2008년 1학기 사회학의 기초이해

“마르크스 방법론과 자본주의의 기원”

 

 

본 보고서는 자본주의 형성에 대한 대조적인 입장을 가진 베버와 좀바르트의 두 권의 저서에서부터 출발한다.(과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지적했음)두 학자는 모두 서구의 산업 자본주의의 기원에 대한 공통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발달과 미래의 변화를 결정한다고 믿었던 경제적 조건이 독특한 문화적 총제성 안에 잠겨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두 사람 보두 근대적 서구 자본주의의 이러한 「에토스」혹은 「정신」의 출현을 확인하는 데에 그들의 많은 저작을 할애하였다.”(기든스,2006:289)(각주 달지 말고 마지막에 참고문헌에서 정리해 줄 것!)

베버에 있어 근대 ‘자본주의 정신’은 부 자체의 축적이 궁극적 목적이 되는 새로운 형태의 자본 축적과 관련이 있다. 전통적인 자본 형성의 목적이 물질적 욕구의 만족을 위한 수단의 성격을 지녔던 반면, 새로운 자본 축적은 투자와 재투자를 통해 이어지는 끝없는 축적의 과정에 불과하였고, 이러한 자본의 규칙적인 투자가 곧 근대 자본주의의 형성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의 발전에는 청교도적 직업관과 금욕적 생활방식이라는 종교적 태도가 영향을 미쳤다. 물론 베버의 이같은 논의가 청교도주의와 근대 자본주의 간의 필연적 인과관계로 해석될 수는 없다. 자본주의 형성에 있어 종교윤리, 기업조직, 임노동, 기술, 시장, 법 등 여러 요인의 상호작용이 존재하되,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요인 중 금욕적인 프로테스탄티즘 윤리가 미친 연관성에 대해 베버 자신이 어느 정도 따옴표를 치고 있다. 특히 전통적인 기업가와 노동자가 전통적 특징과 현저하게 다른 근대적 특징인 영리를 소명으로 하는 기업가와 노동을 소명으로 하는 노동자로 재탄생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종교가 미친 영향이라는 측면에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문화사에 있어 전통적인 노동의 사이클의 변화가 단지 경제적 동기에 의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말이다. 이러한 조심스러움을 깔고서도 베버의 논점을 도식화하는 오류를 저질러보면, 어쨌든 금욕과 청빈의 청교도 정신이 곧 자본주의 형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쯤으로 해석해볼 수 있겠다.(전반적으로 베버의 주장을 정확하게 잘 정리해주었음. 다만 베버의 책을 직접 인용해서 정리하면 본인의 정리에 대한 베버의 논거가 뒷받침되기 때문에 좀더 논리적인 글쓰기가 될 것임.)

반면, 좀바르트는 1912년에 저술한 『사치와 자본주의』에서 정반대의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자본주의 형성을 추동한 정신은 ‘금욕’이 아니라 ‘사치’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좀바르트에 있어 사치란 남녀 간의 사랑과 관련이 있는 육욕적 소비행위이며, 이러한 감각적인 소비풍조가 사회 전체에 만연되어 서구 사회에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를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좀바르트는 중세적 수공업에서 매뉴팩처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그 주축이 된 상품의 대부분이 사치재였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리하여 이전까지의 경제사가들이 판매망의 지리적 확대에 주목하고 있지만, 이러한 해외시장 확대를 통한 양적 향상이 아닌 사치재의 특징인 세련화를 통한 질적 향상이 당시의 대공장 건설의 주 동인이었음을 밝힌다. 정리하자면 미발달된 초기의 자본주의에서는 필수재의 대량생산이 아닌 사치재의 생산이 부를 축적하는데 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는 것으로 “비합법적인 사랑의 합법적인 자식인 사치가 자본주의를낳”(1997, 좀바르트:2761.좀바르트, 1997: 276 으로 표시)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좀바르트의 이론은 자연스럽게 케인즈의 ‘유효수요’이론을 연상시킨다. ‘소비가 미덕’인 자본주의의 출발이 사치였다 해서 하등 이상할 것도 없다는 얘기다.(좀바르트의 주장을 잘 정리함)

문제는 베버와 좀바르트의 논의가 상충된다는 점에 있다. 서구의 산업 자본주의의 기원에 핵심적인 정신은 청교도적 금욕인가 아니면 사랑에 기초한 사치인가 하는 일종의 닭과 달걀 논쟁 같은 질문을 던져보면 조금 머리가 아파오는 것이다. 사회학의 고전 중 고전이라 하는 두 저서의 논의가 이렇게 대립된다면 누구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옳을까. 20세기 초의 고전에서 나타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19세기로 돌아가는 것이 조금 못 미덥긴 하지만, 어쨌든 마르크스의 방법론을 통해 이를 극복해 보기로 한 이상 그의 저작을 살펴보도록 하자.

“경제적 기초의 변화와 더불어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서서히 혹은 급속히 변혁된다. 이러한 변혁들을 고찰함에 있어서 사람들은 자연과학적으로 정확히 확인될 수 있는 경제적 생산 조건들에서의 물질적 변혁과, 인간들이 이러한 충돌들을 의식하고 싸워서 해결하는 법률적, 정치적, 종교적, 예술적 혹은 철학적, 간단히 말해 이데올로기적인 형태들을 항상 구별해야 한다.” (칼 마르크스, 칼 마르크스 혹 마르크스로 통일해서 써야함 1997:478)(각주 달지 말고 마지막에 참고문헌에서 정리해 줄 것!)

단순히 마르크스의 이론을 경제결정론,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규정짓는 위험을 경계한다면, 위의 인용문은 좀 더 단순하게 내 방식대로 해석하자면 경제적 조건과 이데올로기를 구별하여 그 상호작용을 이해하되 경제적 기초의 근본적 변화의 요체가 무엇인지를 직시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자본주의이게끔 하는 특징을 다시 재규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현실에 존재하는 자본주의를 추상적 개념으로 정의내리는 과정, 베버 식으로는 이상형으로 개념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자본주의는 마르크스에 있어 생산과 소비, 분배, 그리고 교환과 유통이라는 다양한 계기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작동한다.(각주 달지 말고 마지막에 참고문헌에서 정리해 줄 것!)마르크스는 자신의 방법론을 정의하면서 구체-추상에서 다시 추상-구체로 이어지는 두 가지 길을 서술한다. 여기서 추상화된 개념은 상품, 화폐 등과 같은 단순한 관계들로 일종의 경제학의 모델링 과정과 닮아있다 하겠다. 문제는 후자인 추상-구체의 과정으로 이 부분이 자본론 전편의 서술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방법론에 대한 이해가 간혹 오해를 낳기도 하는 것이다.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구체적인 것으로 상승하는 방법이란 사유를 위한 방법, 즉 사유가 구체적인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정신적으로 구체적인 것으로 재생산하는 방법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구체적인 것 자체의 성립과정은 아니다”(마르크스,1997:462)에서 함축하듯 자본론의 서술과정 즉 마르크스가 재구성한 자본주의는 하나의 논리적 구성물로서 현실의 자본주의와 바로 조응한다고 볼 수는 없다. 『기본 개요』의 서설에서 “가장 추상적인 범주들조차 그 범주들이 모든 시대에 타당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추상의 규정성 자체 또한 마찬가지로 역사적 관계들의 산물이며, 오직 이 관계들에 대해서만 또 이 관계들의 내부에서만 충분한 타당성을 가진다”(마르크스,1997:466)고 밝히고 있듯 실제는 이들 관계의 편제에 있을 뿐이다. 다만 현실을 설명하는데 있어 자본주의 경제는 현상 자체만으로 보면 진실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가면 속의 본질을 밝혀내는 측면에서의 추상화와 또한 구체-추상-구체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일정의 자기 완결성을 가진 총체를 구성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총체적 연관성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방법론을 기초로 논리적으로 재구성된 자본주의는 그 구성의 방식에서부터 베버, 좀바르트와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하겠다. 베버의 경우 이상형으로서의 자본주의를 상정하고 있지만, 현실과 논리 사이에서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치고 있는 경우에 해당할 수도 있다. 현실의 수많은 연관관계들에 착목하는 것은 물론 연구과정에서 고려해야할 부분들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연관관계들의 합이 전체를 이루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베버 자신이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 하여 다원주의적 오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듯하다. (이 한 문단을 두 문단으로 구분할 것!)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처음 제기한 모순의 해결방식을 찾아보도록 하자. 자본주의는 하나의 경제적 사회구성체로서 자본과 노동의 관계의 근본적 변화를 포함하고 있으며, 노동력이라는 특수한 상품을 통해 가치를 증식시키는 생산과정을 통해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특수한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서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 “생산은 출발점으로서, 소비는 종점으로서, 분배와 교환은 중간으로서 나타”(마르크스,1997:449)난다. 베버와 좀바르트의 강조점을 가져와본다면 베버의 금욕은 기업가와 노동자의 정신에서, 그리고 사치는 소비자의 정신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욕구 없이는 생산이란 없”고, “소비는 욕구를 재생산”(마르크스,1997:452)하기 때문에 생산과 소비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소비는 생산물이 생산물로 되기 위한 종결행위일 뿐만 아니라 생산자가 생산자로 되기 위한 종결행위이고, 다른 한편 생산은 소비의 일정한 방식을 창조함으로써, 그리하여 소비의 자극, 소비 능력 자체를 욕구로서 창조함으로써 소비를 생산한다.” 그리하여 생산과 소비를 동일시한다면, 모순은 존재할 수 없다. “게다가 사회를 하나의 단일한 주체로서 고찰하는 것은 사회를 그릇되고 고찰하는 것이다. 하나의 주체에서는 생산과 소비가 하나의 행위의 계기들로서 나타난다.”(마르크스,1997:454) 다시 말해 생산과 소비과정 사이에 숨어있는 과정을 보지 않으면 자본주의적 가치증식은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없다. 생산을 통한 금욕적 저축도, 사치재 소비에 의해 추동된 부의 축적도 본질적으로 잉여가치의 창출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 이렇게 보면 굳이 하나의 정신이 자본주의의 기원을 지배할 필요가 없다.

마르크스에 의해 분해되는 자본주의적 유통의 전과정은 ‘자본’이 갖는 독특한 특성을 규정짓는다. “貨幣로서의 화폐와 資本으로서의 화폐는 우선 양자의 유통형태가 서로 다르다는 점에 의해서만 구별될 뿐이다. 상품유통의 직접적 형태는 C-M-C[즉 상품의 화폐로의 轉換과 화폐의 상품으로의 재전환, 다시 말해 구매를 위한 판매]이다. 그러나 이 형태와 아울러 그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 즉 M-C-M[화폐의 상품으로의 전환과 상품의 화폐로의 재전환, 다시 말해 판매를 위한 구매]를 발견하게 된다. 후자의 형태로 유통하는 화폐는 자본으로 전환하며 자본으로 되고 그 기능의 관점에서 보면 이미 자본이다.” (마르크스,1995:184)

즉 전자의 유통 형태는 화폐로서의 화폐이지만, 후자는 자본의 기능을 가진 화폐가 된다. 화폐가 자본의 기능을 하면서, “수전노는 화폐를 유통에서 끌어냄으로써-to save- 가치의 쉴 새 없는 증식을 추구하지만, 보다 영리한 자본가는 화폐를 끊임없이 유통에 투입함으로써 그것을 달성하는 것이다.”(마르크스,1995:192) 자본가에 있어 중요한 것은 저축이냐, 소비냐가 아니라 투자를 통한 가치증식이다. M-C-M의 과정이 단순히 동일한 M에서 M으로의 순환이 아니라 M-C-M′로 이어지는 가치증식 과정인 것은 등가물끼리의 교환으로 이루어진 관계들 사이에서 특수한 상품의 존재, 즉 노동력이라는 상품 때문이다. 노동자가 자본가와 교환하는 자기 노동력 즉 노동력 재생산 비용과 실제 생산하는 노동의 차이는 자본의 축적이 발생하는 근본원인인 착취를 감추는 특수한 메커니즘에서 형성된다.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화폐소유자는 상품시장에서 자유로운 노동자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마르크스,1995:213)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면 “이중의 의미”에서 자유로운 노동자의 존재가 곧 자본주의를 지탱하는데, “이러한 관계는 자연사적 관계도 아니며 또한 역사상의 모든 시대에 공통된 사회적 관계도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과거의 역사적 발전의 결과이며, 수많은 경제적 변혁의 산물이며, 과거의 수많은 사회적 생산구성체의 몰락의 산물이다.”(마르크스,1995:213)

문제는 어떻게 시초축적이 가능했느냐의 질문을 넘어 자본주의의 추상적 형태가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로 들어갔을 때 비로소 해소되는 것이다. 시초축적의 인과관계에서는 결국 끝없는 인과관계의 고리 속에서 길을 잃고 말 수도 있다. 기든스가 베버에 대한 해설에서 지적하는 바, 청교도주의가 근대인이 그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강철 감옥」을 만들어냈다는 것에 대한 음울한 고발이 베버의 결말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기실 우리를 끝없이 끝없는 성실한 노동의 세계로 내몰고 있는 것이 과연 정신의 문제겠느냐 하는 질문을 다시 던져볼 수 있겠다. 그리고 다시 그렇다면 물질적 조건에 온전히 갇혀, 이중의 자유로운 노동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 역시 인간의 자유의지와는 위배된다. 이런 양 극단이 기계적인 관념론과 유물론의 반영이라면, 이러한 비생산적 논쟁구조를 넘어 베버와 좀바르트의 논의가 마르크스 이론에 대한 반론이 아닌 보론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마르크스의 논의 자체가 경제결정론이 아니며, 또한 그 자체로서 실제 역사로 치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베버와 좀바르트의 논의가 있었기에 우리는 현실을 보다 풍부하게 파악하고 해석할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결론격에 해당되는 이 주장이 본론의 내용에서 언급되었던 것을 다시 정리하고 강조하는 내용이 아니라 새로운 주장 및 내용을 결론에서 언급하는 것은 잘못된 글쓰기임. 전자의 지적보다는 부차적이지만 밑줄친 내용이 뭘 말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음. 베버와 좀바르트의 주장에 의의가 있다라는 마지막 문장과 기계적인 관념론과 유물론의 반영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쟀든 결론의 내용으로 밑줄 친 내용은 부적합함)

 

 

<참고자료>

전반적으로 참고문헌에 정리가 틀렸음. 첫 번째 문헌의 경우를 고친것처럼 다른 것들도 수정해야 함

저자, 옮긴이, 연도, 책제목, 출판사. ----> 이런 형식으로 쓸것!!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문예출판사, 2006

막스 베버, 옮긴이, 2006,『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문예출판사.

 

-베르너 좀바르트,『사치와 자본주의』,문예출판사, 1997

-칼 마르크스,『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2』, 박종철 출판사, 1997

-칼 마르크스, 『자본론 Ⅰ上』, 비봉출판사, 1995

--> 밑줄친 것들도 처음의 형식으로 다 고쳐야 함.

 

칼 마르크스, 「『정치 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서문」,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2』, 박종철 출판사, 1997

의 경우는 다음과 같이 고친다.

칼 마르크스, 옮긴이, 1997, “정치 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 서문”,『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2』, 박종철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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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펜 장난 아니게 그어져서 돌아왔던 2008년 사회학 기초이해 수업 레포트....ㅋㅋ

이 강사님이랑 엄청 싸웠었다;;;

근데 이 레포트 앞의 첫번째 빨간펜인

"과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지적했음" 에 빵 터졌다....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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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15 08:48 2012/05/15 08: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