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기획] 한 걸음 더+ ③ 거수기 이사회 확 바꾼 노동이사제
박원준 서울교통공사 노동이사가 2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모델 사무실에서 한겨레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박원준 서울교통공사 노동이사가 2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모델 사무실에서 한겨레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지난해 11월 서울교통공사는 무기계약직 노동자 자살사건 이후 정규직과 무기계약직 사이에 책임공방이 벌어졌다. 노조의 요청으로 회사의 인터넷 사내소통망이 임시로 폐쇄됐다. 하지만 회사가 사전 상의 없이 소통망을 재개하고, 사장이 노조의 사과 요구를 거부하며 갈등이 깊어졌다. 이때 노동이사가 중재에 나섰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이사회 이틀 전인 12월26일 사장이 유감 표명을 하고 노조가 수용하는 것으로 합의를 이끌어내 사태가 일단락됐다”며 “경영진도 노동이사제의 취지를 이해하고 장점을 살리려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말했다.

 

 

법적으로 사용자
“현장 목소리 전하지만
경영진 입장도 노동자에 전달
양쪽 매개하고 조정 역할
선입견 벗어났으면 좋겠다”

 

 

최대 강점은
“경영진은 실무 잘 몰라
현장 잘 아는 노동이사 통해
현장문제 합리적 해결되면
회사에도 큰 도움된다”

 

 

아직도 답답한 한계
“현장요청 경영에 반영하려해도
이사회 외 다른 통로 없어
이사회서 현장소리 전하려 하면
정식 안건만 얘기하라고 제지”

 

 

공사의 노사는 지난달 31일 밤 10시 1300여명에 이르는 무기계약직의 정규직 전환에 극적으로 합의했다. 하지만 협상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노사 간 이견은 물론 정규직과 무기계약직 사이에 이른바 ‘노노갈등’까지 겹쳤다. 공사의 노동이사들은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사장, 노조, 무기계약직을 모두 만나 설득했다”고 털어놨다.

 

<한겨레>는 지난달 29일 서울 중구 서울시 노사정 서울모델협의회 사무실에서 서울교통공사의 박희석, 박원준 노동이사와 박윤배 사외이사를 만났다. 서울지하철공사(서울메트로)와 도시철도공사의 합병으로 출범한 교통공사는 직원이 1만7500여명으로 지방공기업으로는 최대 규모다. 공사는 지난해 9월 두 사람을 노동이사로 선임했다. 두 노동이사는 지하철공사 공채 출신으로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해왔다.

 

박윤배 서울교통공사 공익성 사외이사가 2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모델 사무실에서 한겨레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박윤배 서울교통공사 공익성 사외이사가 2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모델 사무실에서 한겨레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노동이사제의 최대 강점은 이사회에 현장의 목소리를 가감없이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현장을 잘 아는 노동이사를 통해 현장의 문제가 합리적으로 해결되면 회사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동이사가 단순히 현장의 요구만 전달하는 데 그친다면 노조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노동이사는 직원과 이사 역할을 겸하지만, 법적으로는 사용자로 간주된다. 박원준 노동이사는 “현장의 목소리를 전하지만 경영진 입장도 노동자나 노조에 전달해 양쪽을 매개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면서 “노동이사에 대한 선입견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노동이사는 경영투명성도 높일 수 있다. 박원준 노동이사는 “기업의 이사회가 경영진에 예속되어 거수기라는 오명을 듣는데, 노동이사가 감시와 견제 역할을 제대로 하면 이사회의 틀을 새롭게 만들 수 있다”며 “두차례 이사회에 참석해보니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의욕을 보였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경영진이 보기에 이전보다 이사회가 더 까다로워졌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현장의 의견이 경영에 반영되면 노사 간 마찰을 더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노동이사에게는 공익성 확보도 중요하다. 공사가 운영하는 서울과 수도권 전철은 하루 750만명이 이용하는 ‘국민의 발’이다. 2016년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스크린도어 작업자 사망사고에서 드러나듯이 직원과 시민의 안전 확보가 시급하다. 공사의 막대한 부채를 해결하기 위한 경영혁신과 대국민 서비스 증진 노력도 당면과제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노인 무임승차 문제만 해도 교통복지 차원에서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과, 막대한 적자 문제를 해결하려면 유료화해야 한다는 입장이 팽팽하다”고 말했다.

 

박희석 서울교통공사 노동이사가 2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모델 사무실에서 한겨레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박희석 서울교통공사 노동이사가 2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모델 사무실에서 한겨레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노동이사제 정착을 위해서는 개선할 점도 많다. 무엇보다 지원시스템이 없다. 공사는 직원이 1만7천명을 넘고, 역은 277개에 달한다. 노동이사들이 직원과 수시로 만나 의견을 수렴하고 타당성을 검토해서 회사 경영에 반영하는 일은 간단치 않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면담 내용이 빼곡히 적힌 수첩을 보여주며 “현장 요청을 회사 경영에 반영하려고 해도 이사회 이외 다른 협의 통로가 없다. 또 이사회에서 현장 소리를 전하려고 하면 정식 안건과 관련된 얘기만 하라고 제지한다. 노동이사는 일하고 싶은데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다”고 말했다. 자료를 검토하고, 직원을 만나고, 회의할 수 있는 공간도 없다.

 

이사회 운영의 개선 필요성도 제기된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3조2천억원의 내년도 사업계획과 예산안을 처리하는 데 2~3시간의 이사회는 너무 짧다. 필요하다면 하루가 아니라 이틀에 걸쳐서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이사에게는 직무수행에 필요한 정보요구권이 있다. 하지만 이사회가 열리기 한주 전에 안건 자료를 보내주는 게 전부다. 박원준 노동이사는 “이사회에서 실질적 논의가 이뤄지려면 이사회 이전에 안건이 생성되는 단계부터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며 “국회도 본회의 이전에 상임위에서 심도 깊게 논의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노동이사는 법적으로 비상임이사이기 때문에 이사회 결정이 잘못되면 공동책임을 진다. 박원준 노동이사는 “노동이사에게 책임을 물으려면 참여와 권한을 좀더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이사회 산하에 소위원회를 두는 방안도 제기된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공사가 매년 적자를 기록하면서 부채가 12조원에 달한다. 이자 부담만 연간 1천억원이 넘는다. 민간기업 같으면 진작에 비상이 걸렸을 것이다. 문제해결을 위한 소위원회 구성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서울시도 개선 필요성에 공감하고, 1월부터 전문가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개선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경총, 전경련, 보수언론들은 노동이사제에 강하게 반대한다. 노동이사의 이사회 참여로 의사결정이 늦어지고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노동이사들은 펄쩍 뛴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2018년 사업계획은 무려 400페이지에 달한다”며 “신속한 의사결정보다 신중한 의사결정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원준 노동이사도 “현장 직원들의 목소리를 전하려고 노력하지만 경영 측면을 함께 고려한다. 노동이사가 또 하나의 노조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곁에서 노동이사를 지켜본 사외이사도 보수진영의 비판은 지나친 기우라고 지적한다. 박윤배 사외이사는 “지금까지 모습을 보면 걱정은 안 해도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노동이사는 노동자의 입장과 회사의 중장기 발전을 조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 노동이사 1호는 서울연구원의 배준식 노동이사로, 지난해 1월 임기를 시작했다. 서울시 노동이사제가 출범한 지 꼭 1년이 되는 셈이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당장 시민들의 박수를 받는 것은 쉽지 않지만, 한국 사회에서 ‘개혁의 빛’ 역할을 할 가능성이 보인다”고 희망을 나타냈다. 박윤배 사외이사는 “유럽에서는 노동이사가 노사 모두의 신임을 얻어 경영 책임을 맡기도 한다”며 “한국도 노조 지도자들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거나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는데, 노동이사가 사장이 되지 말란 법도 없다”고 말했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임기 3년간 열심히 하겠다”며 웃었다.

 

곽정수 선임기자 jskwa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