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원 아버지 윤석동씨 ‘39년 일기’
‘헬기 사격’ 조비오 등 증언 기록
1989년 전두환 백담사 복귀회견 땐
“용서받을 기회마저 잃고 말아”
이낙연 총리를 만난 윤석동씨.
이낙연 총리를 만난 윤석동씨.
“오늘 (청문회에서) 송기숙, 명노근 전남대 교수와 광주상고 윤모 교원, 천주교 조비오 신부의 증언이 있었다. 모든 증인들은 한결같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으며, 정치군인들이 정권욕에만 집착한 나머지 그런 과오를 범하였다고 증언하였다.”(1989년 2월23일)

 

조비오(1938~2016) 신부가 국회 청문회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에 대해 처음 증언한 날, 윤석동(93)씨가 쓴 일기의 한 대목이다. 윤씨는 5·18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1980년 5월27일 옛 전남도청에서 진압군 총에 맞아 숨진 윤상원(1950~80)의 아버지다.

 

이날 조 신부는 “5월21일 오후 1시30분에서 2시 사이 (옛)도청 쪽에서 사직공원 쪽으로 헬기가 날아가면서 번쩍하는 불빛과 함께 연속 3차례에 걸쳐 지축을 울리는 기관총 소리가 들렸다”고 말했다. 조 신부는 1994년 <사제의 증언: 진실을 말해도 안 믿는 세상>이라는 책에서도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거듭 증언했다. 그러나 군당국은 완강히 부인했다. 헬기에서 시민을 향해 총을 쏜 사실이 드러나면, 5·18 당시 군의 발포는 자위권 발동이었다는 그동안의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이런 조 신부에 대해, 광주 시민 학살의 실질적 책임자로 지목되는 전두환 전 대통령은 2017년 4월 낸 <회고록>에서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썼다. 전씨는 11일 조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광주지법 재판정에 출두한다. 전씨는 회고록을 내기 전인 2017년 1월12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광주 전일빌딩 총탄 자국이 1980년 5월에 생긴 헬기사격 흔적이라는 감정 결과를 발표했는데도, 거짓말쟁이라는 단정적 표현을 써 조 신부의 명예를 훼손했다.

 

19080년 5월27일 옛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의 총을 맞고 숨진 윤상원의 아버지인 윤석동씨는 아들이 세상을 떠난 뒤 39년 세월을 묵묵히 기록으로 남겼다.
19080년 5월27일 옛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의 총을 맞고 숨진 윤상원의 아버지인 윤석동씨는 아들이 세상을 떠난 뒤 39년 세월을 묵묵히 기록으로 남겼다.
지난 8일 광주시 광산구 신룡동 천동마을 집에서 만난 윤씨는 ‘12·12 반란 수괴’이자 ‘5·18 학살 주범’인 전두환씨가 광주로 재판받으러 온다는 소식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잠시 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쁜 놈은 나쁜 놈대로 벌을 받어. 죄를 안 짓고 살아야지”였다. 윤씨는 아들이 세상을 떠난 뒤 39년 세월을 묵묵히 기록으로 남겼다.

 

윤씨에게 전두환은 ‘1980년 5월27일 새벽 광주 재진입 작전을 강행하도록 명령해 특공조 부대원들의 총격으로 (윤상원 등) 18명을 살해한 혐의(내란목적 살인죄) 등 13가지 죄목으로 유죄가 확정돼 처벌받은 범죄자다. 윤씨는 아들이 세상을 떠난 뒤 39년 세월을 묵묵히 기록으로 남겼는데, 거기에는 전씨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내용이 일찍부터 등장한다. “전두환씨가 국회 답변을 성실히 하지 않아서 (…) 전씨는 더욱 반성하여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해명을 필요로 한다고 느꼈다.”(1990년 1월3일)

 

백담사에 있던 전씨가 국회 광주청문회에 출두했던 날의 일기는 준엄하다. “청문회가 중단되고 전 전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하고 나서 12시5분 다시 백담사로 떠났다. (…) 모든 것을 청산하고 90년대를 맞자는 국민의 여망을 스스로 저버리고 용서받을 기회를 잃어버리고 마는 불행을 초래하고 말았다.”(1989년 12월31일)

 

아들의 묘에 꽃을 바치고 젯밥을 올리면서 느낀 심경 묘사는 절절하다. “광주특위 청문회에 민정당이 신청한 증인으로 당시 3공수여단 11대대장이었던 임수원 대령이 나왔다. 27일 도청평정작전에서 우리 상원이도 죽었다. (…) 또 상원이가 거론되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상원이가 자주 다녔던) 녹두서점 이야기가 나오기에 (서점을 운영했던) 김상윤에게 전화를 걸어놓고 말을 못 하고 눈물만 흘리고 말았다. 괜히.”(1989년 1월27일)

 

아버지는 아들이 죽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아들의 뜻과 아들의 죽음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고 고백한다. “상원이에 대한 기사가 적혀 있었다. 이 글을 보고 진실되게 느껴졌다. 그놈이 평소에 그렇게 살아왔다. 이런 것들을 접할 때면 막 그 시절 위정자들이 원망스러웠다. (상원이의 삶은) 역사를 위해 희생된 인생이라고 느꼈다. 상원이가 아니면 그 누구인가 그런 희생을 당하여야 할 것이기 때문에. 역사는 그리하여 발전한다.”(1989년 5월4일)

 

10여년의 시간은 젊은 아들의 죽음이 가져다준 상처를 다스리기엔 너무도 짧은 세월이었다. 아들의 12주기가 다가오는 1992년 5월16일의 일기는 기록한다. “5·18 특집을 만들기 위해서 (방송국에서) 취재하여 갔다. (…) 그 당시 상원이가 부모에게 마지막 한 말을 하여 달라고 하기에 그때를 회상하다 가슴이 뭉클하여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부자지간의 떼어놓을 수 없는 정인 것 같았다. 눈물이 앞을 가려 말을 잇지 못하게 되었다.” 1년여 뒤 윤상원의 음력 제삿날 남긴 일기 역시 마찬가지다. “상원이 제일(제삿날)이다. (…) 이토록 허망할까? 산 자들은 무엇을 하여 왔는가. 광주 문제가 진상규명되고 역사에 바로 반영될 때에 (상원이 삶도) 빛을 보게 될 것이다.”(1993년 6월2일)

 

윤씨는 이후 5·18유족회장을 맡아 진상규명을 위해 싸웠다. 서울 연희동 전씨 집 앞에서 농성을 했던 일도 꼼꼼히 기록해놓았다. “9시에 광주역에서 버스 4대로 5월 단체들이 5·18 광주민중항쟁 진상규명을 촉구하기 위해서 청와대로 김영삼 대통령을 면담하기 위해서 약 200명가량이 서울로 갔다. (…) 청와대 부근에서 기동경찰이 막고 있기에 그 이상 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연좌농성을 세시간가량 하고 8시경에 연희동으로 전두환 노태우를 만나기 위해서 갔으나 역시 그곳도 경찰이 막고 있기에 30분가량 그곳에서 농성하고 외치고….”(1993년 6월15일)

 

전씨가 사면복권됐을 때는 이를 담담히 수용하면서 그들이 반성하길 바라는 마음도 일기에 함께 담았다. “우리 유족회에서도 인정하기로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를 하였다. (…) 당신들이 과거를 반성하고 앞으로 국민 대통합에 협력하여 주기를 바란다.”(1997년 12월20일)

 

전씨가 석방돼 자택으로 귀가하는 장면도 기록한다. “오늘 마을 사람들이 모여 김대중 대통령 당선 축하를 겸하여 즐겁게 잔치를 하였다. (…)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특별사면으로 석방이 되어 전두환은 안동교도소, 노태우는 서울교도소에서 11시경에 모두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갔다.”(1997년 12월22일)

 

17살 때인 1943년 광산군 송정리 농업실습학교(현 송정중)에 다니며 일기를 쓰기 시작한 그는 지금까지 하루에 단 한 단어를 적더라도 일기 쓰는 일을 거르지 않고 있다. 이런 그를 닮아 아들 윤상원도 세상을 뜨기 전까지 자신의 생각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