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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똥 치울 때가 좋았어”, 미호천 쇠머리 마을의 ‘황새 추억’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9/03/23 11:05
  • 수정일
    2019/03/23 11:05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최수경 2019. 03. 22
조회수 282 추천수 0
 

미호천과 생물이 되살아날 때 쇠머리 황새는 돌아올 것

 

512-1.jpg» 황새공원에서 날아오른 황새. 김진수 기자

 

복원으로 다시 만난 황새

 

'바스락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가 참 좋다. 충북 청주시 한국교원대학교의 참나무 숲 사이로 난 갈잎 카펫을 걸으니 마치 은둔의 숲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학교가 워낙 넓어 교내에 이런 숲길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01.jpg» 한국교원대 황새복원연구원 들어가는 길.

 

걸어가며 만나는 팻말에 황새복원센터(현 황새복원연구원)라고 쓰여 있다. 팻말을 지나쳐 더 들어가니, 하얗고 덩치 큰 황새 수십 마리가 황새 장 안에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09.jpg» 황새복원연구원의 황새.

 

황새복원센터가 교원대에 세워진 데는  이유가 있다. 황새와 이곳 미호천 유역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황새가 살았던 충북 음성은 미호천의 발원지이다.

 

황새 복원 사업은 1996년 러시아에서 황새를 들여오면서 시작됐다. 6년 후 2마리가 인공번식에 성공했고, 이듬해 한 마리가 자연 번식, 또 이듬해 세 마리가 자연 번식에 성공했다. 그러나 개체수가 점차 늘면서 어디에 풀어놓을지 고민이 시작됐고, 마침내 2013년 예산 황새 마을에 방사하기에 이르렀다. 

 

10.jpg» 충남 예산군 광시면 시목리 풍경.

 

황새 마을 들머리에서 바라본 산세가 고즈넉하다. 황새 공원이 있는 충남 예산군 광시면 시목리는 황새가 날개를 펼치고 앉아있는 형세를 하고 있다. 

 

황새와 공생하게 된 주민들은 인근 무한천의 생태환경을 복원했고, 친환경 농업을 함으로써 마을 농산물 수확이 늘어났다. 새는 보은을 한다더니, 과연 황새가 효자 노릇을 하는 셈이다.

 

11.jpg» 황새 마을에서 생산 판매되는 농산물.

 

우리나라 마지막 텃새 황새

 

텃새였던 황새는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아주 흔한 새였다. 한국전쟁 이후 급격히 줄었다. 미호천 상류인 음성군 생극면 관성리 무수동 마을에서 황새 한 쌍이 목격되었지만 곧 사라졌다. 1971년 4월 이들이 다시 눈에 띄었으나, 발견된 지 3일 만에 사냥꾼의 총을 맞아 수컷이 죽고 암컷만 홀로 남게 된다. 

 

결국 암컷 황새는 1983년 지금의 창경궁인 창경원으로 옮겨졌고, 23년간 홀로 여생을 보내다 1994년 9월에 숨을 거뒀다. 이로써 우리나라 텃새 황새는 절멸했고, 무수동 마을은 천연기념물 보호지에서 해제되었다. 

 

12.jpg» 황새 공원 전시관에 있는 마지막 황새 기사.

 

한국에 서식하는 황새는 러시아와 중국 북동부 및 일본 등에서 번식하는 황새와 같은 종이다. 유럽의 황새는 부리와 다리가 모두 검붉은 데 반해, 한국의 황새는 다리만 붉은색이고 부리는 검은색이다. 온몸이 흰색이지만, 일부 날갯깃은 검은색이다. 황새는 주로 논 습지나 얕은 하천에서 미꾸라지, 개구리 등을 잡아먹으며 산다. 

 

황새의 서식처는 드넓은 논이 펼쳐진 평야 지대와 이런 평야를 끼고 흐르는 하천 유역이다. 산업화 이전의 우리 농촌은 대부분 자연농이었으므로, 황새에게 먹을거리가 비교적 풍부했다. 텃새로 눌러앉을 여건이 됐다. 오랜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는 한 터전에 정주하며 생애 주기를 완성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13.jpg» 황새 공원에 서식하는 황새가 미꾸라지를 사냥했다. 도연 스님 제공.

 

황새는 부부애가 깊다. 따라서 한번 연을 맺으면 평생을 같이한다. 또한 평균 25년에서 35년을 사는데, 사람 나이로 치면 일흔을 사니 여느 동물에 비해 장수하는 편이다. 황새의 몸길이는 초등학교 1학년 정도 키인 112㎝에 이른다. 

 

이런 몸집의 새 한 쌍이 깃들려면 아주 큰 나무가 필요하다. 몸집이 크다 보니 몸을 가릴 수 있는 둥지가 아닌 바닥에 앉을 수 있는 접시형 둥지를 짓는다. 키가 큰 나무에 둥지를 짓다 보니, 그런 나무는 대부분 마을 어귀나 동산에 있다. 

 

너른 논 습지 곳곳에 섬처럼 퍼져있는 마을 주변은 온통 논이 지평선처럼 펼쳐졌다. 멀리까지 조망하고 날아오르고 내리는 데 무리가 없어야 한다. 따라서 먹이를 구할 사냥터로 가는 이동 거리가 가까운 곳에 둥지를 틀었는데, 마을의 정자나무는 적당한 장소였다. 다행히 황새는 사람들과 친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도 황새를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여겼고, 황새 역시 마을의 울고 웃는 역사를 내려다봤으리라.

 

14.jpg» 황새 공원에 전시된 황새가 새끼를 키우는 모습.

 

황새가 살았던 쇠머리 마을

 

금강 최대 지류 하천인 미호천 주변의 황새 서식지로는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과 음성군 대소면 삼호리 쇠머리 마을을 들 수 있다. 특히 쇠머리 마을 사람들은 일찍부터 마을 한가운데 있는 물푸레나무에 둥지를 짓고 사는 황새 부부와 동거했음을 기억한다. 쇠머리 마을은 칠장천, 성산천이 미호천과 만나는 곳에 있다. 마을은 사방이 논으로 둘러싸여 있고, 소 형상을 한 낮은 언덕의 소머리 쪽에 해당하는 곳에 있다. 

 

15.jpg» 쇠머리 마을 지도.

 

미호천이 음성군 망이산에서 발원하여 진천군, 증평군, 청주시를 거쳐 세종시 합강리에서 금강과 합류할 때, 쇠머리 마을은 미호천의 발원지에 해당하는 곳에 있다. 미호천은 하류로 갈수록 강가에 강물처럼 넘실거렸을 모래가 대단히 풍부했다. 

 

실제 금강과 미호천 일대는 지반은 화강암이어서, 이 암석이 풍화된 모래가 많다. 물살은 모래를 토해내며 넓은 충적토를 이뤘다. 미호천변의 진천 쌀, 오창 생명 쌀, 청원 쌀은 미호천이 토해낸 평야의 산물이다

 

16.jpg» 지질학적 이유로 미호천변에는 모래가 풍부하게 쌓여 있다.

 

이처럼 황새가 살아가는데 최적의 장소를 제공했던 미호천변 쇠머리 마을 경로당 앞에는 지금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세운 비석이 하나 서 있다. 비석에는 ‘제120호 천연기념물 음성 관(鸛, 황새) 번식지’라고 적혀있다. 원래는 마을 입구에 비석 두 기가 서 있었지만 하나는 이곳으로 이동하였고, 다른 하나는 마을 입구 어딘가에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1968년 5월에야 황새를 천연기념물 제199호로 지정했다. 

 

02.jpg» 쇠머리 마을경로당 옆 제120호 천연기념물 음성 황새 비석.

 

경로당 어르신들에게 황새를 추억하며 듣는 이야기는 참으로 흥미롭다. 실제 마을에 사시는 강정옥(88) 할아버지는 예닐곱 살 적에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황새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신다.

 

03.jpg» 황새가 둥지를 틀었던 곳을 가리키는 강정옥 할아버지(왼쪽).

 

쇠머리 마을 황새는 마침 김 씨 할아버지네 집 마당 물푸레나무에 둥지를 지었다. 마을로 들어오기 전 멀리서도 400년 됐다는 물푸레나무가 한눈에 보일 만큼 크고 우람했다. 할아버지는 이 나무를 ’황새 나무’라고 불렀다. 

 

소년이 아침에 일어나 문지방을 넘을 때면 황새는 이미 둥지를 떠나 먼 하늘 위에서 점이 되어 있었다. 한나절 둥지를 비운 황새들은 저녁나절이면 제집을 찾아 들었다. 이들이 돌아올 때 맞춰 하늘을 쳐다보면서 둥글게 원을 도는 황새 두 마리를 눈으로 마중했다. 

 

푸른 하늘에 찍힌 작은 점 두 개가 점점 커지며 우리 집 마당까지 내려앉는 풍경은 무척 경이로웠다. “저것들은 온종일 어디 갔다 오는 것일까?” 소년에게 그토록 먼 비행을 하고 오는 황새 부부야말로 늘 궁금함의 대상이었다.

 

04.jpg» 날아오르는 황새. 이 멋진 새는 다시 우리곁에 돌아올 수 있을까. 도연 스님 제공.

 

“딱딱 딱딱~~~!” 황새가 둥지에 있을 때는 무척 시끄러웠다. 어른들은 그게 사랑놀이라고 했다. 한번 연을 맺으면 죽을 때까지 함께 한다는 황새의 사랑놀이는 부리를 부딪치며 소리를 내거나 서로의 깃털을 골라주었다. 매년 봄, 먹이를 구하러 나가지도 않고 쉼 없이 둥지를 평평히 고르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런 후 며칠 지나면 어김없이 알을 낳았다.

 

그 큰 황새 나무 주변은 늘 황새 똥으로 지저분했다. 소년은 새똥 치우는 것이 일이었다. 황새는 주변 논이나 하천에서 잡아 온 개구리며 뱀, 물고기들을 나무에 걸쳐놓고 먹기도 했다. 어떤 것은 마당에 떨어져 비린내를 풍겼다. 

 

“그래도 나무 밑에 새똥 치울 때가 좋았어.” 할아버지는 덩그러니 남은 물푸레나무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황새가 사라진 것이 어느 때부터인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았다. 마을 사람들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를 포함해 주민들이 살아온 지난날은 너무나도 먹고 살기 힘든 세월이었다. 

 

황새 둥지를 품었던 그 큰 황새 나무는 결국 마을 길 확장과 주택 개량을 하면서 원인 모르게 시름시름 앓다 죽어갔다. 다행히 어미나무가 있던 자리에 새끼 나무가 살아있다고 강 씨 할아버지는 대견하게 나무를 바라보신다. 새끼 나무 역시 짐작하건대 꽤 나이를 먹었음 직하다. 강 씨 할아버지 댁 마당 한 쪽에 서 있는 ‘새끼 황새 나무’를 담장 밖에서 보면, 황새 둥지를 품었던 어미나무를 닮아 수형이 반듯하다. 

 

05.jpg» ‘새끼 황새 나무’인 물푸레나무의 겉모습.

 

그러나 집 마당에서 자세히 보면, 몇 차례 마을 길이 복토 되면서 나무 밑동이 땅속 깊이 파묻혀 있다. 나무속은 어린애 몸집 하나가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속이 텅 빈 고목이다. 속이 이런데도 겉이 멀쩡한 것이 신기할 정도다. 

 

06.jpg» 속이 빈 물푸레나무.

 

여전히 쇠머리 마을은 논농사가 주를 이룬다. 낱알을 실하게 하는 밑거름 노릇을 메기와 미꾸라지와 개구리와 우렁이가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미호천변 어디고 황새 쌀을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황새는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의 논 사정은 이들이 들어앉을 기회를 주지 않는다. 잘 만들어진 비료가 있고, 농부에게는 충실한 살충제가 더 든든하다. 농부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황새의 먹이가 될 동물이 논바닥에 머리를 들이밀 재간이 없다. 

 

둠벙은 농지를 구획하며 사라졌다. 모기가 가장 무서워하는 송사리도 사라졌고, 이 논 저 논 드나들며 물꼬를 터주던 미꾸라지와 드렁허리도 사라졌다. 논밭을 이어주는 실핏줄 같은 도랑은 모두 복개되어 양서·파충류는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고 있다. 그나마 목숨 부지하는 개구리들은 바짝 마른 유 자 관 농로에 갇혀 대가 끊긴다. 실개천과 지류 하천 그리고 미호천은 직선 하천으로 정비되었다. 

 

미호천을 따라 난 공장과 축사와 하수종말처리장 방류수는 미호천의 수질을 떨어뜨려 농부들은 미호천 물을 농수로 쓰느니 차라리 관정을 판다. 한마디로 금강의 맏아들 미호천이 금강의 가장 큰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황새가 돌아오는 미호천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미호천 수질이 개선됐다는 지표가 될 것이다.

 

07.jpg» 미호천 옆 관정 농사.

 

황새의 먹이원이 되는 생물들이 돌아오게 하는 방법을 우리는 안다. 어린아이도 아는 상식을 외면하는 오늘, 미호천 너른 들녘에서 황새와의 공존은 영원의 미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미호천 하늘, 황새의 아름다운 비행은 정녕 꿈에나 가능할까.

 

08.jpg» 개발 전 모래가 풍부하던 미호천 상류의 모습.

 

최수경/ 금강생태문화연구소 ‘숨결’ 소장,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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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경 금강생태문화연구소 ‘숨결’ 소장, 이학박사
10년 넘게 시민들과 함께 `비단물결 금강천리 트레킹'을 운영하고 있는 환경교육자이자 생태해설가. 대전충남녹색연합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이메일 : tnrud49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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