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몇 번 봤던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아래 <김장하>)를 넷플릭스에서 다시 찾아본 이유다. <김장하>를 보고 많은 이들이 감동하였다는 소감을 밝힌다. 나도 그렇다. 자신이 세운 고등학교를 국가에 헌납, 문화 재단에서 지급한 수많은 장학금, 사람살이의 문제를 고민하는 형평 운동에 오랫동안 참여하고 후원, 다수의 시민 사회단체를 남모르게 지원, 지역 신문 지원 등이 <김장하>에 나온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만으로도 눈에 보이는 것만이 인정받는 물신주의가 득세하는 이 시대에는 보기 힘든 사례다.
내가 주목한 지점을 조금 덧붙이고 싶다. 나는 <김장하>를 보면서 이런 질문을 해봤다. 사람은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얼마나 절제할 수 있는가? 여러 철학자나 정신분석학 이론에서 어려운 개념으로 설명했듯이, 인간이 뿌리치기 힘든 가장 강력한 욕망이 인정 욕망(the desire of recognition)이다. 이런 질문을 해보면 된다. 왜 권력, 돈을 얻으려 하는가? 그것들 자체가 주는 매력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그것을 소유하게 되면 남들이 '나'를 인정해 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남들이 알아주는 맛에 우리는 산다. 그 인정이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높여준다고 생각 혹은 착각한다. 그게 삶을 움직이는 동력이다. 인정 욕망은 힘이 세다.
눈에 보이는 권세나 돈만 그런 게 아니다. 명예 혹은 상징 권력(symbolic power)을 얻고자 하는 욕망도 마찬가지다. 소설가나 시인, 혹은 평론가도 다르지 않다. 문학 예술인은 물질에는 초연한 척한다. 혹은 현실적으로 초연할 수밖에 없다. 안정된 수입을 갖고 사는 문학 예술인은 드물다. 대부분 불안정한 수입으로 어렵게 생활한다. 수많은 문학상에 기본적으로 비판적이면서도 그 상에 딸려 오는 상금을 생활비로 쓰는 작가, 시인의 사정을 같이 고려해야 하는 이유다.
돈과 권력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남이 알아주는 이름, 명예는 오래 간다. "문학사에 영원히 새겨질 이름" 운운하는 말이 그걸 보여준다. 나는 욕망이 없다는 언설을 믿지 않는다. 따라서 도사나 성자를 자임하는 이들은 대체로 사기꾼들이다. 김장하 선생(아래 호칭 생략)을 그렇게 규정하려는 시각이 있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김장하의 행적이 놀라운 것은 욕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욕망이 따지고 보면 부질없다는 걸 알았다는 점이다. 그렇게 살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자신의 욕망을 인지하는가, 아니면 무지한가 중에서 선택하는 것뿐이다.
엉터리 도사나 성자를 좋아하지 않고 제도권 종교에 비판적이지만, 그래도 종교에서 배워야 할 점이 있다. 예컨대 예수 혹은 기독교를 세계화했다고 말하는 바울이 되풀이 강조하는 게 세상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주님(the Lord) 개념이 그 점을 요약한다. 돈도 권력도 주인이 아니다. 주님은 따로 있다. 불교에서 내가 가장 의미 있게 보는 개념이 무아(자기 없음, 아나타)인데, 그 의미를 나는 비슷하게 해석한다. 따지고 보면 '나'는 없다. 그렇다면 '내' 소유, '내' 권력, '내' 돈, '내' 명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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