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내란 사태 이후 비상행동이 67차례에 걸쳐 윤석열 퇴진 집회를 열었습니다. 지난 4개월을 돌아보면 어떤가요?
김형남 활동가(아래 김): "내란 이후 123일 동안 67번 집회를 열었으니 이틀에 한 번 이상 집회를 연 거네요. 제가 가장 많이 느꼈던 감정은 불안함, 내지는 두려움이었어요. 생각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결과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무거운 분위기들이 전반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불안함과 두려움이 사람들을 계속해서 광장으로 불러내지 않았나 싶어요. 시민들도 다들 생업이 있을 것이고 학생들은 학교에 가야 할 건데 그 와중에 이틀에 한 번꼴로 집회에 나와 싸운 거잖아요. 모두 각자가 겪고 있던 불안한, 두려운 감정을 어떻게 희망으로 전환해 낼 것인지 고민하기 위해 광장에 모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박민주 활동가(아래 박): "박근혜 이후 다시 국민 앞에 윤석열이라는 거대한 적이 탄생한 거잖아요. 그러다 보니 시민들이 광장의 효용성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마이크를 잡는 내가 시민들을 설득해 보자', '어떻게 하면 광장에 나오는 일에 확신을 갖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도 이어졌고요. 그런데 바깥으로 나오는 시민들을 보면서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구나' 싶더라고요. 시민들이 정의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광장에 나왔거든요. 이후 저는 '광장에 자발적으로 나온 시민들이 집회를 완주할 수 있도록 잘 끌고 가는 것', '집회의 분위기나 참가자들의 마음 상태를 계속해서 확인하는 것' 등에 집중했어요."
- 윤석열 파면 전 마지막 주말 집회(17차 범시민대행진)를 사회자로서 함께 진행했습니다. 당시 어떤 마음으로 무대에 올랐나요?
박: "그때가 탄핵 전 마지막 주말 집회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채 무대에 올랐어요. 17차 범시민대행진이 3월 29일이었는데 윤석열 탄핵심판 선고일 공지가 4월 1일, 실제 선고가 4월 4일이었으니까요. 집회 당시에는 '탄핵까지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탄핵 국면이 계속 장기화하다 보니 '집회에 온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 '선고가 늦어질수록 최악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데 이걸 어떻게 표현하지?'라는 고민이 있었어요. (17차 범시민대행진은) 그런 염려 속에 준비했던 기억이 납니다."
김: "그때는 '계속해서 선고 일정이 안 잡히면 어쩌지?'라는 걱정을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참가자들의 감정선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집회에 온 참가자도 시민 한 명이고, 집회에서 마이크를 들고 발언하는 사람도 시민 한 명이니까요. 그렇지만 마이크를 쥔 사람이 '너무 불안하다'고 할 수는 없어요. 집회는 감정을 나누는 시간도 맞지만,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해 내는 시간이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우리의 감정을 불안을 넘어서는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것 같아요."
- 비상행동에서 사회를 맡거나 행진할 때 시민들에게 전하는 발언은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오나요?
김: "저희 둘이 온라인에 공유 문서를 만들어 같이 쓰면서 완성하는 작업을 거쳤어요. 콘텐츠는 국면마다 좀 달랐는데요. 예를 들면 윤석열이 풀려난 직후(3월 8일)에는 '재구속 요구', '즉시 항고 않은 검찰 규탄' 이런 내용들이 주가 되고, 3월 15일쯤부터는 '헌법재판소의 선고 지연 규탄' 등 내용이 주가 되는 식이에요. 시점에 따라 계속해서 내용을 변주해서 발언문을 준비했습니다."
박: "헌법재판소 변론이 끝나고 (선고 일정만을 기다리던) 잠잠한 시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둘이 집회 대본을 쓰다가 토론을 참 많이 했어요. 집회 참가자들에게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이슈를 계속 모니터링했고, 문장 첫머리에 들어가는 단어나 수식어까지도 계속 신경 쓰곤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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