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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기 위에 전자레인지, 경비노동자에겐 화장실이 주방이었다

강석영 기자 getout@vop.co.kr
발행 2020-05-13 18:30:33
수정 2020-05-13 18:3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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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내 주차 문제를 시작으로 서울 강북구 우이동 한 아파트 경비원이 주민에게 지속적인 괴롭힘과 폭행을 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벌어졌다. 사건은 지난달 21일 오전 한 입주민이 아파트 주차장에 이중 주차된 자신의 차량을 미는 경비원에게 폭언을 퍼부었고 며칠 뒤 경비초소로 끌고 가 폭행을 가했다. 결국 모멸감에 시달러딘 경비원은 "억울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사진은 12일 해당 아파트의 경비실이 비좁고 열악한 환경을 보이는 내부 모습. 2020.5.12
단지 내 주차 문제를 시작으로 서울 강북구 우이동 한 아파트 경비원이 주민에게 지속적인 괴롭힘과 폭행을 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벌어졌다. 사건은 지난달 21일 오전 한 입주민이 아파트 주차장에 이중 주차된 자신의 차량을 미는 경비원에게 폭언을 퍼부었고 며칠 뒤 경비초소로 끌고 가 폭행을 가했다. 결국 모멸감에 시달러딘 경비원은 "억울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사진은 12일 해당 아파트의 경비실이 비좁고 열악한 환경을 보이는 내부 모습. 2020.5.12ⓒ뉴스1
 

변기, 전자레인지, 커피포트, 여벌 옷. 한 평도 안 되는 좁은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 한데 있었다. 경비원 최희석 씨에게 이곳은 화장실이자, 주방이고, 탈의실이었다.

‘입주민 갑질’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한 아파트 경비원 최 씨의 휴게시설 사진이 공개되자 많은 이들이 참담한 심정을 드러냈다. 격일로 근무했던 최 씨는 화장실에서 식사를 준비했고, 초소에서 쪽잠을 청했다.

비단 최 씨만의 문제가 아니다. 경비노동자 대다수가 열악한 휴게공간에서 24시간 근무를 버텨내고 있다. 경비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이 개선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경비원들의 옷과 모자가 11일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 경비실 내부에 걸려 있다. 지난달 21일과 27일, 아파트 주차장에서 발생한 주차 문제로 인해 입주민에게 폭행을 당한 경비원 최모씨는 지난 10일 자신의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2020.05.11.
경비원들의 옷과 모자가 11일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 경비실 내부에 걸려 있다. 지난달 21일과 27일, 아파트 주차장에서 발생한 주차 문제로 인해 입주민에게 폭행을 당한 경비원 최모씨는 지난 10일 자신의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2020.05.11.ⓒ뉴시스

‘고(故) 최희석 경비노동자 추모모임’에 따르면, 최 씨는 격일 2교대로 새벽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일했다. 수면시설이 별도로 마련되지 않은 탓에, 밤이 되면 초소에서 앉아있던 의자를 옆으로 밀고 책상 밑까지 간이침대를 펼쳐야 했다.

원룸의 화장실처럼 초소 안쪽 마련된 작은 공간엔 변기와 함께 전자레인지, 커피포트 등 각종 물품이 놓여있었다.

추모모임 관계자는 “변기 바로 위에서 음식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아이들이 충격을 받았다”라며 “사람이 먹고 자고 할 만한 공간이 아니었다. 감옥 독방이 떠올랐다. 사람을 괴롭히기 위한 크기 같았다”라고 말했다.

키가 큰 편이었던 최 씨에게 비좁은 간이침대는 많이 불편했을 것이라며 그는 “젊은이도 병들 수밖에 없는 근무형태와 환경에서 고령 노동자가 계속 생활하면 건강을 해칠 수밖에 없겠더라”라고 말했다.

경비노동자들의 열악한 휴게시설에 문제의식을 느낀 주민들이 최근 방치된 옛 경비실을 휴게공간으로 꾸미기 위해 정리 중이었는데, 사건이 발생해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관계자는 전했다.

11일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 경비실이 비어 있다. 지난달 21일과 27일, 아파트 주차장에서 발생한 주차 문제로 인해 입주민에게 폭행을 당한 경비원 최모씨는 지난 10일 자신의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2020.05.11.
11일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 경비실이 비어 있다. 지난달 21일과 27일, 아파트 주차장에서 발생한 주차 문제로 인해 입주민에게 폭행을 당한 경비원 최모씨는 지난 10일 자신의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2020.05.11.ⓒ뉴시스

경비노동자들에게 휴게시설은 필수다. ‘24시간 맞교대’라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노동권익센터가 지난해 10월 발표한 ‘서울시 아파트 경비노동자 실태조사 보고서’(이하 보고서)는 “경비원 근무행태는 24시간 격일제라는 전근대적 교대제와 함께 24시간 중 10시간에 육박하는 휴게 시간으로 인해 매우 기형적인 근무행태를 보인다”라고 지적했다.

장시간 노동이 가능한 이유는 경비 직종이 ‘감시·단속적 업무’로 분리돼 근로기준법 제63조에 따라 법에서 규정하는 노동시간, 휴게와 휴일을 적용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감수할 불이익이 큰 만큼 별도의 수면시설 또는 휴게시설이 마련됐는지, 다른 업무를 반복해 수행하거나 겸직하지 않는지 등 감시 업무 승인 예외 사항을 근로감독관 면밀하게 조사해야 하지만, 현실은 경비원이라면 바로 승인이 나고 있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휴게 시간은 과도하게 늘어났지만, 제대로 된 휴게시설이 마련되지 않아 사실상 24시간 근무하고 있다.

현행법에 따르면, 입주자대표회의는 경비노동자에게 수면시설 등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산업안전보건법 제64조(도급에 따른 산업재해 예방조치)는 도급인에게 관계수급 노동자에게 수면시설, 위생시설 등을 설치해야 할 의무를 부여했다. 이를 위반할 시 벌금 500만 원에 처한다.

12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 한 아파트 주민의 갑질로 자살한 경비원 최모씨가 근무하는 경비실 앞에서 추모의 글들이 붙여있다.  2020.05.12
12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 한 아파트 주민의 갑질로 자살한 경비원 최모씨가 근무하는 경비실 앞에서 추모의 글들이 붙여있다. 2020.05.12ⓒ김철수 기자

문제는 수면시설의 크기, 적정 온도 등 관련 규정이 없어 대다수 경비노동자가 비좁은 초소을 휴게시설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부가 최근 관련 가이드라인을 발표했지만 권고 사항일 뿐이다.

전국아파트경비노동자 공동사업단을 운영 중인 안성식 노원구노동복지센터장은 “오래된 아파트일 경우 초소가 좁다. 경비노동자 열에 아홉은 누울 공간이 나오지 않아 의자에 기대서 자거나 책상에 엎드려 자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경비노동자 10명 중 4명이 초소를 휴게공간과 겸용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경비초소와 별도로 휴게공간이 있는 경우 60%가 지하에 있었다. 안 센터장은 “오래된 아파트의 경우 지하에 독립된 공간이 있지만, (1급 발암물질인) 석면으로 만들어져 열악한 상황인 건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꼼수’ 휴게시설도 늘고 있다. 초소에서 멀리 떨어진 노인정 등을 수면시설로 정하는 방식이다. 안 센터장은 “초소와 먼 수면시설엔 노동자들이 불안해서 못 간다. 화재 벨이 울릴 경우 초소에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초소를 비웠다고 민원이 들어올 것도 걱정한다”라고 말했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할 때부터 초소를 휴게시설로 사용하는 데 동의를 얻는 사례도 있다. 경비노동자에겐 사실상 입주민 전체가 고용주인 셈이어서, 휴게 시간에도 주민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 대부분 경비노동자는 용역·위탁업체에 소속된 간접고용 형태라서 이 같은 상황들을 감내하는 실정이다.

12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 한 아파트 주민의 갑질로 자살한 경비원 최모씨가 근무하는 경비실 앞에서 추모하는 긴급기자회견을 제지받아 단지 밖에서 가해자 처벌요구 재발방지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0.05.12
12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 한 아파트 주민의 갑질로 자살한 경비원 최모씨가 근무하는 경비실 앞에서 추모하는 긴급기자회견을 제지받아 단지 밖에서 가해자 처벌요구 재발방지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0.05.12ⓒ김철수 기자

올해부터 경비원, 미화원 등을 위한 휴게공간을 의무적으로 설치하는 법이 시행됐다. 50가구 이상 공동주택을 건설할 때 관리 노동자를 위한 휴게시설을 만들도록 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기존의 공동주택에는 해당이 되지 않는 한계가 있다.

안 센터장은 “휴게실에 대해 노동자 한 명당 3평 이상의 크기, 적정 온도 유지 등을 산업안전보건법에 규정해야 한다. 또 휴게 시간에 발생한 문제에 대해 노동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내부 규칙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법 개정만 기다릴게 아니라 당장 휴게 시간에는 초소에 커튼을 치고 휴게 푯말을 붙이게 하는 등 노동자들이 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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