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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현상', 진보정치가 마땅히 채웠어야 할 공백의 다른 이름

[장석준 칼럼] '이재명'이란 거울에 진보정당을 비춰봐야 할 때

작금의 코로나19 대유행 정국이 이재명 지사가 스스로를 부각시키는 절호의 기회가 됐음은 틀림없다. 대유행 상황에서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이 워낙 몰상식한 행보를 계속하는 바람에 정부-여당이 한껏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지만, 이재명 지사는 소속 정당과 달리 여기에서 성큼 더 나아갔다. 그는 항상 중앙정부보다 몇 걸음 먼저, 역병의 창궐에 의연하게 맞서는 행정 책임자의 모습을 보였으며, 정책 논쟁에도 뛰어들어 긴급 재난지원금 지급 같은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없는 조치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했다.

 

이재명 지사의 이런 행보에서 많은 이들이 재난 시대에 '비상사령관'에게 요구됨직한 자질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것이 대선 주자로서 그의 지지율이 상당히 탄탄하게 상승하는 주된 이유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우리는 이재명 바람이 그냥 단명하고 말 현상은 아니라고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다. 2022년 대선의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이재명이 될 가능성은 결코 낮지 않다.

 

그런데 내가 이재명 지사에 주목하는 것은 그가 점점 더 유력한 대권 주자로 떠오른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이렇게 부상할수록 이는 마치 그 동전 반대 면과 같은 또 다른 현실을 아프게 드러낸다. 그것은 이재명 지사에게 늘 한 걸음 이상 뒤처지곤 하는 또 다른 세력, 진보정당의 문제다. 지금 '이재명'은 어쩌면 진보정당이 마땅히 채워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는 공백들의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이재명 현상'을 낳은 대중 정치가 이재명의 미덕

 

이재명 지사의 행보 가운데는 아주 위험해 보이거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구석도 적지 않다. 가령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의 원흉으로 지목받은 종교 집단에 대한 신속한 고발이나 행정 조치는 한편으로는 시원하고 과단성 있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수'를 위해 '소수'의 인권쯤은 쉽게 무시할 수 있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또한 더불어민주당의 내부 역학을 고려해서인지 조국 전 법무부장관 사태나 추미애 현 장관 논란에 대해 '충당파'스러운 발언만 내놓는 것도 좋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재명 지사가 한 사람의 대중 정치가로서 보여주는 미덕은, 적어도 현재까지는, 이러한 한계나 단점을 압도한다. 그는 '촛불 정부'라 자임한 현 정부-여당이 그러한 선언과 멀어져 거리를 둘수록 그 간극을 메꾸는 대안으로 자신을 부각시켰다. 정부-여당이 사회 개혁을 포기하고 이와 반대되는 길을 갈수록 그는 그렇게 버려진 목소리들의 대변자로 나섰다.

 

더불어민주당은 과거 한국 리버럴정당들과 달리 이른바 '내부 진보파'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예전에 진보정당이나 사회운동에 몸 담았던 국회의원들은 있어도 그들이 당의 왼쪽 지대를 넓힐 정도로 당 내 주류와 구별되는 독자 정치를 펼치지는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오직 한 사람이 그 몫을 통째로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재명 지사다.

 

실은 이재명 지사가 메꾼 그 빈 공간은 진보정당이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았어야 할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진보정당보다 먼저, 더 효과적으로 더불어민주당의 대권 주자 이재명이 이를 도약대 삼아 멀찍이 앞서 나가고 있다.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이재명에게는 도대체 무엇이 있고 진보정당에게는 무엇이 없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나는 이재명식 정치의 세 가지 특징에 주목한다.

 

첫째, 이재명 지사는 나름 체계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비전을 갖고 있으며 이에 대한 자기 확신도 투철하다.

 

얼핏 보면 이재명 지사와 '이념'이란 말은 인연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스스로도 그런 입장을 취한다. 하지만 '이념'이란 말에 덧씌워진 부정적 이미지들을 걷어내고 이를 한국 사회를 특정 방향으로 이끌려는 일관된 비전이라 이해한다면, 이재명이야말로 현재 한국 정치에서 이념이 가장 뚜렷한 인물이라 할 수도 있다.

 

기본소득에서 기본주택으로 이어지고 다시 기본대출로 변주된 정책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재명 지사는 오래 전부터 기본소득의 열렬한 지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심지어는 기본소득을 깊이 있게 다룬 저작의 번역자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단순히 이를 정치적 상품으로 활용해보려는 수준이 아니다. 그런 수준에 머물렀다면, 코로나19 사태가 닥치자마자 기본소득을 재난기본소득으로 변주해 때맞춰 제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재난기본소득 제안을 어떻게 평가하든, 이는 기본소득에 대한 상당한 이해도와 확신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정치 행위였다.

 

수도권 아파트 가격이 폭등하자 내놓은 기본주택 방안도 마찬가지다. 상당히 완성도가 높으면서 한국의 진보적 주거 대안에 자주 빠져 있던 부분(중산층 혹은 잠재 중산층에게 매력을 지닌 공공주택 형태)을 제대로 포착한 방안이 역시 시의 적절하게 제시됐다. 이는 이재명식 정치의 밑바탕에 '기본'이라는 공통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를 재편하려는 비전이 자리함을 보여준다. 물론 이게 기본대출 같은 좀 설익은 변주로 나타나 사람들을 당황시키기도 하지만 말이다.

 

둘째, 이재명 지사는 자신이 누구를 지지 기반으로 삼아야 하며 이들에게 호소하려면 어떤 정치를 펼쳐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재명 지사는 지지 기반 측면에서 다른 더불어민주당 정치인들과 확연히 구별된다. 더불어민주당 정치인들이 주로 중산층에게 호소하면서, 특히 상위 중산층의 이익과 관심의 테두리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 데 반해 그는 중산층 이외의 계층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한다. 중산층보다 아래에 있는 계층, 가령 생산직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 청년 구직자 등에게 다가간다. 실제로 이재명 지사의 열렬한 지지자 가운데에는 이런 계층이 많다. 이런 전략은 '10대 고학생 노동자' 출신이라는 그의 이력과 맞물리며 한국 정치에서 처음 보는 독특한 흐름을 탄생시키고 있다.

 

여기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재명 지사가 단지 중산층 '아래'의 계층에게 주목할 뿐만 아니라 이들을 적극 지지층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서민이 체감하는 여러 문제들의 병목 지점이 어디인지 노련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그 지점들을 건드리는 정책과 담론, 전략을 영리하게 구사한다. 기본대출이라는 의문스러운 정책도, 이 정책 자체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이 문제가 실제 서민들의 일상생활에서 큰 부분을 차지함을 잘 알고 있기에 나온 것이다. 아무튼 이런 노력을 통해 이재명식 정치는 중산층을 놓고 경쟁하느라 여념이 없는 양대 정당 주류 정치와는 다른 흐름을 가시화하는 데 일정하게 성공했다.

 

셋째, 이재명 지사는 가장 필요한 때에, 가장 필요한 방식으로 행동할 줄 안다.

 

정치의 팔, 구 할은 타이밍이다. 정치가의 최대 자질은 가장 필요한 때에, 가장 필요한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할 줄 아는 것이다. 논의해야 할 때가 있고, 행동에 나서야 할 때가 있다. 이재명 지사는 대중적 논의가 필요한 때에는 이를 주도하고, 말보다 행동이 앞서야 할 때에는 제일 먼저 몸을 움직인다.

 

가장 극명한 사례는 지난 8월 20일의 광경이었다. 누가 봐도 2차 대유행이 시작된 상황에서 아직 정부가 미처 움직이지 않을 때에 경기도지사가 이를 '쓰나미'라 규정하며 다시 한 번 '비상사령관'의 위용을 보여주었다. 이 언급 하나만으로 이날 하루 정국의 주도자가 결정됐다. 그는 대통령도 아니고 어느 정당 대표도 아닌 경기도지사였다.

 

이재명이라는 거울에 비춰본 진보정당의 미래 리더십

 

지금까지 말한 이재명식 정치의 강점은 고스란히 현재 진보정당의 뼈아픈 약점이다. 그렇기에 자칭 '촛불 정부'와 사회 개혁 민심이 어긋나고 둘의 간극이 커짐에도 이를 넘어서려는 의지가 우선은 진보정당이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내의 이단적 흐름, 이재명 지사의 정치로 쏠리고 있는 것이다. 즉, 이재명의 정치는 진보정당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마련해야 할 리더십이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거울에 다름 아니다.

 

가령 진보정당은 이념을 더욱더 고민하고 정제해야 한다. 그리하여 스스로 이 이념에 대한 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념이란 곧 비전이다. 기본소득-기본주택-기본대출을 꿰뚫는 것과 같은 철학(세계관)이고 준비된 방법론이다.

 

이재명 같은 리버럴정당 소속 정치인이 기본소득을 자신 있게 제시하고 나서는데, 진보정당이 진보 지식인들의 논쟁만 바라보며 "계속 고민 중"이라 둘러댈 수는 없다. 기본자산이든 전국민고용보험이든 자신의 제안을 과감히 내세우며 그와 어울리는 종합적인 대안 사회상을 만들어가야 한다.

 

또한 진보정당은 1차 지지층으로 삼으려는 계급-계층을 분명히 하고, 이들과 한 몸이 되어가는 정치를 펼쳐야 한다. 예들 들어, 이미 널리 알려진 '6411번 버스'라는 비유가 있다. 서울 구로에서 강남으로 가는 이 버스를 타고 매일 새벽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진보정당이 지향하는 이 기본 지지층은 이재명 지사의 경우와 크게 겹친다.

 

하지만 진보정당에 부족한 것은 '6411번' 사람들을 정치화하려는 노력이다. '6411번' 사람들은 누구와 적대하는가? 이들을 투명인간으로 만드는 기존 질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물음의 답을 선명히 지목할 때에 '6411번' 사람들은 비로소 휴먼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아니라 정치의 주역이 된다. 진보정당은 바로 이들의 시각으로 연금이든 주거든 다양한 쟁점에 대해 기존 관성을 넘어서는 답을 내놓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진보정당은 이제 몸이 좀 더 가벼워져야 한다. 국회 의석이 고작 몇 석밖에 안 되는 진보정당은 여당 소속 경기도지사에 비해 자원이 극히 제약돼 있다. 이런 형편에 국회에서 폼만 잡고 있을 수는 없다. 삶의 현장 어디든 찾아다니며 자기 정치의 무대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꼭 누추한 일만은 아니다. 앞으로 기후 재난에 맞서는 생태 전환을 진보정당의 가장 중요한 의제로 놓고 활동하려면, 이쪽이 훨씬 더 어울리는 선택일지 모른다. 주류 정치 세력 모두가 마치 '정치' 의제가 아닌 듯 취급하는 문제를 부여잡고 정치를 하자면, 정치의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까지 바꿔야 하니 말이다. 여의도 정치를 넘어서야 할 뿐만 아니라 경기도지사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대중 정치'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마침 당직 선거를 치르고 있는 정의당에서 여러 후보들이 비슷한 문제의식과 해법을 내놓고 있어 반갑다. 가령 정의당 대표단 후보들의 첫 번째 유세에서 김종철 후보는 "앞으로 정의당은 보수화한 민주당과의 싸움이 아니라 보편적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이재명 경기도지사와의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불평등을 깨기 위해 소득세 최고세율을 50% 이상으로 올리도록 하는 등 정의당이 과감하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보수화한 민주당 아닌 이재명과 싸움 준비", 정의당 대표 유세', <연합뉴스> 2020. 9. 12).

 

이런 목소리가 진보정당의 새 길을 여는 포문이 되길 바란다. 이재명식 정치와 대등하게 경쟁하며 이를 타고 넘는 진보정당의 모습을 보고 싶다. 그래서 한국 정치 전체의 스펙트럼을 지금보다 훨씬 더 넓히는 결과를 낳길 바란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이 커다란 위기의 시기에 정치를 통해 더 많은 생존과 지속, 자유의 가능성을 잡아챌 수 있을 것이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91618141358460#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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