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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상징 '38선'은 누가, 어떻게 그었나?

[손호철의 발자국] 42. 경기도 연천 : 38선에서 분단과 남침, 북진을 생각한다

1980년대 미국 유학시절 '정책결정론' 수업 교재에서 이 이야기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대한민국을 적화통일로부터 구한 구세주'로 알고 있었던 맥아더가 사실은 잘못된 정책 결정으로 미국을 '제3차 세계대전'의 위기로 끌고 갔으며, 맥아더가 남긴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져 갈 따름이다"라는 멋진 말도 이 같은 강경론을 주장하다가 해임당하면서 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3번 국도를 타고 동두천을 지나 연천에 들어서 한탄강 바로 직전에 오른쪽을 보면 두 개의 커다란 조형물이 나타난다. 먼저 나타나는 것은 '38선'이라고 쓴 커다란 돌이다. '여기는 겨레의 한이 맺힌 분단의 현장 38선입니다'라고 쓰여 있는 이 표시석은 1971년 만든 것이다. 원래 있었던 38선 표시석은 1950년 6월 25일 남하하는 북한군 탱크에 파괴된 것으로, 그 옆에 역사적 유물로 다시 세워 놓았다. 이곳이 바로 말로만 듣던 분단의 현장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 연천에는 부서진 38선 표시석과 설명석이 분단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위) 분단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부서진 38선 표시석 옆에 새로 세운 연천의 3.8선 표시석(아래) ⓒ손호철

이를 조금 지나 북쪽으로 향하면 조그마한 탑이 보인다. 탑에는 영어로, 그것도 아주 작은 글씨로 쓰여 있어 무슨 탑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자세히 읽어 보니, 한국전쟁 발발 1년 뒤인 1951년 5월 28일 미군 제 1기병사단이 그리스군과 태국군의 지원을 받아 38선을 돌파한 것을 기념하는 한편,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세 나라 군인들을 추모하는 '38선 돌파기념비'다.


 

▲ 38선 바로 북쪽에 설치되어 있는 38선 돌파기념비. 인천상륙작전 후 유엔군이 북진을 히며 38선을 돌파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손호철

한국현대사, 구체적으로 1945년 해방에서 한국전쟁이 휴전되는 1953년까지의 해방 8년사에서, 38선은 네 번 중요하게 등장한다.

 

 첫 번째는, 분단이다. 1945년 8월, 미국과 소련은 38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분할했고 그 결과 분단이 시작됐다. 두 번째는, 1948년 남쪽에는 대한민국이, 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독립된 국가'가 설립되면서 38선은 '두 체제'의 국경선이 되고 만다. 세 번째는 한국전쟁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은 38선을 넘어 전면전을 일으킨 것이다. 네 번째, 북진이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엎고 서울을 수복한 미군과 국군은 38선을 넘어 북진을 했다.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북진해 북한을 무너트리고 북진통일을 이루는가 싶었을 때, 중국군이 물밀 듯이 압록강을 건너왔다.


 

중국군은 인해전술로 다시 한 번 38선을 넘어 평택까지 남하했다. 따라서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38선은 여기에서 다섯 번째로 쟁점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다시 연합군이 반격을 해 황해도와 개성 등 서부지역을 제외하고 연천지역부터 강원도까지는 우리가 38선을 넘어 북쪽의 일부를 차지했으니 38선은 여섯 번째로 쟁점이 된 것이다. 연천의 38선 돌파기념비는 바로 이 반격작전 때 38선을 재돌파한 것을 기념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로 생겨난 휴전선은 크게 보아 원래의 38선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는 네 번째 속에서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38도가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그러면 38도 이남은 우리가, 이북은 당신들이 점령합시다."


 

최근 공개된 여러 문서들에 따르면,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항복 의사를 밝히면서 이미 한반도 국경에 도착한 소련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할 가능성이 매우 커지자, 미국의 딘 러스크 국무부 정책과장보가 찰스 본스틸 전쟁부 정책과장과 함께 서울과 인천을 미국의 통제 하에 두기 위해 군사경계선으로 38선을 긋자는 미국의 제의를 소련이 받아들임으로써 분단이 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여기에서 정작 놀라운 것은 트루먼 대통령 등 당시 미국의 관계자들이 나중에 밝혔듯이, 소련이 이를 덥석 받아들인 것이다. 멀리 떨어진 미국과 달리 소련은 한반도와 국경을 접하고 있고 이미 소련군이 한반도로 들어오고 있는 상황을 고려할 때, 소련이 38선에 반대하고 훨씬 남쪽에 경계선을 하자고 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같은 미소 양국의 분할점령이 바로 분단이라는 비극의 시초라는 점을 생각하면서 38선 표시석을 바라보니, 가슴이 더욱 아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김구의 이 같은 선언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김일성은 1948년 남북한에 각각 독립된 정부를 수립했다. 이로써 1945년 미소 양국에 의해 이루어진 군사적 분단이 항구적인 분단체제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분단도 분단이지만, 북한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며 38선을 넘어 전면전을 일으킨 것도 문제다. 물론 당시 많은 사람들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등 통일에 대한 강한 염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수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 등 한국전쟁이 가져온 처참한 결과, 그리고 그 이후 남북한에 나타난 비정상적인 억압체제와 이들 간의 대립을 생각하면, 이는 정당화 될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내가 이 나라의 최고통수권자이니, 나의 명령에 따라 북진을 하라." 용산 전쟁박물관에 가면 이승만의 북진 명령을 비롯해 유엔군의 북진 작전을 대대적으로 부각시켜 놓았다(이승만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국에 국군통수권을 양도한 만큼 자신이 최고통수권자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북한의 남침이 문제라면, 북진도 문제이긴 마찬가지다. 물론 맥아더와 이승만의 강경노선에 기초한 38선 돌파에 대해 북한이 먼저 38선을 넘어 남침을 한 만큼 우리도 38선을 넘어 북진을 한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객관적 현실을 무시한 잘못된 결정이었다.

 

구체적으로, 유엔군이 북진을 할 경우 중국이 이를 중국에 대한 침략으로 간주해 참전할 것이라는 경고를 여러 차례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북진을 함으로써 미국은, 나아가 우리도,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적과 잘못된 전쟁'을 하게 된 것이다.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에 대한 영국의 극비 문서들을 연구한 김계동 국가정보대학원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이다. 
 

 
▲ 인천상륙작전 후 유엔군이 3.8선을 넘을 경우 중국에 대한 적대 행위로 간주해 참전하겠다는 중국의 경고를 설명한 전쟁기념관의 전시물 ⓒ손호철
▲ 중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내린 북진 명령을 전시해 놓은 전쟁기념관 전시물 ⓒ손호철

중국은 1950년 9월 초부터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경우 25만 명을 파병할 수 있다는 경고성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인도의 네루 총리는 유엔군이 북진을 하지 말도록 영국에 긴급 제의했고, 영국은 미국에 유엔군이 북한군에 항복을 권하며 최소 7~14일간 38선에서 북진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의 최고지도부는 맥아더의 분석과 주장에 기초해 '중국이 뻥을 치고 있다'고 생각,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10월 9일 전면적인 북진을 시작했다. 영국은 다시 북위 40도선에 완충지대를 만들어 중국의 우려를 해소시켜줘야 한다고 제의했지만 미국은 이를 다시 묵살했다. 그 결과가 바로 중국의 참전이다.

 

 
▲ 중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엔군이 북진을 하자 압록강을 넘은 중공군이 남하하고 있다. 고성 DMZ박물관 전시물 ⓒ손호철

결국 중국의 경고를 무시한 맥아더 등 강경파들의 오판에 기초한 북진 결정으로 네댓 달이면 끝날 수 있었던 전쟁이 무려 3년이나 이어졌고, 미국과 중국이 정면충돌하는 국제전으로 발전되고 말았다(최근 당시 비밀문서에 대한 한 연구는 중국에 대한 핵무기 사용의 경우 맥아더보다도 워싱턴이 더 강경파였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 결과, 100만 명이 넘는 민간인 희생자는 논외로 하더라도, 국군 13만 7899명, 북한군 52만 명, 미군 3만3668명, 중국군 14만8600명 등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고 온 한반도가 쑥대밭이 돼야 했다. 중국의 경고를 받아들였다면, 중국군은 전혀 죽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한국군, 북한군, 미군 등도 최소한 6분의 5는 죽지 않아도 됐다는 이야기이다.

 

▲ 이승만의 북진명령서와 북진을 표지 기사로 보도한 타임지 ⓒ 손호철
▲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국군의 38선 돌파기념사진. 북진은 결국 중국의 참전을 초래해 전쟁의 장기화를 기져왔다. ⓒ손호철

이처럼 맥아더가 해임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고, 중국이 '항미원조(抗米援朝,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도운) 전쟁'이라고 부르는 한국전쟁에 대해 미국에 책임이 있다고 비판하는 데에도 나름 이유가 있다. 즉 미국이 한국전쟁의 발발에 책임이 없는지 모르지만, 북진을 통한 확전에는 분명히 책임이 있다(물론 중국도 스탈린과 함께 북한이 한국전쟁을 일으키는 데 지원을 약속했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의 발발에 일정한 책임이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미국의 많은 '정책결정론' 수업에 한국전쟁을 가르치는 것이다.


 

38선 표시석과 38선 돌파 기념비를 보고 있자, 38선을 둘러싼 우리의 비극적 역사, 구체적으로 분단, 단독정부 수립, 북한군의 남침, 유엔군의 북진이라는 사건들이 차례로 지나가면서, '정책결정론'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한국전쟁, 구체적으로 북진은, 가장 똑똑한 엘리트들이 집단사고에 빠지는 경우 얼마나 멍청한 결정을 내리고 국민들의 목숨을 희생시키는가를 가르쳐주는 좋은 사례라는 점에서 두고두고 기억해야 한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61018125525169#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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