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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판·김·세' 수상한 5일, 대선을 주물렀다

청문회 증언으로 본 '의혹의 재구성'…'축소·은폐'부터 '비상계획'까지

선명수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8-20 오전 2:56:08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부터 경찰의 조직적 수사 은폐까지. 18대 대선을 불과 일주일여 앞두고 벌어진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한 국회 국정조사의 초점은 사건 핵심 연루자들의 수상한 '5일의 행적'이다.

사건의 발단인 지난해 12월11일 '오피스텔 댓글 사건'부터 16일 경찰의 수사 발표까지, 그 닷새 동안 국정원과 경찰 수뇌부, 박근혜 선거 캠프의 1, 2인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특히 19일 사건의 초기 수사를 담당했던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이 국회 청문회에서 경찰 수뇌부의 '사건 은폐 외압'을 폭로하면서 흩어져 있던 퍼즐의 조각들이 맞춰지는 분위기다. 국정조사 핵심 증인들의 발언을 토대로 사건 연루자들의 '5일의 행적'을 재구성해 봤다.

 

▲ 16일 국회 청문회에 참석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왼쪽)과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 ⓒ프레시안(최형락)


■ 12.11, 대선 D-8
'오피스텔 습격' 혹은 '셀프 감금' 사건


18대 대선을 불과 8일 앞둔 지난해 12월11일, 서울 역삼동의 한 오피스텔. 경찰과 선거관리위원회 직원, 민주당 문재인 후보 캠프 관계자들이 602호 현관문 앞에 몰려 들었다. 한 국정원 직원이 박근혜 당시 대선 후보를 지지하고 문재인 후보를 비방하는 인터넷 게시글을 조직적으로 올리고 있다는 제보 때문이었다.

이날부터 문제의 국정원 직원 김하영 씨와 경찰 및 선관위 관계자들은 사흘간 지루한 대치를 계속한다. 김 씨는 "통로를 열어줄테니 나오라"는 경찰의 제안에도 "부모님과 상의해 재신고 하겠다"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흘간 이어진 대치 상황에 대한 해석은 지금까지도 엇갈린다. 국정원과 새누리당은 이를 민주당의 '국정원 여직원 인권 유린 사건'으로 규정하고 박근혜 후보까지 나서 "성폭행범들이나 사용할 수법으로 여직원을 감금하고 인권을 침해했다"며 민주당을 맹비난했다.

반면 민주당은 경찰의 신변보호 제안에도 김 씨가 끝내 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며 이를 국정원 직원의 '셀프(self) 감금' 사건으로 규정, 문제의 사흘 동안 김 씨가 자신이 작성한 인터넷 게시글과 댓글, 접속 기록을 삭제하는 등 증거 인멸을 했다고 맞서 왔다.

사건 당사자인 김하영 씨는 19일 국회 청문회에서 '감금'된 사흘 동안 인터넷 댓글 및 게시글을 삭제했느냐는 질문에 "답변하기 곤란하다"고 증언을 거부했다. 그러나 김 씨는 이후 경찰 조사에서 오피스텔 안에 머물렀던 사흘 동안 인터넷 접속 기록 등을 삭제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드러났다. 통합진보당 이상규 의원이 공개한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의 사건 조사 과정 녹취록을 보면, 김 씨가 경찰 진술 조서에서 개인용 자료와 문서 파일, 접속 기록 등을 삭제했다고 진술했다는 수사관의 발언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피스텔에 '감금'된 것이라는 김 씨의 주장과 달리, 증거 인멸을 위해 일부러 밖으로 나오지 않고 시간을 벌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대목.

 

▲ 국정원 직원 김하영 씨(사진 가운데)가 지난해 12월13일 경찰과의 대치 끝에 역삼동 오피스텔을 빠져 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 12.12, 대선 D-7
김용판 "압수수색 말라"…'외압'의 시작


이튿날인 12월12일, 민주당은 김 씨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다. 경찰 수뇌부는 이 때부터 발 빠르게 움직인다.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의 '수사 은폐·축소 지시' 의혹이 싹튼 것도 이날부터다.

김 씨가 오피스텔에서 나오지 않고 버티자, 당시 사건 수사를 담당했던 수서경찰서는 해당 오피스텔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준비한다. 권은희 당시 수사과장은 19일 청문회에서 "12일 저희들이 오피스텔에서 철수한 이후 새벽부터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하려고 준비하고 있었고 (서류를) 준비해 서울중앙지검에 가지고 간 것이 사실"이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날 권은희 전 과장에게 한 통의 전화 때문에 압수수색 계획이 뒤집어진다. 서울경찰청 최고위층인 김용판 전 청장의 전화였다. 권 전 과장은 "김용판 전 청장이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김 전 청장이 지난 16일 1차 청문회에서 "격려 전화를 한 것 뿐"이라고 증언한 것과 180도 다른 주장이다.

이를 두고 권 전 과장은 "김용판 전 청장이 청문회에서 거짓말을 한 것이냐"고 묻는 민주당 박영선 의원의 질문에 "네, 거짓말이다"라고 단언했다. 경찰 수뇌부의 조직적인 수사 은폐의 시작이 '압수수색 저지 외압'으로부터 시작된 셈이다.

■ 12.13, 대선 D-6
경찰 수사 착수…새누리, '컨틴전시 플랜' 개시


사흘 간의 '셀프 감금' 끝에 결국 모습을 드러낸 김 씨는 서울 수서경찰서에 자신의 컴퓨터와 노트북 하드디스크를 임의 제출한다. 수서경찰서는 곧바로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 디지털 증거분석팀에 증거 분석을 의뢰한다.

본격적인 경찰 수사가 시작되자, 여권은 '권영세 녹취록'의 예고대로 이른바 '컨틴전시 플랜(contingency plan·비상계획)'을 개시한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으로 수세에 몰리자 'NLL(서해북방한계선) 작전'으로 맞불을 놓은 셈이다.

사흘 전인 12월 10일,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 캠프의 종합상황실장을 지낸 권영세 주중대사가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NLL 대화록 구하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역풍 가능성이 있다. 말 그대로 컨틴전시 플랜"이라며 "'도 아니면 모'고 할 때 아니면 못 깐다"고 한 발언은 얼마 전 공개된 녹취록에 담겨있다.

NLL 공세가 '컨틴전시 플랜'이라는 언급대로,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한 경찰 조사가 본격화되자 권 대사는 이날 원세훈 당시 국정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NLL 대화록 공개 문제에 대해 논의한다.

원세훈 전 원장 역시 16일 청문회에 출석해 당시 권 대사와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문제에 대해 "상의했다"고 시인한 바 있다. 원 전 원장은 당시 "13일 국회 정보위원회가 열렸는데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라는 얘기가 있어서 저도 답답하니까 친분 관계로 상의를 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대선을 불과 6일 앞두고 국정원의 선거 개입 의혹까지 번지던 와중에 국정원의 수장과 여당 대선 캠프의 핵심 인사가 현안에 대해 '상의'를 했다는 것 자체가 석연치 않은 대목이다.

권 대사 외에도 새누리당 의원들은 발 빠르게 '컨틴전시 플랜'을 가동시킨다. 이날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새누리당 정보위원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의혹'을 꺼내들며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라고 국정원에 공식 요구한다. 야당이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에 대한 '물타기'라고 비판하는 이른바 'NLL 전쟁'의 시작이었다.

■ 12.14, 대선 D-5
서울청 분석관, 국정원 댓글 확인 '환호성'
비오는 부산, 김무성의 '대화록 낭독'


대선을 불과 닷새 앞둔 14일 오후 8시. 마침내 국정원 직원 김 씨의 노트북에서 삭제됐던 '댓글 흔적'이 발견된다. 수서경찰서로부터 김 씨의 노트북과 컴퓨터를 넘겨받은 서울경찰청 디지털분석팀이 삭제된 파일 복구에 성공한 것. 당시 서울청 디지털증거분석실을 찍은 폐쇄회로(CCTV) 영상엔 국정원의 댓글 증거를 찾고 기뻐하는 분석관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서울청 분석관들은 이틀간의 철야 작업 끝에 다음날 새벽 국정원 직원의 삭제된 40여 개의 ID와 닉네임을 발견한다. 한 분석관은 "닉네임이 나왔다. 고기 사 달라"고 박수를 쳤고, 다른 분석관은 "노다지를 찾았다"고 흥분했다. "이 자료를 뽑아 수사팀에 넘기자"는 말도 오갔다. 분석관들이 당시 찾아낸 김 씨의 댓글 관련 증거는 A4용지 100여 쪽에 달했다. 그러나 이 같은 성과는 수사관들의 '자축' 하룻 만에 무위로 돌아간다.

다른 한 편으로 새누리당의 '비상 계획'도 착착 이행됐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이날 오후 부산, 박근혜 후보 캠프의 총괄선대본부장이었던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은 서면거리 유세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낭독'한다. 국가 기밀인 2007년 정상회담 대화록을 불법 유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날은 언론에 문재인 민주당 후보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지지율을 앞질렀다는 보도가 처음으로 나온 날이기도 했다.
 

▲ 지난해 12월14일 박근혜 후보와 함께 부산 유세에 참석한 김무성 당시 총괄선대본부장(사진 오른쪽). 김 본부장은 당시 유세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그대로 '낭독'해 대화록 사전 유출 의혹이 일었다. ⓒ연합뉴스


■ 12.15, 대선 D-4
김용판의 '수상한 점심 식사'…분위기 바뀐 경찰


15일 오전. 서울경찰청 디지털분석팀이 '밤샘 작업' 끝에 복구한 국정원 직원의 댓글 관련 자료가 김용판 전 청장에게 보고된다. 그러나 분석관들이 찾아낸 국정원의 대선 개입 흔적은 모두 묵살됐다. 김 전 청장의 5시간에 걸친 '수상한 점심 식사' 이후의 일이다.

야권은 이날의 점심 식사에 주목하고 있다. 이날 청와대 인근의 한 식당에서 가진 김 전 청장의 장시간에 걸친 점심 식사 이후 경찰의 기류가 180도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당시 서울청의 업무일지엔 김용판 전 청장이 정보부장 등 직원 12명과 식사를 했다고 나와 있지만, 직원들은 모두 이 사실을 부인했다. 민주당은 김 전 청장의 '수상한 행적'을 두고 국정원 등 여권과 사전 공모를 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지난 16일 청문회에서 시종일관 당당한 태도를 보인 김용판 전 청장은 유독 '당시 누구와 식사를 했느냐'는 질문엔 당황한 듯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누구와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면서도 "정치권 인사는 아니"라고 하더니, 추궁이 계속되자 "기억을 하고 싶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김용판 전 청장의 '수상한 밥 자리'가 끝난 오후 5시, 김기용 당시 경찰청장은 서울청장의 수행도 없이 디지털 분석에 한창이던 서울청 증거분석실을 방문, 분석관들에게 "수고하라"며 돈 봉투를 건넨다. 이를 두고 민주당 정청래 의원은 "이날 오전 김용판 전 청장이 최현락 전 수사부장 등과 모의해 허위 수사 결과를 발표하기로 하고 이어 김 전 청장이 '미스터리 점심'을 하고 난 시점에 김기용 전 청장이 돈 봉투를 전달한 것"이라며 '수사 종료 종용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 12.16, 대선 D-3
새누리, 경찰 수사 결과 암시…박원동-김용판 '의문의 통화'
경찰 "댓글 없었다"…심야 수사 결과 발표


16일은 대선 사흘 전이자, 박근혜-문재인 후보의 마지막 TV토론이 있던 날이었다. 선거의 판세를 바꿀 막판 3일을 앞두고 이른 아침부터 각 후보 캠프는 분주했다.

새누리당 대선캠프 인사들은 더욱 속이 탔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김무성 본부장 등은 '해서는 안 된 말'을 기자들에게 남긴다.

이날 정오 무렵, 김 본부장은 기자들과의 오찬에서 "국정원 여직원의 댓글 증거가 없다"고 잘라 말했고, 박선규 당시 박근혜 캠프 대변인 역시 이날 오후 수사 결과가 나온다는 사실을 일부 기자들에게 흘렸다.

이날 밤 진행된 TV토론의 쟁점은 예상대로 국정원의 대선 개입 사건이었다. 당시 박근혜 후보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실제로 여직원이 댓글을 달았다는 증거가 없다고 나왔다"라며 경찰 수사 결과를 단정했다.

그리고 TV 토론이 끝난 직후인 오후 11시. 김무성 본부장과 박근혜 후보의 '예언'대로 국정원의 '댓글 흔적이 없다'는 경찰의 중간 수사 결과가 기습적으로 발표된다. 대선을 사흘 앞두고 진행된, 이례적인 '심야 발표'였다. 11분 후 국정원 역시 대선 개입은 '사실 무근'이라는 보도자료로 화답했다.

그로부터 6개월 후인 올해 4월, 검찰은 경찰의 당시 중간 수사 결과 발표를 "실체를 은폐한 허위 발표"라고 결론 지었다. 그러나 사건 은폐를 주도한 김용판 전 청장은 불구속 기소에 그쳤다.

권은희 당시 수사과장은 19일 국회 청문회에서 경찰이 중간 수사 결과를 담은 보도자료를 이날 밤 11시에 발표하기 전까지 수사 결과가 발표되는 것조차 몰랐다고 증언했다. 사건 수사를 담당했던 일선 경찰조차 몰랐던 일을 박근혜 캠프의 핵심 관계자들은 이미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당이 김무성 의원 등의 국정조사 증인 채택을 요구하는 이유다.

미스터리한 전화 통화는 경찰의 수사 발표 전 한 차례 더 있었다. '외압'까지 행사하며 수사 발표를 진두지휘한 김용판 전 청장은 이날 오후 2시경, 박원동 전 국정원 국익정보국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박 전 국장은 19일 청문회에서 "당시 사건과 관련해 (김용판 전 청장이) 고생하고 있어 인사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전화했다"고 해명했지만, 가장 민감한 시기 수사대상 기관의 간부가 수사 총책임자에게 전화를 한 것 자체가 일종의 '수사 압력'을 행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민주당이 청문회에서 공개한 CCTV를 보면, 당시 경찰 분석관들은 김 전 청장의 지시에 따라 수사 결과 보도자료를 준비하면서 "대선 결과가 하늘과 땅 차이일 수 있다"고 말했다. 경찰의 180도 달라진 수사 발표 다음날인 17일 보수언론들은 일제히 '국정원 댓글 흔적 없다'는 기사를 1면 톱으로 내걸었다. 대선을 불과 이틀 앞둔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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