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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칩4’에 대한 다른 진단, 같은 처방

메모리 반도체 레버리지 삼아 속도 조절하는 역할 해야…중국 추격 대비한 시스템 반도체 경쟁력 강화 주문도

 
윤석열 대통령이 20일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시찰을 마친 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연설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2022.05.20. ⓒ뉴시스 
 
이른바 ‘칩4’를 두고 미중 패권 경쟁 사이에서 한국의 균형 잡기가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중국을 겨냥한 동맹인지, 기술 협의체인지 성격 규정부터 전문가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린다. 다만, 한국이 취해야 할 방향성에서는 입을 모은다. 칼자루를 쥔 건 한국이니, 최대한 중국을 자극하지 않는 쪽으로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17일 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칩4 예비회의에 참여할 방침이다. 이달 말 또는 다음 달 초로 예정된 회의에서 칩4의 구체적인 협의 수준이나 의제가 논의될 전망이다.

칩4는 미국이 주도해 한국·일본·대만과 반도체 공급망 관련 조정그룹을 형성하려는 구상을 이른다. 모두 반도체 분야 주요 국가로, 이들이 합의를 이루면 반도체 공급망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실체는 모호하다. 정작 미국 언론조차 칩4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 반도체(chip·semiconductor) 동맹(alliance)·협력(cooperation)을 언급하는 외신 보도가 있기는 하나, 반도체 주요국이 공급망 안정성 확보 방안을 협의하는 차원으로 설명된다. 동맹 수준에서 별도 의제를 논의하는 기구와는 거리가 있다.

우세종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소위 ‘칩4 동맹’이라는 단어는 국내 언론에서만 사용한다”며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라고 짚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미국은 한국·일본·대만이 아니더라도 공급망 관리에 도움 되는 나라는 모두 협력하려고 한다”며 “논의 주체를 4개국으로 특정할 상황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칩4가 언급된 건 지난 3월이다. 미국이 한국에 칩4 결성을 제안했다는 보도가 시발점이 됐다.

이후 5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방한을 전후로 반도체 동맹이 대두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첫 순방지로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을 방문해 “지속적으로 공급망을 더욱 회복력 있고, 신뢰성 있게, 안전하게 유지해야 하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전략”이라고 말했다. 동행한 윤석열 대통령은 “한미관계가 첨단기술과 공급망 협력에 기반한 경제 안보 동맹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양국 대통령의 공급망 협력 발언은 칩4가 중국 고립을 목적으로 하는 동맹을 의미한다는 해석에 힘을 실었다.

정부는 줄곧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대통령실은 7월 칩4에 대해 “미국은 지난해 6월 공급망 검토보고서에서 반도체 분야 파트너십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강조했다”며 “미국과 다양한 채널을 통해 반도체 협력을 강화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확대 해석을 경계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외교부도 “미국이 가입을 제안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공급망 교란이 가져오는 여파가 커, 어떤 게 최선인지 다양하게 검토하고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 고립 동맹인가,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인가

칩4가 갖는 외교적 의미를 놓고 해석이 엇갈린다.

미국이 중국을 고립시키기 위한 수단이라는 시각이 있다. 세계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려는 속내라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배타적 반도체 장벽으로 그려진다. 반도체는 산업의 쌀이라고 불린다. 반도체 수급에 차질 생긴 국가는 경제 전반에 타격을 입는다.

중국이 한국 최대 수출국이라는 점은 고민이 깊어지게 한다. 칩4를 미중 패권 경쟁 연장선으로 본다면 중국에는 치명적이다. 2017년 사드 배치로 촉발된 중국의 경제 보복이 재현될 가능성도 있다.

김양팽 전문연구원은 “칩4에 대한 중국 반발은 당연히 보일 수 있는 반응”이라고 말했다. 그는 “반도체 굴기 전략을 추진하는 중국은 한국과 대만에서 기술이전을 받기 위해 노력해왔다”며 “기술력이 없는 중국 입장에서는 미국이 기술력을 가진 국가와 모여 달려 나가면서 자국의 기회가 줄어드는 형국으로 비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윤 대통령의 친미 성향이 짙은 행보는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후보 시절부터 사드 추가 배치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미국이 주도하고 일본·인도·호주가 참여하는 쿼드(Quad) 가입 추진을 주장하는가 하면, 지난달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가 중국에 대한 대립적인 언급을 공식화한 회의에 참여했다.

칩4가 중국에 대한 반도체 제재로 이어진다고 보는 건 과도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통상적인 기술 협력 성격이라는 설명이다. 반도체 기술과 생산 능력을 가진 국가가 친미 성향이다 보니 공급망 관리 논의가 중국 배제로 오역된다는 시각이다.

우세종 연구위원은 “한국이 미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와 이미 수행하고 계획하고 있는 수많은 논의체와 다를 바 없는 모임을 지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이어 “코로나로 인한 국제적 공급망 불안정을 겪은 주요 반도체 제조국이 어떻게 협력하는 것이 미래 반도체 수급을 위해 효과적일지 얘기해보자는 것”이라며 “주요 의제도 연구개발 협력, 반도체 생산 관련 인재 양성, 공급망 안정 대책 논의 등이지, 특정 국가를 배제하기 위한 수단을 모색하는 협의체가 아니다”라고 했다.

김양팽 전문연구원은 “칩4라는 틀에서 국가 단위로 동맹을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분석했다.

이어 “대만을 국가로 인정해야 하는 문제가 있고, 한일 관계도 있다”며 “협의체가 아닌 동맹 차원으로 수위가 높아지면 외교적인 문제가 커진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정부 차원에서 반도체 주요국 간 협의체 구성에 대해 수년전부터 대비해왔다”며 “수면 위로 떠 오르면 미중 사이에서 입장이 곤란해지니 구태여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번에 칩4가 대두되면서 정말 곤란하게 됐다”고 말했다.

격양된 반응을 보이던 중국은 최근 입장에 변화를 보인 것으로 풀이된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최근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회담에서 칩4 예비회담에 참석한다고 통보했다. 박 장관은 특정 국가를 배제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을 설명했고, 왕 부장은 ‘예의주시하는 가운데 한국의 적절한 판단을 기대한다’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관영 매체 글로벌타임스는 회담 당일자 사설에서 “한국이 부득이 미국의 소그룹(칩4)에 가입해야 한다면, 균형자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며 “이는 한국의 독특한 가치를 체현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간 중국 정부와 관영 매체가 칩4에 대해 ‘미국의 협박’, ‘한국의 상업적 자살’ 등 표현으로 비난한 것과 온도차가 있다.

김양팽 전문연구원은 “중국이 경제 보복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는데, 이번 한중 외교장관 회담에서 왕 부장 발언이 톤다운되면서 우려가 해소되는 기류로 보인다”고 말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이 지난 9일 중국 산둥성 칭다오에서 왕이(王毅)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과 한·중 외교장관 회담을 하고 있다. 2022.08.09. ⓒ외교부

미중 패권 경쟁 틀 못 벗어나…느슨한 협의체로 끌고가야

동맹이 아닌 협력이라는 성격, 중국의 미묘한 입장 변화를 감안해도 미중 관계의 틀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미국은 중국 반도체 발전을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경계한다. 세계반도체통계기구(WSTS)에 따르면, 중국 반도체 시장은 2010년 570억달러(약 74조 2,700억원)에서 2020년 1,434억달러(약 186조 8,500억원)로 급성장했다. 2016년 이후 연평균 성장률 12%를 기록하며 세계 평균을 두 배 웃돌았다. 중국 반도체 굴기 전략이 효과를 내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제조 2025’ 정책을 통해 반도체 자급률을 2020년 40%에서 2025년 70%로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미국은 중국 반도체 제재를 강화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최근 반도체와 과학법(반도체 산업육성법)에 서명했다. 해당 법안에 따라 지원받은 기업은 중국 현지에 공장을 신설·증축하지 못한다. 미국은 다른 방식으로도 중국 수출 금지를 압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돈 그레이브스 미국 상무부 부장관이 올해 상반기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ASML이 생산한 반도체 생산 장비를 중국에 수출하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네덜란드 정부에 요청했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다.

산업적 외교적 측면을 고려할 때 한국은 칩4를 느슨한 협의체 성격으로 이끌고 가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 중론이다.

김준형 전 국립외교원장(한동대 교수)은 “칩4가 민간 기업 단위의 협력체로 구성돼도 배후에는 미국 정부가 있는 것”이라며 “중국에 대한 기술이전 등을 통제할 경우 한국 정부도 뒤에서 미국 정부를 상대로 저항하고 속도 조절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김형준 차세대지능형반도체사업단 단장도 “이분법적으로 보면 시장만 가진 중국보다는 시장과 기술·장비를 가진 미국을 등졌을 때 타격이 크다”면서도 “한국 반도체 산업에서 중국 시장 비중이 큰 만큼, 한국은 중국을 배제하려는 미국을 추종하기보다는 최대한 중국을 자극하지 않는 방향으로 끌고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양팽 전문연구원은 “앞서서 적극적인 참여 의사를 보이거나 협력 강화를 주도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또한 “칼자루는 한국이 쥐고 있다”며 “미국에 생산 공장을 지으라거나 중국 공장 신설·증축을 금지하는 등 무리한 요구를 과감하게 거절하는 한편, 우리에게 필요한 기술 경쟁력 강화를 위한 협력을 받아내야 한다”고 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2019년 4월 24일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반도체 비전 2030’ 전략을 발표해,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분야 에 133조원을 투자하고 전문인력 1만 5000명을 채용한다고 밝혔다. ⓒ삼성전자


메모리 칼자루 무뎌질 때 대비해야

한국이 쥔 칼자루는 메모리 반도체다.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차지하는 점유율은 70%에 달한다. 한국이 메모리 반도체 공급을 끊으면 스마트폰·PC·가전 생산이 막히고 서버 증축도 멈춘다. 칩4에 한국이 포함된 이유다.

문제는 메모리 반도체 우위를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느냐다. 중국 추격이 매섭다.

미국반도체산업협회는 올해 초 보고서에서 중국의 세계 반도체 점유율이 2020년 9%에서 2024년 17.4%로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우세종 연구위원은 “중국이 반도체 생산을 시작한 이래, 한국과 중국의 기술 격차는 매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며 “특히 메모리 분야에서는 중국 기술 발전이 매우 빠르게 나타나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은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중국의 가격경쟁력에 밀려 시장을 내준 경험이 있다. 상대적으로 진입 장벽이 낮은 LCD 시장은 주도권이 중국에 넘어가 한국 기업은 철수했거나 철수가 진행 중이다. OLED 시장은 한국 기업이 기술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중국과 격차가 좁아지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중국이 단기간에 추격하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전망도 있다. 미국 견제가 작용할 거라는 분석이다.

김형준 단장은 “미국이 반도체 장비와 전자설계자동화(EDA) 기술을 통제하는 상황에서 중국이 자급자족으로 한국을 따라잡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한국이 메모리 반도체 레버리지가 쉬이 잃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단은 다르지만, 처방은 같다. 메모리뿐 아니라 파운드리(위탁생산), 팹리스(설계) 분야 경쟁력을 강화해 종합반도체 국가로 거듭나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김양팽 전문연구원은 “한국이 칩4 논란 중심에서 향후 방향성에 대한 논의에 참여할 수 있는 건 메모리 반도체 경쟁력 덕분”이라며 “중국에 따라잡히면 가치가 없어진다. 반도체 강국이 아니고 메모리 반도체에서 반짝했던 나라로 사라지게 된다”고 경고했다.

이어 “협상에서 레버리지를 확보하려면 파운드리와 팹리스를 아우르는 시스템 반도체 분야 발전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파운드리 시장 선두는 대만 TSMC다. 점유율은 54% 수준이다. 삼성전자는 16% 정도다. 10나노 이하 선단 공정 파운드리 시장은 대만 TSMC와 삼성전자가 양분하고 있는데, TSMC가 60% 이상을 차지한다.

김형준 단장은 “관건은 파운드리다. 메모리보다 더 위험하다”며 “한국은 최신 전자 기기에 탑재되는 10나노 미만에서는 강점을 가지고 있지만, 보급형 제품에 들어가는 이른바 레거시(성숙) 공정은 중국이 앞선다”고 설명했다.

중국 SMIC는 점유율 약 6% 차지하며 세계 시장 5위를 점하고 있다. 최근 키파운드리를 인수하며 파운드리 사업에 뛰어든 SK하이닉스와 DB그룹 계열사인 DB하이텍보다 우위다.

한국 팹리스 경쟁력은 미약하다. 삼성전자가 스마트폰 AP 엑시노스를 개발해 일부 자사 제품에 적용하고 있지만, 퀄컴의 스냅드래곤에 못 미친다는 평가다. 실제 삼성전자 플래그십 모델에는 대부분 스냅드래곤이 들어간다. 팹리스는 생산 설비가 없어도 돼 비교적 투자 비용이 적은 만큼 중소기업 참여가 용이한 분야이지만, 한국에서는 기반을 넓히지 못하고 있다. 한국 팹리스 기업은 120개가 채 안 되지만, 중국은 1,800개에 달한다.

김양팽 전문연구원은 팹리스 분야 인재 양성 지원을 주문했다. 그는 “하나의 칩에 다양한 기능이 탑재되는 추세”라며 “기능별로 인력이 필요해 수요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팹리스 인력은 고도의 전문성을 요해 학부 수준이 아니라 최소 석사, 기본 박사 과정을 거쳐야 한다”며 “학부생 확대도 중요하지만, 석박사 양성까지 이어질 수 있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김형준 단장은 정부가 반도체 정책을 설계할 때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최근 시행된 국가첨단전략산업법(반도체 특별법)에는 전략 산업에 대한 인프라 구축 비용 지원과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등 규제 완화, 연구개발, 인력 지원 등 내용이 담겼다. 전략 산업 지정은 실무협의회에서 이뤄지는데, 반도체 산업 지정은 기정사실화된 분위기다.

그는 “정부가 반도체에 집중해 지원하는 분위기는 업계에서 반길만하다”면서도 “반도체는 기본적으로 부품이다. 모바일·자동차·선박·의료기기 등 반도체 수요 산업 전반에 대한 활성화 정책이 반도체 지원 전략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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