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학를 중심으로 문명교류학을 개창한 대학자로 이름높은 위공 정수일 선생의 미수(米壽, 88세)연이 9일 저녁 많은 후학들의 열렬한 성원으로 열렸다.
2008년 창립 이래 정수일 선생의 학문적 연구를 후원하고 함께 해 온 한국문명교류연구소가 주축이 되어 마련한 이날 미수연에 맞춰 정수일 선생의 회고록 『시대인, 소명에 따르다』(북이십일 아르떼)가 출간돼 그 의미를 더했다.
김정남 한국문명교류연구소 명예이사장은 "정수일 선생님은 비록 험한 길, 먼길을 걸어오셨지만 나름대로 엄청난 성취가 있었다"며, "그 자랑스러운 성취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다"고 인사했다.
'자신의 실력으로 각주를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세계적 석학'이라며,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비롯한 세계 3대 여행기를 한글 역주본으로 출간한 것도 성과이겠지만, 정 선생 스스로 맨발로 세계 문명교류기를 전부 답사한 이것이 바로 세계 최초, 최대의 여행기가 아니냐"는 찬사를 보냈다.
그러면서 정 선생이 낯선 옥중생활에서 좌우명으로 찾아낸 '빈 산에 사람 하나 없어도 물은 흐르고 꽃은 피네(空山無人 水流花開)'라는 황산곡(黃山谷)의 시구를 인용해, "선생의 마지막이 아름답고 그윽하기를 빈다"고 축원했다.
6개 국적으로 세계를 누빈 다국적자이고 종횡으로 세계를 일주한 코스모폴리턴 여행가이며, 10개 언어에 통달한 인재로 '실크로드학'을 학문적으로 정립한 업적을 세웠으나, 그것만으로 '정수일'의 한 생을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스로 회고록에 밝히고 있거니와 "나는 오로지 시대의 소명만을 따라 살아온 한 시대인일 뿐이다"라고 한 것은 수십편의 대하드라마와 같은 인생을 담을 길 없는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중국 옌볜 출생(1934)으로 베이징대학 동방학부를 졸업(1955)한 뒤 중국 외교부 소속 외교관으로 근무하다 1963년 4월 환국하여 평양국제관계대학 및 평양외국어대학 동방학부 교수(~1974)를 지냈고, 1980년대 들어 튀니지대학, 말레이대학을 거쳐 1984년 한국으로 들어왔다.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1988~1996)로 자리를 잡았으나 1996년 '레바논계 필리핀인 무하마드 깐수'로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2년을 선고받고 특별사면으로 나온 2000년까지 5년을 복역했다.
그리고 2008년 사단법인 한국문명교류연구소와 21세기민족주의포럼을 결성한 이후 종횡 세계일주를 수행하며 제3대 세계실크로드학회 회장(2017~2018)을 역임하기도 했다.
정수일 선생은 이날 출간된 회고록에 대해 설명하면서 "지금까지 해온 일 일곱가지와 하지 못한 일 여섯가지를 결산해 보았다"고 했다.
"그 가운데 가장 가슴을 후비는 것은, 결국 나는 통일성업의 전선에서 한 몸을 바치겠다고 청춘을 보내고 이때까지 사느라고 살아왔는데 아직도 우리는 이 처참한 분단의 역사를 후대들에게 그대로 넘겨주게 되었다"고 회한의 뜻을 내비쳤다.
"스스로 생각컨대 겨우 60점이나 맞을 인생"이라고 하면서 "여생을 못다한 일을 하기 위해서 헌신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회고록을 살펴보면 정 선생 스스로 해 온 일 중 첫째로 꼽은 것도 '새로운 민족론의 정립과 민족사의 복원을 위한 시도'이다.
[통일뉴스]가 출간한 『민족론과 통일담론』(2020.6)이 그것. 정 선생은 책에서 작금 진보적 학계와 정치인들속에 회자되는 '분족론'의 부당성을 설파하고 민족주의 3대속성(연대의식, 민족수호의지, 발전지향성)을 새로 밝히면서 이를 통일담론의 철학적 기조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진일보한 통일론인 '진화통일론'을 새로 제시했다.
"물론 미숙하고 미흡한 점이 많았지만 통일에 대한 '확신범'으로서 초지일관 남북을 아우르는 통일성업의 험난한 현장을 숱하게 누비면서 비교적 적중한 정세분석과 평가 및 제의로 한때나마 남북간에 협의와 화해를 도모하는데 소정의 기여를 했다고 자평한다"며, "단언컨대, 나는 평생 '용도폐기'를 당하는 그러한 무지렁이 약골로 살려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살 수도 없었고, 또 결코 그렇게 산 적도 없다"고 기백을 드러냈다.
'나는 지성의 양식으로 오로지 시대의 소명에 따라 먙겨진 사명을 열과 성을 다해 수행했을 뿐'이라는 선생의 좌우명 그대로이다.
아쉬움으로 기록한 일들도 같은 뜻이다. 한스러운 분단의 비극과 불행을 후대에 전가하게 되어 기성세대로서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민족적 통일담론에 과한 학문적 정립의 미숙성과 보급에서 소극적이었다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선생이 보람으로 꼽은 일들은 '새로운 인문학 분야인 문명교류학의 학문적 정립의 정초자', '비교적 뚜렷한 족적으로 남겨놓은 것은 '실크로드학'의 학문적 정립', '지식의 사회적 환원(연구소 창립 이래 실크로드 정기답사 총 22회, 격년으로 연간 8~10회 시리즈 교양강좌, 20년간 총 388회의 초청강연)', '28년간 5대양 6대주의 종횡 세계일주 단행' 등이다.
오랜 세월 함께 교유했던 거시기산악회 회장이자 다산학 연구자인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다산 정약용이 마흔에 국문을 받아 귀양을 간 이래 75세까지 50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겨 '다산학'을 이루었고, 60살에 감옥에 간 위공 정수일 선생은 오늘까지 우리 곁에서 '실크로드학'을 정립하셨으니 이분이 당했던 고통을 생각하면 슬프기도하고, 그 성과가 기쁘기도 하다"고 하면서 오래 사실 것을 축원했다.
소설가 황석영씨는 "제 인생의 열배는 넘는 선생님의 우여곡절을 듣고는 언젠가 그 인생 내막을 쓰시라고 권유하자 선생님은 아주 정색을 하고 조용하게 '죽을 때까지 안 쓸 것'이라고 말씀한 적이 있다"는 일화를 들려주며, "'열정을 바쳤던 지나온 세월에 대해 의리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저는 선생님의 뒤안에 엄숙하고 준엄하게 지키고자 하는, 말하지 못하는, 젊은 시절의 혁명에 대한 열정에 굉장히 깊은 관심을 갖고 있고, 가슴에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이날 미수연에는 경상북도지사를 지내면서 바그다드에서 경주까지 이어지는 실크로드 여정 답사와 그 성과를 실크로드사전 등으로 출간할 수 있도록 후원을 아끼지 않은 김관용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이 나와 정 선생을 '위대한 학자이며 문화영토를 확장한 문명의 선구자'로 축하하기도 했다.
서울 중구 퇴계로 한국의집에서 열린 정수일 선생 미수연은 박성하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이사의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오랜 기간 우정을 쌓아온 박중기 추모연대 이사장과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연대 이사장, 1984년부터 함께 지낸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를 비롯한 90여명의 하객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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