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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인 저는 올해도 이태원에 갈 겁니다"

[이태원 참사 생존자, 그리고 유족의 증언] 생존자 김초롱 씨 국정조사 공청회 발언

이상현 기자  |  기사입력 2023.01.14. 00:44:16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지 석달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 유가족과 생존자들의 상처난 마음은 치유되지 않고 있다. 국무총리를 비롯해 장관, 국회의원들은 이들의 상처를 보듬어주기 보단 아픈 상처부위를 건드리고 헤집기 일쑤다. 일부에서는 "놀러 가서 그렇게 된 일을 왜 국가의 책임으로 돌리느냐"고 그만하라고 이들의 등을 떠민다. 그럼에도 이들은 여전히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길거리, 국회, 대통령실을 부유한다. 세상을 떠난 이들이 어떻게, 언제, 왜 죽어야만 했는지 알고 싶다는 이유가 이들의 등을 떠밀고 있다.

 

12일 이태원 참사 유가족 8명, 생존자 2명, 지역상인 1명은 국회 국정조사 2차 공청회에 참석해 참사에 대해 증언했다.이들의 이야기는 하나하나가 구구절절했다. <프레시안>에서는 이들의 발언 전문을 싣는다. 이들이 겪는 슬픔, 그리고 아픔을 공유하고자 하는 취지다. 아래는 생존자 김초롱 씨의 발언 전문이다. 

 

※기사를 보기 전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래의 진술서 전문은 10.29 이태원 참사 당시의 현장과 참사 경험 등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태원 참사 당시 사고 현장에서 이태원 상인들의 도움으로 운 좋게 살아남은 김초롱입니다.

 

나는 왜 살았는가. 살았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다가 이 자리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2017년부터 매년 핼러윈을 즐기기 위해 이태원을 찾았습니다. 참사 당일 이태원은 사람이 많았지만 이전보다 특별히 많지는 않았습니다. 핼러윈 이태원은 늘 그렇게 사람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저녁 7시 30분 세계문화음식거리에 도착했고 사고 현장 근처로 향했습니다. 그곳은 이태원에 왔으면 한 번쯤은 가보 자 하는 유명한 식당과 술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저녁 10시 사고 현장 근처 와이키키 술집 앞에 도착했고 압박이 점점 심해져 발이 동동 뜰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조금 버티면 풀리겠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같이 갔던 친구들을 잃어버렸고 주변에 키 큰 성인 남성들로만 둘러싸여 있어서 시야 확보도 전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상황이 펼쳐지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한 술집에서 1층 공간을 열어 두시며 그 공간으로 들어가 대피한 덕분에 살 수 있었습니다. "뒤로! 뒤로!" 하는 외침이 있었고 한 번 큰 흐름이 바뀌면서 반대 방향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있던 가게의 옆 가게에서 잃어버렸던 친구가 대피하고 있길래 함께 그 술집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바로 옆에서 사고가 발생했지만 보지 못했고 (현장 실태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저 대피하던 술집에서 그냥 기다리지 말고 놀아보자 하고 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시각이 오후 10시 40분부터 11시 20분이었습니다. 

 

그때 혼자서 목이 터져라 외친 경찰관이 "앞에 사람이 깔려 죽었어요, 제발 통제에 협조해 주세요"라고 외치는 걸 보았고 이내 곧 1초에 4~5명씩 들것으로 실려나오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지만 실려가는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고는 감히 상상도 못했습니다. 제가 있던 술집의 상인들과 아르바이트생 모두 가게를 내팽개치고 경찰을 도와 거리를 통제하고 새로 진입하려는 사람들을 막았습니다. 자신을 가지 못하게 하는 것에 화가 나 상인분의 얼굴을 가격하는 외국인도 있었지만 그렇게 맞으면서도 통제를 열심히 도운 상인들이었습니다. 

 

참사 당시 왜 음악을 끄지 않았나라는 댓글에 대답합니다. 가게를 버려두고 모두 거리에 나가 돕고 있었기 때문에 음악을 끌 사람이 없었고 12시가 넘어서야 잠깐 들어오셔서 음악을 껐습니다. 

 

밤 12시 30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이태원역 큰 거리로 나왔을 때 거리를 보고도 믿지 못하는 순간이 이어졌습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들. 사람들이 거리에 다 누워 있는 장면들.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뉴스 속보가 뜰 때마다 사망자 숫자가 올라가는 것을 보며 도대체 내가 무슨 현장에 있었던 것인지 피부로 느꼈고 죄책감과 후회로 서서히 제 일상은 모든 것이 망가졌습니다.

 

저는 300명 사상자 안에 든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공무원이나 행안부 등에 별도로 연락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었고 살고 싶었기에 스스로 적극적으로 심리지원을 알아보았습니다.

 

전화상담을 시작한 국가트라우마센터와 민간단체인 심리학회 전화상담을 처음으로 시작했지만 국가트라우마센터보다 심리학회의 전화상담으로 많은 치료가 되었습니다. 

 

"선생님, 아무래도 그곳에 가지 말았어야 했어요"라고 말하는 제게 "가지 말았어야 하는 게 아니라 어디를 가든 안전하게 지켜 줄 수 있는 나라인 것이 맞다. 놀다가 참사를 당한 것이 아니라 일상을 살다가 참사를 당한 것이다"라는 가슴 울리는 치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국가트라우마센터의 상담은 전문가들의 상담이라고 느낄 수 없었지만 거주하고 있는 구청의 정신상담 프로그램을 연계해 주었고 구와 연결된 정신과 치료를 병행하게 됐습니다. 치료를 하면서 우리나라의 복지 시스템이 잘 되어 있다고 느꼈지만 참사 같은 재난이 발생할 경우에 이런 사건을 담당하는 트라우마센터 내의 전문가 배치가 아쉬웠습니다.

 

적극적인 치료를 원했던 저에게는 도움이 되었지만 더 큰 슬픔을 겪는 유족분들이나 중증치료를 받고 있는 생존자들에게는 (지금의 심리지원이) 전혀 알 수 없고 도움 받을 수 없는 체계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강한 사람입니다. 심리상담도 자발적으로 잘 받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성댓글이나 온라인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 저를 힘들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저에게 2차 가해는 장관, 총리, 국회의원들의 말이었습니다. 참사 후 행안부 장관의 첫 브리핑을 보며 처음으로 무너져내렸습니다. "예전에 비해 특별히 우려할 정도의 인파는 아니었다." "경찰 병력을 미리 배치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아니었다." 저는 이 말을 '놀러 갔다 죽은 사람들이다'라고 받아들였습니다. 

 

몇 주 전 고등학교 생존자가 스스로 세상에 작별을 고했을 때 저는 스스로 잡고 있던 끈을 놓칠 뻔했습니다. 그런 결정을 했을 그 마음을 너무 알 것 같게 슬펐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 선생님을 찾았고 약의 용량을 늘렸습니다.

 

그때 국무총리가 했던 발언이 생각납니다. "스스로 더 굳건하고 치료를 받겠다는 생각이 강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정면으로 반박하고 싶습니다. 치료와 상담을 이렇게 열심히 받는 저는 매번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경험을 합니다.

 

참사와 같은 재난을 겪은 사람에게 개인적인 극복도 중요하지만 진상규명만큼 큰 치유는 없습니다. 잘못한 사람 찾아서 벌주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극복의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치료와 상담으로 아무리 개인적으로 노력해도 결국 바뀌지 않는 사회와 매번 쏟아지는 망언들이 제 노력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듭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조금도 없고 아직까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지 못하는 자신의 무지함과 비열함에 스스로 열등감을 가지셔야 합니다. 

 

저는 올해도 이태원에 갈 겁니다. 우리는 반드시 일상으로 돌아가야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태원과 핼러윈은 잘못한 게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일상이었던 이태원과 누군가에게 일상이었던 핼러윈이 왜 아직도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 찍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사람 많은 곳은 가는 것이 아니야 라고 알리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왜 사람들은 혐오 문화를 생성해 내는지를 다 같이 고민하고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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