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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kg 알곤 용접기를 양쪽 어깨에 피멍이 들어도 메고 다녔어요"

[나, 블루칼라 여자] ⑦용접사 김신혜씨

박정연 기자  |  기사입력 2023.11.19. 05:03:30

 

타다다닥. 솟아 오르는 연기와 거친 불꽃 뒤에 그을린 금속 매듭이 남는다. 용접사들의 손길이 지나간 자리마다 남겨진 금속 매듭은 쇳덩이들을 단단히 결합시킨다. 용접은 열과 압력을 이용해 금속을 결합시키는 기술이다. 그 중에서도 발전소나 공장에서 가스나 물이 지나가는 배관을 잇는 용접은 전문성을 요구하는 까다로운 용접에 속한다.

 

<프레시안>은 지난 7일 충남 서산의 플랜트건설기능학교를 찾아 12년째 용접사로 일하는 50살 김신혜 씨를 만났다. 주로 발전소에서 배관 용접을 하는 신혜 씨는 배관사가 배관을 이으면 그 틈을 용접한다. 이날 용접 훈련장에서 취재진에게 배관 용접을 설명해주던 신혜 씨에게 교육생들이 다가와 방법을 물어보기도 했다. 신혜 씨는 직접 시범을 보여주며 그들에게 노하우를 알려줬다. 

 

용접사로 일하기 전 신혜 씨는 삼성석유화학에서 7년 동안 일을 하다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해고됐다. 지인의 권유에 발전소의 화기감시자 아르바이트를 했다. 화기감시자는 화기작업자들 근처에서 불똥이 튀는 것을 막고 불이 나는 것을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화기감시자로 현장에 처음 발을 디딘 그는 용접사라는 직업을 처음 접하며 "현장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화기감시자는 화기위험을 감시만 하는 역할이 아니다. 작업장 주변 청소부터 작업자들이 원하는 것을 갖다주는 도공 수준의 업무자다. 신혜 씨는 일하는 짬짬이 용접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 유심히 봤다. 불꽃이 튀는 용접에 매력을 느꼈다. 그는 "한 번은 탱크 안에서 용접하는 아저씨한테 '아저씨 이거 어려워요?'라고 물으니 '왜?'이러더라. '나도 한 번 해보고 싶어서요'라고 했더니 그 아저씨가 '그래 한 번 해봐. 너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용접사는 기능학교를 통해 용접사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줬다.

신혜 씨가 용접하기로 마음먹은 11년 전 충남 서산에는 여성 용접사가 한 명도 없었다. 가족들도 주변 지인들도 모두 신혜 씨의 결심에 "꼭 그걸 해야 하느냐"고 부정적인 시선을 보냈다. 동료 화기감시자의 한 마디가 용기가 됐다. 신혜 씨보다 10살이 많던 동료 언니는 "내가 너 나이면 당장이라도 시작한다"며 일을 배워보라고 말했다. 여성 화기감시자로서의 설움을 아는 유일한 동료였다. 그 길로 신혜 씨는 용접을 배우기 시작했다. 

 

신혜 씨는 다른 남자 동기들보다 기술을 빨리 습득했다. 발전소와 같은 플랜트에서 배관 용접을 하는 게 그의 목표였다. 여성 용접사가 전무하던 시절,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냉혹했다. 용접사들은 취직 전 해당 용접에 적합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기량 시험을 보는데, 신혜 씨에게는 기량 시험을 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였다. 그는 "용접사로 이력서를 내도 '여자가 무슨 용접을 해', '일 시켜봤자 힘들어서 얼마 못 간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신혜 씨와 함께 배관 용접 기술을 배운 남자 동기들은 모두 서산의 주요 공장과 발전소에 취직했다. 신혜 씨는 다른 동기들과 함께 배웠던 배관 용접을 하는 곳이 아닌, '잡철'이라고 부르는 인테리어 보강 공사를 하는 곳에 취직했다. 동기들은 배관 용접 현장 이야기를 나누는데 신혜 씨는 그 틈에 낄 수 없었다. 박탈감과 서러움이 몰려왔다. 당시를 회상하던 신혜 씨는 눈물을 훔쳤다. 

 

▲<프레시안>은 지난 7일 충남 서산의 플랜트건설기능학교를 찾아 12년째 용접사로 일하는 김신혜씨를 만났다. 용접사로 첫 취직을 할 당시를 회상하며 눈물을 보이는 신혜씨. ⓒ황지현

 

"기능학교 동기생들 10명이 좀 안 되게 모여 선생님을 모시고 밥을 먹었다. 다른 동기생들은 배관 용접을 하는 서산의 주요 4사로 모두 취업했다. 동기들도 저랑 똑같이 초보였다. 나는 하고 싶어도 배관 용접을 못하는데 그들은 배관 용접 현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끼리 나누는 배관 용접 현장 이야기에 도저히 낄 수가 없었다.

 

그때 울컥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 막 울게 됐는데, 동기들이 '누나 왜 그래?'하며 깜짝 놀랐다. 그래서 "니들은 남자라고 기회를 줘서 파이프 용접을 하는데 나는 여자라고 기회도 주지 않는다. 내가 배관 용접을 할 수 있을까 싶다. 그만 둬야 하나"며 막 울었다. 그랬더니 동기들이 용기를 줬다. '누나도 할 수 있어. 우리는 아크도 못하고 CO2(선급용접, 용접 기술의 일종)도 못하지만 누나는 할 수 있잖아. 기회는 주어질 거야'라면서 함께 울어주고 다독거려줬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다. 서산의 한 공장이 증설에 나섰다. 용접사가 많이 필요해졌다. 신혜 씨는 그제야 회사에서 실시하는 기량 시험을 통과해 공장 현장 배관 용접사로 일하게 됐다. 하지만 용접사 일당보다 훨씬 적은 조공(보조작업자)의 일당을 받았다. 역시 여자라는 이유였다. 신혜 씨는 "그 당시 충남 서산에서는 여성 용접사를 쓰려는 회사가 없었기 때문에 저는 그거라도 어디냐, 용접만 시켜주면 가서 하겠다는 마인드로 감사히 일했다"고 말했다. 50킬로그램이 넘는 알곤 용접기를 양쪽 어깨에 피멍이 들어도 메고 다녔다. 

 

그토록 하고 싶던 용접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남성들만 있는 조직문화에 적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자가 무슨 용접이냐"고 무시당했고, 성희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는 "처음에는 많이 울었다. 일을 시작할 때 저도 40대 초반이니 상처를 많이 받았다"며 "이제는 연차도 쌓이고 단단해졌다. 내가 단단해지면 누가 쉽게 상처를 줄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한 번은 무더운 여름 셧다운 현장에서 일한 적이 있다. 더우니까 회사에서 아이스크림을 준다. 팥빙수랑 우유가 간식으로 나왔는데, 어떤 남자 동료가 우유가 떨어졌다고 팥빙수만 받아왔다. 그러더니 나한테 '우유가 없으니까 우유 좀 짜달라'고 그러더라.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들어서 "뭐라고요?"그랬더니 옆 사람이 '니 젖 짜달래잖아' 이렇게 얘기하더라. 그 순간 너무 열이 받았다. 그 자리에서 쌍욕을 하면서 "내가 애 젖 뗀지가 언젠데 아직도 젖이 나와! 니 며느리한테나 가서 짜달라 그래!"라고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창피를 무릅쓰고 그렇게 했다.

 

그리고서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눈물을 훔쳤다. 내가 박차고 나간 자리에 남은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김신혜가 왜 그렇게 화를 냈냐며 웅성대기 시작했다. 주변 동료들이 그 상황을 전해듣고 우유 달라고 한 사람한테 미친 거냐고, '당장 가서 사과하라'고 말했다. 결국 그 사람이 내게 직접 와서 '아무리 친해도 그런 농담을 하면 안 되는데 미안해'라고 사과했다. 그래서 내가 일어나서 "미안한 거 알아? 그럼 빨리 일하러 가"라고 사과를 받아줬다.

 

그런 상황이 오면 사과를 받고 할 말을 제대로 해야 한다. 사실 고소하면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을 고소하고 한두 달 안에 판결이 나는 게 아니고 법정공방을 지난하게 이어가야 하지 않나. 그러다보면 내가 피폐해진다. 그리고 그 상황은 사라지지 않고 항상 내 마음속에 남는다. 그러면 내가 괴로울 것 같았다. 그러니 문제가 생기면 내가 할 말을 하고 사과를 받는다. 그리고 삭히는 거다. 지금도 욱 할 만큼 열 받는 일이지만 하루 이틀 지나고 내 안에서 작은 일로 만들어버린다." 

 

▲<프레시안>은 지난 7일 충남 서산의 플랜트건설기능학교를 찾아 12년째 용접사로 일하는 50살 김신혜 씨를 만났다. ⓒ황지현

 

시대가 바뀌면서 혼자였던 신혜 씨 곁에 이제는 여성 용접사 동료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신혜 씨가 속한 전국플랜트건설노조 충남지부에는 10명의 여성 용접사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남성 조합원이 4000여명인 것에 비하면 턱없이 미미한 수치지만 유일한 여성 용접사로 신혜 씨 혼자 버텨야 했던 시절과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여자라는 이유로, 용접사 일당이 아닌 조공 일당 12만 원을 받고 일하던 신혜 씨는 이제 20만3000원의 용접사 일당을 받는 12년차 베테랑 용접사가 됐다. 주변 동료들도 "양손으로 용접하는 김신혜"라면서 그를 인정한다. 신혜 씨에게 일하게 만드는 동기가 무엇인지 묻자 그는 단번에 "일이 재밌다"며 웃어보였다. 자부심 넘치는 엄마를 따라 신혜 씨의 아들도 용접사로 일한 지 2년째에 접어들었다. 

 

"이런 얘기하면 동료들이 미쳤다고 하는데, 파이프(배관)를 보면 반갑다. 용접하면서 '내가 너를 예쁘게 떼워줄 테니까 오래오래 잘 있으라'고 최면을 건다. 지금도 아침에 눈을 뜨면 일하러 갈 수 있는 게 너무 좋고 새로운 현장에 가면 설렌다. 현장마다 해야 하는 일도, 분위기도, 냄새마저도 다르다. 그래서 좋다. 더 일찍 용접을 배웠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마저 든다." 

 

건강하게 정년까지 용접을 하고 싶다는 신혜 씨는 "안되면 말고, 어차피 가능성은 반반이니까 겁부터 먹지 말고 어떤 일이든 도전을 해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래는 신혜 씨와 나눈 주요 인터뷰 일문일답. 

 

▲<프레시안>은 지난 7일 충남 서산의 플랜트건설기능학교를 찾아 12년째 용접사로 일하는 김신혜씨를 만났다. ⓒ황지현

 

프레시안 : 본인과 하는 일을 소개해달라. 

 

김신혜 : 열심히 사는 엄마이면서 현장의 작업자, 노동자인 김신혜다. 72년생으로 나이는 50살이고, 용접사로 일한 지 12년차가 됐다. 

 

프레시안 : 몇 시에 일을 시작해서 어떤 일을 하는지. 

 

김신혜 : 하루 일과는 아침 5시부터 시작한다. 8시까지 현장에 도착해야 하는데 출근길에 차가 너무 밀려서 일찍 출근한다. 7시 20분쯤 도착해서 동료들과 인사하고 7시 40분 TBM(작업 전 안전점검회의)을 하면서 하루 일과를 계획한다. 8시 10분쯤 현장에 들어가 일을 시작한다. 배관사, 용접사, 조공 3인이 한 팀이 되어서 일한다. 배관사는 배관을 연결해서 루트를 이어나가고 저는 배관과 배관을 잇는 용접을 하고 조공은 그 과정에서 필요한 가공을 하면서 저희 일을 보조해준다. 세 명이 한 팀이 되어 마음을 맞춰서 일한다. 

 

프레시안 : 일당은 어느 정도인가.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일당과 지금의 일당에 차이가 있는지도 궁금하다.

 

김신혜 : 처음에는 일당 12만 원을 받고 일했다. 용접하면서 용접사 단가가 아니라 조공 단가를 받고 일했다. 첫 회사에서 (여성이기 때문에) 용접공 단가로 못 주겠다고, 대신 조공단가로 주겠다고 했다. 그 당시 충남 서산에는 여성 용접사를 쓰려는 회사가 없었기 때문에 저는 그거라도 어디냐, 용접만 시켜주면 가서 하겠다는 마인드로 감사히 일했다. 첫 현장에서 한 달을 그렇게 일하니 열심히 한다고 다음 달 단가를 14만 원으로 올려줬다. 그렇게 첫 현장에서 14만 원을 받으며 몇 개월을 일했다. 

 

다음 현장에선 시험을 통과해 용접사로 취직했고 용접사 단가로 18만 원을 받게 됐다. (용접사들은 취직 전 해당 용접에 적합한 용접기능을 보유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기량시험을 본다. 편집자주) 남자들과 똑같은 단가였다. 이후 매년 임단협을 통해 조금씩 일당이 올라서 지금 일당은 20만3000원 정도다. 사실 달마다 수입은 일정하지 않다. 한 달에 일할 수 있는 날은 20일 정도고 그마저도 비가 오면 일이 없다. 그래도 공장을 세워서 진행하는 셧다운 현장에 가면 자정까지 연장 근무를 하기 때문에 한 달에 많게는 1000만 원 정도를 벌 때도 있다. 

 

프레시안 : 신혜 씨는 주로 어떤 걸 용접하는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줄 수 있나. 일의 장단점도 궁금하다.

 

김신혜 : 물이나 기름이 지나가는 워터배관, 오일배관, 그리고 황산이나 질소와 같은 가스가 지나가는 특수 배관을 용접한다. 우리가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시가스 배관을 이어 붙인다고 생각하면 된다. 일하면서 신경 쓰는 건 최대한 빈틈이 없게 용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용접 과정에서 배관에 공기방울이 들어가면 그 작은 틈을 통해 황산이나 질소 가스가 새어나가게 된다. 밀폐된 공간에 그런 위험한 가스가 가득차면 폭발 사고가 발생하거나 사람이 질식하는 상황이 생긴다. 그런 결함을 방지하기 위해 용접 후 엑스레이나 PAUT(위상배열초음파검사) 등의 비파괴검사를 통해 용접의 안정성을 점검한다. 

 

이 일의 좋은 점은 일하는 만큼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기술자니까 사람들이 인정해준다. 현장가면 내가 여자여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용접사님' 혹은 '반장님'이라고 부른다. 누가 나한테 '님'자를 붙여주겠나. 일터 밖으로 나가면 '아줌마', '이모' 이러지. 단점은 남자들과 일하다보니 성향이 조금 안 맞는 점이 있다는 정도다. 금방 잊어버리긴 하는데 여전히 '여자가 용접을 해?'하면서 무시하는 이도 있고, '여자가 여자다워야지', '나이도 있는데 언제까지 용접할래'하는 말을 들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백에 한 명 정도다. 그런 사람들이 한 이야기는 빨리 잊어버리려고 한다. 그게 내 정신 건강에 좋다. 

 

▲<프레시안>은 지난 7일 충남 서산의 플랜트건설기능학교를 찾아 12년째 용접사로 일하는 김신혜씨를 만났다. 후배에게 직접 시범을 보이는 신혜씨. ⓒ황지현

 

프레시안 : 용접사로 일하기 전에는 어떤 일을 했나. 

 

김신혜 : 지금은 없어진 삼성석유화학에서 포장 업무를 7년 동안 하다가 구조조정으로 회사에서 잘렸다. 그러다 지인이 화기감시자 일을 제안해서 시작했다. 화기감시자는 화기작업자들 근처에서 불똥이 튀는 것을 막고 불이 나는 것을 감시하는 역할이다. 화기감시자로 현장에 와보니 용접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현장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프레시안 : 충남 서산 첫 여성 용접사라고 들었다. 전문 기술이 필요한 분야에서 일을 시작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일을 시작하게 됐나. 

 

김신혜 : 처음 현장에서 두 달 정도 화기감시자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화기위험만 감시하는 게 아니라 주변 청소부터 작업자들이 원하는 것을 갖다줘야하는 도공 수준의 일을 했다. 그러면서 용접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 유심히 봤다. 한 번은 탱크 안에서 용접하는 아저씨한테 "아저씨 이거 어려워요?"라고 물으니 '왜?' 이러더라. "나도 한 번 해보고 싶어서요"라고 했더니 그 아저씨가 '그래 한 번 해봐. 너도 할 수 있다'며 건설노조 기능학교를 통해 용접사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친절히 알려줬다. 제가 인복이 많다. 

 

프레시안 : 용접사를 한다고 했을 때 주변 반응은 어땠나. 

 

김신혜 : 다 반대했다. 꼭 그걸 해야 하느냐고들 했다. 제 지인들도 다른 식당에 자리 있다고 소개시켜주겠다고 했지, 용접하겠다는 나를 응원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화기감시자로 같이 일했던 동료언니가 유일하게 날 응원해줬다. 그 언니에게 "언니 저도 용접 한 번 해볼까요? 기능학교라는 곳이 있대요. 저도 배우면 어떨까요"라고 물어봤더니 그 언니가 '내가 너 나이면 당장이라도 시작한다'며 해보라고 말했다. 그 언니는 50살이었고 저는 40살이었는데, 그 언니의 한마디가 내게 큰 힘이 됐다. 여성 화기감시자로 일하는 게 또 다른 설움이 있다. 그러다보니 동료 언니도 화기감시자로 일하면서 나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아이들은 어렸을 때는 내가 하는 일을 잘 몰랐는데, 이제는 엄마가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고 자랑스러워 한다. 

 

프레시안 : 여성 용접사가 전무하던 시절에 동료 여성의 격려가 큰 용기가 됐을 것 같다.

김신혜 : 그 언니의 격려 때문에 제가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용접사를 하기로 마음먹고 건설노조 기능학교에서 야간에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화기감시자 일을 끝내고 저녁 6시부터 2시간씩 일을 배웠다. 그리고 집에 가서는 애들이 어리니 밥도 해야 하고, 밀린 집안일도 했다. 그러자니 입술이 다 부르텄다. 이렇게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일을 그만두고 용접을 배우는데 올인했다. 내 수업시간은 저녁이었지만 아침부터 나가서 연습을 해도 되느냐고 기능학교 선생님께 물었더니, 요즘 사람이 없다고 얼마든지 하라고 흔쾌히 허락을 해줬다. 그렇게 3개월 동안 아침마다 용접 연습을 하고 저녁에는 수업을 들었다. 저는 정말 일을 빨리 배워서 3개월 만에 (플랜트 배관 용접사로) 일을 구하러 나갔다. 서산 지역에 현대오일뱅크, 삼성석유화학(한화), 롯데, LG 등 플랜트 배관 용접사로 일할 수 있는 주요 4사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곳에서도 저를 안 받아줬다. 여자라는 이유였다. 여성 배관 용접사가 없던 시절이니까...

 

프레시안 : 기술직의 특성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만난 기술직 여성들은 공통적으로 초보 시절에 일을 구하는 게 굉장히 힘들었다. 여성과 남성이 같은 초보 실력이어도 현장 관리자는 남성을 선호한다. 

 

김신혜 : 2012년, 일을 시작했을 당시 충남 서산에선 제가 첫 여성 용접사였다. 이 지역 사람들은 여성 용접사랑 함께 일해 본 경험이 없었다. 내가 용접사로 이력서를 내도 '여자가 무슨 용접을 해', '일 시켜봤자 힘들어서 얼마 못 간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회사에서 실시하는 기량 시험을 볼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저는 제가 배웠던 배관 용접을 하는 게 아니라 '잡철'이라고 부르는 보강 공사부터 시작했다. 

 

▲<프레시안>은 지난 7일 충남 서산의 플랜트건설기능학교를 찾아 12년째 용접사로 일하는 김신혜 씨를 만났다. ⓒ황지현

 

그러던 중 기능학교 동기생들 10명이 좀 안되게 모여 선생님을 모시고 밥을 먹었다. 다른 동기생들은 배관 용접을 하는 서산의 주요 4사로 모두 취업했다. 동기들도 저랑 똑같이 초보였다. 나는 하고 싶어도 배관 용접을 못하는데 그들은 배관 용접 현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끼리 나누는 배관 용접 현장 이야기에 도저히 낄 수가 없었다.

 

그때 울컥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 막 울게 됐는데, 동기들이 '누나 왜 그래?'하며 깜짝 놀랐다. "니들은 남자라고 기회를 줘서 파이프 용접을 하는데 나는 여자라고 기회도 주지 않는다. 내가 배관 용접을 할 수 있을까 싶다. 그만 둬야 하나"며 막 울었다. 그랬더니 동기들이 용기를 줬다. '누나도 할 수 있어. 우리는 아크도 못하고 CO2도 못하지만 누나는 할 수 있잖아. 기회는 주어질 거야'라면서 함께 울어주고 다독거려줬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난다. 

 

프레시안 : 그러면 어떻게 배관 용접 현장에 갈 수 있었나. 

 

김신혜 : 정말 우연히 기회가 찾아왔다. 배관 용접사로 시험 볼 기회가 내게도 주어졌다. 서산의 주요 4사 중 하나였는데, 당시 공장 증설에 나섰다. 증설을 위해 용접사가 많이 필요했다. 그래서 용접사 기량 시험에 합격해 배관 용접을 시작하게 됐다. 정말 열심히 일했다. 알곤 용접기(아르곤 가스를 이용한 용접기)는 50킬로그램이 넘는데, 양쪽 어깨에 피멍이 들어도 그걸 메고다녔다.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말 그대로 몸을 아끼지 않고 일했다. 왜? 난 여자니까. "무거워서 못해요"라고 해버리면 또 도태되니까 더 열심히 했다. 지금도 그렇게 일한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내가 여자라고 무거운 걸 조금 덜 들면 제 팀인 배관사와 도공 그 두 사람이 더 무거워진다. 

 

프레시안 : 현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을 보면 '남자 동료들은 힘들면 죽겠다, 힘들다고도 하는데 오히려 여자라서 힘들다는 내색을 하기 어렵다'는 이들이 많다. 

 

김신혜 : 맞다. 그 분도 살아남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겠나. 나도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사실 여자들이 근력이 좀 부족하지 않나. 집에 가면 온 몸이 다 아프다. 아이 둘을 출산 하다 보니 연골도 안 아플 수가 없다. 신체적인 조건부터 남자들과 다르다. 그래서 피멍이 항상 들어있다. 이제는 어느 정도 경력이 생겼으니 정말 힘든 날은 남자 동료들한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그럼 주변 사람들이 정말 흔쾌히 도와준다.

 

프레시안 : 용접사 중 여성 노동자 수는 얼마나 되는가. 비율이 궁금하다. 

 

김신혜 : 지금까지 6명 봤다. 대부분 남성들이다. 여성들은 손에 꼽을 수준이다. 

 

프레시안 : 여성 용접사 수가 왜 적을까. 

 

김신혜 : 여성 스스로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진입장벽이 높다. 용접을 배워야하는데 애도 키워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니까. 그리고 보통 신랑들도 하지 말라고 하니까 여성들이 선뜻 도전하지 못하는 것 같다. 현장에서 한 여성 화기감시자 후배가 용접을 할까 고민하길래 해보라고 했는데 신랑이 반대해서 못할 것 같다고 하더라. 내가 직접 해보니 여자들이 못 하는 일이 아니다. 그저 접해보지 못해서 못한 것 같다. 충분히 할 수 있다.

 

프레시안 : 화장실은 충분히 있나. 요새 건설현장에는 대부분 여성 화장실이 있는 것 같다. 처음 일을 시작할 당시 휴게공간 상황은 어땠나. 

 

김신혜 : 화장실을 가는 것도 일이라 물도 잘 안 먹고 밥도 조절해서 적게 먹었다. 옛날 화장실은 상상도 하기 싫다. 남자들은 바지만 내리면 어디서든 용변을 보던 시절이니 그게 부럽기도 했다. 

 

또 여성의 경우 생리를 하니까 그게 너무 불편했다. 산부인과에 가서 '아이도 다 낳았으니 자궁을 적출하면 생리를 안 하지 않겠느냐'고 한 적도 있다. 의사선생님께서 왜이렇게 무식한 소리를 하느냐고 호통을 치더라. 생리만 안 하는 게 아니라 몸 전체가 바뀌는 일이라고 나를 말렸다. 대신 생리를 억제할 수 있는 미레나 시술을 받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해 시술 받았다. 피임이나 다른 목적이 아니라 오로지 현장에서 편하게 일하려고 시술 받았다. 

 

▲<프레시안>은 지난 7일 충남 서산의 플랜트건설기능학교를 찾아 12년째 용접사로 일하는 김신혜 씨를 만났다. ⓒ황지현

 

프레시안 : 신혜 씨가 서산의 첫 여성 용접사이다보니 남성들만 있는 조직 문화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김신혜 : 처음에는 많이 울었다. 일을 시작할 때 저도 40대 초반이니 상처를 많이 받았다. 용접을 할 때 불꽃이 튀는데 그 불빛으로 눈에 화상을 입었을 때 모유를 짜서 넣으면 빨리 괜찮아진다는 속설이 있다. 되도 않는 소리지. 한 번은 나이가 많은 남자 조공이 눈에 화상을 입었다. 그때 날 보고 '니 젖 좀 짜주라' 이러더라. 내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뭐라고요?"이러고 한참을 아무 말을 안했다. 그랬더니 자기도 순간적으로 실수한 걸 느끼고 '아니...'이러면서 사과하길래 한숨만 푹 쉬고 말았다. 그래도 이제는 연차도 쌓이고 단단해졌다. 내가 단단해지면 누가 쉽게 상처를 줄 수 없다.

 

프레시안 : 말 못 할 일들이 많으셨을 것 같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차별적인 순간이 있나.

 

김신혜 : 한 번은 무더운 여름 셧다운 현장에서 일한 적이 있다. 더우니까 회사에서 아이스크림을 준다. 팥빙수랑 우유가 간식으로 나왔는데, 어떤 남자 동료가 우유가 떨어졌다고 팥빙수만 받아왔다. 그러더니 나한테 '우유가 없으니까 우유 좀 짜달라'고 하더라.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서 "뭐라고요?"그랬더니 옆 사람이 '니 젖 짜달래잖아' 이렇게 얘기하더라. 그 순간 너무 열이 받았다. 그 자리에서 쌍욕을 하면서 "내가 애 젖 뗀지가 언젠데 아직도 젖이 나와! 니 며느리한테나 가서 짜달라 그래!"라고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창피를 무릅쓰고 그렇게 했다.

 

그리고서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눈물을 훔쳤다. 내가 박차고 나간 자리에 남은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김신혜가 왜 그렇게 화를 냈냐며 웅성대기 시작했다. 주변 동료들이 그 상황을 전해듣고 우유 달라고 한 사람한테 미친 거냐고, '당장 가서 사과하라'고 말했다. 결국 그 분이 내게 직접 와서 '아무리 친해도 그런 농담을 하면 안 되는데 미안해'라고 사과했다. 사과를 받아 줬다. 

 

프레시안 : 명백한 성희롱이다. 아무리 사과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걸 넘겨야 하는 상황이 힘들었을 것 같다.

 

김신혜 : 그런 상황이 오면 사과를 받고 할 말을 제대로 해야 한다. 사실 고소를 하면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사람을 고소한다고 한두 달 안에 판결이 나는 게 아니지 않나. 법정공방을 지난하게 이어가야 한다. 그러다보면 내가 피폐해진다. 그리고 그 상황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항상 내 마음속에 남는다. 그러면 내가 괴로울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상황을 그냥 넘기지 않고 내가 할 말을 하고 사과를 받는다. 그리고 삭히는 거다. 지금도 욱 할 만큼 열 받는 일이지만 하루 이틀 지나고 내 안에서 작은 일로 만들었다. 

 

프레시안 : 부당하고 차별적인 순간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유지하게 만든 동기가 뭐였나.

 

김신혜 : 일이 재밌다. 이런 얘기하면 동료들이 미쳤다고 하는데, 파이프(배관)를 보면 반갑다. 용접하면서 내가 너를 예쁘게 떼워줄 테니까 오래오래 잘 있으라고 최면을 건다. 지금도 눈을 뜨면 일하러 갈 수 있는 게 너무 좋고 새로운 현장에 가면 설렌다. 올 여름도 엄청 더워서 힘들었지만 재밌었다. 내 적성에 맞는 일 같다. 저는 근력은 부족해도 체력이 좋다. 밤새워서 일을 해봤는데, 남자들은 다 떨어져나가는데 저는 아침까지 쌩쌩했다. 체력이 방전된 남자 동료들 일을 대신 해준 적도 있다. 그 친구는 아직도 내 체력이 대단하다고 인정한다. 

 

프레시안 : 고된 일인데도 재미있다고 말하는 신혜 씨의 눈빛에 자부심이 가득하다. 

 

김신혜 : 아들이 크론병을 앓고 있었다. 아이들과 먹고 살고 아들 병원비도 내야 하는데 돈이 부족해서 고단가 일이 필요했다. 내가 아이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아이들이 나를 기대고 일어서게 하고 싶었다. 아들 줄기세포 이식수술이 1500만 원이었는데 45일동안 밤낮으로 일해서 그 돈을 벌었다. 너무 뿌듯했다. 이제는 아들도 완치 수준으로 회복했고 아이들도 날 자랑스러워한다. 내 아들도 나를 따라 용접사 일을 시작했다. 자부심을 가진다.

 

프레시안 : 아들이 어머니를 따른 건가. 

 

김신혜 : 제가 추천했다. 어느 날 아들이 진로 고민을 하면서 어떤 일을 하면 좋을지 심각하게 물어보길래 용접을 배우면 좋을 것 같다고, 돈도 되지만 열심히 하면 보람이 있는 직업이라고 말해줬다. 그렇게 용접을 배우고 일을 시작한 지 2년 정도 됐는데 적성에 잘 맞는다고 했다. 아들이 일하는 곳의 반장님이 저한테 아들이 용접한 배관에 결함이 하나도 안 나왔다고 하더라.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다. 

 

프레시안 : 신혜 씨에게 용접은 어떤 의미를 갖나. 

 

김신혜 : 용접은 내 일상. 지금도 너무 좋다. 파이프만 보면 반갑다. 나는 일할 수 있다는 게 기쁘다. 현장마다 해야 하는 일도, 분위기도, 냄새마저도 다르다. 그래서 좋다. 더 일찍 용접을 배웠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마저 든다.

 

프레시안 : 일터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나 꿈이 있나. 

 

김신혜 : 최대한 건강하게 정년까지 일하는 게 목표다. 지금처럼 열심히 일하고 싶다. 

 

프레시안 : 동시대를 살아가는 일하는 사람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다면. 

 

김신혜 :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큰 상처라고 하면 큰 상처가 되지만,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해버리면 별 거 아니게 되더라. 특히 여성분들, 겁부터 먹지 말고 어떤 일이든 도전하면 좋겠다. 안되면 말고. 어차피 가능성은 반반이니까 도전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프레시안>은 지난 7일 충남 서산의 플랜트건설기능학교를 찾아 12년째 용접사로 일하는 김신혜 씨를 만났다. ⓒ황지현
박정연

프레시안 박정연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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