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희 씨와 한동훈 국힘당 전 비대위원장의 ‘읽씹’ 갈등이 일파만파 확산하고 있습니다. 국힘당은 물론 외부 인사들까지 참전해 누가 잘했니 못했니 한마디씩 거듭니다. 최근에는 김건희와 한동훈이 각각 댓글팀을 운영했다는 주장이 나오며 새로운 양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참고로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는 댓글팀 운영 혐의로 징역 2년 형을 받았습니다. 이제 김건희-한동훈 갈등이 적당히 봉합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한동훈의 등장은 윤석열 대통령의 몰락과 연결됩니다. 한동훈은 적폐세력 내에서 일찌감치 윤석열의 오른팔로, 차기 대권주자로 지명되었고 언제 정치 전면에 등판하느냐만 관심거리였습니다. 한동훈이 너무 일찍 등판하면 윤석열의 권력 누수 현상이 발생하고, 너무 늦게 등판하면 대권주자로 입지를 다질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한동훈이 본격 등판한 시기는 2023년 12월 국힘당 비대위원장 추대로 볼 수 있습니다. 윤석열 집권 1년 반 만의 일입니다. 그만큼 윤석열 정권이 빠르게 몰락했음을 보여줍니다.
적폐세력 처지에서는 윤석열 정권의 권력 누수를 막으면서 한동훈에게 권력이 자연스레 넘어가는 게 최선입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그런 부드러운 권력 이양과는 거리가 멉니다. 윤석열·김건희는 한동훈을 배신자로 낙인찍고 권력을 붙들려 하고, 한동훈은 살아남기 위해 서둘러 권력을 빼앗으려 합니다. 그래서 공멸 수준의 폭로전이 이어집니다. 이제 적당히 자연스럽게 권력을 이양하기는 글러 먹은 듯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배경에는 강력한 반윤석열 민심이 있습니다.
12일 발표된 7월 2주 차 전국지표조사 리포트에 따르면 윤석열 지지율은 26%에 불과합니다. 66%가 국정운영을 잘 못한다고 응답했습니다. 특히 ‘매우 잘 못하고 있다’는 응답이 41%나 됩니다. 자신의 이념 성향을 중도라고 답한 이들 가운데서도 부정 평가가 73%나 나왔습니다.
이런 분위기라서 김건희가 명품 가방 뇌물 사건을 두고 사과를 못 하는 것입니다. 김건희가 문자로 보낸 “제가 사과를 해서 해결이 된다면 천번 만번 사과를 하고 싶습니다. 단 그 뒤를 이어 진정성 논란에 책임론까지 불붙듯 이슈가 커질 가능성 때문에 쉽게 결정을 못 하는 것뿐입니다”라는 내용처럼 사과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일이 더 커집니다. 실제로 당시에 김건희 사과 이야기가 잠깐 나왔을 때 사람들 사이에서 ‘사과한다고 끝나나? 잘못했으면 처벌도 받아야지’라는 반응이 나왔습니다.
이처럼 반윤 민심이 너무 강하니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사과를 할 수 없습니다. 만약 반윤 민심이 이 정도로 거세지 않았다면 김건희가 사과하고 적당히 넘어갔을 것입니다.
민주당이 총선 후 적폐청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강력한 민심 때문입니다.
민주당은 윤석열 탄핵 청원이 5만 명을 넘자 관련 청문회를 실시하기로 하고 김건희, 최은순을 증인으로 채택했습니다.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전격적인 대응입니다.
예전의 ‘고구마 민주당’을 떠올려보면 관례를 명분으로 법사위원장 자리를 국힘당에 내줬을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고구마 민주당’의 모습이 일소된 건 아닙니다. 5선 중진인 정성호 의원은 한동훈이 제안한 채해병 특검법을 두고 “받아들여도 좋다고 생각한다”라면서 “굉장히 의미가 있고 진일보한 것”이라고 칭찬했습니다. 최고위원 출마를 선언한 정봉주 전 의원은 “(한동훈이) 총선 때 김건희 특검법도 받을 추세였고 이제는 채해병 특검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라며 “적의 적은 동지”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고개를 드는 고구마 모습들, ‘정치 공학’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민심을 저버리는 행태들, 눈치를 보며 자기 이익만 챙기는 기회주의 속성은 곧바로 국민의 지탄을 받습니다.
강력한 반윤 민심은 윤석열 공격에 동참할지 말지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도 합니다.
국방부 대변인을 지냈던 부승찬 의원이 2023년 2월 청와대 이전 과정에 천공이 개입했다는 폭로를 한 것도 그렇습니다. 부승찬 의원이 천공에 관해 제보를 받은 건 2022년 4월 1일 이전입니다. 그렇지만 그때는 이를 폭로하지 않았습니다. 윤석열 지지율이 2022년 6~7월에 급격히 떨어져 몇 달 동안 20~30%대에 머무르자 용기를 내 폭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채해병 사건,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 구명 로비 사건, 김건희 주가조작의 연결고리를 입증하는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단톡방)이 언론에 공개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단톡방을 제보한 것으로 알려진 김 모 변호사 역시 윤석열 정권이 궁지에 몰리니 정권을 무서워하지 않고 용기를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반윤 민심이 거세게 타오를수록 이런 폭로가 계속될 것입니다. 정권 내부에서도 이런 폭로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폭로가 나오면서 순식간에 정권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2014년 연말 송년회 자리에서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2015년에는 자유대한민국 체제로 통일돼 있을 것”이라며 건배했다고 합니다. 당시 남북 사이에는 대화와 협상으로 관계를 발전시키는 분위기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니 갑자기 통일한다면 그건 전쟁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을 것입니다. 송년회 자리에서 남 원장이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 아 이슬같이 기꺼이 죽으리라”라는 내용의 대한제국 군가를 불렀다는 이야기도 그래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2015년 8월 4일 비무장지대에서 지뢰 폭발로 군인 2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정부는 북한이 몰래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지뢰를 매설하고 간 게 터졌다고 주장하였고 8월 10일부터 대북 심리전 방송을 재개하였습니다. 그리고 8월 20일 북한이 대북 확성기를 향해 고사총 1발과 직사화기 3발을 발사하고 국군이 대응 차원에서 155밀리미터 포탄 29발을 북한 영토로 발사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북한은 자기들이 발사한 적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48시간 이내에 대북 확성기를 철거하지 않으면 군사행동을 개시한다고 선포합니다. 한편 기자들이 직사화기 3발이 어디에 떨어졌는지 물었지만 군은 끝내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이때부터 남북은 급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북한은 21일 오후 5시를 기해 준전시상태를 선포했으며 한미연합사는 워치콘을 4에서 3으로, 다시 2로 상향 조정하였고 국군은 최고 수준의 경계 태세인 ‘진돗개 하나’를 발령했습니다.
22일 오후 3시, 북한이 정한 시한이 끝나갈 무렵 극적으로 남북이 협상을 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날 6시부터 시작한 협상은 25일 새벽 1시께 가까스로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협상이 진행되는 기간 북한에서는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습니다. 북한 잠수함의 70%가 출항한 것입니다. 잠수함은 일단 물속으로 들어가면 탐지가 매우 어렵고 통신도 불가능합니다. 잠수함이 출항한 것은 특정 명령을 받고 작전에 돌입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도 70%면 전면전에 돌입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함께 최전방의 북한 포병이 2배로 늘어나고 상륙작전에 쓰이는 공기부양정 20척이 전진 배치되었으며 특수부대가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미국이 진행 중이던 한미연합훈련을 중단하고 B-52 전략폭격기 무력시위도 취소했습니다. 또 박근혜 정권에게 협상 타결을 종용합니다. 나중에 미군 관계자는 북한군의 움직임을 보니 작전계획을 다시 짜야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2015년 8월이면 기존 한미연합사의 작전계획인 작전계획 5027을 대체한 작전계획 5015를 채택한 지 두 달밖에 안 된 때입니다. 그런데 그게 다 무용지물이고 작전계획을 다시 짜야 한다고 할 정도로 북한군의 움직임이 예상치 못한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박근혜는 협상 타결 당일까지도 북한의 사과를 받아낼 것을 협상단에 지시했지만 끝내 남북공동합의문에는 사과가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보수세력 내에서조차 ‘협상 패배’라며 개탄하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게다가 박근혜는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북한의 분위기는 정반대였습니다. 남북고위급회담을 주도한 황병서 당시 인민군 총정치국장과 김양건 당시 노동당 대남비서는 ‘피 흘리지 않고’ 전쟁을 막은 공로로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습니다.
이후 11월 14일 박근혜 정권의 실정을 참다못한 국민들이 들고일어난 민중총궐기가 열렸습니다. 시위를 강경 진압하는 과정에서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고 쓰러져 중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은 나중에 박근혜 퇴진 촛불이 폭발하는 발단이 됩니다.
이듬해 4월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제1당을 차지하면서 여당인 새누리당이 참패합니다. 당시는 이미 박근혜 정권을 향한 국민의 분노가 끓어올랐고 여당 내 내분이 심각한 수준으로 번지고 있었습니다. 김무성 대표가 친박계 공천을 인정할 수 없다며 이른바 ‘옥새 파동’을 일으킨 것도 이때입니다.
총선 참패 후 박근혜 정권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적폐세력 내에서도 박근혜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질 정도로 지지기반이 완전히 허물어졌습니다.
그리고 10월 말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결정타를 입었습니다. 사실 최순실 문제는 그 전부터 꾸준히 보도되고 있었기에 알 만한 사람은 대충이라도 아는 얘기였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아 정권에 큰 타격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박근혜를 향한 국민의 분노가 치솟고, 적폐세력 내 자중지란으로 총선에서 참패하고, 지지기반이 허물어지자 여기저기서 증언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끝내 박근혜는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탄핵을 당했습니다.
박근혜 때랑 지금이랑 비교하면 상당히 유사합니다. 정권을 향한 분노의 민심은 그때보다 더 강력합니다. 박근혜 때는 그래도 여당이 총선에서 참패하자 정권을 심판했다며 관망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도 없습니다. 총선 이후 첫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은 ‘틈을 주면 살아난다, 쉬지 말고 몰아치자’라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촛불국민은 국회의원들이 알아서 할 거라 여기며 지켜보는 게 아니라 서둘러 윤석열을 탄핵하라며 더욱 압박하고 견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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