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아스라이 사라졌겠지만 나는 선연히 기억한다. 초록색 티와 빨간색 조끼를 입은 채 택배 상자를 들고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을.
지난 2월 27일, 총선을 앞두고 한동훈 당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성수동의 한 카페에서 '기후 미래 택배' 공약을 발표했다. 택배의 주요 내용물은 기대 이상이라는 반응이었다. 기후대응기금 규모를 현행 2.4조 원에서 5조 원 규모로 확대하겠다, 예산 편성 과정에서 탄소중립위원회의 협의 절차를 신설하겠다, 해상풍력 절차를 간소화하고 배출권거래제 감축목표를 상향하겠다는 내용 등이 포함됐다.
대통령 후보 토론회 'RE100 트라우마' 속에서, 재생에너지를 죄악시하고 기후위기라는 말 자체가 거론되지 않는 분위기의 이 정권에서 나오기 어려울 것으로 봤던 공약이었다. 게다가 기후대응 재원과 예산의 급소를 봤다는 점에서 오히려 과거의 원론적인 공약을 답습한 더불어민주당보다도 신선하다는 평가였다.
그러나 평가와는 별개로 공약은 이행되어야 의미가 있다. 총선에서 패배했다고는 해도 국민들에게 집권여당의 입장에서 약속한 만큼 공약을 없던 일로 치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총선이 끝난 지금 한동훈 대표와 윤석열 대통령은 택배 발송을 준비하고 있을까?
미래를 비추는 수정구슬, 2025년 예산안
가장 빠르게 의지를 보여줄 수 있는 영역은 2025년 기후대응기금 대폭 증액이다. 집권당은 예산 편성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27년까지 기후대응기금을 약속한 5조 원 이상으로 늘리려면 3년간 연평균 9000억 원씩 증액해야 한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2025년도 기후대후대응기금으로 2조 6224억 원을 편성하는 데 그쳤다. 2024년 계획 대비 불과 2306억 원이 증액된 것이다. 이후 2년간 2.4조 원의 증액이 가능할까? 한 해 재량 지출 증액 총액이 2.6조 원에 그치는 상황에서 의지가 의심스러운 행보다.
문제는 이 2306억 원조차도 실질에 근거한 것이 아닌 의문이 가득한 증액이라는 것이다. 기후대응기금의 주 수입원은 유류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교통·에너지·환경세 7%와 자체수입인 배출권 유상할당 경매 수익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교통·에너지·환경세 전입금은 올해 1조 728억 원으로 잡혀 있었다. 이것이 2025년 1조 3318억 원으로 상당히 늘어난다.
그런데 의아하다. 2025년도 예산안에는 교통·에너지·환경세 세입을 15.1조 원으로 잡고 있다. 15.1조 원의 7%는 1조 570억 원이다. 나머지 2748억 원의 전입금은 어떻게 한다는 뜻인가? 1조 3318억 원이라는 전입금 규모는 원칙적으로 교통·에너지·환경세 세입이 19조 원을 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교통·에너지·환경세는 17조 원 이상 걷힌 적이 없다. 2021년 16.6조 원을 정점으로 이후 대폭의 유류세 감면이 장기화되면서 2022년 11.1조 원, 2023년 10.8조 원이 걷히는 데 그쳤다. 올해는 유류세가 정상화될 것이라면서 15.3조 원 수입을 잡아 놓고 유류세 인하 조치를 계속 연장하면서, 11.2조 원 수입에 그칠 전망이다. 유류세 인하가 계속 이어진다면 교통·에너지·환경세 세입은 12조 원을 넘기기가 어렵고, 따라서 기후대응기금 전입금 규모도 8000억 원 수준에서 그칠 것이다. 정부는 내년에 유류세를 정상화시킬 자신이 있는가? 아니면 탄소중립기본법 제71조를 개정해서 전입률 자체를 상향시킬 용기라도 있는 것인가?
배출권 매각수입 3608억 원도 물음표가 붙는다. 지금의 온실가스 배출권 시장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탄소 다배출 기업의 사정을 봐준다고 공짜 배출권을 지나치게 많이 나눠주다 보니 배출권 가격은 곤두박질치고 기업들은 공짜 배출권을 시장에 내다 팔아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배출권 매각 수입도 형편없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2023년 계획된 배출권 수입액은 4008억 원이었다. 그런데 실제 수입은 852억 원에 그쳤다. 예상 수입의 21.2%만 들어온 것이다. 2024년이 다 가지는 않았지만 올해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10월까지 배출권 낙찰수량은 20% 늘긴 했지만, 평균가격은 16% 떨어졌다. 지난해와 대동소이한 수입이 예상된다. 그런데 정부는 무슨 근거로 2025년 배출권 수입이 2023년 결산보다 세 배 이상 뛸 수 있다고 낙관하는 것일까?
이 모두를 종합해 보면 그나마 늘렸다고 하는 2025년 기후대응기금 2.6조 원도 공수표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기금 수입은 2조 원에도 미치지 못해 이 정부의 고질적 병폐인 세수결손의 한 페이지를 또다시 장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어디서 돈을 가져다 메우지 않는 한 윤석열 정부는 올해도 '결손할 결심'을 했다고 평할 수밖에 없다.
화석연료 보조금, 기후대응을 막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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