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미운 물범에서 안쓰러운 물범으로
전 세계 점박이물범 중 약 20% 정도가 백령도에 서식한다. 이들은 주로 중국 보하이(渤海) 랴오둥만(遼東灣)의 인적이 드문 단단한 유빙(流氷) 위에서 출산하고, 해빙기에는 털갈이를 마친 어린 새끼와 함께 백령도에 와서 봄-가을을 지낸다. 12월이면 번식을 위해 다시 중국으로 떠난다.
물범이 백령도에 산 지는 오래되었지만, 보호 필요성이 제기된 건 2004년부터다. 녹색연합은 야생동물 보호를 위해 실행한 현장 조사 과정에서 멸종위기에 놓인 백령도 물범에 주목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백령도를 주기적으로 오가며 지역민과의 교류를 시작했다. 박정운 단장도 당시 녹색연합 소속으로, 2006년부터 점박이물범 조사 연구 활동에 참여해 왔다.
물범 서식지와 어민들의 어업 활동 구역이 겹치기 때문에, 지역 내에서 물범 '보호' 이야기를 꺼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물을 찢어 그 안의 물고기를 꺼내먹거나, 물질할 때 물속을 휘저어 흙탕물로 만드는 물범은 어민들에게 천덕꾸러기 같은 존재였다.
'물범 보호를 위해 손해를 감수하자'는 말이 설득력을 갖기는 어려웠다. '물범이 백령도에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걸 어떻게 풀어낼까 고민한 끝에 떠올린 것이 '생태관광' 개념이었다. 그렇게 해양생태관광 시범사업이 추진되었다. 그 첫 번째 시도가 "생태해설사 양성 과정"이었다.
참여 주민들이 1, 2, 3기까지 배출되면서 자연스레 동력이 생겼다. 심화 과정까지 마친 주민들은 이대로 멈추긴 아쉽다며 공부 모임을 만들었고, 모양새를 갖춘 활동 모임으로 지속하자는 의견이 모여, 2013년 '점박이물범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하 점사모)'이 만들어졌다.
백령도에 살면서도 물범을 제대로 본 적 없는 사람, 어업에 손해만 끼치는 골칫거리로 여기는 사람, 얄미운 물범이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사람... 물범에 대한 백령도 사람들의 인식은 대부분 무관심 혹은 부정적이었다.
그랬던 이들이 '생태해설사 양성 과정'과 '점사모'에 참여하면서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생태를 공부하고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활동이 쌓이면서 가능해진 변화다.
2016년에는 인천녹색연합 주최로 <백령도 해양생태계 보호·수산발전을 위한 관계기관 간담회>가 열렸다. 지역 관계자, 어촌계, 그리고 점사모 등이 참석한 자리였다. 해양 보호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던 중, 어민 한 명이 물범에 관해 건의했다. "물범들이 주로 머무는 하늬바다 물범바위를 보면, 늘 비좁아서 자리다툼이 심하더라, 자리를 넓혀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백령도를 찾아오는 물범 중 절반 이상이 하늬바다의 '물범바위'를 이용한다. 폐호흡을 하는 포유류이기에, 수시로 뭍에 나와 털을 말리며 체온을 관리하는 등 휴식이 필요한데, 바위 면적(약 400㎡)은 개체 수에 비해 너무도 비좁았다. 7-10월 간조 때에는 특히 경쟁이 심해, 약하거나 어린 개체들은 밀려나기 일쑤였다.
해당 의견을 낸 어민은 점사모 회원이었다. 물범 서식지와 어업구역이 겹치는 일종의 경쟁 관계이지만, 그만큼 물범의 상황을 가장 잘 아는 것도 어민들이다. 바다에서 늘 봐왔고, 점사모에서 공부하며 활동한 것이 더해져 안쓰러운 마음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날 점사모 회원들은 "자연석을 쌓고, 그 아래에 인공어초를 조성해 물고기들이 서식하게 함으로써 물범으로 인한 어망 훼손도 줄여보자"는 아이디어를 함께 제안했다. 어민의 제안이 받아들여졌고, 하늬바다 물범바위 인근에 '인공쉼터 조성' 공사에 착수, 2018년 11월 완공되었다. 어촌계 주민, 행정, 환경단체 모두 함께 물범과 지역민의 상생 방안을 고민해 이뤄낸 첫 번째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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