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유력 일간 워싱턴포스트(WP)가 북(조선)을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고, 비핵화 대신 군축형 접근으로 정책 전환을 촉구한 것은 단순한 문제 제기를 넘어선다. 이는 미국 주류 언론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이며, 한반도 정책을 둘러싼 오랜 자기기만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이번 사설이 특히 주목되는 이유는 다섯 가지다.
첫째, 이번 사설은 워싱턴포스트 논설실 명의로 게재됐다는 점에서 미국 내 공식 담론의 변화를 보여준다. 단순한 외부 전문가의 기고나 일회성 칼럼이 아니라, 미국을 대표하는 유력 일간지가 편집국 차원의 판단을 통해 채택한 공식 입장이라는 점에서 무게가 다르다. 이는 북핵 문제를 둘러싼 기존의 ‘비핵화 전제’가 더 이상 미국 주류 정책 담론의 불가침 영역이 아니라는 의미다.
둘째, 조선을 핵보유국으로 규정하는 근거를 단호하고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최대 50기에 달하는 핵탄두 보유 추정, 추가로 40기 이상을 생산할 수 있는 핵물질 확보, 풍계리 핵실험장의 단기간 재가동 가능성 등은 이미 국제기구와 각국 정보당국이 반복적으로 확인해 온 사실이다. 이는 조선의 핵 능력이 더 이상 가설이나 논쟁의 영역이 아니며, 정책 논의의 출발점이 근본적으로 전환돼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 워싱턴포스트는 지난해 12월 발표된 미국 국가안보전략(NSS)에서 조선이 완전히 빠진 이유를 ‘의도된 침묵’이라고 정확히 짚었다. 이는 단순한 누락이나 실수가 아니다. 비핵화가 더 이상 실현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그 결론이 초래할 외교·정치적 파장을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WP의 지적은 미국의 대북 전략이 실패했음을 고발하는 동시에, 더 이상 모호한 언어로 현실을 덮을 수 없다는 경고다.
넷째, ‘비핵화’ 대신 ‘핵 동결과 상한선 설정’이라는 현실적 해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공허한 구호와 결별했다. 사설은 중국 역시 자국의 군비통제 백서에서 ‘한반도 비핵화’ 목표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더 이상 실현 불가능한 비핵화 구호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군축형 접근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WP의 제안은 이상적 선언이 아닌 실행 가능한 선택지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북핵 해법을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내렸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다섯째, 트럼프 행정부를 향해 침묵으로 책임을 회피하지 말고 솔직해질 것을 정면으로 권고했다는 점에서, 이번 사설은 단순한 논평을 넘어 사실상의 정책 제안서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질문이 등장한다. 조선이 왜 핵을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 정확히 말해 왜 핵이 필요 없는 조건을 아무도 만들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다. 지난 30년간 반복된 ‘비핵화’ 요구는 현실을 바꾸지 못했다. 오히려 조선은 핵무력을 완성했다. 실패한 전략을 반복하는 것은 정책이 아니라 관성이다.
특히 한미연합군사훈련 문제는 더 이상 성역이 될 수 없다. 조선이 핵을 ‘체제 안전 보장 수단’으로 규정하는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대규모 연합군사훈련과 선제타격 시나리오가 상시화된 적대적 환경 때문이다. 비핵화를 말하면서 동시에 군사적 압박을 강화하는 것은 모순이다. 핵을 내려놓으라고 하면서, 핵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워싱턴포스트가 지적했듯 이제 필요한 것은 솔직함이다. 미국은 비핵화 목표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고, 한국 역시 그 전제 위에서 새로운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 핵 동결과 군축, 신뢰 조치, 군사적 긴장 완화가 병행되지 않는 협상은 성립할 수 없다. 그 출발점은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중단일 것이다.
비핵화라는 낡은 주문을 외우는 동안 현실은 이미 달라졌다. 이제 질문은 ‘조선이 언제 핵을 포기하느냐’가 아니라, ‘미국이 언제 대북 적대정책을 포기하느냐’로 달라져야한다. 워싱턴포스트의 사설은 이 불편한 질문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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