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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 농민 잔혹사, 언제까지 방치할 건가

'제2 새마을운동' 찬가 속 '이등 국민'들의 절규

[편집국에서] 한국 현대 농민 잔혹사, 언제까지 방치할 건가

김덕련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11-25 오전 10:52:53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국가 기관들의 대선·정치 개입 문제 등에 가려 큰 주목을 받진 못했지만, 지난주 인천 송도국제도시에서 중요한 회의가 열렸다. 18일부터 22일까지 열린 한국과 중국의 자유무역협정(FTA) 제8차 협상이다.

이 자리에서 두 나라는 상품 분야 양허 초안을 주고받았다. 양허안은 어떤 품목을 어떠한 일정으로 개방할 것인가를 담은 계획서다. 일반 품목(10년 내 관세 철폐), 민감 품목(20년 내 관세 철폐), 초민감 품목(20년 이상 개방 유보) 중 어느 쪽으로 분류되느냐에 따라 특정 산업의 미래가 바뀔 수도 있는 상황이다.

제8차 협상에서 두 나라는 일반 품목과 민감 품목 위주로 양허안을 교환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철강, 석유화학, 기계류와 함께 "민감하지 않은 일부 농산물"도 이번 양허안에 포함됐다고 밝혔다. 포함된 농산물이 몇 가지인지는 "협상 전략상 밝힐 수 없다"는 설명도 했다.

최대 교역국인 중국을 상대로 한 FTA 협상은 이명박 정권 말기인 지난해 5월 시작됐다. 올해 6월 한중 정상회담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높은 수준의 포괄적 FTA' 체결에 합의한 후 속도를 내는 모양새다. 두 나라는 9월 품목 수 기준 90%, 수입액 기준 85%를 관세 철폐(자유화)하기로 잠정 합의하며 1단계 협상을 마무리했다. 제8차 협상은 이를 바탕으로 열린 한중FTA 2단계 첫 번째 협상이며, 초민감 품목 양허 초안을 주고받을 제9차 협상은 내년 1월 중국에서 열릴 예정이다.

농민들은 걱정이 태산이다. 한중FTA가 한국 농업을 초토화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동안 다른 나라와 FTA를 비롯한 농산물 개방 협정을 체결할 때도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이번엔 그 정도가 더한 느낌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은 한국과 가까울뿐더러 기후 및 작물 재배 체계에도 유사점이 많다. 쉽게 말해, 한국에서 나는 거의 모든 농산물은 중국에서도 생산된다. 그것도 훨씬 싼값에.

중국은 한국 농산물 시장의 개방 폭을 최대한 넓히려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농산물이 모두 초민감 품목이 될 가능성이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민감하지 않은 일부 농산물"을 이번 양허안에 포함했다는 산업통상자원부 설명에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초민감 품목으로 분류됐다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초민감 품목 모두 관세를 그대로 유지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초민감 품목에는 '양허 제외'(관세 유지)뿐만 아니라 관세를 일부 낮추는 '부분 철폐', 관세는 유지하되 일정 물량을 무관세로 수입하는 '저율 관세 할당', 계절에 따라 관세를 다르게 매기는 '계절 관세' 등도 포함된다. '양허 제외'를 제외한 나머지는 농가 보호 효과가 크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미FTA 때 감귤을 보호하기 위해 오렌지에 '계절 관세'를 적용했음에도 감귤 소비량이 30퍼센트 정도 줄었던 것처럼.
 

▲ 22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2013 전국농민대회에서 한 농민이 배추를 머리에 쓰고 FTA 폐기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한중FTA, 쌀 개방 문제, TPP 가능성…시름에 잠긴 농민들

농민들이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한중FTA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는 이유다. 농민들이 더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는 건 생존권을 위협하는 파도가 한중FTA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쌀 관세화 유예 기간이 2014년으로 끝나면서 쌀 시장 전면 개방 압력이 코앞이다. 정부가 농산물 수출 강국인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와 FTA 협상을 재개하는 것도 농민들로선 지나칠 수 없는 사안이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참여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도 농민들로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TPP에 참여하는 순간 미국의 쌀·쇠고기 추가 개방 요구를 비롯해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칠레 등이 줄줄이 농수산물 전면 개방을 압박"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한미FTA에 적극 찬성했던 이들 사이에서도 '농수산업을 비롯해 산업별 영향 분석조차 제대로 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TPP에 서둘러 참여하는 건 실익이 크지 않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정부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한중FTA를 우려하는 농민들의 목소리에 대한 정부 답변의 핵심은 "수출 확대"다. "농산물 수출 확대 정책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9월 9일 현오석 경제부총리), "농산물 수출 확대를 적극 추진해 한중FTA가 농업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기회가 될 수 있도록 할 것"(11월 11일 정홍원 총리)이라는 것이다.

이는 재계의 논리를 대변하는 일부 경제 신문과 똑같은 논리다. 현 부총리 발언 다음 날, <한국경제>는 한중FTA를 "우리 농산물의 중국 시장 진출 기회", "농업이 발전할 기회"로 규정한 사설을 내보냈다. "어떤 무역 협정도 농업을 배제하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며 TPP에 하루빨리 참여할 것, 쌀 관세화를 더는 미루지 말 것도 주문했다.

박 대통령이 내세운 창조 경제와 엮어서 농민들에게 주문하는 내용도 있다. 정 총리는 "정부는 전통적인 농업에 IT와 BT를 결합해 창조 경제의 훌륭한 본보기로 만들고자 한다"고 말했다. 농업이 "유통과 가공, 관광과 식품까지 더한 대표적인 융·복합 산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일견 듣기 좋은 말이다. 그대로 이뤄진다면 나쁠 것 없는 그림으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런데 정부가 제시하는 방안이 다수의 농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일지는 의문이다. 장밋빛 미래를 펼치기 전에 농민들의 신뢰를 얻는 게 우선이라는 말이다.

몇 가지 사례에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한중FTA가 농업을 비롯한 여러 산업에 끼치는 영향을 분석한 자료 및 연구 보고서를 공개하라는 요구를 정부는 지난해에 거부했다. 정보 공개를 청구한 이들은 소송을 통해서야 올해 8월, 그중 일부를 공개하라는 판결을 받아낼 수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15일 TPP 첫 공청회장에 들어가려던 농민들은 제지를 당했다. 이에 더해 FTA 대책으로 정부가 그간 실시한 농업 관련 투자 사업 등이 까다로운 지원 조건 등으로 인해 기대치에 훨씬 못 미친다는 지적도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 놓인 농민들에게 국익을 위해 정부를 믿고 따르라는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을까?

한국 현대 농민 잔혹사…차가운 숫자 들이대기 전에 귀를 기울여야

이런 상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한국 현대사는 농민 잔혹사이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 때는 한국전쟁 수행 및 전후 복구를 위해 현물로 세금을 거둔 임시토지수득세가 대표적으로 농민들을 힘들게 했다. 대량으로 들어온 미국의 잉여 농산물도 농촌엔 커다란 부담이었다. 농산물 가격이 폭락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 들어 산업화가 본격화하면서 강제된 저곡가 정책은 농촌의 숨통을 죄었다. 저곡가 정책은 도시 노동자들의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1980년대 이후 한국 경제의 개방 폭이 넓어질 때마다 농민과 농업은 우선적으로 희생됐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농촌이 피폐해지자 1970년대에 등장한 것이 새마을운동이지만, 이 역시 농촌의 쇠락을 막지 못했다. 마을길을 넓히고 초가집은 없앴지만 농촌을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1970년대에 농촌 가구당 소득이 10.5배 늘었지만, 빚은 그 두 배인 21배나 늘어난 데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이처럼 한국이 해방 후 이룩한 놀라운 산업화의 밑바탕에는 농촌의 희생이 있었다. 병영 같은 공장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 노동자들의 피땀과 함께 농민들의 고통을 먹고 자란 '한강의 기적'이었다는 말이다.

그러한 시간을 거친 2013년, 한국에서 농민들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다. 수출 중심 경제의 고도화를 위해 언제든 희생될 수 있어야 함에도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대에 뒤처진 이들', 이따금 과격 시위나 벌이는 '2등 국민' 같은 존재로 적잖은 이들의 눈에 비치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한중FTA나 TPP를 무조건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국가 전체의 이익이라는 차가운 숫자만을 제시하며 또다시 따르라고만 요구하는 건 이들에겐 너무나 잔인한 일이라는 말이다. '2등 국민'을 체계적으로 만드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점에서 맞지도 않는 일이다.

차가운 숫자 이전에 노동으로 얼룩진 이들의 굵은 주름을 찬찬히 살펴보고, 이들에게 '2등 국민'의 딱지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경제의 고도화를 추진할 방안을 마련해야 할 때다. 그 출발점은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제2의 새마을운동',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정부가 소리 높여 외치기 전에 새마을운동과 '한강의 기적' 동안 이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살피는 것, 이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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