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돌팔이가 사람을 죽이는 방식에 관한 고찰

[박동천 칼럼] '왕초' 돌팔이 대통령님, 그냥 가만 계세요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정치학)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4.05.01 09:04:05

 

 

 

 

 

 

 

 

 

중화상을 입어 사경을 헤매는 환자를 앞에 두고 악귀를 쫓는답시고 굿판을 벌이면 어떨까? 뇌출혈로 의식을 잃은 환자에게 원기를 보한답시고 보약을 처방한다면 어떨까? 대장암 환자에게서 맹장을 적출하고 있다면 어떨까? 군대 지휘관이 수하의 병력을 사지로 몰아넣는 명령을 내린다면 어떨까? 사후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 어이없도록 무지한 짓들이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역사에서 이런 무지는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특히 주목해야 할 대목은 이런 멍청한 짓들이 당대의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돌팔이는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죽인다. 돌팔이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과정에는 환자를 죽이기는 고사하고 해치고자 하는 정도의 '악의'도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돌팔이는 환자를 살려보려고, 환자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자 “최선”을 다할 때 사람을 죽이기가 쉽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진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돌팔이인 것인데, 동시에 자신의 무능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결정적인 특징이 또한 겹쳐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고려는 세월호 선장에 관해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의무를 다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지만 자신만 돌보느라 의무를 팽개친 사람인가 아니면 애당초 직무수행 역량 자체를 갖추지 못한 돌팔이였는가? 
 
당시에 상황이 너무나 긴박하여 구조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는 그의 변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전형적인 돌팔이가 된다. 자신이 탈출한 시각부터 선체 대부분이 물에 잠긴 시각 사이에 아무리 적게 잡아도 90분 이상의 여지가 있었다는 것이 이미 밝혀진 객관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한다는 낭만적인 이념은 접어두고 선장도 사람인지라 생사의 갈림길에서는 남을 구조하기보다 먼저 구명도생할 권리가 있다고 쳐주더라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생사의 갈림길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를 계산하지 못했다는 것은 선장은 고사하고 하급 선원으로서도 돌팔이였다는 뜻이 될 수 있다.
 
물론 그가 역량을 갖췄지만 악령에 사로잡혀 의무를 저버렸을 가능성도 틀림없이 남아 있다. 그를 돌팔이로 볼 것인가 아니면 악의에 따랐다고 볼 것인지는 추후에 형량을 사정할 재판정에서 결정할 일이다. 이 사건에서 내가 부각하고 싶은 한 양상은 치명적인 선택을 내려야할 수많은 계기에서 한결 같이 돌팔이들이 결정권을 쥐고 앉아서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도리어 문제 해결을 방해했다는 측면이다. 
 
세월호 선장을 '나쁜 사람'으로만 바라보는 프레임, 다시 말해 선주와 관료들의 유착과 탐욕에만 주목하는 프레임은 이 측면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효과가 있다. 반면에 선장이 돌팔이에 해당한다는 측면을 예리하게 발굴하게 되면, 선주, 선사, 해경, 해군, 언딘마린인더스트리, 언론, 안행부 장관, 해수부 장관, 국무총리, 그리고 대통령이 또한 그에 못지않은 돌팔이임을 인지할 수가 있다. 이들이 어떤 점에서 돌팔이였는지는 이미 '무능'이 만천하에 드러난 셈이므로 일일이 적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 이 글의 전개상 몇 가지는 특정해서 부각할 필요가 있다. 우선 배가 넘어간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조대가 탈출한 승객만을 구조하고 갇혀있는 승객을 구조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적극적으로 유리창을 깨서 선실에 있던 7명을 구조했다고 하지만, 그 경우도 눈에 띄었기 때문에 구조할 생각이 난 것이다. 가장 먼저 '구조하러' 출동한 대원들이 기본적으로 그 배에 몇 명이 타고 있었는지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출동한 대원들이야 나름대로, '선의를 가지고', 최선을 다한 결과겠지만, 전체 상황을 어렴풋이나마 파악하고 있었던 누군가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구조대원 개인들의 선의와는 완전히 별도의 차원에서 그들에게는 선실에 갇힌 승객을 구조할 능력이 이렇게 애당초 없었다.
 
다음으로 선체 대부분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다음의 상황에서도 구조의 책무가 돌팔이에게 맡겨져 있었다. 구체적으로 그 돌팔이가 언딘마린인더스트리인지 해경인지 해군인지는 앞으로 밝혀지기를 바랄 뿐, 현재 내가 확정해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일은 물론이고 사고가 난 지 2-3일이 지난 후까지도 누군가는 살아있었을 것이 틀림없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다. 그런데 조류가 빠르다는 둥, 날씨가 나쁘다는 핑계만이 난무했을 뿐, 결국 300명 중 한 사람도 구조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구조할 생각이 없었다는 음모론에는 동조할 생각이 내게는 없다. 그러나 구조할 능력이 없었다는 점만은 명백한 사실이다. 구조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사상 최대의 구조 작전”을 벌였다는 것은, 스스로 구조할 능력이 없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확증으로 충분하고도 남는다.
 
현장을 장악한 사람들이 스스로 무능을 인지했다면, 당연히 혹시라도 자기들보다 구조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야 했다. 국내의 인력으로 안 된다면 국제적인 지원을 절박하게 요청했어야 했다. 언딘이라는 업체든, 해경이든, 해군이든, 현장을 차지하고 앉아 주도권을 쥔 사람들이 스스로 구조에 무능하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돌팔이의 전형이라고밖에 부를 수가 없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보면, 돌팔이 중에서 돌팔이는 대책본부의 지휘부였다는 결론이 자명하게 도출된다. 강병규, 이주영, 정홍원은 구조가 목표인지 인양이 목표인지 아니면 여론조작이 목표인지조차 헛갈린 상태에서 우왕좌왕과 허둥지둥을 솔선수범했다. 생존자를 한시바삐 찾아서 구조해야 한다는 목표의식도 없고, 험악한 환경 아래서 어떻게 구조할 수 있을지 전략을 수립할 능력도 없다 보니, 다양하게 분출하는 여러 가지 방안들 사이에 시도해 볼 만한 대안을 분별하지도 못한 채, 그저 눈치만 보며 자신의 보신에만 연연했다. 이보다 더 한 돌팔이는 과거는 물론이고 미래에도 다시 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돌팔이의 왕초는 두 말할 나위 없이 박근혜다. 전원구조라는 보도가 오보로 드러난 지 몇 시간이 지난 다음에 “구명조끼 다 줬다는데 그렇게 찾기 힘드나요?”라고 했다든가,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한 상태에서 “마지막 한 명까지 구조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는 정도는 말실수 정도로 넘어가도 좋다. 문제는 “구조하라”고 명령하고 “옷 벗기겠다”고 엄포만 놨을 뿐, 실제 구조 현장에서 어떤 착오가 발생하고 있는지, 그런 착오를 해소하기 위해 무슨 가닥을 잡아줘야 하는지에 관해서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아무런 의식 자체가 없었다는 데 있다.
 
나는 2012년 선거 직전에 <신동아>(2012년 12월호)에 '박근혜 불가론'을 쓴 적이 있다. 나는 거기서 역사(헌법)의식 결여, 공사구분 불능, 디테일에 대한 이해력의 결핍을 지적했었다. 역사의식의 결여라는 문제야 5년 임기만 지나면 넘어갈 수 있는 일이라 치더라도,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무능력과 진상을 파악하지 못하는 무능력은 대단히 심각하다고 주장했었다. 불행히도 당시의 우려는 그대로 현실화되고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내가 당시에 우려했던 정도보다 훨씬 심각한 결과를 낳고 있다. 당시에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사안의 진상을 스스로 확인할 능력이 없는 지도자는 귀가 얇아서 참모와 관료들에게 휘둘리는 꼭두각시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앞에 언급한 권력의 사유화 문제가 여기에 직접 결부된다. 권력이란 대통령이라는 직위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행정부의 관료들과 국회의원들과 검찰의 직위에서도 나온다. 이들 모두가 권력을 사유화해서 이권과 결탁할 유혹을 끊임없이 받는다. 대통령이 사안의 진상을 파악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면, 이들의 권력 남용을 제어할 길이 사실상 전무하다.
 
이 문단에서 내가 지적했던 병폐가 이번 세월호 침몰 사건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해운업자, 선급협회, 해경, 해수부, 등의 간부급에 앉은 자들이 제멋대로 권력을 남용하고 있어도 박근혜 정부는 도무지 아무 문제도 인지하지 못한다.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박근혜의 권력을 마사지 해주는 대가로 시장의 권력을 맘껏 휘두르는 언론기관들은 관료와 업자들의 돌팔이 짓을 감시하고 고발하기는커녕 유언비어를 중구난방으로 보도해서 공론의 질서를 파괴하고, 그 틈에 중요한 의제를 파묻어버리며,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대충 넘어가려는 못된 버릇을 발휘한다. 이번 사건에서도 정부의 돌팔이 식 발표를 받아쓰기 식으로 보도하더니, 이제는 성금을 모금하자는 애도의 프로파간다로써 의제를 희석시키고 있다.
 
돌팔이가 엉터리 수술을 하다가 사람을 죽여도 살인죄를 묻기는 아마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순서에 따라 유기치사죄까지는 반드시 물어야 한다. 대통령이 유능했더라면 구조될 수 있었던 생명이 무능한 대통령 때문에 희생되었다고 해도, 대통령에게 유기치사죄를 묻기는 아마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직무를 수행할 능력이 전혀 없는 돌팔이라면, 권한을 대행할 인재를 널리 물색해서 자리에 앉힌 다음에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가장 선량한 선택이다. 박근혜가 만약 이런 선택이나마 내릴 수 있다면, '용단'을 내린 대통령으로 길이 역사에 남을 것이고, 자기 아버지 박정희의 명예도 완전히 파괴되기 전에 어느 정도 보전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나리오는 아마도 현실에서 실현될 가망이 별로 없다. 애당초 이런 용단을 내릴 만한 이해력의 소유자라면 지금처럼 엉망진창을 만들어놓지는 않았을 테니까. 다만, 기어기 그 자리를 내놓고 물러나기가 너무나 아깝고 분하다면, 남은 임기 동안에는 그냥 패션쇼나 하면서 관료와 자본과 언론의 꼭두각시 노릇에 만족하기 바란다. 옳고 그름을 분간할 줄 모르는 사람이 괜시리 "국가개조"니 뭐니 하면서 설쳤다가는, 개조가 아니라 파괴로 끝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돌팔이는 가만있는 편이 그나마 도움이 된다. 돌팔이가 자리를 차고앉아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나설 때, 사람들은 죽어나간다.


 

페이스북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미투데이 보내기 요즘 보내기 C로그 보내기 구글 북마크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정치학)  필자의 다른 기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