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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겨레의 얼과 넋 선배(仙人)) ‧ 선배사상(仙人思想)의 쇠퇴(衰退) 몰락(沒落)

[우리역사] 우리 겨레의 얼과 넋 선배(仙人)) ‧ 선배사상(仙人思想)의 쇠퇴(衰退) 몰락(沒落)
 
[우리역사 이야기12]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천재사학자(天才史學者)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이용섭 역사 연구가 
기사입력: 2014/07/09 [06:59]  최종편집: ⓒ 자주민보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천재사학자(天才史學者)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의 상‧‧고대사에 대한 인식]

  
5. 우리 겨레의 얼과 넋 선배(仙人)) ‧ 선배사상(仙人思想)의 쇠퇴(衰退) 몰락(沒落)

단군조선초(壇君朝鮮初) 시작하여 고려중기(高麗中期)까지도 그 맥(脈)을 이어오던 우리 겨레의 얼과 넋 선배(仙人) ‧ 선배정신(仙人精神) ‧ 선배사상(仙人思想)은 고려말(高麗末)에 이르러 완전히 몰락을 하고 그 흔적(痕迹)조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고려 말 사라진 선배(仙人) ‧ 선배정신(仙人精神) ‧ 선배사상(仙人思想)은 조선시대에 와서는 완전히 사라지고 그러한 사상이나 제도가 있었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선배(仙人)라는 말은 조선조(朝鮮祖) 양반(兩班) ‧ 사대부(士大夫)들에게 【선비】라는 모자로 고상하게 쓰이어지게 되었다. 우리 겨레의 앞도 적 다수를 차지하는 일반백성(一斑百姓)들은【선비】라는 모자에 주눅이 들어 그에 참가를 한다는 것조차도 생각지도 못하였다. 【선비】라는 언어는 이때부터 강력한 신분장벽을 형성하는 데에만 오용(誤用)이 되었다.

우리 겨레의 얼과 넋인 선배(仙人) ‧ 선배정신(仙人精神) ‧ 선배사상(仙人思想)이 사라진 후조선(後朝鮮:전주 이 씨들에 의해서 다스려지던 조선)에는 지도자를 백성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또 선택한 지도자를 한없이 존경하고 따르던 습성이 사라지게 되었다. 선배제도가 사라진 조선조는 지배층 상층부와 백성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를 하였으며 이는 온 겨레가 하나 되어 살아가던 공동체정신이 무너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즉 상층부와 백성들 사이에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못하고 따로 움직이게 되니 환란을 당하게 되면 초기에는 매우 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선배(仙人) ‧ 선배정신(仙人精神) ‧ 선배사상(仙人思想)이 사라진 조선은 513년 후인 1905년 을사늑약으로 그 명을 산소호흡 기에 끼고 헐떡이고 살아가다가 결국 1910년 완전히 사망을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일제식민지 백성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되었으며, 1945년 8월 15일 해방이후 1945년 9월 7일 〈맥아더포고령〉이 반포되고 9월8일 미군이 인천항에 들어옴으로서 우리 겨레는 분단이라는 치욕의 역사를 근 70여년을 안고 살아오고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후조선 이후 겪게 되었던 겨레의 수난사는 고려후기(高麗後期) 우리 겨레의 얼과 넋인 선배(仙人) ‧ 선배정신(仙人精神) ‧ 선배사상(仙人思想)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과거 단군조선(후 삼한 포함) - 삼국시대(가라포함 사국) - 고려 중기까지의 강성했던 배달겨레의 영화를 되찾기 위해서는 우리 겨레의 얼과 넋인 선배(仙人) ‧ 선배정신(仙人精神) ‧ 선배사상(仙人思想)을 되살려야 할 것이다.

이렇게 강력한 겨레의 얼과 넋인 선배(仙人) ‧ 선배정신(仙人精神) ‧ 선배사상(仙人思想)이 사라지게 된 원인과 그 과정 그리고 시대적 배경을 알아보기로 하자.

  
1) 삼국시대중기(三國時代中期) 도입(導入)된 외래사상(外來思想) 불교(佛敎)

삼국시대중기 외래종교인 불교가 도입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전편에서 알아봤기에 이번 편에서는 간단하게 알아보기로 한다. 일반적(一般的)으로 불교의 도입이 우리 겨레에게 있어서 부정적(否定的)인 영향(影響)을 미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우리 겨레의 얼과 넋에 가장 먼저 악영향(惡影響) 준 것이 바로 불교이다. 물론 단군조선시기 심각한 화하 족(和夏族)과 제1차 치열한 사상투쟁(思想鬪爭)이 있었다. 이 시기 화하 족과의 심각한 사상투쟁은 당시 단군조선의 국력이 워낙 강력했기에 우리 겨레의 얼과 넋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당시 배달겨레와 화하 족과의 사상투쟁의 결과 우리 겨레에게는 전혀 그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다만 이민족인 화하 족 일부에게는 그 영향을 미쳤다. 본 문제는 다음 편에서 다루게 된다. 또 후일 많은 자료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단재 선생의 자료도 함께 비교분석하게 될 것이다.

  
① 고구려(高句麗)에서 불교(佛敎)의 도입(導入)

「삼국사기」에 “ 2년(372년) 여름 6월, 진왕(秦王) 부견(符堅)이 사신과 중 순도(順道)를 시켜 불상(佛像)과 경문(經文)을 보내오자, 왕은 사신을 보내어 회사(回謝 - 감사를 보내었다.」하고 토산물(지방특산물)을 전하였다. 〈二年 夏六月 秦王符(符 舊本作符 今校之)遣使及浮屠順道 送佛像一經文 王遣使廻謝 以貢方物, 이년 하 유월 진왕부(부 구본작 금교지)견사급부도순도 송불상일경문 왕견사회사 이공방물〉 ”라고 기록이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에서는 불교가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년)에 공식적으로 도입된 것으로 본다.

“소수림왕 4년 중 아도(阿道)가 왔다고〈四年 僧阿道來(승아도래)〉 ” 기록되어있다. 또 “소수림왕 5년 봄에 초문사(肖門寺)를 지었고, 중 순도(順道)머물게 하고, 이불란사(伊佛蘭寺)를 개창하여 아도를 머물게 하니, 이것이 해동불법(海東佛法)의 기초였다. 〈五年 春二月 始創肖(肖 海東高僧傳作省)門寺 以置順道 又創伊佛蘭寺 以置阿道 此海東佛法之始, 오년 춘 이월 시창 초(초해동고승전작성)문사 이치순도 우창이불란사 이치아도 차해동불법지시〉 ”라고 기록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소수림왕 2년 불교가 도입된 이후 본격적으로 불교가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여 진다.

고구려에서는 불교가 도입이 되는 과정에서 큰 갈등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가 도입되는 것에 대해서 고구려에서는 크게 저항을 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우리 겨레의 얼과 넋인 선배(仙人) ‧ 선배정신(仙人精神) ‧ 선배사상(仙人思想)과 큰 갈등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

고구려에서 우리 겨레의 전통사상과 외래사상인 불교가 도입되는 과정에서 큰 갈등이 없었다는 것은 당시 고구려에는 단군조선부터 2700여년 이상 이어져 내려온 선배(仙人) ‧ 선배정신(仙人精神) ‧ 선배사상(仙人思想)이 워낙 강력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우리의 전통적인 사상인 선배(仙人) ‧ 선배정신(仙人精神) ‧ 선배사상(仙人思想) 워낙 강력하게 자리를 잡고 있으니 외래 사상인 불교정도가 도입이 된다 해도 고구려사회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본다. 

실제 고구려에서는 불교가 도입이 된 이후에도 선배(仙人) ‧ 선배정신(仙人精神) ‧ 선배사상(仙人思想)가 고구려를 지키는 가장 강력한 지주(支柱)였다. 고구려가 무너지는 순간까지도 고구려는 침입한 외적에 대한 방어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영웅들 대부분 「선배」들이었다. 이는 고구려에 불교가 도입이 되었어도 불교가 고구려에 미치는 영향이 그리 컸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물론 이에는 불교의 유연성도 일조를 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② 백제(百濟)에서 불교(佛敎)의 도입(導入)

백제(百濟)에서 불교(佛敎)가 도입(導入)된 것은 고구려(高句麗)보다 12년 후인 384년 백제(百濟) 침류왕1년(枕流王 1년, 384년) 이었다. 「삼국사기」에 “ 九月. 胡僧摩羅難陀自晉至. 王迎致宮內禮敬焉. 佛法始於此. 二年春二月. 創佛寺於漢山. 度僧十人. (구월. 호승마라난타자진지. 왕영치궁내예경언. 불법시어차. 이년춘이월. 창불사어한산. 도승십인) 〈 → 구월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진晉에서 들어왔다. 이에 임금이 맞아들이고 궁성 내에 예를 다해 극진히 대접하였다. 이것이 불법의 시작이었다. 이년(385년). 봄 이월 한산(漢山)에 사찰을 창건하고 도승(度僧) 십명을 두었다 〉 ”라고 기록되어있다. 이로 미루어 백제(百濟)에서는 침류왕(枕流王) 1년(384년)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도입이 된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막론하고 공식적으로 어떤 사상(思想)이 도입되기 전에 구전(口傳) 혹은 설화(說話)들을 통해서 민간에 회자가 된다. 그렇다고 이를 그 나라 사회에 공식적으로 도입이 되었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백제에서도 불교를 공식 도입을 한 것은 침류왕(枕流王) 1년(384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침류왕이 중 마라난타(摩羅難陀)를 친히 맞아들이고, 궁성 내(宮城內)에서 예(禮)와 존경(尊敬)을 다해 극진히 대접(삼국사기 해설서들을 보면 모셨다고 했는데 이는 별로 권장할 할만한 해석이 못되는 것으로 필자는 본다. 이는 새로운 사대주의적 해석이기 때문이다. )을 하였다는 걸 보면 이때 국가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중시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백제에서는 침류왕(枕流王) 1년(384년)에 공식적으로 도입이 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삼국사기에 “백제(百濟) 침류왕(枕流王) 2년(385년)에 한산(漢山)에다가 절을 짓고 중 십 명을 두었다.”는 기록으로 봐서는 이때부터 백제에서는 불교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도입이 되었다고 해서 일반 백성들이나 온 나라가 모두 불교를 신봉했다거나 신앙으로 믿었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종교, 사상, 철학 등이 공식적으로 도입이 되었다는 것은 그 시점에 처음 소개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이다.

침류왕(枕流王) 1년(384년) 백제(百濟)에 불교(佛敎)가 공식적(公式的)으로 도입이 되고, 침류왕(枕流王) 2년(385년) 한산(漢山)에 절을 짓고 중 열 명을 두는 등 본격적으로 불교가 활동을 할 수 있는 보장을 나라에서 해주었다. 

백제에서도 고구려에서와 마찬가지로 불교가 도입되는 과정과 포교과정(布敎過程)에서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저항(抵抗)을 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에서와 마찬가지로 백제에서도 불교가 도입되고 포교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고 해서 백제에서도 우리 겨레의 얼과 넋을 버리고 외래사상인 불교를 숭배했다거나 믿었던 것은 아니다. 백제 역시 불교를 받아들여도 우리의 얼과 넋이 워낙 강고해서 우리 얼과 넋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다고 여겼기에 저항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은 분석일 것이다.

  
③ 신라(新羅)에서 불교(佛敎)의 도입(導入)

신라(新羅)에 불교(佛敎)가 공식적으로 인정이 된 것은 삼국 중 가장 늦은 법흥왕(法興王) 15년(527년)이다. 물론 눌지왕 때에 고구려로부터 전해졌다는 설도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법흥왕 15년인 527년이다. 신라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고구려 보다 55년 늦었고, 백제 보다는 43년이나 늦었다. 앞선 장에서 간단히 언급을 했듯이 이는 신라가 삼조선(三朝鮮) 중 단군조선의 가장 으뜸인 신한(辰韓)을 이은 나라로서 겨레의 얼과 넋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강력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으로 본다. 그 일단을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서 보기로 하자.

“ 十五年. 肇行佛法. ~中略~ 至毗處王時. 有阿道(一作我道)和尙. 與侍者三人. 亦來毛禮家. 儀表似墨胡子. 住數年. 無病而死. 其侍者三人留住. 講讀經律. 往往有信奉者. 至是 王亦欲興佛敎. 群臣不信. 喋喋騰口舌. 王亂之 ” 

“십오년. 조행불법. ~중략~ 지비처왕시 유아도(일작아도)화상. 여시자삼인. 역래모례가. 의표사묵호자. 주수년. 무병이사. 기시자삼인유주. 강독경율. 왕왕유신봉자. 지시 왕역욕흥불교. 군신불신. 첩첩등구설. 왕란지 ”

  
❀❀❀ 해제 ❀❀❀

십오 년 비로소 불법(佛法)을 시행하였다. ~중략~ , 비처왕(毗處王: 이두로 부여임금. 비처= “밝”임) 때 아도(阿道: 我道라고도 함)라는 승려가 제자 3명과 함께 역시 모례의 집에 왔었는데, 그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다. 그는 몇 년을 머물러 있다가 병든 바도 없이 죽었고, 그 제자 3명은 그대로 남아 있어 경률(經律)을 강독하니(가르치니) 신봉자가 때때로 있었다. 이에 와서 왕(法興王)도 역시 불교를 흥기(興起)시키려 하니 여러 신하가 믿지 않으며 말썽을 부리자 왕이 난처하게 여겼다.

본 「삼국사기」에서 보듯이 신라에서는 법흥왕 15년 공식적으로 불법을 시행을 함으로서 국가적으로 불법을 받아들였다. 물론 「삼국사기」에 보면 “ 눌지왕 시대에 묵호자(墨胡子)라는 승려가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善山)으로 오니, 군민 모례(毛禮)가 자기 집에 토굴을 방을 만들고 거기 머물게 하였다”라고 하여 법흥왕 15년 이전에 이미 비공식적으로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본 글에서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을 한 법흥왕 15년 (527년)을 불교가 신라에 공식적으로 도입이 된 것으로 보기로 한다.

위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듯이 신라에서는 법흥왕이 불교를 부흥시키려고 하자 신하들의 반발이 심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즉 “ 왕(法興王)도 역시 불교를 흥기(興起)시키려 하니 여러 신하가 믿지 않으며 말썽을 부리자 왕이 난처하게 여겼다.” 고 하여 신라에서는 불교 도입이 공식적으로 공인이 되고, 임금이 불교를 부흥시키려고 하자 신하들이 매우 심하게 반발을 하자 임금이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고 하여, 불교를 공인했다고 해도 불교를 받아들이는데 강한 반발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는 전편에서도 보았듯이 신라는 단군조선의 삼한 중 【임금】이 머물러 있었던 신한(辰韓)을 이었기에 우리 겨레의 전통사상인 선배(仙人) ‧ 선배정신(仙人精神) ‧ 선배사상(仙人思想) ‧ 화랑(花郞)을 가장 강력하게 고수를 하려는 사회적 전통이 있었기에 불교를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이 컸을 것으로 본다. 

신라에서 불교에 대한 저항이 얼마나 거셌는지 「삼국사기」를 통해 보기로 하자.

“近臣異次頓(惑云處道). 秦曰. 請斬小臣. 以定衆議. 王曰. 本欲興道. 而殺不索非也. 答曰. 若道之得行. 臣雖死無憾. 王於是. 召群臣問之.儉曰. 今見僧徒. 童頭異服. 議論奇言+危. 而非常道. 今若縱之. 恐有後悔. 臣等雖卽重罪. 不敢奉詔. 異次頓獨曰. 今群臣之言非也. 夫有非常之人. 然後有非常之事. 今聞佛敎淵奧. 恐不可不信. 王曰. 衆人之言.牢不可破. 汝獨異言. 不能兩從. 遂下吏將誅之. 異次頓臨死曰. 我爲法就刑. 佛若有神. 吾死必有異事. 及斬之. 血從斷處湧. 色白如乳. 衆怪之. 不復非毁佛事 ” 

“근신이차돈(혹운처도). 진왈. 청참소신. 이정중의. 왕왈. 본욕흥도. 이살부색비야. 답왈. 약도지득행. 신수사무감. 왕어시. 소군신문지. 검왈. 금견승도. 동두이복. 의논기궤. 이비상도. 금약종지. 공유후회. 신등수즉중죄. 불감봉소. 이차돈독왈. 금군신지언비야. 부유비상지인. 연후유비상지사. 금문불교연오. 공불가불신. 왕왈. 중인지언.뢰불가파. 여독이언. 불능양종. 수하사장주지. 이차돈임사왈. 아위법취형. 불약유신. 오사필유이사. 급참지. 혈종단처용. 색백여유. 중괴지. 불복비훼불사 ” 

  
❀❀❀ 해제 ❀❀❀

근신 이차돈(異次頓: 처도處道라고도 함)이 아뢰기를 ” 소신(小臣)을 배어 중의(衆議)를 일정케 하십시오.” 하니 왕은 “ 도를 일으키자는 것이 근본인데 무죄한 사람을 죽인단 말이오?” 하자, 이차돈은 “ 만일 도(道)만 행하게 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습니다.” 하였다. 왕은 이에 여러 신하를 불러 물으니 모두 하는 말이 “요새 보면 소위 승려란 것들이 머리 깎고 검정 옷을 입고 의론이 기괴합니다. 이는 상도(常道)가 아니니 지금 만약 버려두면 후회가 있을지 모릅니다. 신 등은 중죄(重罪)를 입는 한이 있더라도 감히 명령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하였다. 그런데 이차돈만은 “지금 여러 신하들의 말이 옳지 못하오. 무릇 비상한 사람이 있은 연후에 비상한 일도 있는 것이거늘, 듣건데 불교는 이치가 깊다 하니 믿어야 될 줄 아오.” 하였다.

왕은 “ 여러 사람의 말이 일치되어 깨뜨릴 수 없는데 그대 홀로 딴 말을 하니 양편을 들어 줄 수는 없소.”하고 드디어 형리(刑吏)를 시켜 목을 베게 하였다. 이차돈이 죽음에 다다르자 “나는 불법을 위해 형을 받으니 불도가 신령하다면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으리라.”하였다. 급기야 목을 베자 피가 솟는데 흰 젖과 같으므로 여러 사람이 보고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교를 비방하지 않았다.

위 「삼국사기」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신라에 불교가 도입되는 과정에 커다란 저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나 백제에는 불교가 도입되는 과정에 별다른 저항이 기록되어있지 않다. 물론 「삼국사기」가 고구려나 백제에 관한 자료들을 제대로 참고를 하지 않고 저술이 되었다는 문제는 사가들이 일찍부터 제기해오던 바이다. 혹 이런 이유로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불교가 도입되는 과정에 저항이 있었는데 현재 우리가 참고를 할 수 있는 자료에서는 그러한 기록을 볼 수가 없는 것은 아닌가 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그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없으니 더 이상 언급을 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필자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저항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다만 그 기록이 전하여지지 않았을 뿐이다. 고구려에 관한 역사적 자료가 사라진데 대해서는 우리 역사 이야기 제1편에서 다루었다. 단재 선생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 한탄을 하였다. 본 문제도 단재 선생의 상 ‧ 고대사에 대한 인식에서도 다룰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김부식이 유교도적인 입장에 서서 우리 겨레의 전통적인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전통 등에 대해서는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고 한탄을 하였다. 아마도 신라에 대한 우리 겨레의 얼과 넋에 대한 자료는 왜곡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위 「삼국사기」에 나오는 “ 요새 보면 소위 승려란 것들이 머리 깎고 검정 옷을 입고 의론이 기괴합니다. 이는 상도(常道)가 아니니 지금 만약 버려두면 후회가 있을지 모릅니다. 신 등은 중죄(重罪)를 입는 한이 있더라도 감히 명령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위 문장은 참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다. 위 내용을 보면 고구려의 「선배」들의 복장이나 외양과 똑같은데 <승려>라고 한 점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아마도 당시 신라의 화랑들이 고구려의 「선배」들과 같은 복장과 외양을 하고 수련을 했을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두고 김부식이 「선배」라고 기록을 하지 않고 마치나 승려들이 「선배」들과 같은 복장과 외양을 하고 있는 것처럼 기록을 하지 않았나 한다. 

신라에 비공식적으로라도 불교가 신라에 처음 전파가 된 것은 법흥왕 15년으로 기껏해야 20여 년 정도밖에 안되는데 승려들이 우리 겨레의 얼과 넋을 지켜나가던 「선배」와 같은 복장을 하고 외양을 하였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 더구나 외래 사상 혹은 종교가 들어와서 자신들이 2500 여년을 지켜온 「선배」들의 복장과 외양을 모방하였다면 아마도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단군조선의 정통인 신한을 이은 신라가 이에 대해 상기 기록과 같은 정도로 지나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마도 「삼국사기」가 왜곡 축소를 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차돈이 자기 몸을 던져서 불교를 도입하려 하였다는 것 역시 그다지 미덥지 못하다. 혹시 역으로 이차돈이 조선의 얼과 넋을 지키고자 자신의 몸을 던지지는 않았는가 하는 의문을 들게 한다. 물론 위 기록대로라면 이차돈은 외래종교인 불교를 도입하고자 자신의 몸을 던진 것으로 해석이 된다.

여하튼 위 기록으로 보면 불교가 도입되는 과정에서 신라가 삼국 중 가장 커다란 저항이 있었으며, 이에 따른 사회적 혼란도 조성이 되어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기 불교가 도입되면서 신라만 유독 거세게 저항을 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분석일 것이다. 우리 겨레의 얼과 넋과는 다른 외래 종교, 사상에 대해 저항이 거세게 있었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이에 대해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불교가 바로 우리 겨레의 전통사상인 삼신사상(三神思想)을 대체하지 못하고, 오히려 흡수가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현재 오래된 절간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본래 〈굿〉을 하던 〈굿당〉이 있었던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는 절간 가장 윗자리에 자리 잡고 있는 〈삼신각〉 〈삼성각〉 〈칠성각〉 등등의 이름으로 지어진 누각들이 있다. 이는 바로 불교가 우리 전통사상인 〈삼신사상〉을 대체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흡수가 되었다는 증거가 된다.

또 절간을 가서 자세히 살펴보면 불교 본래의 사상을 전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우리 전통사상을 종교적 상징으로 내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삼신이 불상을 둘러싸고 있는 것과 같은 면들이 있기는 하다. 이는 역시 일정 정도 우리 전통사상이 불교에 의해서 침탈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 문제 역시 추후 상세할 것이다.

  
2)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이 본 「선배」 ‧ 「화랑」의 쇠퇴(衰退) ‧ 몰락(沒落)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우리의 얼과 넋인 「선배」 가 사라지게 된 주요인은 우리의 전통사상과 외래사상과의 투쟁에서 밀려났기 때문으로 본다. 그것도 이민족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겨레 내부에서 외래사상을 추종하는 세력과 자신의 얼과 넋을 고수하고 전진하고자 하는 세력 간의 투쟁에서 패했기 때문에 우리의 「선배」 가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다. 

❝ 민족의 성쇠(盛衰)는 항상 그 사상(思想)의 추향(趨向: 추세)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으며, 사상의 추향이 혹 좌(左) 혹 우(右)로 되는 것은 언제나 어떤(某種)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그러면 조선 근세(近世) 사건(事件)에 종교나 학술이나 정치나 풍속이 사대주의(事大主義)의 노예가 된 것은 어디에 그 원인이 있는가? ❞

단재 선생도 민족의 흥망성쇠는 항상 그 사상의 방향성(趨向)이라고 진단을 하고 있다. 한 나라 혹은 민족의 전도(前途)는 그 나라나 겨레가 공유하고 있는 일정한 사상의 공고성에 그 운명이 달려있다고 본다. 위 단재 선생도 그 나라나 겨레가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는 관건은 다름 아닌 종교, 학술, 풍속, 정치등과 같은 보이지 않으나 분명하게 존재를 하는 사상성에 있다고 하였다. 

한 나라 혹은 겨레가 유지되고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다름 아닌 그 나라나 겨레가 일정하게 공감을 하는 사상이 공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한다. 그건 다름 아닌 자신의 나라나 겨레가 면면히 이어온 독자적인 사상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외래 사상이 우수하다고 해도 그 사상이 우리 겨레의 얼과 넋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겨레의 얼과 넋을 좀 먹고 녹을 슬게 만듦으로서 결국에는 나라가 망하고 겨레가 사라지는 비운을 겪게 되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바로 이 점을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 겨레의 오랜 전통적 사상으로 나라를 유지 발전시키며 겨레의 융성번영을 가져왔던 「선배사상」을 옹호고수 해왔는지 아니면 사라졌는지에 따라 우리 겨레의 운명이 갈라졌다고 보고 있다. 바로 위 문장은 이 점을 논증하기 위해서 운을 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한 나라나 겨레의 사상이 사라지게 된 원인 더 정확히는 단군조선 이후 수천 년 동안 이어왔던 「선배」 가 어떤 사건이나 배경으로 그 맥이 끊기게 되었는지 단재 선생의 고증을 통해서 보기로 하자.

❝ 무슨 사건이 앞에서 말한 종교 ‧ 학술 ‧ 정치 ‧ 풍속 ‧ 각 방면에서 노예성(奴隸性)을 만들어 내었는가?

나는 한 마디로 대답하기를, 고려 인종(仁宗) 13년 서경(西京)전쟁, 즉 묘청(妙淸)이 김부식(金富軾)에게 패한 것이 그 원인이라고 한다. ❞

바로 위 두 문장이 단군조선 이래 수천 년 이어온 우리의 얼과 넋인 「선배」 가 사라지게 된 이유와 결론을 내린 것이다. 단재 선생은 위 두 문장으로 오늘날 배달겨레가 가지고 있는 첨예한 모순까지도 한꺼번에 설명을 하고 있다. 물론 단재 선생이 생존해 있던 그 시기의 모순을 명쾌하게 논증을 한 것은 더 말 할 필요가 없다.

이제 단재 선생이 두 문장으로 결론을 내린 문제들에 대해서 좀 더 상세하게 시대적 배경과 사건의 전말을 통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① 삼국시기(三國時期) - 랑(郞) ‧ 유(儒) ‧ 삼가(三家)의 원류

(一) 랑(郞)의 원류

❝ (一) 「랑(郞)」은 곧 신라의 화랑(花郞)이니, 화랑은 본래 상고(上古)시대 소도제단(蘇塗祭壇)의 무사(武士), 곧 「선배」라 불렀던 것인데, 고구려에서는 조의(皂衣: 선배나 소선배는 흰 옷에 검은 비단 띠를 두른 복장을 하였고, 대선배는 검은 옷을 입었다.)를 입었으므로 「조의선인(皂衣仙人)」이라 하였고, 신라에서는 그 미모(美貌)를 취하여 「화랑(花郞)」이라 하였다. 화랑을 국선(國仙) ‧ 선랑(仙郞) ‧ 풍류도(風流徒) ‧ 풍월도(風月徒) 등으로도 불렀다. ❞

위 문장은 앞선 장들에서 상세했기 때문에 굳이 장황하게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된다. 혹 의문을 가지는 독자들이 있다면 〈우리 역사 이야기-7〉부터 정독해보기를 권한다. 다만 여기서는 랑(郞)의 원류에 대해서 설명을 한 것이니 간단히 올려준 것이다.

 (二) 유(儒)의 원류

❝ 「유(儒)」는 공자(公子)를 받들어 모시는 자들이다. 이전의 사가(史家)들은 항상 존화주의(尊華主義 화하족을 높이 받드는 주의)에 취하여 역사적 사실까지 위조해 가면서 마치 태고(太古)부터 유교적 교의(敎義)가 조선에 널리 퍼졌던 것처럼 말하였으나, 「왕(王-임금)」을 「비치 –빛, 광명, 하늘의 뜻, 전편들에서 설명했음)」나 「불구레- 이 역시 빛, 광명, 하늘의 뜻」이라 부르고, 관직 명칭을 「말치」나 「쇠뿔한 –신라의 각간, 불한 역시 밝은, 밝한이다」등으로 짓던 시대에는 공자(公子) ‧ 맹자(孟子)의 이름조차 들어본 사람이 전국에 몇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대개 유교는 삼국 중 ‧ 말엽부터 그 경전(經傳)이 얼마큼 수입되어 예(禮)를 강의하고 춘추(春秋)를 읽는 이들이 있어서 그 뿌리를 박게 되고, 고려 광종(光宗) 이후에 점차 성행하여 사회사상에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

우리는 제도권교육을 담당하는 학교나 혹은 언론 출판물들을 통해서 유교 혹은 유교적 전통이라는 말을 들어왔을 것이다. 필자 역시 이에 대해 세뇌가 되다시피 하였다. 지금도 걸핏하면 「유교적 전통」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마치나 우리 겨레에게는 전통의 사상도 종교도 풍습도 없었던 것처럼 몰아가고 있다. 우리 자신들이 그러니 외국인들이야 말 해 뭘 하겠는가. 하지만 단재 선생이 고증을 하듯이 유학은 배달겨레에게 전해진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삼국 중 ‧ 말엽부터라고 하니 이제 기껏해야 1200~1300여년 정도 되었다. 또 어떤 사상이 전해졌다고 해서 그 사상이 온 나라 온 겨레가 일순간 모두 다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유교가 우리에게 전해진 초기에는 그 영향력이 미미하였다. 당시까지만 하여도 우리의 전통사상인 삼신사상(三神思想) 혹은 삼사상(三思想)이 워낙 강고했고 또 당시 불교도 도입이 된 터라 유교 혹은 유학은 그다지 배달겨레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하지만 고려 광종 때에 이르러서는 우리의 정통사상인 삼신사상(三神思想)에 기반을 두고 있는 「선배」의 퇴조와 때를 같이해서 유교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이 부분은 뒤에서 논한다.

(三) 불(佛)의 원류

❝ 「불(佛)」은 인도로부터 지나를 거쳐 조선에 수입된 석가(釋迦)의 교(敎)이니, 삼국 말엽부터 성행하여 조정이나 민간에서 모두들 숭배하였다. 불교는 비록 세상일과는 관계가 없는 출세(出世 - 세속을 떠남)의 종교이지만, 그 교도들이 문득 정치상의 지위를 갖게 된 것이다.

당초에 진흥대왕(眞興大王)이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 만세(萬世)의 계책(計策)을 장하면서, 각 교(敎)의다툼과 반목(反目)을 염려하여 유(儒) ‧ 불(佛) 양교는 평등하게 대우하고, 화랑(花郞)은 세 교(敎)의 교지(敎旨)를 포함한 것이라 하여 각 교(敎)의 윗자리에 자리하게 하고, 각 교도 사이의 상호 출입(出入)을 허용하였다.

그래서 신라사를 보면 전밀(轉密: 김흠운전金欽運傳에 그 이름이 나옴-원주)은 유교도이다가 불가의 중(僧)이 되고, 후에 다시 화랑 문노(文努)의 제자가 되었으며, 안상(安詳: 〈삼국유사〉 백율사栢栗寺에 보임 – 원주)은 화랑인 영랑(永郞)의 고제(高弟)로서 승통(承統)을 이어 국사(國師)가 되었으며, 최치원(崔致遠)은 유(儒) ‧ 불(佛) 양교에 출입하는 동시에 또한 화랑도의 대요(大要)를 섭렵하였다. ❞

본 문장 역시 불교의 도입부분은 이미 설명이 되었기에 상세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삼국 중(中) ‧ 말엽(末葉)에는 랑(郞) ‧ 유(儒) ‧ 불(佛) 삼교가 아무런 장벽이 없이 받아들이고 믿었다는 것이다. 즉 화랑이 중도 되고 유교도가 되었으며, 중도 화랑이 되고 유교도도 되었다는 점이다. 유교도 역시 화랑도를 숭상하였으며 불교도 믿었던 것이다. 

이처럼 삼국 중 혹은 말엽시기 삼교는 전혀 폐쇄적이지 않았으면 상호 개방이 되어 아무런 갈등 없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믿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불교나 유교가 우리 겨레에게 받아들여짐으로서 우리 겨레의 전통 사상인 「선배사상=삼신사상」이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정 정도 외래 사상인 불교와 유교에 의해 우리의 전통사상인 「선배사상=삼신사상」이 침탈을 당하게 되기 시작하는 시기라고 보는 것은 타당할 것이다. 

❝ 대저 이 선교(仙敎)는 삼국시대에는 불교와 격렬한 경쟁을 하였었다. 그러므로 불교가 처음 수입되자 신라의 군신(君臣)들이 모두 그것을 이도(異道)라고 배척하였으며(고구려와 백제는 사서의 기록이 없어 고찰할 수 없다 – 원주), 이차돈(異次頓)이 불교를 널리 퍼뜨리고자 할 때에는 심지어 자기 몸까지 희생하였던 것이다. ❞

본 문장은 아무리 외래 사상이 들어왔을 때 개방적이고 열려 있다고 하더라도 전통사상과 충돌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위 단재 선생이 고증한 것 뿐 아니라 「삼국사기」에서도 불교가 신라에 도입이 되었을 때 대부분의 신하들이 이를 배척하였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오죽하면 임금이 난처한 상황에 빠졌으며 이차돈이 자신의 몸을 바쳐가면서 불교를 받아들이라고 하였겠는가. 그것은 임금도 어쩌지 못하고 불교도들 역시 어쩌지 못하는 상황이 불교 도입과정에서 발생한 우리의 전통 사상인 「선배 ‧ 화랑」의 사상과의 대충돌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우리 겨레의 얼과 넋을 굳건히 지켜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다.

모든 외래사상이라는 것이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식으로 서서히 자신들의 사상이 외래 사상에 물들어가게 되어있다. 무려 3000여년을 이어온 우리 겨레의 얼과 넋인 「선배사상=삼신사상」은 결국 삼국시대 중 ‧ 말엽부터 불어 닥치기 시작한 외래사상인 불교와 유교에 의해서 서서히 침탈‧ 쇠퇴 ‧ 몰락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래는 이를 잘 증명해주는 글이다.

❝ 그리하여 신라 말 고려 초에 불교가 대성(大盛)하게 되자 마침내 선교(仙敎)는 멸절(滅絶)하였으니, 이는 그 교리(敎理)의 조직이 정밀하고 심오하지 못하여 우승열패(優勝劣敗)라는 역사 발전의 공례(公例)를 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혹시 선교의 교리가 당시의 시세(時世)와 인심에서 멀어져서 자연히 쇠미해져 끊어져버린 것인가?❞

「선배사상」으로 강력하게 무장을 한 우리 겨레는 무려 2300여년 혹은 3100여년(북한 사학계 고증 년대) 단군조선도 결국 세월의 흐름에는 어쩌지 못하였는지 단군조선 중기 이후 강력했던 삼한이 아주 천천히 분립이 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결국 한 나라가 서서히 분립이 되어 진다는 것은 그 사상성이 분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군조선의 「선배사상」 역시 화하 족에게서 첫 번째로 강력하게 도전을 받았으며(후일 상세예정), 그로 인해 아시아의 광대한 강역과 강력한 국력을 가졌던 단군조선이 사상의 분열과 동시 강역의 분열 및 축소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삼국시기 중‧ 말엽부터는 또 다른 외래 사상인 불교의 도전을 받았다. 이 도전으로 우리 겨레에게는 전통사상과 외래 사상이 혼재하는 혼돈의 사회가 시작이 된 것이다. 또한 화하 족의 사상인 유교의 도입은 우리의 전통사상에 있어서는 치명적인 것이 되었다. 이 문제는 아래에 기재를 한다.

  
② 고려시기(高麗時期) 랑(郞) ‧ 유(儒) ‧ 불(佛) 삼교(三敎)의 투쟁(鬪爭)

우리 겨레의 얼과 넋이며 나라와 겨레를 지켜오던 「선배사상」은 삼국시대 중‧말기부터 외래 사상의 침투로 점점 쇠퇴를 하기 시작하였다. 고려시기 중기에 이르러 화하족의 사상인 유교사상을 신봉하던 무리들과의 대투쟁에서 패하게 됨으로서 그 명을 다하게 된다. 우리 겨레에게 있어서 「선배사상」이 퇴조 ‧ 몰락을 하고 왜래 사상인 유교사상이 지배를 하게 됨으로서 단군조선시기부터 이어오던 찬란했던 역사 역시 서산일락의 운명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우리 겨레의 얼과 넋인 「선배사상」의 퇴조는 우리 겨레에게 있어서 시련의 시대를 살아올 수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고려시대 몽고의 침략을 받아 민족이 수난을 당하였으며, 조선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을 거치면서 겨우 겨우 배달겨레로서의 명을 지켜오던 우리 겨레는 19세기 말에 이르러 겨레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서게 되었으며, 결국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강압에 의해 체결이 되었으며 명목상으로 유지되던 〈대한제국〉은 1910년 기만적인 〈한일합병조약〉에 의해 민족의 역사 이래 최대의 수난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 수난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우리 겨레에게 있어서 겨레의 존망을 가름하는 극한점에 서 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 겨레는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되는 최대의 위기상황에 빠져있다는 것을 독자들은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럼 그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단재 선생의 글을 통해서 보기로 하자.

❝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불교를 국교(國敎)로 삼고 유교와 화랑도 또한 참용(參用: 함께 이용함)했는데, 그 후의 왕들에 이르러서는 흔히 지나를 받들어 높이고 흠모하여, 광종(光宗)은 지나의 남방 사람인 쌍기(雙冀)를 등용하여 과거제도(科擧制度)를 도입하고 더욱 유학(儒學)을 장려하였다. 만약 유교의 경전(經傳)을 잘 아는 지나인이 오면 대관(大官)을 시켜주고 후한 봉록(俸祿)을 주고, 또 신하들의 좋은 집을 빼앗아 준 일까지 자주 있었다.

성종(成宗) 때에 이르러서는 최승로(崔承老)등 유자(儒者)를 등용하여 재상(宰相)을 삼아 화랑 교도나 불교도들을 모두 압박하고 오직 유교만을 받들어 존숭(尊崇)하기에 이르렀다. ❞

고려초기까지만 하여도 화랑, 불교, 유교가 동등한 대우를 받았으나, 광종(재위: 949년~975년)에 이르러서는 유교를 우대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우리의 「선배사상」은 그 설자리가 사실상 없어지게 된 것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학교교육에 있어서는 광종이 지나의 과거제도를 받아들임으로서 마치나 선진적인 제도를 도입하여 나라가 후진국에서 선진국이 된 듯이 묘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실제로는 우리 겨레의 얼과 넋이 외래 사상에 의해서 침탈을 당한 사변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우리 자신의 얼과 넋이 침탈을 당하고 남의 얼과 넋으로 살아가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교는 원래 세상을 벗어난 교(敎)일 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 수입되더라도 항상 그 나라의 풍속 습관과 잘 타협하고 다른 교(敎)를 심하게 배척하지 않지만, 유교는 ~중략~ 전도(傳道)되는 곳에는 반드시 표면까지의 동화(同化)를 요구하면서 타교(他敎)를 매우 심하게 배척한다. 그 때문에 이때의 유교 장려에 대하여 화랑파와 불교 파 사람들이 불평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국 인민들도 그것을 못마땅해 하였다.❞

현대 사회를 보더라도 불교는 비교적 한 사회와 융화를 잘 하는 편이다. 현대 세계를 보더라도 불교의 교파에 의해서 전쟁을 한다거나 살상을 하는 것은 없다. 반면 유교는 속뿐만 아니라 겉까지도 뒤바꿀 것을 강요한다고 단재 선생은 말하고 있다. 물론 단재 선생이 20세기 중엽을 지나 21세기에 이른 오늘 날의 대한민국의 사회를 보면 위에서 논한 유교의 배타성은 감히 말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본 문제(서양의 기독교)는 단재 선생이 다루지 않았기에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기로 한다. 

어찌 되었건 단재 선생은 랑(郞) ‧ 유(儒) ‧ 불(佛) 삼교(三敎)를 가지고 비교를 했기에 세 교(敎) 중에서는 유교(儒敎)가 가장 배타적이고 타 사상을 포용할 줄 모르는 협소한 교(敎)라고 논증을 하고 있다. 이는 고려시대 자체에 대해서보다는 후조선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결국 고려시기 외래 사상인 유교를 본격적으로 차용을 함으로서 우리 겨레의 얼과 넋이 사라지는 어리석음을 가져오게 되었다.

❝ 〈고려사〉와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의하면, 성종 12년에 거란 대장 소손녕(蕭遜寧)이 쳐들어와서 북쪽 변경을 공격하면서 또 격문(檄文)을 보내어 80만의 군사들이 장차 계속하여 쳐들어올 것이라고 공갈을 치자, 온 조정이 놀라서 겁을 먹고는 서경(西京) 이북을 잘라서 양보하고 화해를 애걸해 보자는 의론이 일어났는데, 그때 의연히 서희(徐熙) ‧ 이지백(李知白) 두 사람이 나서서 그것은 옳은 계책이 아니라고 논박하였다.

이지백이 건의하기를 “ 선왕(先王)의 연등(燃燈) ‧ 팔관(八關) ‧ 선랑(仙郞)등의 모임(會)을 회복하고 다른 나라의 이법(異法: 즉 유교)을 배척하여 국가 태평의 기틀을 보존하고, 신명(神明)에 고한 연후에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면 그때 가서 화의를 하더라도 늦지 않다.”라고 하였다. ❞

오늘 날 위 기록을 보면 정말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고 백이면 백 모두 비판을 할 것이다. 외적이 내 나라 내 땅을 침략하였는데 싸워보지도 않고 일정한 땅을 떼어서 준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옳은지 그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당시 고려 성종 때 소손녕(蕭遜寧)이 침략을 하고 고려를 위협하자 대부분의 조정의 신하들은 소손녕에게 땅을 떼어주고 화평을 구걸하자고 했던 모양이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기 그지없는 현상이다. 

하지만 오늘 날 우리는 과연 어떤지 냉철한 머리로 깊이 생각을 해봐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과연 오늘 날 우리는 고려 성종시기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서 성찰을 해야 한다. 물론 혹자들은 필자의 이 글을 읽으면서 펄쩍 뛸 것이다. 아니 혹자 뿐만 아니라 대부분은 필자의 이 글에 대해 동의를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무척이나 엄하고 냉철하며 객관적이다. 거란의 소손영 쳐들어 왔던 시기 땅을 떼어주고 화평을 구걸하자고 했던 무리들도 역시 그 당시에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을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지금 어떻게 평가를 하고 있는가? 이렇게 역사는 엄하고 냉철하며 객관적으로 평가를 내리게 되어있다. 우리 독자들은 이 점을 항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겨레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겨레의 얼과 넋을 굳건히 지켜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나마 위안이 되고 또 그 힘으로 배달겨레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와 문화를 꽃 피웠으며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위 글에서 대부분의 조정의 신하들이 땅을 떼어주고 화평을 구걸하자고 하였지만 서희 ‧ 이지백 같은 영웅들이 나서서 이를 강력히 비판을 한다. 또 이지백은 한 발 더 나아가서 외래 사상인 유교를 버리고 신명(神明 - 선배사상, 삼신사상)으로 국가 태평의 기틀을 잡고 보존을 하고자 강력히 건의를 한다. 이 말은 사라진 우리 겨레의 얼과 넋을 되살려서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나라를 강하게 일으켜가자고 건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지백은 “ 연등(燃燈) ‧ 팔관(八關) ‧ 선랑(仙郞)등의 모임(會)을 회복하고 다른 나라의 이법(異法: 즉 유교)을 배척 ”하자고 하여 우리 겨레의 얼과 넋은 어떻게 살려내고 나라의 태평을 이룰 것인지 그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 겨레의 얼과 넋을 유지 발전시켜온 【선배제도‧ 선배사상】을 완전하게 회복을 하자는 건의인 것이다.

이지백의 건의에는 당시에 우리 겨레의 얼과 넋을 버리고 외래 사상에 빠져서(사대주의) 외적이 침입을 함에 강력하게 나라를 지켜 싸우지 않고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하는 나약한 무리들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또 우리 전통의 정신인 화랑이나 비록 외래 사상이기는 하지만 불교를 배척하고 화하족의 사상인 유교를 받아들이고 존숭해왔던 성종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외적인 거란 소손녕의 침입에 대해 자주적으로 사고하고 나라를 지키고자 위와 같은 건의를 한 이지백은 우리 겨레의 자주정신의 표상이다. 자신의 얼과 넋으로 살지 않고 남의 얼과 넋으로 살아가는 넋 빠진 겨레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위 사건의 기록을 보면서 얻게 된다. 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뼈저리게 성찰하는 계기를 준다.

❝ 이 뒤로부터 조정에서는 논의하는 자들이 드디어 두 파(派)로 나뉘었으니, 화랑파는 언제나 국체(國體) 상으로는 독립 ‧ 자주 ‧ 칭제(稱帝: 고려의 임금을 제왕이라 칭함) ‧ 건원(建元: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을 주장하고, 정책상으로는 군사를 일으켜 북벌(北伐)을 하여 압록강 이북의 옛 강토를 회복하자고 힘껏 주창하였다.

이에 반하여 유가(儒家)들은 반드시 존화주의(尊華主義: 지나를 높이 받드는 것은 국시國是로 함)의 견지에서 국체(國體)는 지나의 속국(屬國)이라 주장하고, 따라서 그 정책은 비사후폐(卑辭厚幣: 지나에 대하여 말은 낮추어 하고, 조공朝貢은 많이 바침)로써 대국(大國)을 섬겨서 평화(平和)로 나라를 보존하고자 힘껏 주창함으로써, 피차 반대의 입장에 서서 항쟁(抗爭)하였다. ❞

참으로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기록이다. 필자가 본 글을 집필하면서 한숨이 절로 나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오늘 날의 우리 겨레의 입장과 어쩌면 이리도 부합을 하는지 신통하기만 하다. 둘로 갈라진 사상도 그렇고 그 사상을 지켜가는 얼과 넋도 어쩌면 이리도 신통한지 씁쓸해 하면서 글을 쓰는 손이 떨린다.

위 글에서 첫째 문단은 바로 자주정신을 강조하면서 우리 겨레의 얼과 넋을 굳게 지켜가자고 하는 화랑파 ‧ 선배사상을 주장하는 파들이고, 아래는 당시부터 존화주의에 빠져 사대사상의 극을 달리는 파들의 주의주장이다. 

단재 선생은 화랑파는 언제나 “ 국체(國體) 상으로는 독립 ‧ 자주 ‧ 칭제(稱帝: 고려의 임금을 제왕이라 칭함) ‧ 건원(建元: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을 주장하고 ”라고 하여 바로 우리의 얼과 넋을 굳건하게 지켜가고자 하는 파들은 언제나 화랑 혹은 선배사상을 존숭하는 파들이었다는 것을 고증하고 있다. 또 정책상으로는 “ 군사를 일으켜 북벌(北伐)을 하여 압록강 이북의 옛 강토를 회복하자고 힘껏 주창 ”하자고 하였다고 하여 화랑‧선배정신을 이어받은 파들은 군사적으로도 강력하게 무장을 하고, 또 강화된 무장을 통해 잃어버린 옛 강토를 회복하자고 주창을 하였다. 이것은 군사를 중시했던 「선배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무리(파)들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기록이다.

반면 유가(儒家)들에 대해서는 논한다는 것 자체가 후손된 입장으로 부끄럽기 그지없다. 마치나 현재 남쪽의 현실을 그대로 보는 듯하다. 역사는 반복이 된다고 하였던가. 큰 나라에 굴신‧ 굴종하면서 나라를 보존하고자 하고, 또 그 큰 나라에 대해서는 소리 한번 크게 내지 못하면서 아부나 하면서 평화를 지켜가자는 것이 제대로 된 나라인가 하는 반문을 안 할 수가 없다. 우리 겨레의 역사 1천여 년 만에 그대로 반복이 되는 것이 통탄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물론 우리 겨레는 현명하기에 우리 겨레에게 주어진 수난을 잘 극복하고 존엄 높은 민족으로 세계사에 우뚝 서리라는 기원(祈願)을 안고 본 글을 계속 써가고자 한다. 

❝ 예를 들면, 현종(顯宗) 말년에, 발해(渤海)의 중흥(中興)을 보조해 주어 거란을 쳐서 옛 강토를 회복하자는 주장을 한 곽원(郭元) 같은 사람이 있었던 반면에, 본토(本土)를 신중히 지켜서 생민(生民)을 보호하자는 최사위(崔士威) 같은 사람도 있었으며, 덕종(德宗) 초년에, 압록강의 다리를 없애버리고 억류된 우리나라 사신(使臣)의 회환(回還)을 거란에게 요구하다가 듣지 않으면 절교(絶交)를 하자고 주장한 왕가도(王可道)같은 사람이 있었던 반면에, 외교(外交)를 신중히 하여 전쟁이 없도록 하자고 주장한 황보유의(黃甫兪義) 같은 사람도 있었다. ❞

위는 화랑파(花郞派)의 자주적 외교와 군사를 이용한 나라의 존엄을 지키자는 주장을 한 구체적 실례를 들고, 반면에 사대주의 사상에 물들어서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외교를 하지 못하고 큰 나라에 주눅이 들어 자신들의 안위와 안전마저도 외세에게 구걸하거나 미적거리는 유학파들의 나약성을 본보기로 보여주는 글이다.

또 화랑 파들은 우리 겨레의 뿌리도 정확하게 인식을 하고 있다, 자신들과 한 겨레인 발해와 연합을 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잃어버린 옛 강토를 회복하자는 진취적인 주장을 하였다. 이는 잃어버린 옛 강토를 회복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땅에서 함께 살았지만 강토의 상실과 함께 갈라져 살아야 하는 아픔을 안고 있는 같은 겨레와 하나가 된다는 의미도 있다. 반면 유학파들은 그저 자신들이 현재 머물고 있는 터전만 잘 보전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하자고 하는 매우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유학파들은 잃어버린 옛 강토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으며, 또 그 강토에서 함께 살던 겨레들과 다시 하나가 되자는 의지도 없는 대단히 나약한 사대주의자들임을 단재 선생의 글은 준열히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 기타 고려조 역대 외교에서 매번 강력하게 자존(自尊)의 의견을 발표한 자들은 거의 화랑 파나 혹은 간접으로 화랑 파의 사상을 받은 자들이었고, 비사(卑辭 - 말을 낮춤)와 후폐(厚幣)의 사대론(事大論)을 고집한 자들은 대개 유교 도들이었다. 불교는 그 자체의 성질상 정치문제에 관하여 화랑파와 같이 격렬하게 계통적(系統的)인 주장을 갖지는 않았으나, 대개는 화랑파와 가까웠다. ❞

국체(國體)상 정책(政策)상 뿐 아니라 외교에서도 두 파들은 극명하게 주장이 갈리고 있다. 즉 화랑 파들은 주체적이고 자주적으로 외교를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을 하였다면, 유교도들은 언제나 큰 나라에 비굴하게 자신을 낮추고, 대국들의 요구를 후하게 들어주어야 한다는 사대주의사상에 찌들어 있었다. 현재 우리의 현실과 판박이처럼 맞아떨어지고 있다. 또한 고려시기 불교도들은 별다른 정치, 외교상으로 크게 주장을 하지 않았지만 비교적 화랑파와 가까웠다는 걸 보면 삼국중기 이후 우리 겨레에게 전파된 불교가 우리의 전통사상인 「선배사상」에 흡수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

불교가 우리의 전통사상인 「선배사상에 흡수되었다는 것은 아래 단재 선생의 글이 증명을 해준다.

❝ 팔관회(八關會)를 〈삼국사기〉에서는 불가(佛家)의 법회(法會)라 하였고, 〈해동역사(海東歷史)〉에서는 한(漢) 때의 대포(大酺: 국가의 경사慶事를 축하하기 위하여 신민(臣民)이 모여 술을 마시며 즐기는 것 – 옮긴이)와 같은 가례(家例: 경사스러운 예법)의 경회(慶會: 경사스러운 모임)라고 하였다.

그리고 근래에 이능화(李能和)가 쓴 〈불교통사(佛敎通史)〉에서는, 고려사 태조 천수(天授) 원년에 “ 팔관회를 설치하여 ‧‧‧ 그 사선(四仙) 악부(樂部)와 ‧‧‧ (設八關會 ‧‧‧ 其四仙樂部 ‧‧‧) ”라고 한 말과, 태조 유훈(遺訓)에 “ 팔관회는 하늘과 산천과 용신(龍神)을 섬기기 위한 것이다(八關會 所以事天及 山川龍神) ”라고 한 말과, 의종(毅宗) 32년에 “ 이제부터 팔관회는 양반가 중에서 재산이 넉넉한 자를 미리 뽑아 그들을 선가(仙家)로 정한다(自今 八關會 豫擇兩班家 産饒足者 定爲仙家) ”등의 말을 인용하여, 팔관회를 신선을 섬기는 모임(會)이면서 동시에 불사(佛事)를 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선(四仙)」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화랑의 사성(四聖)인 영랑(永郞) ‧ 부례랑(夫禮郞) ‧등을 겸하여 부르를 것이고, 「선가(仙家)」는 그 위아래 문장을 참조하면 또한 화랑을 가리킨 것이 분명한데, 대개 화랑 ‧ 불가 양가(兩家)의 관계가 가까워진 이래로 화랑파의 소도대회(蘇塗大會)에 불가의 팔관계(八關戒)를 쓴 것이다.❞

우리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역사(국사國史라고 하지만 역사가 더 정확한 표현임) 시간에 고려시대 나라의 풍속 편에서 “ 팔관회 ” ‧ “연등회” 등이 불교의 행사라고 배워왔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교육정책일 뿐만 아니라 역사학자들 역시 겨레의 양심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쳤는지 겨레의 이름으로 묻고 싶다. 

우리는 그간 학교라는 공간을 통해서 배워온 역사, 문화, 풍습, 말과 글 등 제대로 배운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다. 오히려 배우지 않은 것만도 못하다. 우리 겨레의 소중한 역사, 문화, 풍습 등이 우리 것이 아니고 밖으로부터 들어와서 우리가 따라서 한 것으로 배워왔으니 이 어찌 통탄하지 않겠는가? 이 역시 일제가 악랄하게 왜곡 조작한 식민사관의 폐해가 아닌가 한다. 늦지 않았다. 알았으니 이제라도 후세들에게 이것은 조상들의 귀중한 역사요, 문화요, 풍습이었다고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후손들은 겨레의 얼과 넋을 되찾아 조상들에게 욕된 후손이 되지 않아야 한다. 또한 후손들은 온 누리 겨레의 자부심과 존엄을 떨치며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위 단재 선생이 고증한 글에서 “팔관회”는 “ 화랑파의 소도대회(蘇塗大會)에 불가의 팔관계(八關戒)를 쓴 것이다.”라고 하여 불가가 우리의 전통인 「선배」 ‧ 「화랑」의 제천의식(祭天儀式)에 불가(佛家)의 계(戒)를 가져다 붙였다는 것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또한 고려 태조의 유훈에 “팔관회는 하늘과 산천과 용신(龍神)을 섬기기 위한 것이다(八關會 所以事天及 山川龍神)”라고 한 기록을 볼 때 「팔관회」는 분명 「불가」의 제의(祭儀)가 아니다. 이름만 가져다 붙였을 뿐이다. 필자는 혹 그 이름을 붙이는 것마저 후세에 조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 「하늘」 ‧ 「산천」 ‧ 「용신」등의 용어나 대상은 분명 불가의 용어나 제의 대상이 아니다. 

여기서 「하늘」은 「天」이요, 「산천」은 「땅(地)」이다. 이는 우리네 삼신사상(三神思想)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용신(龍神) 또한 하늘의 동물로서 하늘을 섬기는 우리네 조상의 전통신앙에서 나오는 것이다. 요즈음 「용」이 마치나 화하족의 전유물이나 된 듯이, 우리가 화하 족으로부터 「용」을 차용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듯이 내돌리고 있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하지만 「용」은 하늘을 섬기는 삼신사상 ‧ 삼신교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따라서 태조의 유훈 중 “하늘과 산천과 용신(龍神)을 섬기기 위한 것이다”는 삼신교에서 섬기는 중요한 요소인 「하늘=天=용신」과 「산천(山川)=땅신=검,감,곰,금=지신(地神)」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팔관회는 절대 불가의 의식을 행하던 대회가 아니다. 또한 「용」이 지나족으로부터 나왔고, 또 우리가 지나족으로부터 가져와서 사용을 한 대상이 절대 아니다. 고려시대 전기만 해도 우리겨레의 힘을 화하족의 힘이 당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약자인 화하족이 신앙의 대상으로 삼던 것을 우리 조상들이 가져다가 국가적으로 중요한 의식에 사용을 하고 또 그걸 후세들에게 유훈으로 남겨준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본 문제는 후일 상 ‧ 고대사를 본격 분석, 연재할 때 자세히 다룰 것이다.

결론적으로 「팔관회」는 우리 얼과 넋인 「선배사상」 ‧ 「조의선인」 ‧ 「화랑도」의 중요한 제천의식이며, 우리의 선가와 불가가 가까워진 후 그 이름만 불계를 가져다 붙인 것이다. 필자는 팔관회라고 이름 붙인 것 마저도 왜곡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다.

❝고려 초 ‧ 중엽에는 화랑이 그 사상(思想)으로만 사회에 전해져 왔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회(會)가 존속하여 왔으므로, 화랑을 반대하는 유가(儒家)에서도 그 명칭과 의식(儀式)을 많이 훔쳐서 취하였다. 

그 한두 가지의 예를 들면, 최공도(崔公徒) ‧ 노공도(盧公徒) 등은 화랑의 원랑도(原郞徒) ‧ 영랑도(永郞徒) 등을 모방한 것이며, 학교(學校)의 청름록(청금록: 〈서경〉의 「靑靑子衿(청청자금)」에서 나온 말로 유생儒生의 명단을 말함 – 옮긴이)은 화랑의 풍류황권(風流黃券:화랑의 명단을 적은 책 – 옮긴이)을 모방한 것이다. 그러나 사가(史家)의 삭제를 당하여 화랑의 사적(事蹟)이 묘연하니, 어찌 한탄할 바가 아니겠는가.❞

위 글을 독자들이 얼핏 읽으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를 수 있다. 우리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다 보면 오래된 우리의 전통이나 생활습관 그리고 사상 등이 마치나 외래 사상인양 인식을 하는 경우가 수도 없이 많다. 위 단재 선생이 말 하였듯이 우리의 전통 사상인 「선배사상」에 슴베어 있는 것들을 유가(儒家)들이 모방을 하여 사용을 하였다. 

단재 선생이 위에서 예를 든 것 이외에도 우리들이 유교의 덕목이라고 잘 못 알고 있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효(孝)】 【충(忠)】 【신(信)】이 있다. 이는 바로 삼사상(三思想)의 핵을 이루는 것으로 절대 유교의 덕목이 아니다. 만약 유교의 덕목이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하는 말이라는 걸 독자들은 알기 바란다. 후에 우리의 사상사를 연재할 때 논하겠지만 우리의 상고대사상을 연구하다 보면 공자의 유학이라는 것이 단군조선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세상에 나온 갈래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공자의 학풍을 이어받은 유학에 【효(孝)】 【충(忠)】 【신(信)】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전통사상이자 종교인 삼신사상 ‧ 삼신교의 영향을 받아서 정리된 것이지 공자가 독자적으로 창안해낸 사상이 아니다. 

또한 조선시대 문(文)을 대표하는 것으로 알려진 【선비】 역시 단군조선시기부터 내려온 우리 겨레의 얼과 넋인 【선배】를 도용하여 양반들만 특권적으로 사용을 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가의 어린 아이를 【도령】 혹 【도련】님이라고 부른 것 역시 【화랑(花郞)】에서 도용을 한 것이다. 즉 【랑도(郞徒)】가 【도령】 혹은 【도련】님이 된 것이다. 이 밖에도 우리의 전통사상인 「선배사상」에서 유가들이 도용을 해간 것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본 문제에 대해서는 후일 우리 문화를 연재할 때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할 것이다.


                                                      단기 4347년(2014년) 7월 8일

                                                                     이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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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한국근대사상가선집➁ 신채호(申采浩)(신채호 원저. 안병직 편. 한길사. 1979년 12월 25일)

단재신채호전집 별집. 丹齋申采浩全集 別集(신채호 원저.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단재신채호전집발행위원회. 1977년 12월 28일)

주역 조선상고사(下) (신채호 원저. 이만열 주역.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 형설출판사. 1983년 12월 30일)

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 100주년기념논집(論集), 단재 신채호와 민족사관(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 형설출판사. 1980년 12월 8일)

조선상고사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2006년 11월 10일)

조선상고문화사〈독사신론(讀史新論),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사론(史論)〉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2007몀 3월 5일)

한단고기(계연수 찬. 임승국 주역. 정신세계사. 2010년 3월 25일)

삼국유사(일연 저. 이민수 주역. 을유문화사. 1975년 2월 20일)

삼국유사(일연 저. 박성봉 / 고경식 주역. 서문문화사. 1985년 10월 15일)

삼국유사(일연 저. 리상호 옮김. 북한사회과학원 민족고전 연구소. 까치글방. 1999년 5월 10일)

불함문화론(최남선 저. 정재승 / 이주현 역주. 우리역사연구재단. 2008년 12월 12일)

삼국사기(김부식 지음, 신호열 옮김. 동서문화사, 2판1쇄. 2007년 7월 20일)

삼국사기(원문)(김부식 지음. 강무학. 청화 1989년 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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