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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살된 ‘강서구 재력가’ 송씨, 수천억대 재산의 ‘비밀’

등록 : 2014.08.01 19:34수정 : 2014.08.03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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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아무도 말하려 하지 않는 이야기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연합뉴스, 그래픽 송권재 기자 cafe@hani.co.kr
지난달 하늘에서 바라본 강서구 공항로 근처의 야경. 내발산동은 서울 부동산 개발 열풍의 마지막 장소였다. 김형식(44·왼쪽 사진) 서울시의원의 살인교사 혐의 기소사건은 그저 단순한 야당 소속 시의원의 스캔들이 아니다. 서울 부동산 개발의 상징적인 지역에 위치한 ㅅ빌딩에서, 부동산으로 자수성가한 재일동포와 그에게서 건물과 토지를 ‘소송을 통해 증여받아’ 갑자기 부동산 부자가 된 전직 운전기사 송아무개(67)씨, 부동산 관련 청탁을 받았다는 혐의로 기소된 전도유망했던 보좌관 출신 야당 시의원의 삶이 마주친다. <한겨레> 토요판은 위 사진 오른쪽에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처리한 송씨의 부동산 치부 역사를 두루 살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송씨는 범죄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수사 대상자다. 살아있었다면 뇌물공여죄 혐의를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치부의 역사가 독자들이 이번 사건을 둘러싼 정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둘째, 엽기 추구나 검경의 수사 속보에서 벗어나 범죄의 ‘큰 그림’(whole picture)을 독자에게 제공하고 싶었다. 부동산이라는 자석이 여러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굴절시키고 범죄를 낳았는지 분석하고자 했다. <한겨레>의 ‘취재보도준칙’은 35조(희생자·피해자 배려)에서 ‘사건·사고의 피해자나 그 가족을 취재할 때에는 마음의 상처가 덧나거나 피해가 커지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한다’고 규정한다. 그럼에도 송씨를 분석한 이유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살해된 강서구 재력가 송아무개(사망 당시 67)씨는 오랜 소송 끝에 자신이 재산을 관리해주던 재일동포의 건물과 토지를 자기 명의로 소유권 이전 하는 데 성공했다. 내발산동 ㅅ빌딩과 바로 옆에 있는 ㅂ웨딩홀 둘 다 본래 자수성가한 재일동포의 소유였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한 일간지 1997년 11월8일치는 강서구 내발산동 주변을 “택지난 서울 마지막 보고”라고 표현했다. ‘발산’은 강서구의 수명산이 밥주발(鉢·바리때 발)을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다는 데서 생긴 지명이다. 그릇에 물이 담기듯, 땅값 상승에 대한 기대와 욕망이 그리로 모였다. 살인사건이 벌어진 내발산동 ㅅ빌딩 터는 1970년대까지 논이었으나 이미 1991년에 개별공시지가가 ㎡당 153만원에 달했다. 올해는 694만6000원이다. 그 땅에서 세 남자의 욕망이 만났다. 송씨의 치부와 살인사건은 토건자본주의의 초상이었다.

 

 

법으로 완벽히 재일동포 재산 획득한 뒤 1년만에 피살

 

 

서울시 강서구 내발산동은 변화의 땅이다. 그곳은 1966년 6월 농촌지도사가 일하다 숨진(<경향신문> 1966년 6월29일치) 경작지였고, 1976년 5월 서울시 직원 2200여명이 모내기를 돕던 논(<매일경제> 1976년 5월25일치)이었다. 김포국제공항 덕에 해마다 7만~8만명씩 인구가 늘던 ‘서울의 변두리 지역’이자 ‘신개발지역’(<동아일보> 1979년 1월9일)이 되었고, 고도제한이 완화된 1997년 부동산 투자가들에게 ‘택지난 서울 마지막 보고’(<경향신문> 1997년 11월8일)로 알려진, 급격하게 땅값이 오른 지역이다.

 

내발산동은 지역적으로 외곽이었고 계층적으로도 그러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 산업개발이 영남에 몰렸고 가난한 전라도 사람들은 관악·강서·구로 등 강서지역에 많이 살았다. 서울대 이성우 교수는 2002년 ‘주거밀도로 측정한 출신지역별 주거수준 차이’ 논문에서 “‘1995년 이후 관악, 강서, 구로 등 강서지역에서는 호남 출신의 거주 비율이 높게 나타났고, 서초, 강남 지역에서는 영남 출신의 거주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고 밝혔다.

 

 

재판기록과 취재결과로 보면 
송씨는 부동산 소송과 관련해 
변호사 못지않은 법 기술자 
8건 넘는 민사소송 먼저 제기 
고소당해 형사소송도 경험 

 

일본에 10개 회사 가진 이씨 
한국서 땅 사고 호텔 지었으나 
재산관리인들에 계속 사기당해 
재당숙의 딸이 마지막 관리인 
송씨가 바로 그의 남편이었다

 

 

법기술자로 거듭나게 한 ‘1991년 소송’

 

그러나 2014년 7월15일의 내발산동 ㅅ빌딩 주변은 더이상 논도 아니고, 민원이 폭주하는 행정의 외곽지역도 아니다. 지하철 5호선 발산역 5번 출구 계단을 올라온 행인은 강서구청 입구 교차로 방향으로 난 왕복 8차로의 공항대로를 보게 된다. 출구로 나오면 바로 오른편에 커피 프랜차이즈 간판이 보인다. 널찍한 보도블록을 따라 5분 정도 걸으면 지상 3층의 ㅅ빌딩을 발견할 수 있다. 2014년 3월3일 월요일 0시39분께 빌딩 주인 재력가 송아무개(67)씨가 전기충격기와 손도끼로 살해된 곳이다. 송씨를 살인교사했다는 혐의를 받는 김형식 서울시의원의 ㅎ아파트 자택은 ㅅ빌딩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김 의원이 성장기를 보낸 화곡동도 그리 멀지 않다.

 

송씨는 1947년 1월 전남 장성군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이상의 정규교육은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향을 떠난 뒤 서울에서 버스기사를 했다고 전해진다. 송씨는 전남 출신으로 3살 어린 이아무개씨와 1971년 서울에서 결혼했다. 부인 이씨는 광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17살이 된 1966년 상경해 성동구와 금호동 등에서 살았다. 송씨 부부는 수유리나 도봉구 창동 등 서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주로 살다 1998년 5월 초 강서구 내발산동 현재의 연립주택으로 이사했다.

 

여러 재판기록과 법원 취재 결과를 종합하면, 송씨는 부동산 소송과 관련해 변호사 못지않은 법기술자다. 소유권이전등기 소송 등 8건 이상의 민사소송에서 원고로 먼저 소송을 제기했다. 여러 건의 형사재판 경험도 있다. 한국의 법률·재판 용어는 일본식 한자어로 점철되어 있다. 법과 소송 절차를 익히는 일은 쉽지 않다.

 

초등학교 졸업 학력의 전직 버스기사는 어떻게 부동산 소송의 달인이 되었을까. 처음부터 법기술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1980년대 초반까지는 운수업, 건축업 등으로 그럭저럭 살 만한 정도였는데 의리에 못 이겨 친척의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큰 타격을 입어 생활형편이 매우 곤궁”(2006년 송씨 형사재판기록)했다. 이 때문에 송씨 부부는 잠시 법률상 이혼한 적도 있다.

 

1991년의 한 소송이 송씨를 법기술자로 거듭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는 지난 5~7월 송씨 건물 임차인 등 송씨와 민사소송을 주고받은 4명과 만나거나 통화했다. “송씨가 언제부터 소송과 법에 익숙해졌느냐”는 <한겨레>의 공통질문에 이들 4명 모두 ‘1991년 땅 소송’을 지목했다. 이 소송의 3심 판결문을 보면, 송씨의 처제 이아무개씨가 1992년 도봉구 창동에 소유한 자신의 땅과 관련해 토지 공유자 가운데 한명인 권아무개씨를 상대로 소유권이전등기 말소 소송을 냈고 서울민사지법(현 서울중앙지법)은 1992년 1·2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1994년 12월 원고 승소 취지로 2심 판결을 파기해 돌려보냈다. 3심에서 승소한 덕분에 송씨의 처제는 등기부등본에 자신의 이름을 무사히 등재할 수 있었다.

 

‘1991년 땅 소송’은 이해관계자가 많고 사익을 위해 거짓말이 난무한 소송이었다. 땅을 차지하려는 가짜가 진짜 소유자와 소송을 주고받았다. 송씨의 부인 이씨는 1981년 1월 도봉구 창동에 여러 명의 소유권자가 지분 공유자로 복잡하게 이름을 올린 땅 1078㎡(약 326평)를 구입해 이듬해 여동생(송씨 처제)에게 양도했다. 문제는 등기부였다. 송씨의 부인이 구입한 토지는 여러 사람이 자기 땅이라고 쟁송을 벌이던 터였다. 소송 과정에서 거짓말도 오고 갔다. 해당 토지의 진짜 소유자의 조카가 서류를 위조해 자신이 땅의 상속자라고 했다가 들통났다. 송씨의 부인은 이처럼 ‘등기부상의 소유권 분쟁이 벌어지던 땅’의 일부를 구매하면서 구매 직후 소유권이전등기를 하지 않았다. 토지 공유자 가운데 한명의 지분을 산 것이라 등기 과정이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소요됐다. 등기부에 자신의 이름이 없는 채로 땅을 여동생에게 양도한 것이다.

 

땅을 구입한 1981년부터 재판이 확정된 1994년까지 13년간 지속된 이 부동산 분쟁에서 송씨가 부인과 처제를 도와 법무사를 만나며 소송 업무를 도운 것으로 알려진다. 송씨와 한때 가까웠으나 훗날 송씨를 고소한 ㅂ씨는 지난 17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송씨가 그 소송(도봉구 땅 소송) 하면서 문서나 법무사 관계 일을 잘 알게 됐다”고 말했다. 해박한 문서 지식 덕분인지 가난했던 송씨는 “1987년 무렵부터 경매 관련 사업 등으로 차츰차츰 재기”했고 1990년대 중반에는 “수억원의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정도에까지”(2006년 형사재판 당시 송씨 주장) 이르렀다. <동아일보> 1995년 2월13일치 15면 부동산면을 보면, 강남구 압구정동 신현대아파트 115.5㎡(35평형) 크기 1채 매매가 시세가 1억8000만~2억3000만원이었다. 그는 1990년대 중반에 소박한 부자 또는 중산층 상류 정도의 자산가였던 것 같다.

 

 

송씨는 획득한 자산을 토대로 2012년 경매 매물로 나온 염창동 스포츠센터 건물(사진)과 토지를 낙찰받았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재일동포 이씨가 질려버린 사기, 사기, 사기

 

송씨가 수억원대의 부자에서 수천억원대의 부동산 자산가가 되는 데 20년도 걸리지 않았다. 부동산 등기부 등을 통해 확인한 송씨의 부동산 자산은 크게 ‘부인의 재일동포 친척에게서 증여받은 부동산’과 ‘이 재산을 토대로 추가로 늘린 부동산 2곳’으로 구분된다. 종로구 장사동 토지와 건물 2곳, 내발산동 건물과 토지 3곳, 화곡동 ㅇ관광호텔 건물과 토지, 염창동 스포츠센터 건물과 토지 등 서울시내 총 7곳의 토지와 건물을 소유한 것으로 파악됐다. 서울시내 중심지라 시세가 높다. 서울시 부동산종합정보 사이트의 개별공시지가(2014년 1월 기준)를 기준으로, 송씨의 부동산 자산은 건물을 빼고 토지만 계산해도 694억6400만원에 이른다. 이들 토지 위에 있는 3층 ㅅ빌딩, 5층 다세대주택, 2층 상가 건물, 4층 웨딩홀 건물, 15층 관광호텔, 3층 스포츠센터 건물 등을 포함하면 송씨의 자산은 부동산만 수천억원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급격한 재산증식은 부동산 소송을 통해 가능했다. 송씨 부인의 먼 친척이 송씨 부부에게 ‘증여한 것으로 인정받은’ 재산이, 송씨 치부의 출발이자 고갱이다. 법률상 증여는 ‘한쪽이 무상으로 재산을 상대방에게 수여하는 의사를 표시하고 상대방이 이를 승낙’(민법 554조)하는 행위다. 송씨 부인의 친척인 재일동포 이아무개씨가 자신이 소유한 부동산의 명의를 송씨로 바꿔주는 평범한 증여가 아니었다. 대신 송씨는 재일동포 이씨가 재산을 자신에게 넘겨준다는 취지의 ‘위임장’을 한국 법원에 제출했고, 2002년 5월부터 2013년 7월까지 11년에 걸쳐 소유권이전등기 소송 등 8건의 민사재판과 사문서위조 혐의 재판 등 2건의 형사재판을 거쳐 겨우 증여사실을 법적으로 인정받았다.

 

송씨가 살해된 내발산동의 3층짜리 ㅅ빌딩 토지와 건물의 역사는 송씨의 치부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수성가한 재일동포의 삶과, 시골에서 태어나 강서구에서 갑자기 부자가 된 전직 운전기사의 인생이 그 공간에서 얽힌다. 재일동포 이씨는 1917년 3월 경상도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학으로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에서 만난 한국인 여성과 결혼했다. 많이 일했고, 자수성가했다. 일본에서 10개의 회사를 소유했다. 죽어서 한국에 묻히고 싶어했다. 한국에서 땅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1967년 2월 ‘ㅅ산업 주식회사’를 만들었다. 내발산동 ㅅ빌딩 토지, 또다른 내발산동 토지 3곳, 종로구 장사동 토지 등 훗날 송씨 소유가 되는 땅들을 모두 같은 해 3~10월에 샀다. 장사동 토지에 6층짜리 ㅅ호텔을 일본에서 만나 알게 된 한국인 사업가 친구와 함께 지어 지분을 나눠 가졌다. 1987년에는 부인, 아들을 이사에, 딸을 감사에 앉혔다. 회사 지분도 가족 4명이 나눠 가졌다. 가족기업이었다. 재일동포 이씨는 한국말이 유창했지만 부인의 한국어 말하기는 듣기보다 어눌했다. 아들과 딸의 사실상 모국어는 일본어였다. 한국말을 조금 알아들었고, 거의 말하지 못했다.

 

자수성가한 부자의 땅에 탐욕이 모였다. 1967년 임명된 재산관리인이 재일동포 이씨의 토지를 계속 관리했다. 사기범이 1993년 ㅅ산업 주식회사 사원총회 의사록을 위조해 대표이사에 취임하는 일이 벌어졌다. 재일동포 이씨는 사기범을 고소하고 사원총회결의 부존재확인 청구 소송 등을 제기했다. 이 사건은 일간지에도 보도됐다. 재일동포 이씨가 승소했고 사기범은 1995년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았다.

 

이번엔 17년간 토지를 관리하던 재산관리인이 1995년 ㅅ산업 명의로 20억원 액면의 약속어음을 위조했다. 재일동포 이씨는 18년간 한국의 토지를 맡겼던 재산관리인을 해임하고 새로운 재산관리인을 임명했다. 두번째 재산관리인은 재일동포 이씨에게 허락받거나 보고하지 않고 토지 일부를 무단으로 임대해줬다. 두번째 재산관리인도 해임됐다. 재일동포 이씨는 1995년 11월 자신의 7촌 당숙의 딸을 세번째 재산관리인으로 고용했다. 1967년 이후 한국에 올 때 가끔 보던 관계였다. 7촌 당숙의 딸의 남편이 송씨였다. 이와 함께 재일동포 이씨는 자신과 아내는 이사로, 딸을 ㅅ산업 대표이사로 등기했다. 송씨는 세입자로부터 수금하는 잔무 등 재일동포 이씨의 토지관리를 거들었다.

 

 

‘문서위조’ 고소당해 징역 8년을 선고받다

 

송씨는 재일동포 이씨의 내발산동 토지에 지어진 골프연습장을 실제로 운영했고 ‘ㅅ산업 대표이사’라는 명함을(2006년 송씨 형사재판 기록) 뿌리고 다녔다. 재일동포 이씨는 1996년 10월엔 25살 된 송씨 부부의 딸을 감사에 추가 등재했다. 1997년 내발산동 토지에 빌딩을 짓고 또다른 내발산동 토지 3곳에 각각 4층 예식장 건물, 5층 연립주택, 3층 상가 등 건물 짓기 실무도 도왔다. 이들 자산은 공시지가 기준으로 300억원에 이르렀다.

 

그러다 돌연 송씨 부부는 자신들이 관리하던 토지와 건물 6곳을 자신들이 샀으니 소유자 이름을 “재일동포 이씨에서 자신들의 명의로 바꾸라”며 ㅅ산업 대표이사인 재일동포 이씨의 딸을 상대로 2002년 5월9일 서울남부지법에 소유권이전등기 소송을 제기했다. 송씨 부부는 ‘1998년 3월7일 매매계약서’ ‘계약금과 중도금 12억원을 받았다는 1998년 3월7일 영수증’ ‘잔금 8억원을 받았다는 1999년 3월7일 영수증’ 등 3개의 문건을 재판부에 제출했다. 재판부는 피고 재일동포 이씨의 ‘무변론’을 이유로 석달 만인 8월16일 송씨 부부에게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법률상 소송의 주체인 ㅅ산업의 법인등기부상 소재지인 내발산동 사무실로 소장을 송달했다. 법인등기부에 대표이사였던 재일동포 이씨의 딸의 오사카 거주지 주소가 명시돼 있었지만, 법률상 재판문서 송달 장소는 엄연히 법인의 사무실이었다. 석달 만에, 2심과 3심으로 이어지는 법정 다툼 없이 송씨는 갑자기 ㅅ산업 소유 부동산을 전부 소유한 부동산 부자가 됐다. 내발산동의 부동산 시세는 좋았다. ㅅ빌딩 터의 개별공시지가는 ㎡당 1991년 153만원에서 2002년 당시 241만원으로 올랐다.

 

그러나 이는 11년간 지속될 부동산 소송 전쟁의 시작이었다. ㅅ산업 소유 토지에서 영업하던 예식장 사업자 등이 송씨 부부를 사문서 위조 등의 혐의로 2004년 3월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이들은 “매매계약서와 영수증은 전부 위조되었고 송씨의 조작으로 소장이 재일동포 이씨의 딸에게 송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2002년 소유권이전등기 소송에서 재일동포 이씨의 딸이 변론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송씨는 재산관리인에 불과하므로 재일동포 이씨가 아니라 송씨에게 임대료를 낼 수 없다”며 송씨를 2004년 3월 고소하고 소유권이전등기 말소 소송도 냈다.

 

검찰은 2년에 걸친 수사 끝에 송씨가 문서를 위조했다고 결론 내고 2006년 2월 송씨 부부를 불구속기소했다. 송씨 부부에 대한 총 5개의 고소 사건이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에서 병합돼 재판이 진행됐다. 사문서 위조, 위조사문서 행사 등 모두 6개 혐의를 다퉜다. 송씨의 뇌물장부인 ‘매일기록부’에 정아무개 부장검사에게 돈을 줬다고 기록한 시점이 송씨가 한창 검찰 수사를 받고 형사재판을 받던 2005~2011년 무렵이다. 검찰은 송씨가 “명의신탁 받았다”고 진술했다 번복하는 등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여러 건의 문서위조 의혹 가운데 송씨가 재산을 매입했거나 증여받았다는 증거로 검찰과 법원에 낸 5건의 문서가 핵심 쟁점이 됐다. △1998년 3월7일 매매계약서 및 영수증, 1999년 3월7일 영수증 △1998년 3월7일 위임장 △1996년 9월12일 위임장 △1996년 5월25일 위임장 △1996년 11월25일 각서 등이다. 송씨는 “고소인들이 송씨를 몰아내고 이 부동산을 가로채려고 소송을 낸 것”이라고 고소와 소송의 동기가 ‘불순’하다고 항변했다.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재판장 김용상)는 2009년 11월 4가지 핵심 쟁점 문서들을 전부 송씨가 위조했으며 재일동포 이씨와 그의 딸이 한국의 부동산 자산을 자신들에게 증여했다는 송씨 부부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송씨에게 징역 8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고 부인 이씨에게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송씨는 ‘1998년 3월7일 매매계약서 및 영수증’을 근거로 재일동포 이씨의 딸이 공시지가로 300억원대의 부동산을 자신들에게 20억원에 팔았다고 주장했다. 또 재일동포 이씨가 매매 이후 소유권이전등기 절차를 자신에게 위임했다며 1998년 3월7일 위임장도 근거로 제시했다. 1심 재판부는 이 문서 모두가 송씨의 위조라 판단했다. 송씨가 제출한 1998년 3월7일 위임장에 오타가 있고 고령의 재일동포가 쓰기 어려운 현대어가 사용된 점 등을 근거로 삼았다. 실제로 <한겨레>가 입수한 1998년 3월7일 위임장에는 ‘회사’ 대신 ‘화시’라는 오타가 발견되며, 위임장 말미에 ‘일본주소. 대판시 생야구 도곧동 4-9-13…과전주주 권리행사자’라고 한글타자기로 적혀 있었다. 일본에는 ‘초’(町)라는 주소 단위는 있으나 ‘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전주주’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점주주’(발행주식의 과반수를 소유하고 기업경영을 지배하는 주주)의 오기로 추정된다.

 

 

송씨는 자신이 관리하던 재산을 
자신 명의로 바꾸는 데 성공했으나 
사문서위조 혐의로 고소당했는데 
검사에게 준 뇌물이 기록된 시점이 
바로 한창 형사재판 받을 때였다 

 

중요 재판 앞두고 정치인에게 
전화할 정도로 담대했던 송씨 
무수한 범죄로 얼룩져 있던 
위험한 부동산 부자가 내민 손을 
김형식 시의원은 잡고 말았다

 

 

재일동포 이씨 “송씨와는 일면식도 없다”

 

1심 재판부는 ‘1996년 9월12일 위임장’, ‘1996년 5월25일 위임장’, ‘1996년 11월25일 각서’ 등도 전부 송씨가 위조했다고 판단했다. 1심 재판부는 송씨가 제출한 문서와 다른 문서들 사이의 ‘모순’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가령 송씨가 제출한 ‘1996년 11월25일 각서’에는 ‘ㅅ산업 부동산의 임대행위 및 일체의 처분행위에 대해 권한을 위임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이는 송씨가 낸 ‘1996년 9월12일 위임장’이 증여를 언급한 것과 모순된다는 점도 지적했다. 1심 재판부는 ‘행동의 모순’도 판단 근거로 삼았다. 송씨가 정말 증여받았다면 2004년 3월 고소당한 뒤 검찰 수사를 받던 시점에 아직 살아있던 재일동포 이씨에게 연락해 도움을 청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재일동포 이씨는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2004년 10월 숨졌다.

 

강서구 재력가 송아무개씨 관련 의혹 흐름도
무엇보다 일본에 거주하던 재일동포 이씨와 딸의 진술이 국제형사사법공조로 확보돼 검찰 기소와 1심 판결에 중요한 판단 근거가 됐다. <한겨레>가 입수한 ‘오사카 경찰의 형사사법공조 요청에 대한 회신’을 보면, 재일동포 이씨는 송씨의 부인은 알지만 송씨는 “일면식도 없다”며 “자신은 집안 사람을 포함하여 누구에게도 부동산 물건을 팔지 않고 증여하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했다”고 답했다. 재일동포 이씨의 딸도 한국 검찰이 보낸 매매계약서 및 위임장을 본 뒤 “자신이 아버지의 도장 등 모든 것을 관리하고 있다”며 “(송씨 위임장에서) 확인한 도장은 아버지의 도장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이어 재일동포 이씨의 딸은 “매매계약서, 영수증, 위임장을 확인했으나 전혀 본 적이 없는 서면뿐이며 아버지나 내가 작성한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아울러 재판부는 △필적감정을 통해 재일동포 이씨의 자필 서명이 다른 점 △인감도장 비교 등의 과학적 근거도 제시했다. 송씨는 1심 판결로 징역살이는 물론 갑자기 손에 넣은 거액의 부동산 자산을 잃어버릴 위기에 몰렸다.

 

2심을 맡은 서울고법은 2010년 6월25일 1심 판결의 핵심을 전부 뒤집었다. 2심 재판부는 여러 사람이 2002년 이후 여러 차례 한국의 ㅅ산업 부동산 명의가 송씨 부부로 이전된 사실을 알렸는데도 재일동포 이씨 등은 재산을 회복하기 위해 어떤 조처도 취하지 않은 점 등을 중요한 판단 근거로 삼았다. 실제로 재일동포 이씨와 딸은 2002년 소유권이전등기 소송 이후에도 민사소송법상 보장된 재심을 청구하거나 송씨 부부를 고소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재일동포 이씨의 지인들 의견을 종합하면, 재일동포 이씨는 한국 사법부에 대한 깊은 불신과 내발산동 토지 때문에 송씨 재판 전에 겪었던 수많은 법적 분쟁에 지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믿었던 재산관리인이 함부로 행동하고 사기꾼이 접근하는 일에 지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민법의 격언이 있다. 2심 재판부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한 것이다. 2심을 맡은 강형주 인천지법원장은 <한겨레>의 질의에 지난 25일 공보판사를 통해 “과거 재판으로 기억나지 않는다. 판결문을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답했다. 오래 판사로 재직했던 이홍철 변호사가 당시 법무법인 지평 소속으로 송씨의 여러 민형사 재판에서 송씨를 대리하고 변호했다. 현재 법무법인 세종 소속인 이 변호사 사무실에 접촉했으나 “휴가”라는 답을 들었으며, 이메일을 보냈으나 답이 오지 않았다.

 

2심 재판부가 1심의 판단 중에 유일하게 인정한 것은 세금을 탈루할 목적으로 부동산 매매 이행각서를 위조했다는 혐의였다. 핵심 쟁점인 소유권 다툼과 무관한 혐의였다. 복잡한 파기환송심 끝에 송씨에 대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이 확정된 것은 지난해 7월이었다. 김 의원이 송씨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심 재판~3심 재판 사이의 어느 시기로 추정된다.

 

송씨는 중요한 재판을 앞두고 정치인에게 전화를 할 정도로 담대했다. 2010년~2014년 6월 8대 서울시의회에서 활동했던 ㄱ아무개 전 서울시의원은 지난 6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송씨에 대해 “2010년 6·2 지방선거로 시의원에 당선된 직후 송씨가 제 의원 사무실에 전화해서 ‘내 사무실에 들르라’고 전화한 적이 있다. 주변에서 전부 ‘가지 말라’고 말해서 가지 않았다”고 밝혔다. 강서구에서 잔뼈가 굵은 정치인들은 일부러 피했던 형사재판 피고인이자 “2000년도 이후 범죄 전력만으로도 업무방해, 명예훼손, 폭행, 상해, 모욕 등으로 여러 차례 벌금형 전과가 있었”(송씨의 형사재판 항소심 판결문)던 위험한 부동산 부자가 내민 손을, 김 의원은 잡았다.

 

송씨가 연루된 재판 결과를 모두 모아보면, 한국의 사법부는 ‘재일동포 이씨가 ㅅ산업 부동산을 20억원에 송씨에게 팔았다’(2002년 소유권이전등기 소송)는 주장, ‘재일동포 이씨가 부동산을 증여했다’(1996년 9월12일 위임장)는 주장, ‘재일동포 이씨가 부동산 처분의 전권을 위임했다’(1996년 11월25일 각서)는 주장 등 서로 다른 세가지 주장을 전부 사실로 인정한 셈이다. 원소유주가 사법공조를 통해 “증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법원이 “증여 의사가 있다”고 판단하는 일이 벌어진 셈이다.

 

2014년 7월 송씨는 강서구 유지 모두가 알지만 지금 누구도 언급하려 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가 유언처럼 남긴 ‘매일기록부’는 송씨를 만났던 지역 정·관계 유지들을 수사 대상에 올려놨다. 공적 인정에 대한 욕망은 있었던 것 같다. 송씨는 2009년 지역축제인 우장산 신록축제 공동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재단법인 강서구장학회의 이사였다. 우장산동을 지역구로 둔 강서구의회 신창욱 구의원은 <한겨레> 기자와의 통화에서 “송씨와 어떤 자리에서 처음 만났느냐”는 질문에 “과거 공식 석상에서 봤지만 최근엔 개인적으로 만난 일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송씨를 처음 안 게 “20년도 더 됐다”고 말했다.

 

 

서울 강서구 재력가 송아무개씨에 대한 살인교사 혐의를 받고 있는 김형식 서울시의원이 지난 7월3일 검찰로 송치되기 앞서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다. 검찰이 송씨의 ‘매일기록부’에 나온 비리 정황을 수사할지도 관심사다. 뉴시스
네 자녀 주소지 모두 방문했으나 접촉 실패

 

송씨는 동향하고만 어울린 것 같다. 2010년~2014년 6월 6대 강서구의회 때 활동했던 ㄱ아무개 구의원은 지난 9일 <한겨레> 기자와의 통화에서 “송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알지만 얼굴도 모른다”며 “그러나 저는 출신이 영남이고 그분은 호남이다. 그분(송씨)은 같은 지역 출신들만 상대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지역)사람은 못 믿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송씨는 자신의 건물 임차인에게 사소한 이유로 임대차보증금 7억원을 지급하지 않아 소송을 진행한 ‘독한’ 인물이기도 했다. 2009년 우장산 신록축제 당시 찍힌 사진 속의 송씨는 67살 나이가 믿기지 않게 어깨가 다부져 보였다. 눈두덩이 두툼하고 다문 입술이 단단한 느낌을 줬다. 평소 근력운동을 많이 했다고 전해진다. “과묵한 편”이며 “허튼 이야기는 안 하는 사람”이라는 한 법무사의 법정 증언(2006년 송씨 형사재판)과 사진의 이미지가 비슷했다.

 

송씨의 자녀들은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산다. 송씨의 2남2녀 중 장남(41)은 재벌계열사 연구소에 다니다 퇴직하고 송씨의 재산을 관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녀(43)는 현직 세무서 직원으로 알려졌다. <한겨레>는 등기부등본에 나온 송씨의 네 자녀 주소지에 모두 찾아가 보았으나 인기척이 없거나 출입을 통제당해 접촉하지 못했다. 송씨가 소유한 예식장에서는 취재를 거부당했다.

 

시골 출신으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상경해 버스기사로 일하다, 법기술자들과 어울리면서 소송과 재판을 몸으로 배운 뒤 악착같은 소송을 통해 결국 수만㎡의 땅과 건물을 가진 부동산 부자가 됐다가 부동산 투기의 상징적 지역에서 숨진 남자가, 지금 어느 땅에 묻혔는지는 아직 알려진 바 없다. 무덤 부지가 몇㎡인지도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참고 문건: 송아무개씨의 서울남부지법 02가합5478 소유권이전등기 소송 판결문, 서울중앙지법 2007나24741 소유권이전등기 말소 소송 판결문, 2006고합145 형사재판 판결문, 2013고합39 판결문, 서울고법 2009노3265 판결문, 2013노2437 판결문, 송씨 처제의 93다1596 소유권이전등기 말소 소송 판결문, 2006년 서울중앙지검 송씨 부인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 2005년 주일대사관 형사사법공조 요청에 대한 회신, 2006고합145 형사재판 공판조서, 당시 송씨 변론요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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