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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는 아직 냉전 중, 남북화해가 해빙의 첫 걸음"

"동아시아는 아직 냉전 중, 남북화해가 해빙의 첫 걸음"

[동아시아와의 인터뷰]<1> 박명림 연세대 교수

평화네트워크 .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12-10 오전 8:00:38

 

21세기는 '아시아의 시대'로 일컬어진다. 미국과 유럽연합의 쇠퇴, 중국과 인도의 부상이 엇갈리면서,19~20세기에 서구로 넘어갔던 패권이 다시 아시아로 돌아오고 있다. 그러나 앞날은 장밋빛이 아니라 잿빛이다.

오랜 패권국으로 군림해온 미국은 중국에게 그 자리를 내줄 것이라는 조바심을 보이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가 천명한 '아시아로의 귀환(pivot to Asia)'는 그 조바심의 발로이다. 자신감이 커진 중국도 맞대응을 선택하고 있다. 이로 인해
세계 무역의 중심지인 동아시아 해양이 미-중 간 '갈등의 바다'로 변질되고 있다.

경제적 상호의존과 사회문화의 교류 증대가 동아시아 공동체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기능주의적 기대도 일단 빗나갔다. 오히려 배타적 민족주의와 합종연횡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내치(內治)의 불안을 외부의 적을 불러옴으로써 무마하려는 각국 정부의 빗나간 국가주의 열풍도 거세다. 영토 분쟁과 과거사 문제는 이를 위한
소재로 악용되기도 한다.

한반도는 패권 전환 시대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지역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동북아에서 패권 전환이 일어날 때마다 전란에 휩싸이거나 식민지로 전락했다. 외세에 의해 강요된 분단은 언제 끝날지 알 수도 없다. 이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힘이 교차하는 지역에 한반도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정학적 딜레마는 세계와 지역 질서 변동을 날카롭게 포착해 대응하지 못한 주체적 역량의 부족과 맞물려 증폭되었다. 미중 패권 경쟁과 최악의 남북관계가 교차하고 있는 오늘날, 구한말의 신세가 되풀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커지고 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이 있다. 2013년부터 새로운 선수들이 동북아 정치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2011년 12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급서로 시작된 권력 변동은 2012년 들어 러시아, 미국, 중국, 한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본도 그 후보 중 하나이다. 2013년에는 6자회담의 모든 참가국들에서 새로운 정치 리더십이 등장하게 되는 셈이다.

물론 새로운 선수들이
경기를 더 잘 풀어가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피로감과 비관주의를 극복하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정치적 잠재성은 품고 있다. 그 잠재성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은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 그리고 국경을 넘어선 연대에 있음은 물론이다.

평화네트워크와 <프레시안>이 함께 마련한 '동아시아와의 인터뷰'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기획되었다. 한국, 미국, 중국, 일본의 전직 관료와 학자, 그리고 시민사회단체 인사들을 두루 만나고 있다. 이를 통해 격동의 시대에 접어든 동아시아의 과거-현재-미래를 진단하고, 평화와 공동 번영의 아시아 시대를 열 수 있는 정책과 비전, 그리고 지혜를 모아보고자 한다. <편집자>


동아시아와의 인터뷰 첫 순서로 박명림 연세대 지역학 협동과정 교수를 만났다. 그가 평소에 즐겨하는 "평화를 위해 전쟁 연구를 시작했다"는 말 속에는 그의 학문적·실천적 신념이 담겨 있다. 이러한 신념은 "학문적 주권을 되찾았다"는 평가를 낳을 정도로 한국전쟁에 대한 기념비적인 연구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박명림 교수는 <한국전쟁 발발과 기원Ⅰ·Ⅱ>(1부), <한국 1950: 전쟁과 평화>(2부)에 이어 그 완결판으로 한국전쟁이 한국사회와 국제관계에 미친 영향을 다룬 3부 집필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완결판의 목표는 "한국전쟁과 이에 대한 정권의 '해석의 독점'이 얼마나 한국인들의 정신과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는지를 설명하고, 한국전쟁에 대한 바람직한 청산 방향과 민주주의와 평화와 인권과 통일 실현 방안을 제시"하는데 두고 있다. 정전 60주년이 되는 2013년에는 그의 책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인터뷰는 두 차례에 걸쳐 그의 연구실에서 이뤄졌다. 첫 번째는 평화네트워크 인턴으로 있는 김유승과 은종훈이 10월 9일 만나서 진행했고, 두 번째는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가 10월 30일 다시 만나서 보충했다. 끝으로는 11월 30일에 <프레시안>과 다시 만나 추가 보충인터뷰를 했다.

평화네트워크 창립 준비 때부터 인연을 맺어온 박 교수는 "평화네트워크의 여러 비전과 가치들이 동아시아와 세계에 널리 퍼지길 희망하고, 역할이 지금보다 더 커지게 되면 한반도 및 동아시아에 평화로운 질서가 조금 더 빨리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하고 있다"는 덕담으로 말문을 열었다.
 

▲ 박명림 연세대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먼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부터 짚고 싶다. 평화와 통일은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려운 것 같은데, 이명박 정부의 통일정책을 보면 평화와는 동떨어진 감이 있다. 정부는 통일재원 마련을 주장하는 등 통일담론을 주도했으나 이는 흡수통일을 연상케 한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의 5년, 대북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이명박 정부의 통일정책, 또는 대북정책의 가장 큰 문제는 표면적으론 통일을 추구하지만 실제로는 통일에 반대되는 쪽으로 정책을 추진해왔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가 동서독 통일모델을 고려해서 흡수통일을 추구하려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먼저 서독이 온건정책을 통해 동독 인민의 마음을 얻고 동독이 서독의 통일정책과 체제를 수용하게 한 것처럼 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이명박 정부는 북한체제와 인민들이 남한을 거부하거나 적대하는 정책을 만들어놓고 통일정책을 추진한다는 점에서 실제의 정책과 언표 사이에 극적인 자기모순과 충돌을 노정하고 있다.

두 번째는 서독이 동독의 최대 후원국가인 소련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가져가서 통일과정을 잘 관리하였듯이, 우리는 북한의 최대 후원국가인 중국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시기의 한중관계는 그렇지가 않았다. 수교 이후 한중관계를 최악으로 몰고 감으로써 한반도 통일에 대해 중국의 전략적 우려를 키우고 말았다. 역시 상당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상의 두 가지 점에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통일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움직여왔다."

왜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몇 가지가 착종되어 있는 것 같다. 북한을 비판하고 비난할 수는 있다. 그러나 대화는 나와 생각이 다른 상대와 하는 것이다. 북한을 비판한다는 것이 곧 북한에 대한 적대적인 정책과 연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둘을 일치시키고 말았다. 미국의 레이건과 부시 1세가 얼마나 공산주의를 싫어했었는가? 그러나 소련과 끝없이 대화하고 그들을 현실적으로 상대했다.

북한을 악으로 생각하더라도 상대가 악하다고 생각할수록 상대가 나를 공격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연계를 맺어야 한다. 만약 남한이 북한 붕괴를 추진한다고 북한이 인식하게 되면 그들은 더욱 더 단결하고, 더 강력하게 저항하려 할 것이다. 중국이 어떻게 개혁개방을 하게 되었는가? 미국과 일본, 대만이 중국의 문을 어떻게 열었는가? 접근, 교류, 원조, 무역, 지원을 포함한 온건정책을 통해 중국이 열리지 않았는가? 또 서독이 동독의 문을 어떻게 열었는가?

우리는 서독이 동독을 지원하는 만큼, 대만이 중국을 지원하는 만큼의 수십 분의 일도 지원하지 않으면서 퍼주기 논쟁을 한다. 물론 현금을 지원하는 건 안 된다. 그에 대해 저는 김대중 정부 때부터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이산가족 상봉, 인도적 지원, 경제적 교역, 문화교류는 도덕적으로도, 평화이론적으로도 맞다."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그가 실용적 대북정책을 펼칠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는데, 무엇이 문제였나?

"이명박 정부는 너무 국내정치를 의식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보수정당과 언론으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았기에 이명박 정부는 그 정부들과 무조건 반대되는 게 옳다는 식의 강박관념을 가졌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출발했다. 남북관계는 보수적 이념동원을 위해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그러나 남북 간에는 관계적인 측면과 독자적인 측면이 동시에 있다. 이 점이 중요하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점은 남북한을 관계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분단국가인 동시에, 유엔회원국으로서 독립적인 주권국가이고 자체 국가발전 논리와 동학이 있다. 남한이 온건정책을 펴도, 강경정책을 펴도 북한은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남한의 대북정책과 분리된 북한 자체의 핵무장 논리가 있다는 얘기이다. 보수진영에서는 김대중-노무현정부에서 퍼주어서 북한이 핵무장을 했다고 비판하고, 진보진영에서는 노태우-김영삼 정부 때부터 핵무장을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상호간의 내부공격의 논리일 뿐이다. 북한에는 남한의 진보-보수 대북정책을 넘는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국가이익과 논리가 있다. 물론 이것이 남한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외려 그 반대이다."

그 반대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북한에게도 관계적인 측면 역시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저는 초기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을 기대했었다. 민주화 이후에 보수 정부 두 번, 진보 정부 두 번을 거쳤기 때문에 양자로부터 합리적 핵심을 배울 것으로 기대했다. 독일에서는 보수 정부와 진보 정부가 교차 집권하고 나서 보수적인 헬무트 콜 정부에서 진보적인 정책을 폈다. 그리고는 통일을 달성했다. 대만도 국민당 보수정부가 양안문제는 더 온건하다.

만약 이명박 정부가 화해협력정책의 원칙은 받아들이고 방법과 절차의 측면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교정했다면 남북관계는 상당히 진척이 되었을 거다. 북한 역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명박 정부가 무조건 잘못했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북한은 대한민국 국민을 살상하거나 영토를 공격했다. 이에 대해선 북한이 충분히 사과하고 재발방지 약속을 했어야 한다.

끝으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실용주의나 시장주의, 효율성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사실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교역, 대북투자 등이 중단되면서 남한 기업들이 입은 경제적 피해를 고려할 때 실용주의가 아니라 이념주의가, 효율성이 아니라 관념성이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의 핵심기조였다고 생각한다."

북한의 정권은 지속적이지만, 남한에서는 정권이 5년 주기로 바뀌는데 북한 입장에서 진지한 자세로 대화를 지속할 유인이 있는가? 이명박 정부처럼 지난 정부의 합의사항을 뒤집을 수도 있는데.


ⓒ프레시안(최형락)

"많은 학생들과 기자들이 그렇게 묻지만 저는 반대로 생각한다. 북한은 정권이 교체되지 않기 때문에 외교정책이 문제가 많은 것이다. 김일성 정권의 실패를 김정일 정권이 교정할 수 없고, 김정일 정권의 유훈을 김정은 정권이 부정할 수 없다. 약간의 정도 조절은 있을 수 있어도 기조는 바꿀 수 없다. 주체사상과 선군체제 역시 못 바꾼다. 그것이 오늘날 북한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핵심 요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민주주의 체제는 국민 내에서 서로 다른 견해들 간에 타협을 통해 정책이 나오니까 여러 가지 정책 수단을 가질 수 있다. 정책 수정 역시 유연하다. 역사에서 보듯 국제관계에서는 민주주의가 전체주의를 이긴다. 민주주의가 제공해주는 타협성, 유연성, 평화지향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우월성에는 중대한 전제가 필요하다. 이명박 정부와 같은 실수를 하면 안 된다는 거다. 국가로서의 기본원칙과 합의는 일관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정책실행 방법과 절차를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 동시에 국가로서의 일관성과 정부로서의 독자성을 결합해야 한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거꾸로 국가로서 합의한 것도 다 뒤집어 버렸다.

6.15, 10.4 공동선언은 특정 정권의 대표로서가 아니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합의했던 것 아닌가? 한미 FTA는 이어받으면서 왜 이건 이어받지 못하는가? 또 이것들은 수정이나 폐기를 주장하면서 한미 FTA는 왜 수정 요구를 못하는가? 10.4선언과 6.15선언에 문제가 있었다면 합의는 지속하되 구체적인 내용과 실행 절차는 얼마든지 다시 논의할 수 있지 않은가?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점을 비교해야한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결코 7.4 공동성명이나 남북기본합의서를 수정하려하거나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가의 영속성, 신뢰성, 주권성은 특정 정권의 이념이나 정책의 차이를 넘는 데로부터 주어진다. 결론적으로 이명박 정부는 국가로서의 일관성과 정권으로서의 자율성을 구분하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는 국가의 근본 속성에 대한 공부가 부족한 상태에서 문제를 접근했던 것이다. 근본원칙을 부정했기 때문에 남북관계 단절이라는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는 셈이다."

선생께서는 평화를 구축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평화문화의 확산을 줄곧 주장해왔다. 그러나 '퍼주기' 프레임은 여전히 강력하고 연평도 포격 같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북한에 대한 여론도 악화된다.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진단하는가?

"한국전쟁이라는 최대의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남북 간에는 여전히 강력한 증오와 적대감이 남아 있다. 군사문제가 있을 때 전쟁의 두려움이 확산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하게 분리시켜야 할 요소가 있다. 남한이 국력에서 북한에 열세에 있을 때도 우리는 북한의 군사공격을 받지 않고 4월 혁명을 이뤄냈다. 한국전쟁에서 나라를 수호했던 이승만 체제도 전후 7년만에 전복시켰다. 즉 민주주의 혁명을 이뤄냈고 동시에 침략도 받지 않았다. 평화의식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북한의 위협을 명분으로 한 독재정권의 억압논리를 수용했다면 민주화를 못했을 것이다. 분단상태에서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세 독재정권이 모두 민중항쟁(4월혁명, 부마항쟁, 6월항쟁)을 통해 붕괴되었다. 분단과 한국전쟁을 가지고 민주주의와 평화문화를 억압하는 논리는 안보상업주의에 불과하다. 논리적으로 근거가 부실한 주장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4월혁명,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을 시도하고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이들 사건에의 참여자들이야말로 민주발전을 통해 대한민국을 민주국가로 발전시킨, 그리하여 국가정통성과 대북 우위를 실현한 위대한 기여자들이다.

분단국가에서 안보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안보논리는 사실 진정한 의미의 안보논리가 아니다. 국내의 정치논리이거나 이념논리에 불과하다. 그걸 보여주는 게 민주'국가'를 구하려 권위주의'정권'을 타도한 4월혁명, 민주화 운동, 광주항쟁, 6월항쟁이다. 남한이 북한보다 더 강력함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를 국내정치에 활용하려는 시도들이 종종 있었지만, 시민들이 지혜롭게 극복해주었던 것이다. 시민사회에서 평화문화의 발전은 곧 민주주의발전과 비례했던 것이다.

북한의 핵무장과 군사주의는 분명히 문제가 있고, 북한을 위해서도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도 결코 대안이 아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북핵은 절대 안 된다는 압도적인 여론이 있으면서도 남한 국민들은 대북 인도적 지원과 교류협력은 지속되어야 하고, 남북관계는 개선되어야 하며,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실패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집합적인 '시민적 지혜'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점은 과도한 안보논리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평화문화가 계속 성장한 덕분이다.

남북정상회담 합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부는 2000년 총선에서 패배하였고, 반대로 미국의 제임스 켈리 국무부 차관보의 방북으로 제2차 북핵 위기가 고조되었던 2002년에는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다. 또 천안함 사건 공식 발표 직후 이명박 정부는 6.2 지방선거에서 패배했다.

이 세 사례를 보면 남북관계를 국내정치에 동원하려는 시도는 실패해왔으며, 안보논리와 평화논리는 더 이상 상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안보논리를 동원해 평화논리를 제압하려 해도 남한 국민들은 둘을 분리할 지혜를 갖고 있다. 이제 남한 시민사회의 평화문화를 북한까지 확산시켜 한반도 전체에 평화문화가 정착되도록 노력해야 할 때이다."

평화는 말하는 사람에 따라 그 취지와 목표가 다른 것 같다. 교수님께서는 평화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평화는 사실 굉장히 어려운 문제이다. 저는 평화를 몇 층위로 분류한다. 대개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은 평화전략이다. 그러나 저는 그 전에 평화철학, 평화비전과 평화이상, 평화이론을 먼저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나서 평화전략과 평화실천과 평화강제가 있어야 한다.

첫째, 평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생명'이다. 평화[平和]의 말뜻을 그대로 풀어보면 사람들[口]이 식량[禾]을 고르게[平] 갖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평화의 주체가 생명, 즉 사람이라는 게 가장 중요하다. 즉 평화는 사람, 삶, 살려냄의 의미를 포괄한다. 이 때 식량은 사람, 삶, 살려냄의 근본임이 물론이다.

둘째, 평화의 뜻은 '안녕'이다. 이 때의 안녕이란 삶의 안정성을 뜻한다. 전란의 상태에서 삶이 안정될 순 없기 때문에 평화란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일정한 안정 상태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평화는 어원부터 정의와 공평, 평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의 생존조건이 비교적 고른 사회라면 정의롭고 안정되어 평화롭게 된다. 반면 불의하거나 불평등한 상태에서는 평화가 어렵게 된다.

마지막으로 평화는, '성장', '번영'의 뜻도 담고 있다. 이를테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정복의 뜻으로 해석하면 안 되고 인간 실존의 조건, 즉 우리들이 먹고 생활하고 누리는 것들을 위해 "생산하고 노동하라"는 것을 말한다. 스웨덴의 넉넉한 평화와 아프리카의 빈곤한 평화는 전혀 같지 않다. 평화에는 평안과 번영의 뜻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빈곤은 갈등의 중요한 원인이다. 결국 평화는 인간 영혼과 인간 실존의 생명성과 안정성, 세계질서와 인간공동체의 공정성-평등성과 정의를 갖추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

대단히 포괄적으로 들리는데 전쟁의 부재를 넘어 구조적 폭력까지 제거된 '적극적 평화'로 이해하면 되는가?

"'적극적 평화'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개념이다. 저에게 평화가 어떤 평화가 되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세 가지로 말하고 싶다. 먼저 '생산적 평화'이다. 생산적 평화는 평화를 통해 건설적인 인간 삶과 영혼, 사회상태, 세계상황을 창출할 수 있는 조건을 말한다.

두 번째는 포괄적 평화이다. 포괄적 평화는 경제적으론 부유한데 군사적으로는 전쟁상태에 있다거나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인데 경제적으로 극심한 불평등에 있다는 식의 영역별·분야별 불균등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균형적 평화에 도달해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아직 세계 평화이론은 여기까지 나아가진 못한 것 같다.

세 번째는 영구적 평화이다. 임마누엘 칸트도 말했던 것인데, 한 사람의 일생에서 유년시절은 평화롭고, 청년시절은 고통스럽고, 장년은 투쟁기, 노년기는 안정기라는 식이 아니라 전생애에 걸쳐 항구적인 평화를 누리고, 또 어떤 세대는 평화롭고 어떤 세대는 전쟁상태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가 평화를 향유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개인적으로 저는 생산적, 포괄적, 영구적 평화의 도구로 쓰임 받고 싶은 생각이 있다. '인간 영혼의 영구평안'과 '세계질서의 영구평화'는 저의 가장 오래된, 가장 소중한 꿈이다."

영구적 평화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다. 가령 현재 평화롭지 않은 상황인데 다음 세대가 평화롭기 위해서는 지금 세대가 무력이나 폭력을 사용하여 현 상황을 타파해야 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프레시안(최형락)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구조적인 억압과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서 최소 폭력은 폭력이 아니다. 방어적이고 저항적인 폭력이 용인되지 않으면 인간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서 자신과 타자를 보호할 수 없게 된다. 불의를 타파하고 정의를 수호할 수도 없다. 자기 헌신과 희생도 어렵다. 폭군에 저항한 시민투쟁이나 제국주의에 대한 민중저항을 폭력이라고 하지는 않지 않은가? 문제는 자기 이익과 지배를 위해 타인을 억압하는 공격적이고 배제적인 폭력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더 깊은 성찰 지점이 존재한다. 인간 행동의 현실적 선택이 갖는 종교적 자기희생의 의미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 차원에서는 방어적 폭력도 더 깊은 성찰을 요하게 된다. 당시의 정치폭력에 대해 예수가 정치투쟁으로 맞섰다면 그의 희생이 이처럼 영원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간디 역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폭력을 무화시키는 평화를 위한 투쟁은 일종의 종교적인 자기희생과 내면성찰을 수반한다. 미래의 영구평화를 사유하면 방어적 폭력조차 재고하게 된다. 간디나 링컨, 마틴 루터 킹, 함석헌이 평화실천과 종교적 영성을 결합하려했던 것은 깊은 이유가 있다. 요컨대 평화는 이상인 동시에 실천인 것이다.저 개인의 삶은 많이 부족해서 쉽게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내면윤리의 사회적 구성능력이야말로 개인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체가 아닐까 싶다. "

"한국전쟁, 아직도 고민 중"

평화하면 떠오르는 것이 역시 전쟁이다. 한국전쟁의 영향이 큰 탓이 아닌가 한다. 선생님께서는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로 많은 업적을 남기셨다. 한국전쟁에 대해 몇 가지 질문하고 싶다. 한국전쟁의 본질이나 성격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내전인지, 국제전인지, 혹은 둘 다로 볼 수 있는지도 궁금하다.


"솔직히 25년여를 고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최종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이다. 국제학회에서도 숱한 질문을 받았던 문제이고. 외국학자들도 한국전쟁에 대한 한국의 연구자인 저의 견해를 자주 묻는다. 그러나 부끄럽다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다. 복잡하고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어떤 단일한 성격으로 해석할 경우에는 그 성격의 반대 측면에 섰던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극적으로 갈리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거대 사태를 도덕을 기준으로 흑백, 호오, 선악으로 나누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삶의 복잡성과 다층성을 잘 드러내주기에, 제가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개념과 이론화를 향한 궁극적인 학문적 소명을 포기할 수도 없다.

사실 인류 최초의 살인이 형제간의 살인이었을 만큼 근친증오와 근린적대는 인간들의 일반적 현상이다. 제가 이해하기에 한국전쟁은 일단 내전은 아니다. 내전(bellum civile)이라는 말은 원래 서기 이전부터 사용되던 용어로서 한 사회 안에서 어느 쪽이 전체 사회를 대표할 것인지를 둘러싼 갈등을 뜻한다. 그 후 오랫동안 쓰지 않던 용어인데 영국 시민혁명 때 다시 등장하게 된다. 당시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서 누가 영국사회를 대표할 것이냐 다툴 때 다시 불려나온 것이다.

이처럼 내전 개념은 어느 쪽이 한 사회를 대표할 것이냐를 둘러싼 투쟁에 쓰이는 것이다. 한 사회가 분열되어서 왕정인지 공화정인지, 전제정인지 의회정인지, 노예제 유지인지 노예제 폐지인지, 사회주의인지 자본주의인지를 두고 싸울 때는 내전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 영국, 미국, 독일, 스페인 등이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세계체제 등장 이후 주변부 국가들에서 진행된 거대 전쟁 중에서 엄밀한 의미에서 내전은 거의 없다. 그 전쟁들은 국제적 요인으로 발생한 것들이 거의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역사학이나 국제관계학, 정치학 같은 일반학문을 하거나 한국학을 하거나 대부분 외국학자들은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보고 있다. 그러니 저는 지금 세계 학계의 일반적 해석에 경험적 이론적으로 도전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 등을 국제학계가 내전으로 보는 것은 또 다른 제국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즉 오리엔탈리즘의 혐의가 짙은 배제와 억압의 논리이다.

그들이 싸우게 된 기원은 국가나 종족, 민족의 분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서 보듯이 분단의 배경인 친일과 항일,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협력세력과 저항세력으로 갈라놓은 것도 제국주의이고, 분단의 출발이 되는 영토분단도 두 제국 미국과 소련이 국제적으로 결정했고, 분할점령도 두 제국에 의해서였다. 남북 분단국가 수립과 미군-소련군 철수도 마찬가지다. 전쟁에 사용된 무기도 미국과 소련 것이었다. 전쟁의 시작도 김일성-모택동-스탈린의 국제적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 남한 방어를 위한 최종 결정과 힘의 근원도 미국 워싱턴이었다. 전쟁의 기원부터 종결까지의 중요한 국면의 궁극적 결정 권한 역시 거의 전부 국제적인 요인과 주체였다. 이걸 내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내전론은 한국민들끼리 싸웠고 한국민들끼리 죽였다는 것이다. 표면을 넘어 구조를 약간만 들여다보더라도, 사실에 맞지 않는 해석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전쟁은 국제전이라고 봐야 하는가?

"그런 취지만은 아니다. 한국민들도 그들 스스로의 과오에 대해 냉철하게 반성해야 한다. 왜 망국, 분열, 분단을 막지 못했는지, 왜 전쟁을 시작했는지 엄정하게 반성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엄정하게 반성해야 한다는 점과 이 전쟁의 성격이 내전이라는 주장은 전혀 같은 범주가 아니다. 아프리카의 숱한 국경선도 제국주의가 마구잡이로 그어놓은 것인데, 현지인들이 그걸 합치거나 변경하려고 싸웠을 때 이를 내전이라고 하면 도덕적으로도 이론적으로 전혀 맞지 않게 된다. 그건 그들을 두 번 억압하는 제국주의 행위와 같다. 첫 번째는 영토 침략과 분할로, 두 번째는 학문적, 해석적 왜곡으로 말이다. 제국주의가 그어놓은 분할선으로 인해 발생한 그들의 전쟁이 어떻게 내전이 되는가?

최근 들어 세계학계에서는 국제전적 시각과 내전적 시각을 통합하여 한국전쟁을 '국제화한 내전'으로 해석하려 하지만 이것도 맞지 않다. 그들 주장의 본질은 여전히 내전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는 오히려 거꾸로 잠정적으로 '내전화한 국제전쟁', '내전화한 세계시민전쟁'으로 보고 싶다. 한국전쟁이 세계시민전쟁이자 내전화한 국제전이었기 때문에 훨씬 복잡했고 아직도 평화와 통일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형태의 내전이었다면 벌써 통일이 되었을 거다."

한국전쟁을 '내전화한 국제전쟁'이라고 한다면, 이 전쟁이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한반도 분단의 공고화와 동북아 냉전의 안정화이다. 어떻게 공고화되고 안정화되었느냐? 그건 한국문제가 더욱더 국제화되었기 때문이다. 전후 한반도 분단은 완전히 세계의 분단이 되었다. 동아시아 사회주의와 동아시아 자본주의가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고, 남북은 세계자본주의와 세계사회주의 진영의 전방초소가 되고 말았다. 한반도 휴전의 세계화, 국제화가 정전체제의 핵심이다. 동시에 한반도의 휴전의 군사화와 무장화가 있다. 한반도 휴전은 정전을 하면서 비무장지대를 설치했는데 실제로 비무장지대는 최첨단 무기가 최근접 거리에서 가장 위험하게 가장 오래 대치하고 있는 지역이다. 저는 이것을 최무장지대라고 부른다. 정전체제의 이러한 이중성, 즉 최고 수준의 국제화와 최고 수준의 무장화가 한반도에서의 재전쟁을 불가능하게 한 핵심 요인이었다.

동아시아에 끼친 다른 영향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등장하면서 세계 냉전체제가 얄타체제와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둘로 나뉘었다는 점이다. 즉 동아시아에서는 얄타체제가 처음부터 정초되지조차 못했던 것이다. 얄타체제의 핵심은 전범국가에 대한 국제적 억지를 골간으로 한, 미소 양극의 수직적 세계분할체제를 말한다. 그러나 동아시아에는 한국전쟁에서의 중국과 일본 요인으로 인해 얄타체제가 고착되지 못했던 것이다.

일본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일안보조약-샌프란시스코체제를 통해 국제사회에 무임승차했다. 그러면서 처음부터 연합국 미국과 전범국가 일본의 동맹체제가 동아시아 냉전질서의 핵심기축으로 작용하였다. 즉 한국전쟁은 일본을 도덕과 안보와 경제 세 측면에서 구출해줬다. 전범국가 일본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국제문명사회에 진입했고, 모든 전쟁물자가 일본으로 모였기 때문에 전쟁특수를 맞아 폐허상태에서 극적으로 회복하게 되었다.

또 하나 중요한 영향은 일본의 자폐화, 탈보편화이다. 일본은 전쟁책임을 지지 않고 국제 사회에 등장했다. 즉 분단도 되지 않았고 천황도 처형되지 않았다. 오늘날 영토문제, 위안부문제, 야스쿠니(靖國) 신사참배 문제, 교과서 왜곡 문제 등 여러 가지 '전쟁범죄' 문제들은 만약 일본이 분단이 되었거나 국제 사회에 복귀하지 못했으면 통일을 이루고 복귀를 위해서라도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보상하면서 해결되었을 문제들이다. 그런데 이런 도덕적 책임 지불 없이 곧바로 국제사회에 복귀해버려서 거꾸로 더 공세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어불성설이며 문명국가로서의 자격미달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부상도 말씀하셨는데, 무슨 뜻인가?

"일단 한국전쟁으로 인해 중국 분단이 고착되었다는 점은 지적하고 넘어가야겠다. 중국과 대만은 한국전쟁 이전에는 통일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미국과 전쟁에서 비긴 최초의 국가이다. 미국은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무조건인 항복'(unconditional surrender)을 추구했고 이를 통해 언제나 이겼다. 그러나 중국이 참전하면서 미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정전을 위한 장기협상에 들어갔다. 결국 미국과 중국, 남한과 북한은 비기고 말았다. 그래서 한국전쟁은 세계사의 결정적인 전환점이다.

중국이 미국의 공격을 저지하면서 이후 중국은 군사적, 국제적으로 상당한 발언권을 갖게 된다. 여기에서 중국의 자율성과 중소갈등이 발생하면서 동아시아에서 미소 양강의 수직적 분할구도는 작동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한국전쟁 직후 중소갈등을 거친 이후에는 중국이 소련을 대신하여 동아시아 문제의 가장 중요한 행위자로 등장하게 된다. 냉전체제-얄타체제를 미소의 수직 분할체제라고 본다면 그러한 세계체제는 동아시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일동맹은 체결-강화되고 중소동맹은 이완-해체되는 반대현상이 등장한 것이다. 이를 통해 사회주의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은 동아시아에서 비대칭 관계에 놓이게 된다. 어쩌면 G2구도의 거시적 단초는 한국전쟁 때 이미 놓였는지도 모른다."

한국전쟁을 '내전화된 국제전쟁'이라고 할 때, 그 전쟁의 영향이 여전히 큰 한반도에서 국제 차원의 규정력은 얼마나 큰가? 남북한 '우리민족끼리' 평화와 통일을 실현할 수는 없는 것인가?

"갈등의 주체가 결국 평화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남편과 아내가 싸웠는데 둘이 화해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요구로 화해하면 그건 진정한 화해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이 '내전화한 국제전'이었기 때문에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국제적, 민족적 차원에서 함께 추구되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통일문제를 민족문제로 접근한 우리는 통일을 달성하지 못했고 통일문제를 유럽문제-국제문제로 접근한 독일은 벌써 통일을 이루었다는 점은 깊은 성찰을 요한다.

독일은 유럽의 강대국이고 중심부이나 한국은 동아시아의 약소국가이고 변방이기 때문에 후자가 먼저 통일될 것이라고 오랫동안 예상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을 보여준다. 냉전시대의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은 국제적인 문제였다. 분단과 전쟁이 국제 문제라면 평화와 통일도 당연히 국제문제이다. 따라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미치는 지역적, 세계적 규정력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너무 한반도 문제를 국제 문제로 환원한 것은 아닌가?

"압도적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남북간에 민족 내부적으로 해야 할 것이 많다. 남북간이 적대적이면 적대적일수록 국제적 규정력은 더욱 강해진다. 이것은 한반도의 지정학이 갖고 있는 불변의 상수이다. 한국전쟁은 이를 여실히 보여준 사태였다. 게다가 국제질서는 각자의 국익 확대를 위한 투쟁의 공간이다.

따라서 남북의 신뢰가 구축되고 관계가 개선될수록 국제적인 영향력은 줄어든다. 이 점은 남북화해협력의 시점과 남북갈등대립 시점의 남북 각각의 영향력과 국제사회의 영향력을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전자의 시기에는 남북의 영향력이 컸다면 후자의 시기에는 압도적으로 국제사회의 영향력이 컸다. 그런 점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도달하는 조건과 상황을 창출하는 데 있어 남북의 역할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것은 남북한 두 한국의 리더십과 국민들의 엄숙한 책무이다."

ⓒ프레시안(최형락)

선생님께서는 통일문제에서 민족담론의 위험성을 이미 언급하신 바 있다. 그리고 '보편성'의 시각을 강조하는데, 어떤 의미인가?

"통일문제와 평화문제를 우리민족끼리 달성할 수 있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낭만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으로 보게 된다. 즉 분단 상대방이 잘하면 통일이 될 수 있고 평화가 구축될 수 있는데, 지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상대방이 잘못된 정책을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역설적으로 민족담론은 상대방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안 해준다고 믿는 데서 오는 증오와 배신감으로 상대방에 책임을 전가하고 공격하게 된다. 민족주의의 자기충돌적 역설인 셈이다. 즉 민족주의 담론은 민족동일성의 담론이면서 동시에 민족증오와 배제의 담론이다. 그래서 제가 보편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자유, 민주주의, 복지, 인권, 평화, 화해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면 분단과 통일 같은 특수과제는 그러한 가치들의 확산을 통해 점진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문제는 남북 각각에서 내부의 보편적 가치 증진을 위한 노력인 것이다. 통일과 같은 좋은 목표가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같은 좋은 실천이 문제인 것이다.

좋은 목표는 좋은 과정과 분리될 수 없다. 좋은 실천을 반복하면 좋은 목표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반대는 그렇지 못하다. 즉 좋은 목표가 좋은 실천을 낳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평화를 위해 전쟁을 선택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평화가 아니다. 강조하고 싶은 점이다. 만약 보편적인 목표만을 강조하게 되면 보편적이지 않은 수단을 선택할 수가 있다. 전쟁을 통해 평화를, 분단강화를 통해 통일을 추구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대개 특수한 문제는 개별적이다. 동시에 그것은 또한 앞선 모든 사람들이 겪었던 문제이기도 하다. 즉 개별성과 보편성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분단, 통일, 전쟁, 갈등 문제를 해결했던 앞선 많은 사례들이 제공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지혜와 경험을 학습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지금 직면한 개별 상황의 해법을 알기 어렵다. 개별 상황 속의 인간들은 늘 한계를 갖기 마련이다. '우리민족끼리' 하려다가 결국 전쟁을 하고 적대를 한 사례를 직시해야 한다. 따라서 저는 우리사회의 민족주의적인 통일담론과는 상당한 견해 차이가 있다. 저는 지금도 통일에 앞서 평화를 강조하고, 평화 없는 통일은 재앙이라고 생각한다."

"유엔과 유엔 회원국이 정전상태인 희한한 상황"

내년이면 정전60주년을 맞는다. 60년간 지속된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자는 논의가 있다. 왜 우리는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보는가?

"정전은 전쟁의 잠정중단이지 종식이 아니다. 평화체제는 전쟁의 공식적인 종료를 의미한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여 잠정 중단 상태에서 공식적 종료상태로 이행하는 것이 평화체제의 첫 번째 의미이다. 그런데 남북한도 전쟁이 잠정 중지 상태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유엔과 중국, 유엔과 북한 역시 정전 상태라는 것이다.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유엔군총사령관과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중국인민지원군사령관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유엔과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을 맺지 않고 중국과 북한이 유엔에 가입했다. 지금 중국과 북한은 유엔 회원국이다. 결국 유엔이 유엔회원국과 정전 상태에 놓인 것으로서 국제관계 역사상 너무도 희한한 상황이다. 국제기구가 자신의 구성국가와 정전상태에 놓인 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다. 평화협정과 평화체제가 정립되면 이런 예외적 상황들은 반드시 정리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평화체제는 남북이 상호 주권성을 인정해야 한다. 현재는 적대상태인데 상대를 평화상대로 인정하고 상대방의 국가성을 수용하자는 것이다. 이는 남북관계가 국가 대 국가로 제도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때 국가 대 국가는 통일을 이룰 때까지의 잠정적인 관계이다. 동서독 기본조약과 같은 상태를 말한다.

셋째로 평화체제는 전쟁 가능성과 전쟁 수단의 현저한 축소와 직결되어 있다. 평화체제가 되면 상호 군축을 통해서 전쟁물자와 예산이 일반국민의 복지향상으로 전환됨으로써 삶의 질의 제고가 이루어질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정전체제에서 평화체제로의 전환은 한반도 갈등구조의 구조적인 전환뿐 아니라 한반도 사람들의 집합적 삶의 구조적 변화가 이루어지는 계기인 것이다."

한반도 평화체제가 품고 있는 동아시아 차원에서의 의미를 짚어 본다면?

"정전체제가 동아시아 차원의 맥락을 지니듯이 평화체제 역시 동아시아 차원의 함의를 담고 있다. 특히 지난 150년 동안 동아시아 갈등의 요충지였던 한반도가 평화의 발신지로 전환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한반도 평화체제는 동아시아 평화와 동아시아 통합으로 나아가는 큰 전환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한반도 문제는 단순한 민족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 지역문제, 국제문제이다."

그렇다면 평화체제로의 이행을 위한 수단에는 무엇이 있는가?

"평화체제로 가기 위한 조건으로 전쟁억지력의 역할에 대한 전면적인 재고가 필요하다. 핵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의 포기는 강조할 필요도 없다. 남과 북은 상대방의 공격에 대한 방어수단으로서 전쟁억지력을 확보하고 있지만 이것이 상호 위협으로 작용하고 이는 다시 상호 불안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방어를 명분으로 공격수단을 보유하려는 무기 확충을 서로 중단하는 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는 정전협정의 기본합의이자 상호신뢰를 위해서도 굉장히 중요하다.

서독과 동독은 통일을 이루기 전에 상대방이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란 신뢰에 바탕해 적극적인 평화와 교류를 모색했다. 서독이 동독을 공격한다는 것은 바르샤바조약기구(WTO)에 대한 공격을 의미하고 동독이 서독을 공격하는 것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공격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유럽 전체의 전쟁이 되고 만다. 동아시아에 유럽과 같은 집단안보기구를 구축할 수 있다면 평화체제로의 이행은 훨씬 더 용이할 것이다. 저는 이 점을 크게 강조하고 싶다. 남북이 동아시아 집단안보체제와 병행한다면 전쟁의 가능성은 획기적으로 줄고 평화와 안정의 지표는 크게 높아지게 된다. 이는 6자회담의 합의정신이기도 하다."

방금 전 유럽과 동아시아의 경우를 비교하시면서 독일은 WTO나 NATO가 억지능력이 되었다고 하셨는데 동아시아에도 집단안보기구가 있다면 국가간 신뢰가 확보될 수 있다고 보는가?

"그렇다. 아까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말씀 드렸는데 유럽의 화해와 독일 통일이 가능했던 것은 나토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전쟁은 나토 전체와의 전쟁을 의미하고 그런 안보통합이 있었기 때문에 그 뒤로 경제통합이 가능했던 것이다. 안보통합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경제통합, 최종적으로 정치통합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누구도 냉전시대에 집단안보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양자주의에 묶여 있다. 여기는 미일동맹, 한미동맹, 북중동맹, 미중적대, 북미적대 등 전부 양자관계이다. 나토 같은 것이 있었다면 한국전쟁도 일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지금도 다자주의가 없다. 6자회담은 단지 다자적 접근(multilateral approach)이지 제도화된 다자주의나 다자기구는 전혀 아니다."

그렇다면 '냉전의 섬' 한반도를 동아시아 평화의 중심지로 전환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우선 표현 문제부터 짚고 넘어가고 싶다. 흔히들 한반도를 '냉전의 섬'이라고 하지만, 저는 이런 표현을 쓰지 않는다. 한반도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가 아직 냉전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북중동맹이 냉전시대보다 완화됐는가?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이 완화됐는가? 북미 적대관계는 어떤가? 남북관계만 적대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북한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 자체가 냉전시대에서 구조적인 전환을 이루지 못했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남북' 축과 '국제' 축은 상호 맞물려 있다는 것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상호간의 군사안보정책을 방어충분으로 전환할 수 있는 상호신뢰와 국제신뢰가 굉장히 중요하다. 미국도 북한에 대한 신뢰가 낮고 중국도 남한 주도의 통일에 신뢰가 낮기 때문에 남북신뢰와 국제신뢰는 같이 증진되어야 한다. 국제 대결장으로서 한반도의 군사적 대치상황은 미국, 중국, 일본 등 열강들의 이익 쟁투의 장이다. 이를 완화시켜야 한다. 미•중 상호 경쟁을 활용해 미국은 이를 한미동맹 강화에, 중국은 북중동맹 강화에 투영하고 있다. 이 틀을 깨기 위해서는 남북상호신뢰와 국제신뢰 구축은 반드시 함께 가야한다."

중국ㆍ북한 2,3세 정치인이 집권, 한국ㆍ일본도 따라가려나

끝으로 다가올 한국의 12월 대선과 한반도 및 동아시아 평화에 대한 견해를 부탁드린다.

"아주 어렵고도 중요한 질문이다. 동아시아의 국제관계가 격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대선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이제 한반도문제에서 한국정부의 성격과 정책은 가장 중요한 변수의 하나가 된 지 오래다. 이명박 정부 시기 동안 미국, 중국, 일본의 대한반도 정책을 보면서 우리는 민주개혁파 정부가 집권했었더라도 한반도 문제와 남북관계를 이렇듯 오래 방치했을까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또 김영삼 정부 시기와 이명박 정부 시기 동안 김일성과 김정일 사망 이후의 상황을 유념할 때, 만약 당시 남한에 강경보수 정부가 아니라 온건진보 정부가 들어섰을 때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를 상상해보면,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린 정말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2012~13년 동안 중국, 일본, 북한에서 기존 지도자의 2세, 또는 3세 집권이 이미 실현되었거나(중국, 북한), 실현가능한(일본) 상황에서 한국마저 2세가 집권한다면 이것은 동아시아 전체의 세계적 부끄러움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에 깊이 빠져있는 서구의 언론과 학자들은, 동아시아 주요 4개국이 모두 2세~3세 집권으로 귀결된다면 동아시아의 후진성이라며 얼마나 조롱할 것인가? 4월혁명,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을 통해 동아시아 자생적 민주화를 앞장서 이끌어온 자랑스런 한국민들이 깊이 유념해야할 부분이다.

한국민들이 평화와 화해지향적 민주정부를 수립해야하는 이유는, 중국-일본-북한의 2~3세 정권들이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고수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반도 문제와 동아시아국제관계를,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평화와 공존과 화해지향으로 선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민들의 선택은 이제 한반도와 동아시아질서를 좀 더 평화와 안정을 향해 나아가게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로까지 상승된 것이다. 한국민들의 동아시아 및 세계시민으로서의 책임의식을 간절히 기대하고 또 바라게 된다. 이 점은 저의 아주 오래된, 마음 속 깊은 개인적 소망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 동안 좋은 말씀 감사하다. 여기에서 인터뷰를 마칠까 한다.

"수고 많이 하셨다. 동아시아와의 인터뷰, 좋은 성과 있기를 바란다."

*시민단체인 평화네트워크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됩니다. 평화네트워크 바로가기(www.peace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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