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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신의 밤, 그대 곁엔 누가 있는가

신유신의 밤, 그대 곁엔 누가 있는가

등록 : 2012.12.21 20:15수정 : 2012.12.21 21:51

 

유신 시절 젊은 세대에게 지적 자양분을 공급해주며 고군분투했던 지식인들. 왼쪽부터 리영희, 장준하, 송건호 선생.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22> 유신시대의 겨울나기

유신의 부활을 막기 위해 <유신과 오늘>의 연재를 시작했지만, 이제 유신이 오늘이 된 날에도 <유신과 오늘> 원고를 써야 한다는 것은 고문에 가까운 일이다. 하고픈 말이 너무 많을 것 같으면서도, 말 자체를 하고 싶지 않은 밤이다. 1972년 10월17일 박정희의 느닷없는 비상계엄 선포와 헌법 정지 선언을 들은 지식인들은 그 밤을 어떻게 보냈을까? 이명박 시대가 끝나고 박근혜 시대가 온다는 것은 그래도 외형상 헌정의 테두리를 유지하던 제3공화국 대신 유신의 ‘겨울공화국’이 온 것 같은 느낌이다. 그 시절 박정희 치하의 남쪽은 ‘겨울공화국’이라 종종 불렸고, 김일성 치하의 북쪽은 ‘동토의 왕국’이라 불렸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이 겨울, 북쪽은 김일성의 손자가, 남쪽은 박정희의 딸이 다스리는 나라로 변모했다. 어디 남북한뿐이랴. 일본의 신임 총리 아베 신조는 전 수상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이고,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 시진핑 역시 8대 원로인 부총리 시중쉰의 아들인 태자당 출신의 2세 정치인이다. 혹자는 기시 노부스케가 만주국을 사실상 설계했고, 박정희는 다카키 마사오란 이름으로 만주군에서 복무했으며, 김일성은 일본 제국주의와 만주국 괴뢰정권을 상대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점을 들어 동아시아에 만주국 시절의 대립구도가 부활했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오사카 시장 하시모토 도루와 전 도쿄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가 이끄는 일본의 극우세력은 일본유신회를 만들어 지난 16일 총선에서 제3당으로 부상했는데, 한국에서 유신공주 박근혜가 집권하자 한일간에 ‘유신 연대’가 이뤄지게 되었다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이번 선거의 결과로 북의 3대 세습을 비판하는 것도 머쓱해졌다. 하긴 교회도 언론도 기업도 학교도 학벌도 그리고 가난도 대물림되는 나라에서 대통령 자리를 가업으로 승계한 게 무엇이 새삼스러우랴.

 

 

 

침묵하지 않는 지식인들은
해직 뒤 월부 책장사를 하면서
장관 자리까지 거부하고
자식공부도 못 시키는 아비로
미칠 것 같은 그 시대를 견뎠다

 

북쪽은 김일성의 손자가
남쪽은 박정희의 딸이
일본은 만주국을 설계한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가
중국은 태자당 출신 2세가…
만주국 때 대립구도 부활했나

 

 

민주화돼서 살림살이 좀 나아졌습니까?

 

18대 대통령 선거는 어쩔 수 없이 박정희로 대표되는 기득권 세력과 김대중, 노무현으로 대표되는 민주화 세력에 대한 역사적 평가라는 성격을 띠고 치러졌다. 양대 세력의 진검승부는 유신의 부활로 귀결되었다. 너무도 참담한 일이지만, 식민지 지배와 군사독재로 얼룩졌던 한국 현대사의 무게는 민주진보진영이 감당하기에는 아직 너무 무거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 20세기를 돌이켜보면 대한제국 시절의 첫 10년을 제외하면 90년 중에서 4월혁명 직후의 1년과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1998, 1999, 2000년 등 딱 네 해만 빼놓고는 모두 제국주의와 군사독재 세력의 지배를 받았던 것이다. 그렇게 오랜 기간 우리 현대사를 물들였던 얼룩은 민주정권 10년으로 지워버리기에는 너무도 짙었다.

 

지금 우리는 당연한 일처럼 여기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솔직히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출현한 것도 기적이었다.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는 외환위기 상황에서 치러졌다. 나라 살림을 거덜 낸 세력에게 다시 정권을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이인제가 출마하여 보수진영의 표를 500만표나 갉아먹었다. 김대중과 김종필의 디제이피(DJP)연합은 그동안 김대중의 발목을 잡았던 지역 구도를 깨버렸고,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과 관련된 국정농단 스캔들은 온 나라를 뒤흔들었다. 거기에 36년 만의 정권교체를 이뤄보자는 국민들의 여망이 겹쳐졌다. 위에 열거한 여러 요인 중 한가지만을 갖고도 정권교체가 이루어져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요인들이 대여섯개가 겹쳐졌는데도 겨우 39만표 차이로 김대중이 승리했다. 2002년의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국의 기득권 세력은 이회창 대세론만 믿고 ‘듣보잡’에 ‘갑툭튀’인 노무현을 깔보다가 패배했다. 보수 세력은 이때 제대로 한번 바꿔보자는 젊은이들의 열망과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환경의 등장이 갖는 힘을 감지하지 못한 채 무너졌다. 19대에 걸친 총선과 18대 대선에 이르기까지 그 숱한 선거에서 민주 세력이 승리한 것은 4월혁명 직후의 5대 총선과 김대중의 당선, 노무현의 당선, 그리고 탄핵 직후의 17대 총선 딱 네번에 불과했다. 이번 18대 대선에서 친일과 독재를 정당화해온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은 것은 우리의 도덕적 신념에 큰 상처를 주었지만, 돌이켜 보면 5 대 5의 근접 승부를 벌이게 된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0 대 0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100 대 0에서, 그것도 기울어진 경기장에서 시작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다. 민주화는 끊임없는 과정이지 단판 승부가 아니다.

 

여기저기 대중 강연을 다니면서 던져보는 질문이 있다. “민주화돼서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제법 달아올라 있던 강연장의 분위기도 이 질문 한마디면 일순간에 싸해진다. 이번 선거로 다시 한번 확인된 것이지만 민주 세력의 집권 시기에 상처받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문제는 그들의 다수가 기득권 세력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번에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1577만 유권자의 다수는 월소득 200만원 이하, 중졸 이하, 비정규직, 주부, 블루칼라층이었다고 한다. 민주진영은 젊은 세대만을 보고 투표율만 높으면 이길 것이라 예측했지만, 계급적으로 자신의 편이라고 여긴 사람들이 수구 세력을 선택한 것이다. 노무현을 뽑을 당시 바꿔보자는 기대는 바꿔봤자 별수 없다는 환멸로 바뀌었다. 100만의 촛불도,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때 모인 600만의 조문객도 어마어마한 숫자임에는 틀림없지만, 대통령 선거라는 큰 판을 승리로 이끌기에는 크게 부족한 숫자였다. 광화문에서 서울역까지를 꽉 메운 100만의 촛불 인파를 보고 민주진영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다 나왔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선거 유권자의 겨우 2.5%였다. 촛불과 노무현 대통령 서거와 4·11 총선에 이르기까지 민주당은 거리의 운동정치에서도, 제도 속의 대의정치에서도 너무나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민주당이 저토록 무기력해진 데에는 정치혐오증을 덮어씌운 새누리당과 수구언론의 역할도 상당하겠지만, 민주당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이 너무나 크다.

 

 

매년 사단 규모 병력이 죽어나가던 시대

 

유신공주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1970년대의 유신시대가 재현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최소한 박근혜의 ‘신유신’이 박정희의 유신보다 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박근혜 시대는 그 끝을 알 수 없던 유신시대와는 달리 딱 5년이라고 끝이 정해져 있다. 이명박 5년을 거치며 지칠 대로 지친 민주시민들은 이제 어떻게든 박근혜 5년을 또 살아내야 한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우리를 덮치는 엄청난 쓰나미처럼 전혀 손쓸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우리가 중심을 잘 잡고 버텨내면 능히 이겨낼 수 있는 시련이다. 유신시대가 어떤 시대였고, 박근혜는 어떤 인물인지 미리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다가오는 재앙을 막아내야 한다.

 

유신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는 이 난을 통해 많이 설명했지만, 충분히 다하지는 못했다. 먼저 유신시대는 죽음의 시대였다. 최종길, 장준하와 인혁당 관련자들만 희생된 게 아니었다. 유신시대는 군대에서 1년에 근 1500명이 죽던 시대였다. 유신시대 전체가 아니라 1년에 1500명의 젊은이들이 군대에서 죽어갔다. 유신 전체로 치면 1개 사단이 전쟁도 치르지 않았는데 전멸한 것이다. 아니, 전쟁 없이 죽었다기보다는 박정희가 민주주의를 상대로 치른 전쟁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것이다. 민주화가 이룬 가장 중요한 성과는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는 것보다도 그 죽음의 행렬을 멈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년에 1500명의 젊은이가 소리 소문 없이 죽어나가도 입 한번 뻥끗할 수 없는 것이 유신시대였다. 둘째, 유신시대는 박정희 한 사람이 자유롭기 위해 만인의 자유가 희생된 시대였다. 박근혜가 죽어라 하고 토론을 기피했던 것은 박정희를 닮아서이다. 박정희는 유세 다니고 토론하는 것 하기 싫어서 대통령 직선제를 없애버렸다. 그 시절 박정희는 천황과도 같은 절대적인 지위를 꿈꿨다. 셋째, 유신시대는 표현의 자유가 끔찍하게 유린당한 시대였다. ‘유신독재 타도하자’나 ‘유신헌법 철폐하라’가 아니라 대통령에게 헌법을 ‘고쳐주세요’ 하고 부탁(청원)해도 영장 없이 체포해서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을 때려버리는 것이 유신체제였다. 오죽했으면 구속된 민주인사의 가족들이 입에 십자 모양으로 테이프를 붙이고 침묵시위를 했을까. 넷째, 유신시대는 표현의 자유를 넘어 인간 내면의 양심의 자유까지 침해된 시대였다. 친일파에서 광복군으로, 광복군에서 좌익이 군부에 침투시킨 최고 프락치로, 좌익 프락치에서 다시 우익으로 숨 가쁘게 변신한 박정희는 전향하지 않는 좌익수들의 꼴을 봐주지 못했다. 1975년 제정된 사회안전법은 형기를 다 살았어도 전향서를 제출하지 않거나, 형기를 마치고 밖에 나와 있는 사람들도 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다시 잡아들여 보호감호란 이름으로 기약 없는 옥살이를 시켰다.

 

모든 비판이 봉쇄됐던 시대, 박정희의 심기까지 경호 대상이 되었던 그 시대에 익숙해진 박근혜는 과연 귀에 거슬리는 비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 유신체제의 퍼스트레이디 이후 국회의원이 되기 이전에 박근혜가 공직을 맡았던 것은 영남학원의 이사와 육영재단의 이사장이었다. 불행히도 두 경우 모두 측근들의 심각한 부정부패가 문제가 되어 박근혜는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영남학원이나 육영재단 정도 규모를 운영할 때에도 측근들이 어마어마한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몰랐다면-알고도 방치했다면 더 큰 문제다-과연 국가를 운영하는 데에서 측근들의 부정부패가 재발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굴복 대신 무능을 택한 30~40대 가장들

 

단언하건대 유신시대의 언론은 조선시대에 비해 훨씬 막혀 있었다. 박정희의 집권 초기만 해도 정부를 비판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언론인들에 대한 테러(범인이 잡힌 적은 당연히 없다)나 강제연행이 잦아지면서, 그리고 정보기관원이 언론사에 상주하기 시작하면서 비판적인 언론은 사라져갔다. 1960년대에는 비판적인 기사를 쓴 언론인들이 가끔씩 끌려가서 두들겨 맞거나 곤욕을 치르고 나오는 식이었지만 그래도 자리는 보존했는데, 1968년 말의 신동아 필화사건부터는 해직 언론인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단 해직시켰다가 곧 복직시켜도 중앙정보부에서 모르는 척 넘어갔는데, 유신 이후에는 해직된 지식인들이 다른 곳에 취직을 해도 기관에서 찾아와 압력을 행사해 며칠 못 가 쫓겨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박정희는 지식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섞어서 구사했다. <사상계>에 모였던 비판적 지식인들은 박정희가 좋은 자리를 미끼로 하나둘 빼갔다. 언론사 간부들이 서로 한 회사에 한 자리씩 나눠준 유정회 국회의원을 노리면서부터는 정보기관에서 굳이 언론사에 기관원을 상주시킬 필요도 없어졌다. 당시 비판적 지식인 중 상당수는 젊은 시절 좌익 활동에 관련된 적이 있었는데, 사회안전법의 실시는 이들의 입을 꾹 다물게 만들었다. 함석헌, 장준하, 리영희, 문익환같이 한 점 흠잡을 데 없는 우파로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들만이 그래도 입을 열 수 있었다. 유신정권은 1974년 말 민주회복 선언에 서명한 서울대 백낙청 교수를 파면한 데 이어 1975년에는 교수재임용 제도를 도입하여 전국 98개 대학에서 460명의 교수를 쫓아냈는데, 이 중 반체제 인사는 50명가량이었다.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당시 회사에서 쫓겨났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대학에서 쫓겨난 교수들은 대개 30대와 40대의 가장이었다. 리영희는 1969년 정부의 압력으로 조선일보에서 해직된 뒤 월부 책장사를 했다. 실업자가 되어 집에서 낮잠을 자는데 옆에서 놀던 어린 남매가 ‘아버지가 실업자라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선물이 없을 것 같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파 월부 책장사를 한 것이다. 양손에 새끼로 묶은 소설책 더미를 들고 빙판에 미끄러져가며 리영희는 양심을 지켰다. 1975년 동아일보 사태 당시 울면서 사표를 던진 송건호 편집국장은 뒤에 그 시절에 대해 “무직 상태에서 생활하면서 처자를 거느리기가 한없이 괴로웠다”며 “생활에 대한 공포감으로 견딜 수 없었으며 미칠 것 같았다”고 괴로운 심정을 토로했다. 올망졸망 6남매를 둔 채 해직당한 40대 가장은 박정희가 장관 자리를 준다는 것도 거절한 채 “돼지갈비 한번 실컷 먹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풀지 못한 채 자신과의 처절한 투쟁을 벌였다. <사상계>를 통해 전쟁의 폐허에서 방황하는 젊은 세대에게 지적 자양분을 공급해준 장준하 선생도 자식들 대학 공부 시키지 못한 무능한 아비였다.

 

송건호는 이때 우리 역사를 돌아보았다. 1924년생인 그가 중학생이던 일제 말기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그때 그는 민족적 양심이나 독립이라는 문제를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고 지냈지만, 자신이 해직되고 보니 “당시에 양심을 지켰던 분들이 한없이 두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들이 이 어려움을 어떻게 견뎌냈나 궁금해”졌다. 송건호는 “사학자들은 구름같이 많은데 단 한사람도 (이 시대에 대해) 쓴 일이 없으니 기가 막힐 지경”이었기에 역사학도는 아니지만 자신이 써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한국에서 최초로 나온 현대사 책인 <한국현대사론>이다. 역사에 관심이 많았지만 주로 조선시대에 흥미를 느꼈던 나는 고교와 대학 초년 시절 송건호와 리영희의 글을 보며 현대사 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다. 그때는 이분들이 그런 어려움 속에서 글을 썼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송건호는 미칠 것같이 괴로웠던 1970년대 자신의 처지가 일제 말기에 양심을 지키려고 고군분투했던 당시의 지식인들에 비하면 훨씬 편한 것이라고 겸손해했다. 자신은 박정희 정권이 영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지만, 1940년대 초반 국내의 지식인들은 일제의 패망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신시대가 부활할지도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 처한 2012년에 대학교수와 언론인을 비롯한 지식인의 수는 유신시대에 비해 수십배 늘어났다. 그러나 유신의 부활을 막기 위해 발 벗고 나선 지식인은 불행히도 그리 많지 않았다. 장준하, 리영희, 송건호 같은 거룩한 이름을 다시 떠올리게 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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