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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돈키호테, 오랜 친구 김낙중 형

[남재희 기고] 통일 돈키호테, 오랜 친구 김낙중 형
[고난 속 꿋꿋이 산 사람들·⑨] 임진강 건너가 평양에…사형 구형만 5번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2015.09.30 06:03:39
 
 

서울대 문리대 정치과 중심의 동아리 신진회(新進會), 서울대 법대의 동아리 신조회(新潮會), 그리고 고려대 경제과 중심의 동아리 협진회(協進會)의 졸업생들이 4.19 후에 다시 모였다. 이름을 신조회로 단일화하고 정례적인 모임을 갖는 한편 '신조’라는 얇은 간행물도 프린트로 몇 번인가 냈다. 모이는 장소는 을지로 삼각동에 있던, 주석균 씨가 운영하는 농업문제연구소. 저녁에 그 연구소의 사무실을 빌려서 쓰는 것인데, 가끔 가다가 거기의 연구원인 박현채 씨가 퇴근하는 것을 만나기도 하였다. 박현채 씨는 운동권 학생들이 많이 따르던 진보적 경제학자로 나중에 김대중 씨가 낸 대중경제론의 밑글을 쓴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었다. 

신진회는 5,6학년에 걸친 규모가 매우 큰 조직이다. 아마 50~60명의 회원이 있었을 것이다. 대표적 인물은 김지주(金志柱)군. 영국의 페비언 사회주의자인 해럴드 라스키, G.D.H 콜 등을 인용하며 정열적으로 정치이론을 폈다. 그는 신문사를 지망했으나 실패하고 럭키 그룹에 입사하여 중요 회사의 사장을 지냈으나 요절하였다. 신진회 멤버들은 말하자면 그런 페비언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는데 졸업 후 대거 언론계로 진출하고 나머지는 학계로 갔다. 

신조회는 김동익(金東益) 군이 선두인데 그때 영국의 페비언 협회에 가입하려고 열성을 보였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2개 학년에 그쳐 회원 수는 많지 않았다. 중도에 최상징(崔相徵) 군이 서울법대는 노동법 등 사회법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하여 '사회법학회’로 방향을 전환시켰기 때문이다. 사회법학회는 아주 활발하게 활동하고 10여년 동안 유지되었다. 거기서 황돈, 심재택, 조영래, 장기표 씨 등 쟁쟁한 투사급 인물들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협진회는 그 대표 격이었던 김두환(金斗煥) 군 표현을 빌리면 "무언가 공동의 이상을 추구해 보려고 모색하는 모임"이었지, 페비언 사회주의 운운하고 이념을 내세운 동아리는 아니었다. 

4.19 후 신조회로 단일화되어 동인지 '신조’를 낼 때 협진회 출신 김낙중 군이 그 편집을 맡았다. 편집을 책임지다 보니 자연스레 권두 칼럼 집필도 맡게 된 것 같다. 5.16 후 이 신조회 패들도 조사를 받았다 .수사 당국이 전부터 주목해왔던 것 같다. 형사 처벌을 받는 등 크게 문제된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나도 조사를 받았는데 그들은 '신조' 잡지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권두 칼럼이 과격하지 않느냐고 한다. 그때는 좀 과격한 게 아닌가 하고 느꼈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를 만나 그 이야기를 하니 그는 무어가 과격하냐고 도리어 화를 내며 반격을 한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 보니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쓸 수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사 기관에서 읽은 것과 시일이 지난 생각한 것 사이에는 역시 격차가 있는 것 같다. 

4.19 후 신조회 모임을 할 때도 김낙중 형이 평양에 갔다 와서 처벌 받았다는 이야기를 막연하게나마 들었었다. 그러나 일단 법적으로 끝난 문제이고 하여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나는 동인지 '신조'에 중립화론을 썼었다. 그 당시 미국의 맨스필드 상원의원이 한반도의 오스트리아식 중립화를 거론하기도 하였으며, 마침 내가 정기구독하기 시작하던 영국의 <이코노미스트>가 '한반도의 핀란드화(핀란디제이션)?'’란 한 페이지 칼럼을 내기도 하였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종합하여 글을 써본 것이다. 

5.16 후 나를 조사한 수사관은 다행히 인격적으로 아주 훌륭했던 것 같다. 한 번은 그의 상사가 조사실에 들여 "무슨 일이냐" 한다. 그러니까 수사관은 "중립화입니다" 한다. 상사는 별거 아니라는 듯 휙 나가 버린다. 그때 내 느낌은 그랬다. 4.19 공간에 남북 협상론과 중립화 통일론이 있었는데 수사 당국은 남북협상론은 엄히 추궁하고 중립화론에 대해서는 얼마간 부드러웠던 것 같다. 남북협상론은 다이나미즘이 있으나 중립화론은 그런 역학이 없는 수동적 형태의 논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김낙중 형이 대학생 때 평양에 다녀왔었다는 것은 얼핏 들어 알고 있었다. 자세히 알아보지는 않았었다. 그러다가 자세히 알게 된 것은 그가 형무소에 있을 때 (하도 여러 번이니 몇 번째인지는 모르겠다.) 그의 부인이 나를 찾아와서 요로에 그의 감형·석방을 운동해 달라고 부탁해와서이다. 국민학교 선생인 부인은 <굽이치는 임진강>이란 원고 뭉치를 내놓는다. 부부가 교대로 합작으로 쓴 그 원고는 김 형의 통일운동에 관한 것으로 임진강을 건너간 평양행이 그 중심 이야기다. 

박진목 씨라고 역시 통일운동가로 유명한 인사가 중앙정보부와도 잘 통하는 처지여서 그 분에게 그 원고를 주며 부탁을 했다. 그가 그 원고를 읽어보고 그것을 중정에 주며 설득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성과는 없었다. 결국 원고만 되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복사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에 용케 복사본이 있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책으로 되어 나왔다. 

그가 평양에 갔다는 이야기는 이미 <프레시안> 인터뷰로 자세히 소개된 일이 있어 여기서는 대충의 줄거리만 소개하겠다. (☞관련 기사 : 간첩 김낙중, 사형선고만 다섯 번…후회하지 않는다

 

 

▲ 통일운동가 김낙중. ⓒ프레시안 자료사진

 

 

서울대 사회학과에 다니며 통일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통일 독립 청년공동체 수립안'이라는 것을 마련해 남한 정부 당국에도 호소하였으나 무시당하자 그것을 갖고 북에 가서 평양 당국에 호소해 보려 하였다.

'통일 독립 청년공동체 수립안'은 좌··우익의 사상으로 교육·세뇌(?)되지 않은 젊은 세대들을 남북에서 모아 그들을 잘 육성하여 평화 통일의 기본 세력으로 삼자는, 그리고 그들을 확장하여 통일을 이룩하자는 구상인 듯하다. 마치 못자리 판에서 사상에 오염되지 않은 묘판을 길러 그것을 이앙(移秧: 옮겨 심기)하자는 이야기처럼 들리는데 좀 엉뚱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순진무구한 생각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아마 돈키호테적이라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는 줄 안다. 

아무튼 그는 그 생각을 대단히 골똘하게 외골수로만 한 모양이다. 하기는 그는 피난 부산에서 '탐루(探淚)'라는 큰 글씨를 쓴 등(燈)을 들고 한복 차림으로 시내를 돌아다녔다고 지난날의 일을 말하기도 하였다. 눈물 없는 세상에 '눈물을 찾는다(探淚)'는 취지인데 옛 희랍 디오게네스가 등불을 밝히고 다녔다는 고사(故事)에서 생각해낸 듯도 하다. 경찰은 그를 정신병원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그 스스로가 한 고백이다. 

그런 편집(偏執)하는 성격이기에 아마 '통일 독립 청년공동체 수립안'이 가장 올바른 통일 방안이라고 확신하고 평양행을 감행했을 것이다. 일반의 상식으로는 납득이 어려운 발상이다. 

그는 고향이 파주 임진강가이기에 그곳을 잘 안다. 임진강 하류에서 에어 매트리스를 타고 손으로 저어서 북으로 갔다. 요행히 지뢰는 밟지 않고 민가에 갔는데 거기서 당국에 신고되어 평양으로 압송된다. 방학세 내무상까지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예심처라는 감옥에 보내졌는데 그의 말로는 옆방에 박헌영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글쎄, 그렇다 치고 들을 수밖에 없다. 

북한은 그때 대남 평화 공세를 하고 있을 때라 평화 통일안을 들고 온 남한의 대학생을 처벌하기가 곤란했던 모양이다.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압록강 하구 황금평에 있는 상이군인 병원으로 보내 요양케 한 후 1년 만에 남으로 내려보냈다. 휴전선에서 철길 따라 내려오다 미군에게 먼저 잡혀 조사를 받았다. 그 후 한국의 치안국에 넘겨졌다. 1956년 가을쯤이란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심 1년 징역형, 2심 집행유예, 4.19가 난 직후 대법원에서 면소 판결로 이어진다. 그 때 그가 학생이기 때문에 사법당국이 관대했다는 느낌이다.

그는 그 후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고려대 경제학과로 옮기고 대학원에 진학한다. 5.16 후 고려대에서 학생 데모가 일어나자 정권은 "김낙중이 북에서 간첩 교육을 1년간 받고 돌아와 학생들을 선동했다"고 아주 편리하게 이용한다. '간첩 김낙중'의 체포 발표다.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뒤에 3년 6개월 징역형 언도로 낙착되었다. '악운의 톱니바퀴'에 걸려든 것이다. 그 '악운의 톱니바퀴'에 걸려들면 시국사건이 있을 때 자주 자주 편리하게 이용되는 것이다. 

김 형이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발표된 것 가운데 가장 요란했던 것은 그가 민중당의 이우재 씨와 함께 공동 대표로 있을 때 간첩으로부터 200만 달러를 받았다는 사건이다. 본래 정당 운동을 하지 않았던 그였는데 민중당 측에서 통일 간판으로 삼으려고 영입한 것 같다. 그 후 유명해진 이재오 사무총장이 교섭해 왔다는 그의 설명이다. 

그런 그에게 '북'에서 200만 달러를 자금으로 제공하고 그는 그 중 일부를 남대문 암시장에서 환전하여 당직자 몇몇에게 나눠 준 모양. 대부분의 달러는 장독대 속에 숨겨두고. 당시 그 일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그런데 그는 예상보다 가벼운 형벌로 끝났다. 

뒷날 그를 만난 김에 궁금하여 물어보았다. 200만 달러는 거금인데 북이 그 많은 돈을 전달할 까닭이 없을 것 같다고 말하며 혹시라도 조작된 것은 아닌가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진짜로 북에서 보낸 것 같다고 말한다. 우선 북에서 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자기가 북에서 말한 내용을 그대로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직도 진상은 모를 일이다. 나는 그에게 어느 기관에서 혹시라도 조작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의 위치로 보아 200만 달러는 너무나도 큰 돈이다. 그리고 그 뒤의 처벌도 그렁저렁이었던 것 같다. 만약에 '어느 기관'에서 공작을 했다면 돈도 별로 손실 없이 '대어'를 낚은 셈이 아닌가. 

그 후 민중당 대표였던 이우재 전 국회의원을 만난 김에 그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그도 그 후의 처벌이 그리 엄하지 않았던 점이 의문이 간다고 약간 회의적 생각을 비쳤다. 

돈키호테적(?) 통일운동가 김낙중 선생은 아마도 200만 달러를 전달받고 여하간 북에서도 자기를 그만큼 대단히 비중 있게 평가해 준다고 크게 만족했을 것이다. 북이 그의 존재 가치를 높이 평가해 준다고 자존심이 충족되었기에 그는 의도적으로라도 그 일이 '진짜'인 것으로 믿고 싶었을 줄로 안다. 아마 그는 평생에 걸쳐 가장 흐뭇했을 것이다. 그런 심리의 자기 충족적 작용이 있지나 않았을까. 

 

 

▲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프레시안 자료사진

 
살아가는 동안 김 형과 나와의 얽힘이 드문드문 있었다. 그는 노동 문제를 연구하여 그 방면의 유명한 전문학자 김윤환 교수와 공저로 <한국노동운동사>를 펴냈다. 그 책 말고 약간 대중용인 이론서를 저술했을 때 그는 흥사단 회의실에서 출판 기념회를 열고 많은 사람들을 초청하였다. 나도 참석하여 축사를 맡았다. 여하간 그는 저술 활동에 끈질겼다. 

아들의 결혼식에도 초청을 받아 마포에 있는 공단 예식장에 간 일이 있다. 그 아들은 미국 스탠포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하고 지금 서울의 유명 대학에 교수로 있다. 

독립운동의 노선배들이 모임인 민족통일촉진회가 있다. 나도 한 때는 그 모임에 여러 번 나가고 거기서 나오는 간행물에 인물론을 연재하기도 하였었는데, 김 형도 그 후 그 모임에 관계하기 시작하여 정책 연구 책임을 맡아 열을 낸 것으로 알고 있다. 통일운동가인 그로서는 정열을 쏟을 만한 모임이다. 거기서 그는 또 한 사람의 통일운동가 박진목 씨와 깊이 사귄다. 

서울 근교의 신흥주택가 일산은 주민들의 수준도 높고 공동체 활동도 활발한 곳 같다. 그 지역 종교인들이 주축이 된 지역 사회 모임에 초청을 받아 강사로 갔더니 김낙중 형이 나와 있다. 파주에서 가까운 일산으로 이사했단다. 그리고 공동체 모임에도 열성인 것 같았다. 역시 그의 사회 참여 열의는 끊임이 없다. 

근래에 그를 만나자고 하니 서울 시내는 공기가 나빠서 기관지에 해롭다고 그가 사는 일산으로 오라고 까다롭게 군다. 처음으로 따져보니 그는 1931년생으로 나보다 두 살 연상이기는 하다. 이제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커피도 조심하는 듯 내 커피를 조금 따라 맛보기만 한다. 금이 간 듯한 카랑카랑한 목소리도 여전하다. 그리고 요즘의 그의 생각을 정리한 듯한 <우리 민족 통일의 길-8.15 70주년을 맞으며>라는 얇은 논문을 건네준다. 이야기가 끝나자 도서관에 간다고 한다. 요즘도 아직 독서에 열심인 모양이다. 

강천((剛泉)이란 별로 운치 없는 아호를 고집하여 내세우는 것을 보면 김 형도 나처럼 별로 한학 공부를 깊이 하지 않은 것 같다. 아호만 보아도 짐작이 간다. 우선 운치도 없다. 

나에게 준 작은 논문은 말하자면 김 형의 통일 방안에 관한 기본 구상인 셈이다. 그 줄기는 ① 남북간 교류 협력 ②국가 연합 ③ 단일 국가의 순서로 많은 사람들이 말하여 온 그런 순서다. 그런데 김낙중류의 고집이라 할까 편견도 나온다. 북한의 독재 체제를 공산 체제의 본질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은 하지 않고, 남북 분단과 미국의 압박에 연유한 듯이 분석하고 있는 맥락이 그런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분석에서 부족한 부분을 유독 강조하는 논법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글을 인용해 보자. 

"북조선에서는 우리와 같은 고려 민족의 구성원들이 살고 있지만, 사적 재산의 소유로 인한 분열은 아니지만, 당권의 유무 즉 어느 정도의 당권을 갖고 있느냐에 의하여 분열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당 독재 국가가 유지된 이유는 미국에 의한 남북 분단 이후, 미국이 군사 경제적으로 계속 북조선의 목을 조이는 상태를 지속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강대한 외세가 목을 조이는 상태에서 살아남자면 독재 체제가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연유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만 분석하고 말면 사태의 원인 분석에서 주종을 혼동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리고 '남북 국가 내부 대통합의 길'에서는 이런 기발하다 할까 엉뚱하다 할까 한 제의를 하고 있다. 

"남측 사회에서는 소유 재산상의 분열이기 때문에 재벌의 재산과 재산이 한 푼 없는 무산자가 어떻게 하면 '삶의 운명공동체' 즉 하나의 '겨레'를 이루고 동고동락하며 더불어 살게 될까? 그 방법을 찾아야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첫째, 우선 돈 많은 부자들이 자진해서 가난한 이웃에게 장학금도 주고, 먹고 살 식량이나 거주할 방도를 마련해주는 따뜻한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민족의 내부 분열로 인한 갈등을 완화하는 길입니다. 서구라파 국가들에서 하고 있는 방법이지요. 그러나 나는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 방도가 아닌 일시적 방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재산을 많이 가진 부자와 재산이 없는 빈자들이 '삶의 운명공동체'를 만들자면, '공동 상속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필수적 방법이라고 주장합니다. '공동 상속 제도'란 돈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는 일정액 이상의 소유 재산, 예를 들면 100억 원 또는 1000억 원 이상의 재산은 공동 상속해서 국가의 '공동 상속 기금'에 귀속 적립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공동 상속 기금'에 귀속된 재산을 매년 18세 또는 20세가 되는 청년들에게 일정액을 자본 분배해서 모든 젊은이가 공평하게 인생을 출발할 수 있는 밑천으로 삼을 수 있게 해주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겨레'에 대한 따뜻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공동 상속 기금에서 자본 분배를 받는 젊은이는 그것을 은행에 저축해둘 수도 있고, 증권이나 주식을 살 수도 있고, 상급학교 진학 자금으로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기의 노력과 능력에 따라 더 커질 수도 있고 작아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젊은이들이 같은 인생 출발선에서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결론 삼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의 세상이 '아수라장'을 면하려면, 맘몬(황금 귀신)의 유혹을 물리치고, 얼을 건전하게 하도록 모두 함께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면 인류 문명의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즉 과학 기술의 발달을 뒷받침으로 굴러 온 인류 문명이 욕망의 액셀러레이터를 낮추고 절욕(節慾)의 브레이크를 잡아 서로 사랑하도록 힘써야 되겠습니다."

고려대학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오랫동안 그곳 노동문제연구소에서 현실을 분석해온 경력도 있다. 그리고 평생을 평화 통일을 위해 헌신하여 어떻든 결과적으로 사형 구형만 5번을 당한 수난의 인물이다. 친구지만 경건한 구도자의 모습까지도 보이기도 한다. 그런 김 형의 다듬고 다듬은 결론 삼아서의 의견에 섣불리 즉흥적인 논평을 하기가 저어되기도 한다. 

김 형은 북한에 관해 말함에 있어서 미국의 압박을 중요시 하는 것 같은데, 물론 그 점도 중요하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그 점을 간과하고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핵무기가 없었는데 일방적으로 한 독립 국가를 무찌른 게 미국의 이라크 침략이 아닌가. 석유 이권을 확보하고 이스라엘을 돕는 숨은 의도 말고는 달리 설명이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런 미국이다. 그러나 북한 문제에 있어서는 공산 체제 자체가 실패했다는 북의 내재적인 요인 분석이 추가되어야 할 줄 안다. 

'공동 상속 제도', 참 기발하다. 마음에 다가온다. 많은 고통 받는 서민들에게 공감을 받을 것이다. 지금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이 휘몰아치는 이른바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의 대세 속에서 빈부 격차는 심화 일로에 있으며, 언론에 계속 보도되는 대로 청년 실업, 비정규직 문제 등의 심각성은 우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그러나 순리로 풀어야지, 우악스럽게 해결하려 할 수가 없다.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와의 조화 문제도 생각해야 한다. 그러한 세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과 충돌한다고 하지 않겠는가. 규모와 가족 단위의 중요성 등 말이다. 더구나 지금은 국제화가 되어 자본이나 자본가가 도피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본의 규제에는 일국만이 아니라 국제적인 협조가 요청된다는 것이다. 부유세도 글로벌(global) 해야 효과가 있다는 이야기다. 김 형의 의분과도 같은 분노에는 느낌을 같이 하나, 잠깐 그 방도에는 심사숙고가 필요할 것 같다. 

외국 학자 가운데는 '사회적 상속'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상속세가 있으나 대개의 경우 생전에 이리저리 편법을 사용하여 자녀들에게 재산을 넘겨주고 실제로 내는 세금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지금의 상속 세제만 철저하게 집행해도 상당한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들이 있다. 

라만차의 돈키호테는 시대와 상황이 맞지 않아 그렇지, 기사도를 위해 진실되게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 키호틱(quixote)한 주장과 행동으로 주변에 웃음을 주기는 했으나 경멸을 당하지는 않았다. 

김낙중 형을 돈키호테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김 형은 나름대로 성실하고 진실되게 살아왔다고 본다. 라만차의 돈키호테처럼 시대와 상황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겠지만 말이다. 

나를 포함한 친구들이 좋은 산초 판사 역할을 해주었더라면 싶은데 그렇게는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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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출신으로 김영삼 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역임했다. '비판적 보수주의자'로 불리며 이념을 떠나 보수와 진보 양쪽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원로 지식인이다. 프레시안에 연재한 기고를 바탕으로 <언론·정치 풍속사>를 냈고 이후 대담, 연재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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