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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의 국제정치와 또 다시 찾아온 전쟁위기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6/01/14 15:11
  • 수정일
    2016/01/14 15:1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강태호 2016. 01. 13
조회수 863 추천수 0
 

   대북 강경책을 취했던 부시 행정부의 백악관에서 아시아담당국장을 했던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에게 4차 핵실험 이전까지 북한의 모습은 오히려 이례적인 것이었다. 한미일 군사협력을 강조하고 사드(고고도 미사일 요격 시스템) 배치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그는 보수 강경파다. 그러나 봉쇄 정책을 반대하는 대북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해 7월 국내 한 일간지의 한 칼럼에서 “대화를 거부하고 있는 북한이 동시에 상당히 잠잠한 것은 이례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2013년 대미 전면 대결전을 선언하고 3차 핵실험을 한 이래 북한은 대대적인 ‘도발’을 하지 않았다. 또 “북한의 격렬한 외교적 발언들 속에는 대화를 향한 욕구도 공격의 전조(前兆)도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북한의 김정은은 지금 외부세계에 혼자 있게 가만히 내버려 달라는 것처럼 보인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런 그의 분석을 받아들인다면 4차 핵실험으로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당 제1비서)겸 최고사령관은 ‘외교도 도발도 아닌 모호한 은둔상태에 종말’을 고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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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6일 핵실험에 서명하는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과 친필 사인 

 

  그런 점에서 이번 4차 핵실험은 새해 벽두에 사전에 탐지되지 않고, 예고 내지 통보되지도 않은데다 북한이 수소폭탄이라고 발표함으로써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결코 이례적인 것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4차 핵실험을 왜 했는가는 아니더라도 왜 이 시점에 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질 수가 있을 것이다. 
  보수진영과 대북 강경파들은 6자회담과 북핵 폐기를 명기한 9.19 공동성명의 합의가 북한의 핵 개발을 막지 못했다고 비판하면서 심지어 핵 개발의 명분과 시간을 벌도록 했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북한의 2006년과 2009년 그리고 2013년 3번에 걸친 핵실험은 모두 회담이 좌초된 상태에서 감행됐다. 그에 비춰보면 2013년 2월 핵실험 뒤 지난 3년여의 기간에 6자회담은 물론이고 북미, 남북간에 실질적인 협상이나 회담이 없었음에도 북한이 장거리 로켓 발사 등 대규모의 도발을 감행하지 않은 것은 빅터 차 교수의 지적처럼 이례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이때부터 장거리 로켓 발사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북한의 새로운 로켓 발사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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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봄 발사직전 단계에 갔던 무수단 미사일

 

 지난해 중반 함경북도 풍계리 핵실험장에서는 핵실험 준비를 예고하는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 산하 한미연구소가 운영하는 북한 누리집인 <38노스>는 6월 초 북한이 적어도 올해 가을까지는 핵실험을 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그에 반해 북한은 장거리 로켓 발사 준비만큼은 착착 진행시켰다. <38노스>는 7월 28일 최근 촬영한 민간 위성사진을 판독한 결과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 로켓 발사장 내부의 증·개축 공사가 완료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군 정보당국도 로켓 발사대를 기존 50m에서 67m로 높이는 증축 공사를 거의 마무리한 것으로 봤다. 공사가 시작된 게 2013년 말이었으니 1년 6개월여 만이다. 정보당국과 전문가들은 이 발사대 증축으로 북한이 2012년 말 발사에 성공한 은하-3호를 뛰어넘어 미 본토에 도달하는 장거리 로켓을 발사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이에 앞서 <38노스>는 2015년 5월 말 상업용 위성사진을 근거로 북한이 동창리 발사장 발사대 동쪽 끝에 새 건물을 짓고 발사대와 연결된 플랫폼을 만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정보당국은 이 시설이 미사일 제작과 조립 작업을 위한 것일 수 있다고 봤기에 긴장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은 과거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할 때 평양시 산음동 병기연구소에서 로켓 동체를 만들어 동창리 발사장으로 운반했기 때문에 한미 정보당국에 쉽게 포착됐다. 반면에 동창리 발사장에 미사일 제작과 조립 시설이 들어서면 기습적인 발사가 가능해진다. 한미 정보당국의 허를 찌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설들은 제작 공장이 아닌 것으로 최종 판단됐다. 
  또 군 당국은 7월23일 이 기지에서 30m에 달하는 로켓 1단 추진체의 연소실험을 한 걸 확인했다. 2012년 은하3호 발사 당시 3단 로켓의 전체 길이가 30m였고, 이중 1단 추진체가 20m였던 것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약 1.5배나 커진 셈이다. 2012년 말 발사당시 남쪽 군당국은 서해에 낙하한 은하3호 로켓의 1단 잔해를 수거, 분석하여 구체적인 성능 분석을 할 수 있었다. 국방부는 1단 로켓이 산화제로 상온 보관이 가능한 적연질산을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그 목적이 탄도미사일 개발에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미국 미사일 전문가인 랜드연구소의 마커스 실러 연구원 등은 2단 및 3단에 저추진력의 엔진을 사용함으로써 당시의 발사는 북한이 주장했듯이 우주발사체 용도였던 것으로 분석했다. 그러므로 북이 은하 3호를 미사일로 발사할 경우 2단 및 3단 추진체에 노동 엔진이나 비슷한 엔진을 쓰면 사거리를 최대 1,000 km까지 더 증가시킬 수 있으며, 어떤 것이든 적어도 700 kg의 물체(탄두)를 8,000 km 거리까지 실어나를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됐다. 따라서 신형 장거리 로켓의 사거리는 미 본토를 표적으로 삼을 수 있는 1만㎞를 넘을 것으로 추정됐다
  이밖에 국내 언론은 정부쪽 소식통들을 인용해 김정은이 노동당 창건일을 기념해 ‘인공위성’을 발사하라고 했다는 첩보를 전하기도 하고, 평양 인근의 병기 공장에서 장거리 로켓 제작으로 보이는 징후들이 있다는 얘기들을 내놓았다. 여기에 때맞춰 유엔, 중국, 러시아,영국 등 주요국의 북한 대사들이 기자회견을 하면서 “북한은 무엇이든 자유롭게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으며. 어떤 조약이나 의무에도 구속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쏟아냈다. 그 뒤 <교도 통신>은 8월2일 외교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이 발사대에 덮개 설치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미 정보당국은 이 작업이 8월 중 완료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고 전했다. 덮개가 설치되면 위성의 감시활동이 어렵게 된다. 그리고는 9월 들어 14일 북한 국가우주개발국장이 “새로운 지구관측위성 개발을 마감단계에서 다그치고 있다”고 밝혔으며, 9월 18일엔 ’인공위성은 우리 공화국의 자주권의 상징이다’라는 제목의 <중앙통신> 논평에서 “국제법적으로 공인된 주권국가의 합법적 권리인 평화적 우주개발을 걸고 드는 것이야말로 우리에 대한 용납 못할 도발”이라며 발사 강행 의지를 피력했다. 또 9월 15일엔 조선원자력연구원 원장이 <중앙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대북)적대시 정책에 계속 매여달리면 언제든지 핵뢰성으로 대답할 준비가 있다”(<조선신보> 9월 16일)고 경고했다. 이로 인해 8.25 남북 합의까지 영향을 미쳐, 이산가족상봉이 무산될지 모른다는 우려 섞인 관측들이 확산됐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김정은 제1위원장이 중국이 초청한 9월3일 전승절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위성발사를 강행하겠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 시기를 즈음해 미국을 방문한 시진핑 주석은 9월25일 오바마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9.19 공동성명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한반도에 긴장을 조성하거나 유엔 안보리 결의를 위반하는 어떠한 행동도 반대한다”고 밝혔다. 북한을 직접 겨냥한 발언이었다. 
   
    로켓 발사 중단과 세갈래의 대화 기류
 
   그러나 9월 하순 갑자기 기류가 바꾸었다.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9월28일 당 창건 70주년 기념일인 10월 10일께 이뤄질 것으로 전망돼 온 장거리 로켓 발사 관련 준비가 멈춘 듯한 양상이라고 전했다. 이 신문은 인공위성 정보에 의하면, 당 창건일을 기준으로 ‘D-15’였던 9월 25일 시점에서 북한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에서 미사일(로켓) 본체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하루 전날인 9월 24일 조선 국가우주개발국장은 <CNN>과의 기자회견을 자청해 “위성발사는 다가오고 있고 최종 준비가 진행되고 있다”면서도 “우리가 위성을 특정한 축일이나 기념일에 쏘아올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틀렸다”라고 했다. 10월 축전을 맞은 위성 발사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 날이었다. 또 북한은 기체 낙하에 대비한 선박 항해 금지구역 설정도 하지 않았는데 이는 지난 2012년 12월 12일 장거리 로켓을 발사했을 때에 비하면 상당히 지연되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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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핵실험에 대응한 무력시위 나선 B 52 전략폭격기

 

 북한은 당시 로켓 발사 준비를 했지만 로켓 발사를 공식화하지 않았다. 7월28일 북한의 장일훈 유엔 주재 차석대사의 발언도 그렇고 그 핵심은 북한은 ‘위성발사의 권리’를 갖고 있으며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로켓 발사는 무기 이른바 ’군사’의 문제를 넘어 국제정치의 복잡한 역학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민감한 안보현안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한국에 배치하려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인 사드(THAAD)의 문제가 한미, 한중 나아가 미중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외교 현안이 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중국의 류윈산 정치국 상무위원의 방북이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움직임에 영향을 줬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북한이 ‘주권적 권리’라고 주장하는 위성발사를 포기한 것으로 볼 수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로켓 발사 중단은 8월 하순 이후 전개된 세 갈래의 대화 흐름이 서로 맞물리면서 나타난 것으로 봐야 한다. 우선 8월초 목함지뢰 사건이 터지자 북한은 준전시상태룰 선포했으며, 남북의 추가적인 맞대응으로 한반도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긴장이 고조됐다. 그러나 남북은 김양건 당비서- 김관진 안보실장의 담판을 통해 8.25 합의를 함으로써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뒀다. 두번째는 북중 관계의 변화다. 9월3일 김정은 제1비서의 전승절 불참에도 중국은 공식 서열 5위인 류윈산 상무위원을 10월 10일 북한의 당창건 기념일에 보내기로 했다. 그 발표시점이 10월 4일이었다는 점에서 그에 앞서 북한의 로켓 발사 움직임이 중단된 것은 북중간에 교감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세 번째는 북미 대화의 분위기다. 북미간 대화와 관련해서도 미국쪽에서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기 때문이다. 9월 19일(미국 현지시간) 성김 대북 정책 특별대표는 “우리는 북한과 진정으로 대화할 용의가 있다...평양이든 다른 곳이든 장소는 중요치 않다”고 말했다. 그가 방북 의사를 내비친 건 2015년 1월 말 북미 대화가 북한의 평양초청을 그가 거부했기 때문에 무산됐다는 점에서 북미 공식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었다.  2월 1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중앙통신> 기자와의 대담을 통해 “김 성이 이번 아시아 방문기간 우리와 만날 의향을 표시한데 대하여 평양에 오라고 초청까지 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그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마치도 우리의 불성실한 태도 때문에 대화와 접촉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듯이 여론을 오도하면서 책임을 우리에게 전가하려 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미국과 북한의 대화가 평양이라는 장소 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불발되었음을 폭로한 것이다. 방북을 금기시했던 성 킴 대표가 평양 방북 용의를 밝힌 것은 변화였다. 그런 점에서 이 시기 북한의 움직임은 북중, 미중간의 관계가 상호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 시기를 전후한 9월25일 시진핑 주석과 오바마 대통령의 워싱턴 정상회담은 북미대화의 문을 여는 쪽으로 작동했다고 볼 수 있다. 
       
   한미 군사훈련과 핵실험 및 탄두 소형화의 상호 중단  
 
   이런 남북, 미중, 북미간의 상호교감을 바탕으로 북한은 10월 1일 리수용 외무상의 유엔 총회 연설과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평화협정 체결을 다시 제안했다. 북한은 2015년 1월 30일 성 김의 평양 초청이 무산되자 2월 4월 국방위원회의 담화를 통해서 미국과의 대화 단절을 선언했었다. 북한은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모든 문제의 발생근원인 미국의 적대시정책의 종식이 확인되면 미국의 우려사항을 포함한 모든 문제들이 타결될 수 있다”며 선 평화협정, 후 핵폐기를 제의한 것이다. 미국은 “정전체제를 대체하는 평화체제로 가려면 그 전에 비핵화의 핵심 이슈에서 중요한 진전이 있어야 한다”는 기존의 입장으로 대응했다.  당창건 기념일 3일전인 10월 7일 북한은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우리는 이미 공식경로를 통하여 미국 측에 평화협정 체결에 진정으로 응해 나올 것을 촉구하는 메쎄지를 보내였다. 우리는 미국이 평화협정체결과 관련한 우리의 제안을 심중히 연구하고 긍정적으로 응해 나오기를 기대한다”라며 다시 대미 평화협정 논의를 제시했다. 
   이 평화협정 체결 논의의 핵심은 2015년 1월9일 북이 미국쪽에 전달한 것으로 미국이 합동군사연습을 임시 중지하면 미국이 우려하는 핵실험 임시 중지등의 화답 조치들로부터 협상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북한은 2015년 1월10일 <중앙통신>의 ‘보도’ 형식을 통해 북한이 9일 미국 측에 전달한 메시지에서 “미국이 올 해에 남조선과 그 주변에서 합동군사연습을 임시 중지하는 것으로써 조선반도의 긴장완화에 기여할 것을 제기하고 이 경우 우리도 미국이 우려하는 핵실험을 임시 중지하는 화답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는 데 대하여 밝혔다”고 전한 바 있다. 어떤 경로로 이 메시지가 전달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 뒤 1월18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반관 반민의 1.5 트랙 회의에서 조지프 디트라니 전 미국 국가정보국(DNI) 산하 비확산센터 소장은 리용호 북한 외무성 부상이 “한미 합동 군사훈련 중단의 대가로 핵실험과 함께 핵탄두 소형화 노력도 중단하겠다고 제안했다”고 거듭 밝혔다. 
  이정철 숭실대 교수는 9월말 북한의 장거리 로켓발사 중단은 “북한이 지난 2012년 북미간에 합의했던 2.29 합의를 실패로 만든 군사연습과 로켓 발사 강행이라는 두 악재를 한미 합동군사연습의 축소와 로켓 발사 및 핵실험의 동결 검증과 서로 교환하는 ‘동결식 평화 체제’를 기대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북한이 내비친 평화협정과 적대시 정책 중단의 최소 요구 수준을 미국이 수용한다면, 그리고 미국과 남한이 요구한 로켓 발사와 핵실험의 동결과 검증을 북한이 수용한다면 이것이야말로 한반도의 비핵화를 위한 첫 단추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였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월 16일 워싱턴에서의 정상회담에서 한미 두정상은 이런 북한의 제안에 대해 논의했다. 이 정상회담에서 북핵 문제의 해결과 관련해 ‘최고의 시급성과 확고한 의지(utmost urgency and determination)’라는 표현이 들어간 별도의 대북 공동성명을 작성한 것은 북한의 제안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두 정상은 또한 “대북 적대시 정책을 갖고 있지 않으며, 비핵화라는 우리의 공동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북한과의 대화에 열려 있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라는 메시지를 내놨다. ‘대북 적대시 정책(hostile policy)’이라는 표현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 또한 북의 요구에 대한 답변으로 볼 수 있다. 
   그러자 북한은 한미정상회담 직후인 10월18일 한 급 높은 외무성 성명을 통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문제는 무엇보다도 미국이 먼저 용단을 내려야 할 문제이며 조미사이에 우선 원칙적 합의를 보아야 할 문제이다. 유엔도 평화협정체결을 적극 지지 고무해 나섬으로써 조선반도에서 한 성원국과 유엔 군사령부가 교전관계에 있는 비정상적인 사태를 끝장내는데 자기 몫을 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북한 초청은 이런 맥락에서도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명은 “미국이 평화협정 체결 문제를 외면하거나 그에 조건부를 다는 식으로 나온다면 우리에 대한 적대시정책을 포기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세상에 낱낱이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될 것이다”라며, 대북 적대시 정책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그 실체를 보여줄 것을 요구하였다. 
  특히 이 성명은 “그 기본표현인 대규모 합동군사연습 강행과 핵타격 수단들의 남조선에로의 반입 등 군사적 도발행위들이 주기적으로 모든 협상분위기를 망가뜨리고 조선반도 정세의 긴장만을 고조시키고 있는데 있다”라고 하여 적대시 정책의 폐기 여부는 대규모 합동군사연습 중단과 3대 핵타격 수단의 한반도 반입 금지에 관한 미국의 결정에 달린 것임을 강조하였다. 결국 북한이 원하는 대북 적대시 정책 폐기라는 것은 합동군사연습의 중단 혹은 축소를 최소치로, 평화협정을 통한 정전체제의 대체를 최대치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성 킴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10월 20일 의회 청문회에서 미국은 비핵화 단계를 뛰어 넘는 평화협정 체결에는 관심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11월 10일 워싱턴에서의 강연 뒤 정전협정을 대신하는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과 관련한 질문에 대해 “비핵화를 위한 진전이 없는 한 응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그는 “순서가 반대이다. 최대 문제인 비핵화에서 중대한 진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핵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북조선 당국자와 “언제 어디서도 만날” 용의가 있지만, 상대가 전혀 그런 의사가 없다고 지적하면서 9월 중순 내놓았던 북미 대화의 가능성이 사라진 것은 북쪽에 잘못이 있다는 입장도 밝혔다.  또한 중국이 북한에 대대적인 경제지원을 계속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중국은 북조선을 설득하는 데 특별한 책임이 있다. 더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라며 영향력 행사를 요구했다. 그 뒤 8.25 합의에 따라 어렵게 성사된 12월 11~12일의 남북차관급 당국회담도 아무런 성과 없이 결렬됐다. 북한은 이 회담에서 박근혜 정부가 미국의 압력으로 금강산관광 재개조차도 수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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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1일 김정 국방위원장 잠수함 발사탄도미사일의 실험을 보고 기뻐하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 제1 위원장이 수소폭탄 개발을 언급한 것은 12월 10일로 바로 이 시점이었다. 그는 이날 개보수를 끝낸 평천 혁명사적지를 시찰하면서 “우리 수령님(김일성 주석)께서 이곳에서 울리신 역사의 총성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 조국은 나라의 자주권과 민족의 존엄을 굳건히 지킬 자위의 핵탄, 수소탄의 거대한 폭음을 울릴 수 있는 강대한 핵보유국으로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 뒤 북한은 12월 21일 동해 신포항 인근 수중 잠수함에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성공적으로 발사했다고 보도했다. 
   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2016년 1월 7일 이번 ‘수소탄 시험’ 감행의 주요 원인으로 지난해 1월 북한이 ‘한 미 연합군사연습을 임시 중지하면 핵실험을 임시 중지할 수 있다’는 제안을 했지만, 미국이 ‘암묵적 협박(implicit threat)’이라고 일축한 점을 꼽았다. 신문은 또한 “미국에 대하여 8월 사태(목함지뢰 사건을 계기로 한 군사적 충돌위험) 교훈에서 배워 유명무실화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할 것을 촉구하였다”며 “평화협정 체결로 전쟁상태에 종지부가 찍어진다면 조선반도의 안전환경은 극적으로 개선되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동안 북한은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제재 등을 결의하면 핵실험으로 긴장 수위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북한의 1∼3차 핵실험은 모두 장거리 로켓 발사 이후 1∼3개월 안에 이뤄졌다. 2006년 7월 대포동 미사일 발사는 그 해 10월9일 첫 핵실험으로 이어졌다. 또 2009년 4월 장거리 로켓(인공위성) 발사로 촉발된 위기는 5월 북한의 2차 핵실험으로 비화했고, 2012년 4월 그리고 12월 두번의 로켓 발사는 2013년 2월 3차 핵실험을 초래했다.  물론 각각의 정세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2006년 7월은 부시 행정부의 방코델타 아시아은행의 불법거래를 내건 대북 금융제재에 맞선 것이었다. 북한은 이때만큼은 인공위성 발사를 위한 로켓이라 하지 않고 미사일(대포동 2) 발사로 명명했다. 미사일 운반수단을 갖지 못한 핵무기는 기껏해야 자폭수단이 될 뿐이니 미사일과 핵 실험은 같이 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장거리 로켓발사와 핵실험이 한묶음으로 가는 것은 군사적으로나 북한이 처한 상황으로 볼 때 자연스런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북한이 이번에는 핵 실험 뒤 장거리 로켓 발사에 나설 가능성 또한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북미 서로 과거와 다른 협상 방식 고수 
 

  2013년 4월 케리 국무장관은 하원 청문회에서 북핵 문제에서 과거의 방식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즉 비핵화의 조건 없이 테이블에 마주 앉아 경제적 지원 및 평화체제 문제를 논의하는 방식은 더 이상 안하겠다는 것이다. 과거의 방식을 거부하는 건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2013년 6월 미국과의 고위급 회담을 제안한 국방위 중대담화에 깔려 있는 북한의 핵 문제에 대한 접근법은 1994년 제네바 합의나 6자회담에서 나온 9·19 공동성명과 같은 비핵화 협상 방식의 거부다. 예를 들어 2013년 3월말 핵 무력 강화 및 경제건설 동시추진의 병진노선을 채택한 직후인 4월1일 <로동신문>사설은 “미제가 우리를 핵으로 위협하며 경제건설에 제동을 걸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선언했다. 자신들도 이제는 핵보유국이니 주변에서 이를 인정하고, 특히 미국과는 ‘대등한’ 입장에서 핵군축의 구도에서 대화와 협상을 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이 이처럼 과거의 비핵화 협상 방식을 거부하는 까닭은 핵보유라는 현실 말고도 더 이상 에너지 지원과 경수로 건설에 매달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38노스>를 운영하고 있는 조엘 위트 미국 존스홉킨스대 초빙교수는 2013년 10월9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북한은 현재 비핵화로 종결되는 ‘다단계(multi-stage) 협상 프로세스’를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북의 입장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미국내 대북 전문가이며 이  내용은 9월말 10월초 베를린, 런던에서 있은 북미 1.5 트랙 대화를 바탕으로 나온 것이다. 그에 따르면 북한의 입장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첫째로 비핵화 협상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그러나 대화의 전제조건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만 대화 초기에 또는 대화를 위한 신뢰구축 단계는 가능하다. 세 번째로 비핵화, 정치, 군사, 경제분야 등 다단계 협상 프로세스다. 그건 과거 제네바 합의 또는 일련의 6자회담 합의와 마찬가지로 여러 단계를 거치며 양쪽이 필요한 조처들을 취해나가는 방식이다. 물론 핵 프로그램의 해체는 종착역이다. 그러나 위트는 2012년 또 다른 인터뷰에서 “식량이나 에너지 지원으로 핵문제를 푸는 단계는 지났다”면서 “북한은 안보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고 있으며, 북한과 직접 대면해 그들이 원하는 평화협정과 미국이 원하는 대량파괴무기와 프로그램의 폐기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북의 이런 핵보유국 논리에 입각한 새로운 접근법은 ‘비핵화의 조건 없으면 대화는 없다’는 미국의 강경대응과 충돌했으며 결과적으로 중국의 유례없는 적극적 중재를 무색하게 만들어 왔다. 2012년 출범한 중국의 시진핑 지도부는 북한에 대한 외교적 경제적 압박과 유엔제재 이행을 공언하면서 북핵 문제에 대해 그 어느때 보다 적극적으로 관여해 왔다.  예컨데 2013년 9월19일 왕이 외교부장은 워싱턴서 케리 장관과의 회담 뒤  “6자회담을 어떻게 재개할지에 대해 미국과 새롭고 중요한 합의를 도출할 자신이 있다”고 밝히고, 브루킹스 연구소에서의 연설을 통해 북한은 2005년 9월 6자회담 공동성명과 우라늄 농축작업 일시 중단 등을 수용한 2012년 2월29일 북미 합의에 복귀할 용의가 있다고 구체적으로 말했다. 이는 6자회담에 사망선고를 내리고 9.19 공동성명 합의를 거부하는 자세를 보였던 북한의 팔을 비틀어 입장을 바꾸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케리 국무장관은 2013년 10월3일 “북한이 비핵화를 결심하고 진정한 협상에 나선다면 북한과 불가침 협정을 체결할 준비가 돼 있다”는 발언으로 화답했다. 그러나 북미 대화 재개로 이어지지 못했다. 미국이 비핵화 없이 대화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2014년 들어서도 북미는 접점을 찾지 못했다. 한중일 순방에 나선 대니얼 러셀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2월17일 미국의 대북 정책 목표는 ‘대화재개가 아닌 비핵화 실천’이라고 밝혔다. 이에 반해 같은날 북한에 들어갔다 20일 곧바로 남한에 온 류전민 중국 외교부 부부장은 북한이 여전히 조건 없는 6자회담 재개를 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2015년 들어 핵실험과 군사연습 중단 내지 동결을 제의한 북한의 제안에 대해서도 미국은 북한의 선 비핵화를 요구함으로써 협상은 물론이고 대화조차도 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협상 무용론자들은 6자회담과 9.19 공동성명의 합의가 북핵 개발을 막지 못했다고 비판하지만, 2006년과 2009년 그리고 2013년 3번에 걸친 핵실험은 모두 회담이 좌초된 상태에서 감행됐다. 게다가 6자 회담 또는 협상을 대신한 그 어떤 정책이나 전략도 북한의 핵 위협을 약화시키거나 저지하는 데 실패한 것 또한 너무나 분명하다. 
 
  2013년의 데쟈뷰-북한의 전투준비태세 대 미국의 플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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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0일 오산공군기지에서 테런스 오샤너시 미 7공군사령관 겸 주한미군 부사령관이 핵실험에 대응한 한미군사대비태세를 설명

 

  큰 흐름에서 보면 1993년의 1차 핵 위기는 10년 만인 2003년에 2차 위기로, 다시 10년 만인 2013년에 3차 핵위기로 묘하게도 10년 주기설을 보여왔으며, 공교롭게도 93년 김영삼, 2003년 노무현, 2013년 박근혜 등 새 정부가 출범하는 2~3월에 북핵 위기는 정점으로 치달았다. 새 정부 출범의 시기가 한반도 정세를 위기로 반전시키는 전환점이 된 것이다.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왜 그런가? 새 정부 출범에 따른 정책 전환이 기존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정권 교체에 따라 정책의 연속성이 단절되고 기존 합의가 부정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2000년의 미 대선과 2007년 남한의 대선으로 이뤄진 부시, 이명박 정권으로의 교체가 기존 합의를 붕괴시킨 원인이 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여기에 시기적으로 보면 누적된 갈등과 대결이 팀스피리트, 키리졸브 등 한미 군사연습을 앞둔 상황에서 정면대결의 힘겨루기로 치달은 측면도 있다. 
  2016년 봄 한반도는 정권교체기는 아니다. 그러나 다시 북한의 핵실험을 응징하기 위한 미국의 핵무기 등 군사적 시위와 유엔 및 한미일의 강도 높은 대북 추가제재 등을 앞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2월부터는 한미 합동 군사연습인 키리졸브와 독수리 훈련이 이어지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미국이 보여준 괌에서 발진한 B-52 전략폭격기의 한반도 출격은 2013년 2월 북한의 3차 핵실험에 맞선 대응조처를 그대로 재현하는 듯하다. 당시 미국은 <월스트리트저널>(2103년 4월3일자)에 따르면 이른바 ‘플레이북’으로 대응했다. 작전계획의 하위 개념인 플레이북은 2012년 12월 미 태평양 사령부가 북한의 군사위협에 대응해 새롭게 마련한  일종의 ‘전술교본’이었다. 그 목적은 북이 위협을 가할 경우 훨씬 강력하고 압도적인 무력시위를 통해 북한이 추가 도발에 나서지 못하도록 제압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 정부의 지나친 군사적 대응도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전면 대결전을 선언한 북한은 2월12일 3차 핵실험을 감행한 데 이어 그에 맞서 때로는 보다 선제적으로 정전협정 폐기까지 모든 합의를 무효화하면서 전쟁준비를 본격화했다.  미국과 북한은 ‘키 리졸브’ 연습이 시작된 3월11일을 기점으로 실제 무기를 동원한 ‘도상(圖上)전쟁’을 벌였다. 미국은 3월19일 B-52 전략폭격기를 한반도에 전개하는 등 3월에만 세 차례 이상 B-52를 출격시켰다. 또 20일엔 전략핵잠수함인 샤이엔을 연습에 참가시켰으며 이런 사실들을 모두 공개해 힘을 과시했다. 그러자 북한은 3월20일 B-52가 재출격하면 군사적으로 대응하겠다고 선언했으며, 전략로켓군 부대들과 장거리포병 부대들에 대한 1호 전투근무 태세를 발동시켰다. 당시 인민군 최고사령부 성명은 “지금 이 시각부터  전략로케트군 부대들과 장거리 포병부대들을 포함한 모든 야전 포병군 집단들을 1호 전투근무 태세에 진입시킨다”고 밝혔다. 1호 전투근무 태세는 김정은 최고사령관이 최종적으로 전략로케트군의 미 본토 괌 일본 등의 미군기지에 대한 타격계획을 비준했다는 걸 의미했다. 실제로 북은 사정거리 4000km로 추정되는 중거리 미사일 무수단을 동해안으로 이동시켜 발사 대기상태에 들어갔다. 그러자 미국은 3월 28일 B-52를 능가하는 스텔스 전략폭격기인 B-2를 미 본토로부터 출격시켰다. 북도 물러서지 않았다. 29일 김정은은 전략미사일 부대의 화력타격 임무에 관한 작전회의를 긴급 소집하고 ‘사격 대기상태’에 들어갈 것을 지시했다. 북한도 이 회의를 언론에 공개했다. 미국은 3월31일 주일미군의 스텔스 전투기 F-22 랩터를 한반도 상공에 출격시킴으로써 이 또한 무시했다.
  4월5일 평양주재 외국공관에 전쟁 가능성을 이유로 철수권고를 내리며 발사단추를 누르겠다던 북이 무수단 발사 중단 움직임을 보인 건 4월12일이었다. 정면충돌에서 벗어나려는 첫 신호였다. 북이 미사일 발사대기 상태 해제에 나선 이날은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이 서울에서 한미외교장관회담을 한 날이다. 그는 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북한과 대화를 원한다”고 밝혔다. 
  현재로서는 북미가 2013년 봄의 마주달리는 기관차처럼 서로의 위협수단을 다 드러내 놓고 충돌의 무모한 ‘치킨 게임’이라는 외길에 들어선 듯 하다. 어찌보면 2013년의 봄 대결을 경험한 북미는 서로의 카드를 알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전쟁의 위기를 더욱 고조시키는 위험한 게임을 벌일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그 때와 달리 북한은 지난해 9월 발사준비의 최종단계에서 중단한 장거리 로켓의 발사라는 카드를 갖고 있다.  북은 굳이 이번 로켓 발사를 인공위성 발사로 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2006년 7월처럼 탄두 재돌입을 시험하기 위한 미사일로 쏘아 올릴지도 모른다. 과거에도 미국과 일본 내에서는 로켓 내지 미사일 발사에 대한 요격 주장이 나온 적이 있지만, 한미일이 이를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해 10월 한미 정상은 ‘북핵 문제의 해결과 관련해 ‘최고의 시급성과 확고한 의지(utmost urgency and determination)’를 강조했었지만 이번 북한의 핵실험에 이르기 전까지 그런 의지를 보여줬는지 의문이다. 게다가 전쟁에 대한 확고한 의지로 북의 전쟁의지를 꺾으려 할 때 북 또한 굴복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해 보인다. 군사연습이 정례적인 방어훈련이 아니라 전쟁을 초래할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이다. 그렇다면 전쟁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조처는 핵동결과 군사연습 등 상호간 적대적 군사행위의 중단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중러가 6자회담 틀 내에서 정치.외교적 해결 외 대안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은 그런 점에서 막다른 골목에서 탈출할 수 있는 명분과 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외무부에 따르면, 6자회담 수석대표인 이고르 마르굴로프 아태 담당 차관은 성 킴 미 대북정책 특별대표와의 6일 전화통화에서 “북한의 행동이 유관 안보리 결의들에 대한 정면 위반이라는 우려”를 표한 뒤, “6자회담 틀 내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정치.외교적 해결을 추구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강조했다.  8일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도 ‘중국의 특별한 대북 접근법이 작동하지 않았으니 평소처럼 할 수는 없다’는 케리 미 국무장관 발언과 관련해 “한반도 핵문제의 유래와 문제가 중국에 있지 않으며, 해결의 관건도 중국에 있지 않다“라고 ‘중국책임론’을 일축했다. 중국의 이런 자세는 한미일이 일방적으로 북한을 밀어부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그 역시  ”국제 비핵산 체제 및 동북아 평화.안정 유지라는 대국에서 출발하여, 6자회담 틀 내에서 대화와 협상을 통해 관련국의 합리적 우려를 적절하게 처리함으로써 반도의 장기적 안정을 실현하는 것이 근본 방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미중은  그동안에도 북핵 문제의 해결을 놓고 책임공방을 벌여왔다. 2014년 4월 오마바 대통령의 일본과 한국 방문을 앞둔 상황에서 대니얼 러셀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가 중국을 압박했다. 그는 2014년 4월1일 워싱턴 DC ‘아시아소사이어티’가 마련한 미국의 대아시아 외교 관련 전화 토론회(conference call)에서 중국이 북한 비핵화란 목표에 진정으로 동의한다고 하면서도 대북 경제협력에 적극 나서는 등 대북제재에 미온적이라고 비판했다. 그가 보기에 이는 중국이 국경지역, 즉 북한의 안정과 북한의 핵능력 차단이라는 두 가지 정책 목표의 우선순위를 놓고 갈등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가 중국이 바라는 진정한 지역안정은 북한이 계속 핵무기를 추구하는 한 결코 확보될 수 없다고 말한데 있다. 러셀은 ”북한의 핵무기 능력 추구와 그 운반 수단인 탄도미사일 개발이야말로 지역 불안정의 근본 원인(fundamental driver of instability)“이라고 단정했다. 따라서 중국이 진정한 지역안정을 원한다면 이 근본원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데 그는 “한미일 3국의 군사훈련이나 한반도 주변 병력 집결 등은 북한을 억지하기 위한 것이지만, 중국이 이를 원치 않는다면 대북 영향력을 행사하라”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미국이 중국을 겨냥한 것임에도 사드 배치의 명분을 북한의 노동미사일 위협으로 내세운 것과 같은 논리다. 중국이 사드가 중국을 위협하는 것으로 지역안정을 해친다고 생각한다면 북한의 핵 미사일 도발을 막으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추이톈카이 주미 중국대사는 강하게 반발했다. 그는 며칠 뒤인 4월10일 워싱턴 DC 미국평화연구소(USIP) 강연에서 우선 중국이 북한으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강제로 하도록 만들라는 것은 ‘불가능한 임무(mission impossible)’라고 반박했다. 그에 따르면 미국은 중국에 ‘불가능한 임무’를 요구하면서 ‘만일 중국이 못하겠다면 중국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공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상호 협력하는 데 있어 건설적인 태도가 아니”라고 그는 비판했다. 한마디로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은 회담이 재개되지 않는 책임이 북한에만 있다고 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강태호 선임 기자 kankan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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