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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가도 또 가고 싶은 절, 합천 해인사의 '옥에 티'

 

장경판전 전면 통제, 고민과 대안이 필요하다

16.03.04 21:15l최종 업데이트 16.03.04 21:15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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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만대장경과 고려각판 견본 견본이 장경판전에서 학사대 가는 길목에 걸려 있다. 바로 옆에는 장경판전 내부와 팔만대장경 사진을 붙인 간이 벽이 세워져있는데, 이것을 배경으로나마 사진을 찍으라는 절의 '배려'인 셈이다. '인증샷' 따위에 별 관심이 없는 나같은 사람들에게는 흉물스러울 뿐이었다. 뒤로 보이는 건물이 장경판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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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12월 말 광주-대구 간 고속도로가 확장 개통하면서 광주에서도 해인사 가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톨 게이트에서 해인사에 이르는 길도 4차선으로 확장되어, 중간에 휴게소에 들르는 시간을 감안해도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변변한 중앙분리대조차 없어 '죽음의 도로'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던 왕복 2차선의 88 올림픽 고속도로 시절에 견준다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해인사는 1년에 적어도 두세 번은 찾게 되는 고향집과 같은 곳이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 때문만은 아니다. 꼬불꼬불 절에 오르는 길, 길동무 같은 홍류동 계곡의 풍광이 아름다워서고,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1킬로미터쯤 되는 길을 나무들과 대화하며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해서다. 여느 절이 지니지 못한 해인사의 '복'이라 생각한다. 

해인사는 순천 송광사, 양산 통도사와 함께 흔히 '삼보사찰'로 불린다. 부처의 말씀, 곧 불법을 목판에 새겨놓은 팔만대장경을 소장하고 있어 '법보사찰'로 명명됐다. 주변에 수십 개의 부속 암자를 거느릴 만큼 사찰의 규모 또한 크고, 경내에 국보와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도 즐비해 사시사철 탐방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해인사만큼 숨은 볼거리가 지천인 절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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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인사 경내에 오르는 길 일주문에서 천왕문에 오르는 길,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나무들이 반갑게 인사하듯 허리를 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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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 해인사로 봄 마중을 나섰다. 대개 탐방객들은 주위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오로지 팔만대장경을 향해 내달리지만, 해인사만큼 숨은 볼거리가 지천인 절이 또 있을까 싶다. 그나마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장경판전이 절의 맨 뒤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서망정이지, 만약 입구에라도 있었다면 절 안마당으로 들어와 보지도 않았을 성 싶다. 서둘지 않고 안내판만 찬찬히 읽어봐도 해인사가 달리 보일 것이다.

절에 오르는 길, 우리나라 현대 불교의 정신적인 스승으로 추앙받고 있는 성철 스님의 승탑(부도)을 놓치긴 아깝다. 그의 가르침을 현대적 조형미로 형상화 한 승탑 앞에서 그가 남긴 주옥같은 명언을 찾아 읽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성철 스님의 사리를 모셔놓은 이 승탑은 지난 1999년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환경문화상을 수상한 '예술작품'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조금 더 가면 해인사 관광 안내판과 나란히 자리한 곳에 생뚱맞은 삼층탑 한 기가 눈에 띈다. 이름조차 생소한 묘길상탑으로, 딱히 예술적 가치가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작품인데도 보물 제1242호로 지정되어 있다. 폐허가 된 절터 등에서 옮겨온 게 아니라면 마땅히 법당 앞에 자리하고 있어야 할 텐데, 절에서 쫓겨난 듯 일주문 바깥 외진 곳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그다지 볼품이 없어 탐방객들에게 별 관심을 끌진 못하지만 결코 만만하게 볼 문화재는 아니다. 호족세력이 할거하고 농민봉기가 들불처럼 번지던 신라 말, 왕실의 편에 서서 맞서 싸우다 전사한 수십 명의 해인사 승려들의 혼을 달래기 위해 세운 위령탑이다. 더 이상의 사료가 남아있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은 알 길 없지만, 당시 절이 무능하고 부패한 왕실과 결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더욱 재미있는 건, 이러한 내력을 담은 탑지를 작성한 이가 신라 말 대학자 최치원이었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자신의 이상을 펼칠 수 없는 현실을 비관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들어와 삶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라 조정에 환멸을 느꼈을 그가 임금에게 보인 마지막 충정이었을까. 묘길상탑이 감추고 있는 역사의 비밀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장경판전에서 멀지 않는 절 뒤편에는 천 년 수령의 아름드리 전나무 한 그루를 이고 있는 학사대라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다. 최치원이 시와 서를 즐기며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는데, 일설에는 고무신 한 켤레를 벗어두고 홀연히 산속으로 사라진 터라고도 한다. 그 전나무도 당시 최치원이 거꾸로 꽂아둔 지팡이가 자라 무성해진 것이라고 전한다.

그뿐 아니다. 장경판전 내 법보전에 모셔진 목조 비로자나불좌상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불상으로, 883년이라는 제작년도가 밝혀져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해인사의 창건 때부터 줄곧 함께해온 불상인 셈인데, 아무리 금을 입혔다고는 하나 천 년을 견뎌낸 나무라니 그저 신비롭기만 하다. 나무의 나이로만 본다면 이 불상이 팔만대장경보다 한참 선배다.

일주문 못 미친 곳에 세워져 있는 '원표'도 스쳐지나가기 아까운 유물이다. 해인사에서 동서남북 방향의 주변 고을까지의 거리를 표시한 사각 돌기둥으로, 절에 세워진 것으로는 다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대구부, 김천군, 진주군 등의 낯선 지역명으로 미루어 일제강점기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그만큼 당시에도 해인사를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기실 해인사는 대학시절부터 단골 답사코스였다. 죽으나 사나 팔만대장경만 팔며 호객하거나 규모가 크다고 거드름을 피우는 그런 절이 아니었다. 근래 들어 군데군데 무늬만 기와집인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서 경내가 조금 어수선하고 답답해진 느낌이 있지만, 발길 닿는 곳마다 사연이 있고 역사가 담긴 해인사는, 고백하건대, 늘 가도 또 가고 싶은 몇 안 되는 절이다.

오죽하면 딸 이름을 낳기 전부터 해인이라고 지었을까. 출생신고를 하는데 주민 센터 직원이 사람 이름에 도장 인(印)자를 쓰는 경우는 처음 본다며 한자가 맞는지 재차 묻곤 했다. 명색이 가톨릭 신자가 딸의 이름을 절에서 따왔다고 하니 놀라워하는 눈치였다. 그런 그에게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강물을 다 받아주는 바다처럼 살라는 의미에서 지어준 거라며, 내 방식대로 해석해 설명해주었다.

'오직 현금 결제만 가능' 못내 아쉬운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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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경판전 내부에 설치된 철망 틈으로 손을 뻗어 대장경판을 꺼내보려는 일부 탐방객들을 막기 위해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사진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창틀 왼쪽 윗부분에는 'OO 왔다감'이라는 못자국이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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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못내 아쉬운 점도 있다. 하나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 오래 전 관행이고, 다른 하나는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 같은 전에 없던 관행이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이유다. 매번 매표소를 지날 때마다 불만을 토로했고, 돌아와서는 직접 전화를 걸어 요구해온 것인데도 여전히 현금 결제만 가능하다는 답변이다. 매표소에 카드 단말기 한 대 설치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이렇듯 나 몰라라 하는 것일까.

요즘 카드 결제가 안 되는 관광지는 거의 없다. 몇 백 원짜리 입장권조차 기꺼이 카드로 결제하는 세상에, 현금 아니면 안 된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배짱이 놀랍기만 하다. 하물며 해인사의 경우, 어른의 경우 입장권이 3천 원(박물관 입장료는 별도)인데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주차료는 4천 원이니, 한 가족이 간다면 2만 원 가까운 돈을 현금으로 따로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어쩔 수 없이 현금을 건네면서 물어봤다. 대형버스를 타고 온 단체관광객들도 예외가 없는지. 수표를 건네는 경우가 드물게 있긴 하지만, 어떻든 카드로는 결제할 수 없다고 답했다. 입장권에는 금액과 해인사 주지 명의의 날인이 찍혀 있고, 뒷면에는 문화재 보수 및 유지, 관리에 쓰인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입장권 수익을 절과 정부가 일정 비율로 나눈다는 뜻일 텐데, 그렇다면 더욱 카드 결제가 투명하고 효율적이지 않을까. 

굳이 차 몰고 절 코앞까지 가는 탐방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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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경판전의 출입 통제선 해인사 탐방의 백미인 장경판전 안마당 출입이 전면 통제됐다. 간이 울타리를 따라 서너 명의 어르신 봉사자들이 철저히 출입을 막고 있었다. 그 중 한 분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수준이 낮아서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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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볼썽사나운 관행도 있다. 절 아래에 넓은 주차장을 만들어 놓았는데도, 굳이 차를 몰고 절 코앞까지 가는 탐방객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이나 노약자를 대동한 경우를 제외하곤 차량의 접근을 막는 건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당연한 조처다. 그런데, 예외가 너무나 많은 듯하다. 언뜻 걷는 탐방객보다 오가는 차량의 수가 더 많아 보이기까지 한다.

심지어 대형 버스들이 수시로 오르내리기도 한다. 입구에서 물어보니 다른 지역의 불교 신자들을 태운 사찰 순례 차량이란다. 물론 그들 중에도 연로한 어르신들이 없진 않겠지만, 절을 아끼고 사랑하는 불자들이라면 마땅히 다른 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탐방객들에게는 문화재 보호를 위해 걸어오라고 통제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불자라는 이유로 '특권'을 누리겠다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모름지기 '해인삼매'를 구현하겠다는 절답지 않은 관행도 생겨날 판이다. 탐방객들의 장경판전 접근을 아예 차단한 것이다. 곧, 장경판전 내 팔만대장경과 고려 각판(국보 제206호)은 별도로 마련된 외부 게시판의 견본품을 통해 만날 수밖에 없다. 일부 탐방객들의 몰상식한 행동에 맞서 세계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고육지책인 셈이다.

적이 민망한 일이지만, 장경판전 기둥에 뾰족한 물건으로 자신의 이름을 새긴 흔적도 있고, 창틈으로 손을 끼워 넣어 대장경판을 꺼내보려는 걸 막기 위해 철창을 덧댄 모습도 있다. 한 해설사는 탐방객들의 저급한 수준을 나무라며 전면 통제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단언했다. 어쨌든 곳곳에 설치한 CCTV도, 상시 근무 중인 해설사와 자원봉사자들도 별무소용이라는 판단이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입구와 출구를 따로 정해 동선을 일원화하고, 동시에 관람하는 탐방객 수를 입구에서 조정하는 것이다. 또, 순서를 기다리는 탐방객들에게 잠깐이나마 훼손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협조를 당부하는 교육을 행하는 것도 효과적이라 본다. 물론, 여느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처럼 건물과 직접 접촉하지 못하도록 통제 라인을 세우는 것은 기본이다. 

'ㅁ'자형 장경판전으로 에워싸인 마당 가운데에 서서 느끼는 아늑함과 편안함은 먼발치에서 장경판전과 그 틈으로 팔만대장경을 바라보는 감동에 비할 바 아니다. 해인사가 수많은 화재와 난리를 겪었음에도 이곳 장경판전이 무탈했던 이유를 굳이 분석하고 설명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더 이상 만끽할 수 없게 된 건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무작정 막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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