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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국텔' 열풍, 완전히 새로운 뉴스 소비자들의 출현

 

[기자수첩] 콘텐츠 담는 그릇도 콘텐츠… ‘날 것 그대로’에 열광하는 독자들, 뉴스가 재밌으면 안 되나

 

 
조윤호 기자 ssain@mediatoday.co.kr  2016년 03월 05일 토요일

 

야당의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 중단을 전하는 미디어오늘의 기사 제목은 ‘보수 언론과 시민들이 벌인 9일간의 투쟁’이었다. 보수언론은 필리버스터의 의미를 왜곡하고 축소했지만 시민들은 국회를 찾았고 오랜 만에 정치인들에게 열광했다.

시민들은 필리버스터를 일종의 콘텐츠로 소비했고, 그 과정에서 여러 미디어를 이용했다. 따라서 9일 간 190여 시간의 필리버스터는 새로운 미디어 소비행태를 따라가지 못하는 기성 미디어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 시간이었다. 필리버스터 현상은 미디어, 그리고 미디어 종사자를 향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째, 시민들은 ‘날 것 그대로’를 보여주는 콘텐츠에 높은 주목도를 보였다. 그간 시민들이 접하는 정치인의 말이나 언행은 언론에 의해 편집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언론은 자신의 기사에 맞춰 정치인들의 말을 가공하고, 정치인의 행보를 편집한다. 물론 이를 잘 아는 정치인들도 언론을 활용한다.

 

▲ 지난 3월 1일 필리버스터 방청을 위해 국회를 찾은 시민들. 사진=이치열 기자


언론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갈등과 대립에 초점을 맞춘다. 친박과 비박의 갈등, 친노와 비노의 갈등. 언론은 이런 의미에서 정치혐오를 조장한다. 시민들은 언론의 정치 기사를 “저놈들 다 잘라버려야 돼” “맨날 싸우기만 하는 놈들” 등 ‘씹을거리’로 소비한다.

시민들이 야당의 필리버스터를 보며 “생각보다 괜찮은 정치인들이 많다” “정치인들이 저렇게 똑똑한 줄 몰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편집되지 않은 정치인의 말을 접했기 때문이다. 국회방송은 190시간 동안 정치인들의 말을 편집 없이 보여줬고, 언론에 보도된 정치가 아닌 날 것 그대로의 정치를 보면서 새삼 정치인이 싸우기만 하는 존재들이 아니란 걸 학습한 셈이다. 

미디어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게 아니라 정해진 틀에 따라 무엇을 반영할지, 반영하지 않을지 결정한다. 그리고 미디어의 권력은 이 결정권에서 나온다. 하지만 필리버스터 생중계를 보며 정치혐오를 씻어낸 시민들에게 미디어의 권력은 매우 보잘 것 없는 것이 되어버린 셈이다. 

조선일보는 2월 25일자 사설에서 “야당은 아무리 걱정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국민들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정치 염증을 키우는 필리버스터를 당장 중단해야 한다”며 “아무리 합법의 테두리 내에 있더라도 마치 선거운동하듯 필리버스터를 악용하면 국회에 대한 국민들의 혐오감을 키울 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간 미디어의 권력을 이용해 정치혐오를 부추겨온 이들은 기성 미디어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일보의 이 주장은 그 권력을 누리지 못할까 우려하는 불편함으로 들린다.

 

▲ 2월 25일자 조선일보 사설



둘째, 콘텐츠를 담는 그릇 자체가 콘텐츠가 된다. 필리버스터가 많은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낸 것은 그 형식 덕분이다. 시민들은 필리버스터를 생중계하는 국회방송을 두고 MBC ‘마이리틀텔레비전’(마리틀)을 빗댄 ‘마이국회텔레비전’(마국텔)이라고 불렀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마국텔의 형식은 마리텔과 매우 유사했다.

시민들은 ‘마국텔’을 보며 실시간으로 SNS에 댓글을 남기거나 시청 소감을 남겼다. 강기정 의원이 울부짖듯 연설을 할 때는 같이 울먹이기도 하고, 정청래 의원이 박근혜 대통령 성대모사를 할 때면 ‘ㅋㅋㅋㅋㅋㅋ’를 남발했다. 마리텔과 매우 유사하다. 마리텔도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김구라, 백종원 같은 유명인들이 자신의 콘텐츠를 실시간 방송을 통해 보여주면, 누리꾼들이 실시간으로 댓글을 단다. 그러면 방송 진행자들은 다시 그 댓글을 방송에서 읽어준다.

마리텔이 치용한 아프리카TV 등 1인 방송의 가장 큰 특징은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의 반응이 또 다른 콘텐츠가 된다는 점이다. ‘마국텔’도 마찬가지였다. 필리버스터에 참여하는 의원들은 자신의 SNS를 통해 시민들의 의견을 구했다. 김경협 의원은 ‘테러빙자법’ ‘국민스토킹법’ ‘국민감시악법’ 시민들이 댓글로 남긴, 테러방지법 네이밍 60개를 소개했다.

 

▲ 강기정 의원의 필리버스터 생중계 장면을 MBC 마이리틀텔레비전 형식에 합성한 이미지. 이미지 출처 = http://nightworld.tistory.com/128


이미 젊은 층은 아프리카 TV처럼 직접 방송을 보고 댓글을 남기고, 이 댓글이 또 다른 방송 콘텐츠가 되는 방식의 미디어 소비에 익숙해져 있다. 이런 익숙함이 정치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마저 즐거운 콘텐츠로 만든 셈이다. 

필리버스터에 나선 의원들과 의원들이 언급한 단어, 심지어 의원들을 방해한 새누리당 의원들까지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박민식 새누리당 의원이 ‘김학용’ 의원 자리에 앉아서 항의하는 장면이 잡히자 김학용 의원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정청래 의원이 필리버스터 도중 고성을 지르는 새누리당 의원을 향해 “다음 총선 때 도움 받으시려면 이름을 이야기하세요”라고 말한 이유다. 마리텔에서도 방송에 따라 실시간 검색어가 변동하고, 진행자들과 시청자들이 이를 함께 즐기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신경민 의원은 “필리버스터는 새누리당 공약“이라며 새누리당 홈페이지를 확인해보라고 말했고 이 말에 누리꾼들이 몰려가면서 새누리당 홈페이지는 다운 됐다. 마리텔에 출연한 가수 데프콘이 ‘뽐뿌’ ‘엠팍’ 등 특정 사이트 이름을 거론하고 누리꾼들이 특정 사이트에 몰려가는 식으로 맞장구쳐주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마리텔을 제작하는 박진경 MBC PD는 26일 자신의 트위터에 “엄청난 강자가 나타나버렸다”는 의미심장한 글을 남겼다. 그만큼 마국텔이 마리텔과 유사했다는 뜻이다. 더불어민주당 공식계정은 이에 ‘좀 쎄지요?’라는 맨션을 보냈다.

셋째,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도 콘텐츠가 된다. 필리버스터를 소비한 시민들은 의원들에게 캐릭터를 부여했다. 누리꾼들은 맨 처음 필리버스터에 나섰던 최연소 김광진 의원은 ‘민주당 학생회장’이라는 별칭을, 신경민 의원에게는 ‘죄 읽어주는 남자’라는 별칭을 붙였다. 

강기정 의원은 “진작 이런 자리가 있었으면 폭력 의원이 안 됐을 것”이라며 눈물을 보였다가 ‘강 목사의 신앙 간증’이라는 별칭을 안게 됐다. 누리꾼들은 차분차분 연설하는 김경협 의원이 심야 라디오 DJ를 닮았다며 ‘법이 빛나는 밤에’라는 이름을 붙였고, 김 의원의 연설에 끼어든 조원진 새누리당 의원은 ‘법밤의 깜짝 손님’이라고 불렀다. 누리꾼들은 필리버스터에 참여한 의원들의 팬아트를 그리고 의원들을 ‘모에화’했다. 캐릭터를 바탕으로 2차 콘텐츠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 필리버스터 직후 더민주 김광진·은수미·신경민, 정의당 박원석 등 필리버스터에 참여한 의원들의 팬아트(fan art, 좋아하는 대상을 소재로 한 그림)가 만들어지는 등 필리버스터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은 컸다. (사진 = 닝구)

누리꾼들은 이미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로 콘텐츠를 만드는 방식에 익숙하다. 이런 방식을 가장 즐겨 쓰는 매체가 피키캐스트다. 피키캐스트에는 ‘아이언형’ ‘괜찮은언니’ ‘평타공주’ 등 콘텐츠를 올리는 에디터들에게 캐릭터를 부여한다. 피키캐스트는 ‘에디터의 파우치를 털어보자’ ‘에디터들은 설날에 뭐할까’ ‘에디터의 제주도 여행’ 등등 에디터를 소재로 한 콘텐츠를 만든다. 피키의 독자들은 이런 콘텐츠를 통해 에디터를 ‘덕질’한다.

필리버스터는 그 열광만큼 실망도 컸다. 의원들이 계속하겠다는 필리버스터를 ‘선거에 이겨야한다’고 지도부가 뒤집었다. 정치혐오를 씻겨준 필리버스터의 결말은 구태정치의 전형이었다.

잔치는 허망하게 끝났다. 하지만 필리버스터가 미디어에 대한 질문과 숙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정치라는 무거운 콘텐츠도 젊은 층에게 익숙한 미디어의 소비행태와 잘 만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필리버스터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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