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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에게 경주는 특별했다

 

경주 개발은 박정희 정권이 집권기 내내 의욕적으로 추진한 경제개발과 국토종합개발계획의 중요한 부문이었다. 여기에는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통해 경제개발에 필요한 외화를 획득하자는 경제 논리가 깔려 있었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webmaster@sisain.co.kr  2016년 10월 07일 금요일 제472호
활성 단층대 위에 놓인 경주는 요즘 계속된 지진으로 불안한 상황이다. 관광객도 크게 줄어든 것 같다. 온통 학생들로 들썩이던 수학여행의 계절인데도 불국사나 석굴암, 대릉원, 첨성대 등의 주변이 한산하다. 음식점 주인들은 한숨만 쉬고 숙박업소마다 빈 객실이 넘쳐난다. 경주를 한국의 대표 관광도시로 키우려 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현재의 광경을 보면 어떤 심정일까?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공식 일정은 KBS 당진송신소 개소식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참석이었다. 그런데 이틀 전인 10월24일에 경주 보문관광단지를 방문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해 4월6일 1단계 개장을 완료한 상태였던 보문단지를 다시 점검·시찰하러 간 것이다.

한국관광공사 전신인 국제관광공사에서 당시 개발이사로 재직 중이던 고 최귀남씨는 그날 대통령을 보문단지 현장에서 영접한 사람이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전날 대통령이 보문단지에 뜬다는 전갈을 받은 뒤 밤차를 타고 경주에 도착해 대통령 맞을 준비를 했다. 박정희는 다음 날 오후 3시쯤 나타나 보문단지 순시에 들어갔다.  박정희는 상가 단지 앞에 차를 세우고 건물 색조 하나하나, 식재된 나무 하나하나를 살피며 여러 사항을 지적했다고 한다. 나아가 “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았을 때를 대비해 야외극장을 활용할 여러 가지 프로그램 개발과 쾌적한 휴양지, 다시 찾는 휴양지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경주개발동우회 <그래도 우리는 신명 바쳐 일했다> 121쪽, 고려서적, 1998).

 
ⓒ영상역사관
1973년 7월3일 박정희 대통령(오른쪽 세 번째)이 경주 지역 유적 발굴조사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박정희는 대통령 재임 기간 툭하면 경주를 찾았기에 이 방문이 아주 특별한 행사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기 겨우 이틀 전에 보문단지를 방문한 박정희의 행적은 자신이 만들고 집착했던 작품에 마지막 인사를 고하는, ‘필연 같은 우연’으로 보이기도 한다.

경주를 향한 박정희의 꿈은 매우 담대한 것이었다. 천년 수도에 포진한 신라 시대 문화재를 관광산업과 접목해 죽은 도시를 재생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박정희 자신이 1971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입안했으며,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진 1979년 10월26일까지 의욕적으로 밀어붙였다.

이런 측면에서 경주 개발은, 박정희 정권이 집권기 내내 의욕적으로 추진한 경제개발과 국토종합개발계획의 중요한 부문이었다. 일종의 산업 육성 차원에서 경주 개발을 추진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통해 경제개발에 절실히 필요한 외화를 획득하자는 경제 논리가 튼실하게 깔려 있었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은 경주를 시작으로 설악산·제주도·한려수도 등을 관광지로 개발하는 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다만 다른 관광지와 달리 경주 개발에는 ‘국민정서 함양’이라는 목적이 추가되었다. 예를 들면 신라의 삼국 통일 정신을 본받아 남북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자는 등 신라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자는 것이다. 이렇게 정권의 정치적·산업적 의지가 복잡하게 얽힌 경주 개발 계획의 중심부에 보문단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박정희 정부의 관광산업 육성 의지가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1970년대 후반 들어서다. 1978년 11월27일 오전 8시20분, ‘대망의 연간 외국인 관광객 100만명’을 돌파했다. 그해 100만 번째로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미국 여성 바버라 존슨(당시 59세)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KAL 005편으로 김포공항에 들어왔다가 뜻하지 않은 환대를 받았다. 여담이지만 바버라 존슨이 실제로 1978년의 100만 번째 외국인 관광객은 아니었다. 이 행사를 주관한 교통부와 관광공사가 홍보 효과 극대화를 위해 해당 항공기 승객 가운데 미국인 여성을 미리 선정해놓았다. 당시 외국 관광객 가운데 절대다수를 점하던 일본인은 의도적으로 제외했다.

 
ⓒ연합뉴스
1979년 10월11일 박정희 대통령은 경주 보문단지에 주한 외교사절들을 초청해 만찬을 열었다.
2000명 외국인 손님에 긴장한 1979년 경주

이토록 ‘관광입국(觀光立國)’에 대한 열망이 거셌으니, 제28차 아시아태평양관광협회(PATA) 총회 및 제19차 워크숍(1979년 4월 중순 개최) 유치에 성공했을 때 한국 정부와 관광업계가 얼마나 흥분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한국은 연례 국제행사인 PATA 총회를 1965년에 이미 한 차례 개최한 바 있다. 하지만 이후 관광산업을 보는 한국 측의 시각이 달라지고, PATA 총회의 규모도 엄청나게 커졌다. 한국이 유치한 1979년 총회의 경우, 참가단 규모가 2000명 이상일 것으로 예상됐다. 당시까지 한국은 이 정도의 인원이 참가하는 국제회의를 단 한 번도 개최해본 적이 없었다. PATA를 준비하는 자세와 열기는 1988년 서울올림픽의 그것에 못지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PATA 대회의 장소는 두 군데로 확정됐다. 4월16~18일 총회는 서울에서, 4월20~21일 워크숍은 경주에서 열렸다. 경주 워크숍 장소가 바로 보문관광단지였다. 지금은 ‘육부촌’이라 불리는 경북관광공사 관할 ‘컨벤션센터’다.

물론 경주 개발 계획이 처음부터 PATA를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니다. PATA의 한국 개최가 확정된 것은, 경주 개발 계획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76년 4월21일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제25차 PATA 총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PATA는 경주 개발 계획, 특히 보문단지 조성에 더욱 가속도를 붙였다. 대회를 코앞에 둔 4월6일, 보문단지가 1단계로 서둘러 부분 개장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당시 사정을 회고하면서 고 최귀남 국제관광공사 개발이사는 “1979년 초순경 공정에 쫓기는 모든 관계자가 이곳저곳에서 바삐 움직이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그때는 마치 전쟁터와 같았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랬다. 당시 자욱한 먼지에 덮인 보문관광단지는, 포성이 연달아 터지는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박정희는 1979년 2월6일 교통부를 연두 순시한 자리에서 ‘성공적인 PATA 회의 개최를 위해 정부 각 부처나 관광공사가 적극 협조하여 회의를 잘 치르도록 하라’고 당부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1978년까지만 해도 골조 공사 단계였던 보문단지 내 컨벤션센터와 상가가 대회 직전에 완공되었다. 경주조선호텔과 경주도큐호텔도 PATA 회의 직전 문을 열 수 있었다.

4월16일부터 진행된 PATA 총회와 워크숍의 참가단 규모는 역대 최대인 43개국 2424명(국내 대표 499명 포함)에 달했다. PATA 총회 역사상 참가 인원 2000명을 최초로 넘긴 성공적 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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