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만다라 2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便正覺 – 고뇌, 의문, 열정이 필요한 시대
초발심의 행자님에게 띄우는 첫 번째 편지
행자님
유난히 추운 겨울을 거쳐 이제 어느덧 봄의 길목에 들어섰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강둑에는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날 것입니다. 또 화려하고 소담한 꽃들이 이 산천을 수려하게 장엄하겠지요. 지난 3월 15일 황악산 직지사 도량에서 102명의 새내기 스님들이 탄생했습니다. 행자님들은 지난 6개월의 힘든 기초수행과정을 마치고 어엿한 사미, 사미니가 되었으니 출가수행자로서 우리 교단의 새싹이며 꽃이 되었습니다. 먼저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봄볕 가득한 풍경. 한겨레 자료사진(사진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어서 오라, 그대들이여! 아주 잘 왔다.” 그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이 발심한 출가자에게 주신 환대의 인사입니다. 오늘, 석가모니 부처님과 이 땅의 불교대중이 마음을 하나로 모아 청정·자애·헌신의 길을 서원한 보현행자들을 환영합니다.
“102명의 사자들이여! 아주 잘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길은 가슴 벅찬 환희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 가고 있는 ‘옛 길이요, 오늘의 길이요, 미래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미계를 받는 행자들. 조계종 총무원 제공
초발심한 행자님!
그렇습니다. 출가는 곧 길이고 길을 가는 여정입니다. 행복과 안락을 성취할 수 있는 길, 그러기에 마땅히 선택해야 할 길입니다. 진실한 마음과 올곧은 실천으로 삶의 혁명과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길, 그래서 마땅히 가야 할 길입니다. 나와 이웃 사람 그리고 산하대지의 초목과도 더불어 환희로 어울리는 길, 그러므로 마땅히 동행해야 할 길입니다.
조선시대 서산대사는 《선가귀감》에서 출가의 큰 의미와 결의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가하여 승이 되는 일이 어찌 작은 일이랴! 편안하고 한가함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요, 따뜻한 옷과 잠자리와 배불리 먹기 위함이 아니다. 명예와 이익을 구함도 아니다. 생사를 벗어나기 위함이요, 번뇌를 끊기 위함이다. 부처님의 지혜를 잇기 위함이요, 삼계를 벗어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당당하고 빛나는 길을 걷는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행자님과 우리 모두는 세세생생 진리를 추구하는 순례길의 벗이 되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초발심 행자’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나 또한 그렇게 불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나는 ‘초발심’과 ‘행자’라는 어감이 참 정겹기 때문입니다. 초발심! 가만히 불러보면 풋풋하고 순결한 풀 향기가 날 듯합니다. 초발심! 또렷하게 발음하면 첫 새벽의 설렘과 결기가 다가옵니다. 또 초발심과 행자를 붙여 ‘초발심 행자’라고 부르면 어떤가요? 순정무구하면서 강건한 장부의 기상이 용솟음치지 않습니까?
덕숭총림 수덕사의 설정 큰스님은 방장에 오르실 때` “나는 대중과 수행하는 ‘방장행자’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을 생각하는 지금, 나의 뇌리에 설정 큰스님의 단아한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큰스님의 신실한 마음이 큰 감동과 고요한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큰스님께서 “나는 방장 행자”라고 선언하신 깊은 속내를 저는 알 듯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부처님의 제자로서 세세생생 ‘하심’ ‘초심’ ‘항심’을 지키면서 수행하겠다는 원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수행자는, 무엇보다도 초발심 행자에게 하심(下心 )은 원력의 큰 집을 지을 수 있는 단단한 터 닦기가 되겠지요.
하심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를 낮추는 일입니다. 그러면 낮추는 일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하심이 단순히 몸을 숙이는 겸손이 아니라면, 나의 교만심을 내려놓고 이웃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의 가짐이고 마음의 몸짓이겠지요. 그래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이렇게 하심을 말했습니다. “진리를 수행하는 자는 가장 낮은 사람의 발밑에 존재해야 한다.” 행자님이 평생 이렇게 하심으로 공부한다면 나에게도 이롭고 이웃에게도 이로운 아름다운 출가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초발심 행자가 지켜야 할 초심(初心)은 무엇인가요? ‘초심’이란 글자 그 의미대로 평생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겠다는 처음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초심이란, 최초의 발상이라는 단순한 의미는 아니겠지요.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나는 무엇을 하면서 사는 것이 나답게 사는 길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런 근원적인 문제에 정직하게 직면하면서 고뇌하고, 묻고, 그리고 결론을 맺고 결단한 마음이 바로 초심입니다. 그래서 초심은 늘 현재진행형입니다. “심심으로 욕락을 버리고 일찍 발심한 젊은 출가자들은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을 똑똑히 분간하면서, 걸어가야 할 길만을 고고하게 찾아서 가라.” 위에서 언급한 서산대사의 <선가귀감>과 함께 한 직지사 수계교육장에 있는 우바리 존자의 말씀입니다. 생생하게 기억하지요? 가장 핵심적이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길의 선택, 그리고 그것을 이루겠다는 마음이 바로 초심입니다. 초심은 집의 주춧돌입니다. 주춧돌 없이 깨달음과 혁명적 삶의 역사의 집은 완성될 수 없습니다.
행자님!
초심과 함께 늘 쉬지 않고 꾸준하게 정진하는 마음이 바로 항심(恒心)입니다. 하심이 하심을 잃지 않고, 초심이 초심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한결같은 정진을 해야 합니다. 도중에 그만두거나, 혹은 하는 공부가 시들해지고 빛이 바랜다면 이미 출가한 수행자가 아니고 다시 범속한 일상의 집에 갇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선대의 선지식께서는 항심을 때때로 거듭거듭 강조하셨습니다. “한 방울의 물이 비록 적지만 차고 차고 마침내 항아리를 채운다.” 행자시절 읽었던 법구경의 말씀이 생각날 겁니다. 또 대웅전 처마 밑의 돌을 유심히 본 적이 있습니까? 낙숫물이 한 곳에 거듭거듭 쉬지 않고 떨어져 마침내 구멍이 생긴 흔적을 보았을 겁니다. 게으르지 않는 부지런한 정진, 곧 항심은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놓으며 집을 짓는 일입니다.
이제 사미, 사미니계를 받고 102명의 초발심 행자님들은 첫 공부길에 들어섰습니다. 풋풋하고 설레던 초심이 어느덧 느슨해지고 일상화되었는지 점검하고 순간순간 다잡아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그대들은 그대 자신의 ‘온전한 삶’으로 말하길 원합니다. 진실한 마음씀으로 말하고, 지극히 낮은 몸으로 말하고, 비움과 나눔으로 말하고, 세상의 아픔에 그대 가슴이 온전히 아픈 몸짓으로 말하길 원합니다. 그리하면 그대의 모든 삶 하나하나가 그대로 수행이고 부처의 길이 될 것입니다.
며칠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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