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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한 한미관계? 더 큰 문제는 종속성

  • 장창준 객원기자
  •  
  •  승인 2023.10.03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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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댓글 0



 

[한미상호방위조약 70년]지구상에 이런 동맹은 없었다 ②

불평등한 한미관계, 누구나 하는 이야기다. 최소한 87년 6월 항쟁 결과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정치인이라면, 지식인이라면 한미관계의 불평등성을 지적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한국과 미국의 힘이 같지 않은 상황에서 한미 관계의 불평등성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불변의 진리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이 논리를 좇아가면 완전히 평등한 관계는 가능하지 않으니, 불평등성을 최소화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모든 나라의 힘은 균등하지 않다. 강대국도 있고, 약소국도 있고, 중진국이라는 용어도 등장한다. 나라의 힘이 불균등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용어들이다. 한국과 미국의 힘의 격차는 더할 나위 없이 크다. 한국과 미국은 아주 불균등하다.

그러나 불균등과 불평등은 다르다. 한국과 영국, 한국과 중국, 한국과 러시아의 힘의 격차 역시 크다. 한영 관계, 한중 관계, 한러 사이의 힘은 불균등하지만, 그 관계는 평등하다. 불균등함이 불평등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불평등한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불평등하다. 주한미군지위협정(일명 소파협정)도 불평등하다. 그 외 한미 사이의 모든 협정은 불평등한 조항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런 불평등성은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불균등한 힘의 문제가 불평등한 관계를 자동적으로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정치인, 지식인들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이 있다. 불평등성만을 강조하면 종속성이 은폐된다. 불평등한 조약과 협정은 주종 관계를 형성한다. 유리한 조약과 협정을 가진 나라는 ‘주’의 위치를 갖고, 불리한 조약과 협정을 가진 나라는 ‘종’의 위치를 갖는다.

불평등 정도에 따라 주종 관계의 강도는 결정된다. 주종 관계의 강도가 세지만 불평등도 심화된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한미 관계는 다른 어떤 나라의 관계보다 불평등 정도가 심하다. 따라서 주종 관계 역시 가장 강력하다.

미국은 결정하고, 우리는 따른다. 아주 부분적으로 그렇지 않은 현상들이 존재하지만 중요한 정책에서 우리는 항상 ‘종’의 위치에 있을 뿐이다. 한국은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미국에 종속되어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은 정치적 주권이 결국 경제적 주권 상실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함께 한미합의의사록이 체결되었다. 한미합의의사록의 6번째 조항은 “(한국의) 경제계획을 유효히 실시함에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라고 적고 있다.

이미 1952년 5월 24일 미국은 “대한민국과 통합군 사령부와의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일명 마이어 협정)을 통해 한국 경제 정책에 깊숙이 개입해 왔다. 따라서 합의의사록의 ‘필요한 조치’는 미국이 한국에 요구하는 조치이다. 한국은 그 요구를 따라야 하는 ‘종’의 위치에 있다. 이 과정을 통해 미국은 한국 경제 정책의 결정권을 행사해 왔다.

▲ 1966년 7월 9일, 한미 SOFA가 조인되었다.

사법 주권은 어떤가? 1991년, 2001년 두 차례 개정을 통해 일부 개선되었다고 평가를 받고 있지만, 소파협정은 한국의 사법 체계를 농락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공무 중에 발생한 한국인에 대한 미군의 범죄는 여전히 미국이 재판권을 행사한다. 2015년 주한미군이 세균전에 사용되는 탄저균을 밀반입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는 단 한 차례도 미군 기지를 조사하지 못했다.

환경 주권은 어떤가? 반환된 미군 기지를 정화하는 비용이 기지별로 수십억, 수백억 원에 달한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그 비용을 미국에 청구했다는 소식도, 미국이 그 비용을 지불했다는 소식도 없다.

군사 주권, 정치 주권, 경제 주권, 사법 주권, 환경 주권을 빼앗겨 미국에 종속된 채로 70년을 살아왔다. 미국과 동맹을 맺고 있는 어떤 나라도 우리처럼 종속 관계를 유지하는 나라는 없다. 지구상에 이런 동맹은 없었다.

불평등함을 넘어 종속성을 직시했을 때 주종 관계에서 탈피할 수 있는 사고가 가능해진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70년을 맞았다. 이제라도 한미 종속성을 전면적으로 제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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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주기 민주경찰 안병하 치안감 추모식

 
경찰은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눌 수 없다
 
이주연 | 2023-10-02 08:32:1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제35주기 민주경찰 안병하 치안감 추모식

【군번 14562】

1949년 5월, 안병하는 22세 때 육사(8기)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면서 전방에 배치됐다. 육사 8기 중 4개의 특별반이 있었으며, 그들은 광복군과 독립군 출신들이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다. 안병하 중위와 육사8기 동기생들은 소대장, 중대부관, 대대참모 등으로 최전방에서 전투에 참여했다. 육사8기 졸업생 중 3분의 1인 367명이 전사하고, 35명이 실종되었다. 육사8기는 6•25전쟁을 온몸으로 겪었다.

전쟁은 영웅을 탄생시킨다. 23세 청년 안병하는 6사단(청성부대) 7연대 16포병대대 소속이었다. 사단장은 한국전쟁 4대 영웅 중 한 분인 김종오 장군이고, 연대장은 임부택 중령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부터 북한군의 포화가 집중됐다. 6사단 7연대는 춘천에 지휘소를 두고 교전했다. 북한군의 전략은 서부전선을 돌파하는 동시에 춘천과 홍천의 동부전선을 돌파하여 수원 이남으로 진출해서 수도권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서부전선 국군 1사단과 7사단이 무너졌다. 동해안 강릉의 8사단도 대관령으로 밀렸다. 동부전선 춘천과 홍천의 6사단은 사단장 김종오 장군의 뛰어난 지휘로 전투에 대비할 시간이 있었다.

북한군 2군단은 2사단과 7사단 등을 앞세워 2만4천 명이 물밀듯 밀려왔다. 국군 6사단은 열악한 상황에서 치열한 방어전을 펼쳤다. 이 전투에서 안병하 중위가 자청했다. 무전병 한 명만 대동하고 적진에 침투하여 정확한 정보를 탐색했다.

적진 깊숙이 침투한 안병하 중위는 적의 화력과 배치상황을 상세하게 본부에 타전했다. 6사단은 상대적으로 화력이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안 중위가 제공한 정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켰다.

춘천•홍천전투 결과 국군 6사단 사상자는 407명, 북한군 2군단 사상자는 6,900여 명(6사단 집계)이었다. 북한군 2군단장 김광협, 2사단장 이청송, 12사단장 전우가 해임되었다.

1950년 7월 5일, 미군이 투입됐지만 죽미령 전투에서 패배했다. 국군 6사단도 8사단과 더불어 방어선을 구축하며 철수를 거듭했다. 국군과 미군은 낙동강을 방어선으로 지연전을 펼쳤다.

이때 충북 음성 동락리 전투가 벌어졌다. 1950년 7월 7일 북한군 15사단이 장호원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김종오 6사단장은 안병하 중위가 소속된 7연대를 장호원에 급파했다. 북한군은 이미 장호원을 지나서 충북 음성 방면으로 남하 중이었다.

국군 6사단 7연대는 음성 북쪽에 매복했다. 그날 오후 5시, 국군 6사단 7연대는 기습 공격을 했다. 방심하던 북한군 15사단 48연대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전투는 다음날 7월 8일 오전 8시까지 15시간이나 지속됐다.

북한군 전사자 1천 명, 포로 97명, 차량 80대, 소총 2,050정, 155mm 박격포 6문 등을 노획했다. 국군 6사단 7연대는 한국전쟁 개전 이래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당시 동락리 전투를 주도했던 국군 6사단 7연대 2대대는 병력 400명, 81mm 박격포 1문, 중기관총 1정뿐이었다. 놀라운 전과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크게 기뻐했다. 1950년 9월 29일, 국군 6사단에 표창장을 수여했다. 7연대 모든 장병들은 1계급 특진했다. 안병하 중위도 대위로 진급했다.

국군 창설 이후 최초로 거둔 가장 큰 규모의 전과였다. 노획한 무기를 유엔으로 보냈다. 소련의 한국전쟁 도발 입증 증거로 제시했다. 이후 국군은 평택, 안성, 충주, 울진을 잇는 저지선을 구축했다. 동부전선은 국군이 서부전선은 유엔군이 담당하는 전선이 재정비되었다.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됐다. 1950년 10월 24일, 국군 8군사령관과 10군단장에게 38선을 넘어서 국경을 향해 진격하라는 수정명령이 하달됐다. 모든 부대들이 일제히 압록강의 국경선을 향해 질주했다.

안병하 대위가 소속된 6사단은 선두에서 평양을 우회하여 평안남도 순천에 가장 먼저 진출했다. 노획한 북한군 차량 150대를 이용하여 북진 속도를 빠르게 했다. 북진 중 추가로 노획한 북한군 차량 300대에 탑승하여 가장 빠르게 압록강에 도착했다.

1950년 10월 26일, 아침 7시에 국군 6사단 7연대는 압록강을 향해 마지막 진격작전을 개시했다. 초산 남쪽 6Km 지점에서 북한군 8사단 패잔병을 제압했다. 안병하 대위의 7연대 1대대(대대장 김용주 중령)는 오후 2시 15분 압록강 남단의 만주 국경선까지 진출했다.

국군 최초로 압록강에 도착한 것이었다. 안병하 대위와 국군 6사단 7연대 1대대 장병들은 강변에 태극기를 꽂고 압록강 물을 수통에 가득 채웠다. 가슴 벅찬 흥분의 순간이었다. 이 부대는 ‘초산부대’로 불리기도 했다.

감격의 순간은 짧았다. 다음날 10월 27일, 7연대장 임부택 대령이 압록강변 초소를 방문했다. 2연대가 중공군의 매복으로 고전 중이라고 했다. 28일, 오후 5시 중공군이 1대대 퇴로를 차단했다.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29일, 7연대는 포위망을 뚫는데 실패했다. 30일, 자정에 중공군 제38군 예하 3개 사단과 제40군 예하 3개 사단이 국군 7연대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공격했다. 7연대 병력 76%가 전사하고 생존자는 대부분 포로가 되었다. 부대 자체가 붕괴되었다.

안병하 대위는 야음을 틈타 깊은 산 속으로 피신했다. 낙엽 속에 몸을 숨긴 채 3일을 버텼다. 9일 후에야 포위망을 뚫고 아군 지역으로 간신히 복귀할 수 있었다.

안병하 대위는 1957년 5월 7일, 보병 6사단 소속으로 무공훈장을 수훈했다.

“멸공전선에서 제반 애로를 극복하고 헌신 분투하여 발군의 무공을 수립하였으므로 그 애국지성과 혁혁한 공적을 가상하여 대통령내훈 제2호에 의거 부여된 국방부장관의 권한에 의하여 이에 무성화랑 무공훈장을 수여”

안병하는 6•25전쟁을 통해 화랑무공훈장 2개, 상이기장, 6•25참전기장 등을 수훈했다. 전쟁영웅이 된 것이다.

잠이 오지 않아 안병하 평전을 펼쳤다. 문득 보고싶은 내용을 찾았다. 스마트폰으로 정리하며 타이핑했다. 어느덧 새벽의 한 가운데에 들어섰다. 추모식 준비를 해야 하는데.

민주경찰 안병하 치안감에 대한 평가는 청렴한 원칙주의자다. 그의 민주, 인권, 위민정신 또한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해야 하는 경찰관으로서의 원칙을 고수한 것이지 않았을까?
헌법 제7조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헌법정신을 실현한 참공직자.

안병하 평전 저자 이재의 박사는 안병하 비망록을 ‘경찰의 5•18 권리장전’이라고 칭한다. 동의한다. 대한민국 경찰이라면 안병하 비망록 원본을 탐독하시기를 권유드린다. 볼 수 없다면 사본이라도 탐독을 권유드린다. 참고로 원본은 광주 금남로 소재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있다.

대한민국 경찰 영웅 1호 안병하 치안감이 생의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전하고 싶은 경찰에 대한 진심이 전해질 듯싶어서다.

♪국립경찰가♪ 마지막 가사 ♥민주경찰♥

그날이 오면 안병하 치안감은 또다시 새롭게 부활하지 않을까?

1980년 5월 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전라남도 경찰국 안병하 국장과 혼연일체가 되어 권력의 부당한 명령에 저항했던 2천 명의 참경찰들과 함께」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2038&table=c_juyoun&uid=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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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은 왜 2030 청년을 비난할까

[문 대통령께 드리지 못한 고언] 민주당 지지자='깨시민'이라는 생각의 함정

황두영 작가  |  기사입력 2023.10.03. 05:02:00

 

유시민 작가의 2030세대 청년 비하 발언이 논란이다. 유시민은 지난 22일 노무현재단 유튜브에서 전날 국회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것에 책임을 물으며 2030 남성 유권자들을 비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되어 이재명 대표가 탄압받게 된 이유가 2030 남성 유권자들의 잘못된 선택 탓이라는 맥락이었다.

 

유시민은 윤석열 후보가 청년들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을 위해 아무런 정책을 내지 않는데도 청년 남성 유권자들이 윤석열 후보를 뽑았다고 비판했다. 여성가족부 폐지 등 옳지 않은 공약을 사회‧경제적 불만의 해결책을 잘못 이해했다는 맥락이었다. 유시민은 결국 윤석열 정부는 여성가족부 폐지도 하지 않고, 오히려 군 복무기간 연장 등 남성들의 권익을 더 침해하는 방안만 논의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군 복무기간 연장은 현재 국방부장관 후보자인 신원식 국회의원이 지난 5월 주최한 토론회에서 한 발제자가 제시한 의견으로, 정부는 공식 입장이 아니라고 해명한 바 있다.) 

 

유시민은 청년 남성들에게 "불만을 합리적인 방법으로 제시하고, 그래도 기성세대가 부당하게 안 들어주면 돌 들고, 화염병 들고 정부종합청사, 민주당사에 던지라"고 충고했다. 이어 "우리도 다 돌 들고 화염병 들어 세상이 바뀐 것이고, 그렇게 해서 세상은 자꾸 나아가는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뒤이어 민주당에 대한 부정적 의견이 많은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는 "문이 달려 있지 않은 쓰레기통 또는 재래식 화장실"이라며 그 커뮤니티 유저들은 "쓰레기"라고 비난했다.

 

유시민의 발언에 정치권이 청년들의 요구를 더 잘 수용하려고 하지 않고 유권자 탓을 한다는 맥락의 비판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나왔다. 이준석 등 여당 인사 뿐 아니라 박성민 전 청와대 청년비서관, 권지웅 전 민주당 비대위원 등 민주당 청년정치인들도 유시민의 발언을 비판했다. 당연히 비판이다. 하지만 유시민 발언에 대해 남탓 정치를 그만두라는 맥락에서 더 책임감 있고 겸손하게 정치하라는 말로 되받아치는 건 너무 약소한 반박이다. 

 

현직 정치인도 아닌 유시민의 발언이 주목을 받는 건, 그가 민주당 주류의 현역 정치인들이 차마 직접 꺼내 얘기하지 못하는 무의식적 전제들을 말로 꺼내놓기 때문일 것이다. 유시민의 발언은 주로 86세대인 민주당 주류가 유권자를 어떻게 나눠 등급을 매기는지, 그리고 그러한 분류가 어떤 정치적 왜곡을 낳는지를 보여준다. 

 

 

 

 이 발언의 진짜 문제는 특정한 세대 혹은 세대간 갈등의 문제가 아니다. 제대로 된 유권자, 또는 '깨어있는 시민'과 그렇지 않은, 즉 '깨어있지 않은' 유권자의 구별이 핵심이다. 그렇기에 이 문제는 잊을 만하면 터지는 노인이나 특정 지역 비하, 또는 소위 '국개론'과 연결되어 있다. 민주당이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유권자 집단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한 문제다. 유시민에 비해 '겸손한' 현역 정치인들은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겠지만, 유시민의 이 솔직한 발언 덕에 우리는 이 특이한 정치적 사고방식의 구조와 한계를 들여다 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유시민의 발언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부분은 "2030 여성 유권자는 지난 대선 때 충분히 자기 몫을 했다"며 "여자들이 나라를 구하지 않으면 진짜 위험하다"고 말한 부분이다. 여기서 투표는 단순히 자신의 이해관계나 선호를 표현하는 것을 넘어, '나라 구하기'의 문제와 연관된다. 반대로 2030 남성을 비롯해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 투표를 나라를 위기에 빠트리는 문제가 된다. 이 인식에서 유권자는 정당과 후보를 선택할 '권리'를 가진 자가 아니라, 나라를 구하기 위한 역할을 해야 할 '의무'를 가진 자가 된다. 그렇기에 여성 유권자는 '충분히 자기 몫을 했다'는 평가가 가능해진다.

 

'나라 구하기'가 필요한 상황인지, 민주당이 제시한 방법으로 가능한지를 판단한 권리를 가진 주체는 유권자가 아니다. 그것은 먼저 깨닫고 가장 선두에 나서 있는 민주당 정치인들이 결정할 문제다. 나라 구하기는 지극히 당연히 모든 국민이 동의해야 하는 문제로,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 '깨달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유시민은 2030 남성들을 향해 "이제는 깨어나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하라"고 비판한다. 윤석열 정부가 양고기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파는 '양두구육'이라며 "개고기를 구입한 사람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면 이제는 (현 정권을) 응징해야 하지 않나"는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 것은 아직 깨닫지 못한, 발달하지 못하고 등급이 낮은 판단력의 문제가 된다.

 

유시민은 이미 '깨어 있는 시민'과 그렇지 못한 자의 우열을 여러 차례 주장한 바 있다. 

 

"노 대통령 묘의 비석 아래 철판에 새겨진 글이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죠. 저는 이게 답이라고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우리 시대의 의 또는 올바름,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가치를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어야죠. (중략) 

여러분, 국민은 그냥 주어지는 거죠. 대한민국에 태어나면 여권 국적란에 '대한민국, Republic of Korea'라고 그냥 주어지는 겁니다. 자기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국민이에요. 시민은 뭔가요? 자기의 권리가 무엇인지 알고 그 권리를 행사하려고 하는 각성된 국민이 시민이죠. 지금 벌어지는 이 모든 사회적 갈등을 보면 그 기저에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국민과 권리의 주체인 시민 사이의 갈등이 있습니다. 국민은 대개 한나라당 편, 시민은 우리 편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진 시민이 많아지도록 하는 일이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는 방법 중 첫 번째 단계에 또는 늘 해야 하는 기본적인 일입니다. (중략)

 

'깨어있는 시민'은 권력을 견제하기 위한 시민 의식을 갖춰야 한다는 보편적 경구이지만, 유시민은 '시민'의 상대항에 '국민'을 두고 두 항목을 재정의함으로써 차등적인 이분법 구도를 끌어낸다. 사실 모든 국민이 참정권을 갖는 현대 민주주의에서 국민과 시민은 개념적으로 같은범위를 지칭하지만, 여기서 시민은 어떤 자격을 갖춘 존재, 자격이 있기에 '국민'보다 더 큰 정치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당위가 있는 자들이 된다. '국민'과 '시민'의 관계는 이해관계의 대립이 아니라, 아직 진정한 이해를 깨닫지 못한 '국민'과 그들을 위해 진짜 이익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시민'사이의 계몽적 관계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시민'이 될 수 있는가? 구체적 실천이 필요하다. 올바름을 추구해야 한다. 올바름과 이로움이 충돌할 때 올바름을 추구해야 한다. 많은 투쟁과 고민 끝에 현대 민주주의는 특정한 조건이나 자격 없이도 모든 국민이 같은 주권을 가진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 하에선 우리가 진정한 주권을 갖기 위해선 굳이 깨어 있기까지 해야 한다. 대한민국에 그냥 태어나서 사는 것만으로도 꽤나 피곤한 일인데 말이다. 이런 민주주의관은 이후 '이로움' 즉,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민주주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한계로 이어진다. 

 

이러한 인식은 80년대 학생운동의 '품성론'의 업데이트된 재현이다. 품성론은 혁명가가 되기 위한 방법이다. 혁명가가 민중을 닮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거지, 민중이 어떤 행동을 하든 민중에서 탈락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품성론적 요구는 혁명가가 아니라 유권자 일반의 자격에 대한 요구다. 결국 시민이 되지 못한 유권자의 목소리는 무시해도 되거나, 혹은 더 적극적으로 무시되어야 할 것이 된다. 품성론이 대의 민주주의와 만나면서 유권자 사이의 차등을 주는 담론이 된다. 

 

또한 '민중'이 '시민'이 되면서, 모호하게나마 존재했던 계층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1980년대 대학 교육을 받고 중산층 이상이 된 86 집단의 경제적 계층 변화와도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이제 누구라도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만으로 '시민', 즉 우리 편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실천 과제는 매우 어려우면서도 쉽다. 최단 경로는 그냥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이다. 당신이 이로움보다 의로움을 추구하는 시민이라면 민주당을 지지할 것이라는 가정은, 손쉽게 민주당을 지지하면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역 명제로 전환된다.

 

이런 구도에서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 전제 하의 정치적 요구는 모두 비합리적이고 어리석은 것이 된다. 유시민은 2030 남성들이 "불만을 합리적인 방법으로 제시"하지 못한다고 얘기한다. 민주당 정부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회고적 투표는 합리적 방식이 아니란 것이다. 유시민은 이어 "기성세대가 부당하게 안 들어주면 돌 들고, 화염병 들고 정부종합청사, 민주당사에 던지라", "우리도 다 돌 들고 화염병 들어 세상이 바뀐 것이고, 그렇게 해서 세상은 자꾸 나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유시민이 비판한 에펨코리아 등의 커뮤니티에서는 유시민의 발언에 대해 이미 충분히 불만을 제시했는데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리고 불만을 투표로 충분히 표시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2030 청년들은 젠더 갈등의 양상으로나, 실제 투표 결과로나 이미 충분히 불만을 드러냈다. 그 불만이 이기적이거나 여성 등 다른 집단을 차별하는 것이라는 비판은 가능하겠지만, 불만은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는 지적은 이해하기 어렵다.

 

집회결사의 자유와 저항권은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가치이긴 하지만, 유시민의 발언에 따르면 여당에 대한 불만으로 야당에 투표하는 민주주의의 일상적 표현 방식은 비합리적인 것이 되고, 화염병과 돌을 던지는 예외적인 방식은 오히려 권할만한 것이 된다. 이러한 정치적 상상도에서는 정치의 가장 깊은 내핵인 제도 정치 영역에는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이 마땅히 있다. 그리고 그 다음 결에는 민주당이 미처 다 챙기지 못한 잠재적 과제로서의 민중의 불만이 예외적으로 존재한다. 여기까지가 민주당이 생각하는 정당한 정치의 영역이다. 

 

국민의힘은 이 예외적 영역에서도 밀려난 다른 세계, '악'의 세계에 존재한다. 이렇게 이해할 때 2023년 대한민국의 정치는 악의 세력에 의해 무단으로 점령된 전시 상태가 된다. 이 구도에서 악의 세력인 국민의힘에 동조하는 행위는 민주당에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것보다 더 잘못된, 아둔하고 깨닫지 못한 이들이나 할 수 있는 행위가 된다.

 

가장 큰 문제는 투표로 표출한 불만이 정치세력에 가닿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정 집단의 요구가 이기적인 건 사실 민주주의 전체에서 문제는 아니다. 어차피 대부분의 요구는 이기적이다. 이기적 요구들만으론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는 걸, 결국은 우리가 평등한 대안을 찾는 것이 우리 사회의 장기적 존속과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는 걸 설득하는 건 정치인과 정당의 역할이다. 그 역할을 잘 해 다수의 지지를 모아낼 수 있는 이들이 결국은 집권한다. 민주당에 어떠한 요구를 해도 튕겨나오기만 할 때, 더 이상 유권자들은 민주당에 요구도, 기대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보다 확실하게 민주당을 망가뜨리고 집권을 방해하는 방법을 없을 것이다.

황두영

정치학을 공부하고 정치권 노동자로 온갖 실무를 해왔다. 국회인턴부터 시작해 국회의원 보좌관, 청와대 정무수석실 행정관, 더불어민주당 공동비대위원장 정무조정실장까지 열심히 일했다. 정치권 안에서 도무지 풀리지 않는 질문들을 던지고 합리적인 대답을 찾기 위해 글을 쓴다. 단행본 <<외롭지 않을 권리>>, <<후보단일화 게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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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값에 교통비까지...추석 이후 생활물가 또 줄줄이 인상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3/10/03 09:36
  • 수정일
    2023/10/03 09:36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편의점에 진열된 우유 제품(자료사진) ⓒ뉴시스
10월 들어 식품, 에너지, 교통비 등 생활물가가 줄줄이 인상되면서 서민 부담이 더욱 커지고 있다.

낙농진흥회는 1일부터 원유 기본가격을 ℓ(리터)당 88원(8.8%) 올리기로 했다. 이에 따라 서울우유협동조합과 매일유업, 남양유업 등의 흰 우유 제품을 비롯한 유제품 가격이 이날 일제히 올랐다.

다만 우유제조업계는 제반 가격 상승 요인을 자체적으로 흡수해 흰 우유 1ℓ(또는 900㎖) 제품 가격을 대형마트 기준 3000원 미만으로 하기로 정했다.

이번 원유 가격 인상으로 우유가 들어가는 빵과 커피, 아이스크림 등 가격도 한꺼번에 오르는 이른바 ‘밀크플레이션’ 조짐도 보이고 있다. 작년에도 원유 가격 인상 여파로 우유 제품가격이 약 10% 오를 때 빵 가격은 6%대, 아이스크림 가격은 20%대 오른 바 있다.

식품뿐만 아니라 대중교통 요금도 이번 달부터 줄줄이 오를 예정이다. 서울 등 지하철 기본요금은 오는 7일부터 인상된다. 지하철 성인 기본요금이 오르는 건 2015년 이후 8년 만이고, 청소년·어린이 요금이 오르는 건 2007년 이후 16년 만이다.
기본요금은 교통카드 기준으로 성인 기본요금은 1250원에서 1400원으로 12% 오르며, 청소년(중학생·고등학생)은 720원에서 800원으로, 어린이(초등학생)는 450원에서 500원으로 각각 11%가량 인상된다. 이는 서울, 인천, 경기 지역과 코레일 운영 노선 등 수도권 전역에 일제히 적용된다.

가파른 국제유가 상승에 따라 기름값도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 서비스인 ‘오피넷’에 따르면 2일 전국 평균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1796.19원으로, 1800원을 눈앞에 두고 있다. 경유 가격은 리터당 1699.63원이다.

이런 가운데 이달 말까지로 연장된 유류세 인하 조치가 종료되면 휘발유와 경유 가격이 더 오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에 정부는 평균 가격보다 비싸게 파는 주유소를 찾아 점검하는 한편, 유류세 인하 조치 연장 등을 검토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전기요금 인상 조짐도 보이고 있어 서민 부담 가중이 예상된다. 정부는 이달 중으로 올해 4분기 전기요금 인상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한전이 200조 원이 넘는 대규모 부채를 떠안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전기요금이 인상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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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858편 실종 사건의 풀리지 않는 의문점 세 가지

[기고] 방요한 고려신학대학원 전도사

  • 기자명 방요한 
  •  
  •  입력 2023.10.02 15:59
  •  
  •  댓글 0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은 1945년 분단 아래 수많은 단일 민족의 아픔을 겪었다. 그리고 정부의 안일한 대처로 여러 참사를 겪었다. 그러함에도 우리나라 국민은 과거를 망각하는 방법으로 현재 사회를 영위했다.

불과 작년에 발생했던 ‘이태원 참사’는 벌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졌다. 정의는 사라지고, 유가족의 눈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유족의 슬픔을 닦아주려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1987년 11월 29일 발생한 ‘대한항공(KAL) 858편 실종 사건(폭파 사건)’도 40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 속에서 진실이 점점 희미해졌다.

사실 사건의 진실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대한항공 858편의 폭파범으로 지목된 두 명의 의문의 남녀. ‘김승일(金勝一)’과 ‘김현희(金賢姬)’의 정체. 그리고 항공사고 조사의 기본인 ‘CVR(음성 녹음 장치)’, ‘FDR(비행 기록 장치)’의 회수 및 기체 잔해 수거. 마지막으로 정확한 폭탄과 폭약 종류에 관한 조사. 삼위일체와 같이 기본적인 세 가지 조사만 이루어진다면, ‘대한항공 858편 실종 사건’의 실체는 규명될 수 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이 세 가지 의혹 중 어느 하나 명확하게 규명된 것이 없다. 이 점은 2006년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원회’도 400쪽의 조사보고서에서 인정한 대목이다. 그러므로 대한항공 858편 실종 사건의 원인은 불명확하다. 아래 의혹을 살펴보면 쉽게 대한항공 858편 실종 사건의 주범이 북한으로 추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1. 대한항공 858편의 탑승객 ‘김승일’은 누구인가?

1987년 11월 29일에 사건이 발생한 이래, ‘KAL858기 가족회’는 끊임없이 김현희의 정체에 관한 의문을 제시했다. “그녀가 과연 북한의 공작원이 맞는가?” 김현희의 다양한 의문점에 대해서는 여러 언론, 학자들이 정리하였으므로, 본 소고는 김승일의 정체에 관한 의혹을 간략히 정리하고자 한다.

1) 김승일의 언어 구사에 관한 의혹

현재 외교부는 생산 30년이 지난 문서들은 정리 후 공개하고 있다. 외교부 문서에 따르면 김승일은 일본의 위조여권(성명: 蜂谷 真一, 여권번호: MG 5741632)을 통해 일본-동유럽을 거쳐 중동으로 향했다.

김승일은 김현희와 함께 바그다드 공항에서 대한항공 858편을 탑승하고, 중간 기착지인 아부다비 공항에서 하기를 한 후, 난데없이 이탈리아 로마로 향하는 항공편을 발권했다.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바레인 암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김승일이 김정기 대리대사와의 필담 시 남긴 필적(주소와 이름). [자료 사진 - 통일뉴스]
김승일이 김정기 대리대사와의 필담 시 남긴 필적(주소와 이름). [자료 사진 - 통일뉴스]

이때 김승일의 행적은 수상한 측면이 많다. 국가안전기획부의 발표와 외교부 전문과 모순적인 부분이 많다. 가령 국가안전기획부는 김승일을 4개 국어에 능통한 인물로 소개했다(영어,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하지만 유시야 참사관의 지시에 따라 김승일의 정체를 파악한 김정기 대리대사의 전문에 따르면, 리젠시 호텔(Regency Hotel)에서 김승일을 만났을 때, 그는 영어를 하지 못하는 일본인이라 한자 필담으로 겨우 대화를 나누었다고 보고했다.

또한 바그다드와 암만에서는 엉터리 영어(Broken English)를 구사했으며, 러시아어나 중국어를 구사했다는 외교부 전문 보고는 거의 없다. 그렇다면 김현희의 진술 외에는 김승일이 4개 국어를 능숙하게 할 수 있었다는 증거는 전혀 없는 상태인 셈이다.

2) 김승일은 과연 폭약 전문가인가?

이제 김승일이 국가안전기획부의 언론 발표와 같이, 북한의 능숙한 폭탄 전문가인지 따져봐야 한다. 김승일이 장갑을 끼고 화약을 만졌을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의 손톱에 화약의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은 의아하다. 1987년 12월 28일. 국가안전기획부장 앞으로 회보된 국립과학수사연구소(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국과수) 감정서에 따르면, 김승일의 손톱에서는 화약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과거 50~80년대는 종종 총기 사건이 발생하여 국과수 화학과에서 총기 사건을 감정했었다. 화학에 일가견이 있는 화학과가 김승일의 손톱에서 폭약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점은, 과연 김승일이 폭약을 만진 적이 있는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과연 김승일은 폭약 전문가였는가? 과학적으로만 따지면, 그는 화약을 만진 적이 없다. 단지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조작된 정체불명의 테러범에 불과하다.

3) 김승일의 담배 필터 의혹

국가안전기획부 언론 발표문에 따르면 김승일이 청산가리 작은 유리병(aempeul)이 든 담배 필터를 깨물어 자살한 것은 명백한 북한 공작원의 자살 수법과 같다. 그러나 2006년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원회에 의해 부정된 사실이다.

또한 황적준 박사, 이정빈 교수에 의해 이뤄진 김승일의 부검에 따르면 담배 필터와 유리 파편들이 폐와 기관지 모두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감정서 결론부에서는 청산가리에 의해 정신을 잃어 바닥에 쓰러져, 일직선의 골절이 발생했다고 기술했다. 또한 강제로 약물을 주입했거나, 타격했다는 증거로는 활용될 수 없다는 내용을 첨부했다.

하지만 이는 최소 10일이 지난 시신을 부검한 것이며, 당시 현장 사진을 보거나 방문하지 않고 오로지 국가안전기획부의 진술을 바탕으로 부검한 결과다. 반증하듯 부검의 이유 자체가 ‘하치야 신이치’의 진짜 정체를 밝혀, 국가안전기획부의 수사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양인의 노인을 부검한다고 해서, 그의 신원이 밝혀질 리가 없다. 또한 법의학자가 현장을 방문하지 않고, 수사기관의 정보만을 듣고 부검했다가 패착을 본 사례가 많다. 공교롭게도 김승일을 부검했던 두 명의 법의학자가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1995)’에서 현장을 방문하지 않고, 수사기관의 정보만을 듣고서는, 피해자의 시반을 잘못 파악하여 사망 시간을 오판했다.

그렇다면 김승일의 폐와 기관지에서 담배 필터와 유리 파편, 청산가리가 검출되었다고 해서 그가 북한의 공작원이라는 사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4) 김승일의 시신 처리와 부검감정서의 행방

2002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통일뉴스의 정보공개 청구를 받아들여 공개한 김승일 부검감정서 일부. [자료 사진 - 통일뉴스]
2002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통일뉴스의 정보공개 청구를 받아들여 공개한 김승일 부검감정서 일부. [자료 사진 - 통일뉴스]

그렇다면 현재 진실을 명백히 밝혀 줄 김승일의 시신과 부검감정서는 어디 있을까? 김승일의 시신은 사진과 영상을 모두 촬영한 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화장 처리를 하여 경기도 파주의 북한군/중공군 묘지에 안장했다. 따라서 김승일의 시신이라는 주요 자료가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김승일의 시체를 촬영한 영상(VTR)은 어디 있는 걸까? 대한항공 858편을 주제로 석사-박사 학위를 받은 박강성주 박사는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김승일의 사진과 영상의 존재를 확인했다. 하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다른 답변을 했다.

“저희는 부검할 때, 따로 영상을 촬영하지 않습니다(2022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학부).”

국가안전기획부가 작성한 김승일의 시체 처리 문서의 내용과 전혀 대비된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 현재 국가정보원 또한 김승일의 부검 및 시체를 촬영한 영상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2022년). 하지만 간혹 노태우 정권 때 의문사를 당한 대학생의 부검 영상들이 있다는 사례를 볼 때, 과거나 현재나 따로 부검 영상을 촬영하지 않는다는 답변은 여러 의혹을 부른다.

김승일의 부검감정서는 현재 나라기록관에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문서로 소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부분 공개’에서 ‘비공개’로 전환됨). 그러나 2022년 만 해도 나라기록관은 김승일의 감정서를 ‘부존재 문서’로 인지했다. 왜 문서를 찾는데, 무려 1년이나 걸렸을까? 이에 대해 국가 기록관의 직원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부터 문서 이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국과수 감정서 문서가 어떻게 등록이 되냐면, ‘감정서 회보’ 딱 다섯 글자로 나가요. 그걸로 저희는 못 찾아요. 날짜도 없고, 문서 번호도 없고…(2023년 국가 기록관).”

2. 대한항공 858편 기체 잔해는 어디 있는가?

당국이 KAL858기 잔해물이라고 발표한 비행기 잔해. 국과수 감정결과 폭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감정을 의뢰한 안기부가 잔해를 회수해가지 않아서 국과수는 폐기처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료 사진 - 통일뉴스]
당국이 KAL858기 잔해물이라고 발표한 비행기 잔해. 국과수 감정결과 폭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감정을 의뢰한 안기부가 잔해를 회수해가지 않아서 국과수는 폐기처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료 사진 - 통일뉴스]

항공사고 조사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사고 항공기의 상황을 알 수 있는 ‘CVR’과 ‘FDR’의 회수. 그리고 기체 잔해의 수거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기체가 수장된 안다만해 수색을 게을리했다. 더불어 1990년대 발견된 일부 기체 잔해는 태국의 어부가 그물에서 건져 올린 것이다. 그것도 1988년 서울 올림픽 특수 도장이 아니었다면, 대한항공 858편의 잔해인지 판단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태국에서 촬영한 기체 잔해 사진은 국가정보원에서 소유하고 있다. 의아한 점은 기체 잔해 원본 사진들이 ‘비밀정보 2급’으로 분류되어, 열람만 가능한 상태다. 더불어 국가정보원이 2020년 11월에 국토교통부 산하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로 대여했으나, 2023년에 다시 국가정보원으로 회수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놀랍지 않다. 정작 놀라운 것은 1990년도에 국가안전기획부가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감정 의뢰한 기체 잔해들이 모두 폐기 처분됐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미얀마 정국이 안정되어, 안다만해에서 나머지 기체 잔해를 수거하기 전까지는 영원히 그날의 진실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생각해 볼 점은 기체 잔해 사진이 정확하게 대한항공 858편의 잔해이며, 어느 부분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기체를 감정한 감정서는 현재 위치가 묘연하다는 점이다.

“그쪽에서(국가정보원) 보내준 사진이 몇 개 있는데, 707기…손상된 사진이 858편 동체하고 관련된 게 있는데…기체 잔해가 폭파되어서…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진은 기체 도면하고 CVR. 이런 사진들이 몇 개 있어요…이것일 것이다. 기체를 안다만해서 꺼내지도 못했어. 몇 개는 이럴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 몇 개가 있는데…(2023년 국가교통부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

“국과수에 지금 요구해도 국과수에 그 시스템을 담당하는 담당자도 그 감정서에 접근을 못해요. 기체 감정서 때문에, 혹시 문서 번호라도 확인할 수 있는지 요청했는데 접근조차 안 돼요(2023년 국가 기록관).”

3. 대한항공 858편을 추락시킨 요인은 무엇인가?

1987년 11월 29일, 미얀마 안다만 상공에서 대한항공 858편이 추락한 이후, 여러 가설이 나왔다. 첫 번째 가설은 기체 결함으로 인한 비상착륙 시도다.

1971년 대한항공에 도입된 보잉 707(HL-7406)은 구형 기체로서 1977년, 1987년 랜딩 기어 문제로 김포국제공항에 두 번이나 동체착륙을 한 사례가 있다. 1977년은 항공기관사의 조작 실수, 1987년은 기체 결함으로 인해 앞의 기어가 나오지 않아, 뒷부분의 기어만으로 동체가 활주로에 미끄러지듯이 착륙을 강행했고, 다행히 두 사건 모두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다.

1987년 교통부 항공국에서 조사한 조사보고서는 현재 국가 기록관과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에서 보관하고 있다. 그러나 의아하게도 국가 기록관은 수사가 현재도 진행되고 있다는 이유로 ‘비공개 문서’로 처리하고 있다. 두 달 뒤 발생한 대한항공 858편의 기체 상태를 알 수 있는 주요 문서임에도 불구하고,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체 기록이 비공개 상태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정말 기체 결함으로 인해, 미얀마와 교신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단지 구형 보잉 기체이며, 미국에서 수리받은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두 번째 가설은 폭탄테러 설이다. 1988년 1월. 국가안전기획부는 대한항공 858편이 라디오로 가장한 폭탄에 의해 추락된 것으로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그녀의 자서전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 1-2권에서 폭약에 관한 황당한 진술로 인해 여러 의혹이 나왔다.

그중 특기할 진술은 김승일이 이라크 바그다드 국제공항에서 TNT가 든 배터리를 복대에 숨기고 보안검색대를 통과했다는 것. 그러나 외교사료관을 통해 공개된 국가안전기획부의 언론 보도문에 따르면, 일제 ‘파나소닉 라디오 RF-085’에 은닉된 폭약은 분명 ‘컴포지션 C-4’다. 이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 결과(1987년 12월 회보)에 따라, 김현희의 진술서에서 폭약이 컴포지션 C-4에서 급하게 TNT로 변경된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TNT 배터리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2006년 국방과학연구소도 이에 부정적인 회신을 보냈다.

또한 2006년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원회의 조사보고서의 부록에 국가안전기획부-외교부의 전문이 실려 있는데, 김승일과 김현희가 대한항공 858편을 탑승하기 전 받은 보안검사에서 ‘양주병’으로 가장한 ‘PLX’ 액체 폭탄이 발견되지 않았다. 국가안전기획부는 이 사실을 알고도 라디오와 양주병으로 가장한 폭탄으로 대한항공 858편이 추락했다는 허위 사실을 발표했다.

1988년 유엔 안보리에 제출한 외교부 문서 그 어디에도 PLX 액체 폭탄의 실험 결과가 없다. 단지 컴포지션 C-4의 실험 결과만이 실려 있을 뿐이다(350g). 이러한 내용만으로는 대한항공 858편의 추락 원인이 폭탄인지, 기체 결함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정부는 노태우 대통령 당선을 위한 비밀 작전인 “무지개 공작(1987. 12월 2일 작성)”에 따라 북한의 소행으로 서둘러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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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충돌 불사하는 듯한 윤 정부... 위험 신호 3가지

극우 장관 지명에 남북 군사합의 무력화, 국지적 충돌 가능성 높아졌다

23.10.02 18:44l최종 업데이트 23.10.02 18:44l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오전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에서 열린 '건군 75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열병하고 있다.
▲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오전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에서 열린 '건군 75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열병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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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윤석열 정부의 대북 전략이 심상치 않다. 윤석열 대통령이 그 단어조차 생소한 '공산주의'와의 전쟁을 '선언(?)'한 상황에서 극우·강성 장관들이 통일, 안보 수장으로 등장하며 남북 간 충돌 가능성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대북 전략이 세팅되고 있다. 내년 4월 총선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의 대북 강경 폭주는 남북의 충돌을 불사하는 듯하다. 이 기사에서는 윤 정부의 한반도 '포석'이 어디로 향하는지, 왜 위험한지 그 속내를 분석해 보겠다. 

첫 번째 포석, 극우 통일부 장관과 강성 국방부 장관의 지명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이 반대하는 극우 통일부 장관, 강성 국방부 장관을 왜 지명했을까?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지명된 권영세 통일부 장관은 정권교체와 상관없이 이전 정부의 남북 합의를 존중하는 등 이어달리기를 강조했다. 그가 통일부 수장으로서 대북정책을 조율하는 동안 남북관계는 그나마 최소한의 '관리'가 가능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 넘어선 상황에서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 2기 통일부 장관은 전임 권영세 통일부 장관과 연속성을 찾기 어려운 극우 인사이다. 김영호 장관은 "북핵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은 북한 전체주의 체제 파괴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북한이 안고 있는 이런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하는 것은 김정은이가 정권에서 쫓겨나는 그 길밖에 없다"(김영호 교수의 세상읽기)고 주장한 바 있다.(관련 기사: 대통령은 통일부를 없애고 싶은 건가 https://omn.kr/24mah)
 
신원식 국방부장관 후보자가 지난달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신원식 국방부장관 후보자가 지난달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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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청문회를 거친 신원식 국방부 장관 후보자는 과거 현직 대통령에게 내란 선동에 가까운 극우적 발언을 하고, 대결적 대북관을 숨김없이 드러낸 인사이다. 국방부 장관으로 너무나도 부적절한 신원식 후보자에 대해, 우리 국민은 부적절하다는 여론(48.3%)이 적절하다는 의견(30.6%)보다 우세하다(코리아리서치, 2023.9.28). 앞서 언급한 김영호 통일부 장관 또한 우리 국민에게 부적격( 52.7%) 판정을 받은 바 있다(미디어토마토, 2023.7.28).

윤석열 대통령의 철 지난 이념 논쟁을 제1선에서 지휘할 극우·강성 장관의 인선, 그렇게 첫 번째 포석이 놓여졌다. 

두 번째 포석, 남북 군사합의 무력화

두 번째 포석은 남북 군사합의 무력화로 연결된다. 윤석열 정부는 2018년 9월 평양정상회담에서 체결한 9.19 남북 군사합의를 무력화하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9월 21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 출석해 "만약 (북한이) 중대 도발을 하게 되면 9.19 합의 정신을 명백히 어긴 것으로 봐야 한다"며 "그런 상황에 대응해 적절한 조치를 내놔야 한다"고 말해 남북 군사합의 무력화 가능성을 열었다. 여기에 신원식 국방부 장관 후보자는 9월 27일 개최된 청문회에서 9.19 군사합의를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효력을 정지시킬 정도로 최선을 다하겠다"며 군사합의 폐기를 공언했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9월 5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정치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9월 5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정치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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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는 점은 북한의 9.19 군사합의 위반에 대해 합의 이행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합의 폐기를 추진한다는 점이다. 사실 9.19 남북 군사합의는 북한의 도발, 특히 국지 도발을 상당 부분 억제해 온 것으로 파악된다. 설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8년까지 북한이 침투하거나 국지 도발한 사례가 265건이나 되지만, 2020년과 2021년에는 국지 도발이 1건씩"에 그쳤다. 특히 접경지역의 우리 국민들에게 9.19 군사합의는 반드시 필요한 안전장치이다. 반대로 9.19 합의의 폐기는 남북 접경지역에서 국지적 충돌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그렇다면 윤석열 정부는 왜 9.19 군사합의를 스스로 폐기하려 하는가? 이제 다음 포석으로 가보자. 

세 번째 포석, 대북 심리전의 재개

윤석열 정부는 대북 심리전 재개를 서두르고 있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 후보자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대북 심리전을 재개해서 북한을 억제하는 데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북 심리전'을 통해 '북한을 억제'하겠다는 주장은 매우 위험한 도박이다. 우리 군이 김정은 체제를 비방하는 확성기를 다시 켠다면 휴전선의 긴장은 극대화될 것이며 국지 도발의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특히 9.19 군사합의가 무력화된 상황에서 대북 심리전이 재개된다면 그 위험은 배가된다.

관련하여 우리 헌법재판소가 대북 전단 살포 금지법을 위헌(표현의 자유 침해)으로 판결하며 논란이 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2020년 개정된 남북관계발전에 관한 법률 제24조 1항 3호(전단등 살포) 및 제25조(벌칙)에 대해 헌법 위반 결정을 내렸다. 해당 판결에 대해 헌법재판소 공보관실은 "입법자는 향후 전단 등 살포가 이루어지는 양상을 고찰해 접경지역 주민의 안전보장을 위한 경찰 등의 대응 조치가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전단 등 살포' 이전에 관련 기관에 대한 신고 의무를 부과하는 등의 입법적 조치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존중되어야 한다. 다만 대북 전단의 내용이 북한 김정은 체제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대북 확성기 재개와 함께 대북 전단이 접경지역의 긴장을 고조시킬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도 정부가 9.19 군사합의 폐기를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체제의 전복'을 주장한 바 있는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접경지역 주민의 안전을 위해 대북 전단 살포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통제할지 걱정이 앞서는 것 또한 사실이다.

최근 윤석열 정부가 둔 포석은 매우 우려스럽다. 극우 통일부 장관과 대북 강경 국방부 장관의 지명, 그리고 진행될 9.19 군사합의의 폐기 시도, 마지막으로 대북 심리전의 재개가 한 수, 한 수, 점에서 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필자 또한 이런 주장이 하나의 '시나리오'로 남길 바란다. 다만 최근 윤석열 정부의 포석은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기보다는 남북 접경지역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방향으로 두어지고 있다.

국회는 10월 10일부터 27일까지 18일간 국정감사를 앞두고 있다. 국회는 윤석열 정부의 위험한 도박을 막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시민사회도 정부와 국회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주권자가 부여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 여론조사 관련
- 코리아리서치, 2023. 9.28. 25-26일 전화 면접, 전국 1010명 대상, 응답률 12.4%, 신뢰 수준 95% 표본오차 ±3.1%P
- 미디어토마토, 2023.7.28. 전국 1032명, 응답률 2.6%, 오차범위 ±3.0%P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정일영씨는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입니다. 관심분야는 북한 사회통제체제, 남북관계 제도화, 한반도 평화체제 등으로, <한반도 오디세이>, <한반도 스케치北>, <북한 사회통제체제의 기원> 등 집필에 참여했습니다.

 

태그:#윤석열, #국방부, #통일부, #북풍, #남북군사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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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통 조약 맹신하는 우매한 정권

 

[개벽예감 557] 깡통 조약 맹신하는 우매한 정권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 기사입력 2023/10/02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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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왜 깡통 조약을 만들어 놓았을까?

2. 1953년 패전 위험에 빠진 미 제국

3. 깡통 조약은 미 제국의 유인책

4. 최후통첩이 장애물 치웠다 

5. 깡통 조약 제3조는 패전으로 직행하는 길

 

 

1. 왜 깡통 조약을 만들어 놓았을까?

 

2023년 10월 1일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때로부터 70년이 되는 날이다. 1953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미 제국 국무부 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1959)와 한국 외무부 장관 변영태(1892~1969)가 조약문에 서명했다. 이 조약은 1954년 11월 18일에 발효되었고, 그로써 한미동맹 관계가 성립되었다. 조약은 6개 조항으로 이루어졌다. 

 

▲ 변영태 장관과 덜레스 장관의 조약 체결 장면.     

 

 

한미상호방위조약 제2조에는 “당사국 중 어느 일방의 정치적 독립 또는 안전이 외부로부터의 무력 침공에 의하여 위협을 받고 있다고 어느 당사국이든 인정할 때는 언제든지 당사국은 서로 협의한다”라고 명기되었다. 이 조항은 어느 일방이 무력 침공을 받는 경우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서로 협의하는 것을 의무화한 조항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한미상호방위조약에는 어느 일방이 무력 침공을 받는 경우 군사행동을 의무화한 조항이 없다. 그 조약에는 상호협의를 의무화한 조항만 있고, 마땅히 있어야 할, 군사행동을 의무화한 조항은 없는 것이다.  

 

1949년 4월 4일 워싱턴에서 조인된 북대서양조약(North Atlantic Treaty)에는 상호협의를 의무화한 조항과 군사행동을 의무화한 조항이 모두 들어있다. 1960년 1월 19일 워싱턴에서 조인된 미일안보조약에도 상호협의를 의무화한 조항과 군사행동을 의무화한 조항이 모두 들어있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는 경우, 미 제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제2조에 의거하여 전쟁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한국과 협의하는 의무만 이행하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전시에 미 제국이 한국에 군대를 파병할 의무도 없고, 공동의 군사행동으로 전쟁에 대처할 의무도 없는 것이다. 

 

명색은 ‘상호방위조약’인데도, 전시에 군대를 파병할 의무와 공동의 군사행동으로 전쟁에 대처할 의무가 모두 빠져있는 것을 보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이야말로 알맹이 없는 깡통 조약에 불과하다.  

 

의문이 생긴다. 미 제국은 왜 알맹이 없는 깡통 조약을 만들어 놓았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70년 전 깡통 조약을 체결하기 전후의 복잡한 상황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1953년 5월 30일 당시 대통령 이승만(1875~1965)은 미 제국 대통령 드와잇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1890~1969)에게 보낸 서한에서 적국이 한국을 침공하는 경우 미 제국이 즉각 군사원조와 비상 지원을 한국에 제공해 준다는 내용을 한미상호방위조약 초안에 명기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미 제국은 이승만의 간곡한 요청을 외면했다. 1953년 7월 7일 이승만은 미 제국 국무부 차관보 월터 로벗슨(Walter S. Robertson, 1893~1970)에게 보낸 서한에서 어느 일방이 침공을 받는 경우 다른 일방이 군사 지원을 제공하는 조항이 한미상호방위조약 초안에 명기되지 않아서 매우 실망했다고 썼다. 

 

위에 서술한 사정을 보면, 미 제국이 한국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행동을 의무화한 조항을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고의적으로 넣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미 제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해도 한국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행동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195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2. 1953년 패전 위험에 빠진 미 제국

 

1953년 4월 3일에 작성된 미 제국 국가정보보고서(National Intelligence Estimates)가 기밀 해제되어 공개되었다. 국가정보보고서는 미 제국의 여러 국가정보기관들이 수집, 분석한 정보를 최종적으로 종합한 기밀문서다. 1953년 4월 3일 국가정보보고서에 다음과 같은 놀라운 정보가 담겼다.

 

“1951년 중순 정전협상이 시작된 이후, 한반도에서 공산 측 군사력이 꾸준히 증강되어 왔다. (여기서 말하는 ‘공산 측 군사력’은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의 군사력을 의미한다 - 옮긴이) 그들의 군사력은 두 배 이상 증가되었고, 병참도 충분히 증가되었다. 전투기는 세 배 이상 증가되었다. 만주 지역에서 전폭기 100대가 생산된 것으로 판단된다. 대폭 향상된 공산 측 군대의 전투력은 양호한 수준을 넘어선 것으로 판단된다. 잘 조직되고 충분히 통합된 그들의 방어지대는 교전지대에서 후방으로 15~20마일(24~32km - 옮긴이) 정도 더 넓어졌다. 방어지대에 요새가 많이 건설되었고, 현재 더욱 증가되고 확장되는 중이다.”

 

위에 인용한 미 제국 국가정보보고서는 1953년 초에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의 전쟁수행력이 대폭 증강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면 같은 시기에 미 제국군의 전쟁수행력은 어떠했을까? 

 

1953년 3월 5일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A. Van Fleet, 1892~1992)가 미 제국 연방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증언했다는 보도기사가 1953년 3월 6일부 동아일보에 실렸다. 미 제국 8군 사령관 겸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육군 대장 밴 플리트는 미 제국이 유엔기 아래 긁어모아 전선에 동원한 미 제국군, 한국군, 그 밖의 추종국가 군대들을 1951년 4월부터 1953년 2월까지 지휘했다. 그런 밴 플리트가 1953년 3월 5일 청문회에서 중요한 정보를 공개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1953년 초에 미 제국은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군사지휘관을 50%밖에 확보하지 못했고, 전차부대 하사관은 30%밖에 확보하지 못했으며, 전투원도 80%만 확보했다는 것이다. 100%를 확보해도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군사지휘관과 전투원이 그처럼 턱없이 부족했으니 미 제국의 패색이 짙어진 것은 당연하였다. 당시 미 제국이 군사지휘관과 전투원을 충원하지 못한 이유는 전쟁을 2년 이상 계속해 오면서 사상자가 너무 많아져 충원 증가추세가 사상자 증가추세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에 서술한 두 가지 정보는 미 제국이 1953년 당시 전쟁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패전 위험에 빠졌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미 제국의 선택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정전협정을 하루빨리 체결하는 것이었다. 

 

 

3. 깡통 조약은 미 제국의 유인책

 

패전 위험에 빠져 위급해진 미 제국이 정전협상을 서두르고 있는 판에 뜻밖의 장애물이 나타났다. 그 장애물이 바로 이승만이다. 이승만은 정전을 완강히 반대했다. 왜 그랬을까? 정전이 실현되면, 미 제국군이 대폭 감축되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의 전투력이 대폭 증강된 상황에서 미 제국군이 대폭 감축되면, 전쟁이 재발하는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한 일이었다. 미 제국군이 대폭 감축된 상태에서 전쟁이 재발하면, 이승만 종미우익정권과 한국군은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의 압도적인 공격을 받고 전멸할 것이라는 불안과 공포가 이승만의 심경을 심하게 자극했다. 극도로 불안해진 이승만은 ‘정전반대 국민대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정전협상을 반대하는 관제 시위로 군중들을 내몰았다. 

 

1975년 8월 4일 뉴욕타임스는 기밀 해제된 극비문서들을 폭로하는 기사를 실었다. 폭로기사에 의하면, 1953년 5월 29일 미 제국 국무부 고위 관리들과 국방부 고위 관리들이 국방부 청사에 모여 회의를 진행했다고 한다. 6.25전쟁 시기 전선을 지킨 미 제국 육군 참모총장 로튼 콜린스(J. Lawton Collins, 1896~1987)가 회의에서 전시 상황을 보고했다. 회의에서는 세 가지 방안이 논의되었다. 그것은 생떼를 부리면서 정전협상을 가로막은, 골치 아픈 장애물 이승만을 처리하기 위한 방안들이었다.

 

제1방안은 이승만에게 안보조약을 유인책으로 제공해 그가 정전협상을 반대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고, 제2방안은 미 제국의 뜻을 거역하는 이승만과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을 체포, 구금하는 것이고, 제3방안은 미 제국군이 철수할 때까지 미 제국에 협력한다는 약속을 이승만에게서 받아내는 것이다. 

 

회의에서 국무부 부장관 프리먼 매튜스(H. Freeman Matthews, 1988~1986)와 국무부 차관보 월터 로벗슨은 미 제국의 뜻을 거역하는 이승만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육군 참모총장 로튼 콜린스는 이승만을 체포해야 한다고 했다. 미 제국 해군 참모차장 도널드 던컨(Donald B. Duncun, 1896~1975)은 이승만에게 유인책으로 안보조약을 제공하자고 주장했으나, 콜린스는 이승만을 체포해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맞섰다. 오랜 시간 설왕설래한 끝에 이승만이 정전협상을 반대하지 않는 조건으로 미 제국이 이승만과 안보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을 할 수 있다는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논의한 세 가지 방도를 비망록에 담아 아이젠하워에게 상신했다. 아이젠하워는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승만이 정전협상을 반대하지 않게 만드는 유인책으로 안보조약을 체결하는 방안을 승인했다. 

 

1953년 5월 30일 미 제국 합참본부는 전선에 파견된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Mark W. Clark, 1896~1984)에게 1급 비밀전문을 보냈다. 비밀전문에는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와 당시 주한 미 제국 대사 엘리스 브릭스(Ellis O. Briggs, 1899~1976)가 미 제국이 안보조약 체결 협상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이승만에게 통보해 주고,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구조건을 이승만에게 제시하라는 내용이 담겼다. 세 가지 요구조건은 다음과 같다.

 

1) 한국 정부는 정전협상을 반대하지 않고, 정전협상을 반대하는 선동에 군중을 동원하지 않는다.  

2) 한국은 정전협정 이행에 협력한다.  

3) 한국군은 미 제국과 한국의 상호방위조약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 때까지 유엔군 총사령관의 작전통제를 받는다. 

 

그러나 상황을 오판한 이승만은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요구조건을 받아들이지 않고 정전협상을 계속 반대했다. 이승만은 1953년 6월 18일 자정을 기해 미 제국을 격분하게 만든 매우 위험한 망동을 저질렀는데, 그것이 바로 전쟁포로 집단탈출 사건이다. 이승만의 비밀지령을 받은 한국군은 1953년 6월 18일부터 닷새 동안 여러 수용소들에 갇혀있던 전쟁포로들 중에서 26,900여 명을 탈출시키는 대탈주극을 감행했다. 수용소 경비부대는 탈출하는 포로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해 61명을 현장에서 사살했고, 116명에 부상을 입혔으며, 8,200여 명의 탈출을 저지했다. 

 

이 사건은 미 제국에 격앙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전쟁포로 집단탈출 사건으로 미 제국이 “우방을 잃고 적을 얻었다”라고 격분했고,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전쟁포로 집단탈출 사건은 “미국의 등에 칼을 꽂는 짓”이라고 맹비난했으며,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는 전쟁포로 집단탈출 사건으로 “지옥문이 열렸다”라고 개탄했다. 

 

이승만이 전쟁포로 집단탈출 사건을 감행한 1953년 6월 18일 백악관에서 국가안보회의 제150차 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에서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이 감행한 전쟁포로 집단탈출 사건으로 정전협상이 파탄될 위험이 조성되었다고 탄식하면서 “그 위험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하고 신속한 방도는 군사정변”이라고 말했다. 아이젠하워가 언급한 “유일하고 신속한 방도”는 국무부 고위 관리들과 국방부 고위 관리들이 1953년 5월 29일 회의에서 논의한 세 가지 방안들 중에서 제2방안, 즉 미 제국군이 이승만과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을 체포, 구금하는 것을 의미한다. 

 

 

4. 최후통첩이 장애물 치웠다 

 

1953년 6월 초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아이젠하워는 최후통첩에서 “당신이 미 제국에 협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조치를 실행할 것”이라면서 “유엔군 총사령관은 당신의 결정에 상응하는 어떤 조치를 실행할 승인을 이미 받아놓았다”라고 노골적인 협박을 들이댔다.

 

아이젠하워가 최후통첩에서 언급한 조치는 1952년 7월 5일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가 미 제국 합참본부에 보낸 비밀보고서에 구체적으로 서술되었다. 비밀보고서에 의하면, 유엔사령부는 미 제국의 뜻에 복종하지 않는 이승만과 그 일파를 제거하고 과도정부를 수립한다는 실로 충격적인 내용이 들어있다.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가 그런 비밀보고서를 작성한 이유는 이승만의 폭압 만행으로 전선 후방에서 대혼란이 일어날 것으로 우려했기 때문이다. 1952년 이승만이 저지른 폭압 만행은 다음과 같다. 

 

서울을 빼앗기고 임시수도 부산에 내려가 피난살이를 하던 이승만은 1952년 5월 25일 느닷없이 전시계엄령을 선포하고, 야당 국회의원 50여 명을 북과 내통한다는 혐의로 체포, 연행했으며, 7월 4일에는 군대와 경찰을 내몰아 국회의사당을 포위하고 자신이 대통령에 재선되기 위한 이른바 ‘발췌 개헌안’이라는 것을 협박 분위기 속에서 통과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미 제국은 근심에 빠졌다. 폭압 만행을 당한 야당과 지지자들이 반이승만 투쟁을 각지에서 일으키면 이승만은 전시계엄령에 따라 유혈진압을 감행할 것이고, 그런 유혈사태가 일어나면 전선 후방이 대혼란에 빠져 가뜩이나 불리한 전세가 더 불리해질 것으로 우려했다. 그래서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는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한 ‘에버레디 작전계획(Operation Plan Everready)’을 수립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임시수도 부산에 있는 이승만을 다른 곳으로 유인한다.

2) 미 제국군 전투부대를 임시수도 부산에 출동시켜 이승만을 추종하는 한국군 고위지휘관 5~10명을 체포하고, 유엔군 시설들과 한국군 시설들을 경비하고, 한국군의 전시 계엄통제권을 장악한다. 

3) 이승만에게 위와 같은 조치가 이미 시행되었음을 통보하고, 그가 전시계엄령을 해제하게 하고, 국회에서 행동의 자유를 허용하게 하며,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게 한다. 

4) 만일 이승만이 미 제국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으면 그를 독방에 감금하고 국무총리 장택상이 전시계엄령을 해제하게 한다.

5) 만일 국무총리 장택상마저 미 제국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으면, 유엔사령부가 이승만 정부를 해산하고 과도정부를 세운다.

6) 유엔군에 참여한 나라들의 요청에 따라 유엔사령부는 자기 임무를 거스르는 불법행위를 감행하는 자들을 제거하는 군사행동을 하였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에게 최후통첩을 보낸 직후인 1953년 6월 초 국무부 차관보 월터 로벗슨을 특사로 서울에 파견해 미 제국의 지시에 복종할 것을 이승만에게 요구했다. 이승만은 자신이 미 제국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으면 목숨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을 것으로 직감하고 머리를 숙였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마침내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날로부터 며칠 뒤 아이젠하워는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를 서울에 급파해 방위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미 제국의 시각에서 보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정전협상을 반대하며 거역 소동을 일으킨 이승만을 복종시키기 위한 유인책에 불과했으므로, 그 조약은 알맹이 없는 깡통 조약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미 제국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깡통 조약으로 만들어 놓았는데도, 윤석열 정권은 “한미동맹 70주년 만세!”를 목청껏 외쳐대면서 맹신의 길을 가고 있다. 

 

 

5. 깡통 조약 제3조는 패전으로 직행하는 길

 

2023년 9월 28일 미 제국 국방부가 「대량파괴무기에 대응하는 전략 2023(Strategy for Countering Weapons of Mass Destruction 2023)」이라는 제목의 군사전략문서를 발표했다. 미 제국 국방부는 그 문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미국 본토와 역내 동맹국들 및 우호국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단거리, 중거리, 대륙간 사거리의 이동식 핵능력을 개발, 배치하고 있다”라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핵)능력 개발은 갈등의 어느 단계에서도(at any stage of conflict)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선택권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제공한다”라고 기술하였다.   

 

▲ 「대량파괴무기에 대응하는 전략 2023」표지.     © 미 국방부

 

위의 인용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조선인민군이 임의의 시각에 미 제국 본토에 치명적인 핵타격을 가할 수 있을 만큼 핵전투 능력을 고도화했다는 사실을 미 제국 국방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조선인민군 전략핵 타격부대가 기습적으로 발사한 화성-18형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미 제국 본토를 강타할 것이고, 그로써 미 제국은 파멸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점을 비교적 솔직하게 공인한 것이다. 

 

미 제국 국방부가 미 제국 본토를 강타당하고 파멸의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점을 공인한 것은 무슨 뜻인가? 거기에는 미 제국이 자국 본토에 화성-18형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떨어지는 파멸 위험을 감수하면서 한국을 방어해 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미 제국 본토를 치명적으로 위협하는 조선의 핵공격 능력 앞에서 미 제국은 한미동맹을 포기할 것이라는 뜻이다. 백악관은 서울을 방어해 주기 위해 워싱턴을 핵피격 파멸 위험에 빠뜨릴 정도로 우매한 집단이 아니다.  

 

미 제국은 자국 본토를 방어하고, 역외 영토인 하와이, 알래스카, 괌을 방어하기 위해 일본에 외곽 군사기지를 설치했고, 일본 주위에 2개의 부속 방어망을 구축했다. 그것이 바로 한국과 대만이다. 그런데 최근 중미대결이 격화되면서 대만의 군사전략적 가치가 한국의 군사전략적 가치보다 훨씬 더 커졌다. 이것은 미 제국이 한국을 포기할 수 있어도 대만은 포기할 수 없는 특이한 상황 속에 놓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미 제국은 자국 본토와 영외 영토가 조선의 핵타격 위협을 받을 경우, 한국과의 군사동맹을 포기하는 대신 일본과의 군사동맹과 대만 방어에 군사력을 집중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놀라운 사실은, 미 제국이 미 제국 본토와 역외 영토가 조선의 핵타격 위험에 직면하는 경우 한미동맹을 포기할 ‘함정조항’을 깡통 조약에 들여놓았다는 점이다. 깡통 조약 제3조가 바로 그 함정조항이다. 깡통 조약 제3조에는 “공동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각자 헌법 절차에 따라 행동할 것을 선언한다”라고 명기되었다. 이 조항을 “공동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행동할 것을 선언한다”라고 명기한 미일상호안보조약 제5조와 대조하면 격차가 커 보인다. 각자 헌법 절차에 따라 군사행동을 하는 것과 그런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즉시 군사행동을 하는 것은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깡통 조약 제3조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는 경우 미 제국은 자국의 헌법 절차에 따라 그 전쟁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미 제국 연방헌법에 명기된, 전쟁을 결정하는 절차가 번거롭기 짝이 없다는 점이다. 

 

미 제국 연방헌법 제1조 8항에는 연방의회가 선전포고권을 행사한다고 명기되었다. 이 조항에 대한 법리 해석에 의하면, 전쟁을 선포하는 권한(선전포고권)은 미 제국 연방의회가 행사하고, 전쟁을 시작하는 권한(개전권)은 미 제국 총사령관인 대통령이 행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방의회에서 선전포고를 의결해야, 다시 말해서 연방의회가 전쟁을 승인해야 미 제국 대통령이 전쟁을 시작할 수 있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 제국 연방의회는 서로 다른 적대국들을 상대로 여섯 차례의 선전포고를 각각 의결한 바 있다. 

 

그런데 그러한 전통이 미 제국 제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의 독단과 전횡에 의해 깨졌다. 그는 연방의회가 선전포고를 의결하지 않았는데도 1950년 코리아 전쟁을 결정했다. 미 제국 제36대 대통령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 1908~1973)도 연방의회가 선전포고를 의결하지 않았는데도 1964년 윁남[베트남] 전쟁을 결정했다. 

 

트루먼과 존슨의 독단과 전횡에 의해 깨진 전통은 1990년대에 복구되었다. 미 제국 제41대 대통령 조지 부쉬(George H. W. Bush, 1924~2018)는 1991년 연방의회의 승인을 받고 걸프 전쟁을 일으켰다. 미 제국 제43대 대통령 조지 부쉬(George W. Bush, 1946 출생, 2023년 현재 생존)도 연방의회의 승인을 받고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  

 

위에 서술한 내용을 보면, 만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는 경우 미 제국은 깡통 조약 제3조에 의거해 연방의회에서 전쟁 승인을 받으려 할 것이 분명하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의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1) 1991년 걸프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연방의회에서 전쟁 승인을 받은 절차를 보면, 하원에서 찬성 250표, 반대 183표로 전쟁을 승인했고, 상원에서 찬성 52표, 반대 47표를 전쟁을 승인했음을 알 수 있다. 

2)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연방의회에서 전쟁 승인을 받았을 때는, 미 제국 전체가 9.11 사태의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시기였으므로 하원에서 찬성 420표, 반대 1표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전쟁을 승인했고, 상원에서 찬성 98표, 반대 0표라는 만장일치로 전쟁을 승인했다.  

3)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연방의회에서 전쟁 승인을 받았을 때는 하원에서 찬성 296표, 반대 133표로 전쟁을 승인했고, 상원에서 찬성 77표, 반대 23표로 전쟁을 승인했다. 

 

위에 열거한 표결 상황은 연방의회에 존재하는 전쟁 반대 세력이 만만치 않은 표결력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미 제국은 연방의회의 승인을 받고 일으킨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서 각각 패했다. 이 두 차례의 패전은 연방의회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난 뒤에 무력 개입이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로써 젤린스끼 종미우익정권에 미국산 무기를 지원하지 못하게 가로막으려는 분위기가 연방의회에 조성되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는 경우 미 제국 연방의회는 군사력을 사용하는 문제를 놓고 찬반으로 갈려 격론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주목되는 것은, 분초를 다투는 현대전에서 군사력을 사용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면 패전으로 직행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미 제국 연방의회의 전쟁 승인 절차를 명기한 깡통 조약 제3조는 한미연합군이 패전으로 직행하는 길을 예시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미 제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깡통 조약으로 만들어 놓았을 뿐 아니라, 그 조약 제3조에 패전으로 직행하는 길을 예시했는데도, 이번에 윤석열 정권은 “한미동맹 70주년 만세!”를 열심히 외쳐댔다. 우매한 정권이 깡통 조약을 맹신하면, 전쟁에서 패하는 것을 피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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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희, 김행, 한동훈’ 언급한 조국 “윤석열 ‘살권수’는 개소리”

  •  김도연 기자 
  •  
  •  입력 2023.10.01 18:03
  •  
  •  댓글 0



 

 

조국, 연일 윤석열 정권과 검찰 비판 메시지

요직에 검사 출신 임명하는 정권에 “신검부”

검찰수사 비판할수록 그의 위법행위도 부각

자녀 입시 비리 혐의로 1심서 징역형을 받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김건희 여사의 주가 조작 및 양평 고속도로 변경 의혹을 수사하라”고 검찰을 질타했다. 이원석 검찰총장과 검사들이 윤석열 정권 사조직이 아니라면, 현 정권 인사에 대한 수사도 엄격해야 한다는 취지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목소리를 키우는 조 전 장관에 여러 해석이 나온다.

조 전 장관은 1일 페이스북에 “이원석 검찰총장 및 휘하 검사들이 단지 ‘윤석열·한동훈 사조직’의 부하가 아니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문재인 대통령,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및 관계인을 수사하듯, 김건희 여사의 주가 조작 의혹 및 양평 고속도로 변경 의혹을 수사하는 것.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하듯, 해병대 박정훈 대령에게 압박을 가한 용산 대통령실 및 군 관계자들을 수사하는 것. △조국 장관 후보자 배우자의 차명주식 의혹을 수사하듯, 김행 장관 후보자 및 그 배우자, 친인척을 수사하는 것 △조국 장관 및 그 자녀를 수사하듯, 언론에 여러 차례 보도된 한동훈 장관을 비롯한 여러 부처 장관(후보자) 자녀의 인턴 증명서의 진위 및 과장(엄밀한 시간 확인)을 수사하는 것.”

조 전 장관은 “최소 이상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검찰도 법치도 ‘사유화’된 것”이라며 “그리고 윤석열의 ‘살아있는 권력 수사론’은 완전 개소리”라고 비난했다.

▲ 조국 전 법무부장관. ⓒ연합뉴스

조 전 장관은 연일 윤석열 정권 검찰에 각을 세우고 있다. 지난달 27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대선 경쟁자이자 야당 대표를 향한 영장실질심사 전까지 727일 동안 세 개의 청(서울중앙지검, 수원지검, 성남지청), 70여명의 검사가 376회 압수수색과 여섯 번의 소환조사를 벌인 결과가 구속영장 기각”이라고 꼬집었다.

지난달 15일 노무현재단 유튜브 방송 ‘알릴레오북스’에선 “윤석열 대통령 처가 사람들을 변호했던 변호사들은 대부분 한자리 하고 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자리를 챙겨줄 수 있는가 의문이 있다”며 “윤 대통령은 촛불혁명 시기 국정농단 수사를 했던 사람이다. 정권을 잡고 나니까 간첩조작을 했던 검사도 중용하고, 박근혜 탄핵이 잘못됐다고 비판하는 검사 출신 변호사를 정부 외곽기관 주요 자리에 배치했다”고 지적했다. 조 전 장관은 최근 출간한 책 ‘디케의 눈물’에서 정부 요직에 검사 출신을 임명하고 있는 윤 대통령 인사를 ‘신검부’로 표현하며 비판했다.

조 전 장관은 지난달 22일 친민주당 스피커 김어준씨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서 “나와 내 가족 명예를 회복해야 하는 면이 있다”며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서 극우로 달리고 있는데 문재인 정부 고위 공직자로서 책임이 있다. 이 폭주를 어떻게 막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조 전 장관이 내년 총선 출마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뒤따랐다.

조 전 장관이 윤 대통령과 검찰을 비판할수록 그의 위법 행위와 부도덕도 함께 입길에 오르내릴 수밖에 없다. 그는 자녀 입시 비리와 감찰 무마 등 혐의로 지난 2월 1심에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법원은 딸 조민씨의 ‘7대 스펙’ 창조 과정에 조 전 장관이 관여했다고 판단했다. 특히 서울대 공익인권법센터 인턴십 확인서와 부산 아쿠아펠리스 호텔 인턴십 확인서의 경우 조 전 장관이 직접 위조했다고 했다.

언론도 조 전 장관 발언과 행보를 주목했다. 김윤덕 조선일보 선임기자는 지난달 26일 칼럼에서 “조국은 검찰이 국민들 공포의 대상이 됐다고 했지만, 검찰이 무서워 못 살겠다는 사람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공포로 치자면, 검찰보다 백주 대낮의 묻지 마 폭행범과 스토킹 살해범들이 훨씬 무섭다”면서 “신검부, 대한검국이라는 얄팍한 조어 선동에도 더는 속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조 전 장관이 “총선 정국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반검찰, 반독재 감정을 부추기고 있다”는 게 김윤덕 기자 생각이다.

위지혜 매일경제 기자는 “조 전 장관 일가는 최근 잇따라 책을 출간하는 등 정치 행보를 보이고 있다”며 “조 전 장관 일가는 최근 이재명 대표 체제에 대한 야권 내 위기론이 불거지자 친문 세력의 대안으로 언급되며 주목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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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를 빼앗긴 주권 국가가 있는가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23/10/02 08:47
  • 수정일
    2023/10/02 08:5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 장창준 객원기자
  •  
  •  승인 2023.10.01 08:49
  •  
  •  댓글 0



 

 

[한미상호방위조약 70년]지구상에 이런 동맹은 없었다 ①

▶ 1953년 10월 1일 워싱턴 D.C에서 미국의 덜레스 국무장관과 한국의 변영태 외무장관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70년 전 오늘, 그러니까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다. ‘상호’라는 말은 장식에 불과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미국의 방위를 지원할 어떤 역량도, 자격도 없었다. 미국의 원조에 기대해 나라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 나라가 어떻게 미국을 지원하겠는가. 게다가 1950년 7월 14일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도 미국이 거머쥐고 있었다. 작전통제권을 상실한 나라가 작전통제권을 거머쥐고 있는 나라의 안보를 지원할 자격이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체결되었다. 마치 동등한 자격을 갖춘 국가들 사이에서 체결된 것처럼, 마치 한국과 미국이 대등하고 수평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체결되었다.

1953년 10월 1일 이승만 정부는 동맹을 체결할 자격조차도 갖지 못했다. 동맹은 자신의 군사력을 동맹국을 위해 사용하기로 약속하는 정치적 행위이다. 따라서 자기 나라 군대에 대한 작전권과 통제권을 갖고 있어야 동맹할 자격이 생긴다.

그런데 미국은 이미 한국전쟁 시기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앗아갔다. 한국 군대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거머쥔 미국이 한국과 동맹을 체결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작전통제권은 군사 주권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군사 주권을 상실한 나라는 동맹을 체결할 자격 자체가 없다.

이승만을 ‘국부(國父)’로 여기는 사람들은 이승만이 결단과 지략으로 한미동맹조약을 체결하지 않으려는 미국을 설득했고, 그 결과 대한민국이 유지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미동맹조약은 우리의 영토를 미국 맘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을 뿐이다. 이승만은 미국에 우리의 영토 주권을 넘겨준 사람일 뿐이다.

냉전이 격화되는 시기, 미국은 동북아시아에서 대소전진 군사기지가 필요했다. 미국이 원하는 곳에 원하는 군대를 원하는 만큼 주둔시킬 수 있는 권리, 즉 ‘주병권’을 대한민국에서 확보하고자 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역사적인’ 한미상호방위조약 제4조이다.

제4조

상호합의에 의하여 결정된 바에 따라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주변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許與)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

이승만 정부는 주병권을 미국에 ‘허여’하고, 미국은 ‘수락’했다. 이로써 미국은 대한민국 영토와 그 주변에 미군 병력을 주둔시킬 수 있는 권리를 완벽하게 확보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가 ‘역사적인’ 이유는 어느 동맹조약도 이런 내용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미일동맹조약만 하더라도 "미국은 그의 육군, 공군 및 해군에 의한 일본 국내의 시설 및 구역의 사용권을 허가받는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미국은 미군을 일본에 주둔시킬 때는 매번 일본 정부의 허가를 받게 되어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 주권뿐 아니라 영토 주권마저 완벽하게 장악하게 되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70년을 맞는 오늘, 빼앗긴 우리의 군사 주권과 영토 주권은 여전히 미국의 손아귀에 있다. 대한민국이 주권 국가라고? 군사 주권과 영토 주권을 빼앗긴 주권 국가가 있었던가? 그런 경우를 식민지라고 부른다.

장창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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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는 보수? 홍범도 논란, 수사 외압에 ‘일베’급 장관 후보자까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9월 26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단상에서 건군 75주년 국군의 날 시가행진을 지켜보며 장병들을 향해 박수 보내고 있다. ⓒ뉴시스
10월 1일 국군의 날을 닷새 앞두고 성남 서울공항에서 기념식과 함께 육해공군 장병 6,700여 명이 참여한 열병이 진행됐다. 비닉 무기인 고위력 탄도미사일, 최신형 ‘현무’ 등 일반에 최초 공개되는 장비부대 행진도 이어졌다. 곧이어 10년 만에 서울 도심에서 군 시가행진이 실시됐다. 주한미군 전투부대원도 성조기를 휘날리며 처음으로 시가행진에 참여했다. 역대 최대 규모로 열린 국군의 날 기념식이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직접 시가행진에 참여한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들이 위풍당당한 개선 행진을 보고, 여러분을 신뢰하고 우리 안보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지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대북 강경대응을 천명하면서 ‘힘에 의한 평화’를 강조했다. 이날 시가행진이 대북 무력시위 성격임을 드러낸 셈이다.

그러면서 “안보도 경제도 보수정부가 낫다는 조작된 신화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말에 ‘보수정부’인 윤석열 정부와 여당은 콧방귀를 끼고 있다. 하지만 안보는 무력뿐만 아니라 국가의 안녕과 국민의 안전에 대한 대비 시스템 전반을 포괄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안보는 보수정부가 낫다’는 증거를 윤석열 정부에서 찾아보기가 힘들다. 안보에 있어서는 소모적인 이념전쟁만 불사르면서, 정작 병사 하나 지키지 못하는 무능함만 내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내에 설치된 고(故) 홍범도 장군 흉상을 포함한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흉상도 필요시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뉴시스

 

‘항일 영웅’을 한순간에 ‘빨갱이’로 만드는 국방부


윤석열 정부의 이념전쟁은 육군사관학교 충무관 앞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추진으로 촉발됐다. 국방부가 홍범도 장군이 1927년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것을 문제 삼으면서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하겠다고 나서면서다. 앞서 육군은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 3월 1일 우리 군 장병이 훈련으로 사용한 실탄의 탄피 300kg을 녹여 홍범도 장군 등 독립운동가 5명의 흉상을 제작해 육사 교내에 세웠다.

국방부는 홍범도 장군의 전력이 “공산주의 북한의 침략에 대비하여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한 호국간성을 양성하는 기관”인 육군사관학교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홍범도 장관 흉상 철거를 밀어붙이고 있다.

국방부의 이런 방침에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을 무찔렀던 ‘항일 영웅’이 갑자기 ‘빨갱이’로 몰리게 됐다. 항일무장투쟁의 업적을 인정받아 19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았고, 카자흐스탄에 있던 유해는 2021년 대한민국 공군의 호위를 받으며 송환됐으며, 여러 독립운동가와 함께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흉상이 세워졌던 인물이 바로 홍범도 장군이다. 그런 홍범도 장군을 갑자기 윤석열 정권이 지우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국방부의 조치가 과도하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홍범도 장군을 사상의 잣대로 평가하고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1945년 해방 이전까지 사회주의, 공산주의적 이념을 갖거나 소련 등의 도움을 받아 독립운동을 한 세력은 적지 않았다는 게 역사학계의 중론이다. 이제 와서 이들의 당시 사상을 문제삼아 배척한다는 건, 일제라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을 정부가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는 보수세력이 중시하던 안보의 핵심 근간을 뒤흔드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안보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보수진영에서도 비판적인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철 지난 해묵은 공산주의 이념전쟁”이라며 “홍범도 장군을 존경하는 것은 독립전쟁 영웅이었기 때문이지 불가피했던 소련 공산당원 홍범도는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도 “민생의 문제는 절대 아니고 심지어 이건 보수진영의 보편적인 지향점이라기보다는 그저 일부의 뉴라이트적인 사관에 따른 행동”이라며 “과거 무장독립운동에 나섰던 사람들 간에 크고 작은 알력이 있었을망정 이념에 따라서 그 평가가 달라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역사학계에서도 집단적인 반발이 터져 나왔다. 한국역사연구회 등 51개 역사단체는 “정부의 왜곡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자랑인 평민 의병장, 대한독립군 대장, 북로정일제일군 사령관 홍범도가 부관참시당했다”며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추진 계획을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해병대 사관 제81기 동기회는 지난 8월 26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고 채 상병 순직에 대한 공정수사 촉구를 위한 해병대 총행동’을 가졌다. 이날 자리에는 동기뿐 아니라 여러 선후배들이 함께 했다. ⓒ뉴시스

군에 입대했더니 돌아온 건 허무한 죽음, 그리고 진실 은폐


해병대 1사단 포병여단 소속 채 모 상병의 사망 사건은 윤석열 정부가 강조하던 안보의 허점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다.

올해 여름, 채 상병은 경북 예천 내성천 일대에서 호우 피해 실종자를 수색하다가 급류에 휩쓸려 사망했다. 당시 일병이던 채 상병은 해병대를 상징하는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지만 구명조끼를 비롯한 안전장치 하나 제대로 갖추지 않았고, 일명 ‘인간띠’ 수색을 하다가 변을 당했다. 설령 구명조끼와 같은 안전장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도보 수색을 담당하는 포병이던 채 상병이 허리까지 물이 차오르는 강에 들어가 수색을 해야 하거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윗선’의 지시가 없었다면 말이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군인이 소모품이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국가의 안보를 지키는 의무를 다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군에 입대했더니, 돌아온 것은 허무한 죽음이었다는 것이다. 군에 대한 신뢰는 추락했다.

더 큰 문제는 채 상병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당초 채 상병 사망 사건에 대한 수사는 해병대 수사단이 맡았다. 그런데 경찰로 이를 이첩하는 과정에서 ‘윗선’으로부터 외압을 당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해병대 수사단장이었던 박정훈 대령의 폭로를 통해 ‘윗선’의 수사 외압 정황이 속속 드러났다.

그 핵심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기록에서 사건 현장 지휘 책임자로 꼽히는 임성근 해병대 1사단장의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빼고, 수사기록의 경찰 이첩도 보류하라는 것이었다. 수사단장이던 박 대령은 임성근 1사단장 등 8명에게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가 있다는 수사 결과를 내리고, 이를 이종섭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하고 결재를 받은 상태였다. 현행 법에 따라 박 대령은 이 수사기록을 경찰로 이첩하려고 하는데 거기서 ‘윗선’에 의해 제동이 걸렸던 셈이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실의 개입이 있었다는 정황도 나오고 있다.

이후 박 대령은 수사단장 보직에서 해임될 뿐만 아니라 ‘항명죄’로 기소돼 국방부 검찰단의 수사를 받고 있다. ‘윗선’의 지시를 무시하고 경찰로 수사기록을 이첩했다는 혐의다. 박 대령은 수사 외압을 주장하며 계속 법적 다툼을 이어나가고 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도 수사 외압 의혹과 관련해 관련자들을 조사하고 있다. 채 상병 사망 사건은 현재 경찰이 수사 중이지만 그 진실은 여전히 안갯속이고, 박 대령의 항명 사건으로 비화한 형국이다.

안보의 핵심 축이라고 불리는 군대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혼돈은 보수세력의 지지층도 혀를 내두르게 하고 있다. 전국의 해병대 예비역과 박 대령의 해병대 사관 동기들은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집회를 열고 채 상병 사망 사건과 이와 관련한 수사 외압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공정수사를 촉구하기도 했다. 당시 해병대 사령관을 역임한 전도봉(80) 예비역 중장은 “부하는 상관의 지시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다 죽음으로 충성했는데 이제는 상관이 죽음으로 보답해야 한다. 즉 현실의 해병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지휘관이 희생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 후보자가 지난 9월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 출석해 의원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2023.09.27. ⓒ뉴시스

 

군사 쿠데타 옹호 논란 휩싸인 ‘극우’ 국방부 장관 후보자


이 일로 벼랑 끝에 내몰린 이종섭 국방부 장관은 결국 윤석열 대통령에게 사의를 밝혔다. 야당이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실 은폐와 수사 외압의 책임을 물으며 탄핵소추를 추진하자 선제적으로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다. 윤 대통령은 하루 만에 서둘러 이 장관의 사표를 수리했다. 이는 수사 외압 의혹의 진상규명을 막아선 결과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윤 대통령이 신임 국방부 장관 후보자로 신원식 국민의힘 의원을 지명한 것은 안보의 추락한 신뢰를 더 이상 회복할 생각이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신원식 후보자는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인 이완용, 쿠데타와 민간인 학살을 일으킨 전두환을 옹호하거나 ‘군 사이버사령부 댓글 공작’ 사건이 날조된 것이라고 왜곡 주장을 하는 등 부적절한 언사와 극우적인 성향으로 수차례 구설수에 올랐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2019년 자유한국당 주최 집회에 예비역 장군 신분으로 연단에 올랐던 신 후보자는 “이완용이 비록 매국노였지만 한편으론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며 이완용을 옹호하는 반면, “이완용과 비교도 되지 않는 오천 년 민족사의 가장 악질적인 매국노가 문재인”이라며 문재인 당시 대통령을 힐난했다.

또한 신 후보자는 같은 해 유튜브 채널 ‘신인균의 국방TF’에 출연해 전두환 씨에 대해 “뭐 사람들은 독재자라는데, 박정희 대통령 돌아가신 그 공백기에 서울의봄 일어나고 그래서 저는 그때 당시 (전두환이) 나라 구하겠다 나왔다고 본다”며 “그런데 광주에서 사격명령, 방문한 적도 없는 전 대통령 불러서 저 망신을 주는데 누구 하나 보호해 주는 사람 있나”라고 성토했다. 국방부 장관 후보자가 군사 쿠데타를 옹호하는 시각을 보인 셈이다.

그는 같은 해 극우 성향의 전광훈 목사 집회에 참석해서는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을 파멸로 이끌었던 촛불은 거짓이고, 지금 태극기는 진실”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문재인 당시 대통령에 대해 “내려오지 않으면 쳐들어가서 끌어내리고 다윗이 골리앗의 검을 뺀 것처럼 목을 날려야 한다”고 막말을 하며 춤을 추기도 했다. 아울러 “문재인은 취임하자마자 한국군의 정신을 파괴시킨다”며 “공관병 갑질, (군) 사이버사 댓글, 계엄령 모의 날조 이런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 후보자는 2020년 미래통합당 비례대표로 정치에 입문한 뒤로도 국회에서 여러 발언으로 논란이 됐다. 올해 4월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오염수”라는 단어를 쓰면 “특정 이념에 매몰된 것”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해병대원 사망사건 조사 및 이첩 과정에서 국방부 윗선의 외압이 있었다는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에 대해서도 “3류 저질 정치인 망동”이라고 비난했다.

최근 국방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선 “북한 공산주의와 싸워서 나라를 지킨 육사에서 홍 장군의 졸업장을 준 그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며 독립운동가인 홍범도 장군의 육군사관학교 명예졸업증서 회수를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이렇다 보니 신 후보자가 육군 중장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군을 지휘하는 국방부 장관으로서 자격이 있느냐는 의문이 뒤따른다. 논란이 커지자 신 후보자는 뒤늦게 자신의 과거 발언에 대해 바짝 자세를 낮추는 모습을 보였다. 신 후보자는 인사청문회에서 “쿠데타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해명하거나 ‘문 전 대통령의 목을 날려야 한다’는 발언에 대해선 “적절치 않았다”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발언을 주워 담기에는 이미 늦었다. 국회 다수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철 지난 종북, 공산주의 타령이나 하는 신 후보자가 있을 곳은 국방부가 아닌 아스팔트 우파의 집회 현장”이라며 윤 대통령에게 지명 철회를 촉구했다. 수사 외압으로 물러나는 국방부 장관은 물론이고, ‘일베’(극우 성향 커뮤니티) 성향의 국방부 장관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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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내전화, 尹대통령 '이중 전쟁' 종착지는?

한 배 탄 尹·바이든 앞에 드리운 '트럼프 변수'

임경구 기자  |  기사입력 2023.10.02. 05:04:13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됐다. 보름 뒤 치러진 한국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됐다. 5월 21일, 윤 대통령은 취임 열흘 만에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을 가졌다. 중국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소그룹을 만들지 말라"고 미국을 견제했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윤 대통령은 "보편적 가치 공유", "자유의 가치 재발견"을 강조했다. 한미동맹을 외교의 근간으로 삼는 한국 정부가 미국이 주도하는 '가치동맹'을 거부하기 어려운 현실을 반영했다. 미중 경쟁과 우크라이나 전쟁이 표상하는 신냉전의 먹구름 속에 출범한 보수 정부의 불가피한 선택으로 인정받았다.

 

곧바로 한미동맹, 한미일 공조 강화로 직진했다. 올해 4월 핵 기반 동맹 관계로 다가선 한미 '워싱턴 선언', 한미일 안보 협력 제도화의 발판을 마련한 9월 '캠프 데이비드' 합의는 윤 대통령이 올라탄 가치동맹의 소산이다. 이전 정부에서 최악으로 치달았던 한일관계는 "미래지향적 관계"로 전환했다. 

 

대신 한중 관계에 기회비용을 초래했다. 북한과 러시아의 '위험한 거래'도 대가로 돌아오고 있다. 한일관계 개선의 비용도 만만찮았다. 강제징용 문제에서 일본은 배상을 거부하고 사죄도 유보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로 한국 정부에 난처한 상황을 안기기도 했다. 

 

윤 대통령은 처음부터 내치와 외치의 경계를 허물고 국정에 임했다. 취임사에서 "우리나라는 국내 문제와 국제 문제를 분리할 수 없다"면서 "국제사회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역할을 주도적으로 수행할 때 국내 문제도 올바른 해결 방향을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 예고에 따라 신냉전적 국제 질서에는 모호성을 폐기하고 대응 기조를 잡았다. 동시에 내전에 가까운 국내 갈등도 전면화했다. 화물연대, 건설노조, 민주노총, 시민단체를 몰아붙인 '이권 카르텔' 척결,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을 향한 흑백 논리가 이념 전쟁으로 거칠어졌다. 

 

지난 6월 자유총연맹을 찾은 윤 대통령은 "왜곡된 역사의식, 무책임한 국가관을 가진 반국가 세력들은 핵무장을 고도화하는 북한 공산집단에 대해 유엔 안보리 제재를 풀어달라고 읍소하고, 유엔사를 해체하는 종전선언을 노래 부르고 다녔다"고 했다. 

 

8.15 광복절 경축사에선 '공산전체주의'라는 생경한 용어를 반국가 세력의 정체를 지칭하는 의미로 썼다.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 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 세력들이 여전히 활개 치고 있다."

 

9월 국립외교원을 방문해선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그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 그리고 반국가 세력은 반일 감정을 선동하고, 캠프 데이비드에서 도출된 한미일 협력 체계가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험에 빠뜨릴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고 했다.

 

이념 갈라치기는 육군사관학교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을 정치 한복판에 끌어올렸다. 급기야 국민의힘 연찬회에서 윤 대통령은 "이념보다는 실용이라고 하는데 기본적으로 분명한 철학과 방향성 없이는 실용이 없다"며 "제일 중요한 게 이념"이라고까지 했다. 

 

"이념적으로 극과 극이라 싸우지 않을 수 없다. 장관들이 적극적으로 싸우라"고 다그친 내각도 흡사 '전시 내각'을 방불케하는 진용으로 구성했다. 극렬한 반대론을 무릅쓰고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 김영호 통일부 장관을 임명한 데 이어 신원식 국방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를 발탁한 인사 기조는 '이념 투사' 전진배치다.

 

 

 

총선과 美 대선, 尹 앞에 놓인 두 번의 고비

가장 공격적인 방식으로 냉전과 내전을 병행하고 있는 윤석열 정부에 대한 중간 결산은 내년에 이뤄진다.

 

첫 번째 고비는 4월 총선이다. 적어도 그때까지 윤 대통령은 '이념 전쟁'을 누그러뜨릴 기색이 없다. 지지층을 강화하고, 중간층을 끌어당기고, 반대층을 약화시키는 선거공학에 어긋나더라도 윤 대통령 스타일상 후퇴하지 않을 거란 관측이다. 

 

최창렬 용인대 특임교수는 "윤 대통령의 인식은 내면화돼 있다"며 "보수층을 결집하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역사인식, 국제질서 인식에서 의외로 강경보수적인 윤 대통령의 면모가 드러났다"고 했다. 

 

최 교수는 "특히 미국, 일본과 가까워지면서 본능적인 미일 친화적 의식이 국내 정치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시대와 맞지 않는 '공산전체주의', '반국가세력' 같은 표현들은 그래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윤 대통령의 이념 전쟁으로) 보수층은 결집하겠지만, 수도권을 중심으로 하는 중도층에게는 선거공학적으로 득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국제질서의 분기점이 될 내년 11월 미국 대선은 국내외를 관통해 윤 대통령이 뛰어든 '체제 전쟁'의 지속 가능성을 결정할 최대 변수다. 

 

바이든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 '가치동맹'의 핵심 파트너인 윤 대통령의 국제적 위상도 높아진다. 한미일 군사협력 제도화, 인도태평양 전략 추진의 동력이 채워지는 동시에 국정방향 설정의 정당성을 인정받게 될 전망이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집권하면 바이든 정부와 전혀 다른 미중 관계, 미러 관계 설정이 예상된다. 공화당 대선 주자들을 압도하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최근 바이든 대통령마저 오차범위 밖인 9%포인트 차이로 제쳤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와 술렁이고 있다. 

 

윤석열 정부 국가안보실장을 지낸 김성한 교수는 최근 학술대회에서 "미 대선 예비주자 중에는 미국 우선주의와 동맹 경시적 사고를 가진 인사들이 있다"며 "앞으로 1년 반 정도가 우리에게 주어진 골든타임"이라고 했다.

 

트럼프 재집권이 현실이 될 경우 '워싱턴 선언'과 '캠프 데이비드 합의' 등 윤 대통령이 공들인 외교적 성과가 한꺼번에 초기화될 수 있어 서둘러 '핵우산' 정책의 불변성을 완성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동맹 정부의 성격과 이념을 구분하지 않고 청구서를 내밀던 트럼프 전 대통령의 고립주의는 한국 정부도 방위비 분담금 대폭 인상과 '주한미군 철수' 압박으로 경험한 바 있다. 

 

최창렬 교수는 "만약 트럼프가 당선되면 윤 대통령의 인식의 기초가 무너지는 것"이라며 "최근 중국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지만, 한중, 한러 관계가 관리돼 있지 않은 윤석열 정부가 국제정세를 너무 낙관적으로 해석하는 게 아닌지 우려된다"고 했다.

임경구

2001년에 입사한 첫 직장 프레시안에 뼈를 묻는 중입니다. 국회와 청와대를 전전하며 정치팀을 주로 담당했습니다. 잠시 편집국장도 했습니다. 2015년 협동조합팀에서 일했고 현재 국제한반도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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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원숭이' 보듯 쳐다봤지만, 보란듯이 합판을 들어 올렸다

[나, 블루칼라 여자] ④ 형틀목수 기능공 신연옥 씨

박정연 기자  |  기사입력 2023.10.01. 05:07:11

 

'힘' 좀 써야 한다는 노동 현장, 그곳에도 여자가 있습니다. 웬만한 체력으로는 버티기 힘들다는 노동 현장에서 차별과 배제마저도 이겨낸 이들이죠. 남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큰 블루칼라 노동 현장에서 살아남은 '기술직 여성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남성중심적 문화가 지배적인 현장에서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차별과 배제를 버텼습니다. 여자 화장실이 없는 현장,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당해야만 했던 무시와 젠더폭력 속에서도 자신만의 기술을 터득해 당당하게 '기술직 여성'으로서 커리어를 이어 나간 이들을 <프레시안>이 만났습니다.

 

자신이 흘리는 땀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 여성들은 건설 현장에서도 공장에서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건설 현장에서 도면을 그리는 먹매김 노동자, 건물 뼈대를 이어 거푸집을 만드는 형틀 목수, 자동차 제조 공장에서 부품을 염색하는 도장노동자 등 <프레시안>이 만난 블루칼라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편집자 

 

중력을 거슬러 솟아오른 콘크리트 건물들은 '형틀목수'에 의해 쌓아 올려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먹노동자가 설계 도면을, 철근노동자가 뼈대를 잡으면 그 위에 폼이라 불리는 합판으로 촘촘하게 거푸집을 만들어 올리는 게 형틀목수의 일이다. 그 거푸집 안으로 콘크리트가 타설 되고 양생이 완료되면 한 층의 건물이 우뚝 서게 된다. 형틀목수는 재차 그 위를 딛고 또 다른 기둥과 보를 세우며 층을 쌓아 간다. 그렇게 층들이 켜켜이 쌓여 하나의 건물이 완성된다.

 

<프레시안>은 지난 21일 경기도의 한 건설현장을 찾아 형틀목수 기능공으로 6년 째 일하고 있는 신연옥 씨를 만났다. 신 씨는 핀(폼을 고정시킬 때 사용하는 연장)이 들어 있는 못주머니를 차고 망치와 시노(손지레)를 숟가락과 젓가락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15킬로그램이 넘는 폼을 거뜬히 들어 옮겨 그 폼을 허벅지에 대고 2단으로 올려 고정시키기도 했다.

 

 

 

 

형틀목수로 일하기 전 연옥 씨는 아이들 키우고 돈이 필요할 때는 마트나 물류센터에서 단기간으로 알바하는 "'아줌마'의 삶을 살았다." 공장 아르바이트에서 만난 언니로부터 건설현장에 '여자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건설현장에서 여자가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연옥 씨에게 도전할 용기를 주었다. 그는 건설 현장에서 일하기 위해 건설기능학교에 들어가 기술을 배웠고 형틀목수 일을 시작하게 됐다.

"2017년 안산에서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만드는 일이 첫 현장이었다. 한 명 빼고는 다 남자들이었고 제가 그런 현장을 처음 가봤으니 당황하고 겁도 나고 그랬다. 처음에는 남자들이 저를 원숭이보듯 했다. 여자가 없는 현장에 들어오니 신기해서 제 사진을 찍는 남자들도 있었다. '니 남편은 뭐하느냐'고 물어보는 이도 있었다. 심지어 저희 팀 현장 반장이 '아줌마가 왜 여기 와 있느나. 집에 가서 설거지하고 그러지 왜 여길 왔느냐'며 깜짝 놀랐다. 식당가면 더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데 왜 여기 왔느냐고 저를 걱정했다. 저도 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다."

 

동물원의 '원숭이' 보듯 여자를 볼 정도로, 여성 형틀목수가 적은 건설현장이었다. 건설노동자의 절대 다수가 남성인 문화에도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손 한번 잡자', '방 얻을까' 하는 성희롱 발언도 들어야 했다. 그래도 연옥 씨는 건설노조 소속인 '노조팀'이라 안전하게 일했다고 말했다. 노조에 막연히 부정적인 인상이 강했던 연옥 씨는 일하면서 노조는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싸우는 집단"으로 인식하게 됐다고 말했다. 

 

"노조 안에서는 동지라는 생각에 함부로 대하지 않고 일도 자세하게 가르쳐준다. 한 번은 노조팀 소속이지만 일반팀의 먹차장과 먹줄을 놓은 적이 있는데, 그 차장이 '손 잡고 가자' 거나, '방 얻어 줄까', '방 얻을까' 뭐 이런 얘기도 하고 그랬다.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래서 그때 '저 노조팀인데, 함부로 말씀하시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대응 했다. 이런 성희롱이 발생한 상황을 노조에 공유하니 그 뒤로부터는 그 먹차장과 함께 일하지 않을 수 있도록 했다. 만약 내가 일반팀이었으면 당장 밥줄이 걸려있는데, 그렇게 단호한 조치를 취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 

 

▲<프레시안>은 지난 21일 경기도의 한 건설현장을 찾아 형틀목수 기능공으로 6년째 일하고 있는 신연옥 씨를 만났다. ⓒ황지현

 

자기 몸보다 큰 폼을 옮기는 일이 힘에 부쳐 운 적도 있었지만 힘들다고 안 해버리면 아예 못 한다는 생각에 연옥 씨는 하루 하루를 버텼다. 그러다 보니 일이 몸에 익었다. 스트레스도 덜 받게 됐다. 하지만 그를 따라오는 편견섞인 시선과 여성이라는 압박에 연옥 씨는 더 열심히 일했다. 

 

"출근시간이 7시이지만 저는 4시 30분에 출근해서 2시간 일찍 현장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다. 남자들은 담배피고 쉬는데 저는 그 시간에도 계속 일한다. 남자보다 힘있게 하긴 어려우니 쉬지 않고 일했다. 제 체력의 한계 끝까지 무거운 것을 들기도 했다. 긴 파이프인 동바리를 어깨에 두 개씩 들고 다녔는데, 다른 남자 동료들이 '너가 두 개 들면 우리는 세 개 들어야 하니까 하나만 들어'라고 농담식으로 이야기 하기도 했다. 진짜 악바리로 동바리 두 개를 드는 거다. 나도 할 수 있다. 나도 이 일을 성실하게 하고 있고 진심을 다해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무거운 폼도 들어낸 연옥 씨지만 편견은 쉽게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연옥 씨는 '악바리'가 됐다. 그는 "원래는 폼을 붙이는 일도 1단 폼 위에 또 폼을 쌓아올려 2단을 만들어야 하는데, 여자라는 이유로 1단만 붙이는 일을 줬다"며 "이렇게 배려만 받다가는 내가 2단을 쌓아보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20킬로그램 가까이 하는 폼을 2단으로 쌓기 위해 머리로도 받치고 별짓을 다 해봤지만 너무 위험하고 무거웠다. 그렇게 수백번 시도한 끝에 폼을 앞 허벅지에 받치고 안정적으로 쌓을 수 있게 됐다. 허벅지에는 새파란 멍이 훈장처럼 남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다보니 6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15만5000원이던 첫 일당은 어느새 25만 원으로 올랐다. 양성공에서 준기능공을 거쳐 기능공으로서 숙련공 인정을 받았다. 그는 형틀목수로 일하면서 "새로 태어난 것 같다"고 표현했다. 연옥 씨는 망치와 시노(끝이 굽은 철 막대)를 어루만지며 "일은 저를 당당하게 살아가게 해주는 힘"이라며 "어디가서 '나 목수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자부심이 있다"고 말했다. 

 

"일을 시작하기 전의 저는 아파서 집에 있는 사람처럼 집안에서 위축되어 있었는데, 일을 하다 보니 자신감이 생겨서 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리게 되고 뭔가 자꾸 하고 싶어졌다. 일을 하면서 제가 새로 태어난 것 같다. 항상 주눅 들어 살다가 스스로 돈을 벌면서 집에서 큰소리도 칠 수 있게 되었다. 또 집안일이 나만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우리 신랑이 빨래 해주고, 아이들이 설거지도 하고 집안일도 서로 나눠서 하면서 집안도 평등해졌다. 일하는 제 모습이 너무 좋다. 제가 좀 당당해지는 것 같다.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좋다. " 

 

예순이 넘을 때까지 일하고 싶다고 밝힌 연옥 씨는 "더 정확하게 도면을 보고 더 배워서 형틀목수팀의 여자 반장이 되어보고 싶다"며 웃어 보였다. 그의 뒤에는 그와 동료들이 세운 거푸집들이 중력을 거슬러 우뚝 서있었다. 아래는 신연옥 씨와 나눈 주요 인터뷰 일문 일답. 

 

▲<프레시안>은 지난 21일 경기도의 한 건설현장을 찾아 형틀목수 기능공으로 6년째 일하고 있는 신연옥 씨를 만났다. ⓒ황지현

 

프레시안 : 본인과 하는 일을 소개해달라. 

 

신연옥 : 이름은 신연옥. 나이는 51세다. 건설 현장에서 6년째 형틀목수로 일하고 있다. 콘크리트 타설을 위해 유로폼, 알루미늄폼 등을 이용해 거푸집을 만든다. 콘크리트가 타설되면서 터지지 않도록 수평과 수직을 맞춰 견고하게 거푸집을 만든다. 저는 주로 아파트의 지하주차장과 상가를 짓는다. 

 

프레시안 :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나. 하루 보통 얼만큼의 일을 하는 지 알려줄 수 있나. 

 

신연옥 : 보통 오전 7시에 작업을 시작해서 오후 5시까지 일한다. 그런데 공사 현장 주변에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일찍 와서 주차해야 하다 보니 새벽 4시 30분쯤 출발해 미리 도착한다. 차를 근처 공터에 주차해놓고 2시간 정도 잔 뒤 출근한다. 그래서 밤에 활동할 수가 없다. 수면시간이 무조건 확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루 작업시간은 8시간 정도다. 폼으로 거푸집을 만드는 공정을 하루종일 한다고 하면 한 40개는 넘게 붙일 것 같다. 그런데 하루에 한 가지 일만 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얼만큼의 일을 한다고 딱 잘라 말하긴 어렵다. 

 

프레시안 : 콘크리트를 타설할 공간, 틀을 만든다고 이해된다. 형틀목수가 하는 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린다. 일의 장단점도 설명해달라. 

 

신연옥 : 주된 업무는 먹(설계도면을 콘크리트 위에 그려둔 선)을 보고 폼이라는 합판을 이용해 콘크리트를 타설할 거푸집을 만드는 일이다. 폼 규격과 거푸집 크기가 딱 맞지 않는 경우 목재를 깎고 조립해 위에 댈 수 있는 추가 거푸집(가와)을 만들기도 한다. 형틀목수는 폼만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기둥도 만들고 기둥 사이에 보(하리)도 만들고, 그 보를 받치는 서포트와 슬라브도 설치한다. 

 

형틀목수는 현장에서 기능공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에 단가가 높다. 여성도 목수 일에 어느 정도 숙련되면 기능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이 매우 힘들다. 폼을 이용해서 거푸집을 만든다고 했는데, 가벼운 폼 10킬로그램부터 무거운 폼은 20킬로그램이 넘어간다. 크기에 맞는 다양한 폼을 직접 들어 옮겨야 하니 체력적으로 힘이 들 수밖에 없다. 동바리라고 불리는 아주 긴 쇠파이프도 날라야 하는데 힘에 부칠 때도 있다. 

 

▲<프레시안>은 지난 21일 경기도의 한 건설현장을 찾아 형틀목수 기능공으로 6년째 일하고 있는 신연옥 씨를 만났다. ⓒ황지현

 

프레시안 : 먹반장이 콘크리트 바닥에 설계도를 튕긴 다음 철근이 올라가고 그 다음 형틀목수들이 폼을 이어붙여 거푸집을 만들면, 콘크리트가 타설되는 체계다. 연옥 씨는 형틀목수 기능공이기 때문에 처음 일했던 일당과 지금의 일당의 차이가 크겠다. 

 

신연옥 : 6년 전 15만5000원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25만 원을 받는다. 남자 기능공하고 똑같은 단가를 받고 있다. 2017년 건설기능학교를 졸업하고 건설노조 양성공으로 일하면서 처음 받은 돈이 15만5000원이었다. 준기능공이 되어 18만5000원으로 올랐고, 기능공이 되어서 25만 원을 받게 됐다. 기능공이 될수록 더 많은 일을 하니까 그만큼의 보수를 준다. 건설현장의 다른 일보다 강도가 세다보니 단가도 높다. 

 

프레시안 :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만난 건설현장의 여성 노동자 중 가장 많은 일당을 받고 계신다. 무거운 폼과 동바리를 이고 다니시기도 하더라. 그런 육체적 노동과 또 숙련된 경험이 반영된 일당이라고 생각한다. 형틀목수 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신연옥 : 결혼하기 전에는 제약회사를 다녔는데 신랑과 결혼하면서 아이를 갖게 되니 자연스레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면서 마트나 물류센터에서 단순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았다. 아이들 키우고 돈이 필요할 때는 알바하는 '아줌마'의 삶을 살았다. 공장에서 아르바이트하다 남편이 목수인 언니를 만났다. 그 분이 거기도(건설현장) 여자가 있다는 얘기를 해줬다. 알고보니 그 여성이 건설노조에서 일하던 1호 여성 노동자였다. 그 언니 남편을 통해 '건설기능학교'를 알았다. 당시 아르바이트만 하고 고정된 일이 없으니 아이들 대학 등록금 고민이 큰 시기였다. 그래서 그 언니와 함께 건설기능학교에 들어가서 목수일을 배웠다. 

 

프레시안 : 형틀목수를 한다고 했을 때 가족들 반응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신연옥 : 우리 신랑은 '니가 얼만큼 꾸준히 할 수 있겠느냐. 밥하고 청소하다가 너가 목수를 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건설노조 조합원이 됐다고 하니까 '빨갱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그래서 오기로 더 오래 다닌 것 같다. 제가 6년 동안 일하니까 이제 놀라기도 하고 대견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일을 시작하고 처음에는 집안일도 하고 목수일도 했는데 이제는 신랑이 집안일을 많이 도와준다. 많이 변했다. 우리 아들은 직장생활을 하니까 '엄마 힘들면 그만둬'라고 하는데 제가 아직은 못 내려놓겠다. 나이 60 넘을 때까지 일하는 게 소원이다. 여성 건설노동자 1호 언니가 68세에 정년퇴직했는데 올해까지 일했다. 그 언니만큼은 못해도 60 넘어서까지는 해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일하고 있다. 

 

프레시안 : 연옥 씨처럼 형틀목수 시작하려는 여성이나 청년들은 건설기능학교를 통해서 일을 배우고 시작할 수 있나.

 

신연옥 : 그렇다. 기능학교를 통해서 일을 배울 수 있다. 기능학교는 내국인들을 위한 곳이라 학교를 통해 기능을 배우면 현장에 투입될 수 있다. 

 

프레시안 : 형틀목수팀에 여성 노동자 수는 얼마나 되는가. 비율이 궁금하다. 

 

신연옥 : 보통 15명~20명이 한 팀을 이루는데 여성 노동자는 1명이다. 팀마다 여성이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니라 몇몇 팀에만 여성 목수가 있다. 그렇게 많지 않지만 있긴 있다. 하지만 여성 관리직은 한 명도 없다.

 

프레시안 : 건설노동자들의 화장실 수가 적은 것이 건설현장의 고질적인 문제인데, 여성화장실은 충분하게 있나.

신연옥 : 현장마다 다르지만 여기는 그래도 화장실이 두 개 있다. 멀어서 그렇지 부족하지는 않다. 현장에서 화장실이 멀리 있기 때문에 아침에 한 번, 점심에 한 번 가고 일과 중에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가지 않고 참는다. 옛날 어떤 현장에는 더 많은 여성 노동자가 있었는데 여자 화장실이 두 칸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마저도 한 칸은 원청 사무실 노동자들만 쓰겠다고 자물쇠로 잠가두어서 한 칸만 사용하느라 불편했다. 

 

프레시안 : 6년동안 일하면서 겪고 보셨는데, 왜 여성이 건설현장에 적다고 생각하나. 

 

신연옥 : 일이 힘들다. 솔직히 일이 힘에 부칠 때가 많다. 처음에는 많이 울기도 했다. 남자들이 던진 말 한마디가 상처가 되어서 집에 간 적도 있다. 그런데 힘들다고 안 해버리면 아예 못 하는 거니까. 그래서 그냥 하루하루 버텼다. 자꾸 하다 보니 일이 몸에 익기도 하고 스트레스도 덜 받게 됐다. 그러면서 버티게 되더라. 그러다보니 6년 동안 일을 했다.

 

프레시안 : 한국건설산업연구원 통계에 의하면 건설현장 노동자 열명 중 하나는 여성이라고 한다. 여성 노동자가 앞으로 건설현장에 더 늘어날 수 있을까. 

 

신연옥 : 실제로 많이 늘어났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의 건설노조 탄압이 거세지니까 도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다. 건설노조를 쓰려고 하는 현장이 없다. 그러다보니 남자들도 놀아서 일반팀(비조합원으로 구성된 건설 노동자들팀)으로 가는데, 여자가 갈 곳은 더욱 없다. 저는 정말 운 좋게 일할 수 있는 현장이 있다. 저도 이 현장이 마지막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모여 일하는 노조팀과 비조합원들이 모여 일하는 일반팀의 노동 분위기가 다르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여성 노동자가 일반팀에 소속되어 일할 수도 있지 않나. 

 

신연옥 : 그렇다. 그렇지만 노조팀이 여자가 일하기에는 더 안전하다. 밖(일반팀)에서 일하면 남자들이 짓궂게 굴고 성희롱한다. 그런데 노조 안에서는 동지라는 생각에 함부로 대하지 않고 일도 자세하게 가르쳐준다. 한 번은 노조팀 소속이지만 일반팀의 먹차장과 먹줄을 놓은 적이 있는데, 그 차장이 '손 잡고 가자', '방 얻을까' 뭐 이런 얘기를 했다.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때 '저 노조팀인데, 함부로 말씀하시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대응했다. 이런 성희롱이 발생한 상황을 노조에 공유하니 그 뒤로부터는 그 먹차장과 함께 일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만약 내가 일반팀이었으면 당장 밥줄이 걸려있는데, 그렇게 단호한 조치를 취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저는 사실 건설현장에 와서 노조를 처음 제대로 알게 되었다. 노조에 막연히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다. 티비에서 보는 싸우는 사람들이 노조라고 생각했다. 신문에서 민주노총은 '귀족노조'라고 하는데 괜찮은 건가 생각했다. 기능학교를 졸업하고 일하기 위해 노조에 가입한 건데, 처음에는 건설노조도 이상한 곳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런데 안에 와서 보니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싸우는 집단이었다. 저는 회사 다닐 때 힘들고 부당해도 참고 다니는 스타일이었는데, 건설노조로 일하면서 내가 부당한 상황을 이야기하면 들어주는 곳이 있다는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프레시안 : 윤석열 정부가 '건설노조'를 '건폭'이라는 프레임으로 탄압하고 있는데. 

 

신연옥 : 억울하다. 우리는 건폭이 아니다. 우리는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이야기할 뿐인데, '건폭'이라고 이름 붙여서 압박하니 무슨 말을 할 수가 없다. 현장에서도 조용히 일만하라는 식이다. 분하고 속상하다. 사측에 화장실이 없다는 요구를 해도 그것이 노조의 요구이기 때문에 들어주지 않는다. 탈의실이 없어서 땀과 먼지에 절은 채로 아침에 출근한 옷을 입고 퇴근하고, 휴게실이 없어서 차에서 쉰다. 건설노조를 쓰려는 현장이 없다. 그러다보니 건설노조 소속의 여성 노동자들이 대부분 놀고 있다. 일 할 곳이 없다. 여성만 아니라 남성도 놀고 있다. 그나마 남성은 일반팀이라도 가는데, 여성은 알고 있는 팀장이 데려가지 않으면 일반팀에서 일하기 쉽지 않다. 

 

프레시안 : 남성이 절대다수인 상황에서 적응하는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처음 현장에서 일했던 날을 기억하나.

 

신연옥 : 2017년 안산에서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만드는 일이 첫 현장이었다. 한 명 빼고는 다 남자들이었고 제가 그런 현장을 처음 가봤으니 당황하고 겁도 났다. 처음에는 남자들이 저를 원숭이보듯 했다. 여자가 없는 현장에 들어오니 신기해서 사진을 찍는 남자들도 있었다. '니 남편은 뭐하느냐'고 물어보는 이도 있었다. 심지어 저희 팀 현장 반장님이 '아줌마가 왜 여기 와있느냐. 집에 가서 설거지하지 왜 여길 왔느냐'며 깜짝 놀랐다. 식당가면 더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데 왜 위험한 여기 왔느냐고 저를 걱정한 거였다. 저도 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다. 첫 현장에서 만난 그 반장님한테 혼나며 일을 배웠다. 반장님은 멀리서도 망치질 소리만 듣고 절 찾아와 그렇게 치면 손 다친다고 기초를 정확하게 할 수 있도록 알려주었다. 그렇게 하면 어디가서도 못 버틴다면서 겁을 많이 줬지만 조언도 해준덕에 제가 일하면서 다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처음엔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그랬는데 이제는 세월이 약이 되었다.

 

▲<프레시안>은 지난 21일 경기도의 한 건설현장을 찾아 형틀목수 기능공으로 6년째 일하고 있는 신연옥 씨를 만났다. ⓒ황지현

 

프레시안 : 첫 현장의 반장님은 걱정하는 마음에 '설거지하지 왜 왔느냐'고 할 수 있지만, 그런 시선은 형틀목수로서의 성장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신연옥 : 슬라브공사라고 1층에서는 천장인데 위에서는 바닥인, 사람이 딛고 서는 판을 까는 일이 쉽지 않은 일로 꼽힌다. 보에 올라서 슬라브를 깔아야 하는데 현장에서는 그 일을 제게는 안 주려고 한다. 저도 슬라브 까는 일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많이 해보고 싶은데 '배려'로 인해서 배제되는 경우도 있다. 나는 그 일이 힘들더라도 분명히 올라가서 일하고 싶다. 그래야 내 기술이 얼마나 늘었는지 일하면서 느낄 수 있다. 기회를 주면 더 잘할 수 있는데 그런 일은 시켜주지 않으니까 서운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 

 

그래도 계속 해보면 된다. 원래는 폼을 붙이는 일에서도 차별 받았다. 1단 폼 위에 또 폼을 쌓아올려 2단을 만들어야 하는데, 예전에는 여자라는 이유로 내게 1단만 붙이는 일을 줬다. 이렇게 배려만 받다가는 2단을 쌓아보지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단에 폼을 그냥 쌓아봤다. 20킬로그램 가까이 하는 폼을 1단 폼 위에 쌓으려고 올려 봤는데 폼의 무게 때문에 올라가질 않았다. 머리로도 받치고 별짓을 다 해봤는데 너무 위험했다. 그러다가 앞 허벅지에 받치고 올렸더니 무거웠지만 안정적으로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날 저녁 앞 허벅지가 새파랗게 멍으로 물 들었더라. 그래도 한 번 감을 잡으니까 이제는 2단 폼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프레시안 : 20킬로그램 가까이 되는 폼을 옮기려면 체력적으로 정말 힘들 것 같다. 일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가.

 

신연옥 : 혼자 일하는 것이 힘들다. 저는 여자라서 파트너가 없이 혼자 일한다. 일할 때 같이 의논할 사람이 없는 게 가장 힘들다. 남자 형틀목수들은 둘이 짝을 이뤄 일을 한다. 한 사람은 자재를 올려주거나 받쳐주고 한 사람은 작업하는 식이다. 타일에 핀을 끼어 고정하는데 그 일도 혼자 하기 때문에 힘들다. 2인 1조로 하는 일 중에 위험한 일이 많은데 결국 나는 그런 일에 투입되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눈치를 보게 된다. 어려운 일도 해보고 싶지만 그런 경험을 쌓을 기회가 적다.

 

프레시안 : 여자를 배려한다는 동료들의 '선의'에도 계속 어려운 일에 도전해서 더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이해된다. 여성이 적다보니 연옥 씨가 하는 작은 실수들도 '여자의 실수'가 되어서 연옥 씨에게 압박처럼 다가왔을 수도 있겠다. 그런 압박과 혹은 여성을 향한 편견 섞인 시선에 어떻게 대응했나. 

 

신연옥 : 더 열심히 일했다. 출근시간이 7시이지만 저는 4시 30분에 출근해서 2시간 일찍 현장 근처에서 대기한다. 남자들은 담배를 피고 쉬기도 하는데 나는 그 시간에도 계속 일한다. 남자보다 힘있게 하긴 어려우니 쉬지 않고 일했다. 내 체력의 한계까지 무거운 것을 들기도 했다. 긴 파이프인 동바리를 어깨에 두 개씩 들고 다녔는데, 다른 남자 동료들이 '너가 두 개 들면 우리는 세 개 들어야 하니까 하나만 들어'라고 농담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진짜 악바리로 동바리 두 개를 드는 거다. 나도 할 수 있다. 나도 이 일을 성실하게 하고 있고 진심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프레시안>은 지난 21일 경기도의 한 건설현장을 찾아 형틀목수 기능공으로 6년째 일하고 있는 신연옥 씨를 만났다. ⓒ황지현

 

프레시안 : 현장에서 신연옥 씨를 부르는 호칭은 뭔가. 

 

신연옥 : 노조팀에서는 저를 동지라고 부른다. 가끔 여사님이나 목수님이라고 부르는 분들도 있고, 젊은 애들은 누나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줌마'라는 소리도 많이 듣는다. 사측에서 저를 '아줌마'나 '여사님'이라고 부를 때는 친한 사람들이 부르는 것과는 다른 뉘앙스를 주기 때문에 '반장'이라고 불러달라고 요청한다. 대체로 남자들이 여자는 자기보다 아랫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함부로 부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다. 그런 호칭을 들을 때 바로 지적해야 다음부터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프레시안 : 연옥 씨가 형틀목수로서 계속 도전하고 일하게 만든 동기는 무엇인가. 

 

신연옥 : 시작은 아이들 때문이었다. 아이 둘 대학교도 보내고 결혼도 시켜야 하는데 신랑 혼자 벌이로는 힘들었다. 돈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일을 시작했는데 일이 힘들었다. 그래도 임금이 세니까 놓지 못하면서 하루하루 버텼다. 하다보니 체력적으로는 힘들어도 스트레스는 덜 받고, 노조 소속으로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일 하니까 오래 할 수 있었다. 

 

프레시안 : 무거운 폼을 번쩍 들고 능숙하게 연장을 다루는 모습이 멋있었다. 자부심을 느끼는 순간도 있었을 것 같다.

 

신연옥 : 한국에 몇 안 되는 여성 목수다. 처음에 제가 시작할 때는 여성 목수가 열 명도 안됐다. 그러다 여성 목수가 20명, 30명으로 늘어나면서 우리가 대단해지는 느낌이 들고 자부심이 생겼다. 일을 시작하기 전의 저는 아파서 집에 있는 사람처럼 집안에서 위축되어 있는 사람이었는데, 일하다 보니 자신감이 생겨서 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리게 되고 뭔가 자꾸 하고 싶어졌다. 일하면서 제가 새로 태어난 것 같다. 항상 주눅 들어 살다가 스스로 돈을 벌면서 집에서 큰소리도 칠 수 있게 되었다. 또 집안일이 나만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우리 신랑이 빨래해주고, 아이들이 설거지하는 등 집안일도 서로 나눠서 하면서 집안이 더 평등해졌다. 일하는 내 모습이 너무 좋다. 더 당당해지는 것 같다.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좋다. 

 

프레시안 : 형틀목수가 하는 많은 일 중에 이 일 만큼은 자신있다는 게 있나. 

 

신연옥 : 목재 거푸집을 짜서 문과 창문의 틀을 잘 만든다. 특히 폼으로 떼울 수 없는 빈 공간을 잘 채운다. 나는 디테일을 정확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반생을 잘 묶는다. 이걸 잘못 묶으면 굳을 때 밀리는데 이제 손에 익어서 빠르게 잘 하는 일 중에 하나다. 

 

프레시안 : 인터뷰 중에도 망치와 시노를 가져왔다. 망치와 시노는 신연옥 씨에게 어떤 의미인가.

 

신연옥 : 저를 현장에서 살아가게 해주는 힘이다. 이 도구들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디가서 이만큼의 돈을 벌고 당당하게 일할 수 있었겠나. 내게 자신감을 주는 도구들이다. 어디가서 '나 목수예요' 할 수 있는 힘이 된다.

 

프레시안 : 일터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나 꿈이 있나. 

 

신연옥 : 나이 60이 넘을 때까지 일하고 싶다. 기회가 된다면 작업 반장도 해보고 싶다. 팀장도 해보고 싶지만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고, 더 정확하게 도면을 보고 더 배워서 형틀목수팀의 여자 반장이 되어보고 싶다.

 

프레시안 : 동시대를 살아가는 일하는 사람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다면. 

 

신연옥 : 포기하지 않는다면 자신감을 갖고 일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 힘들다고 주저앉아 버리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주저앉지 말고 움직여서 뭐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여성 노동자들이 위축되지 않고 계속 배웠으면 좋겠다. 그러다보면 좋은 날도 오겠지. 

 

▲<프레시안>은 지난 21일 경기도의 한 건설현장을 찾아 형틀목수 기능공으로 6년째 일하고 있는 신연옥 씨를 만났다. ⓒ황지현

박정연

프레시안 박정연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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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렬 “국가별, 지역별 한민족 공동체 만들어야”

통일뉴스 월례강좌서, “재외동포 역량 최대한 활용해야”

  • 기자명 김치관 기자 
  •  
  •  입력 2023.09.30 15:56
  •  
  •  수정 2023.10.01 06:41
  •  
  •  댓글 0
 

“국가별, 지역별로 한민족 네트워크 또는 한인 네트워크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한민족 네트워크에서 국가별, 지역별로 한민족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오는 10월 5일, 재외동포청이 설립되고 처음으로 맞는 ‘세계 한인의 날’을 앞두고 조성렬 전 오사카 총영사는 “재일동포, 재중동포, 재러동포, 재미동포 다 성격이 다르다”며 ‘세계 한인 네트워크’ 보다는 국가별, 지역별 네트워크 구축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조성렬 전 오사카 총영사는 지난 12일 오후 서울 전태일기념관 2층 공연장에서 열린 ‘2023년 9월 통일뉴스 월례강좌’에서 “국가와 민족, 그리고 재외동포 -한민족공동체 네트워크의 모색”을 주제로 강연했다.

조성렬 전 오사카 총영사는 지난 12일 오후 서울 전태일기념관 2층 공연장에서 열린 ‘2023년 9월 통일뉴스 월례강좌’에서 “국가와 민족, 그리고 재외동포 -한민족공동체 네트워크의 모색”을 주제로 강연했다. [사진 - 조천현]
조성렬 전 오사카 총영사는 지난 12일 오후 서울 전태일기념관 2층 공연장에서 열린 ‘2023년 9월 통일뉴스 월례강좌’에서 “국가와 민족, 그리고 재외동포 -한민족공동체 네트워크의 모색”을 주제로 강연했다. [사진 - 조천현]

조성렬 전 총영사는 “10월 5일 ‘세계 한인대회’를 하고 있다”며 “옛날에는 한민족이라고 했다가 최근에는 한인으로 이름이 바뀌는 추세”라고 전했다. 한국인, 한인, 한민족, 한인계의 개념 구분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한국을 중심으로 해서 글로벌을 하다 보니까 한국 정부의 입김이 굉장히 강하게 작용한다”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런 네트워크의 책임자들이 바뀌고 그래서 내부 파벌들이 많다”고 짚었다. 구체적으로 “임기가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미주평통 부의장을 강제로 직위 해제를 했는데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고 예시하기도 했다.

조성렬 전 오사카 총영사는 '미스터 션샤인' 드라마로 강연의 실마리를 풀어갔다. [사진 - 조천현]
조성렬 전 오사카 총영사는 '미스터 션샤인' 드라마로 강연의 실마리를 풀어갔다. [사진 - 조천현]

나아가 재외동포들의 참정권에 대해 “항상 야당 지지가 많아서 지금 국힘당이나 이런 데서는 재외동포들을 선거에서 투표권이 있기 때문에 이걸 어떻게든 간에 성향을 바꾸려고 하고 개입을 하려고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쉽지가 않다”고 진단하고 오히려 “재외동포들의 투표율이 너무 저조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아울러 외국인 참정권의 경우는 지방선거에만 허용되고 있으며, 영주권이 있고 3년 이상 체류한 18세 이상의 외국인만 해당돼 전체 유권자의 1%도 안 된다고 적시하고, 일본의 경우 우리 재외동포들에게는 참정권을 주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갈무리 사진 - 통일뉴스]
[갈무리 사진 - 통일뉴스]

그는 특히 ‘세계 한인 네트워크’에 대해 각국 재외동포 실상이 다르다며 “성격이 너무 달라서 네트워크를 엮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며 “올드 커머인 조선적(일본)이나 고려인(러시아)들은 거기 네트워크에 들어오지도 못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2001년 헌법재판소에서 재외동포법(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해외로 이주한 자 및 그 직계비속을 재외동포의 범주에서 제외)이 위헌 판결을 받고서야 재중 조선족, 재일 조선적이나 재러 고려인이 재외동포에 포함됐고, 지금은 혈통만 확인되면 다 재외동포로 인정하고 있지만 아직도 ‘세계 한인 네트워크’는 사실상 이들을 배제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는 국가별 차이는 물론, 한 국가 내에서의 차이 역시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의 경우 민단(재일본대한민국민단)과 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의 갈등은 물론 올드 커머와 뉴 커머(일본 정부는 1980년대 이후 일본으로 들어온 외국인을 뉴 커머로 규정), 한인회와 민단과의 차이도 있다는 것.

조성령 전 총영사는 일본에서 총영사로 재직한 경험을 토대로 재일동포 현황을 짚고 방향을 제시했다. [사진 - 조천현]
조성령 전 총영사는 일본에서 총영사로 재직한 경험을 토대로 재일동포 현황을 짚고 방향을 제시했다. [사진 - 조천현]

그는 “지금 오사카에서는 민단 건물 내에 한인회가 들어가 있고 한인회 중에 한 명이 민단 부의장을 맡고 있다”며 “일단 지역별로 통합을 하는 움직임, 그 다음에 이게 좀 더 나아가서 도쿄라든지 다른 데를 묶는 국가별 조직으로 만드는 이런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제시했다.

아울러 “뉴 커머와 올드 커머 간의 약간 차이는 있지만 올드 커머 끼리 뉴 커머 끼리의 동질성이 강하기 때문에 이것을 이제 묶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와 달리 재미동포들은 내부 파벌은 있지만 ‘미주한인회총연합회’로 묶여 있다고.

정부조직법에 따라 외교부 산하에 지난 6월 5일 재외동포청이 출범한데 이어 지난 5월 9일 제정된 ‘재외동포기본법’이 오는 11월 10일부로 시행됨으로써 재외동포 정책의 일대 전기를 맞고 있다.

특히 재외동포기본법은 제3조 ‘재외동포정책의 기본 방향’에서 “① 국가는 재외동포가 거주국에서 모범적 구성원으로서 정착하고 그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도록 지원하는 등 재외동포사회의 안정적인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② 국가는 재외동포가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함양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재외동포의 대한민국에 대한 이해와 신뢰 증진활동 장려 등 대한민국과의 유대감 강화를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질문 시간에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은 재외동포기본법에 대해 날카로운 지적을 내놨다. [사진 - 조천현]
질문 시간에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은 재외동포기본법에 대해 날카로운 지적을 내놨다. [사진 - 조천현]

이에 대해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은 강연에 이어진 질문에서 재외동포기법이 “국가는 재외동포가 거주국에서 모범적 구성원으로서 정착하고 그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도록 지원”한다고 돼 있지만 윤석열 정부가 최근 홍범도 장군과 정율성 음악가의 전력을 문제삼고 있는 점이 모순된다고 지적했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에서 공산당원이 되고 정율성 음악가가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를 작곡한 것이야말로 ‘거주국 모범적 구성원’ 아니냐는 것.

조성렬 전 총영사는 “우리가 740만으로 규모로 보면은 화교 다음으로 해외 거주자가 많고 본국 인구 대비 재외동포, 해외 거주자 비율로 하면 유태인 다음으로 두 번째”라며 “영토를 못 늘린다고 한다면 결국은 현재의 영토 내에서 결국 재외동포의 역량을 최대한 활용하고 또 지역별 기능별 역량도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통일뉴스 월례강좌는 21세기민족주의포럼이 공동주최했고, 평화3000이 후원했으며, 10월 월례강좌는 “우크라이나 전쟁 평가 및 북러관계 전망”을 주제로 예비역 육군 준장 한설 전 육군군사연구소 소장이 10월 17일 오후 6시 30분 전태일기념관 2층 교육장에서 강연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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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했으면 국방장관 간첩설까지... 이승만·신성모·채병덕이 부끄럽다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15] 압도적 전력의 인민군... 나라를 구한 6사단

23.09.30 19:11최종 업데이트 23.09.30 19:11

▲ 1948년 5월 10이 모진교에 위치한 23전초중대 로이드 스탠클리프 중위가 38 경계표시 위에서 찍은 사진 ⓒ 자료사진

 
대양 건너 남의 땅의 지도에 자를 대고 간편하게 '찌익' 그은 선이 38선이다. 바다와 섬과 강과 산을 넘어가며 남과 북을 깔끔하게 갈랐다. 그 가운데 북한강 다리 하나의 바로 북쪽을 지났다. 남쪽을 점령하기로 한 미군은 다리 북단의 공간이 초소를 만들기에는 너무 밭아서 다리 남단에 초소를 세웠다. 다리 중간에 38이란 숫자를 페인트로 큼직하게 써놨다.

이 다리는 모진교. 이곳의 북한강은 오래도록 모진강으로 불려왔기 때문에 1930년대에 세워진 이 다리는 모진교라고 명명했다. 춘천댐에서 물길을 따라 5킬로미터 정도 올라간 지점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춘천시 사북면이다. 다리의 북단은 사북면 원평리 산70-5 이고, 남단은 인람리 산56-2이다.

모진교는 지금은 지상에나 공중에서는 보이지는 않는다. 춘천댐이 물을 가두자 수몰된 것이다. 모진교의 북쪽에는 말고개가 있다. 지금은 말고개 터널이 뚫려 대부분의 차량은 터널로 통행하고 말고개 산길은 한적한 옛길로 남아 서서히 잊혀가고 있다.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북한은 5시), 운명의 그날 그 시각, 북한 인민군의 개전포격은 말고개 후방에서 시작됐다. 모진교 남쪽에는 국군 6사단 7연대 3대대 9중대가 배치돼 있었다. 포격 목표의 하나는 모진교 남쪽의 372고지의 관측소. 한 시간 가까이 포격이 계속됐다. 관측소 대원들은 전원이 전사했다. 대기하고 있던 인민군 보병이 자주포를 앞세우고 모진교를 건넜다.

그날 그 시각,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동족상잔의 전면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압도적 전력의 인민군, 모진교를 건너다
 

▲ 모진교 기사연재 그래프 ⓒ 박종현

 
내 평생 쌓여온 기억에서 한국전쟁 개전 초기의 서사는 대략 이렇다. 적화야욕에 불타는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 괴뢰 김일성은 불법적으로 기습적으로 남침을 했다. 우리 국군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폭탄을 안고 적의 탱크에 뛰어들어 산화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화력과 병력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나하나 짚어 봐도 틀린 것이 없다. 참담하다. 그들이 희생한 땅에서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으니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가 없다. 고개를 들면서 그들을 희생시킨 인민군과 국군의 절대적인 전력 차이의 안팎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것은 병력이다. 개인의 싸움이든 정규군의 전쟁이든 병력의 차이는 승패를 가른다. 당시에 국군은 8개 사단으로 병력은 9만5천 수준이었다. 인민군은 10개 보병 사단을 비롯하여 탱크와 자주포로 무장한 105기갑여단, 포병연대, 706기계화연대, 공병연대, 유격연대 등을 포함해 총 18만여 명이었다. 남북에 정부가 각각 수립된 이후 확군의 속도와 성과는 북한이 두 배가 될 정도로 우세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1949~1950년에 이루어진 만주 조선인부대의 대거 입북이었다. 앞의 글에서 살펴본 대로 3개 사단(9개 연대)과 별도의 1개 연대가 무장한 그대로 입북하여 인민군에 편제됐다. 인민군 5사단, 6사단, 12사단과 4사단 18연대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남북을 통틀어 가장 최근의 실전 경험을, 그것도 승전 경험을 갖고 있었다. 장제스의 중화민국이 중국 공산당과의 화평을 깨고 시작한 내전, 곧 제2차 국공내전에 깊숙이 참전했고 승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소전을 포함해 소련군에서 활약한 조선인들도 소련군과 함께 또는 그 이후에 입북해서 북한 인민군으로 편입됐다.

남한의 국군은 어떠했을까. 단적으로 말하자면 교육훈련과 실전 경험에서 정규군으로서 현대전을 수행할 최저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중국과 소련이 북한에 보냈듯이 실전 경험을 갖고 있는 조선인들을 보내줄 동맹국도 없었다. 패전국의 군인이었던 조선인들은 애초에 계급도 낮았고 지휘관도 거의 없었다.

중국에서 일본군을 탈출했던 조선인들은 다수가 공산당 쪽으로 갔다. 일제 패망 이후 광복군은 만주로 가서 확군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채 귀국해야 했다. 뒤늦게 귀국해보니 국방경비대는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중화민국 국민당 군대 출신도 일부 있었으나 역시 실전 경험은 거의 없었고 숫자도 적었다.

'미들급' 인민군을 상대한 '플라이급' 국군... 예상됐던 KO패
 

▲ 모진교 전투 전적지 ⓒ 윤태옥

 
사정이 이러하니 건군 초기에는 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았거나 약간의 군대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국방경비대 장교가 되었고 이들이 곧 국군의 핵심 간부가 됐다. 경력으로 보면 중대장이나 대대장급이었으나 연대장이나 사단장에 보임됐다. 지휘관부터 병사들까지 실전 경험은 물론 기본적인 교육 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실전 경험이라야 제주도와 지리산에서의 반정부 무장대를 토벌하거나 38선에서 소규모 충돌을 감당한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국군의 사단장급 지휘관으로서 정규전에서 소총 중대급 이상의 부대를 실전에서 지휘해본 경력자는 한 명도 없었다. 총참모장인 채병덕부터 병기병과 출신으로 작전지휘에는 부적합하다는 평가가 따라 붙었다. 남한에서는 말로 하는 정치 지도자는 많았으나, 몸으로 전쟁을 감당할 군사지도자는 전무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교육훈련도 차이가 심했다. 국군에게 무기를 제공하며 교육훈련을 담당하던 주한 미군은 1949년 철수하면서 마지막으로 한국군에게 대대작전 시범훈련을 보여 주었을 뿐이었다. 이에 비해 인민군의 교육훈련은 다양했고 나름 체계적이었다. 북한군은 사단 단위의 야외 기동훈련을 마치고, 각 부대별로 남한의 목표 지역에 대한 지형 분석과 도상 연습까지 실시했다.

국군은 1950년 6월 15일에 가서야 수도경비사와 7사단과 8사단의 일부만이 대대훈련을 완료했고, 대개의 경우 중대급 훈련에 그쳤다. 심지어는 소대급 훈련도 안 된 부대도 있었다. 국군은 장갑차 운전병, 통신병 등 특과병 교육과정을 설치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신병 기초교육을 이수한 특과병들을 실무현장에서 가르치는 수준이었다. 인민군은 1948년부터 1년 동안 걸쳐 1만여 명의 청년을 선발하여 소련의 극동군사학교에 파견하여 전차, 항공, 통신교육을 받게 했다.

병력뿐 아니라 부대의 배치에서도 남한은 불리했다. 국군은 8개 사단 가운데 4개 사단만이 38선에 배치됐고, 나머지 4개 사단은 후방에서 반정부 게릴라를 상대해야 했다.

무기 역시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국군의 장갑차는 총 27대였다. 이에 대응하는 인민군의 무기는 T-34 전차 242대, SU-76 자주포 168대, 장갑차 59대, 모터사이클 500대 정도다. 소련이 잉여 군수물자를 북한에게 적극 지원한 것과 대조적으로 미국은 남한에게 무기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았다.

이 정도가 링에 올라가기 전에 계체량에 나선 두 선수의 간략한 비교다. 북한이 미들급이라면 남한은 미들급보다 네댓 급은 떨어지는 플라이급 정도랄까. 경기를 해봐야 미들급 선수가 플라이급 선수를 일방적으로 두드리다가 1라운드도 끝나기 전에 KO패 또는 몰수패로 끝날 형국이었다.

실제 한국전쟁 초기의 양상이 그랬다. 38선에서부터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고, 적지 않은 부대는 대오가 흩어져 말로는 작전상 후퇴이지만 패잔병과 다를 바 없이 지리멸렬하기까지 했다. 다만 미국이란 헤비급 선수가 서둘러 개입하여 완전한 패전으로 끝나지 않았을 뿐이다.

'신성모 간첩설'이 푸념 반 의심 반으로 떠돌았던 이유
 

▲ 말고개 옛길의 38선 표지 ⓒ 윤태옥

 
선수의 승패는 곧 구단의 성패다. 선수인 국군이 패퇴를 거듭하자 국가의 존망은 휘청거렸고 백성들은 전후방 어디든 커다란 고통의 나락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한국전쟁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음미할 것의 하나는, 선수의 체급 문제는 선수가 아니라 구단과 구단주의 문제란 것이다. 미들급 선수와 맞붙는데 플라이급 선수를 내밀 수밖에 없는 구단이라니.

대한민국 군번 1번으로 유명한 이형근(1920~2002)은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면서 군지휘부에 통비(通匪)분자가 있었던 게 아니냐고 탄식할 정도였다. 기습남침 직전의 모든 상황은 그나마 갖고 있는 국군의 방어력을 스스로 가장 낮은 수준까지 끌어내렸다는 것이다.

1950년 4월말 총참모장으로 다시 부임한 채병덕은 전방부대와 후방부대를 대대적으로 교체했다. 작전지역에 익숙해진 부대를 뒤로 빼고 낯선 부대를 투입했으니 북한의 기습공격을 알아서 도운 꼴이 됐다. 지휘관도 전부 교체하고 육군 지휘부도 새로 구성했다. 정보국장과 군수국장을 제외한 모든 참모와 사단장들이 바뀐 것이다.

이와 함께 6월 24일 비상령도 해제됐다. 토요일 아침에 비상령이 해제되자 자연스레 병력의 반 정도에게는 휴가·외출·외박이 주어졌다. 농번기인데다가 가뭄 끝에 비가 오자 농사일을 거들려고 귀가한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북한 인민군의 남침에 맞춰 적들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서 바친 꼴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물론 하나하나는 다 나름의 이유는 있다. 그러나 지휘관이 해야 할 종합적인 판단은 어디에도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38선의 일선부대는 북한의 남침 징후를 계속 보고했는데 군 수뇌부는 이를 묵살 내지 무시했거나, 대단히 안이하게 대처했다는 것이다. 적이 기습을 한다고 해도 그에 대비하고 있으면 기습의 효과가 반감할뿐더러 역습의 기회까지 잡을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남한의 정부와 국군 수뇌부는 이를 충분히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도 제대로 대비하지 않았다.

그 가운데 어처구니없는 사건은 6월 24일 저녁 용산의 장교클럽에서 전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모여 파티를 열었다는 것이다. 남침 징후가 곳곳에서 보고되고 있는데 겨우 육군 장교클럽 오픈기념이란 이유로 댄스파티 술자리를 열었다니. 이것은 몇몇 장교들의 사적인 모임이 아니라 국방장관 신성모가 호스트가 되어 전방의 사단장들과 주요 간부들을 전부 호출한 자리였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술자리가 길어져 2차까지 하고는 새벽 2시에 귀가했다. 그는 새벽 5시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시간에 육군본부 상황실 근무자의 보고를 받고서 전군에 비상조치를 발동했다. 비상시국의 핵심보직인 육본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은 이사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전화연락도 되질 않았다.

채병덕은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영국 경험이 있는 신성모는 자신의 휴무에 충실한 것으로 유명했다. 긴급한 전화였으나 일요일 새벽이라서 그랬을까, 연결조차 되지 않았다. 채병덕이 신성모의 비서와 함께 지프를 타고 집으로 달려간 것이 오전 7시 정도. 나라가 침략을 당하고 있는데 전화연락도 되지 않는 국방장관이라니.

대통령이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이날 아침부터 비원에서 낚시를 즐기던 이승만은 오전 10시쯤에야 경찰 보고를 받고 경무대로 돌아왔다.

인민군은 38선 후방에서 38선으로 발소리를 죽이며 조용히 접근하여 개전포격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남한의 국방장관은 전방의 주요 사단장들을 전부 불러 댄스파티를 벌였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 때문에 '신성모 간첩설'이 푸념 반 의심 반으로 떠돌았던 것이다.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허언 일삼은 권력 엘리트들
 

▲ 모진교가 수몰된 지점 ⓒ 윤태옥

 
전쟁은 양쪽의 총사령관이 일대 일로 링 위에서 싸우거나, 양쪽의 사단장들이 미식축구를 하듯이 스크럼을 짜고 일렬로 맞붙는 게임은 아니다. 그러나 운명의 6월 25일 새벽, 숙취에 젖어 있다가 부대도 아닌 서울의 집에서 비상령을 전달받은 국군 사단장들과, 두 눈을 부라리고 일격에 적을 제압하려고 기습공격을 감행해온 인민군 사단장들의 표정을 비교해서 상상해보라.

플라이급밖에 되지 않는 국군이 링에 끌려 올라가 피투성이가 되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쓰러지게 한 이승만이, 신성모가, 채병덕이, 그들로 대표되는 당시의 권력 엘리트들이 부끄럽다.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안전하게 지킬 모든 방책을 사전사후에 강구해내야 했다. 선제공격을 하든, 미국이나 중국 소련을 상대로 외교적 술수를 쓰든, 김일성을 구워삶든, 무슨 수단을 쓰든 그는 그것을 해내야 하는 자리에 앉아있지 않았는가. 어떤 방법이든 북진 이전에 남침을 막아낼 병력과 무기를 끌어다 군에 공급해야 하는 게 그의 의무였다.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이었으나 1925년 탄핵당한 것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1960년 또 다시 국민들의 피를 보고서야 하야한 것보다, 북진통일을 외치면서도 북한의 무모한 남침을 막아낼 준비를 하지 못한 것이, 그래서 수많은 장병들이 죽었고 훨씬 더 많은 국민들이 극악한 고통에 빠진 것이, 나는 더 부끄럽다.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라는 어처구니없는 허언으로 요약되는 무능한 국방장관 신성모가 부끄럽다. 총참모장으로서의 책임은커녕 급박한 상황에 후들대면서 성급하게 한강다리를 폭파시켜 국군 3개 사단을 적 앞에 고립시키고 수많은 서울시민을 적군 치하에서 고통을 당하게 한 채병덕이 부끄럽다. 그가 일본군 장교 출신이란 사실보다 더 부끄럽다.

술 파티 참석 거부... 부대 지킨 단 한사람 
   
그런데 그날, 남침 징후가 있다고 보고를 했을 뿐더러 장교클럽 파티에 참석하라는 호출을 무시하고 자리를 지킨 사단장이 딱 한 사람 있었다. 춘천의 6사단장 김종오(대령)였다. 다른 사단들이 기습공격에 무너지고 뚫릴 때, 6사단만은 춘천을 통해 수원으로 진공하려는 인민군 2군단을 3일 동안 완강하게 저지했다.

이승만이 공급한 병력과 무기는 빈약했으나 자신의 방어선을 지켜냈고 거꾸로 인민군에게 상당한 피해까지 안겨줬다.

이로 인해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도 한강도하를 3일이나 지연하게끔 만들었다. 6월 25일 운명의 그날에 인민군에게 뚫리지 않은 유일한 전선이 바로 춘천이었고 그래서 나는 모진교부터 찾아온 것이다. 이제 모진교에서 춘천시내의 치열한 전장으로 갈 차례다.

6사단이 나라를 구했다는 자부심의 현장이다.
 

▲ 말고개 옛길의 38선 표지 ⓒ 윤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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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민심 여론조사, ‘총선에서 야당 지지’ 응답 높았다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와 정청래, 고민정 최고위원 등이 지난 27일 서울 용산구 용산역에서 추석 귀성객들에게 인사하는 모습. (자료사진) 2023.09.27. ⓒ뉴시스


추석 직전 진행된 여러 여론조사에서, 현 정부 견제를 위해 다가오는 내년 총선에서 ‘야당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응답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여론조사 기관 한국리서치가 KBS 의뢰로 지난 25~27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천 명에게 물은 결과에 따르면, 내년 총선 인식에 관한 물음에 ‘현 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야당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응답이 52%에 달했다. ‘현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여당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응답은 39.1%에 그쳤다.

코리아리서치가 MBC 의뢰로 지난 25~26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천 10명에게 물은 결과에서도 총선에 관해 응답자 53.4%가 ‘현 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야당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답해 ‘정권 심판론’이 우세한 추이를 보였다. ‘현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여당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응답은 38.9%였다.

엠브레인퍼블릭이 YTN 의뢰로 지난 25~26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천 2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여론조사에서도 비슷한 응답 경향이 드러났다. ‘내년 총선의 성격을 어떻게 보느냐’는 물음에 ‘야당에 더 힘을 실어주는 선거’라는 응답이 48%로 나타났고, ‘여당에 더 힘을 싣는 선거’라는 응답은 그보다 적은 34.5%였다.

같은 조사에서 다음 달 11일 치르는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가 내년 총선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냐는 물음에 응답자 21.1%는 ‘매우 영향이 있을 것’, 40.6%는 ‘어느 정도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영향이 없을 것’이라는 응답은 27%에 그쳤다.


인용한 세 개의 여론조사 모두 표본 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누리집을 참조하면 된다.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와 윤재옥 원내대표 등 의원들이 지난 27일 서울 용산구 서울역에서 추석 귀성객들에게 인사 하는 모습. (자료사진) 2023.09.27.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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