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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페인

 

단체 인권세미나로 차병직변호사가 쓴

인권의 역사적 맥락과 오늘의 의미를 학습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부분에서 버크와 페인의 논쟁이 나와서

페인이 어떤사람인지 알고 싶어 찾아 보았다.

 

아무튼 삶이 풍족했던 혁명가는 아니었다.

사실 그래서 더 동경이 된다.

 

뭐 잘 되는 일도 없었던 사람같고.....

 

인생이 잘 풀리지 않아도 자신의 신념하나로

삶을 정말 열심히 살았던 사람같다.

 

그의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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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페인

1737. 1. 29 잉글랜드 노퍽 셋퍼드~1809. 6. 8 미국 뉴욕 시.

영국 태생 미국의 작가.

 

 

[개요]

정치적인 문제를 다룬 소책자 〈상식 Common Sense〉·〈위기 Crisis〉를 통해 미국 독립전쟁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역사상 위대한 정치선동가로서 명성을 얻게 된 중요한 저서로 프랑스 혁명과 공화주의 원칙을 옹호한 〈인간의 권리 Rights of Man〉와 사회 속에서 종교의 위상을 해설한 〈이성의 시대 The Age of Reason〉가 있다.

 

 

 

 

[영국과 미국에서의 생활]

퀘이커교도인 아버지와 영국 국교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식 교육은 겨우 읽고 쓰며 셈할 수 있는 정도에서 끝났다. 13세 때 아버지와 함께 코르셋을 만드는 일을 시작했고, 그뒤 여러 직업을 전전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자 마침내 간접세 세무국 관리가 되었다. 그가 맡은 일은 밀수업자들을 적발하고 술과 담배에 대한 소비세를 징수하는 것이었다. 급료는 생계를 꾸리기에도 부족했으나 이를 쪼개어 책과 과학기구를 샀다. 영국에서는 실패만 거듭했다. 2번 결혼했으나 얼마 가지 못했고, 손대는 일마다 불행하게 끝났다. 1772년 세무관료의 부패를 척결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보수를 올려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 글을 발표한 뒤 세무국에서 해고당했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바로 그때 런던에서 벤저민 프랭클린을 만났다. 프랭클린은 그에게 미국에서 행운을 찾아보라는 충고를 하면서 소개장을 써주었다.

 

 

 

페인은 1774년 11월 30일에 필라델피아에 도착했다. 첫번째 가진 정규직업은 〈펜실베이니아 매거진 Pennsylvania Magazine〉에서 편집을 돕는 일이었다. 그 일 외에도 익명이나 가명으로 많은 논문과 몇 편의 시를 출판했다. 그 가운데 〈미국의 아프리카 노예제 African Slavery in America〉는 아프리카 노예무역에 대한 통렬한 비난으로, 말미에 '정의와 인간애'라는 서명을 덧붙였다. 페인이 미국에 왔을 때는 영국과 식민지 미국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해 있었다. 1775년 4월 19일 피비린내 나는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가 벌어진 뒤 페인은 미국이 단지 과세에 대해 반발해서는 안 되며 독립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사상을 담은 글 〈상식〉을 1776년 1월 10일에 출판했다. 이 50페이지 분량의 소책자는 불과 몇 개월 만에 50만 부가 팔렸다. 〈상식〉은 단지 하나의 출판물에 그치지 않고 1776년 7월 4일 만장일치로 승인된 독립선언문의 기초가 되었다. 잇따른 독립전쟁에서 페인은 자원을 해 너새네이얼 그린 장군의 부관으로 복무했다. 그가 애국자들의 대의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 일은 1776~83년에 펴낸 16편의 논설 〈위기〉였다. 각각의 글에는 '상식'이라는 서명을 붙였다. 조지 워싱턴의 부대가 붕괴될 위기에 처했던 1776년 12월 19일에 출판된 〈미국의 위기 제1호 The American Crisis, Number Ⅰ〉는 "지금은 인간의 영혼을 시험하는 시기다"라는 열렬한 말로 시작되었다. 워싱턴은 밸리포지에 있는 모든 군인들에게 이 소책자를 읽으라고 명령했다. 1777년 페인은 의회에 의해 외무위원회 간사로 임명되어 일하다가 1779년초 대륙회의 의원 실러스 딘과 논쟁에 휩쓸리면서 사직했다. 그는 딘이 미국에 대한 프랑스의 원조에서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했다며 고발했다.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직책상 입수했던 비밀문서를 공개해야만 했고 그결과 그의 고발이 옳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취직이 매우 간절한 때 마침내 1779년 11월 2일 펜실베이니아 의회 사무원으로 임명되었다. 이 직책에 있는 동안 그는 미국 군대가 낮은 보수와 부족한 물자 때문에 인내력의 한계에 도달한 것을 자주 목격했다. 페인은 자신의 봉급에서 떼어낸 500달러를 가지고 병사들을 구제하기 위한 기부금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1781년 이 일을 위해 존 로렌스와 함께 프랑스에 갔다. 이들이 가지고 돌아온 돈과 옷, 탄약은 독립전쟁의 성공에 중요한 몫을 했다. 페인은 또한 국가 전체의 행복을 위해 분리되어 있는 각 주들이 결속할 것을 호소했다. 〈공익 Public Good〉(1780)에서는 비효율적인 연방규약을 수정할 전국회의가 필요하며 '대륙 헌법' 아래 강력한 중앙집권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독립전쟁이 끝날 무렵에 페인은 다시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그의 애국적 저술은 수십 만 부나 팔렸지만, 책값을 싸게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 위해 이익금을 받지 않았다. 그는 워싱턴의 승인을 받아 의회에 탄원서를 보내 재정지원을 간청했다. 그러나 의회 내의 반대자들 때문에 묵살당했고, 대신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500파운드를, 뉴욕 주에서 뉴로셸에 있는 농장을 받았다. 여기서 그는 교각 없는 철교와 연기 안 나는 초 등을 발명하는 데 전념했다.

 

 

 

 

[유럽에서의 〈인간의 권리〉]

 

1787년 4월 필라델피아 근처에 있는 넓은 스쿨킬 강을 건너는 단일 아치교를 건설할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유럽으로 떠났다. 그러나 영국으로 간 그는 곧 이 계획에서 관심을 돌렸다. 1789년 12월 영국 총리 윌리엄 피트가 네덜란드를 둘러싸고 프랑스와 전쟁에 돌입하려 하자 페인은 전쟁은 "세금을 증대시키려는 단 하나의 분명한 이유"라며 영국 국민을 향해 익명으로 글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때 페인의 생각을 가득 채운 것은 바로 프랑스 혁명이었다. 그는 에드먼드 버크가 〈프랑스 혁명론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에서 프랑스 국민들이 일으킨 봉기를 비난한 것에 대해 분개했다. 페인은 미국독립을 옹호했던 버크를 존경해왔지만 유명한 글 〈인간의 권리〉(1791. 3. 13)를 발표해 그에게 반박했다. 이 책은 당장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791년에 8판이 나왔고, 미국에서도 바로 인쇄되어 제퍼슨 협회에 의해 널리 배포되었다. 버크가 응수해오자 페인은 1792년 2월 17일에 〈인간의 권리 제2부 Rights of Man, Part Ⅱ〉로 다시 맞섰다.

 

 

 

프랑스 혁명을 옹호하는 것에서 출발한 그는 유럽 사회 속에서 불만의 근본적인 이유를 분석하고 전횡적인 정부의 해악과 가난·문맹·실업·전쟁 등에 대한 치유책을 찾는 작업으로 나아갔다. 페인은 왕정에 맞서 효과적으로 공화정을 역설했고 대중교육과 빈민구제, 노인연금, 실업구제를 위한 공공사업계획의 윤곽을 마련했다. 이 모든 비용은 누진적인 소득세 징수로 충당할 계획이었다. 그의 계획은 지배층에게 '유혈 혁명'과 다름없었고, 정부는 이 책을 금지하고 출판업자를 투옥했다. 페인 자신은 반역죄로 기소되어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그는 체포령이 도달하기 전에 프랑스 국민공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이미 프랑스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는 궐석재판에서 반란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법익을 박탈당한 자로 선포되었으며, 〈인간의 권리〉는 영구 발매금지되었다.

 

 

프랑스에서 그는 군주제 철폐에 환호를 보냈지만 왕당파에 대한 테러를 유감스럽게 생각하여, 처형이 아닌 유형을 주장하면서 국왕 루이 16세의 목숨을 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로베스피에르 이하 급진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자, 왕을 구하려 했던 노력의 대가로 1793년 12월 28일 투옥당했고 1794년 11월 4일 로베스피에르의 실각과 함께 풀려났다. 페인은 건강이 매우 심각한 상태였으나 다시 국민공회에 들어갔다. 옥중에서 〈이성의 시대〉의 제1부가 출판되었고(1794) 석방 후 제2부가 나왔다(1796). 페인 자신은 초월적인 존재를 믿고 이신론자(理神論者)로서 단지 기존 종교에 반대할 뿐이라고 밝혔으나, 이 책으로 인해 정통파 사이에서 무신론자라는 평을 받았다. 최후의 중요한 소책자 〈토지 분배의 정의 Agrarian Justice〉(1797)에서 재산 소유의 불평등을 공격해 기득권층에 더 많은 적을 만들었다.

 

 

페인은 1802년 9월 1일까지 프랑스에 머무르다가 미국으로 향했다. 그는 곧 미국을 위해 애쓴 자신의 노력은 모두 잊혀졌고 자신은 단지 세계 최고의 이단자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습관적 음주로 건강은 더욱 악화되고 가난에 시달렸지만 그는 계속해서 특권과 종교적 미신을 공격했다. 그는 1809년 뉴욕 시에서 죽었으며, 혁명적인 글을 쓴 대가로 뉴욕 주정부에서 하사한 뉴로셸 농장에 묻혔다. 10년 후 정치 저널리스트 윌리엄 코벳이 그의 유해를 잉글랜드로 가져갔다. 코벳은 인류에 대한 페인의 지대한 공로에 걸맞는 장례식을 치르려 했으나 계획은 실패하고 유골은 분실되어 다시 찾지 못했다.

 

 

 

 

[평가]

페인이 죽자 미국 신문 대부분이 〈뉴욕 시티즌 New York Citizen〉에 실린 사망기사를 옮겨 실었다. 그 내용의 일부인 "그는 약간의 선행과 많은 해악을 끼치면서 오래 살았다"라는 평가가 사후 100여 년 동안 역사의 심판을 기다리며 남아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견해가 바뀌어 1937년 1월 30일자 런던의 〈타임즈 The Times〉는 그를 가리켜 '영국의 볼테르'라고 했고, 1952년 5월 18일 뉴욕대학교 영예의 전당에 그의 흉상이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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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행복하게 사는법

 

자기를 연민하지 말고, 자기를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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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녹두장군

 

전북대 학생회관 앞 건물에 있는 녹두장군 벽화다.

한참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시절인 1988년도에 그린것인데

지금 건물공사를 하고 있어서 곧 헐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찰칵~

 

예전에 학교에서 플랑쓰고 했었을때

나도 멋진벽화를 한번 그려보고 졸업을 해야지 했었는데

결국 벽화는 그리지 못했다.

 

그래도 내가 쓰고 싶은만큼 플랑은 열심히 써댔다.

붓잡고 글씨를 쓰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곤 했는데....

 

나중에 일이 과중 되다보니 그것도 스트레스였다.

역시 일은 누가 시키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하고싶을때, 하고 싶은것을 해야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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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꽃인가?

 

사무실로 오는길에 꽃이 피어있길래 찍었는데

벚꽃은 아닌거 같고 하얀색인데 배꽃인가?

 

황사로 찌뿌려진 내 마음이

이 꽃 덕분에 조금은 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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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수업

헌법 수업을 들으러

오랜만에 대학교 캠퍼스를 들락거리게 됐다.

 

새학기라 역시 사람들이 바글바글....

특히 젊은이들이 바글대는것이 활력이 넘친다.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받은것도 아닌데...

그냥 길만 걷는 순간에도 기운이 난다.

사람들의 기운이란 이런건가?

 

교수님이 한학기동안에 배울 수업을 소개하는데

모두 기본권에 관한 내용들이다.

 

사실 인권운동 하면서 기본권 관련한 내용은

사안이 터질때마다 잠깐 훓는 정도였는데

전반에 걸쳐 배울수 있는 기회가 생겨

나에게는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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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스토리 블로그....

우리단체 티스토리 블로그를 만들었다.

 

 티스토리 다른 블로그들이랑은 뭔가 다른거 같다.

초대장을 받아야 하고.....

꾸미기도 어렵다. 에휴~

 

티스토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선배한테까지 전화해서

첫페이지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http://jbrights.tistory.com/ 

 

많이들 놀러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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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래딧뱅크

오늘 어떡케 어떡케 하다가 크래딧 뱅크라는데를 들어갔다.

 

신용정보 평가원이라고 하는데....

 

내 주민번호를 치니 내가 가입한 인터넷 싸이트들을 모두 검색해주더라.

 

내 정보를 여기저기 많이도 팔고 다녔었구나라는 인식과 함께

 

그런데 이런 서비스는 개인정보보호상 별 문제가 없는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 이라는것이 편리하지만 수많은 안전 불감증과 불안함을 만든다.

 

 

반나절동안 내가 쓸모도 없이 가입한 싸이트에 들어가서 탈퇴작업을 했다.

 

아~ 이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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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했다...

드뎌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하니 이것저것 장만해야할 살림에 눈이 간다...

 

그런데 이것도 만만치 않네.

 

몇달간은 살림을 하나씩 하나씩 늘려가는 재미로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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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다시 만들다....

블로그 다시 만들었다....

 

요즘 생활이 불안정하다보니 컴앞에 앉아서 블로그,싸이등 관리할 시간이 없다.

 

그런데 왜 또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이참에 블로그 주소도 바뀐 별명으로다가 하고싶은 욕심에.....

 

이제 바꾸지 말고 오래오래 써야지.

 

 

예전엔 일기장에 일기를 쓰며 생각을 정리했는데

 

이제 컴퓨터 키보드가 아닌 펜을 잡고 종이에 글을 쓴다는게 참 성가신 일이 됐다.

 

키보드가 문득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빨리 기록할수 있기에 그렇기도 하지만,

 

생활에서 컴퓨터와 인터넷연결이  안되면 너무도 불편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메일이라는걸 만든지가 불과 10년전이었는데.....

 

아무튼 너무도 빨리 빨리 지나간다.

 

 

그나마 이렇게 빨리 돌아가는 사회에서 글을 쓰는것은 내 생활에 여유를 갖게 해주는 작업중에 하나다.

 

그런데 요즘은 글쓰기 작업을 할 짬을 못내고 있다.

 

차분히 앉아 글을 쓸 여유를 낼수 있어야 정신적 충만감이 들텐데....

 

맘에 드는 거처를 빨리 구해야 몸도 지치지 않고 정신적으로도 여유가 생길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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