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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엔 강학과 학강으로서 도저히 말도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지... 하지만 그녀를 설득해보려고 명자의 자취방으로 찾아가 그녀를 만났을 때, 나는 한 학강이 아니라 한 여성노동자를 거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어..... 무슨 말인지 알겠니?"
동윤의 시선이 집요하게 민수에게 쏟아져내렸다. 동윤은 손끝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한모금 빨고는 재떨이에 비벼 껐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 그녀를 설득하지 못하고 돌아서면서 나는 문득 너와 또 우리 강학들을 떠올렸어. 만일 그들이 내게 이런 고백을 해왔더라면 어땠을까. 강학과 강학으로서 물론 이런 식으로밖에 처리하지 못했을거야. 그러나 .... 여지는 남겨두었을거야. 잊을 때가 더 많을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다시 새로운 관계로 시작될 수 있다는 여지... 명자의 집을 나서면서 나는 내 마음속에 그 여지가 없음을 알았어.... 최소한 명자가 내게 그런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그애가 나를 동등한 사람으로 봤다는 것의 반증이야. 그러나 나는 그렇짐 ㅗㅅ했어. 나는 그 아이를 한 학강으로만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했지. 그러나 명자는 달랐던거야. 그애는 날 인간으로서 사랑했고, 그러나 내가 강학이었기에 떠났어."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네 자신을 괴롭히는 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텐데. 그런 일에는 늘 환상이나 계층 상승욕구 같은 것이 작용한다는 건 너도 알잖아?"
".... 환상? 계층 상승욕구.... 아니야 민수야. 명자는 적어도 내게 환상을 갖지는 않았어. 그애의 편지 귀절 생각나니? 제가 끝까지 선생님을 사랑했더라면 선생님의 일대기에 오점을 남겨놓을 뻔했다고.... 그애는 날 정확하게 바라본 것인지도 몰라.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말이야."
"그럼 명자가 계속 남아서 널 사랑했으면 넌 정말 그걸 네 인생의 오점으로 생각했을 거란 말이니?"
"아니 그런 거하고는 달라."
동윤은 일어나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창가로 다가갔다. 그렇듯 불안하고 괴로워하는 동윤의 모습을 민수는 처음 보았다. 알듯 모를듯 동윤이 가지고 있는 저 소용돌이치는 어움의 깊이를 민수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 민수야 넌 기꺼이 민중이 될 수 있겠니? .... 기꺼이 노동자가 될 자신이 있니? 민중과 선뜻 결혼할 수 있겠니?"
민수를 돌아보며 동윤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민수는 갑작스런 동윤의 질문에 대답 대신 입술을 앙다문다.
"민수야. 민중과 함께하기 위해, 그들과 만나기 위해 우리는 이 곳에 모였다.... 아까 네가 물렁한 벽이라고 표현했던가? 그걸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닐까?"
- 82-84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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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내내 말이 없던 연순이 고개글 들고 조용한 목소리로 민수를 불렀다.
"응?"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뭔데?"
".... 왜 강학들은 .... 우리에게 공부를 가르쳐줄까요? 돈도 못 버는 일인데.... 또 고생까지 해가면서.... 제가 본 대학생들은 옷도 화려하게 입고 다니던데 .... 이상해요."
"그건... 그렇게 해야만이 스스로 또 함께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야."
연순이 의하한 눈초리로 민수를 올려다본다.
"우린 서로 모르는 게 참 많다 그치?"
미소를 지으려 애썼지만 민수의 목소리는 서글프게 울렸다.
"행, 복, 해, 진, 다, 구요?"
낱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연순은 한자한자 힘주며 되물었다.
"그래 행복해지기 위해서지...."
민수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기 때문에 작았다. 언젠가 민수는 동윤에게 이미 행복해질 수 없다고 선언한 적이 있었다. 따뜻한 집안에서 잘 먹고 잘산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바와 행하는 바의 괴리 대문에 심한 괴로움을 동반한 것이었다. 그래서 집을 나왔을 때 그리고는 산꼭대기에서 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했을 때 민수는 이제 행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적어도 예전의 그 미칠 것 같은 분열은 없었다. 그러나 대신 가난과 추위와 궁핍감이 몰려들었다. 그것들은 민수의 머리채를 휘업잡기도 하고 민수를 어두운 방구석에 내팽개치면서 그녀에게 속삭여대곤 했다. 자 이제 이런 철부지 방랑은 그만두는 것이 어때? 집에 가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 부모님들을 일단 안심시키고 나서, 졸업이라도 한 뒤에.....
연순은 보도 블럭들을 비집고 나온 민들레를 바라본다. 가로등 아래 민들레의 노란 얼굴이 창백하게 떨고 있다. 왜 하필 저런 곳에서 피어나야 했을까. 연순은 문득 가슴이 아프다.
".... 선생님 요즘은 모순이라든가 사회의 나쁜 점들이 제게 아주 뚜렷하게 느껴져요. 예전엔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들, 제 탓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저는 세상이 변해가고 있는 것이 두려워요."
......
-90-91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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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혜섭의 곁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지섭은 재깍이는 시계소리와 싸우고 있었다. 이미 1차 약속 시간은 지나고 2차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어서서 이 병실을 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누나의 희고 가느다란, 상처투성이 손을 한번 잡아보고 그리고 조용히 일어서서 떠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섭은 일어설 수 없었다. 압제자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은 막상 그것이 구체적으로 다가왔을 대 공포어린 분노로 변했고 이윽고는 공포만이 남았다. 끝없이 바지가랑이를 잡아당기는 이 가난. 제가 여지껏 가졌던 분노들이 얼마나 관념적이었는가를 깨달으면서 지섭은 피투성이 붉은 해가 떠오를 때까지 꼼작 않고 그 밤을 지샜다. 검붉은 해의 빛살이 닿을 때마다 그의 앞에 놓인 세상이 유리처럼 와르를 무너지고 있었다. 그 날카로운 유리조각 위를 맨발로 딛는 것처럼 아픔만이 느껴졌다.
- 129p
남자는 왼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을 찌그러뜨려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그리고 다시 동사무소 안으로 돌아갔다. 모든 꿈과 희망을 잃어버리고 연료통 밑바닥에 가라앉은 몇 방울의 냉소를 연료 삼아 겨우 굴러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권태가 걸음걸음 바짓자락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의 공작원반, 흔히 130연락소라 부르는 그곳을 막 떠나온 기영은 그의 허무주의적 태도가 조금 놀라웠다. 이런 적지에서, 전두환 역도가 광주에서 수천의 인민들을 백주에 학살하는 땅에서 긴장도 적개심도 없이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 와 돌이켜 보면 권태와 허무야말로 이 사회의 특질이었다. 권태는 무차별적으로 퍼져 있었다. 기영은 권태가 무엇인지는 알았으나 그것을 실제로 목도하기는 처음이었다. 그가 떠나온 사회에서 권태는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에나 등장하는 추상적 개념이었다. 물론 그곳에도 권태는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사회의 권태는 차라리 무류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적절한 동기부여가 부족한 상태라 할 수 있었고, 따라서 어떤 자극만 주어진다면 금세 사라질 가볍고 허망한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 맞닥뜨린 자본주의적 권태에는 무게와 질량이 있었다. 그것은 삶을 짓누르고 질식시키는 유독 가스처럼 느껴졌다. 단순히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생겼다. 가끔 어떤 종류의 인간들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즉각적으로 아, 저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 라는 원초적인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경로로 포섭되었는지 모를 그 동사무소 직원이야말로 그런 사람이었다. 권태와 우울, 허무와 냉소, 후줄근한 옷차림과 매력 없는 용모가 어우러진, 잠시라도 함께 있기 불편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흘러 전혀 엉뚱한 자리에서 기영은 그와 다시 마주쳤다. 1999년 여름. 그는 붉은 망토를 두르고 청량리역에서 자그은 나무 궤짝 위에 올라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망토에는 검은 십자가가 수놓아져 있었는데 금박으로 경계를 삼았가 때문에 멀리서 보면 대학 응원단장의 복장처럼 보였다. 이마와 뺨으로 쉴새없이 땀이 흘러내렸고, 검고 푸른 파리들이 윙윙대며 그의 머리 주변을 맴돌았다. 기영은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는 너무 달라져 있었다. 예전보다 훨씬 말랐고 눈빛은 형형했다.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종말이 다가왔다고 외쳤다. 권태에 찌들어 있던 고정간첩은 어떻게 종말론자가 되었을까? 정말 되기는 된 것일까? 창녀와 경찰, 대학생과 노동자가 엇갈려 오가는 광장에 멈춰 서서 그는 광신도가 되어버린 고정간첩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기영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기영이 다가가자 무심한 얼굴로 종말론 안내책자를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요한계시록의 내용들이 발췌되어 조악하게 편집되어 있었다. 기영은 물었다.
"혹시 저 모르시겠습니까?"
남자는 기영을 쏘아보았다. 그러곤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로 몸을 돌렸다. 기영은 그의 팔을 살짝 붙잡았다. 그가 짜증스런 얼굴로 돌아보며 쏘아붙였다.
"왜? 내가 미친놈 같소?"
"그게 아니고 예전에 동부이촌동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만."
남자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그랬다 한들 그게 무슨 송용이오? 다 소용없소. 그 책자를 보시오. 우리는 곧 돌려올림을 당하게 될 것이오! 그날이 멀지 않았소."
약간은 버림받은 기분이 되어 광장을 떠나려 핮 ㅏ남자는 잰걸음으로 기영을 따라붙었다.
"실은 당신이 누군지 알아."
기영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상관없어. 난 이 세계의 비밀을 알았으니까. 그 전까지는 사는게 그저 답답하고 그래, 막막하기만 했지. 그렇지만 성령을 영접하는 순간 난 알았어. 지금까지의 인생은 모두 헛거였다는 걸. 속았던 거지. 어리석었던 거야. 이 광장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낯짝들을 보라구. 행복한 얼굴이 있나? 다 벌버둥을 치며 꿀꿀이 돼지처럼 하루하루 사는 거야. 이 섹{가 왜 존재하는가를 모르기 때문이야. 모르니까 그냥 걸어가는 거야. 그걸 알면 더 이상 방활항 필요가 없어. 우리 주님이 가르쳐주신대로 걸어가면 돼."
그의 장광설은 끝날 기미가 없었다. 기영은 물었다.
"정말 올해가 가기 전에 사람들이 하늘로 들려올라가고, 그들이 몰던 차는 운전자를 잃은 채 고가도로 아래로 처박히고, 남은 자들은 차라리 죽기를 바라며 고통 속으로 울부짖게 된단 말입니가?"
"인간으로 태어난 걸 후회하게 될 거야/"
"경험해보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미리 알 수 있습니까?"
붉은 망토를 입은 남자는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작고 못생긴 쪽박귀였다.
"너는 꼭 네 눈으로 보아야만 믿느냐? 이 귀로 똑똑히 들었다구. 주님께서 알러주셨어. 당신도 귀를 기울여봐. 귀를 기울이는 자에게만 우리 주님은 말씀하신다."
사내는 다시 상자로 올라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기영은 광장을 떠났다. 물론 그해 말, 어디에서도 휴거는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은 멀쩡했다. 서른세 명의 시민들이 보신각 종을 치는 가운데 새해가 밝았다. 연도 표시방식이 네 자리로 바뀌었다고 비행기가 추락하지도 않았고 기차가 탈선하지도 않았다. 그는 전국 백예순여섯 개 교회에서 종말을 기원하는 집회가 열렸다는 뉴스를 보며 붉은 망토의 사내를 떠올렸다. 혁명과 종말, 양자에게 모두 배신당한 사내와 전국의 백예순여섯 개 교회에 모였던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됐을까. 종말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 이렇게 명확해졌는데 왜 아무도 자살하지 않을까? 종말이 이렇게 간단히 유예될 수 있는 것일까? 그는 잠시 궁금했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미 오래 전 일이었다. 광화문의 대형 빌딩마다 'Y2K 문제 완벽 대비' 같은 플래카드가 내걸리고 자가발전기와 생필품을 장만하여 집에 틀어박힌 이들이 전세계적으로 수백만에 달했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두 잊어버렸다. 가동을 중단한 핵발전소도 없었고 인공위성의 오작동으로 핵미살이니 날아가지도 않았다. 물론 그 법석 덕분에 돈을 번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남한에서만 일조원이 투입됐다니까 미국이나 유럽에선 더했을 게 분명하다.
기본적으로 기영은 인간을 움직이는 두 가지 심리적 축을 두려움과 욕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세기말은 단연 두려움이 욕망을 압도했던 시기였다. 전쟁도, 전염병도, 폭동도 아닌, 난생처음 맞닥뜨린 기호에 대한 두려움. 2로 시작하는 네 자리의 숫자가 우리가 미처 짐작하지 못한 그 어떤 추상의 메커니즘을 통해 세계를 아수라장으로 만들리라는, 한편 과학적으로 들리지만 그 본질은 샤머니즘에 가까운 기이한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그게 기영에게는 전혀 와 닿지를 않았다. 남의 주민등록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복잡한 암호의 세계에서 살아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기독교적 세계관과 무관하게 자랐기 때문일까. 어쨌든 만약 재난과 파괴의 신이라는 게정말 있다면 그런 식으로 등장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온갖 난리법석을 떨며 요란스레 예정된 날짜에 나타나 그렇듯 맥 빠진 축제를 벌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진정한 재난은 인간의 상상력 저 너머에 서, 맥베스 성을 공격하는 버넘의 숲처럼 진군해올 것이라 생각했다. 마치 이날 아침 홀연 그의 필립스 액정 모니터 화면으로 떠오른 바쇼의 하이쿠처럼.
- 79-84 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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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산적이 단 일 주일만 마을을 다스린다 하자. 그놈들은 아마 하루도 안 돼 마을을 거덜내고 말 것이여. 그러나 일 년을 다스린다면 추수 때까지는 기다리겠고 사람들도 살려두겠지. 만약 십 년을 다스린다면 계획도 세울 거여. 다 굶어 죽으면 안 된까 밥과 옷도 주면서 다스리겠지. 삼십 년을 다스린다면 애를 낳느냐 안 낳느냐까지 신경을 쓸 거다. 삼십 년을 다스리는 산적, 고것이 바로 국가란 것이다."
- 1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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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세의 만화에서 따온 까치라는 가명을 쓰던 더벅머리 친구와 역시 주둥이라는 가명을 쓰는 친구, 그리고 망치라는 가명을 쓰던 기영, 이렇게 셋이 어느 여름날 인천 월미도로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소주와 바닷바람에 취해 바닷가 벤치에 축 늘어져 있던 까치가 문득 물었다.
"너희들은 혁명의 그날이 올 것 같냐?"
까치의 형은 까치보다 먼저 학생운동에 투신한 투철한 활동가였고 소수파인 PD의 핵심적 이론가 중 한 명이었는데 고등학생인 까치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대학에 들어가서 뭐 할 거냐, 부르주아의 개가 될 거냐, 그럴 바엔 차라리 공단에 바로 들어가서 노동운동을 해라. 날 봐라, 대학에 들어갔지만 곧 때려치우고 공장에서 활동하는데 너무 늦게 온 것이 늘 후회스럽다, 너는 일 년이라도 빨리 노동자가 되어 나와 같은 죄책감 없이 계급투쟁에 몸을 던지라고 종용했다고 한다. 책상도 없이 온 가족이 공유하는 단칸방에서 어렸을 때부터 어깨를 맞대가 함께 살아온 까치에게 형의 말은 무시하기 어려운 압박이었다. 까치의 형은 그의 교과서를 빼앗고 책상 대용으로 쓰던 사과궤짝도 갖다버렸다. 흥, 자기만 대학 가고 나는 가지 말라는 거냐. 대학을 다니다 그만두는 거하고 처음부터 안 가는 거하고 어떻게 같냐? 까치는 반발심으로 형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몰래, 그렇기에 더욱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합격 했다. 오히려 평소 성적보다 더 월등한 점수를 받았지만 그 역시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자기 형과 마찬가지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강의실은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단지 형과는 다른 정파를 택해 NL이 되었고 곧 주체사상을 '사상원리'로 받아들였다.
주둥이가 까치에게 말했다.
"혁명의 그날이라.... 언젠가 오지 않겠냐?"
그러자 까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난 말이야, 실은 혁명의 그날이 올까봐 두려워."
"왜?"
".... 내가 좋아하는 만화방도 못 가고, 전자오락도 못 하고."
맨정이었다면 정색을 하고 따졌을 주둥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못 하겠지."
"미제를 축출하고 독재정권 타도하고 반제반봉건체제를 깨부순다 치자. 그래서 사람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그런 세상이 온다 치자. 그 다음엔 뭘 하지? 너무 지루하지 않을까?"
기영은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아침 일곱시, 사이렌 소리와 함ㄲ ㅔ일어나 일제히 직장으로출근하고, 일요일은 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이 있을 때만 쉬고, 매일 밤 함께 모여서 하루의 일과를 총화하는 세상을 너희는 모를 것이다. 물론 거기서도 삶의 ㅅ즐거움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공터에서 배드민턴도 치고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타고 친구들과 축구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골방에 틀어박혀 포르노를 보거나 이어폰으로 이글스를 듣거나 잔혹한 일본 만화를 볼 수는 없다.
주둥이가 옆에 앉아 있는 기영의 존재를 문득 의식하고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넌 어때?"
"글쎄, 아마 그런 건 못 하겠지. 까치 말대로 지루하긴 할 거야. 그렇지만 거기에도 나름의 재미가 있지 않을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기영은 월미도에서 나눈 그날의 대화들이 생각나곤 했다. 바닷바람에선 자반고등어 냄새가 풍겼다. 어깨를 겯고 노래를 부르며 비틀거리던 휴가 장병들, 입술을 부비고 서로의 속살을 더듬는 연인들 사이에서 그들 셋은 오지도 않을 혁명 이후를 걱정하고 있었다. 결국 어린 혁명가들이 남몰래 걱정하던 ㅎ'혁명의 그날'은 오지 않았다. 대신 국제통화기금이 진주해 1945년 미군정이 그랬던 것처럼 남한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기영이 처음 보았던 팔십년대의 남한은 지금으 ㅣ남한보다 차라리 당시의 북한과 더 비슷했다고 할 수 있었다. 직장들은 대부분 평생고용을 보장했고 대학생들은 취업 걱정 같은 것은 거의 하지 않았다. 수입 대리석으로 로비를 장식한 은행과 대기업은 영원불멸할 것 처럼 보였다. 자식은 부모를 봉양했고 부모는 자식에게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은 체육관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선출되었으며 야당은 유명무실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경 너머의 세계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우리 식대로 살아가자'는 북한의 구호는 팔십년대의 남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었다. 자원을 배분함에 있어 시장원리보다는 국가의 결정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공무원의 부패가 자심했고, 뇌물과 협잡이 사방에서 판을 쳤다는 점도 북한과 비슷한 점이었다. 고등학생, 대학생 할 것 없이 학도호국단으로 편성되어 일 주일에 며칠은 교련복을 입고 등교하고 한 달에 한 번은 온 국민이 민방위 훈련을 하느라 법석을 떠는 것도 북한과 다르지 않았다. 공습에 대비한 등화관제 훈련으로 서울과 평양 모두 몇 달에 헌 번은 캄캄한 암흑세상으로 변해버리곤 했다.
그러나 지금의 남한은 팔십년대의 남한과 비슷한 점이 거의 없는, 사실상 완전히 새로운 나라였고, 당연히 북한과도 전혀 다른 종류의 나라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북한보다는 싱가포르나 프랑스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결혼한 부부들은 아이를 낳지 않고, 일 인당 국민소득은 이만 덜러에 육박하고, 은행과 대기업의 운명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고, 매년 수십만 명의 외국인이 결혼과 취업을 위해 입국하고, 영어권 국가에서 공부하려는 초등학생들이 날마다 인천공항을 떠난다. 부산에서는 러시아제 권총이 팔리고, 인터넷으로 섹스 파트너를 찾고, 휴대폰으로 동계올림픽의 생중계를 보고, 페덱스가 샌프란시스코 산 엑스터시를 운반하고, 온 국민의 반 이상이 적립식 펀드에 투자하는 사회였다. 최고 지도자는 풍자를 감당할 카리스마도 없는 한갓 비아냥의 대상일 뿐이었고, 노동자 계급을 대표한다는 정당이 해방 이후 최초로 의회에 진출했다. 만약 기영이 처음 남파되었던 1984년에 누군가 이십 년 후 남한이 이런 사회로 변모하리라 예상했다면 아마 미친놈이란 소리를 들었을 것이었다.
- 196-199 pp
나도 함께 하겠소...
덤으로 일제고사도 그만 뒀으면 하오~~
요즘 나는 넘쳐나는 시간을 이용해 그 동안 못했던 공부들을 차근차근 하고 있는 중이다. 그 중 요즘 가장 관심을 많이 두고 있는 분야가 바로 '한국 근현대사'다. 역사공부가 모든 운동에 있어서 기본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있고, 게다가 나는 대학을 다니면서 변변한 역사 세미나 한번 한 적이 없어서 더욱 역사 지식에 배가 고팠던 터였다.
그런데 요즘 서울시 교육청의 고3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현대사 특강, 교과부의 현대사 교과서 수정 지시 등을 보면서 내 공부에 가속도가 붙었다. 하긴 지금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공부' 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얼마 전, MBC 100분토론에서 했던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논란에 대한 토론을 인터넷 재방송을 통해 보게 되었다. 그런데... 100분토론을 통해 통쾌함과 환희를 느껴 본 적은 지난 광우병 논란 때 송기호 변호사, 우석균 정책실장 등의 달변을 통해서 받았던 것 외에는 한 번도 없었지만, 근현대사 교과서 관련 토론은 정말 기대 이하였다. 물론 미천한 지식이기는 하나 내가 최근에 공부한 현대사 지식으로 평가하자면, '기대 이하'라기 보다는 '수준 이하'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토론자로 나온 사람은 총 4명이었지만, 내 눈에는 거의 2명의 토론만 들어왔다. 한나라당의 신지호와 금성출판사 근현대사 교과서 책임지필자라는 교원대 교수.
당연히 내가 '기대 이하'라고 지목한 사람은 후자다. 물론 신지호야 골수 운동권 출신으로서 후일에 뉴라이트로 전향하고 삼성경제연구소에서도 이력이 있는, 좌우파의 논리를 다 꿰고 있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나라당의 브레인에다 달변가이니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문제삼는 것은 신지호에게 밀린 '말빨'이 아니다. 토론의 구도 설정 자체가 틀려먹었다.
교수님은 줄곧 교과서 수정 지시의 비민주성, 절차 무시, 독단성만을 물고 늘어졌다. 이에 대해 신지호 (그리고 함께 나온 교과부 담당자)는 절차상 아무런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참여정부 때에도 비슷한 수정 지시가 있었는데 그 때에는 왜 문제제기를 안하다가 이제와서 난리냐고 맞받아 쳤다.
아, 이 따구로 토론하는데 누가 관심을 가져주겠나? 교과서 수정 지시가 언제 부터 시작되었고, 공문을 몇차례를 보냈으며, 언론에서 처음으로 문제제기가 된 적은 언제이며, 이에 대한 각계의 반응은 어땠으며... 이런건 당사자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문제 아닌가? 또한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정부는 나름 정해진 절차에 따라서 수정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설령 그 과정에서 규정을 벗어난 행위를 했다고 한들, 뭐 문제 되겠는가? 2MB정권이 하는일이 다 그런데... 사실 이제 절차상의 비민주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지난 광우병 사태 이후 정권 차원에서도 이골이 난 일이라 아주 내성이 생긴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식의 문제제기는 백이면 백 헛수고로 돌아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데 여기서 신지호가 아주 민감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치고 나오기 시작한다. "금성출판사 교과서는 헌법정신과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다." 허나... 그런데...
내가 재미없어서 중간도 채 보지 않고 꺼버려서 못봤는지는 몰라도, 이 교수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있는 답변 한마디를 못하신다. 계속 반복하는 것이, 이명박 정권의 비민주성, 정권의 입맛에 맞는 교과서 왜곡... 역사교과서 논쟁에서도 반MB전선을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혹시 이 교수님은 정말로 대한민국의 헌법정신과 정통성을 부정하시는 것일까? 그럴리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이 양반을 좋게 봐서 좌파라고 한다해도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 만드는 일에 사회주의자 또는 아나키스트를 고용하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이 교수님이 노무현 정권과 궤를 같이한 사람이라면 기껏해야 자유주의자 아니겠는가? 사상이 다른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앉았었더라면 아래와 같이 말했을 것 같다.
뉴라이트는 그 긍정의 대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뉴라이트의 도식에 따르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긍정은 이승만에서 박정희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전 정권들에 대한 긍정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어쩌면 이것이 더 핵심적이다. 아무리 추상적인 수준에서 “나는 자유민주주의자요”라고 해도 뉴라이트에게는 그것만으로는 성에 안 찬다. 반드시 ‘국부’ 이승만, ‘중흥조’ 박정희에 대한 입장이 따라붙어야 한다. 그들을 존숭해야 한다. 그래야만 대한민국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
역사 속에서 어떤 기원적 사건을 찾고 그것으로부터 정통성의 계보를 작성하는 것은 전형적인 주자학자들의 역사관이다. 주자학자들에게 지금 이 시대의 올바름은 과거 역사 속 올바름의 계보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 계보와의 연관성 속에서만 이 시대의 올바름도 판가름할 수 있다.
(...)
이승만-박정희 전 정권의 계보와 대한민국 역사를 동일시하고 전자에 대한 긍정만이 대한민국의 현재에 대한 긍정이라는 뉴라이트의 역사관은 과연 이러한 17세기 조선 주자학자들의 역사관과 얼마나 다른가? 뉴라이트 역시 이승만의 건국 행위라는 기원적 사건을 출발점으로 삼아 박정희의 산업화, 작금의 세계화로 이어지는 어떤 정통성의 계보를 그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이 계보의 연장선 위에 서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단으로, 즉 대한민국 안의 반(反)대한민국 분자(‘친북좌익’)로 몰아붙이고 있지 않은가? 300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정신적 근친성은 참으로 놀랄만하다.
- 장석준, "진보좌파에게 대한민국은 무엇인가", <시민과 세계> 2008년 겨울호 中
대한민국 60년 역사동안, 헌법은 얼마나 많이 바뀌었으며, 또 그 배 이상으로 사람들의 생각은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가? 그렇게 대한민국은 '지배계급의 통치단위로서의 국가'라는 생각을 잠시 가려놓고 생각하면 얼마나 변화무쌍한 조직이던가? 또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그 변화를 위해 몸을 바쳤던가? 그렇다면 그런 몸부림들, 어떻게든 통일된 해방국가를 만들어 보겠다고 몸부림 쳤던 김구, 여운형 등을 암살하고 잘려진 나라를 만들었던 이승만은 얼마나 대한민국적인가? (허술하고 급조된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노동자/농민의 권리와 민주적인 국가운영을 얼마간 보장했던 제헌헌법을 허물어 뜨리고 개발독재를 위한 헌법을 만들었던 이승만, 박정희의 행위는 또 얼마나 대한민국적인가?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정적으로 굳어진 유일한 형태가 아니라 대중의 열망과 투쟁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또 그래야 하는 체제라고 말하면 안되는 것이었나? 우리는 그러는 한에서 대한민국을 긍정한다고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기만 한 토론이다.
만일 네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위녕, 오늘 하루 쉬고 싶다고 투덜거리는 널 보내고 엄마는 이 글을 쓴다. 엄마는 네게 말하곤 했었지. 다만 네가 최선을 닿 성실하기를 바란다고. 생각해 보면 절대로 취소하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공부를 잘하라느 압력을 그런 식으로 네게 교묘히 불어넣었는지도 몰라. 이 겨울, 국토대장정을 떠날 돈을 모으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찾아다니는 너를 보며 엄마는 실은 네가 시험을 잘 본 것만큼이나 대견했단다. 아직 너는 어리니까 엄마가 조금 도와주어도 좋을 일인데 굳이 네 힘으로 하겠다는 것을 보며 우쭐하기가지 했단다. 그래서 엄마는 오늘 네게 <<내 발의 등불>>이라는 책 이야기를 해볼까 해.
닐 기유메트라는 신부님이 지으신 잛은 이야기들을 모은 책이야. 늘 그렇듯이 별 기대 없이 책장을 열었는데, 뜻밖의 이야기가 있었다. 제목은 <천사 미니멜>이야. 짧은 이야기니까 좀 들어 볼래?
'마지막 천사가 창조되었을 때 그에게 '미니멜'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모든 천사들 가운데 가장 완벽하지 못했기 대문이다'라는 구절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천사들은 보통 끝에 '엘'이라는 철자를 가지고 있지. 네 영세명인 미카엘라는 미카엘의 여성형이고 네 동생들 가브리엘, 라파엘이란 대천사들의 이름도 모두 그렇다. 미니멜이란 앞에 붙은 '미니'에서 짐작할 수 잇듯이 작고 보잘것없고 막내라는 그런 뜻일 테지. 당연히 천상에서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인 미니멜은 절망하기 시작했어.(천상에서 보잘것없다 해도 우리가 보기에는 엄청나게 아름답고 또 위대한 존재라고 저자는 토를 달았다.) 그래서 미니멜은 죽기로 ㅈ결심한다. 그런데 천사는 불멸의 존재라, 자살이 불가능해. 방법은 하나. 자기를 만든 신에게 가서 자기를 그냥 없애 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단다.
신은 곰곰 생각하다가 대답한다.
사람들 세상에 피에타 상이 수백만 개 존재하고. 나이아가라 포포가 수백 개, 에베레스트 산이 수백 개 존재하다고 한 번 가정해 봐라. 그것들은 더 이상 독창적이 아니니 그 절대적 인 매력을 잃지 않겠느냐?
나의 창조물들을 자세히 보아라 어떤 눈송이도 똑같이 생긴 것이 없다. 나뭇잎이나 모래알도 두 개가 결코 똑같이 않다. 내가 창조한 모든 것은 하나의 '원본'이다. 따라서 각자 어떤 것과도 대치될 수 없단 거란다. ... 너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나는 너 없이도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지만 만일 그랬다면 세계는 내 눈에 영원히 불완전한 거으로 보였을 것이다. 너를 미카엘이나 라파엘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네가 너로서 존재하고 나의 고유한 미니멜이기를 원한다. 태초부터 내가 사랑한 것은 남과 다른 너였기 대문이다. 너는 내가 오랜 세월에 걸쳐 꿈꿔 온 유일한 미니멜이다. 따라서 어느 날 네가 존재하지 않는다면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느냐? 만일 네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더할 수 없이 슬플 것이다. 영원히 눈물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엄마는 한참을 이 구절을 붙들고 있었다. 왜냐구? 엄마도 가끔 생각하거든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나에게는 왜 저 사람이 가진 저것이 없을까? 시은 왜 나에게 이런 재능을 주지 않았을까? 하고. 그런데 생각해 보게 된 거야. 나이아가라 폭포가 동네마다 있다면, 동네 뒤에는 다 에베레스트 산이 있다면, 피에타 상이 온 동네 교회마다 있다면..... 갑자기 말이야, 신기하게도 웃음이 나왔어.
닐 기유메트 신부님은 이 밖에도 많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신 분이야. 어떤 사람의 책이 좋으면 그 사람이 지은 모든 책을 읽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것은 너와 내가 같아서 엄마도 이 분의 책을 다 찾아 읽었단다.
사랑하는 달, 가끔 여성지를 펼쳐들고 있으면 온몸이 오싹해 질 때가 있어. 온갖 성형외가 광고와 다이어트 광고들. 그건 이 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 잘라라, 붙여라, 꿰매라, 빼라..... 결국, 지금 너는 추하다!
위녕, 네 코에 대해 불만이라고 했지? 하지만 엄마가 아무리 생각해도 네 콘는 너의 입술과 세트를 이루는 아름다운 코야. 네 코가 엄마코를 닮았다면 너의 입술은 부자연서러웠을 거야. 성형외과 의사에게 들었는데 인간의 얼굴은 이목구비뿐만 아니라 심지어 턱선 어깨선과도 모두 조화를 이루도록 독특한 설계를 가지고 있다고 해. 그래서 얼굴 하나를 잘못 고쳐 놓으면 그 모든 균형이 무너져 내리고 그러면 그 균형을 어떻게든 되찾기 위해서 다시금 다른 이목구비에 손을 대게 되는 악순환이 벌어 진다고 하더구나.
위녀, 넌 엄마의 심미안을 전혀 믿지 않지만 너는 예쁜 아잉야. 그리고 엄마는 너를 사랑한다. 세상에 하나뿐인 위녕 너를 말이야. 만일 네가 없어지면 우준느 균형을 찾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 치겠니? 어느 시인이던가 그런 말을 했다.
한 송이 수선활르 피우기 위해 온 우주가 협력했으니 지구는 수선화 화분이다.'라고.
엄마는 오늘은 꼭 수영을 가려고 해. 온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엄마의 몸을 튼튼하게 지키려고 말이야.
자, 오늘도 좋은 하루!
- 40-44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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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자신에게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네 자신뿐이다.
위녕, 좋은 날씨가 계속된다. 하루 종일 공부해야 하는 너는 어쩌면 이런 날씨가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하겠다. 하늘은 푸르고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않고 꽃들은 화사하고... 오늘도 가끔 창밖을 보고 있니? 그래 가끔 눈을 들어 창밖을 보고 이 날씨를 만끽해라. 왜냐하면 오늘이 너에게 주어진 전부의 시간이니까. 오늘만이 네 것이다. 어제에 관해 너는 모든 것을 알았다 해도 하나도 고칠 수도 되돌릴 수도 없으니 그것은 이미 너의 것은 아니고, 내일 도한 너는 그것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단다. 그러니 오늘 지금 이 순간만이 네가 사는 삶의 전부, 그러니 온몸으로 그것을 살아라.
너는 어제 어처구니없이 당한 오해와 공격에 대해 엄마에게 오래도록 이야기했었다. 그래, 생각 같아서는 너에게 그런 짓을 한 사람에게 좇아가서 두 팔을 걷어붙이고 항의하고 싶었단다. 하지만 일단 엄마는 여기서 한 박자 쉬기로 했어. 대신 네게 이런 편지를 쓰고 싶었단다. 그 순간, 네가 하지도 않은 일로 그가 너를 오해하고 사람들 앞에서 너를 망신당하게 했을 때, 그때 네 마음이 피 흘리며 아팠을 때, '정말, 정말, 너를 상처 입힌 것은 과연 누구였을까?'하는 편지 말이야.
'네 자신을 아프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네 자신뿐이다.'
이 말은 엄마가 안셀름 그륀이라는 신부님의 책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마라>에서 읽은 구절이었어. 그 신부님은 성폭력의 상처를 가진 여성들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어떤 위로도 이 여성들을 다 위로하고 치유할 수 없지. 어린 시절의 성폭력은 그 여자들이 자신을 아프게 하기 위해 초래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역사에 희생당한 사람들, 테러에 희생당해 불행을 겪는 사람들, 모두가 자기 자신을 아프게 하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니었지. 그런데 말이야. 성폭력이나, 광기의 역사나, 테러에 희생당해 불행을 겪는 사람들, 모두가 자기 자신을 아프게 하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니었지. 그런데 말이야. 성폭력이나, 광기의 역사나, 테러에 희생당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도저히 어쩔 수 없다 해도, 그 와중에 그것은 그저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하거나 나는 오직 희생아라고 말하기 전에 조금은, 우리가 무언가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해. 그륀 신부는 이 여성들과 면담을 통해 이상한 사실을 발견한다.
고통 당하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고통과 작별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고통은 그가 알고 있는 것이지만, 그 고통을 놓아 버린 후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가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녕, 너는 이 이상하고 모순되어 보이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니? 이 무서운 진리를 말이야.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 주변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난단다. 가끔 엄마는 생각해. 진자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든 그 고통에서 그들이 헤어나올 방법을 함께 모색해 주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단다. 그런데 이들은 정말 여기서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기나 한 걸까? 하고 말이야. 가끔 그건 엄마에게도 마찬가지였어.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대개는 그 고통이 가해지는 틀을 깨 버려야 할 때가 많으니까. 그건 미지(未知)이고 그것은 고통보다 더 두려운 거지.
그리고 다시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 거야. 그것은 비단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뿐 아니라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상한 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 그는 그것을 이렇게 써 놓았단다.
우리 모두는 늘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배심원석에 앉혀놓고, 피고석에 앉아 우리의 행위를 변명하고자 하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이해할 수 있겠니? 우리를 변호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를 늘 비난하는 사람들을 배심원 자리에 앉힌 것은 누구였을까? 피고석에 우리 자신을 앉힌 것은 누구였을까? 엄마가 많이 힘들던 어느 날, 사람들이 내게 원하는 것과 엄마가 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다르다고 느끼는 날 엄마는 이 구절을 읽었고, 책이 아니라 가슴에 붉은 밑줄이 손톱자국처럼 북북 그어지는 것 같았고 그리고 엄마의 녹슬어 가던 인생이 끼이익 하고 각도를 트는 소리를 냈다. 엄마는 오래도록 불행한 결혼을 끝내고 싶었지만 두려워서 그러지 못하고 있었어. 왜냐하면 아직 하지도 않은 이혼을 두고 아직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그 비난들이 엄마의 귀에 들려오는 듯했기 때문이지. 그런데 이 구절을 읽자, 나는 왜 피고석에 앉아 있으며, 나는 대체 누구를 배심원석에 앉히고 있었나 싶었던 거야. 분명 내 자신은 내가 피고석에 앉을 만큼 잘못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엄마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엄마를 비난하지 않았고 그럴 리도 없을 텐데, 엄마는 스스로 피고석에 앉아 내 결혼생활의 판결을 엉뚱한 이들에게 맡기려고 하고 있었던 거지. 그토록 중요한 내 인생의 판결을 나를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의 손에 맡기려고 하다니.... 그날은 마침 오랜만에 외출을 하는 날이었는데 엄마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 지인들과 술을 마신 후, 이렇게 말했다고 하더라.
"나는 이제 피고석을 떠나겠어! 오늘부터 내 배심원들 다 해고야.... "
있잖아 위녕, 어떻게 그런 말을 술 마시고 반복했는지 모르지만 태어나서 술 마시고 얼결에 한 말중에 제일 나은 것 같아. 그 순간 엄마의 마음속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이 찾아왔단다. 해방감은 공포를 수반했지만, 적어도 나를 비난하기만 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변명하고 있는 짓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만은 확실했고, 엄마는 그 어리석음이라는 확실함을 붙들고 일단 확실한 그것을 발길로 뻥 차 버림으로써 거기서 한 발짝 벗어나기 시작했단다. 아직도 그 순간의 감격을 기억해.
그륀 신부님의 이 말은 동방의 성자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사상에 기대고 있지,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344년경에 태어난 사람이었어. 그때나 지금이나 성자들이 대개 그렇듯 그는 모함과 오해에 시달린다. 사람들이 그를 골탕 먹일 방법을 의논했지. 그러나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어. 만일 그를 주교자리에 앉힌다면 그는 그 일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너무 훌륭한 주교가 될 것이고, 만일 그를 유배 보낸다면, 그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닮게 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굳세어질 것이며, 그를 죽인다면 그는 하느님을 위해 순교한다는 기쁨에 사로잡힐 것이라는 게 뻔했다는 거지. 그 무엇도 그를 삶의 기쁨에서 내몰 수 없었다는 것이야. 소크라테스가 말했던가. "그들은 나를 죽일 수는 있으나 해칠 수는 없다'고.
하는 수 없이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주교로 임명되는 구나. 344년이면 기원 후 겨우 4세기인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인데, 우리나라에 아직 삼국시대도 오지 않았던 그때에 말이야. 그때도 돈과 성공만 아는 젊은이들이 넘친 모양인지. (그때도! 와우!) 이 성자는 지금 들어도 이미 진부한 말을 하는구나.
당신이 당신을 재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는 그 잣대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인간의 힘인가? 당신이 틀림없이 가난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도 돈이 힘은 아니다. 당신의 노예 생활을 모면케 해 주는 자유도 힘은 아니다. 인간의 힘은 참된 표상과 함께 갖게 되는 주의 깊음과 생활방식과 관련된 올바름이다.
그래, 여기서 드디어 표상이라는 말이 나오는 구나. 참된 표상과 함께 갖게 되는 주의 깊음과 생활방식과 관련된 올바름 엄마는 이 구절에서 한참을 멈추었단다.
그륀 신부님이 요한 크리소스토모를 인용한다면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자기보다 200년쯤 먼저 살았던 에픽테스토스라는 사람의 말을 인용하며 다시 말한다.
사람들은 사건 때문에 혼란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사건에 대한 표상 때문에 혼란에 빠진다. 죽음이 끔찍한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표상이 끔직한 것이고 깨어진 꽃병 자체가 끔찍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과 꽃병을 동일시하여 꽃병이 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온 마음으로 꽃병에 집착하는 것이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돈을 잃어버렸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돈은 꼭 필요하며 돈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상처를 입힌다.
글쎄, 그렇다고 이 위대한 사람들처럼, 엄마가 죽음도, 깨어진 꽃병도, 일어버린 돈도, 나를 상처 입힐 수 없다고 큰소리치며 말할 날이 올까마는, 한 줄기 아주 가느다랗게 희망 같은 것이 엄마를 비추었단다. 내용이 어떻든 사귀던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불행이라고 느끼는 것, 어찌 되었든 결혼을 이어 나가는 것이 행복에 대한 표상이고 이혼은 어쨌든 불행한 일일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 부자는 행복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표상들 예쁘고 날신하면 어쨌든 행복할 거라는 그런 표상들.... 표상은, 잘못된 표상들은 이제껏 내가 이름을 아는 사물과 사건만큼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고3 시절을 생각해 봤어. 엄마는 그때 난생처음으로 힘든 시기를 맞았단다. 외할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셔서 하나밖에 없는 집이 차압을 당하고 우리는 그야말로 거리에 나 앉게(말하자면 말이다) 되었던 거지. 엄마의 마음을 다줄 수 있었던 친한 친구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 버리고, 엄마가 짝사랑하던 사람은 어느 날 정말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어. 나름대로 이보다 더 불행하긴 힘들다고 생각했지. 실제로 숨죽여서 많이 울었다. 제일 견디기 힘든 것은 우리 집안의 사정도 아니고 유학 간 친구도 아니고 짝사랑하던 사람의 부재도 아니었어. 그건 나의 이런 딱한 처지가 알려지게 되어서 반 아이들이 처음으로 엄마에게 가엾다는 눈치를 보내게 되었다는 거지. 지금은 꼭 그렇지 않다마는, 그때는 그것이 그렇게나 엄마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고, 참을 수 가 없었어.
일부러 분식집에서 돈을 내었고 일부러 명랑한 척 떠들었다. 일부러 말이야. 맘속으로는 엄청 죽고 싶었는데(지금 생각하면 죽고 싶기까지? 그런데 그랬단다) 그걸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이 그렇게나 힘든 일이었던 거야. 그때 생각했지. 죽고 싶다, 도망가 버리고 싶다. 그런데 말이야. 도망칠 곳이 없더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 거야. 그러니까 온몸으로 고3을 맞을 수밖에.
그때 생각했어. 이왕 피할 수 없다면 끌려가지 말자고. 내가 끌고 가자, 휘둘리지 말고, 억지로 노예처럼 공부하지말고 내가 이 시간들의 주인이 되자고.
지금까지 생각해도 그때처럼 엄마가 열심히 살았던 적은 거의 없어. 다른 친구들은 고3이라고 빠졌지만 일요일마다 하루종일 가는 성당의 봉사활동도 빠지지 않았다. 책도 열심히 일었어. 친구들과 이야기도 많이 했고 새로운 친구와도 친해지게 되었지. 나중에 시간도 많아지고 집안 형편도 회복되었는데 가끔씩 그렇게 고3때 생각이 나는 거야. 그 이후로 한 번도 그렇게 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거지. 내가 생각하기 에 끔찍했던 불행들이 나를 분발시키고 나를 바른 자세로 살게 만들어 주었던 거야. 가끔 생각하곤 한단다. 나에게 있어 진정한 불행과 진정한 불운은 무엇일까?
에픽테토스는 노예였고 절름발이였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불구였다는 설도 있고 주인에게 맞아서 불구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 아무튼 그는 끔찍한 어린 시절을 보냈음이 틀림이 없다. 노예로 다시 로마로 보내졌을 때 그는 이미 행방된 노예인 에파프로디토스에게 고용된다. 그런데 해방 노예로서 노예의 비애를 잘 알고 있어야 할 에파프로디토스는 에픽테토스를 학대한단다. 그래서 에픽테토스는 알게 되었다고 해.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계속 그것을 전가한다고 말이야. 학대받는 며느리였던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학대하고, 딸이라고 설움당하던 어머니가 딸을 구박하고, 배고픔을 참으며 고생고생 자수성가한 사업가가 저임금으로 아이들을 착취하고. 상처가 대물림되는 이유는 그것이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이야. 만일 엄마가 너희들에게 어떤 의미이든 상처를 주었다면 엄마 역시 엄마의 엄마에게 받은 이ㅠ되지 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되겠지.
에픽테토스는 그래서 거기서 자신과 상대방의 상처를 들여다 보고 그것을 극본한 다음, 말하지. 단언한단다.
인간은 자유를 원할 때에메나 자유로워진다. 다른 사람은 우리가 자신을 해치고 상처낼 때에만 우리에게 상처입힐 수 있다. 불행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일 때문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 믿음 선입견.... 즉 표상이다.
에픽테토스와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그륀 신부님은 각기 아릿아를 부르다가 이제 오페라의 끝 무렵에 와서 삼중창을 부르는 빅3처럼 말한다.
우리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 관해서 만들어낸 생각에 일치하게끔 그 사람을 체험한다. 어느 한 사람을 열광적으로 찬탄한다면, 우리는 그가 저지른 가장 정신 나간 일도 황홀하게 바라보고, 유일하며 비범한 것으로 해석한다. 화난 안경이나 실망한 안경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그를 마음에 안 들고 불쾌하고 허약하며 아주 간사하고 부정직한 등등의 사람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올바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표상과 표상을 투사하는 배후를 묻고, 사물과 사람들을 하느님의 빛 안에서 상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롭게 사물과 사람들을 대할 수 있다. 그러면 사물들이 더 이상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위녕, 무엇인가에 표상을 투사하는 너의 배후는 무엇이니? 네 속에 없는 것을 네가 남에게 줄 수는 없다. 네 속에 미움이 있다면 너는 남에게 미움을 줄 것이고, 네 속에 사랑이 이있다면 너는 남에게 사랑을 줄 것이다. 네 속에 상처가 있다면 너는 남에게 상처를 줄 것이고, 네 속에 비꼬임이 있다면 너는 남에게 비꼬임을 줄 것이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떤 의미든 너와 닮은 사람일 것이다.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알아보고 사랑하게 된 것일 테니까. 만일 네가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너와 어떤 의미이든 닮은 사람일 것이다. 네 속에 없는 것을 그에게서 알아볼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네가 남에게 사랑을 주든, 미움을 주든 , 어떤 마음을 주든 사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네 것이 된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된면 말 한마디 시선 하나가 두려워진다. 정말 두려워져.
위녕, 우리는 가끔 어처구니 없는 가시덤불에 걸리기도 하고, 모욕의 골짜기에 떨어지기도 하지. 너의 선의와는 아무 상관없이 너는 매를 맞을 수도 있고, 창피를 당할 수도 있어.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설사 그 일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 일을 마음속으로 자리매김할 수는 있다는 거야. 그건 우리에게 달린 일이거든, 그리고 우리에게 달릴 수밖에 없는 일익도 해.
오늘 아침에 우연히 마주치게 된 모욕에 오늘 하루를 내줄 것인가, 생명이 약동하는 이 오월의 아름다움에 네 마음을 내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너 자신이지. 그것은 나쁘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너의 선택이라는 거야.
이 시간의 주인이 되어라. 네가 자신에게 선의와 긍지를 가지고 있다면 궁극적으로 너를 아프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네 성적이 어떻든, 네 성격이 어떻든, 네 체중이 어떻든 너는 이 시간의 주인이고 우주에서 가중 귀한 사람이라는 생명이다.
위녕, 힘들다고 했지? 그래 힘들지. 누구나 그 시절을 다 힘들게 보냈어. 그런데 너의 힘듦은 진정 어디서 오니? 그래 이왕 힘든 거, 힘든 시간을 나를 분발시키고 나를 향상시키는 기회로 삼아 보면 어떨까? 미안하다. 그것이 힘든 걸 알면서도 이렇게 또 지당한 소리를 늘어놓게 되었구나, 그러나 위녕, 사실을 말하면 엄마는 네가 이 시기를 좀 잘못 넘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도 돼. 너는 아직 젊고 또 많은 기회가 있을 거야. 이 한 해로 너의 모든 것을 판단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도 안되고...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엄마의 미안한 사랑을 보낸다.왠지 오늘은 수영장이 임시 휴일일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자, 오늘도 좋은 하루!
- 98-111pp
yes24 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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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4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그 자신을 속이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남들을 속임으로써 그것의 종말을 고한다.
거듭 당부하거니와, 절대 상품을 주고받는 식으로 사랑을 확인하지 마시라. 물론 선물은 중요하다. 하지만, 진짜 소중한 선물에는 '삶의 서사'가 묻어 있어야 한다. 즉, 나의 일상의 리듬과 무관한 선물이란 그야말로 쇼에 지나지 않는다. 일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쇼"가 되는 순간, 아무리 정성을 다한다 한들 결국 화폐로 환산될 수밖에 없다. 특히 요즘같이 상품과 예술의 경계가 모호한 시대에는 정성과 화폐가 분리되기 어렵다. 갖은 정성을 다한 선물일수록 가격에 비례한다. 따라서, 그 노선을 취하는 순간, 이미 그 사랑은 화폐권력의 장에 포획되어 버린다. 그 다음부터는 일상의 모든 흐름에 상품의 혼이 따라붙게 된다. 처음엔 얼떨결에 따라했던 작업들이 나중엔 자신의 본성인 양 전도되어 버리는 것이다.(197~8쪽)
왜 사회를 전면적으로 전복하기를 꿈꾸면서 사랑과 성적 관계에 있어서는 새로운 실험을 기획하지 않는 것일까? 사랑이야말로 혁명의 뇌관임을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대체 왜?(83쪽)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우리시대 모든 연인들이 연애와 쇼핑 사이의 이 은밀한 공모관계만 해체해도 신자유주의 체제는 휘청거릴 것이다, 라는. 세상에, 이렇게 간단하고 기막힌 혁명전략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니 청춘들이여, 아니 사랑에 빠진 모든 이들이여, 세상이 바뀌기를 정말 원하는가? 신자유주의에 저항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가장 먼저, 쇼! 하지 마라! 쇼! 그럼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는가? 그래서 창의성이 필요하다. 나의 사랑이 지닌바 특이성이 유감없이 발휘될 수 있는 사랑법을 창안하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고유한 사랑법을.(198쪽)
흔히 연애가 시작되면,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가거나, 하릴없이 유원지를 헤매거나 한다. 한마디로 온통 소비를 통해서만 사랑을 확인하려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다. 힘으로 일어선 자 힘으로 망한다고, 소비로 맺어진 연애는 반드시 소비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 사랑만큼 소중한 감정도 없지만, 사랑만큼 부서지기 쉬운 감정도 없다. 10년 이상을 한 이불 밑에서 알콩달콩 살던 부부도 순식간에 파국을 맞이하곤 하는데, 하물며 처녀총각의 연애야 말해 무엇하랴. 그래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하라는 것이다. 함께 책을 읽으면서 데이트를 하면 돈도 덜 들고 서로에 대한 신뢰도 높아진다. 또 책을 읽으면 주고받을 이야기도 자연 많아진다. 그러면 말하는 능력, 서사적 힘도 절로 붙게 된다. 일석삼조! 아니 사조! - (208쪽)
사랑이란 단지 그 대상하고만 소통하는 것이 아니다. 그 대상이 살아가는 시공간과도 깊은 교감을 나누어야 마땅하다(이쯤에서 “사랑하는 대상이 바로 ‘나’다”,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스스로 창조한다!”는 테제들을 암기해 보는 것도 좋겠다). 그러므로 사랑이 시작되면 내면에 웅크리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세상 속으로 성큼 들어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그 힘에 의거하여 인연이 형성될 수 있고, 인연이 맺어진 다음엔 그렇게 만들어진 삶의 서사를 다시 나눌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인연이 생길 수도 있고. 암튼 이래저래 남는 장사다! - (226쪽)
사람들은 사랑을 언제나 대상의 문제로 환원한다. 한 마디로 대상만 잘 고르면 만사형통이라 여기는 것이다. 사랑에 실패한 건 대상을 잘못 골랐기 때문이고, 아직까지 사랑을 못해 본 건 ‘이상형’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참으로 신기한 인과론이다.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는 판에 나는 몸만 쏙! 들어가면 되는가? 실패한 다음엔 다시 몸만 쏙! 빠져나와 복수극을 펼치면 되고? 이렇게 지독한 이기주의가 또 있을까? 상대를 잘못 만나 인생을 망쳤다면, 그런 상대를 선택한 ‘나’라는 존재는 대체 뭔가? - P. 15
‘불멸의 사랑’은 망상 중의 망상이다. 그건 마치 어린 아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어른이 된 다음에도 계속 끼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다. - P. 16
운전면허증 따지 않기로 결심하다.
얼마 전 학교를 졸업(정확히 말하면 수료. 아직 나에겐 토익시험이라는 장벽이 남아있다. ㅠ.ㅠ)하고 집에 내려와서 지내면서 가족들로부터 지속적으로 압박을 받아온 게 하나 있다. 그건 다름아닌, 수능끝난 고3 수험생들이 제일먼저 자신이 '성인'임을 인증받기 위해 치르는 '운전면허시험'이다. 난 다른 친구들이 하나둘씩 운전면허 학원으로 달려가던 고3 수능 이후, 오전엔 영어회화학원을, 오후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는 친구를 따라 택견을 배우러 다녀서 사실상 운전면허를 딸 수 있는 호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데모'하는데만 쫓아다녔으니 운전같은거 배울 세가 있을리 만무하고...
'인생 살아가는데 운전면허는 필수다', '나중에 직장생활 어떻게 할라고 그러냐?', '차 한대는 있어야 살 수 있는거 아니냐?' 등등... 빨리 운전면허를 취득하라는 압박의 수단은 다양하다. 우리 가족들도 서서히 이런 말들로 나를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맨날 주차 문제 때문에 이웃들과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 운전하면서 온갖 짜증 다 부리는 운전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운전같은거 진짜 재미없겠다고 생각해오고 있던 터라 최대한 이런 요구들을 회피하려고 했다. 그래서 일단 지금은 토익학원을 다니는 것을 핑계로 운전면허 취득은 내년초로 미뤄 놓은 상태다.
하지만 지금은 아예 그 계획을 '취소'했다. 나는 내 소유의 차를 가지는 것은 물론 운전면허도 갖지 않을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내키지 않은 일이긴 했지만, 이제 아예 가슴속에 도장을 찍었다. '지구 천연자원을 파헤쳐 자연생태계가 그간 쌓아온 저금통장을 순식간에 까먹으며 지구온난화를 부추기는 온실가스를 배출해 나의 숨통을 조여오는 자동차 따위' 타지 않겠다고!! 나는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안티-오토모바일리스트다!!!
자본주의의 '화석 에너지 동맹'과 결별을 선언하다!
물론 이런 개인적 선언은 뭇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기 딱 좋다는 것 정도, 나도 잘 알고 있다. "당신의 힘으로는 아프리카의 기아를 없앨 수도 없고, 지구 온난화도 막을 수 없지만..."으로 시작되는 대기업 홍보 광고따위가 이미 나를 비웃고 있질 않은가? "너 하나가 운전 안한다고 조그만 도시 하나의 대기 오염이라도 줄일 수 있을 것 같으냐?"라고 비웃을 지 모른다. 또는 "너 그런 생각이라면 아예 대중교통도 이용하지 마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대중교통과도 결별할 만큼의 배짱은 없다. 하지만 그럴 수만 있다면, 조금씩 그것들과 결별할 것이다. 지금 나는 충분히 운전면허증과 결별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그래도 내 삶에 하등의 지장이 없다. (사실 나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 그런데 실천을 안 할 뿐이다.) 이를 통해서 나는 지구 탄생 역사 45억년 중에 단 1%도 차지하지 않는 자본주의 근대 역사가 벌이는 화석에너지 강탈 동맹에서 조금이라도 빠져나오겠다는 것이다. 비단 자동차 뿐만이 아니다. 전기, 가스 사용량도 현격히 줄여서 '1인당 전기 사용량이 에펠탑 꼭대기에서 땅에 있는 자동차를 끌어올리는 힘과 같은' 이 정신나간 근대 에너지 동맹에서 서서히 탈퇴할 것이다. 난 이제 그 첫걸음을 뗐을 뿐이다. "나 자신도 못 바꾸면서 무슨 세상을 바꾸냐?" 내가 예전에 학교 후배들 갈굴 때 자주 쓰던 말이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나도 이걸 실천에 옮기는 셈이다.
내가 왜 이렇게 극단적이고 황당하게 들릴 법한 생각을 하게 되었냐구? 그것은 거의 <<잔치가 끝나면 무엇을 먹고 살까>>(박승옥 저, 녹색평론사, 2007)의 책임이다.
잔치는 끝났다! 햇빛 에너지로 먹고 살자!
내가 이런 생태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2008년 5월, 온 나라가 촛불로 타오를 때, 나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막겠다고 거리에 섰다. 그러면서 광우병 문제 뿐만 아니라 당시 이슈로 떠오르던 전 세계 식량 위기의 문제도 함께 공부했었는데, 이 모든 문제의 근원에 자본주의에 의한 생태계 순환 파괴에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생태위기에 관련된 책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의 한가지 단점부터 말하자면, 지겨우리만큼 비슷한 얘기를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각각의 글들이 이 책을 내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여러 다른 지면을 통해 발표된 글들을 모아 놓은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거의 모든 장에서 '피크오일'문제가 등장한다는 건 좀 심하지 않나 싶었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나 또한 피크오일 문제는 아무리 입에 쉰내가 나도록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할 정도로 저자의 글쓰기 방식에 동의하고 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현대 자본주의 문명은 화석연료 문명, 즉 석유에 중독된 문명이다. 현대산업의 원동력은 값싼 석유이다. 20세기 들어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 석유는 자동차문명 사회를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의식주 모든 분야에서 석유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게끔 만들었다. (...)
인류는 수억년 전 만들어진 자연의 보물 석유와 각종 천연자원을 단 몇백년 만에 마구 퍼다 쓰고는 또 쓰레기로 마구 내다버리고 있다. 이는 미래세대의 저금통장을 몽땅 털어먹는 도둑질이자 미래를 소비하는 파렴치한 범죄행위이다. 호모 사피엔스, 즉 '슬기로운 동물'이라기보다는 재생 불가능한 쓰레기를 만드는 동물, 눈먼 소비중독의 동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차라리 정확할 듯싶다.
- 64-65pp
이렇게 석유에 중독된 문명이 석유가 고갈되는 사태가 발생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1956년 킹 허버트가 발표한 대로 1970년 이후 미국의 석유 생산은 정점을 지나고 있고, 다른 국가들도 거의 비슷한 길을 밟고 있는 상황에서 석유 에너지 체제를 고집하는 것은 기름을 지고 불길 속에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설령 지금 한국 정부가 하고 있듯이 바다 곳곳을 쑤셔대서 새로운 천연자원의 저장소를 많이 발견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석유를 비롯한 화석에너지로 인해 가속화되는 지구 온난화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의 목숨줄을 쥐고 흔들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게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라는 점을 아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은 워낙 많은 이들의 노력에 의해 대중들에게 알려져서 새삼스러운 면도 없진 않지만, 이런 사실을 경제학의 차원에서 받아들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기존의 주류 경제학은 자연자원을 '무상의 선물'로 여기기 때문에(이에 대해서는 존 벨라미 포스터의 <<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석유 에너지의 '공급'을 변하지 않는 사실로 고정시켜 버린다. 그래서 주류 경제학에서는 자본주의의 성립과 석유 체제의 확립의 상관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틀이 없다. 석유를 이용해 달리는 자동차를 보급하기 위해 철도를 매입해 철도 노선을 없애버렸던 석유메이저들의 만행은 그저 자유로운 시장경제 활동의 하나로 인식될 뿐이니 말이다.
이제 잔치는 끝났다. 석유 메이저들이 아무리 주가를 올리기 위해 석유 매장량을 속일지라도 진실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저자가 주장하는대로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햇빛 에너지를 비롯한 재생가능 에너지로 전환해야 한다. 햇빛 에너지 뿐만이 아니다. 우리에겐 '똥'으로 바이오매스 에너지도 얻을 수 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 바로 "똥은 에너지다"라는 장인데, 저자는 이 글을 통해, 자본주의 근대 문명이 우리 사회에 이식되면서 도입된 수세식 화장실은 사실상 퇴비나 동물 사료로 쓰일 수 있는 유용한 에너지원인 '똥'을 폐기물로 인식하게 하면서 물질의 자연적 순환을 가로막는 '퇴보'의 상징이라고 말한다.(예전에 <<소금꽃 나무>>의 저자 김진숙 지도위원이 강연할 때 수세식 화장실은 초국적 자본의 개수작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러나 볏집이나 왕겨등을 같이 넣어 똥을 썩히면, 여기서 발생하는 메탄가스는 전기로 이용할 수 있고, 남는 찌꺼기는 유용한 퇴비가 된다. 나는 유럽 몇몇 나라의 사민주의적 시스템을 동경하진 않지만, 이들 나라로 부터 배울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똥'을 에너지로 활용하는 자연친화적 시스템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하루 빨리 이들 나라들 처럼 국가가 재생가능 에너지를 고가에 매입해 주는 전기매입법이 도입되어야 할텐데 말이다.
생태적 전환,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사실 기존 체제에 대한 비판과 재생에너지 체제로 전환이 중요하다는 말은 하는 것은 쉽지만, 그 길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를 말하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은 문제이다. 나야 일단 운전면허 안따기 부터 시작한다지만 이걸로만 그친다면 그냥 쇼에 불과하지 않겠나? 저자가 말했듯이, 기본적으로 재생가능 에너지 체제는 지금과 같이 한전과 국가가 주도하는 에너지 독재체제가 아니라 동네에 마련된 소규모의 발전소가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에너지 자립체제여야 한다. 제주도에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서 바다에 해저케이블을 깔아놓는 해괴망측한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 즉, 에너지 체제의 생태적 전환은 대부분의 언론이 말하는 것처럼 첨단 기술 개발 여부에 달렸다기 보다는 석유 에너지 체제를 유지하려는 거대 자본과 국가의 권력을 민중들의 운동을 통해 얼마나 약화시킬 수 있느냐에 달렸다.
그래서 저자는 자연스럽게 노동운동, 농민운동의 진로에 대해 고민한다. 그저 신사회운동, 부르주아 시민운동의 하나 쯤으로 생태운동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금융위기/생태위기의 시대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노동운동, 농민운동도 생태적 전환을 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고민되는 지점은 바로 '폭력시위'에 대한 것인데, 저자는 단호하게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폭력시위는 그만두고, 차라리 전경들 먹는 식단 재료들을 유기농으로 바꾸는 운동을 하는 것이 낫다고 잘라 말하기도 한다. 말의 뉘앙스로 봐서는 기존 운동방식을 비판하고 생태적 전환이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 든 비유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현재 농민운동, 노동운동이 폭력적 상황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조건에 대해 너무 쉽게 간과하고 보수언론과 비슷한 방식으로 일갈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가 된다.
올 해 초 민주노동당이 분당하고 진보신당이 결성될 시점에 '녹색'인사로 박승옥씨가 참여하는 문제를 두고 노동운동 진영에서 말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들의 논지를 대략 요약하면 '박승옥은 너무 우파 아니냐?'라는 거였다. 노동운동의 입장에서 생태운동에 무게중심이 가 있는 사람을 '우파'라고 지칭하는 것도 그렇고, 그 반대편에서 노동운동의 행동양식을 무조건 '폭력적이다'라는 말로 몰아세우는 것도 보기 안 좋긴 마찬가지다. 서로의 조건을 이해하면서 변화의 지점들을 찾아갈 수는 없을까? 한국사회의 생태적 전환을 위해 넘어서야할 또 하나의 벽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요. 납부서를 드리고 가겠습니다."
"웃기지 마. 그렇다면 왜 세금으로 징수하지 않지? 나중에 임의로 납부하게 하는 것 자체가 당신들 뒤가 구리다는 증거야."
"그러니까요, 임의가 아니라 의무라니까요, 국민의 의무!"
"그럼 나는 국민을 관두겠어." 아버지가 가슴을 쭉 젖히며 말했다.
"예?" 아주머니의 목이 앞으로 쑥 내밀어졌다.
"국민이기를 관두겠다고. 애초부터 원했던 일도 아니었으니까."
"...어디, 해외로 이주하시려고요?" 갑자기 목소리 톤이 낮아진다.
"내가 왜 해외에 나가? 여기 거주한 채로 국민이기를 관둘 거야."
아주머니는 할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은 채, 움직이기를 관두고 있었다.
(중략)
"그게 대체 무슨 농담이세요?" 아주머니가 당황하고 있었다.
"농담이 아냐. 오래 전부터 일본 국민을 관둘 생각이었어. 오늘이 바로 그날이야."
"우에하라 씨, 일본사람..., 맞으시죠?"
"그래. 하지만 일본사람이 반드시 일본 국민이어야 할 이유는 없어."
(중략)
"사람을 저희들 맘대로 국민으로 만들어놓고 이래저래 세금을 뜯어 간다니까. 그러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피지배층이라는 얘기야? 정말 웃기고 있어."
아버지는 아직도 고함을 치고 있었다.
위 글은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를 소개하기 위해 본문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왠지 불편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 우에하라 이치로의 행동이 1권에서야 위의 글에서 보여지듯이 적잖이 괴짜스럽고 황당한 것이긴 하지만, 2권에서는 좀 얘기가 다르지 않나? 알라딘의 책소개에는 1권이든 2권이든 모두 저런 자극적인 부분만을 인용해 사람들의 충동구매를 유도하고 있다.(물론 1권에서는 아들 지로가 친구들과 여탕 훔쳐보기를 시도하는 것, 중학생 불량배와 벌이는 스릴러 등을 통해 다양한 코미디를 선사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아니 꽤 많다!!) 내가 서평을 이렇게 까칠하게 시작하는 것은 알라딘에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고, 이 책을 통해 느낀 감상이 저렇게 웃고 넘길 수 있을 만큼 간단하거나 코믹스러운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매우 '강하게' 들어서이다. 분명 <남쪽으로 튀어>는 나에게 있어서 만큼은 엽기적인 전직 운동권 행동대장이 펼치는 시트콤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의 아들이 아버지를 조금씩 이해해가는 과정을 그린 단순 성장 소설도 아니다. 그것과 대비되는 간단한 말로 표현하고 싶은데, 어휘력이 거기까지 도달하기에는 심히 딸리는 관계로 잠시 썰을 풀어보고자 한다.
우에하라 이치로는 전직 과격파 운동권 행동대장이다. 조직 이름도 무시무시하다. '혁공동'(지금 옆에 책을 두고 있지 않아서 잘 기억은 안나지만 아마 '아시아혁명공산주의동맹'의 줄임말이다.) 난 지금껏 이렇게 무시무시한 어감을 가진 조직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뭐 이건 약간 조폭 이름 같지 않나? 그러나 그는 지금은 이제나 저제나 방바닥만 긁고 있다. 가끔씩 아들을 붙잡고 프로레슬링을 하자고 덤벼들지만 아들은 전혀 내켜하지 않는다. 직업은 프리라이터? 뭐 가끔 잡지사에 글을 기고하거나 소설 쓰기를 하는데, 소설은 출판 직전까지 갔다가 퇴짜를 맞는다. 국민연금 담당 공무원이 집에 찾아오면 저렇게 일반인들의 상식에선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얼어버리게 하거나, 아들의 수학여행비가 높게 책정된 것을 보고 학교가 여행사와 뒷돈거래를 한 의혹을 밝혀내겠다고 학교에 찾아서 교무실을 뒤엎어 놓곤 한다.
내가 잠깐 다른 이들의 블로그, 카페등을 둘러보니 이 책에 대한 감상들은 대층 이런 이치로의 개인적인 기질에 초점이 맞춰져 있더라. 그러나 이치로의 이런 기질은 1권 초반에 인물을 소개하기 위한 워밍업이고, 진짜 이야기는 2권, 진짜 남쪽으로 튀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이치로가 혁공동 시절 후배인 홍길동(지금 이름이 생각이 안나서 그러니 대충 이렇게 부르자.)을 잠시 집에 기거하게 해 주면서 일은 꼬이게 된다. 홍길동은 여전히 조직활동을 하고 있고, 조직 중앙으로부터 중대한 지령을 받고 잠시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그 지령이란 반대파 수장을 습격하는 것! 그러나 이 임무 수행은 예상치 못한 살해로 이어지고, 언론들은 이 사건을 "한물 간 운동권들의 혁명놀이"라고 조롱한다. 한 때 이름을 날리던 혁명 투사 이치로는 이 일로 인해 인생의 앙숙(??)인 공무원, 경찰, 공안들과 또 다시 지겨운 실랑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 일로 인해 그의 아들 지로는 불량배 중학생의 괴롭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제 더 이상 '혁명'을 믿지 않는, 완벽한 자유를 꿈꾸는 아나키스트 이치로는 이 사건 이후 가족들과 함께 오키나와의 작은 섬으로 떠난다. 헌데 그는 혈통이 그 지역의 유명한 반골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거의 무상으로 거의 모든 의식주를 제공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이치로에게만 주어지는 특혜라기 보다는 공동체적 삶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이 섬의 살아가는 방식인 것이다. 그러나 이치로가 이 섬에 거주하는 그 순간부터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주거권 투쟁". 본토 사람들과 결탁한 지역의 건설회사가 이치로가 기거하게 된 집 터를 중심으로 호텔을 건설하기로 하고 막무가내로 집을 철거하려 드는 것.
그런데 이 '주거권 투쟁'은 도시의 변두리에서 일어나는 숱한 분쟁중에 하나에 불과했다면 누구도 관심갖지 않을 것이겠지만, 이치로의 과격한 행동과 언행, 그리고 섬에서의 '원시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삶을 살아가려는 이들의 모습 때문에 언론에 대서특필된다. 그의 투쟁은 거의 생중계 감이었고, 한 장면 장면 마다 라이브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으로 전국으로 전파를 탄다.
물론 그의 투쟁은 명목상 패배로 끝나지만, 이들은 파이파티로마라는 또 다른 '남쪽'을 향해 다시 떠난다. '일본 국민'에서 탈퇴하고자 하는 이치로가 또 다시 진정한 자유를 찾아 떠나가는 것으로 이 소설은 끝을 맺는다.
이 쯤되면 나는 완벽한 스포일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ㅋㅋㅋㅋㅋ 그러나 같은 내용을 읽더라도 독자에 따라서 느끼는 감정과 여운들은 제각각일 것이므로, 나의 스포일링이 그닥 다른 독자들의 독서를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많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이치로의 주옥같은 멘트들에 뻑 가곤 한다.
지로, 이 세상에는 끝까지 저항해야 비로소 서서히 변화하는 것들이 있어. 노예제도나 공민권운동 같은 게 그렇지. 평등은 어느 선량한 권력자가 어느날 아침에 거저 내준 것이 아니야. 민중이 한 발 한 발 나아가며 어렵사리 쟁취해낸 것이지. 누군가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아. 아버지는 그중 한 사람이다. 알겠냐? (2권 245p)
지로, 전에도 말했지만 아버지를 따라하지 마라. 아버지는 약간 극단적이거든. 하지만 비겁한 어른은 되지 마. 제 이익만으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은 되지 말라고.
이건 아니다 싶을 때는 철저히 싸워. 져도 좋으니까 싸워. 남하고 달라도 괜찮아. 고독을 두려워하지 마라. 이해해주는 사람은 반드시 있어. (2권 288p)
진보넷 블로그를 제 집 드나들듯이 하는 많은 동무들께서는 식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 멘트들이지만, 오늘날 같이 불의를 보면 엉덩이가 무거워지는 사람들에게는 피가되고 살이되는 말들이 아니겠는가? 정말 사람들이 이런 걸 보고 느끼는게 있어야 될텐데 말이다....
하지만 왠지 나는 이치로의 행동을 보면서 씁슬해 지기도 하고, 답답해지기도 한다.
우익과는 요란하게 한바탕 벌렸다. 가두용 차량을 집 가까이 들이대고
"야스쿠니 신사에 불을 지르겠다니 무슨 망언이냐!"라고 마이크로 꽥꽥거리는 얼룩덜룩한 군복 차림의 아저씨에게 양동이로 물을 퍼부은 것이다,
"대기업 건설사에 빌붙어서 먹고사는 이 우익 놈들! 너희는 야스쿠니를 놓고 떠들 자격이 없어!"
당장 몸으로 들이박는 싸움이 벌어져서 경찰이 달려와 필사적으로 떼어놓았다. 결국 폭력은 쓰지 않겠다는 규칙을 정한 끝에 메스컴이 지켜보는 앞에서 일대 설전을 펼치게 되었는데 무슨 영문인지 삼십여 분 뒤에는 서로 어깨를 두드려 주는 사이가 되었다.
"우에하라씨, 당신은 어떻든 단독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니까 참 대단해"
우익은 마지막에는 그런 말을 남기고 떠났다. 주의나 주장의 차이보다 '폭력적 성향의 연대감'이라는 공감대가 더 컸던 것 같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동질의 인종을 구분해내는구나, 라고 지로는 생각했다. (2권 222p)
박노자 교수가 말했듯이,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라이벌인 김일성과 박정희가 아이러니하게도 닮은꼴인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동시에 개인적인 아나키즘, 돌출적 행위가 우익과 폭력적 성향으로 수렴하는 것도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은 아닐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언론들은 투쟁 그 자체보다는 이치로의 개인적인 기질, 라이프 스타일 따위에만 관심을 갖게 된다. 결국 언론들은 본래 취재 목적이었던 이 섬의 환경단체 취재는 아예 쌩까버리고, 마치 스포츠 중계하듯이 이치로의 투쟁, 아니 싸움(나는 투쟁과 싸움은 전혀 다른 뜻을 가진 언어라고 생각한다.)을 보도한다.
아버지의 인터뷰는 열기가 대단해서 그 큰 목소리가 한참 떨어진 지로 일행의 귀에도 들어왔다
"그 자들이 우타키를 부순다면 나는 그 답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불을 질러주지. 일이 그렇게 되면 죄다 케이티 책임이오. 그만큼 우타키는 우리야에야마 사람들의 정신적 뿌리 같은 것이야!"
무슨 끔찍한 소리를 하는 건가. 이러다가 또 다시 공안이 들이닥치는 건 아닐가. 리포터 까지 곁에서 아버지를 슬슬 부채질하고 있었다
"우에하라 씨의 삶을 반권력적인'슬로 라이프'의 실천으로 생각해도 될까요?"
"흠. 그렇지 마침 좋은 말을 하시는군.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된 슬로 라이프요"
분명 이것으로 세무서도 적으로 만들었다. (2권 204p)
물론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 것'이 그야말로 참된 슬로 라이프라는 데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치로는 이런 자극적인 발언을 통해 자기 혼자 스타가 되고, 호텔 건설 반대 운동을 언론의 좋은 상품화 꺼리를 제공해 줬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걸까? 이치로가 이런 상황을 즐기고 있다고 볼 순 없지만,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을 자기의 (오로지 개인의) 저항적 행동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이치로가 이사오기 전부터 반대운동을 이끌어 오던 지역의 환경단체는 분통을 터트린다. 이치로가 운동을 이용해 먹는다고 했던가? 배신자라고 했던가? 여하튼...
그런데 독자된 입장에서 상황이 또 애매한게, 딱히 이 환경단체의 편을 들어주고 싶은 생각은 안 든다는 것이다. 이치로가 이 빈 집에 '입주'하자마자, 환경단체 간부들이 찾아와 행동대장을 맡아줄 것은 간청한다. 그러나 이치로가 이들을 단박에 퇴짜 놓으면서 하는 말, "당신들은 운동을 위한 운동을 하고 있어. 공산권이 망하고 자기 구실 찾기 위해 끌어들인게 환경이고 인종이고 뭐 그런 것들이지. 사람들은 개인단위로 자유로운 것이 진짜 자유로운 거야"
사실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나에겐 이 부분이 가장 가슴아프고도 고민스럽게 하는 구절이었다. 나를 포함해 소위 '운동권' 이라는 사람들에게, 과연 진정성이라는 것이 있는가? 나는 그들이 꼭 이치로처럼 아나키스트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운동을 통해 또 다른 권력의 성지를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운동'이 만들어주는 도덕성의 외피 속에 숨어, 자신들의 왜곡된 욕망을 투사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되물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권력의 새로운 수임자가 되는 것을 꿈꾸는 것을 넘어, 이치로처럼 '남쪽'을 지향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말이다. 체 게바라가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지니자"라고 한 것에서 이치로가 anti-리얼리스트가 되면서 과잉된 불가능한 꿈만을 꾸었다면, 지금의 운동권, 아니 운동'꾼'들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가능한 꿈, 아니 가능한 '계획'만을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나는 여기서 최근의 두 가지 사건을 떠올리게 되었는데 하나는 얼마전 국군의 날 행사에서 알몸으로 '군대폐지' 퍼포먼스를 벌였던 강의석 군이고, 또 하나는 공금횡령 스캔들로 시민운동의 도덕성에 먹칠을 한 환경운동연합이다. 진보운동을 하는 사람치고 강의석의 의도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많은 이들이 강 군에게 씁쓸한 마음으로 훈계를 했던 이유는 '운동'은 '함께 꾸는 꿈'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환경운동연합 사건이 안타까운 이유는 '환경'과 '생태'라는 모두의 꿈을 권력의 고지로 향하는 사다리로 남용했던 이들의 결말이 안겨주는 씁쓸함 때문이다.
<남쪽으로 튀어>는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외로운 줄타리를 해야 하는 우리에게 숱한 고민을 안겨 줄 수 밖에 없는 소설이다. 그래서 나는 나중에라도 이치로가 이렇게 말해주길 바란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자신만의 파이파티로마를 지니자."라고 말이다. 그래야 조금 위안이 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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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잘~ 읽었습니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