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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홍석만 글...

[논설] 신(新)브레튼우즈 체제라는 신기루

과잉자본 청산없이 국제금융질서 구축 불가능

홍석만(논설위원)  / 2008년11월24일 18시07분

최근 경제위기 상황이 확산되자 국제적으로 신(新)브레튼우즈 체제가 얘기되고 있다. 신브레튼우즈 체제에 대한 논의는 첫째, 국가간 자본이동에 대한 규제강화. 둘째, 금융기관의 자본건전성 수단으로 사용됐던 BIS비율, 바젤1·2 등이 최근 대형 은행들의 도산에 따라 이를 대체할 새로운 관리기준의 마련. 셋째, IMF와 세계은행의 기능 재편(강화) 등으로 요약된다.

 

그런데, 브레튼우즈체제를 대체하는 개념으로서 신브레튼우즈체제는 자본이동 규제와 자본감독 기능의 강화를 초월하는 개념이다. 미국과 달러중심의 금융질서인 브레튼우즈체제를 대체하는 새로운 국제금융질서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신브레튼우즈체제라고 명명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 이러한 신브레튼우즈체제는 확립될 수 있을까?

 

미국발 금융위기가 발발하자 각국은 꽤 신속하게 공동대응 했다. 주요국 중앙은행은 동시에 금리인하를 단행했고 통화스와프를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지난 15일 워싱턴에서 G20 정상회담을 열고 자유무역에 대한 옹호, 금융규제의 확대에 대한 각국의 공감대를 확인하였다. 이어 23일 폐막한 APEC 정상회담에서도 ‘세계경제에 관한 정상성명’이라는 특별성명을 채택했다. “향후 12개월 내 서비스와 상품 무역 및 투자에서 새로운 장벽을 추가하는 조치 등을 자제키로 한다”며 보호주의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또 G20 정상회의를 지지하며, 금융시장에 대한 더 효과적인 규제와 감독 수단이 마련돼야 한다는 데도 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이런 각국 정상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브레튼우즈 체제는 요원해 보인다. 여러 문구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없다. 문구의 거품을 빼고나면 미국 등 주요국이 보호무역주의로 돌아설 것을 우려해서 (최소 1년간이라도) 자유무역을 유지해 달라는 호소(!)와 금융규제에 대한 ‘공감대’ 뿐이다.

 

이런 상황을 미국과 유럽 그리고 신흥시장국의 힘겨루기 정도로 상황을 왜곡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미국이 양보하면 새로운 국제금융질서가 확립될 것처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브레튼우즈 체제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1929년 대공황이 발발하고 금본위제도가 붕괴했다. 2차대전 말기 1944년 미국 브레튼 우즈에서 주요국가들이 모여 순금 1온스=35달러로 금태환을 유지하고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데 합의했다. 그리고 미국 달러에 각국 통화를 고정시킨 고정환율제도를 형성하고 IMF와 세계은행을 설립하여 국제금융질서를 확립해 나가게 되었다. 이것이 브레튼우즈 체제다.

 

이 브레튼우즈 체제는 무엇보다 2차 세계대전 말미에 특수한 상황에서 형성된 국제금융질서다. 1929년 이후 10년간의 대불황이 세계대전으로 발전하였다. 최근 폴 크루그만 교수가 인정했듯이 루스벨트의 공황탈출은 뉴딜로 성공한 정책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과 전후 재건과정을 통해서 극복되었다. 2차 대정 중에 미국은 대부분의 전쟁 군수품을 생산하였고 이를 금으로 거래하며 유럽에 군수물자를 공급하였다. 그 결과 미국은 전체 금 시장의 72%를 보유하게 되었다.

 

전쟁으로 파괴된 생산과 자본스톡의 엄청난 축소 그리고 미국의 금 보유를 바탕으로 한 기축통화로의 인정 속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지금 신브레튼우즈체제를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브레튼우즈 체제가 형성될 당시와 단 하나의 조건이라도 만족하는 것이 있는가?

 

전례없는 위기만큼이나 전례없이 확장된 파생금융상품은 정확히 얼마인지도 모른다. 추측키로 파생금융상품 총액은 약 6백조 달러에 달한다. 전세계 총GDP의 10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신용부도스와프(CDS)만 하더라도 90조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이러한 엄청난 규모의 자본을 어느천년에 ‘금융규제’만으로 청산시켜 나갈 수 있는가? 2차대전후 세계경제가 수 십배 넘게 확대되었는데 미국이건 유럽이건 중국이건 그 어느 나라가 과연 금태환을 조건으로 기축통화체제를 구축할 수 있다는 말인가? 또 금태환같은 조건없이 화폐만을 믿고 기축통화로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60년전 브레튼우즈 체제 논의당시 케인스 주장대로 세계중앙은행을 만들어 단일통화체제로 개편할 것인가? 이 구상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세계중앙은행은 ‘상호 합의’ 하에 통화를 어떻게 분배할 수 있을까?

 

현재 과잉자본과 과잉생산이 일정규모 이하로 청산되지 않는 한, 자본이동의 규제를 강화할 수는 있어도 새로운 국제금융질서는 꿈도 꿀 수 없다. 이 청산은 각국별로 노동자에 대한 공격임과 동시에, 국가 간에는 총성없는 전쟁과도 같은 대결이다. 게다가 지금은 불황의 초입일 뿐이며 이 대결은 상당기간 벌어질 전망이다. 보호무역에 대한 끊임없는 우려는 거꾸로 이런 상황에 대한 (암울한) 암시적 전망에 다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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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 하나. (백승욱)

 

"침몰하는 배의 마스트 꼭대기에 앉아서 우리만은 안전하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생존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 백승욱,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 中 "옮긴이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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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서평] 사이버 맑스 - 닉 다이어 위데포드



닉 다이어-위데포드 저/신승철, 이현 역 | 이후 | 2003년 6월

책소개

토플러의 『제3의 물결』로 대변되는 탈산업주의 미래학은 '예견'이 아니다.
닉 다이어-위데포드는 정보혁명이 낳은 놀라운 성과를 인정한다. 그렇지만 정보혁명이 유토피아와 다름없는 지평을 열어줄 것이라는 탈산업주의 미래학의 주장에는 이의를 제기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탈산업주의 미래학은 자본주의에 맞서는 대중들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한 '계획'이다. 현재의 경향에서 자연스럽게 추론되지 않는 미래의 모습을 단언하는 미래학은 그저 자본주의가 원하는 미래의 청사진을 보여주는 미래학일 뿐이기 때문이다.

맑스주의 미래학은 자본주의가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 적이 없다.
맑스주의자들도 정보혁명 이론가들과 마찬가지로 기술혁신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버릴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맑스주의자들은 첨단기술과 지식,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계가 지닌 지배의 잠재력과 해방의 잠재력을 노동과 자본의 투쟁에, 그리고 또 다른 종류의 혁명인 코뮤니즘 혁명에 연관시킨다는 점에서 정보혁명 이론가들과 구별된다. 정보혁명 이론가들과는 달리, 맑스주의자들은 정보혁명이 야기한 '현실의 운동'을 좇아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본이 주축이 되는 '타인들의 전지구화'가 아니라, 우리가 주축이 되는 또 다른 형태의 전지구화로 나아가는 길을 찾아 왔다. 즉, 맑스주의 미래학은 자본주의 자체에서 벗어나는 길을 발견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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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를 YES24에서 퍼왔는데 이 책소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빼놓은 것 같다. 이책의 2장 '혁명' 은 앨빈 토플러, 다니엘 벨, 프랜시스 후쿠야마로 대표되는 정보혁명가들의 주장들을 싣는다. 이른바 역사의 종언이라는 소리를 지껄여대며 이 시대는 탈산업사회로서 산업사회에서의 계급투쟁은 소멸됐으며, 맑시스트들이 떠드는 계급중심성, 토대-상부구조론은 이제 한물 간 옛말이라고 주장한다. 정보기술은 인간을 고된 육체적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3장 '맑스주의들' 에서는 이에 대한 맑시스트들의 반론을 싣는다. 에르네스트 만델과 같이 자본주의를 필연적으로 패배시킴으로써 절정에 다다를 변증법적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과학적 사회주의적 입장,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같이 기술이 자본주의적 지배의 도구로 보는 비판이론의 주장(저자는 이들을 네오러다이트라고 명명한다.), 기술의 중재를 통해서 노동과 자본이 서로 화해할 가능성을 내다보는 포스트포드주의. 그러나 저자는 이장의 막판에 가서 이 세가지 주장도 첨단기술 자본주의에서의 투쟁에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음을 역설한다.
이어지는 장을 통해 저자가 옹호하는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적 입장이 드러난다. 안토니오 네그리같은 이탈리아 아우토노미아 들의 문헌을 주로 인용하면서 자본주의가 그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서 첨단기술을 발전시키는 측면이 있는 반면, 역으로 그에 대한 저항투쟁의 가능성 또한 첨단기술이 제공한다는 것이다.
 
현준이형이 준책인데 현준이형이 준 책중에 유일하게 제대로 읽은 책이다. ㅡㅡ;; 그 이유는 그나마 이 책이 젤 쉽기 때문이었다. ㅎㅎ
 
근데 생각해 보면 저자가 주장하는 자율주의도 별거 없는것 같다. 얼마전에 읽었던 킴무디의 '신자유주의와 세계의 노동자'(아마 영문 책 제목은 Workers in Lean World 인듯...) 에서 주장하는 사회운동적 노조주의하고 하나도 다를게 없다.(이 책의 저자도 킴무디의 이 책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그 내용을 옹호하고 있다.)
 
하여튼 지식인도 별거 아니라니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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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서평]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 공지영

공지영 저 | 풀빛 | 1989년 12월 초판 발행
 
책소개
80년대라는 특별한 시기에 20대를 맞아 '정의'라는, 그 추상적이고도 지순한 이름을 위해 온몸을 던졌던 젊은이들의 이야기. 시대와 역사를 거슬러 올라야 했던 청춘의 방황이 얼마나 처절하고 힘겨웠던가를 드러냄으로써 그 '방황' 속에서 일구어내는 어둠 저편의 내일은 또 얼만큼 아름답고 값진 것인가를 이 소설은 역설적으로 이야기한다.
 
작가 소개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8년 〈창작과 비평〉에 단편 〈동트는 새벽〉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그는 시대와 사회의 모순을 개인의 삶 속으로 수용하면서 진지하고 치열하게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모색하는 소설들로 주목받아 왔다.

사회 변혁이라는 거대 명제 앞에서 고뇌하던 80년대 청춘들의 삶을 이야기한 장편소설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와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시작》을 비롯해 여성 문제를 90년대 한국 사회의 중요한 쟁점으로 끌어올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착한 여자》, 《봉순이 언니》 등을 발표하며 9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잡았다. 이밖에도 작품집 《인간에 대한 예의》,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와 산문집 《상처 없는 영혼》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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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간 공지영 소설에 매료되어 공지영의 초기작품인 "더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까지 읽게 되었다. 그런데 기대했던 것 만큼 재밌지는 않은것 같다.
 
이 소설에서 민수라는 여자는 흡사 모래시계에서 고현정을 보는 것같다.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나서 명문대에 입학하고 그리고 운동써클에 들어가 사회와 역사의 모순에 눈을 떠 데모질에 나서고... 짭새들에게 잡히면 아버지 빽으로 훈방되고... 여기에 적절한 삼각관계 연예까지... 하지만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방황'이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다 방황하고 있다. 열성적인 운동꾼이었던 인경은 돈많은 남자와 결혼하려고 하면서도 옛 애인인 지섭과 그와 같이 했던 치열했던 고민했던 시간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지섭은 군대를 제대했지만, 인경은 다른 남자와 결혼 하려 하고 주위에 수많은 동료들은 소리없이 하나둘씩 어디론가 끌려가선 주검으로 돌아오고, 몰락한 집안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가족들의 모습에 지쳐가고 있다. 그리고 민수를 비롯한 야학을 하고 있는 학생들은 "넌 기꺼이 민중이 될 수 있겠니? 기꺼이 노동자가 될 수 있어?" 라는 어이없는 선민의식적인 고민을 털어놓는다...
 
공지영의 초기작품이 잘 다듬어 지지 않아서 일까? 인물들은 계속해서 푸념만 늘어놓는다. 술마시고 토악질을 해가며 치열하게 문제의식을 쌓아가긴 하지만...
 
민수의 마지막 편지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그러나 나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나의 방황은 이해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결코 아름답지 않다고. 이 어두운 죽음의 시대에 결코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고."

그래... 우리에게 방황은 더이상 미덕이 아니다. 나에게도 내 방황이 아름답길 바라던 그런 시기는 이제 없다. 나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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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서평] 신자유주의적 '반격' 하에서 핵가족과 '가족의 위기' - 이미경




이미경 지음 / 공감 / 1999년 11월


저자소개
이미경 - 1965년 서울 출생. 84-89년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에서 수학하고 1994년 한신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과천연구실 연구원으로 있다.

 
목차

서문

신자유주의적 '반격'과 페미니즘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
페니미즘의 전통
- 자유주의 페니미즘/급진 페미니즘과 '포스트페미니즘'
성적차이의 페미니즘 : 또 다른 전통을 찾아서

아메리카 핵가족의 역사
핵가족의 전사
핵가족의 형성
- 가족임금과 국가정책/성혁명/핵가족의 황금기 : 1950년대
'가족의 위기'

남한에서의 핵가족과 '가족의 위기'
핵가족 논쟁
핵가족의 변형
- 가족형태/가족주의 이데올로기
'가족의 위기'
여성운동에 대한 반성

참고문헌

 
본문읽기
서문
서문

아메리카에서 '가족의 가치'라는 정치적 켐페인이 출현한 것은 아메리카 자본주의의 위기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1970년대였다. 이후 친가족 운동은 정치적 켐페인에 그친 것이 아니라 1080년대 에는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으러 자리잡았고, 1990년대에는 신자유주의를 보츙하는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았다.

1992년 아메리카 대통령 선거전은 본격적인 가족 논쟁의 전장이 되었다. 경제문제와 윤리문제라는 피상적인 대립구도 속에서 가족의 가치는 모든 정치적 쟁점에 우선하는 '새로운 합의'로 주창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합의에 의해 옹호된 기족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아이'로 이루어진 가족이라는 이상한 조합이었다. 이러한 가족 모델이 실재로 어떤 것인지에 대한 역사적 고찰은 사실 상 불가능하였다.

왜냐하면 그러한 가족은 역사상 존재해본적이 없는 구조와 가치의 우스꽝스러운 조합이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에서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어떤 가족 형태도 이와 유사한 것은 없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합의가 주창하는 가족 모델은 식민개척기의 확대 가족으로 해석도기도 하였고, 전형적인 근대의 핵가족으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아메리카의 여성학자인 스테파니 쿤츠는 신자유주의적 가족 논쟁에 대한 반론을 가족에서 찾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가족 논쟁의 투사적 기원은 아메리카적 핵가족이었다. 아메리카적 핵가족은 세계경제의 헤게모니적 국가에 적합한 노동력 재생산 제도로서 역사적으로 특수한 두 구성요소를 갖고 있었다. 핵가족의 구성요소 중에서 그 물질적 토대로서 가족 임금은 1970년대 불황이후 실질적으로 해체되고 있었다.

그리고 핵가족의 이데올로기적 토대로서 1차 성혁명은 1920년대 진행된 구애 구조의 전환에서 유래하는데, 1960년대 이후 진행된 2차 성혁명은 핵 가족의 가치를 부인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아메리카적 핵가족은 물질적으로도 이데올로기적으로도 해체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도 가족의 가치를 옹호하는 상황은 매우 위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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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대전에서 사 보려고 시내에 있는 대형 서점을 다 뒤졌는데도... 없었다. 하긴 그 서점들에 가서 도서검색대에서 출판사명란에 "공감" 이라고 쳐도 한 5개 정도 목록에 나왔나? 그중에 3개 정도가 재고가 '0'이라고 나왔으니... 기대를 안하는게 좋지...
 
그래서 저번에 서울 올라갔을때 논장에서 사고야 말았다. 책 두께도 면도날처럼 얇고 글씨도 큼직큼직해서 읽기 좋다. 근데 100페이지 밖에 안되는 책이 6000원이나 받아 먹다니.. ㅡㅡ;;
 
이 책에서 상정하고 있는 아메리카적 핵가족이라는 것... 한국적 상황은 나름대로 특수한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상당히 신선한 내용이었다. 첫장에서 설명하는 페미니즘 전통에 관한 생소한 용어때문에 애를 좀 먹긴 했지만...
 
포스트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봐야 겠다. 뭔지 도대체...
 
역시 가족임금제... 근데 생계부양자에게 주어지는 가족임금이라는 것도 그 가족을 부양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부족한 임금임에도 가족임금제에 덧씌워진 이데올로기가 엄청나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 외부에서 공적영역을 통해 지원되던 안정망도 신자유주의시기에 그 기반이 무너지고 나자 그 모든 책임을 해체되고 있는 핵가족(독신가정, 한부모가정 등등...)에 전가하는 모순들...
 
가장 맘에 드는 부분은 마지막 부분의 '여성 운동에 대한 반성'이다. 남한 페미니즘의 성격을 규정한것은 1973년 시작된 가족법 개정운동 이었는데, 이것은 호주제 폐지, 동성동본불혼의 폐지, 친권 행사에서 부모의 동등한 권리... 등을 주장한 운동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남한 페미니즘이 가족법 개정이라는 쟁점에 매몰되어 있었다는것. 이런 문제점은 이후 남한 여성 운동에서 단일 사안 중심의 투쟁에 매몰되는 경향을 낳았다는 것. 이런식의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은 이후 10대 미혼 여성 노동자를 극심하게 탄압하는 가부장적 노동 구조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고 한다...
 
절대 동감이다. 지난번에 철학입문 레포트때문에 정정헌을 읽은 적이 있는데 '페미니즘에 대한 일반적 편견'에 대한 반박을 하는 글이 있었다. 그 글의 필자는 페미니즘 운동이 다른 부문운동들과 연계해서 변혁적 관점을 가지지 않아도 페미니즘 운동 하나 만으로도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 생각 때문에 위와 같은꼴이 났겠지...
 
요즘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 인가 하는 단체에서 여성의원 102명 당선운동하는 것도 이해가 안간다. 그여자들이 국회의원되면 여성해방 되나?
 
하여튼 이해가 안간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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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서평]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 박노자



박노자 저 | 한겨레신문사 | 2002년 06월


저자소개

본명 '블라디미르 티호노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에서 태어났다. 한국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영화 <춘향전>을 보고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동방학부 한국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이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고대 한국의 가야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러시아 국립 인문대학교 강사를 거쳐 학생과 강사의 신분으로 한국에서 대학 생활을 보냈던 그는 '박노자'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귀화한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한국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세계사를 보는 거시적인 혜안 속에서 치열하게 인문학적 성찰의 삶을 살아온 그는 <당신들의 대한민국>,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등의 저서를 통해 '토종' 한국인보다 진한 한국에 대한 애정으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해주었다.



책소개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통해 한국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했던 박노자가 두번째 책을 펴냈다.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태생으로 2001년 한국인으로 귀화한 박노자는 한국 사회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과 날카로운 논리로 지식인들은 물론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 화제를 불러 일으킨 바 있다.

박노자는 이번 책을 통해 북유럽식 사회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노르웨이 사회의 이모 저모를 소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박노자가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상하의 질서와 복종을 강조하는 우리의 일반적인 문화와 달리, 다양성의 존중과 소박한 삶을 생활의 주요 철칙으로 여기고 있는 노르웨이 사람들의 평등한 인간 관계다. 특히 외국 매춘부들의 인권까지 지식인들의 주요 의제가 되고 있는 지식인 사회의 선진성과 교육, 병역, 인권 등 사회 전반에 폭넓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박노자는 북유럽 사회에 비추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되돌아보는데 그치지 않는다. 외견상 선진적으로 보이는 그들의 이면에 존재하는 제3세계에 대한 차별, 인종주의와 극우 민족주의의 발호 등을 예리하게 포착해 내면서 평화로운 일상에 젖은 그들보다 모순과 부조리를 뛰어넘고자 하는 우리에게 오히려 더 큰 희망이 있음을 역설한다.




목차

1부 또 다른 세계 북유럽
   북유럽을 가다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2부 과연 그들은 건강한가
   유럽사회의 이면
   제3세계에 대한 이중 잣대
   인종차별과 민족주의

3부 반폭력 평화를 위하여
   악의 씨앗, 폭력에 반대한다
   테러리즘을 보는 또다른 시각
   양심의 권리가 더 신성하다
   폭력을 거부하는 마음은 인간의 동심이자 본심이다

- 보론 : 좌파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단상-노르웨이, 유럽,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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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빌려온 정말 재미없게 생긴 두권의 책(마르크스주의와 공황론, 자본론 연구)을 뒤로하고 내가 존경해 마지 않는 박노자 선생님의 책을 먼저 읽었다. 역시 박선생님은 한번도 나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다. 정말 감동 감동★☆♥♡♣♧

흔히 우리가 서양 역사를 볼때 주로 영국이나 독일 프랑스를 중심으로 보곤 한다. 영국은 초기 자본주의에서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던 나라로서, 독일은 악명높은 파시즘 히틀러 때문에, 프랑스는 현대 시민사회를 추동한 각종 혁명이 있었던 나라로서...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노르웨이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그냥 추상적으로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정도로??

이 책만 보면 노르웨이는 정말 세계 최고의 인권, 복지, 평등, 자유의 나라이다. 왜일까? 그건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기" 때문이다. 좌우, 그러니까 사상과 신념의 차이는 인정하고 그래서 보수정당도 있고, 사회주의 좌익당도 있지만, 상하관계, 체통과 체면, 권위를 중요시하지 않는 노르웨이 사회의 분위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공산당 기관지에 보조금을 지급할 정도로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고, 시위와 데모가 일상적인 사회생활일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교육장소가 되기도 한다. 또 누가 학생이고 누가 교수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로 자유분방하고 민주적이며, 학생이 교수의 수업방식에 대해 실랄하게 비판을 해도 결코 피해를 받지 않는다.

이 책의 주제는 매우 다양하다. 노르웨이 사회의 장점, 또는 그 이면일수도 있고, 이를 통해 고찰 해 볼 수 있는 민족주의, 인종주의, 그리고 전쟁, 평화, 폭력, 양심적 병역거부, 여성문제 등등등....

박노자의 책을 보면 일관되게 등장하는 것이 있다. 바로 서구의 사회진화론.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논리를 강조하는 사회진화론을 바탕으로 근대화를 이룬 서구 사회는 그 논리를 그대로 제3세계 아시아, 중동 등에 이식하려 한다. 그러면 꼭 그는 한국 근대사를 집고 넘어간다. 윤치호, 서재필, 이승만등 개화파 근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근대화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들은 서구의 사회진화론을 그대로 배껴와선 한국 민중들을 핍박하고 압박하는데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런 주장은 당연히 친일, 친미적으로 흐를 수 밖에 없고, 우리 고유 문화의 가치들을 너무나도 쉽게 용도 폐기 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그동안 내가 생각하던 '전통문화의 보수성'이란 생각도 조금은 재고 해 봐야 할 것 같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내용이 있어 소개하겠다. 노르웨이의 의사인 길베르트와 후숨은 아프간 탈레반 테러리스트들의 행위에도 나름의 명분이 있다라는 주장을 해서 노르웨이에서 이슈화 된적이 있었다. 그들은 이런 예를 든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무자비하게 침략한 1982년에 나는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의료봉사를 했다. 그때 환자 중에 '타리크'라는 레바논 소년이 있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그 아이의 부모와 가족, 친척과 친구들을 섬멸해 버렸다. 타리크는 이 세상에 혼자 남았다. 수술을 여러 번 거듭한 끝에 그를 어느 정도 치료했지만 끝내 오른손은 못 쓰게 됐다. 그런데 그 애는 말도 안 하고 음식도 안먹었다. 완전히 절망한 것이다. 어느날 나는 그에게 의욕을 주기 위해 '왼손으로 총을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그 아니는 그야말로 살아났다. 나는 그때 그 아이가 싸움에 몰두하다 죽으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아이에게 '싸우지 말라'난 말을 할 수 있는가? 싸우는 것이 불가능했다면, 그 아이는 죽고 말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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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서평] 닭털 같은 나날 - 류진운


류진운 (劉震雲) - 1958년 중국 하남성 연진현에서 태어나, 1982년 북경대학 중문과를 졸업했다. 1982년 농민일보에 입사해 기자 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작품집으로 <닭털 같은 나날>, <고향천하황하>, <핸드폰>, <관리들 만세> 등이 있다. '1942년을 돌아보다'는 2004년 현재 미국에서 영화로 제작 중이다.

죽의 장막이 걷힌지 오래라 해도, 중국 인민들의 삶은 아직 우리에게 낯설다. 그곳 평범한 사람들의 현재는 어떠할까? 현대 중국 문인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평가받는 류진운의 소설을 통해 슬쩍 엿보자. 우리 작가 황석영이 '대단한 작가다! 문학이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라고 극찬까지 했으니.

(우리 나라나 중국이나) 소시민의 삶이란 게 뭐 그렇다. 아침 일찍 일어나 두부를 사기 위해 줄을 서지만, 그러다가도 통근버스가 오면 늦지 않기 위해 버스에 올라타야 한다. 시간이 모자라 냉장고에 넣어두지 못해 상한 두부는 부부싸움의 실마리가 되고, 한번 시작된 싸움은 들불처럼 아내의 직장문제, 아이의 유치원 문제, 가정부 문제로 번져나간다. 아아, 상한 두부 한 근이 이렇게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다니. 정말 울고 싶어진다.

아이가 생기니 생활은 점점 더 복잡해진다. 조금 더 큰 집으로 옮기고 매일매일 출퇴근하고 먹고 마시고 싸고. 말이 쉽지 하나도 그냥 되는게 없다. 돈이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적절히 뇌물도 써야 하고 연줄도 타야 하고 남을 이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소시민으로 산다는 건, 뭐 그러그렇게 남들처럼 흘러 가는 것일게다.

물론 임씨 부부도 대학을 졸업할 무렵까지는 꿈이 있었다. 하지만 사회적, 정치적 이상향을 꿈꾸던 청년은 무능한 남편과 아버지가 되었고, 조용하고 시적인 아가씨는 잔소리쟁이에 밤에는 몰래 수돗물을 훔치는 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하루종일 업무에 시달리고 집안일을 하다보면, 저녁이 되어도 책 한장 뒤적이고 싶지 않다. 꿈이나 이상 따위, 철부지 때나 품을 수 있는 사치인 것이다. 아니 그런가?

똑같은 얼굴, 개미떼 같은 군중이 되어간다. 오랜만에 찾아온 초등학교 은사님께 저녁대접도 하지 못하고 돌려보내야 한다. 훗날 선생님의 부고를 듣고 눈물 흘리지만 어쩌랴. 산 사람에겐 죽은 이와의 이별보단 당장 눈앞에 쌓여있는 배추더미가 더 절실한 것을. 우리들 곁에 있는 건 꿈도 아니고 이상도 아니고 바로 '삶', '생활'인 것이다.

그렇게 닭털 같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부수수 흩날리는 하루하루가 흘러간다. 딱딱하면서도 재치있는 문체로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는 삶의 순간, 생활의 단면을 재미있게 그려낸 소설집이다. 문학적 수식은 적지만, 생활과 인간-그 자체에 집중한 중국 신사실주의 문학의 대표작이다.
- 알라딘 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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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에 읽은 소설책이다... 풀무질 일꾼 은종복님께서 추천해 주신 책.... 부라보~ 재밌다. 짱짱 재밌다....

3편의 중편소설이 모아져 있는데, '닭털같은 나날'은 급변하는 중국사회의 소시민의 일상을 통해 우리 삶의 칙칙함, 지독한 속물스러움을 정말 능청맞게도 잘 그려냈다.
'관리들 만세'는 중국 공산당(이건 분명히 '공산주의자'이고 싶은 족속들이 만든 어설픈 피조물이 분명하겠지만...)의 관료주의의 구린내 나는 작태를 껍데기 하나 남김없이 다 드러냈다.
'1942년을 돌아보다'는 별로 재미는 없었는데... 충격적인 사실들을 잘 모아놨다. 장개석 집권 당시 중국이 홍수로 인한 중국 인민들의 죽음과 고통을 얼마나 무참히 깔아 뭉개고 있는지를 어떠한 다큐멘타리 보다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꼭한번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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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서평]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 박완서

 

 

박완서 - 1931년 경기도 개풍 출생. 숙명여고 졸업,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학업 중단. 1970년「여성동아」장편소설 공모에「나목」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작품으로는 단편집 <엄마의 말뚝>, <꽃을 찾아서>, <저문 날의 삽화>, <한 말씀만 하소서>, <너무도 쓸쓸한 당신> 등이 있고, 장편소설 <휘청거리는 오후>, <서 있는 여자>,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미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이 있다.

또한 동화집 <부숭이의 땅힘>, 수필집으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여자와 남자가 있는 풍경>, <살아있는 날의 소망>,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어른노릇 사람노릇>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1980), 이상문학상(1981), 대한민국문학상(1990), 이산문학상(1991), 동인문학상(1994), 대산문학상(1997), 만해문학상(1999)등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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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때인가... 박완서의 "아주 오래된 농담", "꿈꾸는 인큐베이터"란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주 오래된 농담이야 좀 느낌없이 읽었지만, 꿈꾸는 인큐베이터는 손가락이 덜덜 떨리게 만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글이었다. '낙태'를 경험하는 한 여성이 겪게되는 갈등과 고통, 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뤄지는 생명에 대한 단절... 이것이 얼마나 한 개인의 삶의 곡선에 상처를 입히는지...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는 "꿈꾸는 인큐베이터"의 연장선상에 있는 소설이다. (출판연도는 "그대 아직도..."가 좀 빠르긴 하지만 어쨌든...) 상처한 한 남자 혁주와 이혼한 여자 문경의 만남. 그리고 그들간의 불행을 암시하는 듯한 정사. 여자는 임신까지 했지만 남자는 매몰차게 외면하고 돈많고 순종적인 여성과 재혼한다. 그러나 재혼한 여자는 매번 딸만 낳고 결국엔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까지 하게 되어 더이상 자식을 낳을 수 없다. 그런데 혁주와 그의 어머니는 문경이 끝내 고집을 피워 낳은 자식이 아들임을 알고 다시 문경에게 접근하는데...

 

"그 애에게 거는 저의 가장 찬란한 꿈이 뭔줄 아세요?  남자로 태어났으면 마땅히 여자를 이용하고 짓밟고 능멸해도 된다는 그 천부의 권리로부터 자유로운 신종 남자로 키우는 거죠. 그 꿈을 위해서도 그 애는 제가 키우고 싶어요." - 16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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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서평] 모순 - 양귀자

 


 

이 책은 1995년 <천년의 사랑> 이후 3년만에 펴낸 전작 장편으로 작가 특유의 속도감 넘치는 문체와 인생을 통찰하는 웅숭 깊은 시선이 빛을 발한다. 열 일곱 개로 나뉘어진 각 장마다 긴장감을 제공하면서 활달한 걸음으로 `삶의 모순`을 향해 달려가는 소설 속의 주인공은 스물 다섯 살의 젊은 여성 `안진진`이다.

어느 날 아침 문득, `나, 안진진`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라고 외친다. 그녀는 모순 투성이의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선다.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두 명의 남자와 연애를 하고,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나 각기 판이한 삶을 살아가는 엄마와 이모가 빚어 내는 생의 다양한 변주. 그리고 쉽사리 해독하기 어려운 아버지.

이 책에서는 그 숱한 이중성과 상반의 이미지들이 불화나 충돌의 현실로 그려지지 않는다. 가난한 엄마와 부자인 이모가 눈 흘기고 부대끼면서도 마치 한 몸처럼 살아가듯이 진진은 천양지차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애정을 느낀다. 후반부로 가면서 그 행복과 불행의 관계가 거짓말처럼 뒤집혀 버린다.



양귀자 - 1978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1988년 <원미동 사람들>로 유주현문학상을, 1992년 '숨은 꽃'으로 '이상문학상'을, 1996년 '곰이야기'로 현대문학상을, 1999년 '늪'으로 21세기문학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원미동 사람들>, <지구를 색칠하는 페인트공>, <희망>,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슬픔도 힘이 된다>, <모순>, <길모퉁이에서 만난 사람>, <천년의 사랑>, <천마총 가는길> 등의 소설과 산문집 <따뜻한 내 집 창 밖에서 누군가 울고 있다>, <삶의 묘약>, 장편 동화 <누리야 누리야 뭐하니>, 육아 에세이집 <엄마노릇 마흔일곱가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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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검색하다가 이 책의 제목을 문득 발견하게 되었다. 어디서 많이 본 제목인데... 아, 내가 고등학교때 읽었던 소설이었다. 주말드라마 소재로 많이 나올법한 내용인데... ㅎㅎ 그냥 그 때 읽었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뭐 그리 나쁘진 않았던 듯...

 

우리누나는 디빵 재미없다고 했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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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서평] 71년생 다인이 - 김종광


정가 - 7,000원

출판사 - 작가정신

지은이 - 김종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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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말하자면... 전대협 & 한총련 소설이다. 한총련 아닌 나랑 무슨 상관이냐 싶기도 하지만, 사실 이 소설에는 90년대 학생운동에 불어닥쳤던 온갖 파도와 바람이 뒤엉켜져 있다.

 

사실 이 소설도 살짝 기분이 나쁘다. 어제 서점에서 봤던 최영미의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읽었을때랑 비슷한 기분이다. 뭐 책에 딸린 서평에는 숱한 후일담 문학과는 다르다는 식으로 말하지만(다르긴 한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공지영의 소설처럼 가슴아픈 기억으로 절규하는 그런 내용은 아니니까. 오히려 그땐 그랬었지, 그리고 그 다음은 여백으로 처리해 버리는 위트를 발휘했다고 평하면 될까?), 후일담 문학과는 다른 씁쓸함을 남긴다.

 

이 소설이 말하고 싶은건 도대체 뭔가? 역사는 돌고 돈다? 80년대 학번들이 90년대 학번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90년대 학번들이 2000년대 학번들에게, 그것도 그 낡은 틀인 '한총련'을 부여잡고 있는 후배들에게 최영미의 시에서 처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를 외치는 것 같았다. 그래, 먹고 사는 문제 중요하지... 다인이가 먹고사는 문제에 치여서 386이라는 단어가 뭔지도 모를 정도로 깜이 떨어지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 그런데 지금 그녀가 십여년전에 간직했던 정신을 부여잡고 있는 사람들에게 독설을 퍼붓는 이유는 뭔가?

 

71년생 다인이가 그런 정열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 출생의 시기가 전태일열사의 분신, 유신체제 등장, 그리고 고3때 쯤 선생님들이 전교조한다고 잡혀가고... 뭐 이런 이유때문인건가...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렇다고 마치 운동의 한 순환이 마감했다는 듯이 씁쓸한 표정으로 2000년대를 바라보는 그 소설적 재치가 나는 맘에 들지 않는다.

 

어찌되었든 소설 말미에 여운을 남기긴 했지만.... 다석이가 다시 다인이 누나처럼 열혈 운동권이 되어서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 낼 수도 있겠지...

 

아, 하지만 이놈의 소설이라는 것들은 왜 이렇게 맨날 운동을 이렇게 오래 씹어서 지겨워진 껌처럼 뱉어내기에만 바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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