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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1/22
    [발췌독] 호모 쿵푸스 中 - 고미숙
    구르는돌
  2. 2009/01/16
    [발췌독] 페미니즘 역사의 재구성 - 권현정 외
    구르는돌
  3. 2009/01/14
    [발췌독] 이현상 평전 - 안재성
    구르는돌
  4. 2009/01/13
    [발췌독] 콜론타이 관련
    구르는돌
  5. 2009/01/09
    미네르바가 대체 뭘 잘못했나?
    구르는돌
  6. 2009/01/07
    [서평] 경성 트로이카 - 안재성(4)
    구르는돌

[발췌독] 호모 쿵푸스 中 - 고미숙

짧은 미국 생활동안 내가 목격한 건 미국에는 '수많은 영어들'이 있다는 것이다. 히스패닉 영어, 아시아식 영어, 아프리카식 영어 등등. 이를테면 미국에는 전 세계 인종의 수만큼이나 많은 영어들이 범람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영어는 미국이라는 제국의 언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영어를 배운다는 것은 곧 제국식 삶을 고스란히 복제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엔 영어에 대한 두 가지 극단적 태도가 존재한다. 하나는 네이티브(native)에 대한 맹목적 동경, 다른 하나는 적대적 거부감. 이 두가지는 겉보기에 달라보이지만 영어를 제국의 언어로 묶어놓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이제는 이 둘 사이에서 아니 그 둘을 벗어나 영어를 탈제국화하는 운동을 시도해야 할 때다. 솔직히 말해, 영어 보더 더 간단 명료한 언어체계가 어디 있는가. 그걸 인정한다면, 영어를 오히려 국경과 인종을 넘어 전지구적 연대를 모색하는 도구로 적극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근데 대체 왜 이런 가능성에 대한 영어책 혹은 영어 공부법은 없는 것인가? 오직 토익점수를 올리는 것, 네이티브처럼 발음하기, 미국인과 대화하기 위한 각종 표현들 익히기 등등이 전부다. 심지어 발음을 정확하게 하기 위한 혀 수술을 한다는 괴소문까지 나돌기도 했으니, 미쳐도 한참 미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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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페미니즘 역사의 재구성 - 권현정 외

성욕의 문제, 특히 여성 히스테리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정신분석학이 형성되고 발전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은 여성적 동일성과 성욕의 관련성이라는 가정 하에서 여성성을 규명하기 위해 '여성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이는 무성적 존재였던 여성을 성욕을 가진 존재로 구성하는 데서 중요한 질문이었다.

프로이트에 와서 여성성의 문제는 정치철학의 영역에서 정신분석학의 영역으로 이전되었다. 프로이트에게 리비도는 이전 시기 정치철학의 코나투스와 동일한 지위를 갖는 기념으로 개인성 특히 성적 동일성의 형성을 설명하는 열쇠였다. 따라서 여성 성욕의 특성을 밝히는 것이 여성성을 밝히는 데서 핵심적 문제였다.

프로이트는 유아의 리비도를 남성적인 것으로 가정하고 남성적 리비도를 중심으로 여성성을 설명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여성의 욕망은 페니스의 결여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하여 페니스 선망을 거쳐 외디푸스 콤플렉스로 이어지는 모순적이고 불완전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었다. 여성은 자신의 성감대를 작은 페니스인 클리토리스에서 바기나로 이동시켜야 하며 이 과정은 페니스 선망을 페니스 삽입에 의해 남자아이를 갖고자 하는 열망으로 변경시킴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 151-2 pp

 

 

 

 

2차 성혁명을 향한 새로운 성관념의 출현은 이미 킨제이 보고서에서 시작되었다. 킨제이는 1948년 남성의성욕에 대한 연구를, 1953년에는 여성을 대상으로한 연구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서 성은 오르가즘을 추구하는 하나의 게임으로 묘사되었고 '만족'이라는 모호한 용어 대신 '오르가즘'이라는 단어가 선택되었다.

킨제이에 의하면 오르가즘을 목표로 한 성은 반드시 사랑이나 이성애적 매력이나 심지어 인간적 상호작용마저도 포함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킨제이의 연구는 오르가즘의 횟수에 관한 한 동성애, 자위, 심지어 수간까지를 포함하여 이전 시대에는 일탈로 여겨졌던 다양한 성행위를 포함했다.

킨제이 보고서의 충격은 성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낳았다 .그것은 첫째, 성의 목적이 임신보다는 오르가즘의 추구에 있다면, 정상에서 벗어난 다양한 성적 일탈이라는 기존의 판단에 대한 도덕적 상대주의가 능하다는 점이었다. 둘째, 킨제이 보고서는 오르가즘의 추구가 목적인 한 성에 관해서 남녀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인식을 발전시켰다. 즉 오르가즘에 관한 한 남녀간의 해부학적이고 생리학적인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킨제이의 연구는 물리적 반응으로 환원된 오르가즘은 인간적 감정과 무관하며 따라서 남녀간의 성관계는 출산은 물론 사랑 및 결혼과 분리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왔다.

하지만 50년대의 성과학은 불감증의 치료를 위해서 여전히 남성의 노력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페니스가 바기나 안에 오래 머무를 필요가 있었고 이에 대한 실패를 표현하는 단어가 '조루'였다. 여전히 남성이 성관계에서 주도적인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졌으며 여성의 지나친 활동성은 문제로 인식되었다. 2차 성혁명의 초기에 여성들에게 더 많은 성욕의 가능성이 열렸다고 해도 여성의 성적 경험의 본질은 변화하지 않았다. 주부든 독신여성이든 바기나 오르가즘은 여성성의 증거로 이해되었으며, 성교를 중심으로 하는 성욕에 대한 관념은 변경되지 않았다.

 

- 153-4 pp

 

 

 

 

 

금진주의 페미니즘은 성혁명의 대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쾌락에 수반되는 위험에 대한 방어적 투쟁을 벌였다. 실제로 성혁명의 기간에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성혁명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가졌다.

1963년경 절음 여성들은 성혁명의 시대에 살면서 '예스'라고 말하라는 압력이 갑자기 '노'라고 말해야 하는 이전의 무를 대체하면서  혼란을 느꼈다. 젊은 여성들은 새로운 자유를 향유해야 하는지 성적 착취의 가능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지 확신하지 못햇다.

 

- 165 p

 

 

 

 

 

낙태의 권리를 처음으로 제기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분파는 레드스타킹스로 이들은 낙태투쟁을 통해 자신의 재생산 능력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고, 나아가 자기 삶의 향을 통제할 수있는 여성의 자유를 확보하려고 했다. 이들은 임신을 성 경험의 대가나 벌이 아닌 성적 권리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3년 대법원은 미국 전역에 걸쳐 낙태를 합법화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른바 '로우 대 웨이드' 사건으로 알려진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미국인의 사생활 권리(헌법 14조)에는 여성이 아이를 낳을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포함된다는 논리에 근거해 정부가 낙태 문제에개입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는 여성의 재생산에 대한 권리를 법적으로 승인했다기보다 시민의 사생활의 권리에 대한 승인의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판결을 계기로 낙태의 권리는 여성의 권리에서 개인의 선택권의 문제로 변화했다 그 결과 두 개인의 권리, 즉 어머니의 권리와 태아의 권리가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로우 대 웨이드 판결을 계기로 낙태권의 문제가 개인의 선택권으로 옮겨가면서 논쟁은 이른바 '생명존중'을 주장하는 신보수주의와 '선택존중'을 주장하는 페미니즘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변형되었다. 신보수주의가 낙태를 살인으로 규정한 반면에 페미니즘은 낙태를 개인의 선택권의 핵심으로 간주했다.(...)

한편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낙태 찬성 캠페인을 재생산에 대한 권리로 확대할 것을 요구했다. 많은 백인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건강하고 보편적인 낙태 요구는 흑인 여성들의 삶의 맥락에서 볼 때 훨씬 복잡한 문제였다. 흑인 페미니스트들의 개입이 있은 뒤에야 낙태와 피임 문제에 관한 페미니즘 캠페인은 비로소 적절한 상담없이 강제로 낙태나 단산을 당하지 않으려는 흑인 여성들의 재생산에 대한 권리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즉 '낙태를 할 권리'라는 협소한 정의는 임신과 출산 여부를 여성이 스스로 결정할 권리라는 의미를 가진 '재생산의 권리'로 다시 정의 되었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낙태 문제를 이론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특히 고든은 출산통제 운동사를 통해서 자발적인 재생산 권리와 비자발적인 재생산 선택을 분리시켰고 낙태를 자발적인 권리로, 불임시술은 비자발적인 선택으로 분류했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낙태의 권리를 여성의 육체에 대한 통제라는 관념 속에서 조명할 수 있게 했다. 즉 생산에 대한 노동자의 통제에 유비되는 재생산에 대한 여성의 통제라는 차원에서 출산통제를 정당화했다. 이러한 발전은 이전 시대에 '자발적 모성'을 제기했던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전통을 잇는 것이기도 했다.

 

- 168-170 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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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이현상 평전 - 안재성

(1930년대 경성 트로이카가 주도한 연쇄파업과 관련하여...)

 

이틀 후인 9월 21일에는 서울에서도 가장 큰 공장의 하나로 알려진 동대문 종연방직과 용산공작소 영등포 고ㅇ장에서 동시에 파업이 터졌다. 둘 다 이현상의 직접적인 지도 아래 감행된 파업이었다. 종연방직에는 경성트로이카 조직원으로서 영등포 방면 공장에서 활동하던 이병기의 조카 이병의와 유해길이 취업해 있었다. 가회동 집에서 이재유와 회합한 이현상은 임금인상, 처우개선 등의 요구를 내걸고 파업을 이끌기로 합의를 본 후 이효정, 이순금, 이종희 등과 함께 투입되었다. 이현상은 별도로 조선일보 배달원 정칠성과 변홍대를 신설동 하천가 야산 등지에서 만나 최대한 많은 노동자를 참가시키는 방법을 모색하기도 했다.

종연방직 파업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일으켰다. 참가 인원이 오백 명으로 지금까지의 파업 규모 중에 가장 컸다. 이에 경찰이 이영자 등 다섯 명의 여성 노동자를 검거하자 흥분한 오십육 명의 여성노동자들이 경찰서로 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일제 치하에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경찰서 진입을 감행한 것이다.

파업이 사흘째 이어지자 회사측은 직공 모집 공고를 붙이고 다음 날 출근하지 않는 노동자는 모두 해고한다면서 신문기자들에게 구십 퍼센트 이상이 출근하리라 장담했다. 그러나 작업에 들어가는 노동자는 없었다. 이에 회사 측은 더욱 교묘한 술수를 썼다. 남성 노동자들에게 요구조건을 다 들어주었으니 여성 노동자들을 출근하게 하라고 시킨 것이다. 이를 믿은 남성 노동자들의 설득으로 여성 노동자들도 모두 출근했다. 하지만 일단 노동자들을 축근시킨 회사 측은 요구조건을 들어주겠다고 한 적 없으며, 남성 노동자들이 멋대로 말한 것이라고 발뺌했다. 이 과정에서 남녀 노동자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바람에 파업은 유야무야 끝나고 말았다. 이현상은 요구조항 속에 남자들의 임금도 올려줄 것을 넣도록 하는 등 파업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애썼지만 재파업에 돌입하지는 못했다. 요구조건의 쟁취에는  실패하지만 종연방직 파업은 연일 언론에 실리는 등 큰 파장을 일으켰다.

 

- 111-2pp

 

 

 

 

감옥살이는 늘 힘들었지만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더욱 어려워졌다. 음식의 질은 더욱 떨어졌고, 사상통제도 심해졌다. 이현상은 정치범들을 조직해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싸움을 그치지 않아 서대문형무소에서 함흥형무소로, 다시 대전형무소로 강제 이감되어야 했다. 그 와중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체포된 지 사 년 칠 개월 만에 석방될 때 감옥에서 싣고 나온 책이 손수레로 석 대나 되었다.

 

- 119p

 

 

 

 

(1945년 11월, 전국농민조합총연맹 결성회장에서 김태준이 한 축사)

 

"여러 동무들을 등지고 연안에 갔다가 이제 대하니 오히려 면목이 없습니다. 인구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농민의 대표 여러분! 우리의 해방은 아직도 어렵습니다. 잠깐 연안 독립동맹의 현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팔로군하에서는 남녀노소가 노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먹을 것을 농사짓습니다. 모택동 동지도 하루에 몇 시간씩은 농사를 짓는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부부도 연안에서 조선까지 걸어서 왔습니다.  여러분은 해외에서 들어온 사람들의 호언장담에 속지 말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는 공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누구의 밥을 먹고 누구의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정치운동을 하고 있습니까? 과거의 이완용이나 김옥균도 주관적으로는 조선을 구하기 위하여 일본과 결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무엇이었습니까?

물론 우리가 사상운동이 아닌 이상, 정치운동에는 신축성을 가져야 합니다. 팔로군의 십 개조 정책을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과거의 경솔한 공산주의를 버리고 진실한 신민주주의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적당한 노선을 세우고 옳게 걸아 나갑시다. 우리는 자기비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팔로군에는 정풍운동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비판을 할 줄 알면 오늘과 같은 혼란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민족을 위해 싸웠다느니, 네가 그랬느니 하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삼일운동도 결코  삼십삼 인의 지도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중운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대중으로부터 세워진 과거 혁명의 결정인 인민공화국을 절대로 지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최근 성공적으로 나가는 연안에도 민족단체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태도는 겸손합니다. 조선의 인민을 위한 일을 하려면 그러한 태도라야 할 것입니다. 혁명가는  마당히 대언장담하지 말고 자기비판을 합시다.

 

- 177-8 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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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콜론타이 관련

콜론타이에게 자유결합은 '성적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러나  콜론타이의 자유결합 사상과 중간계급 페미니스트들의 자유결합 사상은 구별되는 것이었다. 콜론타이는 자유결합의 부르주아적 성격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비판해 왔다. 사실 자유결합 역시 '성적 위기'에 대한 중간계급의 대응이었다. 죽을 때까지 해체될 수 없는 관습적 결혼을 이혼의 자유가 허용되는 시민적 결혼으로 대체하려는 이들의 시도는 부르주아적 가족의 안정성의 토대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하여 여성들은 가족생활의 부담에서 해방되었지만, 자녀 양육의 부담은 홀로 지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공산주의 공동체만이 가족을 폐지할 수 있는 원리로 이해된 것은 이러한 상황 때문이었다.

 

사회변혁의 전제 없이 성해방을 꿈꾸는 부르주아적자유결합은 오로지 육체적 욕망에만 따르는 '날개 없는 사랑'으로 타락할 위험이 있었다. 노동자들 사이의 동지적 사랑은 이러한 위험성을 공동체 내에서 통제해야 했고, 이러한 새로운 도덕이 노동 공동체와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발전시키는 원리가 되어야 했다. 또한 이러한 윤리가 공산주의적 토대에 근거한 사회적 관계의 재구성 과정에서 출현해야 했다. 이것이 콜론타이가 구상한 공산주의적 유토피아였다.

 

콜론타이가 사랑의 문제에 특히 주목한 것은 여성 억압의 원인이 단지 경제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차원에도 걸쳐 있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활동으로부터 여성의 소외는 여성으로 하여금 사랑만을 욕구하고 갈망하게 만들었고, 공적 영역에서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방해했다.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여성조차 사랑에 종속되는 상황이 발생할수 있었다. 사랑을 제외하고 여성에게 의미있는 일이 주어지지 않았던 과거 역사의 부담에서 여성이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공적 영역에서 여성의 소외에 대한 해답은 사랑과 일을 결합할 수 있는 여성의 능력과 이러한 여성이 가능하게끔 남성을 교육하는 것이다.

 

콜론타이는 제프리즈처럼 독신여성을 레즈비언으로 특권화하지 않고서도, 독신여성을 신여성의 특징으로 설정할 수 있었다. 독신여성은 콜론타이가 발견한 자유결합의 주인공이었다. 콜론타이에 의하면, 신여성은 자본주의적 발전이 가져온 대중적 현상이지만 이를 초과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신여성이 사적 가족경제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유용하고 필수적인 노동을 행하는 '노동 단위'이기 때문이었다. 노동에 대한 새로운 태도로 인해 신여성은 '날개 달린 에로스'를 수용할 수 있었다. 신여성은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성적 욕망의 만족이 내면의 도덕적 의무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어야 했다.

 

 

- 이미경, "1세대 페미니즘", [페미니즘 역사의 재구성: 가족과 성욕을 둘러싼 쟁점들] 中 137-9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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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었던 고미숙의 [호모 에로스]와 이 구절이 서로 대화하고 있다. ㅋㅋㅋ

이 정도면 나도 독서의 경지에 올랐나??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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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가 대체 뭘 잘못했나?

사실 난 미네르바가 썼다는 글을 한번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다.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대충 요새 나오는 증시나 환율과 같은 경제위기와 관련된 글들이 넘쳐나고 있고 딱히 그의 글이 엄청나게 대단한 분석을 했을 거라는 기대같은 것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 항간을 떠도는 온갖 '위기설'들은 굳이 미네르바와 같은 네티즌의 입을 빌리지 않더라도 한겨레, 경향 같은 신문만 조금 봐도 다들 하는 얘기 아닌가? 게다가 루비니 같은 미국 교수들이 시나리오까지 제시하면서 세계경제 대공황을 예견하는데, 내일이면 당장 정부에서 달러매수를 금지할 것이라는 둥의 이야기가 뭐 그렇게 대수인가 싶었다. 적어도 나는...

 

그런데 그의 글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사실 나 같이 돈 한푼 없고 그래서 어디에 투자한 돈도 없는 사람들은 정부가 내놓는 각종 단기 경기부양책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다. (그런 만큼 별 기대도 안한다.) 그러나 당장 목돈을 주식이나 달러에 투자해서 mbn뉴스에 나오는 숫자놀이에 눈을 처박고 있는 사람들은 사정이 다르겠지... 또 자식 중에 누군가를 어학연수나 유학을 보내서 환율에 똥줄 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그런 사람들에겐 "조만간 정부가 달러매수 금지를 내릴테니, 빨리 달러를 준비해 두셔야 할 겁니다." 등의 경고는 "곧 산불이 날 것이니 대피하십시오" 정도로 들렸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미네르바가 뭘 잘못했는가? 정부는 그가 뭐 양치기 소년 쯤 된다고 생각하나? 자기가 하는 말 빼고는 다 뻥이라고 생각하는 명박이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겠지. 걔네들 생각처럼 아직 늑대가 나타나진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저쪽 산 너머에서 늑대가 때거지로 달려들고 있는건지 아닌지 너네도 모르잖아. 혹시 모를 불안에 대비하라는 것이 허위사실 유포면, 97년 IM위기 직전에 캉드쉬의 말을 인용하면서 한국엔 경제위기가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던 조중동 패거리들은 대체 왜 가만 냅두냔 말이다. 진짜 위기가 닥쳤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위기 아니라고 씨부려서 위기에 대한 대처도 못하게 만든 것이 더 큰 허위사실 유포 아니냐?

 

그리고 방금 전에 동아일보 기사 보니까, 전여옥이가 또 한 건 했더라. 미네르바가 신정아랑 비슷하덴다. 전문대 출신 주제에 명문대 출신에 금융회사에서 근무한 적 있다고 뻥친게 학력위조해서 교수된 신정아랑 비슷하다는 거다. 이런 정신나간 입방정을 보게나... 그렇게 해서 신정아는 교수가 되서 '부당이득'을 취했지만, 미네르바라는 사람은 30세의 무직이다. 그가 가짜 이력을 내세워서 얻은 '이득'(??)은 겨우 인터넷 상에서 '경제대통령'칭호를 받은 것 뿐이다. 그것도 명예라면 명예인가? 키보드 워리어의 제왕... ㅠ.ㅠ

 

사족이긴 하지만 덧붙이자면, 어떤 면에선 미네르바의 전문대 졸 학력은 지탄받을 일이 아니라 대단하다고 칭찬받아야 할 일 아닌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식민지 주구들이 판치는 이 나라 경제학 판도에서 일반인들이 경제학에 관한 기초적 상식만이라도 갖추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기껏해야 주식시세 정도 따지는 수준이지... 그런데 그는 혼자서 맨큐 경제학을 독학했단다. 나도 대학 2학년때 교양과목으로 경제학 원론 시간에 맨큐를 가지고 공부했는데, 너무 재미없어서 맨날 수업시간에 도망다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성적은 C를 받았다. ㅋㅋㅋㅋ 보수 언론들은 어려서부터 경제  교육을 확실히 해야 한다고 그렇게 떠들어 대면서 이렇게 혼자서 열심히 경제를 독학한 사람에게 무슨 자격으로 침을 뱉나? 그가 완전 헛소리를 한 것도 아니고, 여전히 한국 경제에 논란이 되는 사안을 나름대로의 시선으로 날카롭게 짚어낸 것 뿐인데...

 

아, 한 마디만 더하면... 작년에 SERI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기업 부설 경제연구기관들이 경기예측이 거의 빗나갔다고 한다. 주식시장 분석은 거의 0점에 가까웠다. 이거 완전 국민들 상대로 한 대형 사기극 아닌가? 게다가 이들은 전문대 출신도 아니고 다들 한가닥 하는 대학들에서 경제학 박사까지 하신 분들 아닌가? 검찰은 빨리 이들부터 잡아들이길 바란다.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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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경성 트로이카 - 안재성

 

 

트로이카.

러시아 말로 '삼두마차'라는 뜻이다.

세 마리의 말이 동시에 같은 힘으로 수레를 끌면서 가야하는 구조.

이것이 바로 이재유가 1930년대 경성 일대에서 노동운동을 이끌면서 만들어내고자 했던 이상적인 조직의 형태, 바로 '경성 트로이카'의 모습이다.

 

요새 어쩌다보니 해방전후사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책 저책 뒤져보고 있던 차였는데,

안재성의 멋진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마침 우리집에서 버스타고 10여분을 달리면 나오는 도서관에 이 책이 있었고, 나와 경성 트로이카의 만남은 이렇게 손끝의 파르르한 떨림을 느끼면서 시작되었다. ^^;; (이런 책을 가까운 공공 도서관에서 이리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어찌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사실 시립, 구립 도서관을 조금만 뒤져보면 이런 보물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사실 나는 이 책 제목만 보고 이 책이 소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소설은 아니라도... 아, 그럼 이 책은 어떤 부류로 넣어야 하나?

단순한 역사책이라고 부르기에는 '역사책'이라는 말이 너무 투박하다.

그렇다고 이 책에서 핵심 인물로 다루고 있는 이재유라는 인물의 평전인가 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 그에 대한 평전이라고 하기에는 동덕여고 출신들의 운동사에 대한 이야기의 비중 또한 만만치 않다.

 

그래, 이 책은 남북한 어디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그래서 역사적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불굴의 투사들에 대한 정당한 기록, 바로 진정한 역사 다큐멘터리다. 특정인물에 대한 평전이 쉽게 범할 수 있는 영웅사관 따위와는 거리를 두면서도 그 당시 국내파 사회주의자들의 고뇌와 열정의 숨결들을 세심하게 포착해 낸, 역사실록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든 첫 번째 느낌은 무엇보다 경성 트로이카의 구성원들 모두 결과적으로 매우 불행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남한에서는 물론이고, 북한에서조차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현상, 김삼룡같이 남한 땅에서 죽임을 당해 북한에선 혁명열사로 추앙받게 된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이들이 지도했던 남로당도 북한 노동당에게는 외면을 당했고, 그렇게 염원하던 공산주의가 북한에서는 실제 너무나 강압적이고 연고주의의 고루한 것으로  서서히 드러나자 낙담하고 운동을 포기한 이들도 있고, 그 이전에 일본 경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트로이카의 우두머리 이재유 등이 있다.

 

나는 어쩌면 우리 현대사에서 이들의 존재가 잊혀진 것이 사회주의 운동의 크나큰 비극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재유를 비롯한 트로이카의 일원들은 철저하게 대중의 힘의 근거한 사회주의 운동을 도모했고, 현장에 기초하지 않은 어설픈 이론주의로 대중을 계몽하려 하지 않았다. 때론 이런 입장 때문에 국제선을 주장하는 다른 사회주의 그룹이었던 권영태 그룹과 마찰을 빚기도 했으며, 이재유는 아직 초기단계에 있는 경성의 노동운동을 지도해야 한다는 이유로, 원산으로 옮겨 이주하 등과 노동운동을 함께하라는 코민테른의 명령도 거절한다. 경성 트로이카는 그야말로 일제치하에 유일하게 존재했던 '자주파 사회주의자'들의 본거지였던 셈이다. 그에 비하면 사실 김일성 등이 말하는 '자주'는 얼마나 빈약하기 그지 없는가? 그는 압록강 인근에서 무장투쟁을 하다가 탄압이 심해지자 소련으로 쫓겨가 적군부대 밑에서 수십명의 유격대만을 거느리고 활동했을 뿐이다. 게다가 해방 이후 소련의 지시에 따라 국내 여론을 무시한 채 진행된 신탁통치 지지운동은 그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국내 좌파세력의 괴멸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반면 경성 트로이카의 주축 인물이었던 김상룡(당시 남로당 책임지도자)은 국내 인민의 여론을 감안하여 찬탁운동에 신중한 뜻을 내비쳤다.

 

그에 비하면 이재유의 트로이카는 아무리 심한 탄압에도 조선의 혁명은 국내 노동자 인민의 힘으로 이뤄야 한다는 일념으로 경성지역에서 연쇄총파업을 일으키는 등 엄청난 '자주적' 성과들을 만들어 냈다. 어쩌면 김일성 등의 해외파가 이재유 사후에 남은 국내파들을 압도한 것이 우리 역사의 엄청난 비극이지 않나 생각한다.

 

또한 이들은 사회주의는 철저히 대중운동에 기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권영태 그룹과의 통합논의 과정에서도 상부 단위의 음모적 논의를 통한 통합이 아니라, 공동의 대중투쟁 과정을 통한 사상적, 행동적 통일을 꾀했다.

 

2009년 벽두에 80년 전의 혁명가들의 족적을 따라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본 경찰의 미행을 피해 신출귀몰해대는 식민지 혁명가들의 장엄한 삶의 파노라마를 보면서 때론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들의 역사를 통해 다시 21세기 좌파의 새출발을 상상해 본다. 어차피 이젠 코민테른같은 국제적 지도부도 없다. 다시 이 땅에 진정한 '자주적 사회주의'가 꽃피울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트로이카의 마차를 끌 말들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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