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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10/07

최근 교육 문제에 관한 메모

오장풍 교사 논란 이후 곽노현이 '체벌 전면 금지' 카드를 들고 나왔다. '나는 다른 진보교육감들과는 다르다'고 말해온 그의 노선변화에 다시 한번 꺽기가 들어간건가? 오늘 나온 세계일보와의 인터뷰 기사에서도 일제고사 해직교사에 대한 복직 가능성을 암시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 혹시 지금 언론 플레이중?

 

이게 고도의 전술인지, 아니면 그냥 바보짓인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지만 어쨌든 자신의 정책 추진 과정에서 전교조를 상대화 하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일제고사 선택권을 보장하든, 교원평가를 재검토하든 그건 교육감의 정책 결정에 관한 사항이지 전교조의 입김에 휘둘릴 사안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하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지 않고서야 해직교사들 불러다가는 복직은 힘들다고 말했다가, 언론 앞에서는 또 항소 취하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가 이런 변덕스러운 짓을 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해서 전교조 교육감이라는 보수진영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겠다는 생각인 것 같은데...

 

꿈도 참 야무지십니다 그려... 노무현은 뭐 대단한 거 한게 있어서 빨갱이 소리 들었나? 곽노현 교육감은 그 출신 자체가 이미 글러먹어서 가만히 있어도 보수한테 욕먹게 되어있다. 노무현이 탄핵 당하기 전까지 1년동안 한 게 뭐 있었지? 아하, 이라크 파병!!! 나는 그저 곽노현이 노무현 꼴 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아, 근데 왜 이름은 이렇게 비슷한거야? ㅋㅋㅋ 선거 때 누군가가 '곽노무현'이라고 불렀다지 ㅠ.ㅠ)

 

뭐 그건 그렇고 '체벌 전면 금지' 카드가 올바른 대응인지 의문이다. 교총의 논리대로 "아무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체벌을 금지하는 것은 교권 침해가 될 것"이라는 말은 돌려 말하면 체벌을 쓰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을 정도로 교사의 권위는 이미 바닥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고, 그렇기에 교권 침해 여부와 체벌 전면 금지와는 사실 별 상관이 없기 때문에 일단 논외로 치자.

 

그 동안 곽노현이 일제고사와 교원평가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온 것을 비춰 봤을 때, 체벌금지와 학생인권조례 문제를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국면타개용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어차피 일제고사와 교원평가는 곽노현 자신의 소신과는 별개로, 진보적인 방향으로 추진하려 해도 교과부의 제재 압력 때문에 쉽지 않다. 그러면 자신의 4년 임기도 불안해 질 수 있다. 하지만 체벌, 인권조례, 거기다 더해서 요즘 서울시 교육청이 모가지를 쳐내고 있는 수학여행 비리 교장 문제 등은 여론의 분위기도 그렇고 행정상으로도 딱히 교과부가 서울시 교육청에 딴지를 걸 수 없다. 그래서 일단 껄끄러운 일제고사, 교원평가 문제는 제껴놓고 후자의 문제로 일점돌파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기는 거다.

 

내 생각엔 이 상황에서 그냥 "성추행 및 상식을 벗어난 체벌을 하는 등 교사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킨 교사에 대해서는 무조건 중징계" 정도의 입장을 내세우는게 좋지 않을까한다. 성추행에 관해서는 상황 여하를 따지지 말고 그 사실 자체가 밝혀지는 즉시 그냥 파면이고, 체벌은 상식적으로 훈계의 목적이라고 볼 수 없는 얼굴 가격, 발로 차기, 집단 기합 등은 최소 직위해제가 적용되어야 한다. (어, 근데 이게 더 센건가? ㅋㅋ)

 

체벌 전면 금지는 내가 봐도 지금 상황으로는 가능하지도 않고, 학교 현장에 혼란만 가져올 것 같다. 지난 주말 신문기사 보니까 초등학생이 수업시간에 핸드폰으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길래 선생님이 압수를 했는데, 그 학생이 "왜 남의 핸드폰 맘대로 가져가!?" 라고 소리지르며 선생님을 때리고 의자 집어 던지고 난리를 폈단다. 이 상황에서 선생님도 인간인 이상 어떻게 견디냐는 반발, 솔직히 난 이해된다.

 

이 상황에서 '체벌 전면 금지' 같은 강경책으로 여론전을 벌이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교육감이 정책 수행을 언론 그리고 대중과 심리전 하듯이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나는 체벌은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오해없이 읽어준다는 전제하에서) 원래 애들은 혼나면서 크는거다. 혼자 크는 애는 세상에 없다. 그렇게 키우면 예전에 서양에서 발견됐다던 '늑대인간'처럼 될 뿐이다. 혼나면서 가끔 '맴매'를 맞을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저 옛날 동네 훈장 선생님들이 혼낼때는 발로 걷어차거나 집단 기합을 주거나 그런 패륜적인 짓거리는 안했다는 거다. 드라마 같은 얘기일 수 있지만, 우리네 이미지 속에서 훈장 선생님은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고도 나중에 제자가 걱정되어 따로 불러 약을 발라주며 달래주는,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어쩌면 '머리를 때리지 말고 손바닥을 때려라' 같이 특정 신체 부위를 지정하는 것도 해결책이 아닐지도 모른다. 요즘 애들 다 집에 돌아오면 인터넷 강의로 우수 강의 골라듣는 처지에서 학교는 그냥 질 떨어지는 구멍가게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마이클 애플(맞나?)이 말했듯이 학교의 시장화는 교육을 슈퍼마켓에서 물건 고르는 정도로 이해되게 만들었을 뿐이다. 앞에서 말했던 핸드폰 뺏겼다고 의자 집어던지 아이의 심리는 "왜 슈퍼마켓 직원이 손님을 때리냐" 뭐 이정도 일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체벌 금지는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슈퍼마켓 직원에 대한 노동권 침해다. (제발 오해 없이 읽어주세요 ㅠ.ㅠ)

 

 

 

그래서 결론:

 

곽노현 교육감은 체벌 문제 해결, 학생인권조례 제정 등을 이루고 싶다면 먼저, 교육시장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라. 그건 교육감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교원노조, 학부모단체, 학생과 머리 맞대고 함께 고민하면서 풀어갈 문제라는 것. 교육 시장화 문제와 대결할 수 없는 '학생인권론'은 공문구라는 것.

 

 

(아, 글이 좀 난삽한데 시간이 되면 글을 좀 더 압축적이고 깔끔하게 정리해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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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와 돕/스위지의 <자본주의 이행논쟁>

 

 

세계공화국으로
세계공화국으로
가라타니 고진
비(도서출판b), 2007

 

 

 

자본주의 이행논쟁 - 동녘신서 15
자본주의 이행논쟁 - 동녘신서 15
高橋幸八郞 외
동녘, 1997

 

 

 

 

 

 

 

 

 

 

 

 

 

 

 

 

 

가라타니 고진의 책은 충격적이다. 그의 <세계공화국으로>에 담긴 주제는 역사적 교환양식, 칸트와 맑스, 세계제국과 세계경제 등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버거운 것들인데, 이걸 300쪽도 안되는 얍실한 책 한 권에 다 담았다. 심지어 쉽다!! 어쨌든 난 이 책을 산지 두어달 만에 두 번 완독했는데, (감히 용기내어 말하자면) 난 이 책의 내용이 뭐냐고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적어도 15분 정도는 쉬지 않고 혼자 떠들 수 있을 것 같다. 이건 전적으로 내 능력이 아니라, 저자의 능력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책 자체가 원래 고등학생도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저자가 작정하고 쓴 책이라고... 인터넷을 뒤져보니 어쨌든 이 책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자기가 줄곧 주장해 온 내용을 거의 다 쏟아낸 듯 하다. 이 책의 부제를 굳이 붙이자면 '1시간만에 읽는 가라타니' 정도?

 

어쨌든 이렇게 쉽게 세계화 속의 자본-네이션-국가의 문제를 둘러싼 쟁점을 선명하게 드러내 주신 덕에 내가 앞으로 고민하고 공부해야 할 것이 뭔지가 좀 선명하게 드러나는 듯 하다.

 

일단 고진에게 특이한 점은 그가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생산양식'이 아니라 '교환양식'을 통해서 발견한다는 점이다. 그가 책에서도 언급하듯이 이런 논의는 20세기 중반 모리스 돕과 폴 스위지 간에 벌어졌던 자본주의 이행논쟁에서 스위지의 계보를 잇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진을 이 논쟁에 가담시켜 본다면, 그에게는 자본주의 뿐만 아니라 봉건제 조차도 그 내부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봉건제는 '제국의 아주변'에서 출현한, 즉 제국권력이 영향력을 뻗치는 범위의 (상대적)외곽 또는 사이공간에 존재하는 타자였다. 이를테면 서유럽 봉건제는 로마제국의 아주변에서, 일본의 봉건제는 중국제국의 아주변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에게서 국가는 역사적으로 존재해 왔던 4가지 교환양식(호수 / 약탈-재분배 / 상품교환 / 어소시에이션) 중 약탈-재분배를 기초로 성립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상품교환은 기본적으로 독립적인 자유민의 존재가 보장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국가와는 다른 토대를 갖는 것이다. 즉 상품교환은 공동체의 바깥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상품교환은 공동체가 끝나는 곳에서,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 또는 그 성원과 접촉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마르크스)

 

그렇다고 그가 국가와 상품교환이 완전히 별개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고, 근대 자본주의 등장 이후에 네이션(나는 이것을 그냥 '민족주의'정도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다)이 등장해 이 둘을 매개하여 자본=국가=네이션의 보로메오의 매듭을 형성한다고 말한다. 이들 각각은 상품교환, 약탈-재분배, 호수적 교환관계를 상징한다.

 

여기서 또 다시 가라타니의 주장이 자본주의 이행논쟁과 관련해 쟁점을 형성하는 부분은 '소비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라는 주장이다. "상인자본과 달리 산업자본은 생산과정에서 잉여가치를 얻지만 이는 아직 잉여가치의 실현이 아니다. 잉여가치가 진짜로 실현되는 것은 그 생산물이 유통과정에서 팔릴 때"라고 주장하고 또, "상대적 잉여가치는 노동자를 직접적으로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로서의 노동자가 스스로 만든 것을 다시 사는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말한다. 이렇게 그는 산업자본주의의 특징으로서 노동과정에서의 노동자의 자본가에 대한 예속과 이를 통해 얻어지는 잉여가치에 대한 부분은 일정정도 상대화시키고, 스위지가 그랬던 것 처럼 유통과정과 상업에 방점을 찍는다.

 

이런 문제를 고민하다가 결국 2년 가까이 책꽂이에서 잠자고 있던 <자본주의 이행논쟁>을 꺼내들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난 스위지의 주장이 맞다고 생각하지만(그런데 이 책만 보면 스위지가 돕, 다까하시, 힐튼, 힐 등에게 다구리 당하는 형국이다), 아직 고민이 좀 남는다. 스위지의 논점은 이후 월러스틴이 잘 계승해서 논의했듯이, 분석의 시야를 세계체계로 확장시켰다는 측면은 있지만, 어쨌든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모순의 변증법'을 상대화시킨 것 아닌가? 또한 자본주의의 기원을 가치체계 사이의 계산적 차이를 이용해 이윤을 얻는 상인자본에게 초점을 맞추면, 자본주의의 고유한 노동과정에 대한 분석은 어떤 로를 통해 이뤄질 수 있는가? 나아가 이 논의의 끝까지 밀고 나가면 노동가치론은 폐기되는 건가?

 

그럼에도 돕과 다까하시 등의 논리로는 스위지가 제기한 문제들을 해결 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들은 봉건제 붕괴의 원인이 봉건 영주의 과도한 수입욕구와 이를 견디지 못한 농노들을 영지 이탈에 있다고 했다. 이에 스위지는 영주의 수입욕구라는 것도 국제 사치품 교역의 성장에 따른 결과이고, 농노들의 이탈은 도망갈 곳이 있어야 가능한데 이 당시 봉건영지 외부에 성장하던 상업에 기반한 도시가 이를 가능케 했다고 답한다. 딱히 도망갈 곳이 없던 동유럽의 경우에는 재판 농노제가 나타났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는 것이다. 이에 돕은 봉건제 외곽에 존재하던 도시들도 사실상 봉건 영주의 영향력 하에 있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이들은 오히려 반동적인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내가 볼 땐 좀 부족해 보이는 대답이고, 그가 가장 힘주어 강조하던 바는 "스위지 너, 계속 그렇게 말하면 넌 마르크스주의자 아니야" 뭐 이런 게 아니었을까?

 

아직 잘 모르는게 많아서 대충 정리해 봤는데, 어쨌든 이 두권의 책 덕분에 앞으로 공부할 게 더 많아졌다. 일단 올 여름이 가기 전에 <자본론> 1권부터 제대로 정독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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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엔 발리바르, <스피노자, 반 오웰: 대중들의 공포>

개인성과 다중이 분리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스피노자는 또한 전체주의에 대한 이론들의 부조리함을 미리 보여주는데, 이 이론들은 대줄들의 운동들에서 단지 발본적인 역사적 악(mal)의 형상만을 보고, 거기에 인간의 의식[양심]의 영원한 재출발에 대한 믿음과 인권의 지배를 확립하는 인간의 의식[양심]의 능력에 대한 믿음만을 대립시킬 줄 알 뿐이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민주주의자라는 용어에 부여할 수 있는 의미에서 전혀 민주주의자가 아니었지만, 아마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피노자는 복종에 맞서 사고할수 있는 표지들과 수단들을, 그가 민주주의의 제도들을 기술하는 데에 성공했을 경우 보다 더욱 견고하게 우리 시대에 제공해 주는 것 같다. 스피노자의 대중들의/대중들에 대한 공포는 지성을 마비시키며 오직 개인들을 경악하게 만드는 데에 기여할 뿐인, 총체적으로 비합리적인 공포가 아니다. 스피노자에게 깃들어 있는, 이해를 위한 노력(sed intelligere: 오히려 인식하라)은 이러한 공포가 저항하고 투쟁하고 정치를 전화하는 데에 사용될수 있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대중들의 공포] (최원/서관모 역, 도서출판b)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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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이행논쟁(2) - &quot;봉건제의 붕괴와 자본주의 성립&quot; (모리스 돕)

<자본주의 이행논쟁> (김대환 편역, 동녘 출판사) 1부 2장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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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제의 붕괴와 자본주의 성립

- Maurice Dobb, Studies in the Development of Capitalism, 1946. pp. 33~82.



비판의 대상 : 농노제를 부역 혹은 영주의 영지에서 직접 행해지는 의무노동과 동일시하기 / 중세 말기에 상업과 원격지시장을 위한 상품생산이 발전하는 정도에 따라 그러한 부역노동이 일반적으로 소멸하고 화폐적인 계약관계로 전화되는 것을 보이기


정의 : 자본주의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봉건제를 하나의 ‘생산양식’으로서 특징지우려 함. 즉 봉건제는 농노제와 일치. 즉 그것은 영주의 특정 경제적 요구(부역의 형태이든 화폐나 생산물로 지불되는 조(租)의 형태를 취하든)를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자에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강제적으로 부과되는 의무. 여기서 강제력은 봉건영주의 군사력일 수도 있고 사법적 수속으로 뒷받침되는 관습 또는 법률의 강제력일 수도 있음.


봉건적 농노제는 낮은 기술수준과 관련되어 생산도구는 단순하고 대체로 저렴하며 생산활동은 주로 개인적 성격이었음. 분업은 매우 원시적인 수준이었고 광범위한 시장을 위한 생산이 아니라 가계나 촌락공동체의 직접적인 필요를 위한 생산조건과 관련됨.


이 체제의 발전의 정점은 직영지 경작, 즉 종종 상당한 규모로 강제적인 부역노동에 의한 영지의 경작으로 특징지워짐(이러한 고전적 형태에 국한되지는 않지만). 이 경제체제는 정치적인 분권화의 형태, 봉사를 조건으로 하는 영주의 조건부토지보유 및 (더욱 일반적으로) 예속민과의 관계에서 영주의 사법기능 또는 그에 준하는 기능의 보유와 결부됨(상당히 중앙집권적인 국가에서도 영주제가 발견되기는 하지만).



비판의 대상 : ‘자연경제’(natural economy)와 ‘교환경제’(exchange economy)는 혼합될 수 없는 두 개의 경제질서이고 후자의 출현은 전자를 분해시키는 데 있어 충분하다고 하는 설명


비판 : 14세기경 영국 특히 런던에 가장 가까운 주들(‘영주의 권력에 대해 가장 파괴적인 분해력이었던 화폐가 흐르는 동맥’)의 경우 부역이 화폐지불로 전화한 가장 좋은 증거가 발견됨. 또한 보다 진보적인 남동부지방에서 부역노동이 가장 오랫동안 잔존. / 발틱국가들이나 폴란드, 보헤미아에서 곡물수출의 기회증대는 농민층에 대한 노예적 의무의 폐지는커녕 오히려 이를 증가 부활시켰고 대규모 영지에서 농노노동을 기반으로 한 시장을 위한 경작에로의 길을 촉진함. / 영국에서의 금납화(金納化)가 시장생산의 성장과 결부되어 비롯되었다는 증거가 없음. - 화폐경제의 성장 그 자체는 봉건제 쇠퇴의 원인이었다는 증거만큼이나 농노제의 강화를 낳았다는 증거도 많음(특히 동유럽의 역사에서).

==> 화폐경제 성장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


상업의 발달이, 시장을 목표로 한 직영지 경작에 강제노동을 공급하기 위해 농노제를 강화했다고 믿어짐.


봉건제의 쇠퇴에 대한 이제까지의 논의에 있어서는 시장을 위한 상품생산은 필연적으로 임노동에 기반한 생산을 의미한다는 가정이 흔히 부지불식간에 전제되곤 했음. 전통적인 해석에서의 명백한 오류는 생산양식으로서 봉건제가 갖는 내부관계의 분석과 이것이 이 체제의 분해나 잔존에 미친 역할과 분석을 놓친 점.(봉건제의 상황에서 공동체 간 생산물 교환이 아니라 그 내부의 생산양식에 주목해야 한다는 뜻) 실제로 봉건제의 쇠퇴는 시장이라는 외부충격과 이 제도의 내부관계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의 결과로서 다루어져야 하지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은 후자임. 봉건제의 쇠퇴에 주된 원인이 되는 것은 지배계급의 증대하는 수입욕구와 더불은 생산체계로서의 봉건제가 갖는 비효율성이었음. - 여기서 소득증대의 유일한 원천은 예속계급이 행하는 잉여노동시간. 이에 비해 당시의 노동생산성은 그에 부합하지 못하고 생산자를 노동력 고갈 상태나 사실상의 소멸로 몰아넣음.


이민운동 : 증대된 억압은 장원을 떠나는 비합법적인 이민운동 즉 생산자의 대량이탈을 낳음. 그 결과 14, 5세기에 이르러 봉건경제는 일련의 위기 속에 휘말려 들어감 - 주기적인 농민폭동의 발생. 1300년 이후 인구는 서유럽 대부분에 걸쳐서 1000년 이래 증가해왔던 것과는 달리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 인구감소의 직접적 결과는 수입의 감퇴를 가져와 봉건사회를 위협하게 되었고 14세기에는 소위 봉건경제의 위기가 촉진됨. * 돕은 인구감소에는 전쟁과 흑사병이 아니라 경제적인 근본이유(경제적 위기 : ‘노동시장에서의 균형의 변화’(립슨)?)가 있었음이 확실하다고 주장.



봉건적 위기에 대한 귀족들의 대응책 : 결코 획일적이지 않음 - 이러한 대응책의 차이에서 이후 수세기에 걸쳐 유럽 각지에서는 서로 다른 경제사가 전개됨 → 백년전쟁 후의 프랑스 특히 남부프랑스의 경우 영주의 양보와 농노의 부담 경감 / 동부유럽의 경우 ‘봉건반동’, 즉 영주들은 봉건적 부담을 오히려 강화시키고 이미 완화되었던 노예적 강제를 다시 가중시킴 / 대륙의 여러 지방에서 일어난 사실상의 농노제 부활.


그러나 정치적 요인들은 어느 정도 원인이 되지만 그것만으로는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사태진행의 차이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음. 모든 징후로 미루어볼 때 최종결과를 결정짓는 데 있어서 경제적 요인이 가장 두드러진 영향을 미쳤다고 상정할 수 있음(그러나 경제적 요인들의 정확한 성격이나 중요성을 파악하기에는 신뢰할만한 자료가 불충분함).


여기서는 당시의 지배적인 경작형태를 살펴봄 : 직영지경작의 새로운 형태(고용노동에 의한 경작 - 13세기 이후?)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종래의 것과 다름. 즉 부역노동제도에서 직영지에 지출되는 노동시간은 모두가 순전히 영주의 잉여였던 반면, 여기서 노동력은 먼저 임금으로 구매됨. 새로운 형태의 경작이 유리하게 되기 위해서는 고용노동이 강제적인 농노노동보다 효율적이라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생산성이 반드시 어느 ‘최저수준’에는 도달해야 함. 요컨대 부역의 금납화와 고용노동에 의한 직영지경작에의 이행에는 다음 두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 - 여분의 노동 / 이 고용노동의 생산력수준이 임금보다 상당한 정도로 높을 것. (요컨대) 고용노동에로의 이행은 노동의 순생산이 높은 경작형태에서 보다 발생하기 쉽고 노동력생산이 낮은 생산형태가 지배적이거나 생산방법이 매우 저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경제사의 시기에는 농노노동이 잔존하기 쉬움. 봉건영주가 취할 수 있었던 또 다른 하나의 방책(고용노동에 의해 영지를 경작하는 것이 아니라 직영지를 소작인에게 대여하는 방책)을 고려하는 경우도 위와 같음.


노동력의 착취가능성 : 노동(또는 소작인)에 대한 영주의 수요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가운데 결정적인 것은 영주의 수요를 만족시켜 줄만한 노동력의 존재유무 뿐 아니라 노동력의 착취가능성이기도 함. 착취가능성이란 보잘 것 없는 보수로도 큰 부담을 짊어지려고 하고 약간의 토지에 대한 댓가로서 무거운 지대의 지불도 불사하려는 정도를 말함. 이 착취가능성의 정도는 농민의 인구수에 비한 ‘농민토지’의 크기에, 농민이 소유하고 있는 가축이나 경작도구의 양에, 토지의 비옥도나 촌락의 농업기술 등에 반비례하는 경향이 있음. 또한 농노노동의 공급에 관한 상태는 영지의 규모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을 고려해야 함(이를 통해 봉건귀족의 서로 다른 계층 사이의 정책대립이나 얼핏보아 모순되게 보이는 많은 것이 설명될 수 있음).


영국에서 14, 5세기와 같은 어려운 시대에 있어서 일련의 사태는 정기소작의 확대와 고용노동의 증대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것 같음. 일련의 사태란 농민층 내부에서의 경제적 분화의 심화이며 이 무렵 농촌 내부에서의 일부 비교적 부유한 농민층의 대두였음.


비판 : 부역의 쇠퇴와 봉건적 농노제의 해체를 실질적으로 동일시하는 일반적인 견해는 명백히 잘못된 것임. (15, 6세기에) 봉건적 수입욕이 상대적으로 커지고 노동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게 되자 부역에 의한 직영지경작에로 바뀌었던 움직임이 역전되었음. 그러나 비록 공납(현물지대나 화폐지대)이 다시 한번 부역을 대체했다고 하더라도 생산자가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하고 그의 생계가 사실상 영주의 의지에 달려있는 한 그 강제적 성격을 반드시 상실하는 것은 아님. 또한 금납화가 항상 봉건적 부담을 실질적으로 경감시킨 것도 아님(12세기에 영주의 주도로 영국에서 이뤄진 금납화경향은 명백히 (계산되어질 수 있는) 부역의 시장가치보다 상당히 높은 가격이었음).


(그런데) 그 범위가 크든 비교적 작든 부역에서 화폐지대로 바뀌는 초기의 전화는 15세기에 극히 강력하게 작용했던 한 경향의 시작에 불과했음. 15세기 말경 봉건질서는 분해되고 여러 가지 점에서 약화되었음. 그러나 봉건제의 종말을 위해서는 영국의 시민전쟁의 세기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음.


러시아역사는 지대가 비록 노동지대에서 화폐지대로 이행된다 하더라도 농노제의 본질적 특성은 지속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함 - 11~12세기 대영주의 영지(boyars)를 경작하는 농노 지위의 농민 / 공납관계 / 14~16세기 대영주의 영지에서 농민층의 부역을 강요하는 경향이 생김(16세기 말에는 부역노동이 급속히 화폐지대를 압도하여 증가).



시장의 발전과 봉건제의 붕괴 : 시장의 발전은 봉건제구조의 해체에 영향을 미치고 봉건제를 약화시키는 힘이 성장하는 토양을 준비. 그러한 한 경제적 정치적 독립을 소유한 자치체로서의 도시의 발흥과 상당히 일치함. 도시공동체가 상업과 계약거래의 독립적인 중심지였던 만큼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봉건제와는 이질적인 존재로서 그것의 성장은 봉건질서의 해체를 돕는 것이었음. 반면에 이 단계의 도시를 자본주의의 소우주라고 여기는 것은 타당치 못함. 도시민은 농노가 부담하는 과중한 부역에서는 벗어났지만 영주에 대해 여전히 특정의무를 지고 있는 장원의 자유소작인과 단지 정도에 있어서만 차이가 날 뿐이었음.


도시공동체가 도시의 수공업에서 가졌던 생산양식은 단순상품생산의 형태를 나타냄. 그것은 즉 비계급적이고 농민적 형태이며 그곳에서 사용된 도구는 수공업자의 소유에 속했었음. 이 초기시대(즉 15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영국에서는 이러한 생산양식을 자본제적이라 할만한 점은 없었음.


도시공동체의 기원에 대하여 : 9세기 이후 생겨난 새로운 그룹의 인구나 새로운 종류의 집단을 다룸(연속성의 부재) / 순수하게 농촌에 기원을 두었다는 주장(도시는 봉건사회의 태내에서 생장했으며 따라서 도시의 주민은 영주에 대하여 어떤 종류의 예속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 / 대상(隊商)의 정착에서 도시의 기원을 구하는 견해 / 도시의 발흥은 봉건영주에 의해 주어진 소베떼(Sauvete) 즉 봉건적 권위에 의해 주어지는 면책특권과 관련시키는 설명(이 견해에 따르면 도시는 자생적으로 성장했다고 하기보다는 봉건영주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도적으로 만든 것임). 현재로서 우리들은 중세도시의 발흥에 관해서는 절충적인 설명, 즉 경우에 따라서 여러 가지 영향력에 상이한 비중을 두는 설명에 만족할 수 밖에 없을 것임.


(하지만) 감히 시론적인 판단을 내린다면 대부분의 도시는 봉건사회의 완전한 이질체라기 보다는 오히려 봉건사회의 주도에 의해 봉건사회의 한 요소로서 발생했던 것 같음.


봉건시대에는 상업이 전혀 없었고 따라서 화폐유통도 이질적인 것이었다는 그릇된 생각을 떨쳐버려야 함. 당시에는 도시를 통제하거나 건설하는 것이 봉건적 수입증대를 위한 중요한 원천으로 여겨졌음은 당연했음.


도시의 독립을 위한 투쟁의 주도권은 처음에는 봉건적 지배에 가장 적게 예속된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 같음. 그 이유는 그들이 외부에서 들어온 상인이었거나 또는 양도장이나 특허장을 가지고 처음부터 특권적인 지위를 보장받았기 때문이었음. 이들은 봉건제의 체내에서 불편한 상태에 놓여있었는데 그 이유는 도시 내에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시민의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생계는 기본적으로 상업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임. 그리하여 이들은 매우 일찍부터 자기들 사이에 조합이나 길드 소위 ‘상인길드’를 만들고, 길드나 사실상 길드의 지배하에 있는 도시자치정부를 위해 투쟁하고 지방의 수공업이나 시장을 통제하여 자기들의 이익을 꾀했던 것임. 영국에서 13세기 및 14세기에 확대된 도시의 자치권투쟁은 폭력의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았음. 봉건적 지배층 스스로가 상업에 종사하고 보다 저렴한 식량의 원천을 확보하기 위하여 국지적 시장을 육성한다는 사실이야말로 분명히 시민들의 자치권에의 요구가 그렇게 격렬하게 저항을 받았던 주된 이유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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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이행논쟁(1) - 돕과 스위지 주장 정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견해: Dobb과 Sweezy의 논쟁


 

(1) Dobb-봉건제 내부 계급간의 세력구조에서 붕괴 요인을 찾음.


1) 봉건제의 정의

봉건제는 기본적으로 농노제. 봉건제의 정점은 강제적인 부역을 통한 직영지의 경영.


2) 봉건제의 붕괴요인

시장, 교환의 확대 자체가 봉건제를 해체한 결정적인 요인을 아니다. 봉건제의 해체요인은 제도내부에서 찾아야 함. 즉 “지배계급의 증대하는 수입욕구와 더불어 나타난 생산체제로서 봉건제가 갖는 비효율성”에서 붕괴의 원인을 찾아야 함. 영주들의 수가 증가하고 화폐취득의 욕구가 커지면서 생산자에 대한 과도한 압력(노동력의 과잉착취)이 나타나고 이는 농노의 도망, 생활수준 감소에 따른 인구의 감소 등을 가져와 노동력이 고갈, 소멸됨.

인구모형에서와는 달리 인구가 외생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인구의 변화도 계급간의 관계 변화로 설명할 수 있다고.


3) 자본주의의 기원-상인들의 자본 축적은 수탈이며 상인부르주아는 자본주의 발전의 방해자.

 중세초기의 상인들에 의한 자본의 축적은 “생산된 것”이 아니라 다른 계급의 잉여를 수탈한 것.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듯 교환이라고 하는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생산된 것이 아니고 독점을 통하여 농촌에서 생산된 잉여를 수탈. 독점은 불완전한 시장으로부터 발생. (수요와 공급의 지역적 괴리와 정보의 부재 하에서 높은 가격의 차이를 이용할 수 있음) 독점적인 지위는 정치적인 특권과 상인조합의 활동에 의해 뒤받침 됨.

상인 부르주아들은 배타적인 상인단체를 만들었고 이들 단체들은 시정을 장악.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특권을 강화하고 수공업자들을 종속시킴. 수공업자들이 외래상인과 직접 계약을 맺는 것이 금지되었고 그 지역의 부유한 특권상인들과 계약을 맺어야 했음.

상인 부르주아는 결코 생산양식으로서의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촉진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방해했음. 상인 부르주아는 봉건세력과 신속히 타협했음. 진정으로 혁명적인 길은 생산자 자신이 자본을 축적하여 상업적인 기능을 담당하게 되고 수공업 길드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본제적인 기반 위에 생산을 조직하는 과정. (임노동 생산)

앞서 본 상인자본에 의한 생산의 종속이 또 다른 길인데 이는 결코 자본주의 태동의 원동력이 아니었음. 상인 부르주아가 득세하던 14세기-16세기: 이는 기본적으로 봉건제의 연속으로 파악해야 함.


(2) Sweezy의 견해


1) 봉건제의 정의-자연경제

봉건제를 농노제로 파악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함. 농노제는 명확히 봉건적이지 않은 체제하에서도 존재할 수 있음. 봉건사회는 오히려 “사용을 위한 생산경제,” 다른 말로 자연경제“로 파악될 수 있음. 즉 화폐거래 및 금전계산의 부재를 함축하고 있음. 봉건체제에도 인구의 증가나 봉건영주와의 전쟁 등 불안정 요인은 존재함. 그러나 이는 농민들의 궁핍화를 가져올 망정 봉건사회를 변형시킬 수는 없음.


2) 봉건제의 붕괴요인-자연경제를 붕괴시키는 것.- 도시의 성장과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에서

봉건제의 외부요인 - 도시의 성장과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에서 찾아야 한다고.

a) Dobb의 논의에 있어서 왜 영주의 수입필요가 증대했는가? 낭비 증가의 이유는 교역의 급속한 확대.

b) 농노의 도망: 도망갈 곳이 없이 도주할 수 있었을까? 도시의 성장이 이를 뒤받침 했을 것.

교역의 증가와 이에 따른 시장을 위한 생산의 증가는 봉건체제에 다음과 같은 영향을 미쳤음:

a). 합리적 분업과 특화체제의 확립은 장원적 생산조직의 비효율성을 부각.

b) 상인들뿐만 아니라 교환경제에 접촉하게 되는 사람들은 사업적인 태도를 갖게 됨

c) 봉건계급의 기호가 증대 - 낭비가 심해짐.

d) 도시의 발흥은 더 나은 삶에로의 전망을 열어줌.

Dobb이 주장하듯 상업이 발전하던 동유럽에서 재판농노제가 나타나기도 했음 그러나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음:

a) 봉건반동에서 볼 수 있는 반례에도 불구하고 저변에 깔린 장기적인 경향을 그래도 농노제의 붕괴. 농촌에 남아있던 농민들의 생활조건도 장기적으로 개선되는 추세.

b) 동부유럽에서 재판농노제가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도시화가 덜 진전되어 있었기 때문임. 즉 농민들의 선택가능성이 없었기 때문. 서유럽의 봉건제는 (도시라고 하는 농민들의 선택권 때문에) 지배계급이 사회의 노동력을 통제하여 그로부터 과잉착취를 못했기 때문.


3) 자본주의의 기원

Marx의 “진정으로 혁명적인 길”을 다르게 해석. 즉 이는 자본가의 사회적 배경(생산자 출신 vs. 상인출신)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님. 오히려 임노동에 기반한 자본제적 생산과 선대적인 생산이 대조되고 있음. 선대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자본제로 이동하는 경우가 혁명적인 길이라고.

14-16세기: 이는 봉건제의 연장으로 파악할 수는 없음. 이는 봉건제도 자본제도 아닌 전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의 단계. 물론 그 스스로 존립할 수 있는 체제는 아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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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 <세계공화국으로> 통째로 요약

제1부. 교환양식



1. ‘생산’에서 ‘교환’으로

․ 사적유물론의 오류 : 국가가 상부구조라는 견해는 근대자본주의 국가 이후에만 성립. 원시사회에는 애당초 국가가 없었고, ‘동양적 국가’에서도 국가장치(군, 관료, 경찰기구 등)는 경제적인 의미에서의 지배계급 위에 있는 것이 아님. 애덤 스미스가 범했던 근대사회에서의 양태를 원시단계에 투영하는 오류는 사적유물론에서도 반복됨.

․ 생산양식이라는 관념은 생산이 일차적이고 교환, 분배가 이차적이라는 잘못된 생각으로 이어짐. 보통 교환은 상품교환과 같은 이미지로 생각되나, 그것은 교환일반 속에서 오히려 작은 부분. 미개사회로부터 공동체 내적으로는 증여와 답례로 구성되는 호수적 교환이, 공동체 사이에서는 폭력적 약탈관계가 형성. 상품교환은 사실상 상품과 화폐의 교환. 교환이 아닌 것이 교환인 것처럼 표상되는 관계

B 재분배

(약탈과 재분배)

A 호수

(증여와 답례)

C 상품교환

(화폐와 상품)

D ?

 


2. ‘교환’의 현재적 의미

․ 마르크스는 사실 ‘생산’이 아니라 ‘교환’, 또는 그보다 넓은 의미로 ‘교통’이라는 개념을 자주 사용. 여기서 교통은 가족이나 부족과 같은 공동체, 공동체 사이의 교역 또는 전쟁까지 포함하는 것. ⇒ 모제스 헤스의 영향. 『독일 이데올로기』, 『경제학․철학초고』등에 나타남.

․ 마르크스의 ‘생산’개념의 초점 : 자연과의 물질대사. 생산과정에서의 폐기물에 대한 사고. ⇒ 합리적 농업과 자본주의의 양립 불가능성.


3. 다섯 가지 사회구성체

․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경제학 연구에 전념하면서 ‘교통’ 개념 사용을 중단함. 그러나 이 때문에 마르크스를 비판하기 보다는 『자본론』에서의 작업을 국가와 네이션에도 적용해야 함. 근대의 자본제경제, 국가, 네이션은 기초적인 교환양식의 변형과 접합에 의해 역사적으로 형성.

․ 교환양식의 관점에서 파악한 사회구성체

 └→ 씨족적 사회구성체 : 호수(互酬)가 지배적. 공동체 사이에선 약탈-재분배가 존재.

 └→ 아시아적 사회구성체 : 비트포겔이 말한 수력사회. 중요한 것은 수력사회가 발전시킨 문명, 즉 국가기구의 출현.

 └→ 고전고대적 사회구성체 : 아시아적 사회구성체인 제국의 ‘아주변’(submargin)으로 성립된 도시국가. 제국의 문명을 향수하면서 동시에 부족적인 호수성을 유지. (그리스의 폴리스와 노예제)

 └→  봉건적 사회구성체 : 서유럽, 일본 등 제국의 아주변. 서유럽에서는 집권적 국가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교황과 황제의 항쟁, 영토간의 항쟁 속에서 도시와 상업이 자립.

 └→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 : 상품교환의 우위. 약탈-재분배 관계는 봉건적 특권을 빼앗긴 귀족들이 국가 관료로서 토지세를 배분받으면서 변형된 채 유지. 세금을 통한 복지국가의 유지. 호수적 교환은 ‘네이션’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통해 유지.

 └→  어소시에이션 : 상품교환이라는 위상에서 생겨난 자유로운 개인 위에서 호수적 교환을 회복하려고 하는 새로운 운동. 이는 역사적으로는 보편종교가 설명하는 ‘윤리’로서 나타남.

․ ‘세계제국’과 ‘세계경제’ : 자본제 이전의 세계는 ‘세계제국’, 이후의 세계는 ‘세계경제’(월러스틴)



제2부. 세계제국



1장. 공동체와 국가


1. 미개사회와 전쟁 (씨족적 사회구성체)

․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미개사회의 원리 : 근친상간 금지는 여성의 호수적 교환관계를 나타낸다. 즉 사회를혈연적인 좁은 범위로 축소시키지 않기 위해서, 말하자면 ‘문화’를 ‘자연’으로 환원시키지 않기 위해서 필요함. 그러나 이 미개사회의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폐쇄적이고,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시스템.

․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미개사회에서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를 발견하지만, 그것은 바깥 국가로부터의 독립과 수렵․채집이 가능한 자연조건이 갖춰져야 가능한 것. 아메리카 대륙의 미개사회는 잉카, 마야 아스텍 등 ‘아시아적 국가’의 주변부에 있었기 때문에 생존이 가능했음.

․ 생산력 발전이 국가형성(×), 국가에 의한 집단적 농업과 장시간 노동 강제가 생산력 발전 유발(○)


2. 국가의 탄생 (아시아적 사회구성체)

․ 국가는 공동체 속에서 발생하지 않으며, 그것은 본래 하나의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들을 계속 지배하는 형태. 지배자와 수탈당하는 자의 관계가 지속적이기 위해서는 약탈-재분배가 마치 호수적 교환인 것처럼 표상되어야 함.

․ 칼 슈미트 “정치적인 것의 특유한 영역은 ‘친구와 적’의 구별에 있다” ⇒ 국가는 다른 나라를 상정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 국가는 그 내부에서 폐지할 수 없다.


3. 아시아 전제국가와 그리스․로마 (고전고대적 사회구성체)

․ 동양적 전제국가의 출현 : 아시아적 국가에서는 지배자의 공동체는 사라지고 피지배자의 공동체만 남음. 피지배자의 공동체에 국가가 간섭하는 일은 거의 없음. 이 관계의 최상위에 제국이 존재. 이들 제국은 보호와 복종이라는 ‘교환’에 의해 많은 주변 국가를 지배 하에 놓고 그 범위를 넓혀 ‘제국’이 됨. 막스 베버가 말한 관료제의 원형이 출현했다고 할 수 있음. 그러나 공동체의 호수원리는 그대로 남아있음.

․ 그리스 민주주의 : 부족적 공동체의 평등주의와 호수원리가 관철됨. 이집트나 페니키아 문명에 있었던 문명의 많은 것을 계승하면서도 집권적 국가체제만은 받아들이지 않음. ⇒ 제비뽑기에 기초한 아테네식 민주주의 출현.


4. 봉건제와 자유도시 (봉건적 사회구성체)

․ 봉건제는 로마제국의 아주변 즉 게르만의 부족사회에서 성립된 것. 로마제국의 봉건제에서 주군과 가신의 쌍무적 계약관계는 호수원리. 이것은 왕이나 제후들의 전쟁에 의한 분산화, 다중심화가 통일적인 국가형성을 방해했던 것. 봉건제와 병행한 농노제는 아시아적 공납제와는 다르게 농노가 토지를 소유하고 강한 농업공동체 존재.

․ 제국의 집권성이 약하므로 황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교황 측에 붙어 다양한 특권을 얻는 로마교회 등장. 피렌체의 코무네 선언(1115년), 쾰른 대주교의 ‘자유를 위한 성서공동체 결성’(1112년) ⇒ 1871년 파리코뮌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운동의 모체가 됨.


5. 아주변의 행방 ( “ )

․ 부르주아사회를 육성한 것은 봉건제. 서양의 일반적 특징은 중핵, 주변, 아주변이라는 위치와의 관계에 기초한 것. 일본 봉건제도 중국 제구의 아주변에 위치함으로써 가능. 조선이 중국의 제도에 완전히 편입되어 동양적 국가가 구축된 것과 상반 됨.

․ 일본 봉건제는 쌀농사에 수반되는 공동체적 소유와 구속이 있었지만, 농민은 실질적으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음. 16세기에는 사카이나 교토 같은 자치도시 존재. 조닌(부르주아)의 무화적인 활동도 계속 됨. 일본의 사회구성체는 봉건적이지만 아시아적이지 않음.


※ 정리 : ① 중앙집권적 제국 성립 (동,서 아시아)  ② 제국의 바깥(아주변)에서 중핵 문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집권적 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고전고대적 도시국가와 봉건적 사회구성체 등장 ⇒ 이후 그곳에 중앙집권적 국가가 형성되나, 이는 아시아적 국가가 이미 이룬 수준을 따라잡은 것에 불과.

 ⇒⇒ 국가 일반에 대한 고찰에 있어서 동양적 전제국가에 주목해야 함.



2장. 화폐와 시장


1. 상품교환이란 무엇인가?

․ 상품교환의 성립 조건 : ①공동체 바깥에 존재. 공동체 내부의 교환은 호수적 교환이 되지 상품교환이 되지 않음. “상품교환은 공동체가 끝나는 곳에서,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 또는 그 성원과 접촉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마르크스)  ②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는 생산물 교환보다 약탈이 선행하므로, 상품교환이 성립하려면 약탈이 배제된 자유로운 합의에 기초해야 함. 이는 역설적으로 폭력을 독점함으로써 다른 폭력을 금지하는 국가와 법이 선행되어야 가능.


2. 미개사회와 원시사회

․ 폴라니는 트로브리안드 제도의 쿨라 교역에서 유통되는 선물인 바이구아(vaygue)라 불리는 재화나 보물을 화폐라고 지적했지만, 이와 같은 교환은 간(間)공동체적인 교역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공동체 내부의 호수적 교환.

․ 원시단계는 미개사회가 아님. 미개사회는 바깥의 국가가 간섭하지 않으면 그 사회시스템을 영속시킬 것. 미개사회는 교환양식 A를 순수하게 고찰할 수 있음. 반면 원시사회는 교환양식 A,B,C가 동시에 존재. 원시단계에서도 자신의 환경에서 생산할 수 없는 것을 반드시 다른 공동체에서 얻을 필요가 있었는데, 이 과정에는 호수원리가 작동하지 않음.

․ 국가와 상품교환은 상보적 : 상호계약을 강제하는 힘을 국가만이 가짐. 다시 말하면 상품교환은 교환양식 B를 전제하는 것(상업에 대한 과세).


3. 화폐의 기원

․ 고전파의 화폐론 : 화폐는 각 상품에 투여된 노동가치를 표시하는 것. 리카도학파 사회주의자는 화폐를 폐지하고 노동시간을 표시하는 노동증표의 사용을 주장.

․ 마르크스의 가치형태론 : 애덤 스미스의 생각(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가진다)과는 다르게 상품은 다른 상품의 사용가치로 표현된다. 상품a는 상품b의 사용가치에 의해 표시 됨. 상품b는 사실상 화폐(등가물). 여기서 실제로 화폐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상품b만이 등가형태(일반적 가치형태)여야 함. 한 상품만이 다른 모든 상품과 교환가능하게 되었을 때 화폐가 등장.

 └→ 생각의 전도 : 금이나 은이 그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화폐인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특별하기 때문에 화폐라고 생각. 홉스의 사회계약에서와 같이 화폐는 상품들의 사회계약인 것. 상품교환이 만드는 세계는 인간의 동의에 기초하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의지를 넘어선 객관성을 가짐.


4. 상인자본과 대금업

․ 화폐에 의한 교환은 자유롭고 대등한 관계를 초래하지만, 동시에 등가형태와 상대적 가치형태 즉 화폐와 상품이라는 비대칭적인 관계를 수반. 화폐를 가진자가 더 우월. 자본가는 이 화폐를 항상 새로운 유통에 맡김으로서 가치의 끝없는 증식을 추구.

․ 화폐에는 상품과 교환할 권리가 있지만 상품에는 화폐와 교환할 권리가 없음. 마르크스는 상품이 화폐와 교환될지 어떨지를 ‘목숨을 건 도약’이라 함. (‘에서 ’의 과정) 이런 위험을 당분간 피하는 것이 ‘신용’. 신용제도는 자본운동의 회전을 가속화/영속화 함. 이 과정에서 ‘빌린 자본’, 즉 상인자본과 대금자본을 고려해야 함.


5. 국가 ․ 화폐 ․ 교역

․ 화폐는 상품들간의 사회계약이다 : ① 화폐는 국가가 유통시킬 수 없음. 국제적으로 통용도지 않는 화폐라면 국내에서도 통용되지 않음. 소련연방과 같이 강한 국가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말기에는 국내에서 루블이 통용되지 못함.   ② 세계화폐가 상호신용에 의해 성립한다는 견해는 화폐가 금일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 미국의 달러-금 태환 정지 이후에도 달러가 세계화폐로 존속 중. 그러나 금이 태환되어 유출되어버렸기 때문에 태환을 정지시킨 것인데, 만약 금준비가 불필요하다면 금의 유출을 정지시킬 필요는 없음. 그러므로 여전히 금=세계화폐.

․ 상인자본은 국가간 가치체계 차이에서 이윤을 얻음. 그리스인들은 그런 상인을 경멸함. 소크라테스, 플라톤은 그런 상인 소피스트들을 비난.

․ 도시와 상업의 발전은 공동체나 국가를 넘어서 통용되는 화폐의 힘. 이로 인해 봉건제는 붕괴하고 그 결과 절대주의 왕권국가 성립. ⇒ 부르주아와의 연대를 통해 봉건적 특권 폐지. ‘경제’의 자율성 인정.



3장. 보편종교


1. 보편종교와 예언자

․ 네 번째 교환양식의 특징 : 정치적 국가조직을 거부. 또한 시장경제(C)위에서 호수적인 공동체(A)를 회복하려는 것. 이것은 다른 세 가지 교환양식과 달리 이념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역사적으로는 보편종교의 형태로 나타남. 사회주의는 본래 종교의 형태로 태어남.

․ 예언자 종교에는 초월적․초감성적인 무언가에 대한 호수적 관계로 드러나는 주술적 영역이 강하게 남아있음. 반면 주술에서 종교로의 변화는 사회적으로는 공동체에서 국가로의 이행에 대응하는 것. 종교의 보편화 또는 일신교의 출현은 국가의 보편화 즉 세계제국의 형성에 수반되는 현상. 보편종교는 현실적으로 세계제국의 지배수단이 됨.

․ 제4공간과 예언자 : 예수, 마호메트, 불타 모두 예언자이자 카리스마적 개인. 이들은 사제계급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기구에 대립. 또한 도시에 기반을 가지고 또 그곳에서 퍼져나감. “농민이야말로 신의 뜻에 들어맞는 경건한 인간의 특수한 전형으로 간주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완전히 근대적인 현상이다.”(막스 베버) ⇒ 보편종교(앞에서 말한 보편종교와는 다른 개념?)는 제3면(C)의 도시공간에서 출현하고 그로부터 제4면의 공간을 ‘개시’한 것.


2. 자유의 상호성을 위하여

․ 니체의 관점에서 보편종교의 출현은 주술=호수적 교환을 폐기하고 화폐에 의한 교환이 지배적이 된 시점에서 생기는 것. 예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직접적 교환을 배척하고 “만약 누가 네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돌려 대어라.”라는 대응을 함.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그리스도가 몸을 가지고 전 인류의 ‘부채’를 지불한 것으로 해석.  ∴ 보편종교는 상인자본주의, 공동체, 국가에 대항하여 호수적인 공동체 즉 어소시에이션을 지향하는 것.

․ 그러나 종교가 현실적으로 확대되고 정착하게 되면, 국가의 종교가 됨. 서유럽도시에서 일어난 다양한 종교개혁은 새로운 문맥에서 보편종교를 회복하려는 것. ‘천년왕국’운동. 독일 농민운동을 이끈 토마스 뮌처, 영국 청교도혁명에서의 수평파(Levellers)와 개척파(Diggers) 등. 영국 부르주아혁명의 주요 시사점은 부르주아가 아닌 계급에 의한 사회운동으로 게다가 종교적 운동으로 개시되어 최후로 그것이 배제된 시점에서 성취되었다는 것.

․ 칸트는 타인을 목적으로서 다루라는 ‘자유의 상호성’을 주장. 이 때 타자는 살아있는자 뿐만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타자를 포함(환경 파괴에 대한 감수성 필요). 칸트적 윤리는 보편종교에서 유래. 윤리=교환양식. (보편종교의 운동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지는 않음)




제3부. 세계경제



1장. 국가


1. 세계제국에서 세계경제로

․ ‘약탈-재분배’ 관계가 우위인 세계제국들의 연결 ⇒ 세계경제의 탄생. 세계경제 하에서 주권국가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모두 일국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근대세계체계)

․ 세계경제의 등장으로 중심과 주변의 형성. 이전에 제국의 아주변이었던 유럽이 중심이 되면서 종래의 중심부가 주변화. 그런데 이전 세계제국에서 중핵과 부분의 차이는 얼마간 남게 됨. 러시아나 중국에서 일어난 사회주의혁명은 그러한 시도.


2. 절대주의국가의 탄생

․ 절대주의의 조건 : ①파괴력있는 화기의 발명으로 귀족=전사신분을 무력화시킴. ②왕과 도시 상공업자가 결탁하면서 봉건제후의 조세를 비롯한 특권 폐지, 관세와 소득세를 얻기 위해 무역 추진. ⇒  귀족세력은 절대주의 국가기구 속에 흡수되어 정착. 방대한 관료조직과 상비군 형성.


3. 국가와 폭력

․ 국가는 정부와는 다른 것이고, 국민의 의지로부터 독립된 의지를 가지고 있음. 국민이 정부를 선출할 수는 있지만, 국가를 선출할 수는 없다. 시민혁명 이후, 국가․정부․국민의 관계는 주주․경영자․노동자의 관계. (절대주의 왕권국가에서 국가의 존재는 확실했음. 그러나 시민혁명 이후 우리가 국가를 보려하면 정부만을 발견하게 됨. 주주가 경영자를 해임하거나 기업을 매수할 때 사람들이 자본(주주)의 실체를 실감하게 됨. 마찬가지로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여실하게 느끼는 것은 전쟁.)

․ 홉스의 주장을 원용해 생각해보면, 국가는 복종과 보호의 교환으로서의 ‘사회계약’이 소위 사회계약에 선행하고 있음. 홉스의 주장은 절대주의 왕권 옹호를 위해 쓰여짐. “주권자 이외의 모든 이는 그의 국민subject이다.” 홉스는 원자론과 무관.


4. 관료지배와 복지국가

․ 헤겔에 따르면, 의회는 사람들의 의견에 의해 국가정책을 결정해가는 장(場)이 아니라, 관리들에 의한 판단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마치 그들 자신이 결정한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데 있음. 근대 자본주의에서 관료제의 팽창은 봉건제가 행정기능을 왜소화시키고 자기 자신의 경제적 존립에 불가결한 범우 l안에서만 예속민의 경우를 생각하는 것과 대비되는 ‘가부장적 가산제’이다.



2장. 산업자본주의


1. 매뉴팩처의 시대로

․ 상인자본은 본래 원격지와의 자연적, 역사적 조건의 차이에 따른 가치체계 차이에서 생기는 잉여가치를 챙겨왔다. 그러나 ‘세계시장’ 내 교역에서는 스스로 생산을 조직하면서 적극적으로 가치체계의 차이를 만들어냄. 기계의 채용이 자본제 생산을 낳은 것이 아니라 매뉴팩처에서의 분업과 협업의 조직적 발전에서 기계의 채용이 생김.

․ 세계시장에서 농노제 등 전근대적 생산양식은 사라지지 않음. 이는 상인자본주의가 기본적으로 국가들 간의 가치체계의 차이에서 이윤을 발견하는 것이며, 각각 어떤 생산양식을 취하는가에 무관심.


2. 생산=소비하는 프롤레타리아

․ 산업자본과 상인자본은 차이가 있나 없나?

 └→ 막스 베버 : 산업자본가에게는 프로테스탄트적 윤리가 있다. ⇔ 좀바르트

 └→ 모리스 돕 : 생산과정 중시(차이 있다) ⇔ 폴 스위지 : 유통과정 중시(차이 없다)

 └→ 마르크스 : “자본은 유통에서 생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유통을 떠나서도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이라는 유통과정에서 노동력이라는 특수상품을 발견하고 이를 고용하여 생산한 상품(’)을 파는 것. ⇒

․ 영국에서 산업자본주의가 발전한 것은 ‘소비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가 출현했기 때문. 이것이 산업자본이 상인자본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으로서, 상인자본이 주로 사치품을 취급하는 것과 대조됨. (생산수단(토지)를 잃은 도시빈민의 출현만으로 산업자본주의 발전이 설명되지 않는다!)

․ 상인자본이 국외를 향했다면, 산업자본은 국내를 향함. 프롤레타리아가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농촌 근방의 새로운 도시에서 산업가가 상인이 되어 직접 대규모로 상업을 위해 생산하는 것.


3. 기술혁신에 의한 존속

․ 상인자본과 달리 산업자본은 생산과정에서 잉여가치를 얻지만 이는 아직 잉여가치의 실현이 아니다. 잉여가치가 진짜로 실현되는 것은 그 생산물이 유통과정에서 팔릴 때. (개별 자본 차원에서 잉여가치 운운하는 것은 불가) ⇒ “자본은 유통에서 생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유통을 떠나서도 생길 수 없는 것이다.”

․ 상대적 잉여가치는 노동자를 직접적으로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로서의 노동자가 스스로 만든 것을 다시 사는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 기술혁신은 자본 자체가 존속하기 위해 끊임없이 강요되는 것.


4. 자기재생적 시스템

․ 산업자본의 잉여가치는 노동자가 노동력을 팔고 그 생산물을 소비자로서 다시 산다는 광의의 ‘유통과정’에만 존재. ⇒ ①노동자는 자본가에 대해 단순히 ‘예속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②개별자본의 운동과정만으로 잉여가치를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

․ 대량생산-대량소비의 구축 ⇒ 자본주의는 자기재생적 시스템.


5. 자본에의 대항

․ 노동력과 토지 : 자본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것. 수요가 없다고 폐기할 수 없고, 부족하다고 증산 할 수 없음. 이것에 기초해 공동체는 상품교환의 원리에 대해 끝까지 저항.

․ 선진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수정주의로 전환, 기존에 혁명을 고집한 자들은 후진자본주의 국가에서 혁명을 발견하려 함. 그러나 이는 자본주의의 중핵을 공격하는 것이 되지 못함. 이는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 산업자본을 생산지점에서의 착취라는 관점에서 보면, 본질을 이해 할 수 없음.

․ 유통과정에서 자본은 프롤레타리아를 강제할 수 없음. 일하는 것을 강제할 수 있는 권력은 있지만, 구입하는 것을 강제할 수 있는 권력은 없기 때문. 유통과정의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보이콧.



3장. 네이션


1. 네이션의 탄생

․ 오늘날의 네이션=스테이트는 전부 옛 세계제국 또는 근대 제국주의에 의한 분절화의 결과물.

․ 세계제국은 자신의 지배 하에 있는 다수의 부족적 국가에 대해 간섭 없이 통치. ⇒ 신성로마제국의 해체로 왕, 봉건제후, 교회 등이 나란히 서있는 형태로 싸우는 단계로 이행. ⇒ 시민계급과 국왕의 결탁 하에 절대주의 국가의 성립.

․ 루터의 종교개혁 : 봉건세력으로서의 로마교화가 가진 경제적 지배에 대한 반항. 제국의 법이나 교회법을 넘어선 주권국가나 봉건적 제도들로부터의 해방을 구하는 농민전쟁 야기.

․ 절대주의 국가의 의미 : 그때까지 다양한 신분이나 집단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 주권자 아래서 신하로서 동일한 지위에 놓여 ‘인민’(people)이 되는 것. 다양한 지역적 공동체성이 제거되고 신하로서의 동일성이 형성되는 과정이 집단적으로 ‘망각’되지 않는 한, 네이션은 확립되지 않는다.


2. 공동체의 상상적 회복

․ 네이션은 계몽주의의 결과물(베네딕트 앤더슨). 내셔널리즘은 종교 대신에 ‘상상력 가득한 응답을 해왔다’.

․ 살아가는 자들 간의 호수뿐만 아니라 죽은 자(선조)와 이제부터 살아갈 자(자손) 사이에도 상호적인 교환을 상정했던 농업공동체의 해체로 무너진 공동체 내부의 호수적 관계를 네이션이 대체. (‘국민’이라는 호명) 네이션이란 상품교환 경제에 의해 해체되어 있던 공동체의 ‘상상적’ 회복에 다름 아님.

․ 네이션의 감정이 형성되는 것과 상상력의 지위가 높아지는 것은 역사적으로 평행하는 사태. 애덤 스미스는 공감(동정)이란 상대의 몸이 되어서 생각하는 상상력이라 말함. 그의 후예들은 ‘자유방임’과 ‘공감’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스미스가 자유방임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초래되는 폐해를 깨달았다고 말하며 그를 후생(厚生)경제학의 선구자로 이해함. 그러나 스미스에게 자유방임적인 이기심과 공감이 모순되지 않으며, 이 ‘공감’이라는 능력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에서 비로소 출현.


3. 보로메오의 매듭

․ 스미스의 공감은 프랑스혁명의 ‘우애’와 같은 것. 본래 우애는 기독교적 기원을 갖는 것이지만, 혁명 과정에서 네이션에 흡수. 네이션에 대항한 19세기 전반 사회주의 속의 우애도 역시 내셔널리즘으로 귀착.

․ 칸트는 감성과 오성을 예리하게 절단. ‘도덕감정’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도덕법칙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에서 생기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님. 오성과 감성의 분열은 상상력에 의해 결합 됨. (오성-감성-상상력)

․ 네이션에서 현실자본주의 경제가 초래한 격차, 자유와 평등의 결여가 상상적으로 메워지고 해소 됨. 네이션을 통해 국가와 자본주의 경제라는 서로 다른 교환원리에 서는 것이 상상적으로 종합됨. (국가-시민사회(경제)-네이션)

․ 헤르더의 국가와 민족 : 풍토, 언어, 그리고 언어공동체로서의 민족이라는 감성적 존재에서 출발. ⇒ 감성을 이성화 하는 것.

․ 헤겔의 국가와 민족 : 민족이 가족이나 부족과 같은 감성적 기반에서 유래하며, 또 그것은 (가족, 공동체를 넘어선) 시민사회를 다시 넘어서서 실현되는 고차원 즉 국가에서만 나타남. (감성의 단계에 이성의 맹아가 있다는 단계론) 여기서는 네이션이 상상물에 지나지 않아 자본=네이션=국가의 매듭이 지양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음.



4장. 어소시에이션이즘


1. 칸트의 구상

․ 어소시에이션이즘 : 상품교환 원리가 존재하는 도시적 공간에서 국가나 공동체의 구속을 거부함과 동시에 공동체에 있던 호수성을 고차원적으로 회복하려는 운동.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목적으로 다루는’ 사회.

․ 칸트의 종교론 : 교회=국가적인 형태의 종교를 비판. 그러나 종교가 도덕적 법칙(자유의 상호성)을 개시하는 한에서 종교(=순수이성종교)를 인정.

․ 칸트의 구상 : ①상인자본의 지배를 거부한 소생산자들의 어소시에이션. ②국가들이 그들의 주권을 양도함으로 성립하는 세계 공화국.

  └→ 구성적 이념 : 칸트는 프랑스 혁명이 성급한 ‘외적 혁명’으로 인해 그 오류를 수정하는데에 수세기도 더 걸릴 것이라고 비판함과 동시에, 그것이 무한히 멀리 떨어진 미래라 할지라도 이 지상에 실현될 ‘신의 나라’(세계공화국)로의 제일보가 된 것을 높이 평가. 이런 자코뱅주의의 ‘구성적 이념’을 비판하면서도 규제적 이념은 승인.

  └→ 규제적 이념 : ‘초월론적 가상’으로서 이를테면 ‘역사의 목적’과도 같은 것. 사회주의는 환상적인 거대서사일 뿐이라고 비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비판하는 이념은 사실 ‘구성적 이념’이고, ‘규제적 이념’과는 다른 것. 규제적 이념은 결코 달성되지 않기 때문에, 끊임 없는 현상에 대한 비판으로서 계속 존재.


2. 프루동의 구상

․ 19세기 사회주의자의 시도는 혁명에서 잃어버린 ‘평등’과 ‘우애’의 가능성을 되찾는 것. 그러나 프루동은 ‘사회주의를 ’자유‘에 기초해 세우려고 함.

․ 프루동은 분배적 정의에 반대하고 ‘교환적 정의’를 내세움. 즉 부의 격차를 낳지 않는 교환시스템 즉 자유의 상호성 실현 중시. 자코뱅주의 혁명에 반대하고 국가에 의하지 않은, 자기통치에 의한 질서 추구.

․ 또한 ‘자유’를 ‘우애’보다 강조. 우애에 기반하여 사회를 바꾸려는 자는 거의 틀림없이 국가로 향함. (국가사회주의나 나치스의 경우) 오히려 자유와 경쟁을 긍정. ⇒ 생산자협동조합(노동자이면서 경영자인 주체의 탄생), 대체화폐 ․ 신용화폐(화폐의 왕권 폐기) ⇒ 국가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로부터 자립한 네트워크 공간의 형성.


3. 경시된 국가

․ 마르크스와 프루동의 대립을 정치혁명인가? 경제혁명인가? 하는 점에서 찾는 것은 옳지 않다. 마르크스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라살의 ‘국가 사회주의’임. 라살은 독일사민당 「고타강령」(1875년)에서 국가에 의해 생산자협동조합을 육성한다는 계획을 주장.


4. 어소시에이션이즘을 위하여

․ 루소는 국가를 그 내부 즉 성원(국민)에서 보면서, 국가의 내부에서 왕정을 무너뜨리면 국가의 초월성이 사라진다고 믿음. 프루동은 루소가 당연하게 간주한 집권적 국가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

․ 파리코뮌이 가능했던 것은 1871년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해 프랑스의 국가주권자가 실추되었기 때문. 그러나 파리가 전승국 프러시아에 의해 지지된 프랑스 신정부의 지배 하에 속하는 것은 자명함. 국가적 지배가 존속되는 속에서 터진 파리코뮌은 2개월로 끝나고, 그 내부에서는 바깥의 적으로부터 방위하기 위해 집권화를 강요하는 ‘다수파’가 지배적. 러시아 혁명도 그런 국가 방위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함.

․ 마르크스는 프루동을 따라 국가를 시민사회의 자기소외태로 인식. 봉건 군주제하에서 주권은 외부에 대해 존재했을 뿐이지만, 절대왕정 해체 이후 사람들은 주권이 먼저 외부에 대하여 있다는 것을 잊어버림.

․ ‘화폐의 왕권 폐기’라는 프루동의 주장 또한 화폐가 한 나라 바깥에서 통용되는 초월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것. 그의 협동조합론도 산업자본이 발달하지 못한 프랑스의 매뉴팩처 단계의 직인적 노동자만을 염두에 둔 것.

․ 국가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칸트가 간파한대로, 국가들을 ‘위로부터’ 억압하는 국제연합을 만들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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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과 박헌영, 다른 길을 간 두 혁명가의 초상

 

      

 

 

 

지난달에 이 두 권의 책을 함께 읽고 몇 마디 적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시간을 낸다.


조봉암과 박헌영. 이 둘은 모두 해방 이전 조선 공산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거목들이다. 하지만 해방과 함께 맞이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 다른 길을 택해 결국 사실상의 정치적 반대파가 되고, 둘 모두 각각 남한과 북한에서 부당하게 간첩 혐의를 뒤집어쓰고 법살 당했다. 정태영의 <조봉암과 진보당>과 안재성의 <박헌영 평전> 모두 이 법살의 희생자들의 정치적 명예 회복을 염두에 두고 쓰여졌다. 하지만 이러한 저자들의 목적이 나의 관심사는 아니다. 어차피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의 스탈린주의적 편향을 비판하면서 독자적 길을 걸은 조봉암이 북한의 간첩이 아니라는 것과, 평생을 조선공산당의 정치적․이론적 지도자로 살아왔던 박헌영이 반공주의의 본산인 미국의 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은 상식 있는 이들이라면 모두 동의할 만한 내용 아닌가?


오히려 나는 이 둘을 통해 해방 전후 공산주의 운동이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정치적 비극성을 발견한다. 조봉암은 왜 둘도 없는 동지 박헌영을 향해 매서운 비판의 문건을 날려야만 했는가? (비공개로 전하려던 조봉암의 계획과는 달리 미군정의 수색에 의해 문건이 발견되면서 부득이 공개되고 말았지만) 이 문건을 받게 된 박헌영은 왜 성실하게 토론에 임하지 못하고 조봉암을 축출하는 것으로 사태를 종결하고야 말았는가?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 조봉암, 박헌영 개개인의 최종적인 정치적 결과물에 대한 평가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조봉암과 진보당>에 실린 박헌영을 향한 조봉암의 편지를 읽어보면 상당히 합리적이고 근거있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소양국간의 대결로 치닫고 있는 국제정세를 고려하여 지나친 친소적 노선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 않을 수 있으며, 신탁통치 문제와 관련하여 대중을 설득시키려는 노력에 힘써야 한다는 등의 주장들 말이다. 어쩌면 당시의 극단적인 정치적 대립 상황에서 그의 그런 구상은 꿈 같아 보이는 측면도 있지만, 그런 평가는 사실 사후적인 결과를 중심에 두고 하는 것이고 당시 상황에서 정치세력들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였다고 보는 편이 옳다. 그런 면에서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은 지나치게 코민테른의 지령을 조선 정세에 무매개적으로 대입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이에 대한 조봉암의 비판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약간 저자의 주관적인 냄새가 나긴 하지만) <박헌영 평전>에 묘사된 박헌영의 정치적 토론 자세나 정세적 치밀성으로 미뤄봤을 때, 박헌영이 이런 비판을 조금이라도 수용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은 다소 미스테리다. 설령 박헌영이 스탈린주의자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김일성이 ‘권력형 스탈린주의자’라면 박헌영은 그보다는 죄질(?)이 덜한 ‘이론형 스탈린주의자’라고 볼 수 있고, 그래서 박헌영의 합리적인 대처가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 사건 이후 조봉암은 철저한 대중지향적 노선에 기반하여 현실정치 참여로 방향을 잡았고, 박헌영은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의 반공주의에 맞선 전국적 저항을 통해 조선공산당 사수에 힘을 쏟는다. 어차피 둘 다 50년대 한반도 정치에서 축출 당했다는 면에서 패배자임에 틀림없지만, 최근 남한 진보정치 내부의 평가 움직임을 봤을 때, 둘 간의 경쟁에서 조봉암이 ‘역사적’ 승리를 거둔 듯 하다. 작년 조봉암 법살 50주기를 맞아서 주대환의 사회민주주의연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모두 그의 정신을 이어받자는 토론회를 열면서 조봉암 노선의 복권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조봉암을 대한민국 건국공신으로 치켜세우는 사민련의 입장이나, 그의 진보당 건설 투쟁을 현재적으로 해석하면 ‘반MB연대’라고 주장하는 민주노동당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조봉암의 법살이라는 비정상적인 정치 행태가 현재까지 내려져오면서 노무현의 죽음과 노회찬 X-파일 사건 유죄 판결을 낳았다는 진보신당 조현연 교수의 주장도 말이야 맞는 말이래도, 그런 주장이 미래지향적 정치적 비전을 형성하는데 그리 중요한 주장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진보신당 장석준 정책실장이 말한, 미소대립이 직접적으로 투영된 한반도 현실 속에서 평화통일이라는 구상(그는 이를 당시 반둥회의로 대표되는 중립국 제3세력 노선과 맞닿아있다고 말한다)을 제시했던 조봉암의 국제정치에 대한 혜안을 본받아 21세기에 걸맞는 정치적 리더쉽을 형성해야 한다는 주장에 찬성표를 주고 싶다. 이런 관점 하에서라면 나는 앞으로 조봉암 노선의 적극적 해석을 통한 진보정당의 비전형성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


하지만 이런 결론을 내리기 이전에 단서들을 몇 가지 달아야 한다. 내가 제시하려는 단서들은 이런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조봉암의 노선이 더 현실적이고 대중정치에 부합하는 것이었다면, 왜 그의 시도는 법살이라는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버렸는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 ‘그래서 이승만이 나쁜 놈이다’가 제시되는 건 부당하다. 왜냐하면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박헌영도 변명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박헌영과 조선공산당도 잘 해보려 했지만, 미군정을 등에 업은 우익들의 테러가 만연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은 탄압에 의해 지하 비합정당이 되어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대구총파업, 4.3항쟁 등 대중들의 자생적 봉기를 끝까지 책임지고 지도하려는 노력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박헌영의 북한행도 이런 상황에서 조직의 붕괴를 막으면서 대중투쟁에 대한 지도를 유지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조공의 이런 노력을 언급하지 않고 이들의 스탈린주의적 오류만 지적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사실 조봉암이 제헌의회 선거에서부터 다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이 엄혹한 투쟁의 시기에 침묵을 지켰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니었을까? (다만 인터넷 참세상에 소개된 책에서처럼 조봉암을 변절 지식인이라 표현하는 것은 좀 과하다는 생각이다.(변절 지식인 조봉암과 비극의 뿌리 조선공산당))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조봉암의 민주적 사회주의 노선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는 단지 그가 역사적으로 성공한 북유럽식 사민주의와 비슷한 내용을 주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실패가 예정되어 있던 코민테른식의 사회주의를 거부하고 자주적으로 국제정세를 읽으며 제3노선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맥락에서 봤을 때에도 코포라티즘의 물적 토대가 전무했던 50년대 한국 상황에서 텍스트적 유사성만을 근거로 조봉암이 개량적인 북유럽식 사민주의를 주장했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적 상황을 무시한 해석이다.

그와 비교해 박헌영은 고지식하다고 할 정도로 조직적인 인간이었고, 그래서 그 조직(코민테른과 조선공산당)의 오류가 그대로 박헌영의 오류가 되어버렸다. 안재성의 설명대로 박헌영이 김일성의 주전론에 거부감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라 해도 전쟁에 반대하는 실제적 행동을 하지 않은 이상 그도 전쟁의 공범이긴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진보운동의 역사에서 박헌영을 버리고 조봉암을 택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옳지 않다. 조봉암의 현실주의는 비슷한 시기에 터져 나온 노동대중들의 자생적 투쟁을 우회한 현실주의였다. 당시의 대구총파업, 4.3항쟁등이 조선공산당의 모험주의의 소산이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 당시 조선공산당은 사실상 전국적 지도 체계가 붕괴한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조선공산당은 대중 투쟁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극의 길로 빨려들어 갔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와 함께 조선공산당의 오류에 대해서도 좀 더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나는 이재유를 비롯한 경성 트로이카의 중심들이 해방 이후에도 살아남았다면 적어도 코민테른 입장에 따라 반탁에서 친탁으로 우왕좌왕하는 조공의 행보는 나타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이재유는 박헌영이 자신의 밀사를 통해 상해에서 보내주는 공식 문건과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활동할 것을 권하였을 때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문건이 도착하는데만 한달이 넘게 걸리는데, 어떻게 조선의 구체적 정세에 맞는 운동을 하겠냐는 것이다. 가혹한 탄압에 의한 것이었지만, 어쩌면 이들의 죽음이 조선공산당에 가장 큰 비극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장석준 등 진보신당의 브레인들이 주장하는 ‘조봉암 계승론’은 ‘비판적 계승론’으로 바뀌어야 한다. 21세기 진보정당의 정치적 리더십은 폭발하는 대중적 불만과 투쟁을 수평적 토론과 연대 속에서 대안적 사회체제에 대한 구상으로 나아갈 수 있게 이끄는 리더십이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50년대 민중항쟁과 함께했던 조선공산당의 긍정성도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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