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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2/07/18
    빌어먹을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구르는돌
  2. 2012/07/18
    도가니
    구르는돌
  3. 2012/07/18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구르는돌
  4. 2012/07/18
    "우리는 모두 예비장애인이다"!???
    구르는돌
  5. 2012/07/18
    타까기 진자부로오의 <시민과학자로 살다>를 읽으며...
    구르는돌

빌어먹을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페이스북에 쓴 글. 2011.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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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청원군에 있는 사회복지시설 꽃동네의 표어는 "빌어먹을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이다. 그런데 나는 오늘 아주 역설적이게도(??!!) 이 주님의 은총을 모욕하는 발언을 지하철 방송을 통해 듣게 되었다. "지하철 내에서는 구걸행위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구걸행위를 하고 계신분은 빨리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세계적으로도 존경받는다는 오웅진 신부님이 이 방송을 들으셨다면 어떤 반응이셨을까? 당신이 빌어먹을 힘이라도 있는 것을 감사하게 여기라고 시설 생활인에게 굴종을 강요할 때, 이 사회는 구걸행위조차도 견디지 못하고 눈 앞에서 지워버리려 한다. 2AM이 아무리 서울메트로 찬양송을 불러대도, 어쩔 수 없이 서울메트로는 가난한 자들이 설 땅을 빼앗아 달리는 지옥철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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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영화 <도가니>를 보고나서 페이스 북에 쓴 글. 201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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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회의를 통해 '도가니' 이후 사회복지사업법 개정 투쟁을 하는 데 있어서 활동가들의 교육을 위해 필요한 교양자료를 만드는 일을 맡게 되었다. 늦은 밤 집에 들어와 선배들이 보내 준 예전 토론회 자료집을 훑어보다 잠이 들었고, 오늘 드디어 그 영화를 보았다.

토론회 자료집은 무미건조했다.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발제를 맡고, 이러저런 전문가가 토론문을 더했고, 실제 시설 생활 경험자의 의견까지 더한 토론회 자료집은 교양자료를 대체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하는 막막함만 더 해주었다.

영화를 보고 나면 나아지겠지... 했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더 답답해 졌다. 영화가 끝나고 일어서자마자 머리가 너무 아팠고, 영화를 보고 난 소감 같은 걸 말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여주인공이 생각보다 연기를 못하...네... 같은 영양가 없는 말이나 던지고 말았다.

그렇다. 남들 다 그렇게 느끼듯이, 끔찍했다. 한편으로는, 안보는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전에 '도가니'가 daum에 연재될 당시 읽었을 땐 이정도 느낌은 아니었는데....

나는 사람들이 이렇게 끔찍한 장면들을 '영상'으로 접하고 나서야 분노하는 지금 이 상황이 불편하다. 도가니가 연재소설 일 때도, 책으로 나왔을 때도, 나름대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는데, 사회적 공분으로 옮겨지는 것은 왜 그 끔찍한 장면을 눈으로 보고 나서야 가능하단 말인가?

나는 오히려 이 끔찍한 장면들보다 영화의 말미에서 공유가 죽은 민수의 영정 사진을 들고 경찰의 물대포를 맞으며 하는 마지막 대사, "이 아이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합니다. 이 아이의 이름은 민수라고 합니다."가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결핍의 상태인 이 아이를 위해 대신 싸워주기를 호소하는 이 정의의 외침은 그러나, 민수를 여전히 정의의 '수혜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어른들이 물대포 맞아가며 싸우는 동안, 연두와 유리는 그저 울며 물대포 세례를 힘없이 지켜만 보고 있다.

끔찍한 장면의 자극을 통해 만들어지는 분노가 아니고서는 우리가 이런 문제를 함께 공유하고 해결해 나갈 노력을 만들어갈 길은 없는 것일까? 장애인의 신체적 '결핍'을 대신해 싸워주겠다는 '가상의 정의감'을 공유하지 않고, 차분하게 그들이 몸으로 내는 목소리에 귀기울여가며 그들의 싸움에 '동참'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공지영의 말처럼 진실은 가끔 생뚱맞고 대개 비논리적이며, 심지어 게으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영화를 통해 느낀 폭발하는 감정들이 이 진실의 '게으름'을 앞서 나가려다 보면 분명 진실에 상처를 주고 말 것이다. 진실만큼 느리게 가자. 진실보다 뒤쳐져선 안되겠지만, 단 두시간 동안 느낀 감정으로 진실을 인도하려 하지 말자. 우리는 아직 모르는게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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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이것도 페이스북에 썼던 글. 2011.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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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두번째로 읽었다. 처음 읽을땐 그냥 쏟아지는 질문공세가 짜증나서 대충 읽고 별 생각 안하고 있었는데, L모 선생의 '생각보다 허접한 책'이라는 평가에 귀가 솔깃하여 '대체 얼마나 허접하길래!?'라는 의문으로 다시 집어들었다.

그런데 이 책을 단순히 허접하다고(물론 L선생도 그런 의미로만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말하기에는 부족한 뭔가 이 책이 담고 있는 파괴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말미에 가서 샌델이 끊임없이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로부터 연유하는 도덕과 가치'를 강조하는 이유는 소위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 선택의 자유만을 앞세우다가 그런 도덕과 가치라는 중요한 정치적 자원을 보수주의자들에게 빼앗겼다는 비판 속에서 나온다. 이 대목을 읽다가 프레임 전략을 외치며 보수주의에 대항할 것을 주장했던 조지 레이코프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면 레이코프나 샌델 모두 (그들이 아무리 고전철학적 논의를 하더라도) 순수하게 '현실정치적' 고민 속에서 나온 철학을 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현실적인' 철학이 대중들에게 일정한 설득력, 파급력을 갖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겠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공동체의 가치, 미덕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경계는 어디인가가 문제다. 샌델은 '충직 딜레마'라고 이름 붙인 장에서 갑자기 '애국심'이라는 쟁점을 들고 나온다. 웹사이트를 통해 네티즌이 자발적으로 불법 이민자들을 감시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의 정당성 문제를 논하면서 그는 마이클 왈저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사회 구성원이 되는 조건을 규제하는 능력, 즉 입국허가, 거부 규정을 정하는 능력은 공동체 독립의 핵심이다."

결국 그가 앞에서 이러저런 쟁쟁한 철학자들을 등장시키며 신나게 썰을 풀었지만, 결국 그가 말하는 미덕은 '국경'을 근거로 하는 미덕, 즉 타국의 인민을 배제하고 내부의 동일성을 단단히 하고자하는 '도구'로서의 미덕이다. 뒤에 가서 그는 이를 '연대'라는 말로 포장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건 연대라고 이름붙이기 민망한

'내식구 감싸기'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이명박 대통령의 영포회 감싸기도 훌륭한 연대의 사례다. 반면 어떠한 공동체적 소속의 근거를 공유하지 않음에도 새롭게 관계를 만들어내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꿈구고 공유하는 한진중공업 앞의 희망버스 난장은 샌델식 정의론으로는 당췌 설명이 안된다.

가장 무서운 것은 이런 식의 '정의론'이 보수주의에 맞서는 진보주의적 전략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이 고려해야 할 정의는 내가 속한 공동체의 서사속에 구현된 가치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가 아니라, 서로 다른 공동체간의 가치 충돌이 빈번해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더욱 보편적인 가치를 '새롭게' 형성할 것인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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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예비장애인이다"!???

페이스북에 썼던 글. 2011년 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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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420결의대회에서 민주노총 위원장 발언의 요지는 "이 정부는 멀쩡한 사람도 장애인 만들고 있다", "우리는 모두 예비 장애인이다"로 요약됨. 이 말을 듣고 예전에 적어두었던 문구가 생각났다.

 

“장애를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장애인을 결핍된 인간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장애인을 차별하는 자나 장애인을 동정하는 자나 차이가 없다. 차별하는 자와 동정하는 자는 그 이유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장애인은 부족한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이다. 장애인들은 의학적․공학적․정치적 기술을 간절히 원하지만, 그것은 어떤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그 자리에서 자유롭고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다.

 

- 『부커진 R - 소수성의 정치학』, "박경석과 고병권의 대담“ 中

 

참고로 내가 장애인운동에 함께하는 이유는 내가 '예비장애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장애인의 신체적 다양성과 속도를 받아들이게끔 이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자본주의를 넘어서겠다는 어떤 운동도 말짱 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넘어선 어떤 대안적인 사회에서는 적어도 신체적인 기능의 일정한 결함이 불행의 표지여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비 장애인'인 것이 아니라 장애-비장애의 구분을 가로지른 새로운 공간 속에 스스로를 위치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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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까기 진자부로오의 <시민과학자로 살다>를 읽으며...

예전에 페이스북에 썼던 글들을 정리하기 위해 블로그로 옮겨옵니다. 그런데 2011년에 썼던 글들이 다 확인되지 않네요. 페이스북 나빠!!!

 

 

2011.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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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핵발전소 사고가 터진 이 판국에 나는 일본의 반핵운동가 타까기 진자부로오의 라는 책을 읽고 있다. 원자핵공학을 연구하던 대학교수가 공항 건설을 반대하는 농민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과학'이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 반성하고 고뇌하는 모습들이 내 가슴이 꾹꾹 눌러 담기고 있다.

 

"토지를 강제수용하려고 공항공단 측에서는 대규모의 경찰력을 동원해서 반대파 학생들을 밀어낸 뒤 불도저로 땅을 뒤집어엎고 나무를 쓰러뜨리고 있었다. 그때 자신의 몸을 사슬로 나무에 묶고 저항하는 농민들과 지하땅굴 속에서 저항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보았다."(82쪽)

"이러한 저항을 지속시키고 농민들이 생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려면, 농민들이 대지 위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 푸른 들을 파괴하고 공항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사회에 알려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일이야말로 나 같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84쪽)

"실험과학자로서, 나 또한 상아탑 안의 실엄실에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삶 자체를 실험실로 삼아, 방사능을 두려워하는 어민들과 불도저 앞에서 눈물 흘리는 농민의 처지를 내 것으로 하는 데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대학에서 나가자, 나는 그렇게 마음을 굳혔다."(87쪽)

 

 

 

 

얼마전 326집회때 장애인동지들이 쇠사슬 사진관을 하면서, 쇠사슬로 자신의 삶과 투쟁을 표현하는 모습들이 인상깊었다. 그런데 농민들에게는 쇠사슬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구나 생각하게 된다. 장애인투쟁에서 쇠사슬이 시설과 집안에만 묶여있던 자신의 몸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자신의 존재를 사회에 당당하게 알리는 것이었다면, 농민들에게 쇠사슬은 이 땅과 농민 자신은 절대 분리될 수 없음을, 그것은 이 땅과 농민 자신 모두의 죽음임을 처절하게 알리는 것이었다. 죽음의 공항에 반대하며 삶의 농토를 추구했던 나리따 농민들의 쇠사슬과 죽음과도 같은 침묵만이 강요되는 시설을 뛰쳐나와 온전한 삶을 추구하는 장애인의 쇠사슬은 왠지 다른듯 하면서도 닮았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삶을 위한 투쟁들과 함께 손을 잡을 수 있을까? 암담하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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