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전환시대의 논리>에 나온 문화대혁명 관련 글귀.

"의학이란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이 50세로 죽을 것을 51세까지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수많은 고귀한 두뇌와 거액의 돈을 쓸 것이 아니라 돈이 없어 어쩌면 51세로 살지도 모를 생명을 50세에 버려야 하는 가난한 대중의 전반적 치료와 보건을 위한 인간의 기술이다."
 

 

 

 

 

리영희 저작집 1 -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저작집 1 -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한길사, 2006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테리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 중에서

기독교 신학에서 하느님은 초월적인 제작자가 아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만물을 지탱해 주는 존재이며, 세계에 처음이 없었더라도 이런 역할을 했을 존재다. 창조란 그저 사물이 시작되도록 하는 일이 아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지 않고 뭔가가 존재하는 이유 자체이며, 모든 실체의 가능성의 조건이다. 하지만 하느님 자신은 어떤 종류의 실체도 아니므로,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들에 견주어 설명될 수 없다. 나의 질투심과 내 왼발이 하나의 짝을 이룰 수 없는 것과 같은 논리다. 하느님과 우주를 합한다고 둘이 되지는 않는다. 유대교에서는 하느님을 형상화하는 일을 금지한다. 하느님이 비실체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유일한 형상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조직화된 종교를 무산시키기 위해 하느님이 끊임없이 애썼음을 기록한 문헌이 있다. 바로 성경이다. 창조자 하느님은 연구지원금을 주는 기관을 깊이 감명시키기 위해 지극히 합리적인 설계에 따라 일하는 하늘의 공학자가 아니다. 어떤 의도가 담긴 기능적 목적에서가 아니라 창조하는 일 자체를 좋아하고 즐거워하기 때문에 세상을 만들어낸 예술가이자 탐미주의자다. - 19 page

 

 

모든 증거가 불리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끝내 이기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패배자를 경멸하는 나라들에서는 말도 안 된다고 여기겠지만, 실패에 대한 충실성이라 부를 만한 믿음의 태도를 견지할 때만 인간의 힘은 창조적이고 지속적이 될 수 있다. 이처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냉정한 현실주의를 유지하면서,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극악하고 충격적이며 지긋지긋한 실재, 그 메두사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할 때에만 어떤 형태로든 부활이 가능해지지 않겠는가. 냉정한 현실주의를 최후의 보루로 받아들이고 다른 모든 것은 감상주의에 사로잡힌 허튼소리거나 이데올로기적 환상, 가짜 유토피아, 거짓된 위안, 혹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이상주의일 뿐임을 알아볼 때, 그제서야 최후의 보루가 결국은 최후의 것이 아니었음이 밝혀질 수 있다.

신약성경은 인간의 환상을 잔혹할 정도로 깨뜨린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죽음을 맞지 않는다면 뭐가 잘못돼서 그런 건지 변명의 해야 할 정도다. 인간 조건의 적나라한 시니피앙은 사랑과 정의를 강력하게 옹호하다가 그 때문에 죽음을 당한 사람이다. 엉망으로 훼손된 시신이 인류 역사의 충격적 진실이다.

- 43-4쪽

 

 

 

신을 옹호하다 -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
신을 옹호하다 -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
테리 이글턴
모멘토, 2010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윤삼호의 『한국 장애운동의 어제와 오늘』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

윤삼호의 『한국 장애운동의 어제와 오늘』

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

 

 

윤삼호의 이 글은 매우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스타일의 글이다. 스스로가 장애-당사자주의를 표방하는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고 이 글 속에서도 사실상 장애-당사자주의를 두둔하고 있으면서, 글의 전체적인 뉘앙스는 ‘양비론’적이다. 저자의 태도는 글의 말미에서 ‘장애-민중주의’와 ‘장애-당사자주의’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에서 보이듯이, 이 두 진영의 갈등을 해소하고 통합적인 장애운동을 건설할 것을 ‘거국적으로’(?) 제안하는 듯 한 태도를 취한다.

그런데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한국 장애운동의 역사를 개괄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윤삼호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그는 서구와는 다르게 한국에서는 장애-민중주의가 먼저 나타났고 장애-당사자주의가 그에 후속했는데, 이러한 뒤바뀜이 한국의 장애운동을 왜곡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라고 나는 이해했다).

 

※ 마이크 올리버가 설명하는 장애단체의 역사 (M. Oliver, 『장애화의 정치』, 158~161쪽)

 

 

파트너십 / 보호

(장애인을 위한 단체들, 자선단체들)

장애인을 위한 단체

경제 / 의회

(의회 로비 및 연구, 법정 단체들)

소비자주의 / 자조

(장애인 당사자 단체들)

장애인 ‘당사자’ 단체

(신사회운동으로서 장애운동을 주도)

민중주의 / 활동가

(장애인 당사자 단체 및 정치 활동가 단체들, 정치적, 집단적 활동과 의식 함양 목적)

우산 / 통합

(소비자주의 민중주의 조직들을 포함 단체 연합)

 

올리버가 위와 같이 역사를 정리하는데에는 두 가지 배경 사건이 자리잡고 있는데, 하나는 UN의 ‘1981 세계장애인의 해’ 선포계획이다. 장애인 당사자들은 자신의 힘으로 이 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졌고, 이 때를 기점으로 영국장애인단체협의회(British Council of Organization of Disabled People, BCODP)를 결성한다. 두 번째 사건은 ‘장애인을 위한 단체’ 중 하나인 국제재활협회(RI, Rehabilitation International)가 자신의 조직의 ‘장애 헌장’에 “지역사회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장애인의 동등한 참여에 대해 가능한 가장 완전한 통합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들을 취할 것”이라고 명시했으나, 장애인 당사자가 이사회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해야 한다는 요구에는 거절의사를 표하자, 이에 맞서 장애인 당사자들이 DPI(Disabled Peoples’ International)를 결성한 것이다.

즉, 서구에서는 ‘장애인을 위한 단체’에 맞서 ‘장애인 당사자 단체’들이 스스로 조직되는 역사를 통해 장애운동이 형성되어 왔다. 그러나 80년대 사회변혁운동의 등장과 함께 태동하기 시작한 한국의 장애운동은 울림터, 장애인청년운동연합회 등 민중주의 성향의 단체1)들이 먼저 결성되었고, 당사자주의 및 우산/통합을 지향하는 DPI 등의 단체는 90년대 후반에야 등장했다.

이에 대해 윤삼호는 “서구 장애운동은 흑인운동, 게이운동, 여성운동 등 소수자운동의 맥락에서 출발한 까닭에 인권과 복지이슈 중심으로 발전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 반대로 ‘장애-민중주의’가 압도한 한국의 장애운동은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여타 민중 세력이 종적으로 연대하는 구사회운동적 기획이 인종, 여성, 소수자 등 다양한 운동세력이 횡적으로 연대하는 신사회운동적 기획을 압도하는 양상이다. 이것이 장애인들이 스스로 결정한 선택인지, 아니면 비장애인 운동가들의 ‘과도한’ 개입인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라고 말하면서 장애-민중주의 부정적인 영향을 부각시키고 있다.

반면 그는 장애-당사자주의에 대해서는 이 그룹에게 던지는 첫 번째 질문에서도 드러나듯이, 당사자주의의 악용을 문제삼을 뿐, 그것을 장애운동의 지도이념으로 견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글에 나와 있는 내용만으로는 저자가 주장하는 당사자주의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인터넷을 좀 뒤져봤다. 윤삼호는 「장애인 당사자주의 소고」라는 글에서 당사자주의의 구체적인 맥락을 이야기하고 있다. 당사자주의에는 크게 영국의 당사자주의와 미국의 당사자주의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영국의 ‘분리에 저항하는 신체장애인 연맹’(UPIAS)은 손상(impairment)과 장애(disability)를 명확히 구분하고 장애의 원인을 손상이라는 의학적 원인이 아닌 사회적 배제나 불이익과 같은 사회적 문제로 보고 있는데, 이런 관점에서 사회적 결정과 권력으로부터의 배제 극복을 추구하는 ‘정치 참여형’ 장애인운동이 등장한다. 한편 미국의 당사자주의는 <Nothing About Us Without Us>라는 말로 표현되는데, 즉 장애인이 겪는 독특한 장애 경험과 문화에 기반해 자기 몸과 삶에 대한 자기 통제가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으로 대리주의에 반대하는 의미로 당사자주의를 주장하는 것이다.

나의 이해로는 이러한 당사자주의의 두 경향이 교집합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드는데, 일단 그것은 아무렴 어떻겠냐 싶으니 일단 넘어가자. 그런데 이러한 두 경향은 일반적으로 ‘신사회운동’이라고 일컬어지는 운동의 특징들을 일정하게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사회운동은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우선 편한대로 (구)사회운동이라 일컬어지는 노동운동과 같은 주류 운동 담론에서 배제되었던 주체 및 의제들을 대상으로 하는 운동 전반을 가리키는 것으로, 거시적인 사회변혁에 치중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삶에 기반한 변화들을 추구하는 경향을 띤다(라고 이해해 보자).

그런데 이 신사회운동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두 가지가 거론되는데, 그것은 바로 ‘자원동원’과 ‘정체성지향’이다.2)쉽게 말하면 ‘자원동원’은 운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운동조직의 다양한 자원을 활용하여 목표에 도달하는 정치적 과정을 중요시하는 것이고, ‘정체성지향’은 억압에 저항하는 이들의 정체성을 계급이라는 단일한 표상에 두지 않고 성, 인종, 지역, 장애 등 억압받는 이의 삶과 문화를 구성하는 다양한 정체성에 기반하고자 하는 것이다.

윤삼호의 장애-민중주의 비판도 어떤 면에서 보면 바로 이 ‘자원동원’과 ‘정체성지향’에서 장애-민중주의가 오류를 낳았다고 비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최초로 장애-민중주의를 표방한 울림터는 장애 문제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자본주의적 모순의 결과라는 급진적 주장을 내놓는데, 이를 두고 “따지고 보면 이 주장은 독창적인 장애이론이 아니라 당시 민중운동의 논리를 장애운동에 ‘기계적으로’ 대입한 것”이라고 평가하거나, 이동권 투쟁 당시 비장애인-운동권 활동가들을 두고 “투쟁 지원에 그치지 않고 투쟁을 기획하고 주도하거나 ‘프락션’을 하기도 했다.”는 등의 평가를 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장애운동이 장애인 정체성에 기반한 이념과 방식을 따르지 않고, 비장애인 운동권들에 의해 자원과 이념을 외부수혈 하다보니 왜곡된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더해 장애-민중주의 진영이 노조와 연대해 정립회관 투쟁으로 마찰을 일으킴으로써 “청소년 시절 정립동산을 뛰놀던 숱한 장애인들의 ‘마음 속 고향’도 사라졌다”고 말하면서 장애인의 독자적인 장애경험과 문화적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Q1) 누가 ‘장애인’인가? - ‘정체성지향’으로서의 당사자주의에 대한 의문.

 

장애-당사자주의도 장애가 사회적 차별에 의해 생긴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사회적 차별과 억압의 결과라면 피해의 당사자가 문제 해결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것은, 장애운동에서 뿐만 아니라 여성운동, 노동운동 등 여타의 운동에서도 기본적인 ‘원칙’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사회적’이라는 전제를 중심에 놓고 보면, 사실 ‘장애인 당사자’라는 것도 선험적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편하게 복지카드 소지자를 장애인 당사자로 볼 수도 있겠지만, 손가락 절단으로 장애등급을 갖게 된 우리 아버지는 솔직히 ‘장애’ 때문에 차별 받은 적은 없는 것 같다. 학벌이 낮고 가진 게 없어서 차별을 받았으면 받았지, 아버지의 복지카드가 장애인으로서 차별 받았음을 증명해 주지는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차별이라는 구체적인 작용이 어떤 사회적 장벽과 억압기제에 의해 벌어졌는가를 묻는다면, 신체적(또는 법적)으로 장애인 당사자로 규정되고 아니고는 운동에 있어서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선험적인 장애인 당사자를 규정하고자 하는 시도는 상당히 모순적이다.

예를 들면 법적으로 장애 등급을 받을 수 없지만, 활자 중심의 사회에서 엄청난 제약과 차별을 겪을 수밖에 없는 난독증을 가진 사람들을 보자. 사실 이들은 복지부 기준으로는 어떤 지원도 받을 수 없지만, 특수교육 대상자로 선정되서 각종 교육 서비스를 받기도 한다(고 들었다. 아닌가?). 선험적인 장애인 당사자를 규정하여 이들의 정치적 결정권 확대를 요구하는 방식의 운동은 이런 ‘비장애인’의 장애를 해결할 어떤 이념과 원칙을 갖고 있는가?

또 하나. (내가 몇 번 페이스북에 올린 내용이기도 한데) 예전에 검찰이 용산 철거민과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에 대해 DNA를 채취한 일이 있었다. 그들은 정리해고 반대투쟁을 한 것, 그리고 강제철거에 반대한 행위를 일종의 ‘범죄’라고 보는 것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유전적 질병’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신체적 ‘손상’이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강제적으로 의학적 형태의 권력에 의해 집행되는 현상은 어찌보면 장애인에게 가해지던 의학적 시선이 확대된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명권력의 횡포가 확대되면 장애인 수용시설처럼 해고자 수용시설, 철거민 수용시설이 생기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을까?

이런 상황에서 장애인의 정체성은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 나아가 누가 ‘장애인’인가? 윤삼호는 장애-민중주의를 향해 던지는 첫 번째 질문에서 “장애인들이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경험하는 모든 문제를 국가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다면 개인이 손상 그 자체 때문에 당하는 고통과 비통함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했는데, 나는 이것이 질문으로서 성립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손상 그 자체는 언제나 고통과 비통함을 수반하는가? 이 질문 자체가 장애를 사회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개인의 손상이 고통과 비통함으로 옮아가게 되는 것은 ‘손상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조건들 때문이다. 이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 바로 사회모형에 기반한 장애인운동이 해야 할 역할 아닌가? 혹여나 ‘손상 그 자체’ 때문에 당하는 고통과 비통함(예를 들면 교통사고나 천재지변에 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장애인운동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의학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장애인 정체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버릴 필요는 없지만, 선험적인 장애인 정체성 개념은 버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장애인 정체성은 끊임없이 재구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Q2) ‘구매력 행사’가 당사자의 권력을 강화하는가? - ‘자원동원’으로서의 당사자주의에 대한 의문

 

앞에서 신사회운동의 맥락에서 제기되는 당사자주의는 두 가지의 특징, 즉 ‘자원동원’과 ‘정체성지향’이라는 특징을 갖는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정체성지향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야기했으니 자원동원과 관련해서 이야기해보자.

신사회운동의 특징으로서 ‘자원동원’이 앞서 이야기했듯 “운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운동조직의 다양한 자원을 활용하여 목표에 도달하는 정치적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장애인운동에서는 이것이 주로 공급자 중심의 서비스체계를 비판하고 장애인 당사자의 ‘서비스 통제권 확보’라는 방식으로 이야기 되고 있는 듯하다. 이것의 주요한 실현을 장애인 당사자 조직이 복지전달체계를 독점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중증장애인, 지적/발달장애인이 주로 이용하는 복지서비스 전달체계를 경증장애인이 차지하는 것이 당사자주의라면 이것은 코미디이다.3)

 

그런데 사실 내 고민의 핵심은 당사자주의를 이야기하는 이들이 서비스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소비자주의’, 즉 장애인 당사자의 구매력 행사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윤삼호도 이 글에서 소비자주권이라는 개념이 자립생활운동의 주요한 이념이라고 언급하는데, 이것은 당사자주의를 주장하는 진영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개념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 ‘소비자주의’니 ‘소비자주권’ 같은 개념이 매우 불편하다.

소비자주의가 주장되는 배경에는 “장애인복지서비스에 관하여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전달과정에서 장애인 자신들의 경험 및 다양한 욕구가 반영하지 못하고 전문가 및 정책담당자들에 의하여 공급자 위주로 전달되었다는 것”4)이라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그래서 서비스 제공과정에 장애인 당사자가 자기결정의 주체로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구매력을 갖춰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내에서도 활동보조서비스에 서비스 그 자체가 아니라 현금을 지급하는 직접지불제(Direct Payment) 도입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일단 장애인 의제를 떠나서 생각해 보면, 일반적으로 ‘시장’에서 구매력을 갖춘 소비자는 얼마나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 설령 그가 고소득자로서 상당한 구매력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생산을 통제할 수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 돈이 수십억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생산과정을 통제해 생산품의 질을 높이는가 하는 문제는 완전 별개의 사안이다. 그는 그 수십억의 돈으로 더 값 비싼 상품, 더 많은 상품을 구매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일정 정도 이상의 구매력은 질 낮은 상품이 시장에서 선택받지 못해 퇴출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할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공급자간의 경쟁구조 속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이윤을 뽑아내기 위해 예산절감 노력(노동자 착취 등)만 행해질 뿐이다.

이것을 장애인 복지영역에 적용하게 되면 어떨까? 장애인이 활동보조서비스를 통해 이용하는 것들, 예를 들면, 용변 처리, 식사 보조, 이동 보조, 옷 갈아입기 등... 이런 것들을 비장애인은 돈을 내고 이용하나? 화장실 한 번 갈 때 100원, 외출 전에 옷 갈아입을 때는 200원, 길을 걸어갈 때 300원... 뭐 이렇게 돈을 내나? 아니면 밥 먹을 때 밥 값 이외에 추가로 내는 비용이 있나? 이런 것들은 비장애인에게는 굳이 ‘권리’라고 인식할 필요도 없는 공기 같은 것들이다. 그러니 돈을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장애인은 돈을 내야 하나? 설령 그 돈을 국가에서 지급해 준다 하더라도, 이런 기본적인 일상생활의 영위와 관련된 것들을 상품화, 화폐화 시킨다면 활동보조서비스의 권리로서의 성격은 완전히 탈각될 것이다. 그 결과는 당사자의 결정권 강화가 아니라 장애인의 경제력에 따라 권리 향유가 계급화되는 것으로 될 것이다.

이러한 소비자주의는 고립된 개인으로서의 당사자를 전제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활동보조’를 서비스로서 ‘구매’하여 ‘소비’해 버리는 것으로 이해되는, 소비자주의에 기반한 자립생활운동은 얼마나 우리 사회를 장애인이 살기에 적합한 사회로 바꾸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활동보조와 자립생활을 화폐적 관계를 넘어선 어떤 삶의 재구성의 한 형태로 바라보는 아래와 같은 관점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세상 누구도 사회에 등장할 때 혼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말이죠. 사회란 말 자체가 그런 뜻을 담고 있습니다. 제가 사회 속에서 등장할 때, 옆에 이미 다른 사람, 두 사람, 세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이지요. 저는 활동보조인이 사회에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서로를 이미 활동보조인으로 삼고 있습니다.

박경석과 고병권의 대담, 『부커진R – 소수성의 정치학』 (그린비) 中

 

 

앞으로 우리는 이렇게 ‘고립’된 ‘자립’ 개념을 깨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런 고민 속에서 얼마 전 비마이너에 실린 일본 푸른잔디회 회원 중 한 명의 발언은 왠지 눈길이 갔다.

 

토오루 씨는 “하지만 푸른잔디회의 중심사상 중의 하나는 지역 안에서 생활하면서 근처에 사는 사람들과의 관계 내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나는 공적 보조인 개호서비스(활동지원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다”라면서 “이번에 한국에 함께 온 이들도 제가 사는 지역 사람들과 제가 강사로 일하고 있는 국학원대학(國學阮大學)에서 만난 인연으로 동행한 사람들”이라고 밝혔다.

“일본 푸른잔디회, 노들야학을 만나다” (비마이너 6/26)

 

 

‘자립생활’이라는 것이 단지 한 개인이 홀로 살아갈 능력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관계 맺고 살아가는 방식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활동보조서비스 등 장애인복지의 전달체계의 문제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대충 글을 마치며

 

갑자기 나보고 발제를 하라길래, 처음엔 그냥 요약이나 대충 해가면 되겠지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길어졌다. ‘당사자주의’라는 주제를 접하게 되니 별별 생각들이 다 들었고 결국엔, ‘나는 왜 하고많은 운동들 중에 굳이 장애인운동을 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에 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내가 ‘장애’라는 것을 삶 속에서 확인하고 느낄 수 있었던 첫 번째 계기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이 절단된 아버지를 보면서 항상 ‘불쌍한 우리 아버지’라는 이미지를 머릿속에 박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집에 놀러온 아버지 동료를 보니 그 분은 아예 손목이 잘려나갔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 “내 주변엔 다 불쌍한 사람들 밖에 없구나. 불쌍한 사람들 속에서 사는 나도 너무 불쌍해.” (따지고 보면 이런 생각은 우리 엄마가 항상 주입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20대 중반까지 마음속으로 끝도 없이 불쌍하다고 자기 무덤을 파대는, 진짜 ‘불쌍한’ 짓을 하며 살았던 것 같다. 어떤 구체적인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내가 장애인운동을 하게 된 것은 이 ‘불쌍함’의 낡은 순환에서 스스로 빠져나오고 싶어서였던 것이 아닐까?

 

“장애를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장애인을 결핍된 인간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장애인을 차별하는 자나 장애인을 동정하는 자나 차이가 없다. 차별하는 자와 동정하는 자는 그 이유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장애인은 부족한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이다. 장애인들은 의학적․공학적․정치적 기술을 간절히 원하지만, 그것은 어떤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그 자리에서 자유롭고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다.”

- 박경석과 고병권의 대담, 『부커진R – 소수성의 정치학』 (그린비) 中

 

 

생각해보면 저 굵은 글씨의 문장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게 아닐까 싶다. 노동‘해방’이든 장애‘해방’이든, 그것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구렁텅이, (또는 불교식으로 말하면) 번뇌의 사바세계를 벗어나 극락왕생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유롭고 건강하게 살겠다는 선언 아니겠나!? 그런 삶이 나 혼자 정신수양 한다고 될게 아니고, 속도와 효율 중심의 이 사회를 함께 바꿔나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이미 장애‘해방’운동의 당사자가 아닌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노동운동 등 소위 ‘주류’ 사회운동 진영과 밀접한 인적, 이념적, 조직적 관계를 맺고 있는 단체들(이라고 윤삼호는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2) 이인영, 「신사회운동으로서의 장애인운동에 관한 고찰」, 중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년.

 

3) 유동철, 「당사자주의는 대안인가?」, 『소비자주의? 당사자주의? : 비판과 대안』, 2006년 한국장애인복지학회 춘계학술대회.

 

4) 이성규, 「소비자주의는 있는가?」, 같은 자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고병권 쌤 강연 후기

노들바람에 글을 쓰라는 요구에 응해 쓴 글인데, 정말 오랜만에 글을 쓰면서 나름대로 고민을 정리한 것 같아 올려봅니다. 나도 "내일 당장 그린비 인문플랫폼이 사라진다해도 한 줄의 씨앗문장을 올리는" 마음가짐으로. ㅋㅋㅋㅋㅋㅋ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총파업, 자본의 일정표를 멈추고 사건을 시작하는 선언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하금철

 

 

고병권 쌤의 강연 후기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미 한 달도 더 지난 강연의 후기를 쓴다는 것은 초등학교 때 밀린 방학 숙제를 몰아서 하는 것과도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든다. 그래서 부랴부랴 비마이너에 실린 강연 원고도 찾아서 다시 읽어보고, 그것도 부족해 위클리 수유너머에 실린 고병권 쌤의 연재 글도 훑어봤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무슨 이야기로 시작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내게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초등학교 1,2학년 때 쯤이었을 법한 아버지의 파업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볼까 했었다. 누구보다 순종적인 도덕관을 가지신 아버지가 사장의 명령을 어기고 파업의 대열에 동참하실 때에는 어떤 마음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었을까? 기억을 더듬어 그런 이야기로 한페이지 넘게 써내려가 봤지만, 결국 다 엎어버렸다. 고병권 쌤이 강연을 통해 절실하게 요청했던 ‘총파업’은 아버지의 파업을 포함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이러저러한 파업의 반복은 아닌 것 같아서였다. 아버지가 파업에 동참한 그 동기야 물론 인간적인 분노와 설움 때문이었겠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자본이 짜 놓은 욕망의 회로에 갇혀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고병권 쌤은 “모든 곳을 점거하라,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라!”라고 했지만, 우리 아버지는 분명 야근에 특근을 해서라도 임금을 더 받기를 원했던 분이셨다.

그래서 대체 뭘 어째야 된단 말인가? 하루 종일 고민해서 썼던 글을 엎어버리고 나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고병권 쌤은 지금 당장 “체제의 중단”을 요구해야 한다고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이 말이 그저 ‘이론적 표어’ 같다는 생각만 맴돌았다. 지난 5월1일 있었던 한국은행 앞에서의 ‘총파업’ 행진도 체제의 중단을 선언하고 실천하는 자리라기보다는 한 판의 축제 같다는 느낌이 더 강했던 것이다. 축제가 끝나고 난 뒤엔 여전히 내 안에도 자리잡고 있는 자본의 혈관은 잘만 돌고 있었다.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의 수많은 1인 시위 행렬에 끼어, “자본주의 물러가라”라고 주술 같은 구호를 외치는 것만 같은 무력감을 느꼈다고 하면 너무 심한 비유인가? (물론 아직까지 그런 들썩거리는 집회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나의 이질감 탓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나니 한편으로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런 불편한 마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병권 쌤이나 ‘총파업’ 행진을 기획했던 분들에게, 장판 활동가들이 가끔 시청 장애인복지과 등에 프로포절 내듯이 <총파업을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2012년 사업계획서>를 써오라고 요구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식의 사업계획서를 백가지 천가지를 써온다고 한들 수많은 우연과 사건의 충돌로 형성되는 역사의 순간들 앞에서 어차피 무용지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건이 시작되는 순간, ‘총파업’

 

생각해보면 ‘총파업’은 그와 같은 용어로 지칭되는 구체적인 현실로부터 도망가기를 언제나 주저하지 않았다. 역시나 올 해에도 민주노총은 메이데이 집회에서 총파업 투쟁을 감행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총파업’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시청 광장을 가득 메웠던 깃발들과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월차내고 재능 갑시다”라고 배짱 좋게 이야기하던 어떤 활동가의 위트 있는 한 마디와 더 잘 어울렸다.

고병권 쌤은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대와의 만남을 계기로 이러한 글을 쓰고, 강연을 하게 되었는데, 그는 이 만남을 하나의 ‘사건’이라고 지칭했다. 지친 몸을 쉬러 떠난 타국의 현장에서 만난 시위대와의 만남이 하나의 ‘사건’이듯이,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모두 사건들이 쌓이고 쌓여 생긴 퇴적암이었다가 그 사건들 외부에서 가해오는 또 다른 사건의 열기에 의해 다져진 편마암이 아닌가. 나는 이렇게 무수한 사건의 과정 속에 있는 총파업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고병권 쌤은 강연 서두에서 발달장애 아이를 둔, 투사가 된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어머니는 “부양의무제 폐지, 활동지원 시간 확대, 평생교육, 가족지원 등… 그 어떤 의사에게서도 들을 수 없었던 사람을 살리는 말들”을 자신과 처지가 같은 사람들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투사가 되는 길이, 아들을 살리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점거’와 ‘총파업’에 대한 강연에서, 왜 굳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발달장애 아이를 둔 어머니의 이야기로 시작했을까? 내가 받아들이기로는 이 ‘사람을 살리는 말들’을 듣는 순간이, 월가를 점거한 사람들이 ‘뭔가를 일으키는’ 사건의 순간과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경찰이 점거 집회 예정장소를 원천봉쇄하자 점거자들이 주코티 공원으로 자리를 옮긴 후 누군가 ‘우리 모두 여기서 이야기를 하자’고 선언하면서 상황은 놀랍게 변했다. 처음에는 쭈뼛쭈뼛하던 사람들이 조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주변 사람들과 곳곳에 작은 원들을 만들었다. 그러자마자 이런저런 말들이 마구 쏟아져나왔다. 집을 잃은 이야기, 건강보험 없이 아이들을 키우는 이야기, 직장을 잃은 이야기, 대학등록금이 너무 높아 학업을 접게 된 이야기…”

 

이렇게 내 머릿속에 반복적으로 각인되고 있는 이 ‘사건’이란 대체 무엇인가? 적어도 이 ‘사건’은 자본의 방식으로는 발생하지 않는다. 자본은 오로지 ‘집행’할 뿐이다. 수익률의 하락을 타개하기 위해 노동자를 정리해고하는 업무를 ‘집행’하고, 대양해군을 육성하기 위해 수천 수만년 숨쉬어 온 구럼비 바위를 파괴하는 업무를 ‘집행’한다. 여기에서 존재와 존재가 만나 벌어지는 ‘사건’같은 것은 출현하지 않는다. 오로지 한 존재가 완전히 대상화되어 가치의 쓰레기통에 분리수거 되거나 운 좋게 살아남아 자본이 정해놓은 틀 속에서 근근이 숨 쉴 뿐이다. 요즘엔 심지어 ‘사랑’조차 집행될 뿐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최근에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알랭 바디우의 『사랑예찬』이란 책에서 저자는, 프랑스의 결혼 중매 사이트쯤 되는 ‘미틱’(Meetic)이란 사이트의 광고 문구에 의문을 표한다. “위험없는 사랑을 당신에게!”,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사랑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설렘, 갈등과 시련… 이 따위의 위험들을 모두 제거하고도 사랑할 수 있다는 이들의 ‘사랑’에는 우연적인 사건, 즉 ‘만남’이 배제되어 있다. 오로지 특정한 조건과 조건을 일치시키는 프로그램을 ‘집행’할 뿐이다. 이러한 사랑의 과정, 사건의 과정에서 기계적으로 소외된 인간들은, 미틱의 집행에 의해 선택되거나 버려지거나 둘 중 하나만이 가능할 뿐이다.

점거는 그리고 총파업은, 이렇게 자본의 계획표에 따라 진행된 집행에 의해 버려지고 배제된 존재들이 드디어 입을 열고 이야기를 벌릴 자리를 제공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으로서는 아무런 쓸모도 가치도 없다고 여겨지는 자신의 발달장애 아이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해 달라고 말하기 위해, 어머니는 교육청을, 보건복지부를, 국가인권위원회를 점거하는 ‘사건’을 만들어낸다. 이를 통해 고립된 삶을 살아왔던 발달장애 가족들은 서로를 인간적인 관계망으로 끌어당기게 되고, 발달장애인을 배제한 채 작동되는 체제의 ‘중단’을 요구하는 ‘총파업’을 실천한다.

 

 

자본의 일정표에서 일탈하기

 

총파업(General Strike). 그것은 이 어머니처럼 체제의 중단을 요청하는 ‘온갖 요구’들이 모이는 순간의 사건을 지칭한다. 그것은 모이는 사람들의 수로 ‘계산’되지 않고, 특정한 기관의 계획과 일정표에 의해 ‘집행’되지 않는다. 총파업이 작동되는 원리는 오로지 사람들이 광장에서 만나는 사건의 순간, 각자가 터뜨리는 웃음의 크기, 흘리는 눈물의 염도에 좌우될 뿐이다.

 

 

 

어제 오랜만에 집회에 나갔다.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23번째 죽음을 막기 위한 ‘희망행진’. 오랜만에 집회 단상에 오른 김진숙 지도위원의 발언은 또 한번 요약 불가능한 감동을 전해줬다. 그녀의 발언에는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2012년 총파업 사업계획서>같은 것은 없었지만, 자본에 맞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실천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었다. “울다가 웃자. 그리고 사랑에 빠지자.”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 월스트리트 점거운동 르포르타주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 월스트리트 점거운동 르포르타주
고병권
그린비, 2012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예비장애인?

페이스북에 썼던 글. 2012.04.0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장판에 큰 집회가 있을 때에는 여러 높으신 분들이 오셔서 발언을 한다. 그 때마다 내가 의도치 않게 발언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한 사람, 민주노총 김영훈 위원장. 예전에 노동절 집회에서 '반신불수 정권' 발언으로 공개적으로 사과까지 한 후에, 규모가 작은 장애인 집회에서도 발언섭외가 오면 항상 애써서 발언하는 것 같아 그래도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기도 했지만, 사실 항상 거슬리는 단어를 듣게되서 고민하던 차에 몇 마디 적어본다.

예비장애인. 김영훈 위원장은 꼭 이런 표현을 쓴다. 노동자들 집회할 때, 우리는 모두 예비 비정규직이다, 뭐 이런 표현을 즐겨 쓰니까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일 수도 있는 말 같지만, 사실 '예비장애인'과 '예비비정규직' 또는 '예비 노동자'는 전혀 다른 의미를 담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예비 비정규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비정규직'과 같은 어떤 위험한 상태에 비정규직이 아닌 사람들도 내몰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뜻을 내포한다. 같은 방식으로 '예비 장애인'이라는 말도 장애인이라는 단어에 위험하고 불안하고 삶의 벼랑끝으로 내몰린 상태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예비 장애인'이라면, 장애인이 되지 않도록 예방대책을 잘 세우면, 그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장애인이 왜 장애인이 되었는지, 그를 장애라고 명명된 감옥으로 밀어넣은 사회적 폭력을 볼 수 없게 만든다.

우리가 '비정규직 철폐'라고 말할 때, 그 대안으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할 수는 있지만, '장애인 차별 철폐'를 말하면서 장애인의 비장애인화를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것이 바로 재활 패러다임이고, 우리의 장애인운동은 이 재활 패러다임을 넘어서자고 주구장창 얘기해 왔던 것 아닌가?

예전 페북 글에도 쓴 적이 있는 얘긴데, 쌍용차 노동자와 용산 구속자들의 DNA를 채취하려한 정부의 시도는 정확히 지금 이 사회가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와 일치한다. 정리해고와 강제철거에 저항한 사람들을 유전적 질환자로 대하려는 태도, 이것은 장애가 의학적 기준이 아니라 정확히 사회적 기준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라는 장애학의 가장 중요한 명제를 떠오르게 한다.

내가 김영훈 위원장님과 페북 친구가 아니어서 전할 방도는 없지만... 혹시나 어쩌다 이 글을 보신다면,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예비 장애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지금 이 땅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배제된 자들'이라는 동질성으로 함께하자고. 그것만으로도 연대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빌어먹을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페이스북에 쓴 글. 2011.11.0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충북 청원군에 있는 사회복지시설 꽃동네의 표어는 "빌어먹을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이다. 그런데 나는 오늘 아주 역설적이게도(??!!) 이 주님의 은총을 모욕하는 발언을 지하철 방송을 통해 듣게 되었다. "지하철 내에서는 구걸행위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구걸행위를 하고 계신분은 빨리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세계적으로도 존경받는다는 오웅진 신부님이 이 방송을 들으셨다면 어떤 반응이셨을까? 당신이 빌어먹을 힘이라도 있는 것을 감사하게 여기라고 시설 생활인에게 굴종을 강요할 때, 이 사회는 구걸행위조차도 견디지 못하고 눈 앞에서 지워버리려 한다. 2AM이 아무리 서울메트로 찬양송을 불러대도, 어쩔 수 없이 서울메트로는 가난한 자들이 설 땅을 빼앗아 달리는 지옥철일 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도가니

영화 <도가니>를 보고나서 페이스 북에 쓴 글. 2011.10.0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어제 회의를 통해 '도가니' 이후 사회복지사업법 개정 투쟁을 하는 데 있어서 활동가들의 교육을 위해 필요한 교양자료를 만드는 일을 맡게 되었다. 늦은 밤 집에 들어와 선배들이 보내 준 예전 토론회 자료집을 훑어보다 잠이 들었고, 오늘 드디어 그 영화를 보았다.

토론회 자료집은 무미건조했다.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발제를 맡고, 이러저런 전문가가 토론문을 더했고, 실제 시설 생활 경험자의 의견까지 더한 토론회 자료집은 교양자료를 대체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하는 막막함만 더 해주었다.

영화를 보고 나면 나아지겠지... 했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더 답답해 졌다. 영화가 끝나고 일어서자마자 머리가 너무 아팠고, 영화를 보고 난 소감 같은 걸 말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여주인공이 생각보다 연기를 못하...네... 같은 영양가 없는 말이나 던지고 말았다.

그렇다. 남들 다 그렇게 느끼듯이, 끔찍했다. 한편으로는, 안보는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전에 '도가니'가 daum에 연재될 당시 읽었을 땐 이정도 느낌은 아니었는데....

나는 사람들이 이렇게 끔찍한 장면들을 '영상'으로 접하고 나서야 분노하는 지금 이 상황이 불편하다. 도가니가 연재소설 일 때도, 책으로 나왔을 때도, 나름대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는데, 사회적 공분으로 옮겨지는 것은 왜 그 끔찍한 장면을 눈으로 보고 나서야 가능하단 말인가?

나는 오히려 이 끔찍한 장면들보다 영화의 말미에서 공유가 죽은 민수의 영정 사진을 들고 경찰의 물대포를 맞으며 하는 마지막 대사, "이 아이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합니다. 이 아이의 이름은 민수라고 합니다."가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결핍의 상태인 이 아이를 위해 대신 싸워주기를 호소하는 이 정의의 외침은 그러나, 민수를 여전히 정의의 '수혜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어른들이 물대포 맞아가며 싸우는 동안, 연두와 유리는 그저 울며 물대포 세례를 힘없이 지켜만 보고 있다.

끔찍한 장면의 자극을 통해 만들어지는 분노가 아니고서는 우리가 이런 문제를 함께 공유하고 해결해 나갈 노력을 만들어갈 길은 없는 것일까? 장애인의 신체적 '결핍'을 대신해 싸워주겠다는 '가상의 정의감'을 공유하지 않고, 차분하게 그들이 몸으로 내는 목소리에 귀기울여가며 그들의 싸움에 '동참'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공지영의 말처럼 진실은 가끔 생뚱맞고 대개 비논리적이며, 심지어 게으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영화를 통해 느낀 폭발하는 감정들이 이 진실의 '게으름'을 앞서 나가려다 보면 분명 진실에 상처를 주고 말 것이다. 진실만큼 느리게 가자. 진실보다 뒤쳐져선 안되겠지만, 단 두시간 동안 느낀 감정으로 진실을 인도하려 하지 말자. 우리는 아직 모르는게 너무 많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이것도 페이스북에 썼던 글. 2011.08.0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두번째로 읽었다. 처음 읽을땐 그냥 쏟아지는 질문공세가 짜증나서 대충 읽고 별 생각 안하고 있었는데, L모 선생의 '생각보다 허접한 책'이라는 평가에 귀가 솔깃하여 '대체 얼마나 허접하길래!?'라는 의문으로 다시 집어들었다.

그런데 이 책을 단순히 허접하다고(물론 L선생도 그런 의미로만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말하기에는 부족한 뭔가 이 책이 담고 있는 파괴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말미에 가서 샌델이 끊임없이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로부터 연유하는 도덕과 가치'를 강조하는 이유는 소위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 선택의 자유만을 앞세우다가 그런 도덕과 가치라는 중요한 정치적 자원을 보수주의자들에게 빼앗겼다는 비판 속에서 나온다. 이 대목을 읽다가 프레임 전략을 외치며 보수주의에 대항할 것을 주장했던 조지 레이코프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면 레이코프나 샌델 모두 (그들이 아무리 고전철학적 논의를 하더라도) 순수하게 '현실정치적' 고민 속에서 나온 철학을 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현실적인' 철학이 대중들에게 일정한 설득력, 파급력을 갖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겠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공동체의 가치, 미덕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경계는 어디인가가 문제다. 샌델은 '충직 딜레마'라고 이름 붙인 장에서 갑자기 '애국심'이라는 쟁점을 들고 나온다. 웹사이트를 통해 네티즌이 자발적으로 불법 이민자들을 감시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의 정당성 문제를 논하면서 그는 마이클 왈저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사회 구성원이 되는 조건을 규제하는 능력, 즉 입국허가, 거부 규정을 정하는 능력은 공동체 독립의 핵심이다."

결국 그가 앞에서 이러저런 쟁쟁한 철학자들을 등장시키며 신나게 썰을 풀었지만, 결국 그가 말하는 미덕은 '국경'을 근거로 하는 미덕, 즉 타국의 인민을 배제하고 내부의 동일성을 단단히 하고자하는 '도구'로서의 미덕이다. 뒤에 가서 그는 이를 '연대'라는 말로 포장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건 연대라고 이름붙이기 민망한

'내식구 감싸기'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이명박 대통령의 영포회 감싸기도 훌륭한 연대의 사례다. 반면 어떠한 공동체적 소속의 근거를 공유하지 않음에도 새롭게 관계를 만들어내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꿈구고 공유하는 한진중공업 앞의 희망버스 난장은 샌델식 정의론으로는 당췌 설명이 안된다.

가장 무서운 것은 이런 식의 '정의론'이 보수주의에 맞서는 진보주의적 전략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이 고려해야 할 정의는 내가 속한 공동체의 서사속에 구현된 가치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가 아니라, 서로 다른 공동체간의 가치 충돌이 빈번해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더욱 보편적인 가치를 '새롭게' 형성할 것인가가 아닐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우리는 모두 예비장애인이다"!???

페이스북에 썼던 글. 2011년 4월 21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오늘 420결의대회에서 민주노총 위원장 발언의 요지는 "이 정부는 멀쩡한 사람도 장애인 만들고 있다", "우리는 모두 예비 장애인이다"로 요약됨. 이 말을 듣고 예전에 적어두었던 문구가 생각났다.

 

“장애를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장애인을 결핍된 인간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장애인을 차별하는 자나 장애인을 동정하는 자나 차이가 없다. 차별하는 자와 동정하는 자는 그 이유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장애인은 부족한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이다. 장애인들은 의학적․공학적․정치적 기술을 간절히 원하지만, 그것은 어떤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그 자리에서 자유롭고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다.

 

- 『부커진 R - 소수성의 정치학』, "박경석과 고병권의 대담“ 中

 

참고로 내가 장애인운동에 함께하는 이유는 내가 '예비장애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장애인의 신체적 다양성과 속도를 받아들이게끔 이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자본주의를 넘어서겠다는 어떤 운동도 말짱 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넘어선 어떤 대안적인 사회에서는 적어도 신체적인 기능의 일정한 결함이 불행의 표지여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비 장애인'인 것이 아니라 장애-비장애의 구분을 가로지른 새로운 공간 속에 스스로를 위치지어야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타까기 진자부로오의 <시민과학자로 살다>를 읽으며...

예전에 페이스북에 썼던 글들을 정리하기 위해 블로그로 옮겨옵니다. 그런데 2011년에 썼던 글들이 다 확인되지 않네요. 페이스북 나빠!!!

 

 

2011.04.0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일본에서 핵발전소 사고가 터진 이 판국에 나는 일본의 반핵운동가 타까기 진자부로오의 라는 책을 읽고 있다. 원자핵공학을 연구하던 대학교수가 공항 건설을 반대하는 농민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과학'이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 반성하고 고뇌하는 모습들이 내 가슴이 꾹꾹 눌러 담기고 있다.

 

"토지를 강제수용하려고 공항공단 측에서는 대규모의 경찰력을 동원해서 반대파 학생들을 밀어낸 뒤 불도저로 땅을 뒤집어엎고 나무를 쓰러뜨리고 있었다. 그때 자신의 몸을 사슬로 나무에 묶고 저항하는 농민들과 지하땅굴 속에서 저항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보았다."(82쪽)

"이러한 저항을 지속시키고 농민들이 생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려면, 농민들이 대지 위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 푸른 들을 파괴하고 공항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사회에 알려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일이야말로 나 같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84쪽)

"실험과학자로서, 나 또한 상아탑 안의 실엄실에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삶 자체를 실험실로 삼아, 방사능을 두려워하는 어민들과 불도저 앞에서 눈물 흘리는 농민의 처지를 내 것으로 하는 데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대학에서 나가자, 나는 그렇게 마음을 굳혔다."(87쪽)

 

 

 

 

얼마전 326집회때 장애인동지들이 쇠사슬 사진관을 하면서, 쇠사슬로 자신의 삶과 투쟁을 표현하는 모습들이 인상깊었다. 그런데 농민들에게는 쇠사슬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구나 생각하게 된다. 장애인투쟁에서 쇠사슬이 시설과 집안에만 묶여있던 자신의 몸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자신의 존재를 사회에 당당하게 알리는 것이었다면, 농민들에게 쇠사슬은 이 땅과 농민 자신은 절대 분리될 수 없음을, 그것은 이 땅과 농민 자신 모두의 죽음임을 처절하게 알리는 것이었다. 죽음의 공항에 반대하며 삶의 농토를 추구했던 나리따 농민들의 쇠사슬과 죽음과도 같은 침묵만이 강요되는 시설을 뛰쳐나와 온전한 삶을 추구하는 장애인의 쇠사슬은 왠지 다른듯 하면서도 닮았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삶을 위한 투쟁들과 함께 손을 잡을 수 있을까? 암담하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밤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