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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마나부,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 요약정리.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

 

○ 만들어지는 위기와 무시되는 실태

미디어를 통해 ‘이지메’, ‘부등교’, ‘학급붕괴’, ‘소년범죄’ 등의 사안들이 주목받고, 학교의 위기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이런 문제들은 극히 일부의 사례에만 집중한 것.

변한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아이들을 보는 어른들의 시선. 고베의 어린이 연쇄살상사건 무렵부터 어르 사회 전체가 아이들에 대한 너그러운 마음이 없어졌으며, 일본 사회전체가 아이들의 언동에 대해 집단히스테리를 일으키고 있는 중.

그러나 아이들을 적대시하는 사회는 미래가 없음. 냉엄한 시대일수록 아이들의 하찮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 위기의 실태 - ‘배움’으로부터의 도주

일본의 아이들이 공부에 쫓겨 여유가 없다는 말은 학원에 다니는 일부 아이들에 국한된 이야기. 통계적으로 보면 일본의 아이들의 방과후 공부시간은 세계 최저 수준. 독서량 급감.

선택과목의 강화가 학생들의 기초 학력을 붕괴시킴. 초,중학교 단계에서 높은 학력이 시민적 교양으로는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어린이 되는 과정에서 몽땅 떨어져 나가 일반시민의 과학적 교양은 최악의 상태.

아이들에게는 지금 ‘무엇을 배워도 소용없다’는 식의 니힐리즘과 냉소주의가 만연해 있음.

 

○ 동아시아형 교육의 종언

동아시아형 교육근대화의 특징 : 압축된 근대화, 경쟁교육, 산업주의 교육, 중앙집권적 관료주의 통제, 강력한 내셔널리즘, 교육 공공성의 미성숙.

이러한 교육시스템은 산업화와 교육의 급속한 근대화가 정체되는 시점에서 파탄을 드러냄. 배움으로부터의 도주도 동아시아형 교육의 ‘압축된 근대화’의 종언과 그 파탄에 의해 생긴 현상. 일본에서 학교와 교사에 대한 신뢰도가 높고 학력수준도 제일이었던 때는 교육에서 압축된 근대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던 시기. 그러나 압축된 근대화가 종언을 맞이하자 이제 대다수의 아이들은 학교교육을 통해 부모보다 높은 교육력을 획득할 수도, 부모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할 수도 없음. 학교는 일부의 ‘성공팀’과 다수의 ‘실패팀’을 가르는 장치로 변모. ‘공부’의 시대 종말.

 

○ 사회변모와 교육개혁의 실패

산업주의 사회는 소수의 지적 엘리트를 정점으로 하고 다수의 단순노동자를 저변으로 하는 피라미드형의 노동시장을 형성. 그러나 포스트산업주의로의 전환은 지적노동자의 수요를 높여 항아리형 노동시장으로 옮겨감.

기업의 구조조정과 IT혁명은 그런 징후의 하나이며, 이로 인해 청년노동시장이 해체되고 있으며 그 급격함. 대량의 프리터 출현. 일본의 경우는 동아시아형 근대화의 파탄과 거품경제의 붕괴, 그리고 아시아 쇼크로 인해 보다 급속한 변화를 겪고 있음.

젊은이들은 취직을 통한 사회참가의 기회를 빼앗기고 있고, 고령화사회의 부담을 어쩔 수 없이 떠맡게 되었으며, 막대한 국가재정의 적자를 갚아야 할 의무를 짊어지게 됨.

조기교육에 열중인 가정에서 아이들의 성적이 좋지 않으면 부모의 이기적인 태도가 드러나고, 이에 아이들의 배움으로부터의 도주가 순식간에 진행.

일본 교육에서 신보수주의 => 내셔널리즘의 강조와 가정교육의 강조 그리고 ‘봉사활동의 의무화’ 제창 / 신자유주의 => 공립학교 기능 줄이고 나머지는민영화하자는 ‘합교론’ 등. 신자유주의 교육개혁은 교육행정과 학교 책임을 극소화하여 아이들과 부모와 교사의 ‘자기책임’을 극대화하는 무책임한 개혁. ‘마음의 케어’를 강조하며 개인인적인 카운슬링만으로 대처.

‘보건체육’을 제외한 모든 교과의 ‘선택이수를 기본’으로 개편하는 신학습지도요령은 배움으로부터의 도주를 한층 가속화시킴. “매년 교육내용이 어려워져 아이들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학습지도요령을 개정할 때마다 교육 내용을 삭감하고 수준을 낮추어 점점 아이들이 수업에 따라가지 못함. “수험공부의 폐해로부터 아이들을 구한다”고 하지만, 교과내용 삭감과 수준저하를 단행해 오면서도 대학입시의 수준은 변하지 않음. 21세기는 평생교육 사회. 생애에 걸쳐 배움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라도 고교단계까지 교육내용은 모든 학생에게 기초 교양으로 보장되어야 함.

수준별 학습도 학력격차를 확대하는 이상의 성과를 올리지 못함. 기초를 모르는 학생에게는 그런 학습의 환경에 더 많이 노출시킴으로써 빨리 내용을 습득할 수 있음. 수준별 학습지도는 저학력인 아이를 저학력인 채로 묶어둘 위험성이 있음.

 

○ ‘공부’에서 ‘배움’으로

공부를 거부하고 싫어하는 아이들도 배움에는 굶주리고 있음. 필요한 것은 ‘공부’에서 ‘배움’으로의 전환.

공부와 배움의 차이는 ‘만남과 대화’의 유무에 따름. ‘배움’이란 사물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한 <세계만들기>, 타자와의 만남과 대화에 의한 <친구만들기>, 그리고 자기자신과의 만남과 대화에 의한 <자기만들기>가 삼위일체되어 수행되는 ‘의미와 관계를 엮어가는’ 영속적인 과정.

‘공부’는 교과서와 칠판에 비쳐진 지식의 그림자를 정보로 습득하고 있는 것에 그치는, 일종의 ‘동굴 신화’. 이 벽을 극복하기 위해 도구나 소재나 사람으로 매개된 ‘활동적인 배움’을 교실에 실현할 필요 있음. 또한 공부’에서 가정하는 자립과 의존의 이항대립을 넘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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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학력을 묻는다 – 배움의 교육과정

 

○ 학력문제의 혼란

대학생의 학력저하 배경으로는 대학입시과목의 다양화와 축소화, 고등학교의 선택중심 교육과정, 대학의 교양교육 해체에 거품경제 붕괴 후의 취업난으로 이한 고등교육 진학률의 상승이라는 직접적, 복합적 요인이 얽혀 있음.

이러한 대학생의 학력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지만, 초/중학생의 학력저하는 실제와 거리가 멀다. 이러한 학력저하 논쟁은 입시산업 쪽에서 보면 학부모와 학생들의 불안을 이용하여 고객을 늘릴 수 있는 ‘호박이 덩굴째 굴러 들어온’ 기회라 할 수 있을 것.

학력저하라는 여론이 완전히 근거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문부과학성 등은 이런 여론을 바탕으로 다른 목적을 이루고자 함. 즉 복선형 학교제도를 만들고자 하는 것. 기초학력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수준별 학습지도’와 ‘소집단지도’도입을 결정하고 학교선택의 자유화를 추진.

과연 ‘읽고 쓰고 셈하기’라는 기초학력 강화는 새로운 시대의 요청에 부응할 수 있을까? 수준별 학습지도는 낙제생들에게 효과가 있을 수 있는가? 미국과 유럽의 교육개혁은 산업사회로부터 지식사회로의 전환을 예상하여 교육내용의 레벨업을 중심과제로 삼고 있는데, 일본은 거꾸로 교육내용의 레벨다운을 시도하고 있음.

 

○ 학력의 실태 – 무엇이 문제인가

①일본의 초/중학생의 학력은 아직까지 세계최고 수준이다. ②초/중학생 학력수준에 비해서 일반시민의 과학적 교양이나 과학에 대한 관심은 최하위. 성인의 교양쇠퇴현상이 훨씬 심각. ③초/중학생 학력에 있어서 기초내용에 관해서는 고득점이지만, 창조적인 사고를 반영하는 능력에서는 평균 이하. 21세기형 창조적 사고에 있어서는 취약. ④학년이 올라갈수록 공부를 싫어하고 공부를 하지 않는 배움으로부터의 도주가 심각. ⑤배움으로부터의 도주와 학력저하는 사회적으로 낮은 계급, 계층일수록 심각. 학력의 위기는 문화자본의 측면에서 계급간 양분화를 촉진(수준별 수업, 교육내용 삭감은 이를 부추김). ⑥대학생의 학력저하는 직접적으로는 대학입시과목의 삭감과 교양과목의 해체 및 고등학교 선택과목의 확대에 따른 결과에 지나지 않음.

 

○ 위기의 배경 – 학력신화의 붕괴

학력을 힘(power)으로 여긴다는 것은 학력의 사회적 기능을 표현하고 있는 것. 학력의 기능은 화폐와 세 가지 측면에서 같은 것. ①화폐가 다양하고 이질적인 것을 수량적으로 비교하여 값을 매기고 가치를 부여하는 것처럼, 학력도 다양하고 이질적인 학습 경험을 일정하고 균질적인 척도로 값을 매기고 가치를 부여. ②교환수단으로 기능. 학력은 누구나 원하는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입시시장이나 노동시장의 교환수단으로 기능하고 있음. ③저축수단. 학습활동에 계획성과 계속성을 부여하고, 낭가서는 저축 욕망이 ㅜ자로 작용하여 교육활동의 기반이 되고 있음.

일본의 학력위기는 학력신화가 붕괴함으로써 통화폭락에 비유할 수 있는 학력폭락이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음.

싱가포르, 한국, 홍콩, 타이온, 일본 모두 학력성적은 1~5위를 독점하고 있는 나라이지만, 학교 외 학습시간은 현저하게 떨어지는 배움으로부터 도주현상이 일어나고 있음. 이것은 동아시아형 교육위기 현상.

학력경쟁을 통한 사회이동의 활성화는 압축된 근대화가 진행될 때는 순조롭게 기능. 그 때는 학력이라는 통화가 실제 이상으로 가치를 지님. 그러나 경제가 저성장시대로 돌입하면서 학력신화는 붕괴. 압축된 근대화가 종료되자 학교교육을 통해 높은 교육수준과 사회적 지위를 획득할 수 없게 됨. 학력이라는 통화가치가 폭락한 것.

포스트 산업주의 사회로 이행하면서 동아시아형 교육은 계속 어긋남. 일본 정부는 신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적 대응으로 일관. 신보수주의는 글로벌화에 대항하여 국가도덕과 가부장제를 고수, 신자유주의는 글로벌화에 영합하여 국가의 책임을 최소화하고 개인의 책임을 극대화하는 구조개혁 단행.

지식, 기능보다는 관심, 의욕, 태도를 중시한 새로운 학력관이 창조되고 있는 중. 후자가 강조되고 있는 배경에는 동아시아 교육이 식민지주의 교육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 과학과 생활, 과학과 도덕, 지식과 경험, 지성과 감성 등을 끊임없이 대립시키는 교육방식에서 기존의 교육을 개혁시키겠다는 미명하에 후자로의 이동이 신자유주의 교육개혁과 맞물려 이뤄지고 있는 중.

 

 

○ 기초학력의 복고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학력저하를 우려하는 논의는 언제나 교육의 혁신적 실천을억압하는 보수세력의 담론. 영국에서는 1970년대 후반에 노동당이 추진하는 아동중심 교육에 대한 공격으로 기초학력저하론 출현. 미국에서는 1980년대 오픈스쿨과 다문화교육을 억압할 목적으로 보수세력의 back to the basics 운동이 일어남.

리터러시literacy는 식자능력이라고 번역되고, 일리터러시illiteracy는 비식자 또는 문맹이라고 번역하는데 이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 리터러시라는 말의 용법은 본래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였음. 기초학력을 정의하고자 한다면 리터러시 개념으로 해야 함. 고등학교 졸업자가 다수인 사회에서 리터러시는 고등학교 정도의 교양을 갖추는 것이어야 함.

기초적인 지식이나 기능일수록 반복적이 연습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기능적으로 습득됨. 그래서 복고주의 교육운동은 변화된 시대의 노동시장에 적응하지 못하는 집단만을 양성하여 실업률만 높이는 결과를 낳음. 학력은 기초에서부터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에서부터 끌어올려 형성되는 것. 비고츠키의 발달근접영역과 내화이론에 따른다면 학력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 수준으로 돌아가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모르는 수준의 내용을 교사나 친구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모방하고 이를 스스로 내화할 필요가 있음. 배움에는 점프가 필요함.

 

○ 수준별 학습지도, 소집단지도는 유효한가

왜 학원에서는 수준별 학습지도를 기본으로 하고 학교에서는 도입하지 않았을까? ①수준별 학습지도는 공립학교가 입각하고 있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차별 교육 ②지도에 곤란을 초래함(이해도가 떨어지는 학생들만 모아놓으면 교사의 혼란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증가) ③학교의 커리큘럼이나 수업은 소정의 지식과 기능을 단계적으로 배우는 학원과 같은 조직이 아님(학교의 수업은 교육내용의 주제를 중심으로 조직됨).

학급당 40명이라는 악조건보다는 소집단지도가 효과가 있을 것이란 점은 명확한 것. 그러나 문부과학성이 추진하는 소집단지도는 이에 맞는 교사수를 확보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문제. 대신 전임교사를 채용하던 정원을 시간강사로 대체하여 실현하려 함. 이런 방식으로 소집단지도를 하면 학교에서 교사 정원의 반이 시간강사가 됨. 학력저하와 학교해체 초래.

 

○ 아이들의 ‘배움’을 위하여

학급당 학생수를 줄여야 함. 교과서와 칠판을 중심으로 일제수업을 하는 방식을 바꿔야. 교과서도 풍부한 내용을 담은 것으로 전환(학교에 비치하고 대출하는 식으로). 나아가 아이들에 대한 평가를 폐지. 배움에 대한 평가는 배움의 경험 자체에 대한 충실감과 배움의 희노애락을 공유하는 친구, 교사와 부모의 승인과 격려로 충분함. 학력저하의 극복은 교사의 지도력으로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 서로가 배워가는 협력 속에서 가능.

고등학교 입시를 폐지해야함. 대학인의 입장에서는 학력저하의 희생이 된 학생의 입장에서 교양교육의 충실을 꾀할 필요가 있음. 학교 교사가 대학원에서 공부할 기회를 대폭적으로 확충해야 함. 아이들의 배움을 촉진할 교사의 역량이 매우 중요. 또한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평생에 걸쳐 몇 번이라도 재출발할 수 있는 배움의 기회 제공해야 함. 지식사회에서는 평생교육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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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추장의 연설 - 녹색평론 창간호

 

 

시애틀 추장의 연설 Chief Seattle letter
1991년 11월 <녹색평론> 창간호

 

워싱턴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대추장은 우정과 선의의 말도 함께 보내왔다. 그가 답례로 우리의 우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는 그로서는 친절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대들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볼 것이다. 우리가 땅을 팔지 않으면 백인이 총을 들고 와서 우리 땅을 빼앗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속에 흐르는 수액은 우리 홍인(紅人)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백인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이 태어난 곳을 망각해 버리지만, 우리가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 홍인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이다. 사슴, 말, 큰 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가족이다.
워싱턴의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온 것은 곧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을 달라는 것과 같다. 대추장은 우리만 따로 편히 살 수 있도록 한 장소를 마련해 주겠다고 한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들의 제안을 잘 고려해보겠지만, 우리에게 있어 이 땅은 거룩한 것이기에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울과 강을 흐르는 이 반짝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피다. 만약 우리가 이 땅을 팔 경우에는 이 땅이 거룩한 것이라는 걸 기억해 달라.
거룩할 뿐만 아니라, 호수의 맑은 물속에 비추인 신령스러운 모습들 하나하나가 우리네 삶의 일들과 기억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음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물결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내는 목소리이다. 강은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갈증을 풀어준다. 카누를 날라주고 자식들을 길러준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팔게 되면 저 강들이 우리와 그대들의 형제임을 잊지 말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형제에게 하듯 강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아침 햇살 앞에서 산안개가 달아나듯이 홍인은 백인 앞에서 언제나 뒤로 물러났었지만 우리 조상들의 유골은 신성한 것이고 그들의 무덤은 거룩한 땅이다. 그러니 이 언덕, 이 나무, 이 땅덩어리는 우리에게 신성한 것이다. 백인은 우리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백인에게는 땅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똑같다. 그는 한밤중에 와서는 필요한 것을 빼앗아가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땅은 그에게 형제가 아니라 적이며, 그것을 다 정복했을 때 그는 또다른 곳으로 나아간다. 백인은 거리낌없이 아버지의 무덤을 내팽개치는가 하면 아이들에게서 땅을 빼앗고는 개의치 않는다.
아버지의 무덤과 아이들의 타고난 권리는 잊혀지고 만다. 백인은 어머니인 대지와 형제인 저 하늘을 마치 양이나 목걸이처럼 사고 약탈하고 팔 수 있는 것으로 대한다. 백인의 식욕은 땅을 삼켜 버리고 오직 사막만을 남겨놓을 것이다.
모를 일이다. 우리의 방식은 그대들과는 다르다. 그대들의 도시의 모습은 홍인의 눈에 고통을 준다. 백인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 없다. 봄 잎새 날리는 소리나 벌레들의 날개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곳이 없다. 홍인이 미개하고 무지하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도시의 소음은 귀를 모욕하는 것만 같다. 쏙독새의 외로운 울음소리나 한밤중 못가에서 들리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면 삶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나는 홍인이라서 이해할 수가 없다.
인디언은 연못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부드러운 바람소리와 한낮의 비에 씻긴 바람이 머금은 소나무 내음을 사랑한다. 만물이 숨결을 나누고 있으므로 공기는 홍인에게 소중한 것이다. 짐승들, 나무들, 그리고 인간은 같은 숨결을 나누고 산다. 백인은 자기가 숨쉬는 공기를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여러 날 동안 죽어가고 있는 사람처럼 그는 악취에 무감각하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대들에게 땅을 팔게 되더라도 우리에게 공기가 소중하고, 또한 공기는 그것이 지탱해 주는 온갖 생명과 영기(靈氣)를 나누어 갖는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의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베풀어준 바람은 그의 마지막 한숨도 받아준다. 바람은 또한 우리의 아이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준다. 우리가 우리 땅을 팔게 되더라도 그것을 잘 간수해서 백인들도 들꽃들로 향기로워진 바람을 맛볼 수 있는 신성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그러나 제의를 받아들일 경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즉 이 땅의 짐승들을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미개인이니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나는 초원에서 썩어가고 있는 수많은 물소를 본 일이 있는데 모두 달리는 기차에서 백인들이 총으로 쏘고는 그대로 내버려둔 것들이었다. 연기를 뿜어내는 철마가 우리가 오직 생존을 위해서 죽이는 물소보다 어째서 더 중요한지를 모르는 것도 우리가 미개인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짐승들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든 짐승이 사라져버린다면 인간은 영혼의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이다. 짐승들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들에게도 일어나게 마련이다. 만물은 서로 맺어져 있다.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그들이 딛고 선 땅이 우리 조상의 뼈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들이 땅을 존경할 수 있도록 그 땅이 우리 종족의 삶들로 충만해 있다고 말해주라.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을 그대들의 아이들에게도 가르치라. 땅 위에 닥친 일은 그 땅의 아들들에게도 닥칠 것이니, 그들이 땅에다 침을 뱉으면 그것은 곧 자신에게 침을 뱉는 것과 같다.
땅이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물은 마치 한 가족을 맺어주는 피와도 같이 맺어져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그물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그가 그 그물에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곧 자신에게 하는 짓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종족을 위해 그대들이 마련해준 곳으로 가라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우리는 떨어져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우리가 여생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아이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패배의 굴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의 전사들은 수치심에 사로잡혔으며 패배한 이후로 헛되이 나날을 보내면서 단 음식과 독한 술로 그들의 육신을 더럽히고 있다. 우리가 어디서 우리의 나머지 날들을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 많은 날이 남아있지도 않다. 몇 시간, 혹은 몇 번의 겨울이 더 지나가면 언젠가 이 땅에 살았거나 숲속에서 조그맣게 무리를 지어 지금도 살고 있는 위대한 부족의 자식들중에 그 누구도 살아남아서 한때 그대들만큼이나 힘세고 희망에 넘쳤던 사람들의 무덤을 슬퍼해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왜 우리 부족의 멸망을 슬퍼해야 하는가? 부족이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인간들은 바다의 파도처럼 왔다가는 간다. 자기네 하느님과 친구처럼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백인들조차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백인들 또한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가지는 우리 모두의 하느님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대들은 땅을 소유하고 싶어하듯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하느님이며 그의 자비로움은 홍인에게나 백인에게나 꼭같은 것이다. 이 땅은 하느님에게 소중한 것이므로 땅을 해치는 것은 그 창조주에 대한 모욕이다. 백인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져 갈 것이다. 어쩌면 다른 종족보다 더 빨리 사라질지 모른다.
계속해서 그대들의 잠자리를 더럽힌다면 어느날 밤 그대들은 쓰레기더미속에서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멸망할 때 그대들을 이 땅에 보내주고 어떤 특별한 목적으로 그대들에게 이 땅과 홍인을 지배할 권한을 허락해 준 하느님에 의해 불태워져 환하게 빛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불가사의한 신비이다. 언제 물소들이 모두 살육되고 야생마가 길들여지고 은밀한 숲 구석구석이 수많은 인간들의 냄새로 가득차고 무르익은 언덕이 말하는 쇠줄(電話線)로 더럽혀질 것인지를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덤불은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독수리는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날랜 조랑말과 사냥에 작별을 고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삶의 끝이자 죽음의 시작이다.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우리가 거기에 동의한다면 그대들이 약속한 보호구역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서 우리는 얼마남지 않은 날들을 마치게 될 것이다. 마지막 홍인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그가 다만 초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구름의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기억될 때라도, 기슭과 숲들은 여전히 내 백성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어머니의 심장의 고동을 사랑하듯이 그들이 이 땅을 사랑해 달라.
그러므로 우리가 땅을 팔더라도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 달라. 우리가 돌본 것처럼 이 땅을 돌보아 달라. 당신들이 이 땅을 차지하게 될 때 이 땅의 기억을 지금처럼 마음속에 간직해 달라. 온 힘을 다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그대들의 아이들을 위해 이 땅을 지키고 사랑해 달라.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이.
한가지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모두의 하느님은 하나라는 것을. 이 땅은 그에게 소중한 것이다. 백인들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1854 Suquamish Chief Seat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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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마나부, 『교육개혁을 디자인한다』, 학이시습

사토 마나부, 『교육개혁을 디자인한다』, 학이시습

 

 

 

훗카이도에 있는 어업이 중심인 한 작은 마을의 고등학교에서도 배움의 네트워크는 펼쳐지고 있다. 이 마을의 고교는 각 학년이 두 반밖에 없으며, 전교생을 다 합쳐도 200명이 안 되는 작은 학교다. 학생수가 더 줄게 되면 폐교로 내몰릴 위험 상황에 놓여 있다. 학교의 존속은 마으르이 사활이 걸린 문제다. 학교가 문을 닫아 젊은이들이 마을을 떠나버리면 어업에 종사할 사람이 없어지고, 결국 마을은 소멸한다. 이 위험에 맞서 교장과 교사들은 지역의 현재와 미래를 주제로 한 교육과정을 마련했다. 1학년은 지역학습, 2학년은 어업의 현재와 미래, 3학년은 학생 스스로 미래 삶의 방식을 디자인하는 학습이 그것이다. 지역 실정에 맞는 교육과정은 지역의 지지를 받았다. 지역 어업협동조합으로부터 경비를 지원받아 2학년 전원이 뉴질랜드 어촌을 방문해 바다의 환경을 지키며 어업을 영위하고 있는 젊은이들과 교류했다. 뉴질랜드의 어업은 글로컬리즘—세계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한다—이라는 환경보호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업의 미래를 생각하기에는 더없이 멋진 장소인 것이다. 지역 실정에 맞는 교육과정을 실천하고 나서부터 인근의 마을에서 이 학교를 지망하는 학생이 늘어났다. 학교와 지역의 연대는 이런학교의 화려한 부활도 가능하게 해준다. (57-8pp)

 

 

배움을 중심으로 한 수업 개혁은 교실 커뮤니케이션의 변혁을 기초로 해야 한다. 아이들의 ‘자주성’이나 ‘주체성’이 강조되는 최근의 수업 개혁에서는 일반적으로 아이들의 발표력과 표현력이 중시되고 활발하게 의견을 서로 발표하는 교실 만들기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배움을 촉진하는 커뮤니케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들어주는 관계’이며, 말하기보다는 ‘듣기’가 배움에서는 더 결정적이다.

일본의 초등학교 교실에서 심각한 것은 늘 ‘밝고, 건강하게’ 활동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 외국의 교육학자나 교사들을 데리고 초등학교를 방문해 교실 참관을 안내할 기뢰가 많은데, 일본의 초등학교 교실에 대한 그들의 첫인상을 물어보면 ‘noisy’(소란스럽다)라는 말이 되돌아온다. 참으로 그러하다. 일본의 유치원과 초등학교 교실은 서구 여러 나라의 교실과 비교하면 아이들도 교사도 목에 힘을 준 채 경직되어 큰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으며, 떠들썩한 공간이라는 것이 특징적이다. 교실 인원이 많은 것도 한 이유겠지만, 그 이상으로 ‘밝고, 건강한’ 아이(학교, 교실)가 좋다는 관념을 교사도 아이도 지니고 있기 때문일까? 어딘지 무리가 있는 ‘밝음’과 ‘활달함’이며, 스트레스가 강한 교실이라고 말해야 좋을 것이다. (93-4pp)

 

 

이와 아울러 시급히 재검토해야 하는 것이 바로 교과서 무상 배포 제도다. 교육내용이 크게 줄어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 예산의 부족으로 교과서는 점점 얇고 빈약한 것이 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교과서에 견줘보면 분량 면에서도 5분의 1에서 10분의 1 정도의 빈약한 인쇄물이다. 현재 교과서는 학습 자료 기능은 거의 수행하지 못하며, 아이들에게도 매력있는 책이 아니다. 현재와 같이 아동 한 명 한 명에게 무상으로 배포하는 제도를 폐지하고 학교 도서실의 도서로 비치해 아이들에게 대출하는 방식으로 바꿀 것을 제창한다. 교과서를 5년마다 개정한다고 해도 무상공극ㅂ을 대출 방식으로 전환할 경우, 같은 예산으로 적어도 5배 분량의 교과서를 준비하는 것이 가능하다. 학습지도요령 개정 때마다 갱신한다면 10배 이상 분량의 교과서를 구비하는 일도 가능하다. 자녀들에게 자기 교과서를 갖게 해주고 싶은 부모에게는 시판을 통해 구입하게 하면 된다. (111p)

 

 

학교의 자주적인 개혁을 막는 최대의 장벽은 문부성의 통제도, 교육위원회의 통제도 아니다. 교사들을 분열, 고립시키고 있는 교실의 장벽이며 교과의 장벽이다. 이 장벽을 안에서부터 부수지 않고는 교내에서 동료성을 구축할 수 없다. 모든 교사가 1년에 적어도 한번은 동료에게 자신의 수업을 공개해 서로 비평하는 시간을 갖지 않고서는 교내에서 확실한 동료성을 구축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1년에 단 한번도 동료에게 자신의 수업을 공개하지 않는 교사는 엄밀히 말해 공교육 교사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교사는 교실과 수업을 사물화하고, 학교의 공공성을 진작하는 책임을 게을리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라도 교실을 개방하지 않는 교사가 교내에 존재하는 한 학교개혁을 내부에서 원활하게 추친하는 일은 곤란하다. (113-4pp)

 

 

교육개혁에 혼란을 가져오는 가장 큰 오류의 하나는, 인간성 좋고 정열만 있으면 누구나 교사의 일을 하 수 있다고 하는 교직에 대한 안이 한 생각에 있다. 그러기는커녕, 교직은 교육에 관한 전문적인 식견과 아이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책임, 일본 사회으 lalfo에 대한 책임이라는 높은 지성과 윤리 의식에 기초한 고도의 전문직이다. 오늘날 교사는 교직의 전문직성에 부합하는 양성과 연수르 보장받지 못하고 있으며, 전문직에 적합한 자율성도 윤리도 미흡하다. (153p)

 

 

양육과 교육의 열린 네트워크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이 겪고 있는 일련의 교육 위기의 기저에는 엄마 혼자서 아이를 기르는 ‘밀실 양육’이라는 현실이 있다. 엄마에게나 아이에게나 스트레스가 많은 ‘밀실 양육’은 핵가족이 정착된 30년 전에 일반화되었지만, 핵가족은 현재 해체 위기를 맞고 있다. 현재 도쿄의 35-39세 남성의 30% 이상(전국적으로는 20%)이 결혼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학령기의 아이가 잇는 세대는 전체 세대의 3분의 1까지 감소하고 있다. 거의 모든 사람이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키우는 시대는 이제 그 막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 앞으로는 일본도 유럽이나 미국과 같이 한 번밖에 결혼하지 않는 사람, 몇 번이나 결혼한 사람, 한 번도 결혼하지 않는 사람으로 분할되는 사회가 되는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근대 가족의 붕괴와 재편 속에서 아이들을 보호하고 양육할 새로운 시스템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며, 여성의 사회 진출의 기회를 확대하는 것과 함께 양육을 지원하는 사회적인 네트워크의 형성이 요구된다. (15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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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맥낼리, [글로벌 슬럼프] 3,4장 요약

3장. 조울증에 빠진 자본주의: 위기의 재발

 

 

 

 

- “대공황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주기적으로 반복된다”(찰스 킨들버거). 자본주의 경제성장은 늘 그 체제 내부에 큰 고장을 일으킨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마치 사람들이 들숨과 날숨을 쉬듯 호황과 침체를 번갈아 겪는다.

그 모든 대공황들 중에서 1930년대 대공황이 단연 으뜸. 이때야말로 글자 그대로 ‘글로벌 슬럼프’. 그러나 실제 데이터를 분석해보면 1930년대에도 상당한 경제성장이 있었음. 5%이상의 경제성장을 나타낸 분기가 무려 20차례나 됨. 이때마다 일부 지배층은 “이제 경기침체가 끝났다”는 것을 선전해 댐. 그러나 이런 경제성장의 분기들 사이사이에 13회의 경기위축기가 끼어있었음.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돌파구 없이는 자본주의적 번영이나 경기 회복은 불가능했음.

 

과잉 투자, 투기, 그리고 슬럼프: 1920년대로부터 얻는 교훈

1925년에서 1929년 사이에 미국 등 세계의 여러 나라 경제들은 확실히 호황기를 맞았다. 4년간 제조업 및 광업 생산고는 거의 20%나 증가함. 이런 경제의 성장은 강력한 수요 팽창이 뒷받침 되어야 가능함. 그러나 이 호황기 기간에도 미국인의 90%는 소득이 줄어들었음. 그러나 20세기 초 자본주의는 ‘빚을 내는 것’으로 단기적 응급조치를 취함. 소비자 신용의 증가로 부동산 시장의 과열이 형성. 1924~5년 사이에 주가가 무려 80% 이상 상승. 그러나 실물경제의 ‘기초 조건들’, 예컨대 수익성, 평균소득, 고용 등의 지표는 그런 성장을 정당화할 정도로 좋은 것이 전혀 없었음.

사람들은 만약 주가가 떨어질 경우 그 빚을 어떻게 갚을지에 대해선 하나도 걱정하지 않음. 이런 나쁜 상황에 대해선 누구도 생각하기조차 싫었기 때문. 그러나 그 생각하기 싫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남. 1929년 10월 23일부로 주식시장은 그 직전 4개월동안 거두어들인 모든 이익을 물거품으로 만들면서 폭락함.

거품붕괴의 핵심 요인은 ‘과잉 투자’. 대공황 직전 4년간 미국의 제조업체 수는 무려 2만 3,000여개나 증가. 노동생산성도 급격히 상승되어 포드 T-모델 자동차 차대 하나를 만드는 시간이 12시간에서 90분으로 단축. 이러한 과잉투자의 위험은 잘 드러나지 않았는데, 그것은 고용증가와 은행융자 규모의 확장으로 인한 소비시장 확대 때문. 이것이 주식시장의 거품 증대로 이어지고 끝내 그 거품이 붕괴했을 때, 사람들은 거품이 모든 고통의 원인인 것처럼 보지만, 거품조차 과잉 투자가 만들어낸 고전적 순환의 결과물.

 

이윤 체제에 깃든 경제의 불안정성

주류 경제학은 개인의 소비를 자본주의 경제의 추축이라고 고집. 그러나 실제로는 투자 지출이 경기순환을 설명하는 핵심 변수. 케인스의 경우 자본 투자의 순환적 변동을 심리학적으로 설명. 자본가들은 미래에 대한 비합리적인 불안감 때문에, 부를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축장하는 것이라는 설명. 반면 맑스는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생산에 의해 추동되고 강제되는 경제체제 그 자체가 비합리적이라고 설명.

“US스틸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지 철강 자체를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니다.”(US스틸 전임 최고경영자). 이러한 발언이 소비자 수요가 생산을 추동한다는 주류경제학의 발언보다 더 솔직한 것.

이윤 추구가 목표가 되기 때문에 재화들 간의 사용가치의 차이는 중요한 문제가 아님. 그것이 화폐로 환산되는 수량적 가치로 전환될 수 있는지의 여부만이 중요함. “당신이 무슨 상품을 사건 우리는 상관하지 않아요. 우리 눈에는 ‘곡물이나 석유나 서로 맞바꿀 수 잇는 칼로리로 보이죠. 어디 옥수수를 한번 봅시다. 그건 이제 난방이나 운송에도 쓰이는 연료가 되었죠. 게다가 석유로 플라스틱도 만들 수 있고 농사용 비료도 만들죠.”(Doug Sanders)

이윤 극대화를 위한 자본가의 열망은 노동강도 심화에 대한 노동자들의 반발과 생산성 향상과 시장점유율 확보를 위해 자본가들간에 벌어지는 신기술 도입 경쟁으로 인해 종종 좌절된다. 그럼에도 이런 무한 경쟁은 기업가들이 자유의지로 선택의 가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체제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자본주의의 성장 과정은 자본주의의 토대 자체를 허물어뜨리게 되었는가? 맑스의 대답은 자본주의의 팽창 과정이 과잉 축적과 이윤율 하락을 초래하기 때문이라는 것.

 

과잉 축적 및 이윤 하락

기계화라는 것이 자동적이고 단선적인 방식으로 이윤율을 저하시킨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상대적인 의미에서 노동을 신기술로 대체해 나가면서 이윤에 하향 압박이 가해지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과정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기업가들은 갈수록 취약해지고 마침내 경쟁에서 탈락하거나 경제적 슬럼프에 빠진다. 그런데 상당한 기업들이 파산하는 현실 자체가 전체적으로 새로운 경기 회복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물론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체제 전반의 경제적 위축이라는 고통과 역경을 수반한다.

 

금융, 신용, 그리고 위기

기업들이 경쟁에서 버티기 위해 필요한 투자를 제대로 하려면 은행 등에서 돈을 빌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로 현대 자본주의는 고도로 발전된 신용 체제 없이는 제대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런데 기업이 돈을 빌리려면 당장 필요한 투자 자금을 빌려 가는 대신 장래 벌어들일 이윤의 일부를 주겠노라 약속을 해야 함. 은행과 같은 채권자가 돈을 빌려 주면서 받는 건 기업이 나중에 돈을 주겠다는 약속 뿐. 일종의 가공자본.

우리의 현실은 가공자본의 거래가 왕성하게 성장한 상황. 실제로 2000년 초 시스코시스템즈의 주가는 그 회사가 정작 벌어들이는 수준에 비해 160배나 높게 팔렸음. 이는 즉 이 회사의 주식을 구입한 뒤 그 기업의 실제 배당금을 받아 애초 투자한 본전을 찾으려면 무려 160년이나 걸린다는 뜻. 그런데 주식시장에 거품이 많이 끼어 ‘비합리적인 과열’이 발생하면 이런 투자가 만연하게 됨.

엔론의 경우 : 이 회사 주식의 거품이 한창일 때 주당 90달러였으나 거품이 터지자 주당 36센트로 폭락. 2001년 그 회사가 무너져 내리는 동안, 주주들이 소유했던 가공자본 600억 달러가 순식간에 사라짐.

체제의 전반적인 위기가 얼핏 보면 단순히 금융 및 화폐 공황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 체제 전체의 이윤율 하락의 위기. 그러나 어느 자본주의의 위기도 영원하지는 않음. 우리의 시급한 학습과제는 자본주의가 공황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어떤 메커니즘을 동원하는가를 설명하는 것.

 

‘창조적 파괴’: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빠뜨려 배를 바로 세우는 방식

자본주의의 위기는 공장, 사무실, 광산, 제철소 같은 것을 폐쇄함으로써 과잉자본을 청소함. 금융위기는 그런 자본의 파괴가 일어나도록 돕는 데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함. 어떤 기업의 주가가 극단적으로 폭락하면 그 기업은 오히려 쉽게 망하거나 팔릴 가능성이 높아짐.

기업이나 은행이 더욱 대형화될수록 자신의 죽음을 예방하기 위한 수단을 더 많이 동원함. 사업의 확장을 통해 적자를 모면하기 위한 시간을 버는 것, 경쟁업체와의 인수합병, 은행 빚 돌려막기 등. 이에 더해 파산 직전의 기업과 은행을 국가가 구제하기도 함. 이들이 망하면 전체 경제에 대파국이 올 것이라는 논리. 그러나 이런 개입의 결과 전체 체제가 다시금 팽창하는 데 필요한 ‘창조적 파괴’를 못하게 가로막음. 이것은 “위기로부터 불경기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일종의 혈전증을 유발”(프레오브라젠스키). 자본의 파괴를 방지함으로써 불경기가 덜 잔인해진 대신, 파괴를 통해 새로운 자본 증식의 조건을 재창조 할 수 없게 됨. 결과적으로 제2차대전을 불러오게 됨. 2차대전을 통해 새로운 자본축적의 조건을 형성할 수 있게 됨.

 

 

 

4장. 금융 대혼란: 후기 자본주의에서의 화폐, 신용, 불안정성

 

 

금융 부문, 특히 이윤 획득을 위한 부채의 창조는 최근 수십 년 사이에 돈벌이 되는 사업으로 떠올랐다. 1973년 당시 미국 경제에서 금융 수익은 전체 이윤의 16%에 불과했지만, 2007년에 41%로 증가함. 그 때문에 이윤 급상승이란 경제 전반에 걸쳐 오히려 총부채가 상승했다는 것을 의미. 일례로 앨런 그린스펀이 연준 의장으로 재직하던 동안(1987~2005), 미국의 부채 총액은 10조 달러 수준에서 43조 달러로 증가. 이를 두고 주류 학자들은 소비자들의 과소비를 탓하지만, 같은 기간 소비자 부채는 두 배가 증가한 반면, 금융 부문 부채는 5배 증가. 채무에 기반한 경제가 경제성장의 새로운 동력이라는 생각이 차용 경쟁에 불을 붙인 것.

이를 두고 ‘금융화’가 진전되었다는 평가를 하기도 하지만, 이 중대한 경제구조 변화를 설명할 때 금속, 철강, 석유화학과 같은 전통적인 경성 상품들보다는 지식, 정보, 상징적 자산 등에 기반한 신경제의 탄생이라는 측면만 부각시킴. “파이프라인이나 전선, 발전 설비 같은 것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지적 자본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제프리 스킬링, 엔론 회장). 그러면서 엔론은 다른 사업자들이 깔아 놓은 통신망에 대한 접근권만 구매함으로써 실제 인프라 구축의 진전을 가로막음.

뒤메닐, 레비 등은 1970년대 말 ‘금융 쿠데타’가 발생하여 은행가들이 정부나 사회보다 우위에 서게 되어 금융 규칙들을 다시 작성했다고 평가. 그러나 자본주의는 마치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어 낸 괴물처럼 더 이상 통제가 불가능해진 하나의 소외된 체제. 어느 누구도 자본주의를 실제로 통제할 수 없음. 공황이 한 번 닥치면 은행이나 증권시장은 순식간에 수십조를 날리는데 그런 위기를 유발하는 체제를 은행가들이라고 일부러 불러들일 이유는 무엇인가?

후기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것이 은행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면, 진보 진영의 경제적 시야는 금융을 길들이고 통제하는 데로 좁혀질 것. (기생계급과 생산계급 사이의 투쟁?) 반대로 금융화를 여전히 일터에서 노동력의 착취에 의존하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 안에서 발생한 하나의 변형된 형태라고 묘사한다면, 은행에 대한 저항 투쟁은 자본주의적인 착취 공간을 문제 삼고 비판하는 정치 활동의 한 부분. 우리는 금융이라는 회로와 노동 착취 사이의 상호 연관성을 설득력있게 설명해야 함.

 

세계 금융이 영원히 변화한 날

화폐의 안정성은 투자가들이 장래의 투자를 경정하는 데 있어 가격 변동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중요. 1870년대에 대부분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영국의 선례를 따라 금 본위제를 채택. 이후 대공황과 2차대전을 겪으면서 주요 강대국들은 새로운 달러-금 본위제를 만드는데 합의. 2차 대전 이후 미국 경제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아 다른 강대국에 비해 막강한 경제력을 확보. 다른 나라들은 미국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달러가 필요했고, 이것이 달러의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보장.

수십년 만에 북반구 다른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는 미국에 대적할 만큼 성장. 독일과 일본의 성장이 두드러짐. 미국의 해외직접투자의 급증과 해외 미군기지 및 무기 구입 등 국방비 지출의 증가로 인한 미 달러의 지속적이 유출은 구조적인 국제수지 불균형 초래. 미국은 달러가 기축통화라는 점을 이용해 달러 발행을 늘림으로써 무역적자를 해소하려 했으나 역부족.

이제 각국으로 유입되어 넘쳐흐르게 된 미 달러는 유러달러 시장의 탄생을 촉발시킴. 유러달러 시장은 미국 혹은 다른 어떤 국가의 규제도 받지 않고 미 달러를 대출하고 빌릴 수 있는 공간. 이런 역외 금융거래의 팽창으로 미국은 금융시장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력 상실.

이런 역외 금융시장과 탈규제화된 통화시장의 성장이 선행한 후, 정부의 금융 탈규제가 뒤이어짐. 정부의 규제 철폐는 당국의 관할 바깥으로 도피해 버린 금융회사들의 자금을 다시 관할지로 끌어들이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일 뿐. 닉슨 대통령의 금-태환 중지선언은 사실상 예정된 수순이었을 뿐.

 

불안정한 화폐, 휘발성이 높은 금융

금-태환 중지선언으로 인해 통화 불안정성 심화. 여러 나라 통화를 사용해야 하는 사업가들 입장에서는 투자비용 또는 영업수익의 규모를 예측하는 것이 더 어려워짐.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다양한 ‘위험 관리’ 기법이 등장. 한 국가의 통화가치의 급격한 하락은 다국적기업의 투자를 수포로 돌릴 수 있는 것이기에, 이런 통화 변동으로부터 투자자를 보호할 울타리, 즉 헤지hedge가 등장.

외환거래자들은 어떤 통화가 약세이고, 어떤 통화가 강세인지를 정확히 예측만 할 수 있다면 실질 투자의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이 막대한 이윤을 챙길 수 있게 됨. 통화시장이란 말 그대로 돈이 돈을 버는 자본주의 유토피아를 구현.

파생상품 거래는 본래 미국 농업분야에서 먼저 시작된 것. 곡물상이 곡물수요 증가를 예측하여 농부에게 내년도 특정 시점에 곡물거래를 하겠다는 약정을 미리 하는 것. 이러한 선물계약을 통해 농부 입장에서는 미리 안정된 소득을 확보할 수 있고, 곡물상 입장에서는 추수 이후 곡물가가 상승한다면 그만큼 이득을 볼 수 있는 것. 이를 통해 농부는 재해에 따르는 농사의 위험성, 곡물상은 일정한 가격선 확보라는 면에서 서로의 위험을 상쇄한 것. 금융불안정의 심화는 이런 시스템을 금융시장에도 적용시킴. 미국에 들어온 다국적기업이 달러가치 급락에 대비한 파생상품을 미리 구입해 놓으면, 달러가치가 하락해도 미리 정해놓은 환율로 달러를 자국 화폐로 교환이 가능해지는 것. 달러가치가 오른다고 해도 계약 비용만 지불하고 오른 가치대로 팔 수 있어 어차피 이득이 되는 셈.

은행 금리 변동에 대비한 스왑 상품도 등장. 이런 파생상품 시장의 규모는 순식간에 주식시장, 채권시장의 규모를 초과해버림. 주요 은행가들이나 경제학자들은 이 모든 것이 세계시장의 효율성이 증대한 것이라고 평가.

 

부채, 증권화, 그리고 금융 공황

금융 폭발의 두 가지 결정적 국면: ①미국 바깥에서 유통되는 달러량의 지속적인 증가 ②주기적으로 경기침체에 빠진 경제를 구제하기 위해 정부가 취한 경기부양책으로 인해 전세계적 통화 공급 증가. 이 증대된 통화의 대부분은 은행으로 흘러들었는데, 경기후퇴로 인해 대출 수요는 통화 증대에 미치지 못함.

오일 쇼크로 인해 제3세계 국가들이 급하게 돈을 빌리려 함. 이에 서방 은행들은 제3세계를 향해 대출잔치를 벌임. 그런데 미 연준의 폴 볼커가 1979년 인플레를 잡겠다는 명목으로 금리를 20%로 인상시켜 제3세계 ‘부채위기’를 유발. 이에 IMF, 세계은행 등이 구제금융을 앞세워 이들 나라에 구조조정 프로그램 강제. 볼커 충격을 통해 인플레가 진정되자 점자 금리도 하락하게 됨. 이에 글로벌 부자들은 다양한 파생금융상품에 대한 투자를 통해 새로운 수익 창출에 뛰어 듦.

이제 은행들은 대출이자와 예금이자의 차액을 통해 수익을 올리는 전통적 기법에서 탈피하여 대출을 담보로 한 증권을 만들어 파는 것을 통해 수익을 창출. 이를테면, 주택융자를 판매한 즉시 그 대출 기록을 회계장부에서 뻬버리고, 이를 다른 투자은행 등에 판매. 채무자의 채무불이행에 따르는 위험은 이 투자은행에 넘기고 단지 수수료만 챙기게 됨. 이런 방식은 주택 뿐만 아니라 신용카드, 부채, 자동차 등으로 번져감. 은행들이 채무불이행 위험을 떠맡지 않는다는 것은 은행들이 자기들이 판매한 융자대출채권을 다시 구매하지 않을 때에는 그렇겠지만, 어리석게도 꽤 많은 은행들이 그러한 실수를 범함.

이전 같았으면 금융위기의 징후가 강하게 드러날 때에는 중앙은행등이 나서 이를 수리하지만, 금융 팽창의 시기에는 이런 통제가 작동하지 못함. 전산화된 통화 거래체계는 정기적으로 자산 거품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위기에 대응.

2000년대 초반 닷컴 기업의 거품 붕괴에 대응하겠다고 연준 의장 앨런 그린스펀은 수 차례 이자율을 낮춰 부동산 분야의 거품을 키움. 2003년에는 이자율이 1%대로 낮아졌고, 이에 힘입어 주택융자 증권화의 규모는 천문학적으로 증대. 이를 통한 수익 증대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가난한 흑인, 남미 출신 등에게까지 주택융자를 팔게 됨. 이후 이자율이 솟구치면서 위기 도래. 그러나 대다수의 은행들은 근거 없는 수학적 모델에 현혹되어 자신들이 팔고 있는 악성 채권을 맹신함. 주류 논평가들은 빈곤층이 자신들의 자산능력을 넘어선 대출을 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매도했지만, 오히려 문제는 은행들의 공격적인 대출판매. 이 과정의 태반이 속임수와 조작.

채권 투자에 대한 위험을 상쇄시키기 위해 신용부도스왑CDS 등장. CDS를 판매한 금융 회사는 고객이 투자한 회사가 부도가 나는 경우 투자한 돈에서 하나도 손해를 보지 않게 모두 보상해 주겠다고 약속. 이는 회사가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나 가능. 은행들은 이런 금융상품을 자격심사도 하지 않고 대량으로 판매. 사람들은 끊임없이 투자한 회사 또는 채무자가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내기를 하게 되는 상황. CDS는 이 내기에 대한 일종의 보험.

1995년 이전까지 미국 주택가격은 물가 상승률과 비례. 그러나 그 이후로는 소비자물가지수보다 주택가격이 70%나 빨리 상승. 이는 기존의 역사적 패턴과도 다를 뿐만 아니라 명백히 지속 불가능한 것. 그럼에도 투자 회사는 신용도가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강요하다시피 주택융자를 판매함.

은행들의 고전적인 딜레마는 이윤율의 저하. 수많은 은행들이 똑같은 상품들을 많이 만들어 내다 보니 이윤 마진도 낮아지는 것. 이에 대한 일반적인 대응은 재무 레버리지 비율(자기자본에 대한 대부자본의 비율)을 높이는 것. 2001년 메릴린치의 레버리지 비율은 16대 1이었으나 2007년에는 32대 1로 증가. 모건스탠리와 베어스턴스도 33대 1. 이는 만약 채권자들이 대부 자금의 3%만 되돌려 달라고 요구해도 그 기업은 금방 망한다는 것. 이런 일은 2008년에 실제 일어났음. 문제는 금융권 전체의 이윤 마진을 줄이도록 압박하는 체제 전반의 문제.

 

“사기꾼보다 멍텅구리가 더 많아”: 위험, 숫자 물신주의, 범지구적 대폭락

시티은행 등은 그들이 판매하는 주택담보부증권을 맹신한 나머지 상품 계약 내용 속에 ‘유동성 판매 조항’까지 포함시켰다. 이것은 주택담보부증권 시장이 얼어붙는 등 비상 상황이 닥치는 경우, 판매한 은행이 그 증권을 도로 사주겠다는 약속이다. 결국 시티은행은 자기 덫에 걸려 결국 250억 달러에 이르는 쓰레기 악성 증권을 되사야 했다. 이렇게 시장 상황이 악화되는 것이 뻔한데도 파생금융상품에 목을 메는 은행들의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파생금융상품에 활용된 현대적인 수학적 위험 관리 기법은 투자 위험을 줄이는 데만 사용된 게 아니라 아주 공격적인 투기 전략을 구사하는데도 활용. 이러한 투기 전략은 오히려 위험을 극도로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음. 현대 재무금융 이론은 효율적 시장 가설을 바탕으로 작고 임의적인 가격 운동은 그 중심을 향해 운동하여 실제 가치를 합리적으로 반영한다고 본다. 즉 이들은 자연 세계에 기초한 모델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런 주류 경제학은 균형이 완전히 무너지는 경우를 설명한 이론적 능력이 없다. 실제로 1987년 미국 주식시장이 폭락했을 때, 금융기법 전문가 두 명은 그 폭락은 ‘통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증언. 이 것이 주류 학자들이 할 수 있는 설명의 전부.

파생금융상품은 질적으로 서로 다른 현실의 모든 위험을 단일한 측정 단위를 사용하여 가격을 표시하고자 한다. 기후변화가 플로리다 오렌지 수확에 미치는 영향, 볼리비아 모랄레스 정부가 탄화수소 산업을 국유화할 가능성, 미국의 주택경기 추락 가능성은 모두 질적으로 다르지만 금융권은 이를 모두 동일한 숫자로 압축한다. 또한 모든 시점들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보는데, 즉 내일은 어제나 오늘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위험 가치 측정은 길어야 몇 주를 넘기지 못한다. 이들의 ‘장기적 시각’에 의한 평가조차 1~2년 전부터의 데이터를 사용할 뿐.

그러나 주류 경제학 이론의 붕괴는 실상 그 이상의 것이 붕괴했음을 의미.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 동안 평생 저축한 것, 일자리, 희망, 꿈 등이 모두 같이 붕괴했기 때문. 금융 도표 및 그래프의 등락 속에는 사람들이 실제로 느끼는 고통이 잠복해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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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현, [벌거벗은 생명 - 신자유주의 시대의 생명정치와 페미니즘] 3,4장 요약

3. 생명정치, 벌거벗은 생명, 페미니스트 윤리

 

1. 문제제기

국가 권력의 성격을 분석한 아감벤에 따르면, 국가의 주권은 폭력과 법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는 지점, 즉 폭력이 법 안으로 들어가고 법이 폭력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다. 국가 권력의 본질이 법과 규칙의 실천보다는 법과 규칙이 적용될 수 없는 예외 조항을 만들고 그 예외 조항에서부터 다시 법칙을 만들어 내는 것일 때, 우리 모두는 잠재적으로 법이 적용되지 않는 예외에 속하는, 이른바 주권에서 배제된 벌거벗은 생명일 수 있다.

지구화 과정에서 폭력의 새로운 징후는 바로 사회적 생명(비오스)과 벌거벗은 생명(조에)이 분리됨으로써 일어난다. 페미니스트 윤리는 개인 안에 그리고 사회 집단들 간에 분리된 사회적 생명과 벌거벗은 생명을 통합하려는 데 있다. 내 안에 존재하는 벌거벗은 생명의 잔여적 생명을 직시하고 사회적 생명과 벌거벗은 생명이 통합된 나를 인정하는 것, 타인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사회 집단 간의 관계에서 사회적 생명과 벌거벗은 생명의 구분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사회적 생명과 벌거벗은 생명의 통합을 위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생명정치시대에 페미니스트 윤리의 지향점이다.

 

2. 생명정치와 벌거벗은 생명

아감벤은 푸코의 생명정치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켜 국가권력이 예외의 공간을 갈수록 확장함으로써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될까 봐 두려워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누구라도 언제라도 예외적인 공간에 놓일 수 있고,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불안을 갖는다는 것이다.

아감벤은 오늘날 국가 권력과 대칭되는 위치에 있으면서 절대적인 기본권으로 간주되는 생명의 신성함이란 것이 사실상 생명이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버림받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생명정치는 규범적 시민과 벌거벗은 생명으로 생명을 구획한 후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포함적 배제에 근거해 권력을 행사한다. 벌거벗은 생명의 존재는 규범적 시민이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국가 폭력의 대상으로 국가 안에 포섭된다. 촛불 시위는 국가 주권의 생명정치에 대항하여 규범적 시민(비오스)과 벌거벗은 생명(조에)의 통합을 실현하는 운동이었다.

정부가 촛불 시위 기간에 통치권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은 대부분의 규범적 시민들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범주화하는 정책을 보였기 때문. 미국산 쇠고기를 안 사 먹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시민들은 규범적 시민의 범주에서도 소수 집단에 불과함.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스스로가 벌거벗은 생명의 범주에 들어갈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알게 됨.

 

3. 벌거벗은 생명과 여성

지구화 과정에서 젠더 배열은 국민 국가 내의 생명정치와 상호 교차해 벌거벗은 생명의 여성화를 가져온다. 국가의 예외적 공간의 설정이 젠더와 인종 배열에 따라 진행될 뿐 아니라, 지역 내 위계적인 사회 체계들과의 상호 교차를 통한 확산 역시 젠더 배열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이다.

 

1) 포함적 배제 공간의 확산

2004년 밀양 고교생 집단 강간 사건의 상홍은 한국 사회의 위계 체계들이 어떻게 상호 교차하면서 배제적 포함의 영역을 설정하고 그 영역에 속한 개인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하는지를 잘 보여 줌. 이 때 적용 범주의 기준은 지역, 계급, 가족, 젠더, 섹슈얼리티 체계 등이다.

①지역체계: 밀양지역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집단 강간당한 여중생의 섹슈얼리티가 비정상적인 것임을 부각해야하고, 그런 비정상적인 섹슈얼리티를 지닌 여학생이 밀양 출신아 아니라는 것을 강조. 한편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밀양 촌동네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서울과 지역의 구분을 강조. ②섹슈얼리티 체계: 정상적인 성의 범주를 ‘순결’한 이성애로 규정하고 피해 여학생의 성을 비정상적 성으로 배제할 때, 이 섹슈얼리티 체계는 밀양을 도덕과 예의 고장으로 타 지역과 차별화하려는 구도를 지원하는 형태로 작용. ③계급 체계: 경찰은 수사과정에서 41명의 남학생을 세워 놓고 이름을 말하면 손가락으로 누군지를 가리키라고 하고, 한 명 한 명을 마주하면서 “넣었냐, 안 넣었냐”를 묻기도 함. 언론과 경찰이 피해자에게 이렇게 폭력적이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은 저소득 계층의 인권과 사생활은 보호의 대상이기보다 개입의 대상으로 간주되기 때문. 기타 등등....

 

2) 이미지 유통의 정치화 무관심의 확산

이미지 홍수의 시대에 우리는 이미 온갖 혐오물에 익숙해져, 현실 속의 고통의 이미지에 대해 점차 무감감해지고 있다. 타인의 고통의 이미지를 단지 구경할지 말지를 선택하는, 뉴스 소비자의 마음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타인의 극한적 고통의 이미지들을 읽을 때의 주된 반응(수전 손택) : ①평화주의자의 태도(‘우리’는 충돌과 직접 관계가 없는, 원거리에 있는 제3자의 위치에 있고, 특정 국가/집단의 역사와 정치를 제거한 추상적 시선으로 평화를 촉구) ②옳고 그름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갖고 있는 ‘우리’(고통의 이미지는 ‘정체성’을 뜻함. ‘우리’는 고통의 이미지를 읽으면서 오히려 전의를 불태우고 복수와 정의를 실현할 것은 주장) ③무서운 이미지에 ‘넋이 나간 상태’(전쟁/충돌에 대해 순진함과 피상성, 무지를 드러냄)

손택은 이러한 반응이 사실상 전쟁과테러와 충돌을 지속시키는 기제라고 지적. 우리는 주어진 고통의 이미지에서 누구의 이미지가 보이지 않는지, 누구의 잔인함이 보이지 않는지, 누구의 죽음이 보이지 않는지 질문하는 것이 중요함.

벌거벗은 생명의 고통의 이미지들을 보고 동정심을 느끼는 한 우리는 적어도 고통을 야기한 동조자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그 고통에 대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을 말해 주기도 한다.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지겨워지고, 빈정대고, 무감각해지기 시작한다. 손택은 벌거벗은 생명의 이미지에 대해 그 고통과 상상적 유사성을 느끼면서 타자와 연결되려는 것은 현실의 권력관계를 단지 신비화할 뿐이라고 말한다. 벌거벗은 생명의 이미지가 진정으로 우리를 자극하는 경우는 그들의 고통과 우리의 특권이 같은 국면에 놓여 있을 뿐 아니라 연결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다.

한편 이라크의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서의 포로 고문 사진은 벌거벗은 생명의 고통의 모습을 무제한으로 드러낸다.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의 고문의 내용은 여성의 몸을 가리는 것을 규범으로 하고 있는 이슬람 여성에게는 나체로 있게 하는 고문을, 이슬람 남성에게는 여성의 팬티를 머리에 씌우고 동성 간의 성교를 강요하는 고문을 한 것이다. 이들은 이미 개인의 정체성이 지워진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고문은 포르노적 성격을 띠고 있다.

버틀러는 이를 지구화 과정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새로운 방식에 성 정치가 복무하게 된 것으로 분석한다. 그동안 성 정치는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강압적 이성애성을 비판함으로써 진보 정치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여기서 ‘진보’란 근대성의 역사, 즉 진보와 합리, 이성의 역사성에 위치한 것으로 상징되었다. 그러나 버틀러는 최근의 지구화 과정에서 성정치의 진보성이 근대적 시간대를 상징하는 위치에 놓이면서 근대적 시간대 밖에 놓여 있는 대부분의 공간을 미성숙한 전근대의 시간대에 놓는 데 전유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말하지면 여성의 사회 진출과 동성애의 인정을 진보와 근대를 상징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그 상징을 무기로 하여 타 시간대를 타자화 한다는 것이다.

 

4. 벌거벗은 생명과 페미니스트 윤리

근대 국가는 생명정치의 구도에서 생명에 형식을 부여해 사회적 생명과 벌거벗은 생명으로 구분한 후 전자를 시민의 자격으로 국가의 기획에 포함하고 후자를 벌거벗은 생명으로 배제적 포함의 영역에 포획한다. 이 때 우리에게는 완전한 시민으로 국가의 보호 아래 놓이거나,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되거나, 생명정치의 구도 자체에서 탈주하는 세 가지 길이 주어진다.

이 세가지 길을 넘어서는 대안적 전망. 첫째로는 애국주의와 대척점에 있는 세계 시민주의를 추구하는 것(너스범). 둘째로는 문화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시작과 끝을 폭력적으로 설정하는 목적론 바깥에 있는 시간대를 사유할 수 있어야 함(버틀러). 즉 글로벌 주체로 ‘소수자’범주를 제안하면서 시민과 비시민을 가로지르고자 함. 셋째로는 권리 개념을 수정하여 신자유주의 지구화에 맞서는 기획을 하고(사적 소유권을 부수적인 권리로, 언론과 표현의 자유 및 공유물과 식량 안보에 대한 권리를 우선적인 것으로), 소수자들의 연대만이 아니라 기존 체제 내의 비판적 분석도 이와 결합하는 것(하비).

이 세가지 전략은 입장의 충돌을 보여주기보다는 대응 전략의 순서의 문제. 생명정치의 억압성에 대한 미시적 분석(버틀러) -> 체제 내에서의 보편적 인권개념에 기반을 두고 국민국가의 억압성 견제(너스범) -> 체제 내외의 모든 저항 운동간의 연대를 통한 체제 자체의 재구성(하비).

페미니스트 정치학에 걸맞는 페미니스트 윤리는 어떤 특징을 갖는가? ①푸코의 윤리적 주체성: 화자와 청자 사이에 위계적 관계를 형성하지 않고 오히려 청자가 화자를 선정하며, 청자는 화자의 주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청자와 화자가 어떤 규범이나 정상화의 권위를 통해서가아니라 서로 함께 진실함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권위를 만들어 가는 것. ②버틀러의 윤리적 주체성: 언어화 되지 않은 타자의 ‘얼굴’을 통해 타자가 놓인 극도의 위태로움을 알아차리는 것.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은 이러한 ‘얼굴’을 비인간적인 것으로 만들거나 아예 삭제함으로써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 규범적 권력을 바꾸어 내는 일.

버틀러는 우리가 폭력을 경험했을 때 즉각적인 보복의 자세를 취하는 대신 우선 그 폭력에 애도를 표함으로써 인간성을 찾아내는 노력을 기울일 것을 제안한다. 즉각적인 보복은 폭력에 따른 상실을 비현실화함으로써 오히려 이간의 고통과 죽음에 무감각하게 하며, 그를 통해 비인간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5. 맺음말

생명정치가 젠더와 인종 배열에 따라 재편되고 있는 지구화 회로와 만날 때 벌거벗은 생명의 여성화가 일어난다. 국가의 예외 공간의 설정이 젠더와 인종 배열에 따라 진행될 뿐 아니라, 위계적인 사회 체계들과의 상호 교차를 통한 확산 역시 젠더 배열에 의해 진행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과제는 일상의 삶에서 규범으로 규정되지 않은 벌거벗은 생명의 경험 세계를 드러내고 드러나지 않은 ‘얼굴’을 보고 들을 수 있게 하는 것, 그리고 시민권과 인권의 긴장 관계를 통해 ‘시민’의 자기 성찰을 고양시킴으로써 시민과 벌거벗은 생명의 경계를 조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되는 것, 마지막으로 체제의 안과 밖을 가로지르는 연대의 구성을 모색하는 것임.

 

 

 

4. 지구화와 공공성의 변화

 

 

1. 문제제기

우리는 지구화 과정에서 폭력성의 새로운 징후를 목격한다. 9.11사태 이후 아부그라이브 포로수용소 고문 사건, 김선일 씨의 죽음,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 사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새로운 정치적공간의 확산과 거기서 파생되는 폭력은 우리에게 지구화 과정에서 근대 국가와 폭력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여성은 이폭력성과 어떻게 직면하는지에 대해 새로운 의문을 갖게 함.

공공성 변화의 주요한 두 측면: ①국민 국가 단위의 근대적 공/사 구분이 약화되고 젠더, 계급, 인종, 국가가 상호 교차하는 상황에서 계급 정체성을 형성하기는 더욱 어려워진 반면, 여성 경제인구 증가와 함께 부상한 여성 비정규직화의 문제 ②정치적으로 국가 권력은 국가의 주권이 적용되지 않는 배제의 공간을 확장함으로써 배제의 공간을 지배하는 생명정치가 확산.

여성운동은 국지적 장에서 공/사 구분을 넘어선 여성들의 삶의 방식을 반영하는 공공성의 새로운 기준을 주장하는 한편으로, 공공성의 영역을 잠식하는 배제의 공간이 확산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성해야 함.

 

2. 공공성 변화 논의의 배경과 의미

페미니즘은 공/사 구분의 논리가 젠더 체계를 고착화한다고 비판함. 이에 대한 대안으로 페미니스트들은 사적 영역과 여성이 짝을 이루는 것을 해체하고자 함(여성의 정치적 시민권 강화 운동). 그러나 이것은 공/사 영역 구분 자체를 문제 삼지 않고, 더 많은 여성이 공적 영역에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음. 대다수 여성들의 공적 영역 진출은 충분한 사회권과 시민권 획득으로 연결되지 않으며, 이들의 공적 영역 진출은 여성 대다수의 삶에서 사적 영역과 단절된 형태의 공적 영역 체험이 아니다.

두 번째 페미니스트적 대안은 여성들의 체험을 반영해 공/사 영역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들이 그간 사적 영역에서 수행한 돌봄노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이 대안은 주류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최근 지구화와 함께 ‘생존의 여성화’가 가속화되면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지구화는 금융, 생산, 무역, 통신이 통합된 세계를 구축하는 ‘기술 근육 자본주의’와 대부분 여성 이주 노동자가 제공하는 돌봄 노동의 ‘노동 친밀성 체제’라는 두 과정으로 구분한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기술 근육 자본주의화에 대해서는 국가의 역할을 축소할지 모르나, 노동 친밀성 체제화 과정에서는 국가의 역할을 강화한다. 노동 친밀성 체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통해 생물학적 생명을 감시, 관리하는 역할이 국가의 목적으로 부상하는 것이다.

아감벤은 현대에 들어올수록 예외 상황은 점점 더 전면으로 부상해 예외 상황이 근본적인 정치 구조가 되고 궁극적으로 예외 상황이 법칙이 되기 시작했다고 주장. 이렇게 예외상황의 특수성이 상실된 조건에서 법칙은 특수성을 상실하지만, 국가는 이 ‘의미 없는 법률’을 여전히 강요하는데, 이에 대응하는 개념이 바로 ‘벌거벗은 생명’이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개념상 ‘자연 그대로’의 정체성 혹은 ‘동물적’ 정체성으로 격하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초월적 의미는 사상되고 인간이 가진 것이라곤 오직 생명뿐인 존재로 환원되는 것을 말한다.

 

3. 공공성 변화의 두 방향

지구화는 전 지구적으로 ‘핵심 지역’을 연결하면서 이들 지역 간의 공통점이 각 국가 내부의 지역 간 공통점보다 더 많아지는 현상을 초래한다. 이 핵심 지역 연결망에 포함되지 않은 ‘죽은 땅’은 제3세계뿐 아니라 서구 세계에도 등장하며, 따라서 영토에 근거한 국가 단위 주도의 냉전 정치는 무력화될 것으로 전망한다.

 

1) 기술 근육 자본주의와 노동 친밀성 체제

제3세계 여성의 시선으로 봤을 때 지구화에는 세계적 거점 도시들 안에서 백인 남성 중심으로 전개되는 기술 근육 자본주의과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짝을 이루는 것으로 지구적 차원에서 돌봄 노동을 담당하는 노동 친밀성 체제의 과정이 상존한다. 노동 친밀성 체제는 아시아 여성들을 ‘서비스를 체현한’ 사람들로 인식하게 하고 있지만, 글로벌 계급과는 달리 이들 여성들의 주체성은 표현할 언어, 수사, 담론 목소리까지 없어지면서 침묵된다.

필리핀의 경우 1992년도에 전체 외화 획득의 25%를 주로 여성으로 구성된 이주노동자들로부터 거두어들이고 있다. 이들은 필리핀의 필수적인 수출상품이다. 한편 이주 여성을 받아들이는 국가 역시 노동 친밀성 체제의 유지, 강화에 공모하는데, 홍콩 정부는 외국인 가정부가 최소 2년간 한 고용주에게 고용되어야 하며 상시 재택근무할 것을 의무화한다.

이주여성의 행위성의 차별화 : 조선족 기혼 여성들은 유입국인 한국 사회와 고향인 조선족 사회 양쪽에서 느끼는 차별과 편견에 저항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 자신들을 전근대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한국 사회의 시선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으로 돌아가면 자신들이 소속될 부유 계층으로 스스로를 규정함으로써 행위성을 확보. 또한 모성과 아내로서의 섹슈얼리티를 지키기 위해 자녀의 모든 교육비와 장래에 대한 투자를 전담. 홍콩에서 상주 가정부직에종사하는 필리핀 여성들도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인식을 불식시키기 위해 성당에 다니며 도덕적 정체성을 확보하고, 여성 간의 동성애를 발전시킴으로써 오랜 외국 체류에 따른 외로움을 해소하면서 동시에 홍콩 사회와 필리핀 사회 양쪽이 갖고 있는 자신들에 대한 성적 의심을 벗어나려고 함. 차이점이라면 필리핀 여성이 조국에서 애국자로 의미화하는데 비해 조선족 여성은 중국 내에서도 소수민족인 조선족의 해체로 여겨지는 차이점이 있음.

(기타 다양한 이주 여성의 사례 소개)

이러한 지구적 재편에 따라 이주 여성들은 노동자 정체성이 구성되기보다는 자신과 가족, 이웃의 생존을 위해 기존의 생산과 재생산 노동의 경계를 넘나들 뿐 아니라 노동/성/가족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형태의 여성 주체의 탄생을 보여준다. 여기서 여성운동의 과제는 지구적 차원의 젠더 배열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한편으로, 지구적 젠더 배열과 지역에서 여성들의 삶의 조건을 연결할 수 있는 문화 번역의 책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

 

2) 국가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2007년 2월 여수 화재 참사 사건에서 나타난 이주노동자들의 실태는 이들이 전적으로 벌거벗은 생명, 오로지 생물학적 생명만을 유지한 비시민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줌.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포로수용소에서 발생한 고문 사건은 한편으로 성 정치를 내포하고 있었음. 미국 여군이 나체의 아랍 남성 포로의 목을 묶은 가죽끈을 잡고 웃고 잇는 이미지는 이 사건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음. 이 사건의 형상화에 여성 인물을 배치함으로써 이 사건의 주범이 ‘여성’이기 때문에 문제라는 식으로 몰아갔으며, 이로 인해 미국 정부의 행동을 사사로운 것으로 만드는 효과를 낳았음.

국가의 본질이 이와 같은 법이 적용되지 않는 예외 집단을 상정하는 것이라고 할 때 국가에게 이들을 보호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현실적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됨. 이에 따라 국제적 수준에서 수용소 내 체류민의 보호는 시민이 아닌 인간의 보호라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러나 이렇게 인식이 전환되려면 국민 국가와 전 지구적 공동체 사이의 갈등과 충돌을 직시하고 공존 방식을 구체화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구긴 국가의 폭력성에 대한 여성운동의 접근은 지역적 차원과 지구적 차원을 연결할 수 있는 ‘인권’개념의 번역 가능성에 있으며 이 번역 과제에 젠더 배열을 반영시키는 데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4. 지구/지역 번역으로서의 여성운동

생명정치의 폭력성을 인식하는 여성운동의 틀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구화 과정에서 서구 중심의 단일한 규범 체계로 재편되기를 거부하고 문화적, 지역적 다양성이 공존할 수 있는 규범과 윤리의 설정을 모색해야 함. 여기서 지역의 여성운동을 지구적 질서와 소통시키는데 층위가 다른 두 차원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의 문제, 즉 번역의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른다.

문화 번역은 “타자의 언어, 행동 양식, 가치관 등에 내재화된 문화적 의미를 파악하여, ‘맥락’에 맞게 의미를 만들어 내는 행위‘를 말함. 이 과정에서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언어들 간의 권력 차이를 좁힐 수도 넓힐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권력행위가 됨.

인권은 종교와 민족성에 근거한 지역의 의미망 안으로 번역되어야 하며 합법적이고 호소력있게 설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운동가들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인권 용어들을 차용함으로써 후원자들을 만족시켜야 하는 딜레마가 존재. 그럼에도 여성운동이 지구/지역 번역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는 인권이 그 기원과 암시라는 면에서 유럽 중심적인 개념이지만, 동시에 인권은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기 때문.

 

5. 맺음말

여성운동은 이 같은 정치 경제적 상황에서 지역적 경험과 지구적 질서를 연결하는 지역/지구 문화 번역의 과제를 향해 나아가야 함. 지구적 차원의 젠더 배열의 중요성을 인식해 지구적 젠더 배열과 지역 여성들의 삶의 조건을 연결하고, 국가의 주권 개념과 무관한 보호의 개념을 제안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지역적 경험과 지구적 질서의 상호 소통이 필수적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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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정의인가] 중 일부 발췌 요약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국내 학자, 평론가들이 각자의 입장을 담아 비평한 책.

그 중 서동진과 노정태의 글을 요약해서 옮겨 봄.

 

 

 

 

 

이 윤리적인 사회를 보라

신자유주의적 윤리로서의 정의

 

서동진

 

1) 신자유주의의 윤리적 글로벌 스탠더드, 정의

줄리언 어산지의 위키리크스에 대해 평가하며 미국의 보수적 경제잡지 『포브스』는 이른바 “비자발적 투명성”의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 이는 매우 신자유주의적 윤리에 입각한 표현인데, 투명성이란 신자유주의 사회의 부정적 효과를 제어하고 반성하며, 나아가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많은 윤리적 덕목에 속함.

이데올로기는 자신이 관련을 맺는 대상을 비호하거나 예찬하지 않음. 오히려 이데올로기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힘 가운데 하나로서 비판을 동반함. 무엇보다 자유주의는 비판을 애호함. 자유주의는 합리적인 논증을 하는 자신들과 달리, 이를 부정하는 보수주의와 사회주의는 가장 이데올로기적인 이데올로기라며 규탄함. 그러나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아닌 척 하는 몸짓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이데올로기적 자취.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점은 자유주의가 자본주의를 비판되어야 하는 체제로 반성하면서도 동시에 절대로 근본적으로는 부정하지 못하게끔 하는 비판의 윤리를 어떻게 생산하고 동원해 왔는지를 분별하는 것.

 

2) 정의의 심판을 내리자구요? 네, 그럼 당장 감사를 합시다! 정의 사회, 감사 사회

자유주의자들은 “사회개선의 과정이란 현존하는 문제에 대해 전문가가 합리적으로 평가하고, 그 평가에 따라서 현명한 사회개혁을 도입하기 위해 정치 지도자가 계속 의시적인 노력을 쏟는 꾸준한 과정이나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보는 이들.

정의의 윤리는 변화된 자본주의 사회를 관리하기 위한 새로운 지도적인 프로그램, 즉 신자유주의를 보완하는 비판정신의 기획.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통해 만들어진 변화된 자본주의 역시 자신을 위한 비판의 공간을 열어 놓음. 이에 가장 대표적인 윤리적 규범은 ‘감사’(audit).

감사사회란 책무성이라는 윤리적 규범을 통해 개인이나 기업, 공공부문 혹은 사회운동단체에 이르는 다양한 행위자들의 행동방식 혹은 행태를 관찰, 측정, 평가하고 그 결과에 기반하여 그들을 규제하고 관리하는 것.

신자유주의가 ‘탈규제’를 부르짖는 것은 오히려 규제로부터의 해방을 향한 것이 아니라 사회를 규제하기 위한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내는 것. 즉 ‘감사’라는 신자유주의적인 윤리적 규제는, 착취나 불평등 같은 윤리적 규범과는 다른 방식에서 윤리적으로 따져봐야 할 현실을 만들어 냄.

‘책무성’이라는 표현은 노르만왕조의 최초의 토지대장이라 할 수 있는 둠즈데이북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이는 영토 내에 살고 있는 토지 소유자들에 대한 인구조사를 통해 마들어진 것으로, 토지 소유자들을 하나의 총계 즉 계정으로 파악해 재산을 등록시킴으로써 세금을 거두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음. 계정으로 파악된 신민은 집중화된 감사와 반년간의 장부 기재를 통해 왕정에 대한 윤리적인 의무를 다하도록 강제 됨. 즉 회계 활동을 통해 특정한 도덕 공동체가 성립되는 것.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자본 축적의 위기를 경유하며 이런 회계적 실천의 비중이 증대됨. 관치금융을 통해 자본을 조달하던 국내 대자본이 점차 자본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본시장을 지배하는 금융자본이나 주주의 이해관계를 보장해 주는 조치를 받아들임. 기존의 관치금융 등은 ‘정실자본주의’로 비난받음.

공공부문 또한 발생주의적 복식부기 회계를 통한 기장을 도입하고 이른바 ‘기업가적 예산’이라는 새로운 예산제도를 도입. ‘총액예산제도’가은 것은 예산을 사업 집행에 필요한 비용이 아니라 적극적인 관리를 통해 재무성과를 이뤄내야 하는 것으로 다룸. 공무원을 경영자와 동일시하고 공무원들의 비재무적인 자산, 즉 지식과 창의성을 활용하기 위해 정부조직을 학습조직으로 전환하는 것 등이 본격화 됨.

비정부기구(NGO) 또한 책무성의 윤리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 시민사회단체들이 지켜야 할 시민사회단체로서의 규범적인 정체성을 ‘시민사회지표’로 구체화하고, 이를 크게 정당성, 책무성, 투명성으로 구분. 한국의 대표적인 시민사회운동이 ‘정보공개’나 ‘소액주주운동’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특이한 현상은 아님.

 

3) 정의의 윤리인가, 해방의 윤리인가

자크 동즐로에 따르면 주권이 막다른 길에 이르렀을 때 발명한 것이 바로 ‘사회’(the social)임. 이는 출생, 나이, 성별, 직업, 지역사회 같은 다양한 틀을 통해 자신의 삶을 규제하는 법칙을 발견하고 반성하는 개인이 상상하는 사회로서 루소적인 의미의 정치공동체와는 다름. 이에 기반해 사회국가 혹은 복지국가는 공리주의적 개인주의란 이름으로 기존의 자유주의를 비판하며 새로운 윤리적인 모델을 만들어냄. 그것이 바로 ‘연대’로서, 정의의 윤리는 집합적인 책임을 나눠 가짐으로써 이를 통해 탐욕스러운 이기적 개인들이 초래할 수 있는 불의로부터 자본주의를 방어하고자 함.

어떻게 정의의 윤리를 넘어설 수 있을까? 그것은 정의의 윤리가 기반하고 있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길 뿐. 그러나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일은 윤리 자체와 대면하는 것을 통해서는 성취될 수 없음. 윤리는 바로 그 자본주의 자체를 변혁하기 위한 투쟁의 부산물일 뿐.

 

 

 

 

 

 

 

정의의 딜레마, 딜레마의 정의

 

 

노정태

 

1) 누구를 죽이는 것이 더 공정한가?

우리는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을 즐기지 않지만, 윤리적인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좋아한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수십만 부 이상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된 것에는 다른 점 보다도 사람들이 ‘윤리적 딜레마’ 자체를 즐긴다는 것에 그 이유가 있다.

샌델이 책에서 제시한 첫 번째 윤리적 딜레마(전차 딜레마)에서 공리주의자라면 당연히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편을 택한다. 칸트적 자유주의자라면 선로를 바꾸거나 뚱뚱한 사람을 밀어버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여기서 샌델은 갑자기 이 추상적인 비유를 현실(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은신처를 찾아다니는 미군 사례) 속으로 과감하게 옮겨 놓음. 이 예에서 민간인을 풀어준 것이 미군에게 피해를 주어, 이에 대해 후회한다.

샌델이 말하는 내용, 공동체주의 자체가 아니라, 그가 그 말을 하기 위해 꺼내드는 사례가 이 책을 진정 문제적인 것으로 만든다. 철로에서 누구를 희생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 혹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민간인을 죽여야 하는 가에 관한 문제를 윤리적 토론을 위한 화두로 꺼내드는 것 자체가 하나의 윤리적 판단이다. 칸트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우리는 이미 그 순간 ‘누구를 죽이는 것이 더 공정한가’를 놓고 고민하며, 그 과정을 즐기고 있음.

 

2) 권력의 눈높이에 맞춰진 정의의 딜레마

샌델의 딜레마를 대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딜레마에 직접적으로 대답하기 보다는 딜레마가 전제하고 있는 상황의 맥락을 가늠해 보는 것. 이를테면 플라톤의 『국가』에서 플라톤의 대변자로 등장하는 소크라테스가 제시하고 있는 ‘정신이 오락가락하여 난폭한 행위를 일삼는 친구에게 그가 내게 맡겨놓은 무기를 돌려 줄 것인가’라는 문제를 대할 때에는 고대 그리스 사회가 현대 사회와는 다르게 전쟁이 나면 자신이 소유한 무기를 들고 폴리스를 위해 전쟁에 나서는 ‘시민’들로 구성된 사회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이들은 다름아닌 ‘시민’의 눈높이에서 딜레마를 사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샌델의 눈높이는 결코 시민에게 맞춰져 있지 않다. 그는 미군의 시각으로, 자신과 비교했을 대 철저히 약자일 수밖에 없는 민간인들의 생사여탈권을 거머쥔 채 그들을 죽일지 살릴지를 고민한다. 더욱 섬뜩한 것은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는 독자들이 그 딜레마를 고민하며 즐기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민간인을 향해 히죽거리며 발포하는 민군 혹은 역사상 존재한 모든 점령군들의 공범이 된다.

 

3) 우리 공동체와 다른 공동체 사이의 정의

점령군의 딜레마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떤 선택이 더 ‘전략적으로’ 타당한가에 있을 뿐이다. 윤리적 책임과 도의적 갈등은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판단의 요인으로 전락.

당신이 이라크에서 태어난 한 청년이라고 가정해 보자. 나 한사람의 목숨과 더불어 미국인 수십 명을 죽임으로써 ‘우리 편’에게 더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올바른 것일까? 샌델이 제시하는 논리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를 포함하여 몇 사람쯤 희생시키겠다는 자살테러범을 설득할 수가 없다.

칸트는 『영구평화론』에서 국경과 문화를 넘어서 통용될 수 있는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인 철학자의 말에 정치가들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함. 『정의란 무엇인가』에는 이런 초월적 관점을 통한 보편성 추구가 결여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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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중에서

2년간의 암울했던 공익근무요원 시절에, 내 삶의 유일한 빛이 되주었던 김상봉 선생의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다시 읽으니 그 맛이 아주 쏠쏠하구나~~~

 

"만약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단순히 그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인식하는 주체 앞에서 다른 사람의 운명이 내 앞의 술잔의 운명과 다를 수가 없습니다. 그 때 타인을 이해하다는 것은 타인을 해부한다는 것과 다른 일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내가 개념적 사유를 통해 타인을 모두 규정할 수 있다면, 나는 누더기가 된 타인의 시신 앞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것을 두고 이성의 신봉자들은 타자를 이해하는 것이라 부르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그것은 내가 나 속에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 타인이 내 속에 들어와 머물고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 그리하여 때로는 내가 곧 네가 되어버리는 것, 그런 것이 아니던가요? 그러나 타인은 언제 내 속에 들어와 머무를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오직 타인의 슬픔이 내 속에 쉴 때뿐입니다. 오직 내가 타인의 슬픔이 내 속에서 머무를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한에서 타인은 내 속에 들어와 고요히 쉴 수 있습니다. 내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 속에서 타인의 슬픔이 고요히 움직이는 것을 느낄 때인 것입니다." (260쪽)

 


"오랫동안 나는 세상에 왜 이토록 받아들일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 널려 있는지 묻고 또 물어왔습니다. 지금 나는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왔던 그 오랜 물음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려 합니다. -- 오직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그 많은 슬픔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사랑은 만남에 존립합니다. 그리하여 신은 만남과 사랑을 완성하라고 인간에게 이 ㅁ낳은 슬픔을 넘치도록 허락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단지 고통을 핑계로 우리가 삶을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에피쿠로스의 신들이 아무리 완전하 행복을 누리고 산다 하더라도 내가 그들의 삶을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는 것은, 만남 없는 삶의 행복이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내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인간의 삶에 널려 있는 슬픔과 고통 앞에 몸서리치면서도 인간의 가난한 삶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 것은 오직 고통과 슬픔 속에서만 우리는 서로에게 손내밀고 서로에게 말건네며 서로서로 온전히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그대, 우리에게 삶은 얼마나 신비한 선물인지요? 푹풍우치는 이 깊은 고통의 바다 위에서도 삶은 깃털처럼 가볍고, 마음은 파랑새처럼 명랑할 수 있으니...." (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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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에 대한 생각

요즘 목수정의 『야성의 사랑학』을 읽으면서 낙태 문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페미니즘의 ‘은혜’를 입은 내 운동의 관점에서 봤을 때 낙태를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공익근무를 할 당시 읽었던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의 『에코 페미니즘』(특히 13장 “개체에서 조합으로: ‘생식대안’의 슈퍼마켓”)을 읽으면서 낙태를 둘러싼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시바와 미스는 생태주의적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낙태찬성’을 넘어서 다양한 ‘기술적 대안’(예를 들면 대리모와 같은)을 이용해 성적 접촉 없이 자녀를 만들 가능성을 옹호하는 이른바 ‘생식선택권’ 그룹의 관점을 비판한다. ‘생식선택권’ 그룹들은 여성이 자기 신체의 ‘소유주’라고 보면서, 자기 신체를 ‘사고 파는’ 것이 가능해져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에 대해 시바와 미스는 ‘사고 파는 자유’란 그들 신체의 분해에 의존하는데, 그렇게 분해되고 나면 사고 파는 주체는 도대체 누구냐고 반문한다. 여성의 신체는 여성이 주인이라는 미명하에 여성의 신체를 조각조각 나뉘어진 ‘자본’으로 이해하게 되면 역설적으로 ‘여성 주체’를 제거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시바와 미스는 또한 이러한 접근법이 결과적으로 태아도 하나의 자본으로 보아 소위 ‘결함있는 태아’에 대한 제거를 정당화한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유전자결함을 갖고 태어난 아기의 부모들이 의사와 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한 사례가 있다.)

 

페미니즘의 입장에서는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내세워 낙태를 인정하자는 입장이지만,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전자 감식 등을 통해 태아를 제거하는 논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야성의 사랑학 162쪽

 

 

 

생명 어쩌구 하면서 낙태 반대를 외치는 사람이 최소한 자기 주장의 논리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그가 최소한 '채식주의자'여야 한다고 생각함.

 

 

 

_________________________

 

 

 

페이스북에는 이렇게 썼음.

 

 

 

요즘 목수정의 [야성의 사랑학]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낙태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하루 종일 좀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갔지만, 어쨌든 결론은... 낙태를 반대한다는 사람들(특히 진보의 이름으로)이 자기들 논리의 정당성을 최소한이라도 확보하려면 그들 스스로가 최소한 '채식주의자'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 그들 말대로 '프로라이프', 즉 생명이 우선이기에 낙태를 인정할 수 없다면 지구 생명의 근본적인 토대를 부수는 육식주의에 반대해야 할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서 낙태에 반대한다는 것은 '생명우선'을 빌미로 (원하지 않는) 임신에 따른 사회적 부담과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려는 매우 야비한 가부장제의 술책이라 생각한다.

 

 

"이명박 정부가 시도하는 저출산 극복 정책은 일찍이 1960~70년대를 풍미한 루마니아의 전설적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시도했던 그것과도 맥락상 크게 다르지 않다.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의 부국강병을 위해 인구를 늘려야겠다는 결론을 얻고, 모든 여자들에게 아이 5명을 낳을 것과 피임과 낙태를 금지할 것을 명했다. 그 결과 전국의 고아원들은 곧 아이들로 넘쳐나게 되었다. 보모 한 명당 80명의 아이들을 돌봐야 했고, 밤에는 120명의 아이들을 한 보모가 돌봐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돌본다는 행위가 사실상 불가능하고, 아이를 '사육하다'는 표현이 더 적합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이들은 그 어떤 종류의 따뜻한 스킨십도 받지 못하고 목숨만 부지하며 자랐다. 70년대 들어 이 아이들이 대거 서유럽과 북미로 입양되었는데, 입양된 아이들에게서 한결같이 자폐증 혹은 유사 자폐증 증상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야성의 사랑학], 161-2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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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값 등록금...

 

한나라당이 반값 등록금을 한댄다. 시민사회진영은 미심쩍지만 일단 환영을 한댄다. 오, 그러나 이게 솜씨 좋은 낚시꾼의 밑밥이면 어쩌려구!? 신문을 봐라. 보수 언론에서 맨날 때려대는 얘기가 뭐냐? 국민세금으로 부실대학에 돈 퍼준다고 난리다. 사실 따지고 보면 맞는말 아닌가?

며칠전에 지하철 타고 가는데 옆 사람이 보고 있던 중앙일보를 힐끗 봤다. "이대 757억, 홍대 752억" 대학들이 적립금을 이렇게 남겨먹는데, 세금으로 등록금 대주는게 옳은거냐고 핏대를 올린다. 이거 내가 알기로는 적어도 한 3년 전쯤에는 등록금투쟁하는 학생운동단체 자료집에나 나올법한 내용이다. 근데 이런 내용이 보수언론에 실린다.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반값 등록금을 말하기 전에 부실대학 구조조정부터 해야 된다"는 거다. 국가가 학벌경쟁을 부추겨서 우후죽순처럼 생긴 부실대학을 반값등록금 때문에 청소해야 한댄다. 이말은 즉슨, 쉽게말하면 일류대학 중심으로 재정지원 해야 된다는 얘기 아닌가? 이런 공격에 대한 진보진영의 대응은 얼마나 옹색한가? 프레시안 기사인가를 보니까 한다는 소리가 "대학 구조조정의 필요성에는 동의하지만..."으로 시작한다. 이건 완전 놀아나도 제대로, 아주 댄스를 추고 계신다.

반값 등록금, (아니지... 한나라당 표현대로라면 장학금!!!) 하자면 못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런 정책이 지금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지금도 4년제 산업대나 전문대 등에서는 산업체랑 계약 맺어서 등록금 50%로 퉁치는 곳은 많이 있다. 그런데 이게 완전 노예 계약이라는 거다. 이런 계약학과 다니는 중에 회사에서 짤리거나 사표내면 학교에서도 바로 짤리는 거다. 이런 식으로 하자면 반값 등록금이 아니라 무상 교육도 얼마든지 하고 남는다.

반값 등록금, 이게 민생정책이면 히틀러도 휴머니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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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장애인운동에 연대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장애인운동에 연대하는 이유로 '우리도 언젠가 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드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장애인운동에 '연대'하는 이유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이 될 수 있는 확률이 문제라면, 사고를 예방해서 그럴 확률을 줄이면 되는 것이다(불조심, 차조심, 건강조심 등등). 이것은 건강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당연한 욕구인데, 그러지 못할 가능성에 대한 불안이 장애인운동에 대한 연대로 이어진다는 것은 과도한 결론이다. 또한 자기 자식이 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도 비슷한 심리일텐데, 그 중 뱃속의 태아가 '기형아'일 수 있다는 우려는 많은 경우 '낙태'로 이어져 사실상 장애인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하는 꼴이 된다. 의도와는 다르게 장애인운동의 존재가치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체적 손상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권력의 자의적 기준에 의해 얼마든지 우리의 신체가 장애라는 울타리 안으로 밀려들어가 배제와 억압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얼마 전 경찰인가 검찰인가가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DNA를 채취하겠다고 한 사태를 보자. 이들은 '해고자'라는 낙인을 무슨 유전적 질병으로 취급 하려는 것 아닌가. 그래서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에 장애인 수용시설처럼 '해고자 수용시설'이 만들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 수 없게 만드는 무수한 턱들, 속도들, 노동의 장벽들 때문에 장애인이 수용시설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신체 자체가 아니라 그 신체를 분류하는 권력의 기준이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운동에 연대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언제든지 그 권력에 의해서 (조르조 아감벤이 [호모 사케르]에서 말한 것처럼) 희생제물로 바쳐질 수는 없지만, 누군가가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 '날것의 삶', '벌거벗은 생명'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점, 그래서 그 권력의 기준을 갈갈이 찢어내 버려야만 온전한 '연대적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점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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