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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 (모멘토) 中에서...

 

기독교 신학에서 하느님은 초월적인 제작자가 아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만물을 지탱해 주는 존재이며, 세계에 처음이 없었더라도 이런 역할을 했을 존재다. 창조란 그저 사물이 시작되도록 하는 일이 아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지 않고 뭔가가 존재하는 이유 자체이며, 모든 실체의 가능성의 조건이다. 하지만 하느님 자신은 어떤 종류의 실체도 아니므로,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들에 견주어 설명될 수 없다. 나의 질투심과 내 왼발이 하나의 짝을 이룰 수 없는 것과 같은 논리다. 하느님과 우주를 합한다고 둘이 되지는 않는다. 유대교에서는 하느님을 형상화하는 일을 금지한다. 하느님이 비실체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유일한 형상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조직화된 종교를 무산시키기 위해 하느님이 끊임없이 애썼음을 기록한 문헌이 있다. 바로 성경이다. 창조자 하느님은 연구지원금을 주는 기관을 깊이 감명시키기 위해 지극히 합리적인 설계에 따라 일하는 하늘의 공학자가 아니다. 어떤 의도가 담긴 기능적 목적에서가 아니라 창조하는 일 자체를 좋아하고 즐거워하기 때문에 세상을 만들어낸 예술가이자 탐미주의자다. (19쪽)

 

 

우리가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순전히 존재 자체의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기(또는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급진적 낭만주의자들이--이 맥락에선 칼 마르크스까지 포함하여--제기하는 의문은 그 같은 존재방식을 현실화하려면 어떤 정치적 변혁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22쪽)

 

 

여하튼 예수가 가르치는 도덕은 무모하고 비현실적이며 장래에 대비하지 않는, 상식을 벗어난 것이다. 따라서 보험설계사의 적이며 부동산 중개사의 장애물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원수를 용서하라, 겉옷만이 아니라 속옷까지 벗어 주라 하고,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까지 내주어라, 너를 욕하는 사람을 사랑하라, 네 몫 이상으로 노력하고 내일 일을 미리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는가.(26쪽)

 

 

니체가 빈정대며 지적했듯이, 초월적인 신(神) 즉 하느님을 전능한 인류로 대체한다 해도 어떤 의미에선 달라지는 게 거의 없다. 여전히 세상에는 고정된 형이상학적 중심이 존재하며, 그 중심이 이제는 신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라는 점만이 다르다. 우리는 스스로 부과한 제약 외에는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 주권자이기 때문에, 새로이 찾아낸 신적 권리를 행사하는 가운데 황홀할 정도로 창조적인 희열을 주는 파괴에 탐닉하기도 한다. 니체의 관점에서 볼 때, 절대적인 힘이 신에게서 인간에게 그대로 옮겨지지 않으면 신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죽음을 불러온다. 다시 말해 주인처럼 뻐기면서 우쭐대던 유형의 인본주의까지 종언을 고하리라는 것이다. 아니면 인본주의는 은밀한 신학으로 남고 신은 교외 거주자들의 점잖은 도덕으로 형태만을 바꾸어 새로운 세월을 조용히 보내게 될 것이다. 요즘의 하느님이 바로 그런 모습이다. 인간의 무한성이 결국하느님의 영원성을 지탱해주는 셈이다. 파우스트 식으로 인간은 무한한 듯해 보이는 자신의 힘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성육신(成肉神, Incarnation)의 교리에서는 육신을 지닌 연약하고 유한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난다는 점을 망각한 채 말이다. 이처럼 자신의 무한함에 어리석게 도취한 인간은 너무나 빨리 앞으로 나아가다 도가 지나쳐 중심을 잃고 결국 무(無)로 떨어지는 위험에 끝없이 빠져든다. ‘인류의 타락’ 신화와 다를 바 없다.

이런 병폐를 치유하는 전통적인 방법이 있기는 하다. 이른바 비극(悲劇)예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항암화학요법이 그렇듯이 비극이라는 치료법도 질병 자체만큼이나 파괴적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비극 무대에서 벌어지는 무제한적 투쟁을 지켜보면서 인과응보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늘을 우러르며 떨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된 것들이 감히 창조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이는 예술가에 대한 질책이 아니라 요즘 같으면 자기창출(self-origination)에 대한 부르주아의 위대한 신화 부를 만한 것을 경계하는 전형이다. 보다 근원적인 의존 관계의 맥락 속에서만 우리의 자유가 크고 든든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데서 숱한 역사적 재앙이 시작됐다. 이 같은 태도는 오늘날 서구의 신제국주의를 이끄는 원동력 중 하나이기도 하다.(28-30쪽)

 

 

가장 급진적인 형태의 자기부정은 금연이나 금주 따위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포기하는 일, 전통적으로 '순교'라고 알려진 행위다. 순교자는 자기가 지닌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지만, 가능하다면 그러지 않아도 되기를 바란다. 반면에 자살자는 견디기 힘든 부담이 돼버린 삶을 기꺼이 내던진다. 예수가 만약 죽기를 바랐다면 그는 무수한 자살자 중 하나가 되고, 그의 죽음은 자살폭탄테러범의 흐트러진 종말만큼이나 덧없고 무가치했을 것이다. 자살자와 달리 순교자는 타인들을 위해 죽음을 택하는 사람이다. 그들에겐 죽는 것까지도 사랑의 행위다. 그 죽음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열매를 맺는다. 이는 타인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사람, 예컨대 나치 독일의 가스실 앞에 남을 대신해 줄을 선 사람뿐 아니라 타인에게 생명이나 살아갈 힘을 줄 수 있는 원칙을 지키려고 죽음을 택한 사람에게도 해당되는말이다. '순교자(martyr)'라는 단어는 '증인'을 뜻하는 말에서 나왔다. 그들이 증언하는 것은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원칙이다. 이런 점에서 순교자의 죽음은 생명의 하찮음이 아니라 생명의 가치를 입증한다. 이슬람의 자살폭탄테러범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없다. (42쪽)

 

 

모든 증거가 불리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끝내 이기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패배자를 경멸하는 나라들에서는 말도 안 된다고 여기겠지만, 실패에 대한 충실성이라 부를 만한 믿음의 태도를 견지할 때만 인간의 힘은 창조적이고 지속적이 될 수 있다. 이처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냉정한 현실주의를 유지하면서,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극악하고 충격적이며 지긋지긋한 실재, 그 메두사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할 때에만 어떤 형태로든 부활이 가능해지지 않겠는가. 냉정한 현실주의를 최후의 보루로 받아들이고 다른 모든 것은 감상주의에 사로잡힌 허튼소리거나 이데올로기적 환상, 가짜 유토피아, 거짓된 위안, 혹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이상주의일 뿐임을 알아볼 때, 그제서야 최후의 보루가 결국은 최후의 것이 아니었음이 밝혀질 수 있다.

신약성경은 인간의 환상을 잔혹할 정도로 깨뜨린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죽음을 맞지 않는다면 뭐가 잘못돼서 그런 건지 변명의 해야 할 정도다. 인간 조건의 적나라한 시니피앙은 사랑과 정의를 강력하게 옹호하다가 그 때문에 죽음을 당한 사람이다. 엉망으로 훼손된 시신이 인류 역사의 충격적 진실이다. (43-4쪽)

 

 

지금까지 보았듯이 나 같은 사람과 디치킨스는 신학적 관점뿐 아니라 정치적 관점도 판이하다. 리처드 도킨스와 내가 가장 근본적으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사실 하느님이다 과학, 미신, 진화, 그리고 우주의 기원 등에 대한 생각이 아닌 듯하다. 신학자들은 적어도 직업적으로는, 헨리 제임스처럼 절묘하게 복잡한 작가가 과연 진화라는 조잡하고 실수 많은 과정을 통해 탄생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조금의 관심도 없다. 내가 알기로 과학과 신학 간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을 선물로 보느냐 아니냐 하는 데에 있다. 이는 세상을 엄밀하게 조사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도자기 꽃병을 아무리 자세히 뜯어보아도 그게 결혼 선물임을 알아낼 수는 없지 않은가. 디치킨스와 나 같은 급진주의자 간의 차이 역시 인간 조건의 궁극적인 시니피앙이 고문 받고 살해당한 정치범의 몸뚱이라는 말을 받아들이는지, 그것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54-5쪽)

 

 

무자비하게 실리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에 내몰린 이른바 영적인 가치가 피난처로 삼은 곳의 하나가 뉴에이지(New Age)다. 하지만 뉴에이지는 영적인 것의 서툰 모방에 불과한데, 물질주의에 매몰된 문명에서 그 이상을 기대할 수는 없을 터이다. 마음이 냉혹한 사람들이 감상적인 노래를 들으며 훌쩍이곤 하듯이, 진정한 영적 가치가 품안에 굴러들어도 알아보지 못할 사람들이 유독 영성(靈性)을 뭔가 으스스하고 영묘하여 심원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띤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며, 마르크스가 종교를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라고 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게 바로 이런 상황이다. 마르크스의 말을 다시 풀이하면, 유머 감각 없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종류의 우스개가 난처할 정도로 노골적인 유머이듯이, 무정한 세계에서 감정 혹은 정(情)의 원천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전통적인 종교뿐이라는 얘기다. 마르크스가 공격한 종교는 실리만을 추구하는 물질주의자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종교, 즉 영적인 것을 현실에서 분리하여 감상적으로만 이해하는 유형의 종교였다. (59쪽)

 

 

 

이슬람 급진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는 이와 사뭇 다르다. 낭만주의나 뉴에이지와 달리, 그것들은 불만을 품은 소수의 교리를 넘어선 대중운동이다. 여기서 종교는 인민의아편이라기보다 인민의 크랙 코카인이다. 근본주의는 단순히 세상으로부터 도피처를 찾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나선다. 근본주의는 근대성(modernity)이 내거는 가치들을 거부하지만, 근대의 과학기술과 조직 방식들은 그것이 화학적이건 미디어 기술이건 필요한 대로 기꺼이 받아들인다. 영국에서 이라크 침략을 지지한 좌파 인사들 혹은 이전에 좌파였던 사람들은 그 문제에 관한 성명에서 “우리는 근대성에 대한 두려움을 거부한다.”라고 했는데, 이들의 말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됐다. 하나는 이슬람이 근대성을 덮어놓고 거부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근대성에는 거부할 만한 게 많다는 점이다. 화학전을 불안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복고적인 반동세력이 되는 건 아니다. 화학전이 두렵지 않다면 도대체 뭐를 두려워해야 한단 말인가. (61-2쪽)

 

 

아퀴나스가 『이단논박대전』에서 말하듯이, 각 피조물의 궁극적인 완성은 행함에 있다. 아퀴나스의 생각에 존재란 실체라기보다 행위다. 그에겐 하느님조차 명사보다 동사에 가깝다. 우리의 몸 자체가 주체와 객체라는 이원성을 해체한다. 나는 안에서 눈구멍을 통해 밖의 세상을 냉정하게 응시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에 참여하는 행위자로서 항상 세상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따라서 아퀴나스도 비트겐슈타인처럼 ‘외부 세계(the external world)’라는 일상적인 표현에 대해 곤혹스러워했을 법하다. 저 등나무가 내 옆에 있지 않고 내 ‘밖에’ 있다는 게 무슨 뜻일까? 저 나무가 내 ‘밖에’ 있다고 본다면, 실재의 나는 마치 크레인을 운전하는 사람처럼 나의 몸 안에 웅크리고 있어야 할 터이다. 그럼 그 실재의 나는 또 누가 움직이는 걸까? (109쪽)

 

 

행위에서의 주체성과 사물에 대한 지배력, 그리고 자율성 등은 바람직한 미덕이지만, 위협적이리만큼 이질적으로 느껴지게 된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주권은 고독과 불가분한 것임이 드러난다. 계몽정신으로 무장한 인간은 확신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자신이 이 우주에 홀로 서 있으며 그의 진가를 증명해 줄 것도 자기 자신뿐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그는 세계를 지배한다면서도 거기에 개재된 자의성과 불확실성을 진저리 칠 정도로 의식하게 되며, 이런 상황은 근대가 진행됨에 따라 더욱 심각해진다. 자신이 한 손으로 방금 세상에 끼워 넣은 가치를 다른 손으로 끄집어내어 이것 보라며 제시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간 주체가 딛고 선 토대가 자기 자신뿐이라는 점은 또 어떻게 봐야 하는가? (112-3쪽)

 

 

얄궂게도 진보라는 개념에는 종교적인 여운이 있다. 찰스 테일러는 『세속의 시대』에서 진보의 개념을 ‘신의 섭리의 대체물’이라고 했다. 하지만 기독교 종말론은 무한한 발전이라는 생각과 거리가 멀다. 하느님의 나라는 역사라는 상승하는 곡조의 절정에서 힘차게 울려퍼지는 소리처럼 도래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장엄한 역사적 진화의 완성이 아니라, 인간이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가운데 보편적 평화와 정의가 살아 숨 쉬는 하느님의 통치 시대를 예시한 모든 역사적 발화점들의 마무리다. 이처럼 기독교 신학은 진보라는 오만한 관념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역사를 바꾸어 갈 수 있다고 믿는다. 발터 벤야민도 인식했듯이, 하느님의 통치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산발적이고 자주 불운했던 투쟁들, 영원의 관점이라 할 것에 따라 ‘지금시간’이라는 하나의 순간에 모여 일관된 이야기로 구현됨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투쟁들을 이른다. 근대적인 사고에서는 이른바 거대담론을 믿는 반면 포스트모던한 사고에서는 이를 믿지 않는데, 그와는 별도로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거대담론이 하나 있으며 그것은 미래뿐 아니라 과거에까지도 소급해 작용하리라고 본다. 벤야민이 말했듯이 “구원된 인류에게 비로소 그들의 과거가 완전히 주어지게 되기” 때문이다.(124-6쪽)

 

 

철저하게 합리적인 미래라는 꿈은 얼만큼이나 천국의 대체물 역할을 하는 걸까? 절대화된 ‘진보’는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자들 나름의 ‘내세(來世)’인가? 자유주의적 합리주의는 정말 종교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났을까?(128쪽)

 

 

상상해보건대, 하느님이 갑자기 소설가 토머스 하디의 외양간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더라도 하디는 그다지 감격하지 않았을 듯하다. 충실한 진화론자인 하디는 하느님을 순수하게 인간적인 모든 관점들이 수렴되는 가공의 지점으로 보았으며, 그 자리에 어떤 초월적 존재가 있을 가능성을 원칙적으로 인정한다 해도 본디 불완전하고 관점에 얽매인 인간의 삶에 그런 존재가 실질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디의 생각에는 하느님이 정말 존재하더라도 우리에게 특별히 흥미로운 말을 해줄 게 없다. 그는 어느 시에서 하느님이 실제로 세상을 창조하긴 했지만 세상에 관심을 끊은 지 이미 오래라고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어구를 약간 바꾸어 말한다면, 하느님이 말을 할 수 있다 해도 우리는 그의 말에 신경 쓰지 않을 터이다.(150-1쪽)

 

 

바디우에 따르면 믿음의 행위에 관련된 지리는명제적 진리와 전혀 무관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명제적 진리로 환원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바디우에게 믿음이란 그가 ‘사건(event)'이라고 부르는 것 -- 역사의 평탄한 흐름에서 훌쩍 벗어나 발생했기에 기존의 맥락에서는 이름 붙일 수도 없고 의미를 파악할 수도 없는 지극히 독창적인 일 -- 에 대한 끈질긴 충실성에 있다. 진리는 세상의 결을 거슬러 옛 체제와 단절하고 완전히 새로운 현실의 토대를 놓는 것이다. (...) 예를 들어, 사람들을 움직여 인종차별이 없는 사회의 가능성을 믿게 만드는 것은 일련의 명제들이 아니라 일련의 헌신이다. 그들이 피부색 때문에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이 움직여 행동에 나서려면 그에 앞서 이미 정의라는 개념과 정의의 실현 가능성에 어느 정도 헌신하고 있어야 한다. 사실에 대한 인식만으로는 정의 실현을 위한 행동을 유발하기에 충분치 않다. (155-8쪽)

 

 

근본주의는 천박한 기술적 합리성 -- 중요한 영적 문제들을 냉소적으로 일체 외면함으로써 편협한 사람들의 그것을 독점하도록 허용하는 합리성 --의 압박에 내몰려 광신에 까지 이른 사람들의 믿음이라 할 수 있다. (193쪽)

 

 

문명이 실용주의와 물질주의에 젖어갈수록 그것이 감당 못하는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욕구들을 채울 임무가 문화에 더 많이 주어지고, 문명과 문화 간의 반목은 한층 깊어진다. 보편적인 가치를 특정한 시대, 특정한 공간에서 구현해야 할 문화가 결국은 보편적 가치를 공격하게 된다. 요컨대 문화는 억압된 것의 격렬한 회구라 할 수 있다. 문화는 문명보다 국지적이고 직접적, 자연발생적이며 합리성과 무관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둘 중에서 더 미학적인 개념이다. 자기네 고유의 문화를 기리고 지키려는 유형의 민족주의는 언제나 가장 시적(詩的)인 종류의 정치로, 전에 누군가 말했듯이 ‘문학인들의 발명품’이다. 하기는 아일랜드의 위대한 민족주의자이며 시인이었던 파드릭 피어스를 위생위원회에 배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01-2쪽)

 

 

 

죽음보다 강한 것은 이성이 아니라 사랑이며, 오직 사랑에서만 문명의 아름다움이 샘솟을 수 있다고. 이성은 너무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힘이어서 죽음을 이겨낼 수 없다. 하지만 그 사랑이 진정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피의 제물을 항상 묵묵히 인정하는” 사랑이어야 한다. 우리는 아름다움과 이상주의, 그리고 진보를 향한 열망을 높이 평가해야하지만, 그 뿌리에는 많은 피와 비참함이 있었다는 사실 또한 마르크스나 니체 식으로 시인해야 한다. 한데 얼핏 보기에 ‘진보’의 사도들은 이런 지혜에 이르지 못한 듯하다.(210-1쪽)

 

 

비극적 인본주의도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자유로운 번영을 염원하되, 그 같은 이상은 우리가 최악의 것들을 직시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에 대한 긍정이 궁극적으로 가치 있으려면, 왕정복고 이후 미몽에서 깨어난 밀턴처럼 인간이 애당초 구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조너선 스위프트의 소설에서 거인국의 왕이 무슨 생각으로 인간을 구역질나는 해충이라고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긍정이어야 한다. 비극적 인본주의는 사회주의적인 것이든 기독교나 정신분석학의 관점에 선 것이든 간에, 인간은 자기 비우기와 근본적인 개조를 통해서만 바로 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변화된 사회가 미래에 반드시 태어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교조적 자유주의자, ‘진보’의 광신자들, 이슬람 공포증에 사로잡힌 지식인들이 변화의 길을 끈질기게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런 미래가 조금은 떠 빨리 찾아올지 모른다. (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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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수다'와 전문가주의.

'나는 가수다' 전편을 어제 몰아서 봤다. 하도 여기저기서 말도 많고 하길래 일단 내 눈으로 확인하고 끼어들 겸 해서... 1회는 예전에 보긴 했는데, 매니저로 나온 개그맨들이 계속 호들갑 떨어대는 것도 보기 싫고, 왠지 가수들끼리 서로 자화자찬 하는 분위기도 맘에 안들고 해서 볼 생각을 접었는데... 노래 하나는 끝내준다는 소문에 귀가 간지러워서 저녁내내 다 보고 말았다.

 

밥먹고, 씻고, 설거지 하고 어쩌구 하는 시간 다 포함해서 5시간을 이거 보는데 투자한 것 같은데,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안들었던 걸 생각하면 노래하나는 정말 끝내줬다. 우선 이소라, 김범수는 어떤 노래를 부르던 입이 쩍쩍 벌어지게 만들었다. 백지영은 너무 대중적이고 유행타는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라 가창력을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웬걸 “백지영이 원래 노래를 이렇게 잘 불렀나” 싶을 정도로 훌륭했다. 음악의 질적인 면으로 보자면 우리나라 공중파에서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해내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문제는 이것이 전적으로 가수들의 실력이 이뤄낸 성과라는 점이고, 제작진이 이렇게 훌륭한 뮤지션들을 모아놓고 겨우 ‘서바이벌’이라는 저질스런 컨셉밖에 생각해내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게다가 이 서바이벌이 실제 탈락자 1인을 향해 화살을 날렸을 때, 제작진이 보인 엉성함이란... 이 문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찧고 까불고 있는 중이니 나까지 말을 보탤 필요는 없겠다.

 

나를 제일 어이없게 한 것은 김건모가 떨어지고 나서 한 발언이었다. 김건모는 자기가 떨어진 이유가 ‘립스틱 퍼포먼스’ 때문이라고 계속 중얼거렸다. 재도전을 제안한 김제동도 그 발언에 사실상 동의하며 ‘음악 외적인 부분’ 때문에 7위를 한 것이니 재도전의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이 너무 쉽게 무시한 것은 김건모가 7위라는 판정을 내린 것은 김건모 자신도 아니고 김제동도 아니고 500명의 일반인 평가단이었다는 사실이다. 왜 김건모는 자신이 ‘음악’ 때문에 7위를 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일까? 왜 500명의 ‘일반인’들이 그의 음악성을 가지고 7위를 줬을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일까? 누가 그에게 그렇게 오만할 권리를 줬단 말인가? 김건모의 립스틱 퍼포먼스가 전체적인 공연의 분위기와 안 어울렸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500명의 평가단의 ‘감상’에 미쳤을 효과는 다 제각각인 것이다. 게 중에는 퍼포먼스가 기발하고 독특하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건모는 7위를 했을 수 있다. 제작진, 그리고 가수 도전자, 개그맨 매니저들 모두 그럴 가능성을 배제해버리는 엄청난 오만함을 보여준 것이다.

 

이런 태도를 굳이 규정하자면 일종의 ‘전문가주의’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 ‘전문가주의’가 제일 빈번히 출현하여 대중과 마찰을 일으키는 분야는 단연 ‘과학’이다. 광우병, 조류독감, 천안함, 그리고 최근 일본 핵발전소 사고까지... ‘전문가’를 자청하는 과학자들을 등에 업은 정부와 언론은 자신들이 믿는 ‘가정’이 유일한 ‘진리’임을 강조하고, 이것이 대중의 불안에 기반한 정서와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킨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권력을 기반에 두고 끊임없이 지식인과 무지자를 갈라놓는데 여념이 없다.

 

이런 과학의 영역이야 ‘패러다임의 전환’과 같은 한계적 조건이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그 학문적 성격 자체가 ‘진리’를 추구한다는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그나마’ 이해해줄 수 있다(상대적으로). 하지만, 음악이 진리를 추구하는 영역인가? 오로지 뮤지션들만이 알 수 있는 독특한 심미적 세계가, 나같은 문외한은 알 턱이 없는 그런 오묘한 세계에 똬리를 트고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나가수는 프로그램의 흥행을 위해서 일반인을 평가단으로 500명이나 불러들여놓고, 그 평가가 자신들의 ‘전문가적’ 잣대와 맞지 않으니 손바닥 뒤집듯이 결과를 뒤집어 버린 것이다. 그것도 평가단의 평가는 자신의 음악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부분에서 이루어졌다는, 아주 오만한 자신감을 근거로.

 

데뷔 20년차 가수를 데려다놓고 서바이벌이라는 형식을 선택한다는게, 국사를 영어로 가르치는 것만큼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지만, 어쨌든 그 서바이벌 과정에서 드러난 제작진과 가수들의 오만한 전문가주의에 더 화가났던 어젯밤이다.

 

 

뱀발) 어제 우연히 한겨레 [왜냐면]에 신동일이라는 사람이 쓴 글을 보니, 나가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평가방식을 다음과 같이 바꿔야 했다고 말한다.

 

“누가 어떻게 심사할 것인지 참가 가수들과도 협의를 하고, 심사단을 엄밀하게 선정한 뒤 심사자 교육 과정을 참가자들과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기도 하며, 심지어 참가 가수나 시청자들도 평가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심사 권한을 위임한다. 탈락한 가수가 심사자로 참가할 수도 있으며, 동료끼리 또 각자 자신을 평가한 점수도 최종심사에 반영한다. 가수들 쪽에서 평가방식에 대해서 제작진이나 심사단에게 물어볼 수 있도록 대화창구가 있으며, 신뢰감을 서로가 가질 수 있도록 여러 행사도 준비한다. 그리고 결과는 당일에 깜짝 발표되기보다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게 한다.”

 

교원평가에서 그렇게 하듯이 다면평가를 도입하자는 얘기인데, 아무리 좋은 평가도 평가는 평가다. 그리고 7명의 가수들이 평가방식에 문제를 제기한 것도 아니지 않는가? 패자부활전을 100번을 한다고 한들 어쨌든 꼴찌는 나오게 되어 있다. 가수들은 누구든 1명은 탈락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실제 결과가 나오니까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평가 ‘방식’이 아니라, 평가 ‘자체’에 있는 것이다. 교원평가든 일제고사든 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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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문제는 백분토론에서 다뤄질 수 있는가?

바로 어제 장애학 세미나 발제에 썼던, 아주 갑작스럽고 엉뚱한(?) 고민...

 

 

박경석 대표님이 예전에 하셨다는 그 말, “장애인들의 문제가 백분토론에 한번 나와 봤으면 좋겠다”라는 얘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정말 과연, 장애문제가 이 사회에서 ‘토론’ 가능한 문제일까?

난 이런 질문 앞에서 예전에 학생운동단체에서 활동할 때, 어린이대공원으로 ‘소풍’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동물들은 우리 안에 갇혀서 사실상 하루 종일 ‘멍’ 때리고 있는데, 우리들은 그걸 보고 신기해하고, 가끔 사진도 찍고 하는 게 나는 영 불편했다. 그러다가 나는 마지막에 동물원을 나오면서 ‘꼭지가 확 돌아버렸다’. 왜냐면 산만한 크기의 코끼리의 한 쪽 발이 쇠자물쇠에 묶여있는 모습을 보고 말았기 때문이다. 난 그 모습이 너무 화가 나서 돌아오는 내내 같이 갔던 사람들에게 ‘동물해방’ 투쟁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는데, 그 날 나의 이야기는 두고두고 사람들 사이에서 농담거리가 되고 말았다.

 

물론 완전히 같은 문제라 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우리 사회가 장애문제를 인식하는 수준은 어느 정도 동물원의 동물을 바라보는 태도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동물원과 장애인 시설의 존재 목적은 다르지만 사회적으로 기능하는 바는 사실상 같은 게 아닐까? 동물원은 우리 속에 갇혀진 그들의 (우리는 무감각하게 ‘울음’이라고 부르는) ‘비명’ 소리로 인간들에게 ‘오락’을 제공하여 이들의 안락을 유지한다. 인간의 경계 ‘내부’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그 ‘내부’에서 동물들의 존엄성에 대해 토론할 필요 같은 것을 느끼지 못한다. 꼭 동물원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야생동물들이 그 ‘우리’ 안에 갇혀 있음으로 해서 자신들의 지금의 안락한 삶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가끔 TV를 통해 들려오는 멸종위기 생물들에 대한 남획에 분노할 수는 있어도, 우리 중에 누구라도 뒷산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맷돼지가 내려오는 것을 참으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사람이 있을까? 그건 근대적 인간의 삶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용납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무슨 동물보호단체라는 데서 나온 사람들이 토론프로그램에서 할 수 있는 말은 대개가 의학적, 생물학적 지식을 동원해야만 말이 이어지는 것들이다. 이런 말이라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게 다행이긴 하지만, 나는 그게 생명체들의 보편적인 자기 삶의 권리를 누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 생각한다.

한편 장애인 시설은 비장애인의 삶의 방식에 ‘불편한’ 존재일 (뿐이라 여겨지는) 장애인들을 시설로 몰아넣으면서 비장애인들의 안락을 유지한다. 비장애인들은 그렇게 장애인들을 시설로 몰아넣고는 가끔씩 ‘봉사활동’이란 명목으로 찾아가 자기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내가 고등학교 때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노동자 자녀들을 데리고 꽃동네 봉사활동 하는데에 간 적이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서 비장애인들이 취했던 태도는 동물원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랑 다르지 않은 것 같다. ①우르르 몰려간다. ②잠깐 있다 나온다. ③먹을 것을 준다. ④가까이 오면 무서워한다. (+알파, 베타, 오메가....)

이런 상황에서 장애인의 삶에 대한 토론이 가능할까? 그것도 백분토론 같은데서? 내 생각은 토론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아니라, 토론을 할 수도 있고 해서 나쁠 것도 없지만, 사실상 토론 불가능의 영역으로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가 끌어안고 있는 어떤 신체의 ‘무결성’과 그들의 ‘안락함’이라는 개념을 깨버리지 않은 상황에서 그 토론이 핵심적인 문제를 다룰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느끼는 것이지만, 아직은 장애문제를 둘러싸고는 ‘말’로 하는 토론보다는 ‘몸’으로 하는 싸움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사회를 더 없이 불편하게 해야 한다. 이 사회의 안락함이라는 것은 장애인을 ‘비(非)인간’의 영역으로 몰아넣는 시설의 위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것을 깨우치는 것은, (안타깝게도) 아직까진 ‘말’보다는 ‘공격’인 것 같다. 학교 다닐 때, 동아리에 들어온 새내기가 장애인 시설에 봉사활동 다녀서 동아리 활동을 소홀히 한다길래 (그 전부터 노들에서 교사활동을 하던 선배와 함께) 술자리에서 그 친구를 앉혀놓고 그런 거 다니지 말라고 몰아세워서는 결국 울려버린 적이 있다. 내가 살면서 여러 사람 눈에 눈물 흘리게 한 것 참 반성을 많이 하지만, 그 때만큼은 참 잘한 것 같다.

 

(계속 논점이 삼천포로 빠지는 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생각난 김에 말해보자면) 우리 인간에게 어떤 권리가 있음을 밝히는 것이 근대사회를 열어젖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앞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투쟁을 하는데 있어서는 오히려 인간에게 ‘어떠한 권리가 없음’을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다른 어떤 인간을 (예를들면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평생토록 시설에 가둬놓을 권리가 ‘없다’. 그것이 특정한 인간집단의 안락과 편안함을 위해 더 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같은 이유로 인간은 인간이 아닌 동물들을 특정한 공간에 가둬놓고 그것을 보며 즐거워할 권리가 ‘없다’. 어떠한 생명도 자신을 감금된 상태로 희생하며 다른 생명에게 유희를 제공할 의무 따위는 없다. 예전에 지율스님의 도롱뇽 소송 같은게 이런 의미를 가진 싸움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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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스쳐간 고민에 대한 갑작스런 메모.

난 어떤 의미에선 우리나라가 ‘복지국가’가 맞다고 생각한다. 복지국가에 어떤 이상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보편적 삶의 권리가 보장되고, 소득분배가 평등한 나라라는 기준으로 보자면 택도 없지만. 사실 사회복지정책론 교과서 같은데 나오는 복지국가 유형분류를 논외로 생각한다면, ‘복지국가’라는 어떤 근대국가의 이상향적 모델은 근대인들의 무절제하게 팽창하는 욕구에 어떻게 사회경제시스템이 대처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 욕구를 어떻게 조절하여 지구상의 생명-생태계와 공(共)-존(存)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완전히 열외의 문제였다. ..... 그래서 .... 인간의 욕구와 등치된 개념이 되어버린 ‘권리’를 사실상 삭제하고 새롭게 ‘삶’을 창안하는 투쟁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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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임금이론』(케네스 라피데스 저, 사회진보연대) 주요부분 요약

 

 

 

마르크스의 임금이론

(케네스 라피데스 저, 사회진보연대 노동자운동연구소)

 

 

■ 마르크스의 초기 임금이론

 

1)『1844년 경제학․철학 원고』

- 처음 출간될 당시에는 노동자의 소외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심이 드러나 있다는 점 때문에 큰 방향을 불러 일으켰지만 임금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심은 그다지 주목을 끌지 못함.

- 수요-공급법칙과 노동자의 생계적 필요가 임금수준을 경정하는 일차적 요인으로 이해됨. 반면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탄압과 같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가 이러한 시장의 효과가 실현되는 과정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이해됨. 하지만 마르크스의 성숙기 분석의 근본적 특징인 생계적 필요가 역사적으로 변화한다는 사실과 노동조합의 역할이라는 요소가 빠져 있음.

-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여기에서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생계적 요구와 상대적 임금이라는 측면을 통해 기존의 분석을 넘어서기 시작하고 있음. “모든 사회 계급들의 평균 소득이 증대하였다는 것은 거짓이지만, 이를 사실이라 가정할지라도 소득 격차, 따라서 상대적 소득 격차는 더욱 커졌고, 이로 인해 부와 빈곤의 대립은 더욱더 첨예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총생산이 증가하고 그와 똑같은 정도로 욕구, 욕망, 요구도 나타나고 증대하는 까닭에, 절대적 빈곤은 줄어든다 할지라도 상대적 빈곤은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2) 엥겔스, 「경제학 비판 개요」

-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 모두를 통틀어 임금 문제를 최초로 다루고 있는 저작.

- 엥겔스는 이 글의 목적을 자본주의 체제와 그 이데올로기, 경제적 불의와 위선을 고발하는데 두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노동자의 조건을 악화시키는 요소에 대한 체계적 분석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엥겔스는 당대에 중요했던 다른 주제들, 예를 들어 맬서스의 인구론이라던가 기계의 도입이 고용과 임금에 끼치는 영향 등에 대해서는 면밀히 연구하였다. 특히 후자에 대해서 엥겔스는 “자본과 토지의 노동에 대한 투쟁에서, 자본과 토지라는 두 요소가 노동에 비해 갖는 특별한 이점이 이다. 그것은 바로 과학의 지원을 받는다”라고 말했다. 기계는 공장주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계획도 분쇄하고, 열세를 면치 못하는 노동이 자본에 대해 벌이는 투쟁에서 그나마 노동이 쥐고 있던 힘의 흔적마저도 지워버렸다.“

-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둘의 공동작업인『신성가족 비판』에 이르러 임금인상을 위한 노동자의 조직된 투쟁을 중요하게 인식하면서 이를 무시하는 견해를 논박하기 시작한다. “임금의 크기도 처음에는 자유로운 노동자와 자유로운 자본가 사이의 자유로운 합의에 의해서 결정된다. 뒤늦게 노동자는 자본가가 임금을 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수 없으며 자본가도 될 수 있는 대로 임금을 낮추지 않을 수 없음이 드러난다. 계약 쌍방의 자유 대신에 강제가 나타나게 된다.

 

3) 엥겔스,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

- 엥겔스는 최저임금은 노동자들 경쟁으로 인해 결정되지만, 최고임금은 부르주아 자신들 간의 경쟁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 자신의 상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 자본가는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한다. 수요 증가 때문에 모든 가능한 노동자가 다 흡수된 뒤라면 자본가들은 자신들끼리 노동자를 추가로 확보하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 그 결과 임금이 상승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평균 임금률을 결정할 수 있다. 평균적 상황에서 임금은 최저수준 약간 위쪽에서 형성된다. 여기서 평균적 상황이라 함은 노동자나 자본가 모두의 경쟁, 특히 자신들끼리 경쟁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며, 정확히 수요만큼의 상품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수 정도의 노동자만이 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임금이 최저수준보다 어느 정도까지 상향할 수 있는 지는 노동자의 평균적 필요와 문명화 정도에 달려 있다. (...) 노동자들이 서로 경쟁하지 않고 있으며, 그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아서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이보다 적게 줄 수는 없다. 반면 자본가 자신들 간에 경쟁이 없는 상황에 특별한 호의를 베풂으로써 노동자를 유인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이보다 많이 줄 이유 또한 없다.

- 과잉인구는 어떤 자연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의 요구로 인해 발생한다. “노동자들 간의 경쟁에 의해 최고 수준으로 올라간 손노동의 작업속도와 생산성, 분업, 기계의 도입, 자연력의 이용 때문에 노동자 다수는 빵을 빼앗겼다” 여기에 더하여 교역위기의 효과도 고려해야 한다. 공장이 문을 닫거나 기존의 절반만 가동되면 “실업자와 경쟁, 노동시간 감소, 수익 매출의 부재 등으로 인해 임금은 내려간다.”

 

4) 『철학의 빈곤』

- 프루동을 비판하면서 혁명적 입장에서 노동조합주의를 방어함. 그러나 임금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의 분석은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에 미달하는 것으로, 이 저작에서도 임금수준 결정에 있어 사회적, 역사적 요소에 대한 언급을 빠뜨리고 있음.

- 마르크스는 프루동의 순진한 생각을 논박하기 위해 그 이전에 기각한 바 있던 리카도의 분석을 다시 받아들이고 있음. “노동 자체가 상품이라 할 때, 노동의 가치는 노동이라는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을 통해 측정된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노동의 지속적인 유지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들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 즉 자신의 삶을 유지할 수 있고, 자신의 종족을 번식시켜 나갈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노동시간이다.”

 

5) 『임금노동과 자본』

-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있어서 임금 문제만을 다룬 최초의 저작.

- “화폐로 환산된 상품의 교환가치를 가격이라고 부른다. 임금은 노동의 가격을 지칭하는 특별한 이름일 뿐이다. 따라서 임금은 다른 모든 상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법칙과 동일한 법칙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경제학의 상투적 가르침과는 반대로 마르크스는 “임금은 ... 노동자가 자신이 생산한 상품에서 차지하는 몫이 아니다. 임금은 자본가가 일정한 양의 생산적 노동력을 사들이는 데 사용한 기존 상품의 일부분이다.” 노동자는 노예와는 다르게 자신의 노동을 '상품'으로 팔아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는 이 부르주아 혹은 저 부르주아에 속한 것이 아니고, 부르주아 계급 전체에 속해있다.” ⇒ 여기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잉여가치이론이 발생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접할 수 있음. (자본과 임금노동 사이의 교환을 설명하면서 명시적으로 ‘노동력’이라는 표현을 씀)

- 상대적 부와 상대적 임금에 대해 논하기 시작함. “임금이 현저히 증대되려면 생산자본의 급속한 성장이 전제 되어야 한다. 생산자본의 급속한 성장은 마찬가지로 부, 사치, 사회적 욕구 및 사회적 향유의 급속한 성장을 야기한다. 따라서 비록 노동자의 향유가 증대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는 사회적 만족은 노동자가 넘볼 수 없는 자본가의 증대된 향유에 비하면, 즉 사회의 발전 상태 일반에 비하면, 감소된 셈이다. 우리의 욕구와 향유는 사회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를 기준으로 욕구와 향유를 재며, 욕구와 향유를 만족시키는 것들을 기준으로 만족의 정도를 재는 것이 아니다. 욕구와 향유는 사회적 본성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본성이다."

- 임금은 자본가의 이득과 비율의 문제로 사고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 실질임금이 변함없더라도 심지어 오르더라도, 상대적 임금은 하락할 수 있다. 즉 임금은 무엇보다도 자본가의 이득, 즉 이윤과의 관계에서 결정된다. 즉 상대적 임금이라는 것.

- 임금변동이 가지는 이점에 대해 강조. 임금의 변동이 없다면, 노동자는 문명의 발전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 최저점 이상으로 임금의 일시적 상승이 없다면 노동자는 모든 생산의 발전, 사회적 부, 문명, 따라서 해방의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

- 맬서스로부터 기원하는 임금기금설을 논박함. 그는 생산적 자본이 성장하고 그 결과 노동에 대한 수요가 상대적으로 상승하는 경우에도, 현대 산업과 자본의 특성상 노동자 고용을 위한 수단은 동일한 비율로 증가하지 않는다고 지적. 이것은 필연적으로 대규모 산업의 본질적 속성과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서 기인하는 것.

 

6) 『공산주의자 선언』

- 『선언』은 임금과 관련하여 “임금노동의 평균 가격은 최저임금이다. 다시 말해 생계수단의 양은 노동자를 노동자로 겨우 연명케 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양고 같다”고 쓰고 있다. 임금은 이러한 최저생계를 “연장하고 재생산”할 수 있을 정도다. 『선언』에서의 이러한 해석은 이후 마르크스의 임금론을 이해하는데 지속적인 영향을 미침.

- (마르크스의 <자유무역 문제에 대한 연설>(1848)에서) 자본의 성장은 사실상 노동자에게 가장 유리한 조건. 그러나 이는 자본의 축적과 집적을 의미. 이러한 집중은 분업과 기계의 사용을 증가시킴. 분업의 심화는 노동자의 특화된 기술을 파괴하며 노동자 사이의 경쟁을 증대. 자유무역의 교리에 따르면 경쟁은 모든 상품의 가격을 최소 생산가격으로까지 떨어트린다. 따라서 최저임금이 노동의 자연가격. 그렇다면 최저임금이란? 노동자의 생계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임 품목의 생산을 위해 필요한 것과 정확히 똑같은 양이며, 개별 노동자도아 노동자 계급의 존속을 위해 필요한 것과 동일한 양. 그는 또한 “노동자들이 오로지 이 최저임금만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항상 이 임금을 받는다고 생각해서는 더더욱 안된다.” “더 값싸고 저질의 음식으로 노동을 유지하는 방법이 끊임없이 발견됨에 따라 최저임금은 끊임없이 하락한다."

- 마르크스는 런던 거주 당시 근대 노동자운동과 접촉하면서 이 사태를 분석. “이러한 파업은 일차 생필품 가격의 전반적 상승에 상응하여 노동-잉여가 상대적으로 하락한 필연적 결과”. 그는 파업 이외에는 노동자들이 자신이 자신의 노동에 대해 실제 시장 가치를 받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고 말하며 처음으로 노동조합을 경제적으로 정당화 함.

 

 

 

 

■ 『경제학 비판 개요』와 『1861-63년 경제학 원고』

 

1) 경제학 비판 개요

- 『자본』의 최초의 원고로 알려지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음. 또한 이 저서의 의의에 대한 논의도 학자에 따라 분분한 상황.

- 마르크스는『개요』의 몇몇 구절에서 임금에 관해 별도의 장 또는 절에서 논하겠다고 하면서 분석을 유예함. 일부 저자들은 이를 근거로 그가 후에 『자본』출간에 후속해서 자신의 임금이론을 완성하는 임금노동을 다루는 별도의 저작을 쓸 계획이었다고 오해. 그러나 있지도 않은 의미를 부여하는 대신 마르크스가 표현한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진실에 훨씬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

- 마르크스의 임금 분석 방법에 있어서의 전제 : “임금은 언제나 최저로 가정된다. 이런 가정 하에서만 하나의 관계를 논하려 할 때 기타 여러 가지 관계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여기서의 ‘최저’라는 말의 의미는 이전의 저작에서 ‘최저생계’를 의미했던 것과 다름. 여기서는 ‘사회의 특정 상태’에 의해 규정되는 최저임금. 그것은 단지 임금의 상승이나 하락, 또는 토지 소유의 영향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을 때의 이윤 법칙들을 확정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 고정된 가정들은 설명이 계속되면서 모두 불필요해진다. 마르크스는『자본』1권에서도 ‘분석상의 목적으로’ 상품이 자신의 가치대로 교환되고 따라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 가치에 따라 임금을 지급 받는다고 가정했을 뿐이라고 말함.

- 『개요』에서의 임금결정 방식 분석 :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이 임금 수준을 결정한다는 리카도의 주장을 논박하면서 경쟁은 임금 수준의 하락의 원일 수는 있어도 “일반적인 임금 표준”을 이런 방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으며 “오로지 자본-노동의 기원적 관계에 의해서만” 설명 가능하다고 말함. 경쟁은 부르주아 경제 법칙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집행자.

- 마르크스는 자본의 성장과 자본의 생산력 성장은 그 가변 요소(산 노동과 교환되는 자본의 부분)의 비율이 체감한다는 것을 함의한다고 말함. 그는 과잉인구에 대한 맬서스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노동 능력의 일정 부분을 과잉인 것으로, 즉 이 부분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을 과잉인 것으로 정립하는 것은 필요노동에 비한 잉여노동 증가의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말함. 이 경향은 노동수단을 기계로 전환함으로써 실현. 그러난 그는 어떻게 해서 기술 발전이 잉여인구 증가와 노동력 가치의 하락의 원이 되는지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음.

- 역사적으로 창출된 욕구가 증가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내재한 특성. “자본가는 노동자들의 소비를 자극하고, 자신의 상품에 새로운 매력을 부여하며,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욕구를 발생시키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강구한다. (...) 자본은 노동을 자연적 필요의 경계 이상으로 내몰고, 그리하여 풍부한 개성의 발전을 위한 물질적 요소들을 창출한다. [풍부한 개성 속에서] 자연적 욕구는 역사적으로 창출된 욕구로 대체되었다.”

- 마르크스의 가장 중요한 통찰은 노동의 이중성을 발견한 것. 노동자가 판매하는 것은 순수하고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그 자신의 노동력. 노동의 이중성에 대한 분석은 잉여가치의 비밀을 푸는 열쇠. 마르크스는 186-63년 원고에 이르러서야 노동력 가치를 노조와 명시적으로 연관 지음.

 

2) 『1861-63년 경제학 원고』

- 이 원고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노트 4권-15권은 훗날 『잉여가치학설사』라는 이름으로 출간됨. 마르크스는 “화폐는 어떻게 자본이 되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 그 해답은 노동의 이중성에 대한 이해에 달려 있음. 다른 모든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자가 노동자로서 자신을 유지하고 한 명의 노동자로 살아가고 아이를 낳기 위해 필요한 생계수단의 가치로 분해될 수 있다.” 또한 모든 상품이 그렇듯이, “노동력의 시장가격은 어떤 시기에는 제 가치 이상으로 상승하기도 하고 다른 시기에는 제 가치 이하로 하락하기도 하면서” 장기적으로는 평균값을 나타낸다. 여기서 생계수단의 가치를 감소시킴으로써 노동력 가치의 수준을 떨어트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여성과 아동의 부양책임이 그 평균수준을 결정하는 데 포함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도 노동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이 수준을 떨어트릴 수도 있다.

- 통상노동일의 연장은 양적 차이 뿐 아니라 질적 차이도 있으므로 노동력의 일일 가치는 변화된 평가액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초과수당을 요구한다. 13시간 노동일이 12시간 노동일을 대체하면, 노동자의 노동력은 더 빨리 소비될 것이다. 말하자면 노동자의 노동력 연한이 20년이라면 15년으로 단축되는 셈이다. 이러한 초과수당의 문제는 1860년대를 뜨겁게 달군 이슈로서,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정상적 노동 시간을 초과하는 시간에 대해 더 많은 임금을 지불하도록 하더라도 이는 결코 임금인상이 아니며 초과시간에 해당하는 가치에 대한 보상일 뿐이다. 현실에서 초과수당은 이를 보상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사실 초과근로 시 더욱 늘어나는 노동력 마모에 대해 보상하기 위해서는 추가된 시간만큼이 아니라 매 노동시간에 대해 더 놓은 임금률이 매겨져야 한다”고 말함.

- 노동력의 정상적 재생산에 필요한 생계수단의 양은 노동력의 교환가치가 아니라 그 사용가치에 따라 결정된다. 동일한 양의 생계수단이 노동생산성 상승으로 인해 더 짧은 노동시간 동안 생산될 수 있다면, 노동력이 계속해서 제 가치대로 판매되더라도 노동력의 가치는 하락할 것이며, 이로 인해 그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도 짧아질 것이다.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생계수단의 종류, 따라서 삶의 쾌락은 지속적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는 교환가치가 아니라 그가 영유할 수 있는 사용가치의 양과 질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생산성 향상의 결과 중 하나로 노동일 중 더 큰 부분이 자본에 의해 영유된다는 상대적 잉여가치의 법칙을 증명한 뒤, 마르크스는 “노동의 생산력의 발전의 결과 노동자의 물질적 상태가 다방면에서 개선되었다는 통계적 증명을 통해 이 법칙을 반증하려고 하는 본말전도”를 공격한다.)

- 노동자운동이 성장하고 사용자로부터 양보를 쟁취할 능력이 신장되면서 마르크스의 이론에도 그 영향이 반영되었다. 노동자들은 “(실질)임금의 감소를 막아낼 수 없더라도, 임금이 절대적 최저치로 하락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노동자들은 전반적으로 증가한 부 중에서 일정한 양을 분배 받을 수 있다.” 이는 최저임금 그 자체는 변화하며 항상 하락한다는 1847년 당시 마르크스 자신의 견해를 뒤집은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의 주장으로 세간에 알려진 소위 ‘궁핍화’ 교리에 대한 반대이다. 확실히, 생산성이 상승하고 상품가격이 하락할 때 노동자가 그 상품을 소비한다면 명목임금이나 노동력 가치가 감소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라마다 임금이 노동생산성에 반비례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는 정확히 반대다. 세계시장에서 한 나라의 생산성이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을 때, 그 나라의 임금은 다른 나라보다 더 높다. 영국에서 명목임금과 실질임금 모두 다른 나라에 비해 더 높다. 그러나 생산성에 대비해서 측정해보면 영국이 다른 나라보다 더 높지는 않다.

- 임금기금설에 대한 비판 : 임금기금설은 일정한 자본 기금이 임금 지불에 사용된다는 통념, 즉 이 이금은 노동을 고용하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야 하고 기타 용도로 사용될 수도 있다는 통념이 중심을 이룸. 그래서 임금기금의 출처인 축적된 자본이 확대되어야 임금상승도 가능하다는 논리. 그러나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은 가정을 통해 반박한다. “한편으로 그들은[노동자들은] 아이를 낳으면 안 된다. 아이를 낳지 않으면 노동 공급이 감소하고, 그 결과 노동의 가격은 상승한다. 그러나 노동의 가격이 상승하면 축적률이 감소하고, 그 결과 노동 수요가 감소하고 노동의 가격이 떨어진다. 노동의 공급이 줄어드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자본이 줄어든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들이 아이를 낳으면 그들은 자기 자신의 공급을 늘려 노동의 가격을 떨어뜨리게 된다. 따라서 이윤율이 상승하고 자본축적도 상승한다. 말하자면 노동인구는 정확히 자본가가 필요로 하는 숫자만큼 존재해야 한다. 어떤 경우든 말이다.”

-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발전할수록 가변자본으로 재전환되는 잉여생산물의비율은 더욱 작아지며 언제나 생산과정에서 잉여화되는 인구도 더욱 늘어난다. 노동자 숫자를 증가시키지 않고서도 소비되는 노동의 양이 커질 수도 있다. 노동의 공급은 ... 노동자의 수가 아니라 노동일의 길이에 따라 좌우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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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맑스주의』(이진경, 그린비) 부분 요약 정리

『미-래의 맑스주의』(이진경, 그린비)

 

 

▶ 화폐와 사회 (138-141쪽)

 

- 상품들의 세계는 화폐를 통해 고유한 질서를 획득하며, 이런 의미에서 화폐는 상품들의 세계를 동질적 공간으로 변환시킴으로써 질서를 만들어낸다. ⇒ 상품들이 구성하는 세계를 하나의 질서로 묶고 통합하는 것은 ‘가치’나 ‘계약’이 아니라 화폐의 초월적 권력

- 상품세계와 화폐의 관계는 근대인과 근대국가의 관계와 정확하게 동형적. 정치경제학은 상품세계에서 개별적 가치형태의 전개로는 극복될 수 없는 한계를 특정한 한 상품의 ‘선출’과 배제를 통해 극복한다는 소설과도 같은 내러티브를 통해 화폐의 탄생을 설명. 이러한 설명의 논리는 개별적인 의지들이 서로간에 대립하고 있는 자연상태 내지 전쟁상태를 피하기 위해 어떤 하나의 대표자에게 자신들의 의지를 위임하는 홉스나 계약론의 설명방식과 유사.

- 이러한 화폐의 거래망은 공동체와 상응할 수 없기 때문에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하지 않음. 교환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화폐조차 공동체 사이에서, 공동체들간의 교역을 위한 공간에서 발생했고, 공동체의 바깥에 있는 외부자들에 의해 취급되었다. “두 나라 사이의 평화상태는 양국의 지배자 간에 항상 증여가 행해지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곧 상업적 성질을 가진 추장교역이며, 추장상업은 이로부터 발달하였다. 증여가 단절된다는 것은 전쟁을 의미했다.”(막스 베버, 『사회경제사』)

- 자본주의의 발상지로 간주되는 중세도시의 경우에도, 그 도시의 상업과 부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다른 도시와의 대외교역. 이러한 도시간 대외교역이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광범위한 상업적 교역망과 더불어 화폐의 교역망을 만들게 되는데, 이러한 ‘화폐거래 네트워크’가 나중에 영토국가와 손을 잡거나 그것에 의해 포획되면서 영토국가 차원의 시장과 화폐가 발전.

- 그 경우 화폐는 전쟁자금이나 궁정의 사치 등과 같은 국가적인 차원의 리에 사용되었고, 그것의 조달은 국가가 나중에 걷을 조세를 담보로 은행가나 상인에게 빌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국가는 그 채무를 인민들에게 조세로 떠넘겼다. 그리고 조세를 화폐로 납부하게 함으로써 화폐가 하나의 국가 내부에서 일반화된 교환수단으로 자리잡게 된다. 화폐가 한 ‘사회’의 내부에서 일반화된 교환수단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였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화폐, 특히 어떤 사회 내부의 일반화된 교환수단으로서의 화폐는 개별적인 교역 내부에서 교환의 확대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한 게 아니라 국가적 조세를통해서 자리잡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시장적인 모델의 세계에서 화폐의 지위는 단순한 교환의 매개라는 상인의 위상이아니라 인민들을 지배하고 그들에게 조세를 내라고 요구하는 군주의 지위와 훨씬 더 가깝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 5장. 노동의 기계적 포섭과 기계적 잉여가치 개념에 대하여

 

1. 산업혁명과 노동

 

-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핵심은 노동가치론에 대한 비판. 맑스는 노동이란 가치를 갖지 않는다고 지적하면서 노동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사용가치”라고 주장. 즉 ‘노동의 가치’란 자본가가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을 사용하여 산출한 생산물의 가치라는 것.

- 이러한 정의는 노동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함축함. 헤겔식의 ‘노동이란 인간의 합목적적 활동’이란 개념에 반하여 노동과정이란 그것을 구매한 자본가각 노동력을 사용하는 과정이라는 주장. 이는 노동을 자본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사회적인’ 본질로서 재정의 한 것.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것은 노동이 된다. 즉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관계하에서 ‘노동자의 활동’은 ‘노동력 상품의 사용’(=노동)이 된다.

- 이러한 정의는 자본주의에서는 ‘노동’ 자체가 항상-이미 계급적 적대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다시 말해 노동과정 자체가 두 개의 적대적인 의미가 항상-이미 대립하는 계급투쟁 과정임을 의미. ⇒ ‘자본에 의한 노동의 포섭’

 

① 자본에 의한 노동의 형식적 포섭

- 자본이 노동을 형식적으로 포섭한 조건에서 자본은 노동력의 구체적인 사용 양상을 장악하고 사용할 수 없으며 다만 노동의 결과물만을 자신의 소유로 영유할 수 있을 뿐이다. ⇒ ‘자본에 의한 노동의 형식적포섭’ / 노동시간을 연장함으로써만 잉여가치를 확대시킬 수 있음. ‘절대적 잉여가치’

- 자본과 노동자의 계급투쟁은 처음부터 시간을 둘러싼 투쟁의 양상을 띰. 14-18세기 영국의 노동법규는 노동일을 강제로 연장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함. 톰슨(E.P. Thompson)의 말대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노동생활은 “한바탕 일하고 한바탕 노는 것의 반복”이었기 때문에 자본이 노동자의 노동과정을 완벽하게 장악할 수 없었음. 그래서 국가적 법을이용해서라도 노동시간을 확보하려고 함.

 

② 자본에 의한 노동의 실질적 포섭

- 산업혁명으로 인해 개별 노동에 고유한 기능이 기계로 이전되고, 숙련은 해체되어 기계적인 동작의 집합이 됨. 이제 자본가들은 기계의 운동을 장악함으로써 노동의 리듬을 실질적으로 장악할 수 있게 됨. ⇒ 상대적 잉여가치로의 전환, 그러나 노동시간은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으로까지 확대. 이제 반대로 노동자들이 노동시간을 제한하기 위해 법의 힘을 빌리게 됨.

-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노동자의 활동을 노동자의 의지로부터, 간단히 말해 노동을 노동자로부터 분리하려는 경향을 확인하게 됨. 노동 자체에 함축되어 있는 적대성이 펼쳐지는 중요한 양상.

 

 

2. 기계화의 세 가지 계기

 

① 육체노동의 기계화

- ‘자본에 의한 노동의 실질적 포섭’에서 나타난 ‘과학적 관리’나 그에서 연원하는 인체공학의 발전 등을 ‘육체노동의 기계화’라 부르자. 이는 다양한 육체적 동작을 역학적 수단을 통해 분석하여 표준화된 요소동작으로 분해하는 것이었다. (육체노동을 노동자로부터 분리하기)

- 1870년대경부터 미국의 도살장 등에서 사용되던 것을 포드가 전면적으로 채택하여 공장의 중심으로 끌어들인 어셈블리 라인은 개별적인 육체노동의 기계화와 다른 차원에서 분할된 노동을 결합시키는 ‘결합노동의 기계화’를 위한 시도였다는 점에서 테일러와 길브레스의 ‘과학적 관리’라는 시도와 구별되는 것.

 

② ‘정신노동의 기계화’와 ‘결합노동의 기계화’

 

a. 정신노동의 기계화

- 인공지능 개념의 사용은 컴퓨터의 발전과 결부되어 있음. 튜링은 ‘튜링-기계’ 개념을 창안했던 1930년대에 이미 컴퓨터의 본질이 아주 단순한 이론적 기계를 모델로 한다고 주장했다. 즉 통상 ‘계산’이나 ‘연산’이라고 불리는 정신적 사고과정을 7가지의 기계적 연산(테이프를 읽어라/테이프를 한 글자 왼쪽으로 옮겨라/테이프를 한 글자 오른쪽으로 옮겨라/테이프에 0을 써라/테이프에 1을 써라/다른 명령으로 넘어가라/멈추어라)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것. 나아가 그는 컴퓨터의 연산과정과 인간 두뇌의 사고과정이 본질적으로 유사하다고 주장. ⇒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으로 간주되던 정신활동 내지 정신노동이 기계화될 수 있게 됨. ⇒ 정신노동의 기계화

 

b. 결합노동의 기계화

- 어셈블리 라인이 사물들의 물리적인 흐름을 기계화함으로써 결합노동을 기계화하는 것이었다면, 전기나 전파를 통해서 수행되는 전자기적 네트워크는 소리나 문자, 정보는 물론 전기적 신호로 변형가능한 모든 비물질적인 것의 흐름을 기계화함으로써 결합노동의 범위를 비물질적인 것으로 확장.

- 컴퓨터에서 처리하기 위한 탈코드화/재코드화의 형식으로서의 디지털은 이질적인 형태의 정보를 하나로 동질화하여 일괄처리할 수 있는 표현형식을 제공. 이러한 디지털화의 과정은 모든 정신적 프로세스가 빛의 유무로 치환가능한 0과 1 두 숫자의 집합으로 초코드화(overcoding)되는 것을 뜻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정신적인 영역의 모든 이질성이 동질적인 수로 변화되는 탈코드화(decoding)를 수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디지털화된 정보는 전달된 것 그대로 다른 것들과 혼합되거나 변형되어 일괄처리 될 수 있으며, 따로 입력하거나 형태를 바꿀 필요 없이 그대로 사용될 수 있음. 이로 인해 네트워크로 연결된 모든 지점이 결합된 활동이나 결합노동을 할 수 있게 되며, 분리된 지점에서 수행하는 활동이 네트워크가 존재한다는 조건만으로 직접적으로 결합될 수 있게 됨. ⇒ 결합노동의 기계화

 

 

3. 자동화와 정보화

 

- 약간의 위험을 무릅쓰고 도식화하여 구별하자면, 자동화가 육체노동의 기계화와 정신노동의 기계화를 졉합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면, 정보화는 정신노동의 기계화와 결합노동의 기계화를 접합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a. 자동화

- 자동화는 일차적으로는 기계화된 동작에 피드백이나 재귀적 처리를 포함하는 일련의 사이버네틱 프로세스를 결합해 ‘노동자 없는 노동’을 기계로 수행하게 하는 것을 겨냥하고 있다. 전통적인 관념에서 노동이나 ‘생산적 노동’이 수행하던 역할이 기계의 작동으로, 기계의 ‘노동력’의 사용으로 이전됨. 이제 노동은 노동자의 활동이라는 정의로부터 거의 벗어나서 자본가의 손에 전적으로 장악되고 포섭됨. ⇒ 산업혁명을 통해서 진행된 육체노동의 기계화가 자본에 의해 노동이 실질적으로 포섭되는 과정을 뜻하는 것이었다면, 육체적 및 정신적활동능력 자체를 기계화함으로써 노동 없이도 활동능력 자체를 착취하는 이러한 양상은 자본에 의해 노동이 기계적으로 포섭되는 과정이라 말 할 수 있음. (‘노동의 기계적 포섭’과 ‘기계적 잉여가치’)

 

b. 정보화

- 자동화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기계적 도식을 통해 노동자의 활동능력 자체를 기계적으로 포섭하는 것이었다면, 정보화는 오히려 노동자는 물론 다양한 사람들의 활동을 그 자체로 포착하여 가공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어 저장하고 일괄처리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시킨다. 정보화를 통해 자본은 디지털화된 네트워크와의 ‘접속’을 수반하는 모든 활동을 가치화한다. 이럼으로써 자본은 굳이 노동력을 구매하지 않고서도 모든 종류의 활동 자체를 착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 정보화의 예 : 은행 창구 직원들이 하던 노동은 기계 앞에서 우리 자신이 직접 수행해야 하는 ‘비노동’으로 대체. 주문하는 활동 자체가 직접 입력하는 행위를 통해서 주문장을 만들던 이전의 노동을 대체. 이전에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활동의 산물들, 가령 그림이나 디자인, 음악, 지식 등과 같은 것들을 직접 재료로 삼아 가공하여 상품화.

- 자동화가 노동자의 고용없이 인간의 노동능력 자체를 이용/착취하는 것이라면, 정보화는 노동자의 고용 없이 인간의 사회적 활동을 이용/착취하는 것. (‘사회적 활동을 기계적 포섭’과 ‘사회적 잉여가치)

- 자동화든 정보화든 모두 노동자의 활동은 더 이상 노동력-상품으로 구매되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포섭되어 잉여가치를 생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짐.

 

 

4. 기계적 포섭의 결과들

 

- ‘기계적 포섭’이란 생산의 중심적인 프로세스를 자동화된 기계가 차지하고 ‘인간’은 그것을 그 기계적 프로세스의 입력과 출력을 담당하게 되는 이러한 변화를 의미. ‘인간’에 속한다고 생각되던 요소들이 기계의 일부가 되고 ‘인간’의 활동이 기계적 과정의 시작(입력)과 끝(출력)을 차지하게 되는 양상. 네트워크의 발전과 정보화의 진전은 이러한 입력과 출력의 지점들이 ‘공장’이라고 불리는 특정한 공간에서 탈영토화되어 사회 전체로 확장되며, 생산과 비생산은 물론 대중들의 일상적 삶 전체로 확장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

 

 

5. 기계와 잉여가치

 

- 사회적 잉여가치는 정보화된 활동의 결과나 정보화하는 기계와 접속하는 활동 자체를 착취하는 것이란 점에서 비용의 지출 없이 인간의 사회적 활동을 착취하는 것임을, 그것을 통해 노동자 내지 인간을 착취하는 것임을 표현한다. 즉 사회적 잉여가치는 정신노동 및 결합노동의 기계화에 따른 결과지만 근본적으로 그런 활동을 수행한, 혹은 수행하는 사람 자신이 생산한 것이다.

- 하지만 자동화는 사회적 잉여가치와 달리 활동이나 활동의 결과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능력 자체를 착취하는 것이기에, 노동자나 인간에 대한 착취의 형태로 진행되지 않으며, 반대로 노동자나 인간 없는 생산의 형태로 진행된다. 극한적인 형태의 자동화된 공장이란 노동자가 사라진 공장, 인간의 노동이 사라지고 기계가 스스로 상품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표상된다. ‘노동의 종말’이란 관념이 정보화와 무관한 게 아님에도, 일차적으로는 자동화라는 현상의 짝으로 표상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 자동화된 공장에서 자본은 직접적인 노동자가 아니라 이 ‘인간화된 기계’를 통해서 노동자 내지 인간의 노동능력을 착취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계적 잉여가치란 노동자가 아니라 기계가, ‘인간화된 기계’가 생산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 기계적 잉여가치의 존재는 단지 새로운 기술의 채택에 따른 초과이윤을 뜻하는 특별잉여가치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화된 기계가 생산한 것이고, 기계화된 인간의 능력을 자본이 착취하는 것이다.

- ‘기계적 잉여가치’ 개념에 대한 비판에 대한 반론 : 비판자들은 가치와 사용가치는 다른 것이고 사용가치가 증가한다 해도 개별 상품의 가치가 감소하기 때문에, 결국은 인간의 전체적인 노동시간이 변하지 않았다면 가치량은 증가한 게 아니라고 주장. 즉 기계적 잉여가치란 새로운 기술이 전반적으로 평균화됨에 따라 소멸하게 될 일시적인 특별잉여가치에 불과하다는 것. 그렇다면 자동화된 공장에서 생산하는 상품이나 개개의 자동화된 기계가 생산하는 상품은 가치는 없고 사용가치만 있는 그런 상품일까? 자동화가 전면적으로 진행될 경우 우리는 마치 식물들이 생산하는 산소를 공짜로 사용하듯이, 저 ‘인간화된 기계’들이 생산하는 상품들을 (재료값만 지불하고) 공짜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일까? (사용가치는 흘러 넘치지만 지불해야 할 가치나 잉여가치는 없는 새로운 천국?)

- 요컨대 노동의 기계적 포섭은 노동자 내지 인간의 능력 자체를 기계화함으로써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착취한다. 기계가 생산하는 잉여가치, 그것은 자본이 기계를 이용하는 방식의 한 극한이고, 자본이 노동을 노동자에게서 분리하려는 전략의 궁극적 도달점이다. 이는 자본의 한계 안에서만 유효하지만, 그것은 가치나 잉여가치라는 개념이 자본의 한계 안에서만 유효하다는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 그렇다. 그러나 인간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인간학적 관념, 근대적인 경제학의 공리는 이러한 사태를 직시하지 못하게 한다.

 

 

 

 

▶ 6장. 부르주아는 자본주의적 계급인가?

 

1. 자본주의로의 두 가지 길?

 

- 『자본』에 나타난 자본주의 발생에 관한 상이한 두 가지 서술 : I권 마지막에 서술된 자본주의 실질적 출발점이 되었던 ‘본원적 축적’은 국가적 폭력에 의한 끔찍한 횡탈로 진행된 반면, (III권에 등장하는 자본주의의 과거에 해당하는) 자본에 의한 자본의 증식을 추구했던 대부자본이나 상인자본은 대체로 자본주의를 만들어내기 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가로막는 계기들을 갖고 있었음.

- 후자의 경우 자본주의로 가지 않는 길이지 자본주의로 가는 길이 아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차라리 상인자본처럼 근대적 자본의 직접적 선행형태로 보이는 것조차 자본주의로 이행의 계기를 갖는 게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가로막는 계기로 자곧ㅇ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따라서 그 두가지 길이란 상인자본 같은 자본의 선행형태들이 포함하고 있는 두 가지 길, 두 가지 방향의 벡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야 더 적절함.

 

① 돕-스위지 논쟁

- 돕 : 자본주의의 발생을 상인자본에 결부시켰던 당시 역사학의 통념을 비판하면서, 반대로 생산자가 상인이 되는 이른바 ‘아래로부터의 길’을 통해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발생하고 발전했는가를 제시하려 함. “상인자본은 대체로 구질서의 기생충으로 그쳐버리고, 청년기가 지나면 상인자본의 의식적 역할은 혁명적이 아니라 보수적으로 된다.”

- 스위지 : 원격직 교역에 따른 영주들의 사치품 수요 증대, 그를 위한 화폐에 대한 욕구 및 과도한 착취가 봉건제 위기를 야기한 원인. 즉 봉건제의 붕괴는 자립적으로 성장한 소생산자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봉건제에 속한다고는 할 수 없는 원격지 교역에 기인하는 것.

- 상인자본의 존재 자체가 자본주의로 나아갈 수도 있고 그것을 저지할 수도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두 가지 길은 역사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이행의 두 가지 유형’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본과 자본주의 사이에 손쉬운 화살표를 긋는 통념에대해 경종을 울리는 것.

 

 

2. 도시와 자본주의

 

- 부르주아지는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들이 영주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도망쳐 획득한 것이 ‘자치도시(Commune)’였다. 이러한 도시나 도시동맹체들의 발전은 일차적으로 상업의 발전을, 그리고 그에 따른 화폐자본의 축적을 의미한다. 그러나 상인자본은 자본주의 발전의 전제조건을 형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개는 길드(guild)라는 동업조합으로 표상되는 특권들을 통해서 자본주의 발전을 방해하고 저지했다. 왜냐하면 “상인자본에게 황금의 기회를 제공한 것은 바로 시장의 미발달” 이었고, 자신들이 교역을 독점함으로써 발생하는 초과이윤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교역 내지 상업이 도시 외부로 확장되는 것을, 도시 외부에서 시장이 발전하는 것을 극력 저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시는 자본주의 발생과 발전에 필요한 상업의 발전, 화폐자본 축적을 야기했지만 결코 자본주의를 만들어내지 못했고, 반대로 자본주의의 발달을 극력 저지하고 시장의 확산을 가로막았던 것.

-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적 시장이나 생산을 오직 도시라는 특권적 영토 안에만 제한함으로써, 자본주의의 확산과 발전을 저지하고 방해했다는 점에서, ‘도시적 길’은 자본주의 이행의 길이었다기보다는 그것을 도시 안에 가둠으로써 그것을 저지하고 가로막은 길이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 이는 상업적 도시 부르주아지뿐만 아니라 수공업자나 매뉴팩처러 등의 생산자 부르주아지에게도 해당되는 지점. 생산자 부르주아지의 맹아적 성장을 강조하는 돕의 경우에도 수공업자조합이 상업부르주아의 손에 장악되는 식으로, 수공업자가 상인에게 완전히 종속되는 경우나 아니면 수공업자 자신이 상인귀족화되는 경우가 많았음을 보여준다.

- 결론 : 도시의 시민이란 의미에서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적 계급이 아니라고 말해야하며, 자본주의는 도시에서 탄생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한다.

 

 

3. 자본주의와 영토국가

 

- 질문 : 소생산자는 자본가계급이 될 수 있을까?

- 소생산자의 독립성은 상인들에 대한 독립성일 뿐만 아니라 상품 자체에 대한 독립성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 독립성으로 인해 시장에 크게 의존하지 않으며, 또한 상품시장의 흐름을 형성하는 구매력을 형성하지도 않는다. 또 소생산자가 만들어내는 시장은, 바로 그들의 ‘독립성’으로 인하여 자신이 소비하고 남은 여분을 교환하는 지극히 제한된 시장일 뿐이다. 나아가 상품화된 시장이 소생산자들의 농촌 세계에까지 깊숙이 침투하기 전은 물론 그 후에도 시장에 대해 ‘독립성’을 가지며, 따라서 시장에 잘 편입되지 않는다. 즉 소생산자가 자본가가 되는 것은 ‘이미’ 자본주의의 존재를 전제한다. 요컨대 상인이 자본주의화를 예견하면서 저지한다면, 소생산은 자본주의화를 밀고 나가기에는 너무도 ‘독립적’이다. 그래서 맑스는 자본주의 출발점을 이루는 이른바 ‘본원적 축적’은, 돕의 생각과 반대로 소상품생산의 대대적인파괴를 수반한다고 썼던 것이다.

- 결국 중요한 것은 소생산자가 상인이 되기 위해서는 상업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도시의 통제를 넘어서 시장이 농촌으로 확장되어야 하고 지방으로, 전국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도시의 상인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와는 다른 이유에서 소생산자로서도 결코 수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 여기서 우리는 도시동맹체나 도시국가와 대비되는 영토적 국가의 존재를, 혹은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절대주의(절대왕정)에 주목해야 한다. 도시의 특권과 도시적 교역의 제약을 넘어서 국가적 영토 안에 그것을 통합하고, 봉건적 귀족의 영토와 권력을 넘어서 절대군주의 단일한 권력 아래 그것을 통합하고, 영토 내부의 흩어진 지역들을 잇는 도로망을 건설함으로써 국지적 시장을 지방적인시장으로, 나아가 전국적인 시장으로 통합하는 것. 이는 바로 절대주의 국가의 가장 중심적인 과제에 속한다.

- 이러한 영토적 내지 영토국가적 통합은 도시의 힘과 권력이 강성한 경우에는 거의 불가능했다. 절대주의 국가가 유럽에서 도시의 힘이 취약한 지대였던 서유럽,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강력하게 발전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 영토국가는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느리게 성장해 옴. 그렇게 느리게 성장한 것은 도시에 비해 훨씬 광대한 영토 안에서 정치적, 경제적인 통합능력을 형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전국시장이 완수되려면 농업, 상업, 수송업, 공업 사이에, 또 수요와 공급 사이에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영국이 마침내 이런 균형에 도달하자 네덜란드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경쟁자가 되었다.”(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III』)

 

 

4. 자본주의와 절대주의

 

- 절대주의 왕정의 관료들에 의해 시행되었던 중상주의는 정확하게 전국적 시장의 창출과 영토국가적 통합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중상주의는 “국지적 교역과 자치도시 교역의 케케묵은 텃세를 깨부수어 도시간, 지방간의 구별뿐만 아니라 도시와 농촌의 구별도 점차 무시하는 전국시장으로의 길을 열었다.”(칼 폴라니, 『거대한 변환』)

- 자본주의를 향한 ‘아래로부터의 길’이 유효화되기 위한 조건이 전국적 시장이었다면, 그리하여 생산자가 상품생산을 위해 생산하는 ‘상인’이 되기 위한 조건이 전국적 시장의 g여성이었다면, 이는 단일한 중심으로 통합된 영토적 국가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었고, 바로 그것이 절대주의가 직접적인 목표로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고. 자본주의는 나중에 ‘국민국가’라고 불리는 그런 영토적 국가를 통해서 비로소 사회적인범주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되었으며, 따라서 자본에는 국경이 없을지 모르지만 자본주의에는 국경이 있다고. 아니, 자본주의는, 그것이 비록 식민지의착취와 수탈, 세계경제의 발전을 실존의 조건으로 하며, 그것을 통해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영토국가를 통해 형성된 국경을 통해 존재할 수 있었고, 국경을 단위로 작동하고 ‘발전’한다고.

 

 

5. 누가 부르주아지가 되었나?

 

- (다시 강조하자면,) 소생산자의 분해를 통해서 한편은자보가로 성장하고 양적으로 대다수인 다른 한편은 노동자가 되었다는 식의 내적 발전의 도식이 순전한 ‘신화’라는 사실. 소생산의 분해는 이미 국내시장의 형성을,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미 충분히 성장한 자본가계급을 전제로 한다.

- 인클로저나 교회재산의 몰수, 공유지 횡령 등을 비롯하여 이른바 ‘본원적 축적’을 구성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거대한 ‘본원적 자본’을 형성한 사람들은 어떤 계급인가? 그렇게 거대한 재산을 집적한 사람들은 무엇보다 우선 자본가계급이 되었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 (책에서 소개된 몇 가지 사례들을 보면) 영국에서 젠틀맨이라고 불리던 귀족 출신의 대지주들이 16세기 미래 소위 ‘본원적 축적’을 통해 자본가계급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그들이 귀족이라는 사실은, 다시 말해 왕의 권한에 속하던 국가적 독점의 특권들에 가장 먼저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계급이라는 사실은, 이들이 자본가가 될 수 없는 이유가 아니라 정반대로 이들이야말로 가장 쉽게 자본가가 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반대로 상인이나 무역업자들처럼 국가적 독점권을 할당받거나 국가의 허가와 원조를 필요로 했던 층은 말할 것도 없고, 제조업자들 또한, 영토국가 자체의 성격과 밀접히 결부된 국가적 독점에 접근해야 했다. 이를 위해 자신들의 조합에 젠틀맨을 끌어들이고 그들의 힘을 빌리고자 했지만, 이는 그들에게 조합 자체의 중요한 이권을 내주는 결과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조건에서 제조업자나 상인이나, 자본가들은 어떤 식으로든 귀족의 일부가 되거나 국가권력 안에 들어가려 했고, 이를 위해 자신들이 번 돈을 사용해서 매수하고 매직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 따라서 지주나 귀족과 자본가를 그 출신성분이 다르다는 이유로 본질적으로 다른 계급으로 구별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자본가들이 도시 체제 안에서 하나의 계급으로 통합되어 간다면, 지주나 귀족들은 절대왕정의 영토국가 안에서 국가적 독점을 축으로 하나의 계급으로 통합되어 간다.

 

 

6. 국가와 부르주아지

 

- 우리는 그 탄생기에서나 아니면 ‘정상적인’ 시기에서나 국가야말로 다양한 출신을 갖는 부르주아적 층들을 하나의 계급으로 묶고 그것에 동질성을 부여하는 장치라고 말해야 한다. 이미 우리는 본원적 축적 과정에서 봉건영주, 지주, 상인, 제조업자, 수공업자, 대규모 차지농 등의 이질적인 층들이 국가권력이라는 축으로 모여들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의 계급이 된다는 것을 충분히 보지 않았던가? 따라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국가를 통해서만 부르주아지는 하나의 동질적 계급이 된다고.

 

 

 

 

▶ 7장. 계급과 비-계급의 계급투쟁

 

(...)

 

2. 자본주의 공리계와 계급

 

- 자본주의에 이르면 법은 이제 원칙적으로는 모든 경우에 해당되며 모든 사람들에 대해 동일하게 적용되는 보편적 형식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법이 관련된 사항들 전체에 동등하고 동일하게 적용되는 최소한의보편규칙이고, 개별적인 경우들이 그것에 기초해야 하는 그런 최상위규칙이란 의미에서 ‘공리적’이란 것이다.

- 이러한 자본주의 공리계에는 그 공리들을 따르는 오직하나의 계급만이 존재한다. 즉 가치법칙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계급, 시장의 법칙을 유일한 행동원리로 삼는 계급, 그러한 가치법칙을 자신의 행동 법칙으로 삼고, 그것이 함축하는 경제적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삼는 하나의 계급. 이를 위리는 부르주아지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 공리계 안에서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피지배계급, 오직 하나의 노예계급만이 존재할 뿐이다. (...) 부르주아지란 일반화된 노예계급이다. 부르주아지는 부를 지배하는 계급이 아니라 증식을 목표로 하는 자본의 논리에 지배되는 계급, 자본의 공리에 복종하는 노예계급이다. 공리계의 공리에 복종하는 계급, 자본주의 공리계는 오직 이런 하나의 계급만을 요구하며 그런 하나의 계급만을 생산한다.

- 계급은 오직 하난 존재하며, 그 계급의 보편성은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정의의 보편성이다. 예를 들어 흔히 말하듯이 자본가에게 고용된 관리자는 피고용자이지만 기능상 자본의 기능을 수행하는 존재란 점에서 ‘기능적 자본가’고 부르주아지의 일부다. 소득수준의 차이나 직업의 차이는 이 경우 또 다른 계급을 구성하는 이유가 전혀 되지 않는다.

 

 

3. 부르주아지: 보편적 계급

 

- 부르주아지를 단순하게 지주나 귀족들과 다른 출신의 어떤 집단으로 상정하는 통념, 그리하여 근대적 합리성과 진보성을 표상하는 그런 신화적 통념에서 벗어나서 본다면, 부르주아지는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부의 증식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이용하여 생산 내지 경영에 참여하는 아주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만들어진다.

- 부르주아지가 된다는 것은 그 출신이나 규모와 무관하게 영지나 토지 혹은 다른 재산을 이용해서 재산을 증식하고 화폐를 이용하여 화폐를 증식시키는 활동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은 공리적 보편성을 갖게 된 그 규정성을 획득하는 것에 의해, 그 규정성에 부합하는 순간 누구든 부르주아지가 되고, 그의 과거는 눈부신 화폐의 빛 아래 지워지고 사라지며 하나의 동일한 계급으로, 보편적인 계급으로 동질화된다.

- 그런데 부르주아지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가 제공하는 이권이나 특권에 접근할 수 있어야 했고, 그런 점에서 또 다른 의미의 ‘정치적 신분’이 되거나 거기에 줄을 대야 했다. 17세기 영국 공장들이 주로 귀족적 이권 소유자에게 장악되어 국왕으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았던 것이 그런 예이다. 뿐만 아니라 국가적 독점권을 할당받아야 했던 상인들이나 무역업자는 물론 제조업자들도 영토국가의 독점적 권력에 접근해야 했다. 이를 위해 자신들의 조합에 젠틀맨층을 끌어들이고 그들의 힘을 빌리고자 했지만, 이는 그들에게 조합 자체의 중요한 이권을 내주는 결과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조건에서 제조업자나 상인, 자본가들은 어떤 식으로든 귀족의 일부가 되거나 국가권력 안에 들어가려 했고, 이를 위해 자신들이 번 돈을 사용해서 매수하고 매직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 이런 점에서 부르주아지의 보편성은 누구에게나 적용가능한 규정이란 의미를 넘어서, 자신의 개별적 내지 특수적 이해를 국가를 통해 ‘보편적 이익’으로 변환시키는 능력을 요구했던 셈이다.

 

 

4. 프롤레타리아트: 비-계급

 

① 비-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

-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 혹은 근대 사회에는 오직 부르주아지만이 존재하는가?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 부르주아지라는 하나의 계급만 존재한다는 것이 그 세계에 부르주아만 존재함을 뜻하는 건 아니다. 자본의 공리 혹은 부르주아지를 구성하는 가치법칙의 공리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 복속되어야 할 부르주아를 갖지 않는 사람들, 혹은 고용되었지만 그들의 의지에서 벗어나는 사람들... 이들 모두는 부르주아지와 동일한 외연을 갖는 저 보편적 계급에 속하지 않는다.

- 자본의 ‘본원적 축적과정’이란 무엇보다도 생산수단으로부터 생산자를 분리하여 프롤레타리아트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기존의 신분적인 규정이나 경제적인 규정을 상실하여 비-신분이 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의 공리나 부르주아지를 정의해주는 어떤 규정성도 획득하지 못한 상태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란 이처럼 토지로부터 분리됨으로써 부랑자가 되어 사회를 떠돌거나, 걸식하는 거지가 되거나, 날품을 팔며 하루하루 생계를 잇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람들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즉 프롤레타리아트는 하나의 적극적 규정에 의해 ‘계급’으로 정의 될 수 있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 맑스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한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1843)에서는 이 개념을 정확하게 계급이 아닌 ‘계급’이란 의미에서 ‘비-계급’으로 규정한다. “철저하게 속박되어 있는 한 계급, 시민사회의 계급이면서도 시민사회의 어떤 계급도 아닌 한 계급, 모든 신분들의 해체를 추구하는 한 신분”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것이다. 즉 그들은 “사회적 궁핍에 의해 기계적으로 몰락한 사람들이 아니라 [즉 주어진 규정 안에서 궁핍으로 몰락한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의 급격한 해체 [즉 사회적 규정성의 급격한 해체]를 통해 특히 중간계층의 해체로부터 출현한 사람들”이다.

-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는 특정한 요구, 특정한 이해관계를 갖는 계급이 아니지만, 어떤 의미에서도 ‘보편적 계급’이 아니다. 계급 자체의 해소를 제외하곤 어떤 보편적 요구, 보편적 이해관계를 갖는 계급이 아니기 때문이다.

- 물론 이 개념은 이후 ‘임노동자계급’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지만, 그 경우에도 분석의 맥락은 노동자계급 내지 임노동자계급이 자본의 운동과 관련된 경제적 관계를 서술하는 경우에 주로 사용된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인 관점에서 혁명이나 운동에 대해 말하는 경우에 주로 사용된다. 이런 이유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학적 저작인 『자본』에 ‘노동자계급’이란 말은 빈번히 등장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말은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 요컨대 부르주아지가 된다는 것이 출신이나 방법이 무엇이든 어떤 보편적 규정성을 획득하는 것에 의해, 그 규정성에 동일화되는 것에 의해 이루어지다면, 프롤레타리아트가 된다는 것은 그와 반대로 출신이나 방법이 무엇이든 기존의 지위를 유지하던 규정성을 상실하는 것에 의해 이루어진다.

 

② 프롤레타리아트와 소수자

- 부르주아지가 주어진 규정의 획득에 의해 정의된다는 점에서 다수적/주류적(major) 집단이요 다수자(majority)라면, 프롤레타리아트는 규정의 부재, 척도의 부재, 혹은 수많은이질적 규정의 혼합으로 특징지어지는 존재란 점에서 소수적(minor) 집단이요 소수자(minority)다. 다수자란 어떤 사회에서 지배적인 척도를 점유한 자들이고, 그것의 지배적인 규정에 따라 사는 자들이다. 반면 소수자란 그 척도에서 벗어난 자들, 척도의 규정과 지배에서 배제되거나 벗어난 자들이다. 정확하게 이런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근대 사회에서 부르주아지가 산출하는 모든 소수자들의 집합이다.

- 이런 의미에서 ‘비-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는 하나의 거대한 ‘계급’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이질적인 성분들의 흐름으로서 ‘대중’이라고 해야 한다. 계급적 제한에서 벗어난 다양한 집단들이 모이고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흐름, 정해진 규정이 없기에 미리 흘러갈 정해진 방향도 없으며, 길이 난 대로 흘러가지만 샛길로 빠지거나 패인 둑을 흘러넘치면서 새로운 길을 만드는 흐름.

- 이런 점에서 정말 노동자도, 아니 무엇보다 우선 노동자야말로 프롤레타리아가 되어야(devenir-proletariat) 한다. 자본에 포섭되어 노동하는 존재, 가변자본의 형태로 ‘계급’에 포섭된 존재에서, 자본의 척도를 벗어나고 계급적 안정성의 부르주아적 환상에서 벗어나, 자본의 지배, 자본의 포섭에 대항하는 비-계급화 내지 반-계급화의 선을 그려야 한다. 나아가 프롤레타리아 역시 프롤레타리아-되기를 해야 한다. 단순한 비-계급적 상태에 머문 조재로서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그리고 그 상태에서 자본의 손길을 기다리며 다시 계급적 자리를 꿈꾸는 ‘열등한 계급’ 내지 ‘버림받은 계급’이 아니라, 자본의 요구를 자신의 욕망으로 삼길 거부하고 자본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길 거부하며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활동방식을 창안하는 프롤레타리아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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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생활보장법 개정 요구 인증샷!!

끝내 얼굴을 드러내길 거부했던 지똥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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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질 책읽기 모임에서 처음 만났지만 흔쾌히 인증샷을 찍어주신 애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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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질의 영원한 지킴이, 은종복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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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풀무질 책읽기 모임에서 처음 만난, 짐 캐리를 닮으신 송충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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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면 스타일로 인증샷을 찍어주신 장호님!! (풀무질 책읽기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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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쾌히 전장연 CMS후원서까지 써주신 멋진 구슬아님!! (풀무질 책읽기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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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에서 노동으로 - 노동중심적 복지국가의 비판적 이해』, 김종일 (일신사, 2001)

 

□ 37-40쪽

 

1) 실업의 원인 : 공급부문(즉, 실업자 자신)에서 실업문제의 원인을 찾으려 함. 그래서 노동유인, 고용가능성을 높이는 것을 주요 과제로 함. 비판자들은 이를 본질적으로 희생자를 비난하는 격(blaming the victim)이라고 지적. 실업자를 만들어낸 사회경제적 구조를 그대로 둔 채 그 피해자의 행태를 교정하는 일에 정책의 초점을 맞추는 태도라는 것. 유럽의 사회운동가들은 고용가능성과 같은 편향적인 개념 자체를 거부하고 대안으로 실업자 개개인의 역량강화(empowerment)를 내세운다. 여기서 역량강화란 자신의 상황을 주체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실업자의 개인적 그리고 집합적 능력의 제고를 가리킨다.

==> 이러한 분석은 뒤에서 영미식 노동중심적 복지국가의 특징인 ‘노동력 부착 전략’을 비판하고, 덴마크식 ‘인적자본개발 전략’을 높이 평가하는 밑바탕이 되는데, 그러나 과연 이 두 전략이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전자가 노동자 개인을 ‘비난’하는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편승하여 노동자를 처벌적 성격의 노동시장으로 밀어넣는다는 점에서 후자와는 비교되는 비판의 지점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나, 인적자본개발이 고용가능성 증진이라는 노동중심적 복지국가의 본질적 결함과 거리가 멀다 할 수 없다. 노동자의 역량강화, 인적자본개발이라는 논리가 전적으로 노동자 개인의 사회적 욕구를 발현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으로의 재투입이라는 관점하에서 추동되는 것이라면,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저자는 두 가지 전략이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 그의 분석에서도 (특히 네덜란드의 경우) 두 가지 전략이 혼재되는 양상이 드러나고 있다. 멀리 볼 것 없이 우리나라에서도 노동력 부착 전략(이를테면 공공근로사업)과 인적자본개발전략(각종 평생교육사업이나 고용보험상의 실업자 교육훈련과정 등)이 병행하여 제도화되어 있다. 그런 한국적 상황을 영미식에 가깝냐, 덴마크식에 가깝냐를 구분할 수 있을까? 사회적 여론의 분위기, 즉 복지수급자를 비난하는 풍토만 놓고본다면 영미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한국내에서 ‘노동중심적 복지국가’적인 제도의 작동 방식을 놓고 본다면 딱히 그렇게 말 할 수도 없는 것이다.

 

2) 노동연계의 타당성 : 노동연계정책이 수급자의 도덕성을 논란의 대상으로 삼아 시민의 기본적 복지권을 훼손한다. 수급의 전제조건인 노동의무는 사실상의 강제노동으로, 이러한 시도를 방치할 경우 이 제도는 언젠가 또 하나의 구빈법이 되고 말 것이라고 지적. 정녕 복지수급자의 근로경험이 중요하다면, 왜 이들을 정상적인 고용계약을 통해 지역사회 서비스를 담당하도록 하지 못하는가? 또한 수급자들이 의무적으로 행하는 노동에 사회적 낙인이 가해져서, 해당 직업에 종사하는 일반 노동자는 물론 그러한 일 자체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3) 사회정책의 적극성과 소극성 : 복지급여가 수급자의 삶에 이바지하는 ‘적극적’ 기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됨. 거의 모든나라에서 복지급여는 최소한의 생계비를 넘지 않는다. 이 생계비에 의지해서 수급자들은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기 위한 제반 활동을 수행할 수 있다. 이들을 마치 복지급여라는 아편에 중독된 사람으로 간주하는 사회 일각의 태도는 분명 잘못된 것.

 

 

□ 51쪽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의 필요성이 복지국가 전반에 걸쳐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문제는 어떠한 성격의 ‘적극성’인가에 관한 것이다. 작금의 추세는 국가의 적극성이 노동시장의 공급 측면에 집중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서방 복지국가 전체가 온통 ‘고용가능성’이라는 개념에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을 증명해준다. 이 개념은 고용주의 입장에서 나온 말이다. 일자리는 넉넉하다는 전제 아래, 고용주가 ‘채용할 만한’ 사람이 못되는 원인을 해당 실업자에게서 찾아내어 그것을 제거하는 제반 조치를 취하는 것이 바로 고용가능성을 높이는 정책이다. 바야흐로 노동시장 바깥에서 연명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재상품화가 (시장이 아니라) 국가주도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 59쪽

 

(사민주의 복지국가의) 가장 심각한 모순은 시장기제에 대한 이중적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보편적 사회복지를 통한 탈상품화 전략과 시장의 효율성을 통한 경제성장은 서로 충돌하는 목표였다. 특히, 경제가 어려워질 때 양자의 모순은 더욱 두드러지기 마련이다. 모순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일부 사민주의 복지국가가 채택한 전략은 노동시장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통하여 성장의 잠재력을 키워나가는 정책이었다.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대부분의 서구 복지국가가 ‘소극적 노동시장정책’을 펼치고 있을 때, 스웨덴을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복지국가들은 노동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완전고용의 실현과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이들의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은 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복지에서 노동으로’정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후자가 공공부조의 개혁이라는 목적 아래 추진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전자는 노동자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프로그램이다.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은 또한 노동시장의 공급 측면은 물론 수요 측면에도 개입한다는 점에서 후자와 구별된다. 믹국과 영국에서 시행중인 ‘복지에서 노동으로’ 정책의 경우 노동자의 교육, 훈련과 같은 노동공급 측면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활발하지만, 고용창출이나 임금 보조 등의 노동수요 측면은 거의 전적으로 시장논리에 맡기고 있다.

 

 

□ 89쪽 (1996년 미국 복지개혁의 주요 내용)

 

첫째, AFDC를 폐지하고 한시적 구호제도인 TANF로 대체한다. TANF의 수급자에게는 엄격한 근로의무가 주어진다. TANF의 수급기간은 평생 60개월을 초과할 수 없다.

둘째, 공공부조에 관한 모든 권한과 책임을 주 정부에 넘긴다. 과거에 시행하던 JOBS와 연방정부의 대응보조금(matching fund)을 폐지하는 대신에, TANF의 소요예산은 전액 연방정부의 포괄적 교부금(block grant)을 통해 지급한다. 각 주와 지방 정부는 이 돈을 원하는 방식대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다. 새로운 제도에 따르면, 연방정부의 포괄적 교부금은 각 주의 1994년 지출 수준을 기준으로 책정되었고 이 액수는 2002년까지 변동이 없다. 이와 같은 방식의 지원은 주 정부지출액의 네 배를 무제한 지급하던 과거에 비해 주 정부의 빈민지원재정을 크게 압박할 것이라는 우려가 많다. 의회는 이러한 우려를 고려해서 1997년에 포괄 교부금과 별도로 주 정부의 노동중심적 복지개혁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위한 특별예산을 마련하였다. 30억 달러의 이 지원금은 TANF 수급자 가운데 취업능력이 가장 뒤떨어지는 집단을 위해 연방 노동부에 의해 시행되었는데, 이것은 이 돈의 사용 목적이 소득지원이 아니라 노동지원임을 명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TANF에 관한 업무가 각 주로 이관되었다고 해서 연방정부가 감독권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아직도 연방정부는 몇 가지 원칙과 기준을 통해 주 정부를 규제할 수 있다. 예컨대, 2002년까지 모든 주는 수급자의 50% 이상을 근로활동에 참여시켜야 한다.

 

 

□ 미국, 영국, 덴마크, 네덜란드에서의 노동중심적 복지국가 정책의 비교 분석

 

지금까지 논의된 복지의존에 관한 담론은 다음 세 가지 관점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는 이데올로기적 관점으로 복지 자체에 대한 부정, 나아가 복지의존의 원인인 빈곤에 대한 개인적/문화적 인식에 입각한 것이다. 요컨대 빈곤은 개인의 결함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이들의 복지의존을 방치하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라는 시각이다. 미국사회를 지배하는 관점이며, 최근에는 영국에서도 그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둘째는 사회적 배제, 포함이라는 관점이다. 복지의존이 길어지면 복지수급자들이 사회로부터 소외·배제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복지의존의 예방에 힘써야 된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덴마크 사회의 일반적인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복지의존을 주로 경제 현실의 입장에서 다루는 관점이 있다. 이것은 복지의존이 가져올 경제적, 재정적 부담에 일차적인 관심을 갖는다. 네덜란드의 활성화 정책에서 이러한 관점이 드러난다. (191쪽)

 

노동중심적 복지정책이 대상은 미국을 제외하면 대체로 청소년에 집중되고 있다. 영국의 뉴딜은 청소년 뉴딜이 핵심이고 네덜란드의 구직자 고용법도 기본적으로 청소년을 겨냥한 것이다. 덴마크의 활성화 정책 역시 청소년에 대한 관심과 비중이 매우 높다고 하겠다. (...) 대체로 유럽 국가들의 활성화 정책이 청소년 실업자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이유는, 이들의 실업률이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장기 실업의 늪에 빠질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EU에서도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청소년 실업을 예방하기 위한 각종 조치를 회원국에 권고하고 있다.

이와 달리 믹구의 노동중심적 복지정책은 사회부조에 의존하는 편부모를 대상을 삼아왔다. 아니, 미국의 복지개혁 자체가 바로 이들의 ‘문제’로 인해 촉발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미국의 복지 개혁 역사가 공공부조 개혁의 역사이고, 공공부조 수급 대상자는 대부분 편부모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공공부조에 의지하는 편부모들이 미국 복지개혁의 핵이라는 사실보다 미국 복지국가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없다.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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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中

날씨는 대체로 맑았지만 추웠다. 한낮에는 가끔 해가 환하게 빛나기도 했다. 그러나 늘 추웠다. 산기슭 여기저기에 부리처럼 생긴 야생 크로커스의 녹색 열매가 보이기도 했고, 붓꽃이 머리를 내밀기도 했다. 분명 봄은 오고 있었다. 그러나 느리게 왔다. 밤은 평소보다 추웠다. 새벽에 경계 근무를 끝내면, 취사실에서 불을 때고 남은 것을 긁어모아 발갛고 뜨거운 깜부기불 앞에 서 있곤 했다. 군화에는 좋지 않았지만 발을 녹일 수 있어 좋았다. 때로는 봉우리들 사이로 동트는 것을 보기 위해,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서 빠져나오는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산을 싫어한다. 좋은 위치에서 바라다보이는 아름다운 산들조차 싫다. 그러나 이따금 우리 뒤편 봉우리들 뒤로 동이 트면서 가느다란 황금색 빛줄기들이 검처럼 어둠을 가르고, 이어 빛이 밝아지면서 가없이 펼쳐진 구름 바다가 붉게 물들 때, 그 광경은 설사 밤을 꼬박 새고 난 뒤 무릎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이 없고 앞으로 세 시간은 아무것도 못 먹는다는 생각에 마음이 우울해질 때라도, 한번 지켜볼 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이 짧은 전쟁 기간 동안에, 인생의 나머지 기간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이 일출을 보았다. 바라건대는, 앞으로 살아야 할 세월 동안 보아야 할 것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이 본 것이면 좋겠다. (57쪽)

 


흔히 제창되는 구호 가운데 <전쟁이 먼저고, 혁명은 나중이다>라는 것이 있었다. 물론 일반적인 통일사회당 의용군은 그 구호를 진심으로 믿었다. 정말로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에 혁명을 계속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구호는 눈속임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좀더 적당한 때가 올 때까지 스페인 혁명을 미루자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혁명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시간이 갈수록 분명해졌다. 노동자들은 점점 권력을 빼앗겼다. 온갖 부류의 혁명가들이 점점 더 많이 투옥되었다. 모든 행동이 군사적 필요라는 명목하에 이루어졌다. 손쉽게 써먹을 수 있는 핑계였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우월한 지위로부터 점차 물러나게 되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났을 때, 자본주의의 재도입에 저항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이게 될 터였다. 나는 일반 공산주의자들에게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마드리드 주위에서 영웅적으로 죽어간 수천 명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무슨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 정책의 방향을 잡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 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92쪽)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후방에 적대적인 주민이 있을 경우에는 이들의 통신 시설을 지키고 파업을 진압하는 등의 일을 해야만 전방의 군대도 유지할 수가 있다. 따라서 프랑코의 후방에서는 이렇다 할 저항 운동이 없었다는 말이 된다. 프랑코의 영토 내에 있는 인민, 적어도 도시 노동자와 가난한 농민들이 프랑코를 좋아했다거나 그를 원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인민전선 정부가 계속 우익 쪽으로 움직여가면서 정부의 우월성은 점점 빛을 잃었다. 이런 점을 결정적으로 보여준 것이 모로코 사건이다. 모로코에서는 왜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프랑코는 악명 높은 독재를 수립하려 했다. 그런데 무어인들은 실제로 인민전선 정부보다 프랑코를 더 좋아했다! 명백한 사실은 모로코에서는 반란을 선동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전쟁에 혁명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어인들에게 인민전선 정부의 선의를 보여주기 위한 우선적인 조치는 바로 모로코의 해방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랬더라면 프랑스인들이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이 간다! 그러나 인민전선 정부는 프랑스와 영국을 회유하려는 헛된 희망때문에 전쟁에서 가장 좋은 전략적 기회를 날려보내고 말았다. 공산주의 정책의 전쳊덕 경향은 이 전쟁을 평범하고 비혁명적인 전쟁으로 축소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전쟁에서는 인민전선 정부가 극도로 불리했다. 그런 종류의 전쟁은 기계적 수단, 즉 궁극적으로 무제한의 무기 공급에 의해서만 승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의 주된 무기 지원국인 소련은 이탈리아나 독일과 비교해 볼 때 지리적으로 매우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어쩌면 통일노동자당과 무정부주의자들이 내건 <전쟁과 혁명은 분리할 수 없다>라는 구호가 언뜻 보기보다 덜 환상적이었는지도 모른다. (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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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현배려.

 

 

소중한 이가 떠났다.
사실 내게 그가 그렇게 소중했던 이였는지 잘 몰랐다. 그런데 오늘 아침 돌아서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목이 매여오는걸 보니 그가 내게 얼마나 큰 무게를 남긴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군대를 가기 전 1년 반동안 그 조그만 학교에서, 겨우 3-4명이서 이것저것 해보겠다고 참 아옹다옹거리면서 많이 웃고 싸우고 또 즐거웠는데... 얼마 전 제대하고 나서도, 그때와 같은 설렘은 없을지 모르지만 다시 그런 마음으로 돌아가 너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었는데...

 

가끔 문득문득 그 때 그 무리들이 다시 모여서 인천 계산동 골목을 돌아다니는 꿈도 꾸곤 했는데, 이제 너가 없으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다 허망해지고 말았구나.

 

내가 조만간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 너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많은 얘기 나누고 싶었는데, 너는 너만 혼자 사랑하는 하나님 곁으로 떠났구나...

 

그런 너가 너무 야속하지만, 내가 야속해하는 만큼 너의 세상에서 행복하렴. 그리고 그 곳에선 다신 아프지 마. 그렇게 아프도록 너 자신도 모를만큼 속으로 썩고 있지도 말고.

 

안녕, 너무 빨리 나의 추억이 되고 만 소중한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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