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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했습니다.

지난 1월8일에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식에 와주신, 그리고 부득이한 사정으로 오지 못했더라도 축하의 마음을 담아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사회진보연대 회원이기도 하고 전국보육노조 인천지부에서 일하는 박지영 동지와 식을 올렸습니다. 결혼식 다음날 신혼여행도 다녀왔습니다. 환상적이고 행복한 경험들이었는데 아마도 박지영 동지 덕분이겠죠. ^^;

 

결혼을 하기로 결정하고서, 이런저런 준비를 하면서도 정작 우리 결혼은 어떤 의미를 가져야하는지 깊이 토론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혼으로 구성하게 되는 가족이라는 것이 가지는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떤 실천을 해야할지 모호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추상적으로 가지는 원칙은 있었지만 그것이 정작 우리 자신들의 문제가 될 때에는 더 진지하고 책임감있는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도 결혼을 준비하면서 깨달아갔죠.

 

이런 고민을 더 하게 된 계기는 '결혼식'을 어떻게 할 것인지, 그 속에서 어떤 의미와 약속을 담을 것인지를 의논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정작 결혼식 자체에서 그것이 어떻게 녹아났을 지 평가는 나름대로 가능하겠지만, 고민의 계기는 분명히 된 것같습니다. (역시 물질적 계기, '사건'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군요.)

 

특히 그런 고민이 집중된 것은 성혼선언 혹은 결혼에 대한 약속을 어떤 내용으로 구성할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인권의 정치와 성적차이](공감, 2003)에 실렸던 올랭프 드 구즈의 [여성의 권리와 여성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 중 "남성과 여성의 사회계약의 형식"을 참고하기로 하고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와 ----, 우리 둘은 우리 자신의 의지에 따라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또 우리가 서로 좋아하는 동안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결합한다. 우리는 우리의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동시에 우리의 아이들과 우리가 특히 좋아하는 이들[예컨테 입양한 아이들]에게 그것을 물려줄 권리를 각자 유보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 우리는 우리의 재산이 우리의 아이들에게 그들이 누구의 소생이든 무관하게 직접적으로 귀속된다는 것과 아이들 모두가 아무런 차별없이 그들을 자신들의 아이들로 확인하는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의 이름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을 서로 인정한다. 우리는 자신의 아이들을 유기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을 준수할 것이다. 생전에 이별할 경우 우리는 법에 의해 우리의 아이들의 몫으로 정해진 부분을 공제하고 나머지 재산을 분할할 것이다. 사별할 경우 죽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몫을 자신의 아이들에게 물려줄 것이며, 아이들이 없을 경우 죽어가는 사람이 그것을 자신이 원하는 사람에게 물려주지 않는다면 산 사람이 그것을 물려받을 권리를 갖는다.

... 이런 우정어린 결합의 유대가 처음에는 무질서를 초래할 지 몰라도, 그러나 그 결과로 완전한 조화가 마침내 생산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용자체가 시대적 조건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대에 그대로 사용하기에는 난감한 내용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다시 구성해보기로 했습니다. 나름대로 고민을 담으려고 하고 몇몇 선배들의 조언도 받았습니다. 그렇게 구성한 '결혼에 대한 약속'을 결혼식에서 낭독했습니다.

 

박지영와 박준형, 우리 둘은 우리 자신의 의지에 따라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또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동안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결합합니다. 우리의 우정어린 결합의 유대에서 서로는 고유한 성적 차이를 존중하고 그러한 차이에 근거한 각자의 권리를 갖습니다. 이에 따라 둘은 결혼으로 구성하는 가족의 성격과 각자가 속한 공동체의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할 의무를 서로에게 가집니다. 임신여부와 그 회수를 선택할 시민적 권리는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여성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고유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재산을 소득에 상관없이 공동으로 소유합니다. 부득이한 경우, 공정하게 분할하거나 남은 사람이 그것을 물려받을 권리를 갖습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결합할 것을 우리는 약속합니다.

 

나름대로 고민을 하기는 했지만 부족한 점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더 어려운 문제는, 선언을 성안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 생활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라는 점일 겁니다. 약속을 하는 것보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항상 더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사실 가족 제도를 변혁하기 위한 정치적 실천이 생활자체가 되어야하는 일인 만큼 어느 약속보다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자유주의 하에서 가족이 온갖 종류의 위기에 봉착한 가운데 가족의 구성이라니, 흠흠.. 특히 이러한 결합 속에서 더 책임감있는 실천이 요구되는 쪽이 현재의 가족제도의 모순속에서 특히 남성에게 있다고 할 때 개인적인 책임감이 더 무거워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약속'에는 온전히 다 담지 못했을 지 모르겠지만, 더 고민되는 것은 과연 관계의 성격이 어떠해야하는지, 관계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서로의 차이와 권리를 존중하고 유지시켜갈 것인가 등등입니다. 아마도 여남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시빌리테가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 구체적인 형태는 살아가면서 매순간 발명해가야할 것입니다.

 

결혼식에서는 조주은 선배와 박하순 선배가 귀한 시간을 내서 '주례'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굳이 주례라는 부담스러운 말로 소개하지 않아도 활동가, 이론가 선배들로서 후배들에게 축하의 말씀을 해주신 것으로 생각하면 되겠죠. 우리는 결혼식을 진행하면서, 나이든 남성의 보증으로 결혼이 승인되고 보증된다는 식의 구도를 깨야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에 따라 '어르신'보다는 '선배', 그리고 여남 각각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구성을 했습니다.

 

박하순 선배는 말씀중에 알튀세르가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서 한 아래 구절을 언급해주셨는데, 저도 참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 그 후 나는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즉 그것은 자신을 부풀리고 '과장'하는 주도권을 쥐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받아들이는 것을, 하나하나의 선물을 인생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배울줄 아는 것, 그러나 전혀 자만하지 않고 전혀 강요하지 않은 채 똑같은 선물을, 똑같은 기쁨을 상대방에게 줄 줄 아는 것이다. 요컨데 단순한 자유다. 세잔느는 무엇 때문에 생트-빅투아르 산을 매 순간 그렸겠는가? 그것은 매순간의 빛이 하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관계가 우리가 '약속'에서 담지 못한 그런 내용일 텐데, 매 순간 상기하면서 살아가야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진보연대 사무처장인 박준도 동지는 축가를 불러주었습니다. 윤선애씨가 '러시아에 대한 명상' 중 불렀던 '사랑'이라는 노래입니다.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마침 제가 결혼식 당일날 아침에 듣고 나온 노래이기도 했습니다.

 

사랑 그것은
다만 우리가 마침내
둘이 되어 고단한 우리들의 앞날을 본다는 것

사랑 그것은
다만 우리가 마침내
미래를 두 눈으로 바라볼 뿐
주인은 너희들(후손들)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것

더 나아가 눈물 흐린 시야를 보탤 줄 안다는 것
살아 있는 동안
영원 불멸한 생애를 불태우고

무엇이 또 일어서는가
그러나 일어서는 것은
이미 살아있는 수천의 미래일 뿐

그래 생애는 흔적으로 남는 것이 아닌 것
그것은 눈물 혹은 기쁨일 뿐
일어서는 것은 오로지 세상 뿐

무엇이 또 일어서는가
그러나 일어서는 것은
이미 살아있는 수천의 미래일 뿐

이룩된 것이 보다 찬란히 일어선다

 

전체 가사는 http://dawn.logosia.com/rs.html 참고.('새벽'의 홈페이지), 노래는 밥자유평등평화 사이트의 여기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현재성](권현정, 공감, 2002) 중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겠습니다.

 

따라서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의 물질적 토대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현재 사람들이 가족에게 거는 모든 기대들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추구하기 보다는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을 찾아냄으로써 가족을 덜 필요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근대적 가족형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비판은 그것이 근거하고 있는 물질적 토대의 소멸과 동시에 그것 안에서 추구되었던 남녀 간의 낭만적 사랑 또는 동반자적 사랑 역시 역사적 시효를 다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족의 틀을 넘어서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새로운 사랑과 유대를 사고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48쪽)

 

박지영 동지는 결혼을 준비하면서, 정작 결혼제도 속에서 묻히는 것같아 아찔했다는 평가를 했습니다. 돌아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랬던 것을 깨닫게 되고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위험에 대한 정확한 평가입니다.

 

결혼을 통해서 가족을 구성하지만, 박지영 동지와 '가족의 틀을 넘어서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새로운 사랑과 유대'를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그것이 결혼을 경과하면서 우리가 그 제도 속에 묻히지 않고 자신의 실천을 할 수 있는 방향일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실에서는 수많은 추상적인 원칙보다 구체적인 실천들(가사노동이라든가, 각자의 가족과의 관계라든가 등등)이 훨씬 중요할 것이라는 것, 그것이 가장 힘들 것이고 관계의 성격에 가장 큰 영향을 주리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해내기 위한 노력, 실천이 모든 것을 판별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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