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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상구 왜 그래?"
쇼파에 누워있는 주선생님 앞으로
갔습니다.
"이틀 남았다."
"그러게, 상구 진짜 고생 많았다."
"너도"
미루는 자고 있습니다.
"근데 기분이 어때?"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처음 미루를 안고 집에 들어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큰 일을 마치고 나면
보통 시원섭섭하다던데
그런 느낌하고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
"그냥 너무 허전하다"
"똥 싼 것처럼?"
...
육아휴직
마지막 날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미루야, 이유식 먹자~인제 당분간 아빠가 이유식 못 주니까..."
"끼약~~~"
"......"
"우바바바"
"......"
"까따까따까따"
"상구~또 울려고 그러지?"
"오늘 아니면 인제 이유식 먹일 날도 없잖아..."
"왜 없어. 일요일도 있고, 휴일도 있고, 저녁에 일찍 와서 먹여도 되구.."
이유식을 다 먹이고
미루를 놀이집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미루야, 이건 진짜 오늘이 마지막이야.
내일부터는 엄마랑 잘 다녀, 알았지?"
딴 데 보는 데 정신이 팔려 있던 미루가
저한테 얼굴을 푹 파묻습니다.
마음이 울컥해집니다.
"너...
졸리는구나"
미루를 맡기고
내일 출근을 위해
머리를 깎았습니다.
미용실에서 나오는데
바로 옆에 중국집이 보입니다.
힘들고, 갈 데는 없을 때
항상 이 근처를 배회했었습니다.
중국집 안에서 주선생님이 짜장면을 먹고 있고
저는 미루를 유모차에 태우고 흔들고 있습니다.
그 옆 창 너머 일식집에선
주선생님과 제가 무슨 날인가를 기념하면서
그 비싼 회를 먹고 있습니다.
건너편 아이스크림 가게를 쳐다봤습니다.
두 사람이 아이스크림 1인분을 시켜서 먹고 있고
유모차 안에서 미루는 잠이 들었습니다.
맞은 편 푸드 코트 구석 의자에선
제가 혼자 메밀국수를 먹습니다.
주선생님은 유모차를 끌고 푸드코트를 한 바퀴 돌고 있습니다.
엘리베이터 옆 화장실에 들어갔더니
미루 기저귀를 갈고 있는 제 모습이 보입니다.
지하 마트랑 떡볶이 코너에 가볼까,
지쳐서 벤취에 앉아 있던 바로 앞 공원에 가볼까 하다가
마음이 너무 지칠 것 같아 그만뒀습니다.
1년이 금세 갔습니다.
그 사이 미루는 훌쩍 컸고
주선생님과 저도 컸습니다.
세 사람이 지난 1년 처럼 꼭 붙어서 지지고 볶을 일이
앞으로는 다시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별 생각없이 적기 시작했던 일기는
오늘로 300개가 됐습니다.
미루 덕에 일기를 쓰게 됐고
일기 덕에 300개의 기억을 갖게 됐습니다.
이 기억들은 미루가 우리에게 준 선물입니다.
미루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참 아름다운 365일을 보내고
저는 내일부터 출근을 합니다.
미루를 낳고 처음으로
주선생님과 저 둘이서
영화를 보기로 했습니다.
"흐흐...떨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서,
미루를 놀이집에서 찾는 4시까지
그야말로 실컷 놀기로 했습니다.
"점심은 뭐 사먹을까? 초밥 어때?초밥?"
뭐든지 좋습니다.
둘이 같이 놀러간다는 것 자체가
감격스럽습니다.
열심히 부지런을 떨었지만 우리는
이런 저런 사정으로 결국 12시가 넘어서야
가까운 극장으로 출발했습니다.
"현숙아, 어떡하냐. 이렇게 늦어져서..."
"괜찮아, 괜찮아...일단 우리 둘이서 극장에 간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기뻐할 일이야"
버스를 두 대 갈아타고
극장 앞에 도착했습니다.
뛰다시피해서 6층 매표소에 도착했습니다.
"지금 몇 시지?"
"12시 40분"
"그래?그럼 1시 10분 영화 끊자"
영화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30분
또 열심히 뛰어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층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식당이 어디지?"
"저기 돌아가면 있잖아"
"우리 쌀국수 먹는거지?"
"그렇지, 어서 뛰자"
쌀국수 집엔 사람이
득실득실합니다.
"안되겠다! 저기 스파게티집 가자"
"그러자"
스파게티집에 도착하자
12시 45분입니다.
가장 빨리 나오는 스파게티를 시켰습니다.
"최대한 빨리 먹어야겠다."
"그러게"
"이렇게 자꾸 쫓겨서 어쩌냐"
"괜찮아, 그래도 이게 어디야"
스파게티는 55분이 되어 나왔습니다.
거의 마시다시피 먹었습니다.
5분이 남았습니다.
"뛰자"
"상구 나 돈 찾아서 팝콘 살테니까 기다려"
"..."
"샀어. 어서 가자"
영화는 상당히 재밌었습니다.
오랜만에 스트레스가 풀립니다.
영화가 끝났습니다.
"상구, 우리 영화 잘 골랐다. 그치?"
"응. 근데 이 영화 되게 길다."
"그런가?"
"지금 시간이...어?! 3시 50분이다"
우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극장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왔습니다.
"현숙아, 놀이집 전화해서 늦는다고 해야겠다"
"알았어. 근데, 여의도 가서 소고기 분쇄육도 사야 되는데..."
"그래? 그럼 어떡하지?"
"둘이 찢어지자. 상구는 여의도로 나는 놀이집으로.."
"그래 알았어. 급해도 조심해서 다녀"
둘은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뛰고 또 뛰어서
한 사람은 미루를 찾았고,
한 사람은 고기랑 브로콜리를 샀습니다.
오늘 1년 만의 데이트의 주제는
달리기였고
부제는 영화보기였습니다.
1.
필요 없는 걸 들고 다니기 분야의 1인자는
역시 저 입니다.
미루를 막 놀이집에
맡기기 시작했을 때의 일입니다.
주선생님과 저한테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주선생님은 사무실에 있다가 먼저 손님을 만나고
저는 집을 치우다가 약속 시간에 늦었습니다.
급히 의자에 걸쳐놨던
잠바를 집어 입고 뛰어나갔습니다.
마을버스에서 내려서
약속장소로 걷고 있는 길
햇살이 따뜻합니다.
손님이랑 주선생님이 있는 식당이
바로 10미터 앞인데
햇살을 좀 더 쬐고 갈까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어?"
다리에 뭐가 걸리적 거려서
아래를 쳐다봤습니다.
기절할 뻔 했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여자 추리닝이 다리 앞에서
털럭 거리고 있습니다.
다행히 주변엔 아무도 없습니다.
다시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잠바에 교묘하게 걸려서 다리로 흘러내려와 있는 추리닝은
주선생님겁니다. 아까 의자에서 잠바를 급히 집어 입을 때
추리닝까지 같이 입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흘러내린 추리닝을 말아서
잠바 안쪽 팔 사이에 끼웠습니다.
식사 내내 추리닝 신경 쓰여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2.
"상구 이게 뭐야?"
놀이집에서 미루를 데리고 왔는데 보니까
가방 속에 겨울털실 모자가 들어 있습니다.
"어? 아까 놀이집 데려가기 전에
미루가 서랍에서 털실 모자 꺼내서 놀고 있었는데..."
미루를 아기띠로 안으면서
털실모자까지 통째로 들어서
안은게 틀림없습니다.
참 여러가지 합니다.
3.
저는 필요없는 걸 주로 들고 다니지만
미루는 필요한 걸 들고 다닙니다.
놀이집에서 미루만 따로 밥 먹이는 게 힘든지
자꾸 이야기를 합니다.
"요리하시는 할머니가 서운해하셔요"
주선생님과 저는
미루가 약간 아토피 기운도 있고 해서
아침마다 이유식 도시락을 쌉니다.
놀이집에서는 2-3살 아이들이 먹게
음식에 간을 다 하는데
미루는 좀 나중에 먹여야겠다고 생각을 해서입니다.
"음식을 따로 먹이니까 애가 더 예민한 게 아닐까요?"
별로 과학적이지 않은 말에
주선생님 열 받았답니다.
"그래도 일단은 도시락 먹여주세요..."
열만 받고 말은 공손하게 한 뒤 돌아서는데
선생님이 그러더랍니다.
"어? 볼펜이 또 없어졌네. 비싼 건데"
놀이집 현관에
매달려 있는 볼펜이 없어졌다는 소리인데
주선생님은 신경쓸 일이 아니라서
바로 나왔답니다.
"앗! 미루야~~너 이 볼펜?"
집에 와서 보니까
미루가 볼펜을 한 손에 꽉 쥐고 있습니다.
주선생님과 놀이집 선생님이
이야기할 때 미루가 볼펜을 슬쩍 한 겁니다.
"히힛! 잘 했어 미루야~"
이유식 문제 때문에 기분이 상했는데
미루가 볼펜을 확 가져와 버리다니
주선생님 매우 상쾌해 합니다.
딱 적당한 때
미루가 주선생님 기분풀이를 위해
볼펜을 챙겼습니다.
그 볼펜
써보니까 잘 나옵니다.
자는 데 낌새가 이상합니다.
고개를 들어 옆을 쳐다봤습니다.
이런!
미루랑 눈이 마주쳤습니다.
미루, 파닥파닥거립니다.
"에이..잘못 걸렸다"
새벽부터 놀아주기가 시작됐습니다.
눈이 안 마주쳤어야 하는데
완전히 실수입니다.
미루는 분명히 졸린 얼굴인데
여기 저기 기어다니면서 꽥꽥 소리를 지르고
저는 마지못해 놀아주기를 시도합니다.
한참을 놀던 미루가
앉아서 눈을 비비고 머리를 긁습니다.
졸리다는 신호입니다.
"미루야. 자자~"
6시 30분부터 시작해서
30분 동안 노력해서 겨우 재우고
방을 나옵니다.
"끼잉..."
뒤를 돌아보면 안됩니다.
또 눈 마주치면 다시 깹니다.
방문을 닫으려다가
문틈으로 살짝 쳐다봤습니다.
미루가 눈을 뜨고 이 쪽을 쳐다봅니다.
이 좁은 틈으로 제가 보일리가 없습니다.
"자라~자야지...자야 해"
혼자 주문을 외우고 나왔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30분쯤.
"상구 일로와봐~~"
"왜?"
"빨리 와 봐"
이럴수가!
미루가 잡니다.
침대 위에 올라가서,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자고 있습니다.
이제 드디어 잠결에 침대에 올라가는 경지에 도달한 겁니다.
"내가 너무 힘이 들어서
그냥 토닥토닥하다가 잠이 들었거든?"
주선생님이 상황을 설명합니다.
"칭얼대다가 조용해지더라구.
그래서 자는 줄 알았는데...
한참 있다가 눈 떠 보니까 여기 있는거야"
앞으로는 정말 미루가
어디서 어떤 자세로
자고 있을 지 모르게 됐습니다.
미루를 가운데 눕히고
양쪽에서 압박해서 자야 하나 싶습니다.
"끼야아아악~~~~~"
미루는 틈만 나면
소리를 지릅니다.
"미루야 밥 먹자"
"끼야아악"
"미루야 뭐 해? 책 봐?"
"끼야아악"
"안 되겠다. 아빠 힘들어서, 침대 위에서 놀아라"
"끼야아아악~~"
목청이 어찌나 좋은지
계속 그렇게 소리를 질러도
힘도 안 드는 모양입니다.
소리를 지르는 중간 중간에
미루는 뭔가를 계속 중얼거립니다.
요즘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겁니다.
"까따까따까따까따"
식탁 다리를 잡고도 까따까따 거리고
엄마한테 기어갈 때도
가습기 물 떨어져서 빨간 불 들어온 걸 보고도
계속 까따까따 합니다.
"미루는 도대체 누굴 닮아서 저렇지?"
"현숙이 너 닮은 거 아냐?"
"그런가?"
주선생님
부정은 안 합니다.
주선생님은
아플 때 빼고는 항상 말을 하고
가끔 소리를 꽥 지르면
귀를 퍽퍽 때리는 음파가 발사됩니다.
"상구랑 내가 평소에 대화를 자주 해서
미루한테 영향을 준 게 아닐까?"
맞는 말 같은데
왠지 비겁한 변명으로 들립니다.
어제는 놀이집에서 찾아 오는데
선생님이 이러십니다.
"미루가 하루 종일 떠들어요"
가정통신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미루가 요새 말이 많아졌어요.
활동하는 내내 말을 해요'
결국 놀이집에서 까지
미루가 제일 많이 떠든다는 소리를 듣더니
주선생님이 과거의 진실을 실토했습니다.
"나 초등학교 5학년 때 반장이었거든?
그때는 공부도 잘 했었어.
근데 선생님이 생활기록부에 뭐라고 적었었는지 알어?"
반장에 공부도 잘 했으면
'품행이 방정하고, 타의 모범이 되며..'등등을
적는게 보통인데 선생님은 반장 생활기록부에
이렇게 적었답니다.
'목소리가 매우 큼'
"내가 조용히 해~~~!!!! 이러면 교실이 조용해졌다니까."
미루가 엄마를 닮았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책상에 앉아서 졸고 있는데
방문 여는 소리가 딸깍 들리더니
주선생님이 나옵니다.
예의상 고개를 돌려서 한번 쳐다봤더니
갑자기 주선생님이 양손을 들어서 희한하게 흔듭니다.
"이야~~" 소리도 지르는데
얼굴은 좀 처럼 보지 못한 아주 특이한 표정입니다.
"현숙아. 왜 그래?"
"오늘이 미루 생일이잖아! 이야~"
소리는 환호성이었고
표정은 기쁨이었습니다.
"이야~~"
저도 같이 일어나서 소리를 지르고
부둥켜 안고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수고했어"
"고생 많았어"
저녁땐 셋이서 미루 생일 파티를 하기로 했습니다.
낮에 나갈 일이 있어서 외출했다가
케잌을 사러 빵집에 들렀습니다.
"초 몇 개 드릴까요?"
"한 개요"
순간 울컥했습니다.
눈물이 삐질삐질 나옵니다.
잔돈 계산하는데 괜히 밖을 쳐다봤습니다.
"미루야~~생일 축하해~!!!"
케잌을 사들고 왔는데
집이 난장판입니다.
놀이집에서 미루 생일이라고
사탕, 과자, 나비인형, 공책, 연필 등
당장은 못 먹고 못 쓰는
많은 선물을 줬는데 그게 집에 다 널려있습니다.
주선생님과 미루는 그 사이에 파묻혀서
놀고 있습니다.
"우리 케잌에 불도 붙이고 사진도 찍자"
카메라 타이머를 작동시켜서
10초 후에 셔터가 눌러지게 해 놓고
셋이서 이 자세 저 자세를 취했습니다.
멋있게 한장 찍었습니다.
두 번째 사진은 더 멋진 자세로 찍기 위해 자세를 취합니다.
건전지가 없습니다.
항상 이런 식입니다.
긴급히 건전지를 조달해서 다시 찍었습니다.
미루는 오늘이 자기 생일인 걸 아는 지
계속 활짝 활짝 웃습니다.
"이거 봐 ,이거 봐"
"어?!! 미루야, 생일 기념으로 인제 걸어다닐려고?"
집을 왔다갔다 하던 미루는
쇼파를 잡고 일어서더니 손을 떼고 다리로만 서 있습니다.
보행기를 잡더니 또 손을 안 대고 섭니다.
거실에 있는 미닫이 문을 잡고 서더니 손을 떼고
욕실 턱에 걸터서 목욕물 받는 제 등을 잡고 섰다가
혼자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미루 낳기를 참 잘 한 것 같애"
"그런 생각이 들어?"
"응"
"구체적으로 왜?"
"참 좋잖아."
"또?"
"가만 있어봐, 말 시키지 말아봐"
"상구, 또 울려고 그러는 거지? 자기 말에 울컥해서?"
오늘 미루는 한 살이 되었습니다.

<한 살 기념 포스터. 사진은 말걸기님 협찬>
내일은 미루의 첫 생일입니다.
주선생님과 저는
오늘 미루 생일 전야를 맞아
방바닥에 누워서 생일축하 특별 토크쇼를 진행했습니다.
강: 벌써 일년이다.
주: 그러게
강: 그때 현숙이 니가 10신가 11신가에 운동갔었는데...
주: 9시에 갔을 걸? 그때 상구가 피곤하다고해서 나 혼자 갔다 왔지
강: 그리고 일찍 잤지?
주: 응...그러다가 오줌이 마려워서 깼는데, 자꾸 뭐가 나와서...
강: 그래서, 어차피 내일 아침에 병원 갈 거니까 ...
주: 일단 자자고 했었는데, 계속 피가 나오다가 양수가 터졌지. 애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는데...
강: 우리가 확신을 하고 나서 외친 말이 있지. '등심 구워!!'
주: 히히, 맞아. 근데 그땐 등심 다 먹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배가 빨리 아플까 생각했다니까.
이야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강: 등심 한 입 물고, 으윽 아파하고 또 한 입 물고 그랬잖아.
주: 그랬지. 흐흐
강: 근데 난 그때 지금 병원으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느낌이 확 오더라구.
주: 그랬어? 난 왜 벌써 옷 입으라고 하나. 아픈 거 좀 가시면 옷 입어도 되는데 빨리 옷 입으라고 해서 좀 귀찮았었는데...
강: 그때 옷 안 입었으면 큰 일 날뻔 했었어.
주: 맞아. 그때 안 나갔으면 미루 집에서 낳을 뻔 했다니까.
주: 엘리베이터 탔는데 그 땐 정말 누가 온 몸을 뒤트는 것 같더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오는거야.
강; 내가 옆에서 보니까 니가 이 어떤 압도적인 힘에 밀려서 나오는 신음소리를 내더라고.
주: 엘리베이터에서 그랬고, 또 아파트 바로 앞에서도 그랬지.
강: 아파트 앞에서 너 쓰러져 있고 내가 단지 앞으로 뛰어갔을때 차 한대가 들어왔었거든. 근데 그걸 잡을까 하다가 뒤에 오는 택시를 잡았었는데, 그러고 아파트 앞으로 오다 보니까 아까 내가 안 잡았던 차가 니가 쓰러져 있는 곳을 지나는 거야. 무슨 일 났을까봐 정말 죽고 싶더라.
주: 내가 아무리 그래도 의식은 있었지. 차가 오길래 피했지.
강: 택시 타고 갈 때에도 그런 식으로 신음을 두번인가 했지.
주: 맞어
강: 그 사이엔 이런 얘기도 했잖아. "상구 정신 차려"
주: 우히히. 그래 그래. 니가 지갑에 돈을 못 꺼내가지고 내가 그랬지.
주: 그리고 병원 앞에 가서도 아저씨 한테 병원 입구가 여기니까 세워달라고 막 그랬지.
강: 맞어, 산모가 자기 일만 할 것이지.
주: 근데 그 택시 아저씨가 또 마침 그 병원 구조를 잘 알아서 병원 뒤로 가서 2층 입구 앞에 딱 차를 대줘서 진짜 다행이었어. 그 밤에 정문 닫혀 있는데 내렸으면 어쩔뻔 했어.
강: 맞어. 문은 잠겨 있지. 나는 들어가는 문 찾을려고 막 이리뛰고 저리뛰고 했을거야.
주: 그 사이에 애 낳았을거야.
강: 맞어 맞어. 병원 도착하고 20분만에 낳았으니까 딱 헤맬시간이지. 애 들고 병원 들어갈 뻔 했다니까.
주: 그래 맞어. 히히.
강: 아휴...그때만 해도 이 배 속에 있던 애가 지금은 방에서 자고 있네
주: 지금도 생각난다. 미루가 처음 나와서 눈을 하나만 겨우 뜨고 나한테 안길 때...
강: 그러게. 미루가 막 나왔는데 간호사가 미루를 꺼꾸로 들어가지고 저울에 올려놓던 생각난다. 그 때 나도 모르게 손가락 발가락 다섯개씩 인가 세어 봤다니까.
주: 미루 나오는 거 봤어? 나올때 느낌이 어땠어?
강: 그냥 무덤덤했는데...이런 생각은 들었지. "아...나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구나" 하는 느낌
주: 나는 미루 처음 안고 젖을 물렸는데 미루가 젖을 세번 정도 빨았었던 기억이 나.
강: 나도 기억나.
주: 휴...하여튼 그때 죽을 뻔 했어. 출혈이 심해서
강: 그러게 말야. 나는 미루 나오고 나서 분만실 밖에서 기다리는 데 니가 하도 안 나와서 걱정했다니까
주: 미루가 나오자 마자 확 춥더라고. 피도 많이 흘리고. 의사도 출혈이 계속되니까 찾느라고 한참 고생하고...하여튼 미루 낳고 나서 많이 힘들었어.
강: 그랬는데 벌써 1년이 지나버렸네....근데 방바닥이 왜 이렇게 뜨겁냐?
주: 5월에도 한번씩 불을 틀어주나봐. 오늘 비오니까 이런 날은 한번씩 틀어줘야 돼.
딱 1년이 흘렀습니다.
1년 전 오늘 이 시간 주선생님은 운동을 하러 나갔고
저는 쉬고 있었습니다.
몇 시간 후 우리는 미루를 낳았습니다.
내일 미루 생일에는
기념으로 미역국을 해주기로 했습니다.
미역국을 해서 미루는 안 먹을거니까
주선생님이랑 저랑 둘이 먹기로 했습니다.
미루 돌잔치에
식구들 10명만 모이기로 했는데
소문이 퍼져서 17명이 모였습니다.
17명이 앉을 수 있는 방은
꽤 그럴 듯한 규모입니다.
앞쪽 가운데에는
돌잡이를 위한 상이 놓여있고
그 뒷 벽엔
주선생님과 제가 심혈만 기울인
현수막이 걸려 있습니다.
이런 날 아니면
못 먹는 음식들이
줄지어 나옵니다.
어쨌거나 이럴 땐
많이 먹는 게 남는 겁니다.
미루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싱글 거리다가
가져온 이유식을 잘 받아 먹고 놉니다.
무슨 특별한 프로그램을 기획한 것도 아니라서
우리는 그냥 밥을 열심히 먹었습니다.
그 사이 작은 아버지들께서
봉투를 주셨습니다.
식사를 마치신 후에는 할아버지께서
봉투를 꺼내서 주시는데 엄청 두껍습니다.
"이건 미루한테만 써라"
이걸로 미루 통장을 만들어주기로 했는데
액수가 정말 큽니다.
이것 때문에 하루 종일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돈도 없는 분이 증손자한테 마음을 크게 쓰셨습니다.
식사를 다 마치고 나서
자연스럽게 돌잡이를 합니다.
상 앞에 앉은 미루는
맞은 편에서 열 몇명 되는 어른이
다들 자기를 보니까 멈칫합니다.
그러다 공책에 손을 댑니다.
"상구 형은 미루가 뭐 집었으면 좋겠어?"
"나? 돈!"
누군가가 돈과 공책의 위치를 바꿔놨습니다.
제 소원이 이뤄지도록 한 배려입니다.
자, 이제 미루가
손을 쭉 뻗습니다.
쌀그릇에 손을 푹 집어 넣었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집으라고
연호했지만
미루는 쌀만 가지고 놉니다.
쌀을 집어서 돈 위에 뿌립니다.
제가 외쳤습니다.
"그래~미루야. 밥 많이 먹어라!!"
사람들한테
쌀을 집으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니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어머니는 "좋은 뜻이야. 잘 살라는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보통 이런 대답을 애매모호한 대답이라고 합니다.
"자, 인제 갑시다"
정말 밥만 먹고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인사를 하고 헤어집니다.
사촌동생은 쉬는 날이라서 그냥 시골에 내려왔다가
얼떨결에 합류했다는데 실컷 먹고 나더니
천냥 빚을 갚을 결정적인 한 마디를 합니다.
"형수님, 1년 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형님, 1년 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1년 동안 수고 많았던 건 맞습니다.
그 말이 듣고 싶기도 했습니다.
고생스러웠던 것만 치면
육아휴직을 또는 못하겠다 싶습니다.
근데 요즘 들어서는
앞으로 한 동안
지난 1년이 무척 그리울 것 같습니다.
요새 주선생님이랑 제 마음이 그렇습니다.
<지난 5월 5일 미루 돌잔치가 있었습니다. 그 전에 종이에 적어놨던 일기인데 지금 올립니다.^^>
"요새 돌잡이 할 때는 마이크도 올린대~"
"왜요?"
"아나운서가 잘 나가잖아"
미루 돌잔치를 3일 앞두고
마이크를 우리가 준비하기로 한 게
기억이 났습니다.
"아..그리고 현수막 하나 해라"
어머니는 마이크 말고
미루 사진 이쁘게 들어간
현수막도 원하셨습니다.
10명 모여서 조용히 밥만 먹기로 한 자리에
50명 쯤 모일 때 필요한 걸 원하십니다.
마이크는 주선생님 카메라에 붙이는 걸로 하기로 했습니다.
현수막이 문제입니다.
"현숙아, 편집 오전 중으로 할 수 있지?"
세명이 같이 찍은 사진 중에서
제일 잘 나온 걸로
포토샵 편집을 시작했습니다.
"어? 기억이 안 나"
하도 오랜만에 포토샵을 써서
사용법이 자세히 기억이 안 난답니다.
"꼼수를 발휘해 봐. 너 그거 전공이잖아."
"알았어"
주선생님은 제가 자기보다
디자인 감각이 있으니까
무조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겠답니다.
"아니, 그렇게 말고...글자 색깔을 연두색으로 바꾸는 건 어때?"
"이렇게?"
"응...그리고, 사진 위에는 '미루의 한 살' 이라고 쓰자.."
2시간 동안
이렇게 고치고 저렇게 고치면서
엄청 작업을 했습니다. 마음이 급하니까 잘 안됩니다.
"그래, 그래..그 박스만 빨간 색으로 하면 되겠다"
마지막 요구사항을 처리한 주선생님이
갑자기 "푸하하하하" 웃기 시작합니다.
"왜 그래?"
"이거 선거 포스터 같잖아!!!"
미치겠습니다.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그 박스를 파란색으로 바꾸면 어때?"
"그러면 선거 홍보물 맨 뒷면이잖아!!"
아무튼 시간 없으니까
이걸로 맡기기로 했습니다.
돌 잔치가
유세장 분위기가 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예전부터 알고 있던 현수막 업체에 전화를 했습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큰 일 났습니다.
당장 맡기지 않으면 안됩니다.
급할 수록 냉정해야 하는 법
주선생님과 저는 열심히 다른 집을 알아봤고
결국 새로운 현수막 업체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거기서 그럽니다.
"저희가 도안해서 보내드릴테니까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만 말씀해주세요"
고생한 주선생님 눈치를 봐서
그냥 선거 포스터로 갈까 생각하는데
주선생님이 자기는 괜찮답니다.
괜히 2시간 고생했습니다.
우리는 그날 밤 결국
업체에서 해준 도안대로
현수막을 하기로 했습니다.
나름대로 깔끔하고 이쁩니다.
현수막 아랫부분에는
이렇게 적어놨습니다.
'고맙습니다!
미루가 이 만큼 자랐어요.
앞으로 더 재미나게 살겠습니다.'
"어머니, 어버이날 기념 전화 되겠습니다~"
어버이날 해가 뜨고
점심 시간 다 지나서 배가 좀 부르니까
부모님한테 전화할 생각이 났습니다.
"응..고맙다. 미루한테도 어버이날 축하한다는 얘기 들어라"
무슨 말씀인가 했습니다.
주선생님과 저도 어버이가 됐다는 얘기입니다.
놀이집 정문에는
색종이로 접은 꽃이
매달려 있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까
'엄마, 아빠 사랑해요. -미루-'라고
적혀 있습니다.
'엄마, 아빠 감사합니다'라고 쓴
종이 카네이션도 놀이집에서 보냈습니다.
미루는 글씨를 못 쓰니까
선생님이 미루 손에 크레파스를 쥐어준 다음에
자기가 막 썼답니다.
정말 새로운 느낌입니다.
놀이집에서 돌아온 미루는
유난히 혼자 잘 놉니다.
부엌에서 저녁 식사와 실랑이 중인 주선생님한테도 안 매달리고
책상에 앉아서 매우 바쁜 척 하는 저도 안 괴롭힙니다.
그냥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장난감 상자 앞에서 여러 장난감과 대화를 나눕니다.
소리도 '끼악~' 지르지 않고
전혀 보채지도 않고
그저 신나게 놉니다.
"상구~미루 오늘은 왜 이렇게 잘 놀지?"
근래 들어서는
정말 처음 있는 일입니다.
"글쎄"
"저렇게 노니까 우리가 진짜 편하네"
"어버이날이라서 우리한테 잘 해주는 건가?"
미루의 센스가
벌써 어버이날까지 챙길 정도가 됐습니다.
미루 덕분에
어버이날이 무척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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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귀 축하 드려요. 엄마와 아빠 미루 모두 새로운 생활에 잘 적응하시길 바래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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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구백/ 수고했어. 참 힘들었을텐데 그래도 참 잘했어. 내가 두고두고 이뻐해줄께. 복귀하면 몸 힘들지 않게 잘해봅시다. 미루팀 잘했잖어. 앞으로도 잘할겨. 여튼 덕분에 지난 일년 인간답게 잘지냈어. 그대가 아니었음. 음...아마도 난 늑대의 시간을 보냈을거 같아. 고마워.진경맘/ 저는 아침 시간이 좀 힘들긴 하겠으나 그럭저럭 적응할 듯도 한데 상구백은 한동안 찔끔거리지 싶어요. 아까도 한참을 찔끔거렸다지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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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정씨가 해온 인터뷰 편집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알았습니다. 얼마나 억울했을까 안전 공감했습니다. 그러고 많이 배웠습니다. 돼지 한마리 사람으로 변하게 했으니 그 1년 성공한겁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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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눈팅만 하다가 이렇게 인사드립니다.그동안 미루, 상구(<--언제나 반말로..ㅎ), 주선생님.. 이렇게 세분이 연출하시는 각본없는 드라마 잘 봤습니다. 앞으로도 이어지겠죠? ^^ 가만.. 그러고보니 주선생님은 영상물제작하시는 분인 것 같던데... 언제 한번 이 이야기들을 "각본있는 드라마"로 만드는 것도 재밌겠네요. 이 일기들을 각본 삼아서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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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더 좋은 일이 많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집주소는 그대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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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개의 일기 덕분에 저도 행복했습니다. 아님 우울했을 1년이었을텐데...보통 아빠들하고 다른 모습 존경스러워요. 미루네 가족 앞으로도 행복 만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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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왈칵...수고 많으셨습니다.
무사복귀, 미리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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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귀해도 고생길인데...어쨌거나 존경스런 아빠였음.
정신없어서 이제야 인사함.
6월 1일은 너나나가가 다시 출근하는 날,말걸기는 마지막으로 출근하는 날.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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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진짜 고생 와방!앞으로도 먼길이지만 재미있게 갈 수 있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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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할 날은 앞으로 더 많은데, 미루는 그걸 알까나.형 얼굴은 언제쯤 볼려나. 우연하게 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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