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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혁명

 주권혁명


저자 : 손석춘

출판사 : 시대의 창


2008년 11월 8일(일요일)


비폭력 교과서을 반납하기 위해 도서관에 들렀다. 아직도 김민기 책은 들어오지 않았다. 책을 두 권 빌렸는데 한 권은 동양철학에세이고 한권은 주권혁명이다. 촛불 까페의 사람들이 요즘 읽고 있다기에 빌려보았다.


손석춘 교수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의 원장이다. 최근 들어 정세에 대해서 책을 많이 쓰는 연구소이다. 촛불 이후 쓰여 진 책이어서 기대가 되었다. 특히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니체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마르크스와 니체의 결합이라는 주제가 책속에 포함되어 있어 더욱 궁금했다.


책은 단숨에 읽었다.

그러나 읽고 나니 기분이 묘하다. 마르크스를 해석하는 방법과 니체에 대한 의견이 그리고 대안들이 상당 부분 나와 해석이 다르다.


저자는 서문에서 신자유주의 착취 체제가 노골적인 이유를 세 가지 들었다. 1. 수탈과 침략체제에서 이익을 누리는 세력이 민중에게 진실을 조직적으로 숨기거나 속이고 있기 때문이고 2. 실존사회주의의 몰락과 진보세력이 무능이고 3. 진실을 외면하려는 민중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처지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민주주의를 제안했으며 저자는 민주주의를 생명체로 볼 때, 민주주의의 탄생(자유주의) -> 성장(사회주의) -> 위기(신자유주의) -> 성숙으로 새로운 민주주의 발전 이론을 제안하였다. 새로운 민주주의는 민중을 행방하는 주권혁명으로 신자유주의와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신자유주의 대안으로 민주경제론과 분단체제의 대안으로 통일민족경제와 새로운 세계를 단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글을 읽는 와중에 내가 느낀 것은 새로운 촛불운동의 자발성과 역동성을 감지한 저자의 감흥과 전혀 새로운 것 없는 저자의 철학이 만났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발전 이론은 그야 말로 논리가 이해하기 힘들고 억지스럽다. 역사를 발전사관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인류사를 보면 인간은 점차적으로 자유와 평등이 확대되어온 것은 맞지만 현재의 위기를 성숙으로 가기 위한 이행 정도로 도식화시킨다면 이것은 지나친 낙관이다. 진실에 대한 조직적 은폐라는 전제 조건도 이데올로기가 그저 허위의식에 불구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정치 선동으로 허위의식을 걷어 내면 혁명을 할 수 있다는 단순한 사고에서 비롯된다. 어떤 사회 체제는 그 시대를 유지하고 재생산해내는 주체의 재생산을 전재로 하고 주체의 재생산은 진실의 은폐로서가 아니라 그 주체의 동의를 전제한다는 현대의 주체화 양식을 너무 가볍게 보는 전제이다. 말 그대로 전혀 새로울 게 없는 계몽주의의 산물이다. 민주주의 발전 단계로 보자면 사회주의의 몰락과 진보의 무능도 역사적 단계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의 전제 조건은 공허함 그 자체이다.


특히 계보학의 선구자인 니체 철학에 대한 분석은 납득하기 힘들다. 사회구조와 주체성이라는 문제를 혼합해보려는 시도는 이미 있어왔지만 수직적 나무구조에 초극하는 주체를 결합하는 것은 변증법이 아니다. 니체는 인간이라는 초극의 주체가 어떻게 수동화되어가는가를 서양 역사를 냉혹하게 분석하여 죽어간 주체를 살리기 위해 그리스 시대 주체화양식과 주체의 역능을 복원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니체의 계보학적 관점을 버리고 니체의 문제의식을 가져다 쓰는 것은 니체를 왜곡하는 것이 아닐까?


민주주의는 과연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인가? 오히려 나무의 성장을 위해 뽑혀온 무수한 잡초들의 제거가 바로 물질문명에 바쳐진 민주주의의 피는 아닐까?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조직화 양식이 꼭 나무형 일 필요가 있는가? 주권혁명이 제시하는 새로운 헌법과 새로운 주체의 탄생은 정말 절실하지만 그 방법과 절차는 너무나 빈곤하다. 경제 발전론의 단계에도 한 말이 만치만 더 이상이야기 해야 무슨 소용인가? 결론을 위해 서론이 있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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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교과서

 

비폭력 교과서


2008년 10월


오랜 만에 시립도서관에 갔다. 김민기의 책을 빌리기 위해서이다. 28,000원이나 하는 책을 사기에는 고민이 많이 된다. 도서관을 이용하라는 보리 누나의 조언으로 도서관에 갔으나 김민기의 책은 도서관에 없었다. 읽고 싶은 책으로 신청을 해놓고서는 책 쇼핑을 했다. 언제나 책 쇼핑은 즐겁다. 비폭력 교과서라는 제목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장을 넘기니 비폭력 저항운동에 대해 이런 저런 그림과 사례들이 소개되어있다. 폭력과 비폭력 논쟁이 많았던 촛불을 떠올리며 빌렸다. 폭력과 비폭력 논쟁에서 항상 아쉬웠던 것은 그것이 불의에 대한 불복종의 의미가 퇴색된 채 형식 논리로 되어버린 경우이다.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이나 사회의 권위주의적 형태에는 무관심한 채 시위대의 폭력 행위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되는 폭력과 비폭력 논쟁은 정말이지 답답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구호를 외치는 것 이외에 물리력으로 한번 해보려는 한탕주의나 상상력의 빈곤도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현실이다.


비폭력 교과서는 비폭력운동의 사례를 풍부하게 설명하고 있다. 다양한 방법의 비폭력 행동을 그림을 그려 주기도 하고 사례를 소개하기도 하고 비폭력 행동을 실현하는 조직들이 원칙과 규율도 소개하고 있어 눈에 잘 들어오고 재미있기도 하다. 필리핀의 아키노는 독재 정권에 맞서는 시민들의 비폭력 행동으로 총파업, 수업거부, 가두행동, 국영티비와 재벌이 소유하고 있는 신문의 구매 및 광고 게제 거부, 공공요금 납부 거부, 불매운동, 정부계 은행에서 예금 인출 등을 호소하였다고 한다. 이정도면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 비폭력 교과서는 대안적 삶과 운동으로서의 자기 혁신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듯하다. 비폭력적 삶의 자세와 단체의 규율은 새겨볼 만한 게 많다.


간디의 자서전을 잃으면서 비폭력 운동에 대해서 새롭게 이해를 하기 시작했다. 비폭력이라는 것이 단순히 무저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진이 금지된 곳에서 행진을 시도하고 노동자의 파업을 호소함과 동시에 물레를 돌려 투쟁하는 사람들의 가족들을 돌보는 정성이 놀라웠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간디와 같은 비폭력을 바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생사가 오가는 처절한 자본과 권력의 폭력 앞에 비폭력만이 대안이라고 말하기에는 여전히 쉽게 동이하기가 힘들다. 샤파티스타의 무장 투쟁도 총을 들었지만 폭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총보다 더 무서운 말과 민주주의가 샤파티스타의 무기임은 확실하다.


우리의 상상력이 다양함을 요구하고 비폭력의 정신이 불의에 대한 불복종에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비폭력 교과서는 읽고 토론할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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