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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 하기 위하여...

자립하기 위해서는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자본주의적 욕망을

꿰뚫어볼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줍는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실사구시의 생활 습관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자립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립의 조건을 만들며 살아야하지 않을까?

 

나는 아직 함께 사는 법을 몰라

혼자서 잘사는 자립을 꿈꾸는지도 몰라~

 

나는 아직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몰라

다른 이들의 욕망을 따라살고 있는지 몰라~

 

나는 아직 관념속에서 허욱적데며

당당하지 못하고 쭈삣거리는지 몰라~

 

자립이란 무엇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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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조문익과 그의 사람들

사랑하는 조문익과 그의 사람들

 

 

핸드폰에 지우지 못한 번호가 하나 있다. 끝 번호 3362, 이미 다른 몸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문익이 형 전화번호다. 어제는 4주기 추모제가 있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문익이 형이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평소 사람을 형식적으로 만나지 않았던 문익이 형이기에 나중 사람들도 형을 형식적으로 보내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사람들 마음이 모였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이 있다. 그것은 모인 사람들의 관계는 해가 갈수록 멀어진다는 것이다.

지역에서 활동가들에게 안부를 물어보기가 민망하다. 어떤 분은 내가 “잘~ 지내시죠?”하면 놀리는 줄 아는 모양이다. 오히려 역성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해법은 무엇일까? 조직과 조직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도 마찬가지다. 많은 조직들이 겪는 갈등과 내횽! 그러나 이러한 내횽도 진보의 성장통이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4주기 추모식 식순 전단지에 쓰여 있는 글귀가 마음에 남는다.

 

충만한 실천과 열정적인 토론이 물흐르듯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고요하게 내부를 응시하는 영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 고 조문익의 글 중”

3주기 추모제가 끝나고 여러 사람이 뒷풀이를 하면서 내년부터는 좀 밝게하자고 했다. 그리고 4주기 추모제가 끝나고 술을 마시면서 또 한번 의견을 모았다. 내년에는 재미지게 풍물도 치고 그러자고 말이다. 그런데 문익이형 추모제가 무거운 것은 문익이 형이 죽은 날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너무 무겁기 때문은 아닐까?

 

만남의 광장이 되어버린 문익이 형의 추모식~ 그 추모식이 이제 사람들의 삶을 나누고 서로를 보듬는 그런 추모식이 되었으면 좋겠다. 마당에 사물악기들을 풀어놓고 신나게 굿 한번 같이 치고 놀았으면 좋겠다. 정년퇴직을 하고도 전북을 제2의 고향으로 20년 동안 한국을 48번 방문하신 나카무라 선생님께 슬픈 추모제가 아니라 행복한 추모제를 보여드리고 싶다. 같이 온 지역 동지들과 어깨를 걸고 춤을 춰보고 싶다.

 

행복한 추모제를 위해 1년 동안 나는 뭘 하며 지낼까?

벌써부터 다시 만날 사람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설렌다. “두근 두근~!^^”

행복한 운동, 행복한 추모제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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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님 고맙습니다.

김진숙님 고맙습니다.

 

악수한번 얼굴한번 보지 못했지만 

단식을 풀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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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아리랑

 용산아리랑


아리고 쓰리다고 아리랑이라고 했던가?

아리고 쓰리지 않고서는 넘을 수 없는 고개

용산아리랑이 한고개를 넘었다.


아리고 쓰리지만 넘어야 하는 고개

운명처럼 받아들려야 하는

아리랑 고개를 눈물로 넘었다.


애비를 죽인 살인자로,

옥상에서 떨어진 후유증을 진통제로 버티던

이상림 열사의 막내아들은 아리랑 고개를 넘어

까막소로 들어갔고


혼신의 힘으로 철거민과 함께하던

수배자들은 끝내 그 한고개도 함께 넘지못하고

명동성당에서 눈물을 흘렸다.


아리고 쓰리다고 아리랑이라고,

몇 고개를 더 넘어야 할지 모를 절망의 시간에

"아리랑 응 응 응 아라리가 났네"며

어깨를 들썩이는 아린 긍정의 시간을 향해 고개를 넘는다.

다섯 열사가 355일 먼길을 돌아 넘는 그 고개를

눈물로, 사랑으로 사람들이 함께 넘는다.


"아리랑 아리랑

용산 아리랑

남일당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고 발병난다."


아리고 쓰리다고 아리랑이라고 했던가?

기어이 넘어야 하는 고개를 이제 한 고개 넘었다.

 

*1월 10일 눈내리던 일요일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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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2000년 전에...아니 그 이전부터...

에피쿠로스라는 철학자는 이미 2000년 전에

"사적소유"와 "종교"가

폭력과 불안 그리고 공포의 세상을 만들것을 이야기 했다.

이미 2000년 전에....

 

지금도 계속되는 국제적 분쟁 대부분이

사적소유 확장과 종교 분쟁임을 본다면

역사는 폭력과 불안...공포의 확장임에 틀림없다.

 

맑스가 지금까지의 철학자는 세상을 해석해 왔는데

중요한 건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라고 말을 했다는데

아마 그것은 정원에 소요하는 에피쿠로스를 향한

외침이었는지 모른다.

 

맑스는 에피쿠로스의 말을 보편적 진리로 만들기 위해

정세를 분석했을 것이다. 그러나 맑스의 분석은 역사적 분석이기에

2000년을 관통하는 분석이어야 하지 않은가?

 

이미 2000년전에 사적소유와 종교로 타락한 세상에 환멸을 느낀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정원에서 감각의 기쁨을 즐기며 소요하며 살았다.

 

이런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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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제5장 무력감을 느끼면 민주주의는 아니다 중

노동자는 모든 경제적 가치를 자신의 노동에 의해 생산합니다. 그것이 모든 경제적인 힘이 원천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노동자가 일하지 않으면, 자본가, 경영자, 상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노동자의 역할은 우선 취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때, 일하는 장소를 완전히 자유로이 선택할 수는 없겠지만, 가능한 한 자신의 양심, 사고방식, 생활방식과 합치되지 않는 곳에서는 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양심을 죽이면서 매일 일한다는 것은 괴로운 것으로서, 과로사의 한 원인이 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 당연한 것이 사회의 상식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사회는 크게 변할 것입니다.

더글러스 러미스

 

 

브레이트의 전쟁교본 중 


"이보게 형제들, 지금 무얼 만들고 있나?" - "장갑차"

"그럼 겹겹이 쌓여 있는 이 칠판으로는?"

"철갑을 뚫는 탄환을 만들지"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왜 만들지?" - "먹고 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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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똥

오늘 그 놈은 인간의 똥을 무려

15톤이나 삼켰다.

무려 15톤이나 말이다.

 

그 놈은 쉼이 없다.

가끔 너무 많은 똥을

그 놈 아가리에 집어 넣으면

소화를 멈추거나

뱉어내기는 하지만

쉼없이 먹는다.

 

하루에 15톤씩~

 

나는 오늘 그 놈의 입에

인간의 똥을 하루 종일

퍼 먹였다.

 

인간이 쓰기에는 너무 큰 숟가락이지만

그 놈에게는 터무늬없이 작은 숟가락이다.

인간에게는 삽이 그놈에게는 겨우 티스푼 정도일게다.

티스푼으로 그 놈 양에 차게하기 위해 똥을 먹일라치면

쉴 틈이 없다.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만다.

 

도대체 이놈의 똥들은 어디서 이렇게 온단 말인가?

인간이 싸는 똥은 꼭 음식만이 아니다.

셀수 없이 많은 똥을 싸고 산다.

그 똥은 비닐, 병, 종이, 천, 프라스틱 등

이름도 참 다양하다.

 

그 똥은 서해 앞바다에 투기되기도 하고

비가오는 날이면 슬며시 강에 버려지기도 한다.

내가 사는 전주에서 매일 15톤씩

아니 걸리것들만 15톤이겠지~

그 배가 되는 수의 수많은 잡병이

그놈에게 먹여진다.

 

하루에 15톤씩~

 

*자기 똥은 자기가 치우는 세상에서 살고싶다.

내가 싼 똥을 내가 치우는 곳에서 똥과 함께 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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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싶은 사람 - "모니카" 자매를 만나다.

사무실에 출장을 내고 밭을 갈러 갔다.

포도 밭을 만들고 생태 마을을 만들어보겠다는

신부님의 간절한 전화....

주말이면 늦는다며 주중에 와주기를 부탁한다.

사무실에 이렇게 말도 안되는 출장을 주장하며

진안으로 향했다. 월초에 월차를 두게나 써버려서

월차라고 주장하기에는 터무늬없고.....

 

한 여인이 함께 했다.

카톨릭 네임으로 "모니카"

이것 저것 한보따리 싸가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수줍은듯 천진한 웃음으로

이야기를 한다.

 

얼굴도 곱고 몸짓도 곱고 말씨도 곱다.

쉬면서 쉬엄 쉬엄 하자며..

포도를 심어 3년 후에 먹을 생각에 열심히 하자는

신부님 말에 모니카 자매님은

기냥 오늘 재밌게 일하면 된다면서 배시시 웃는다.

 

볼수록 웃음이나고 볼수록 향기가 묻어난다.

일이 한참 끝나고 오후가 넘어갈 무렵

시냇물에 발을 담그며 다슬기를 줍는

모니카 자매님의 하얀 다릿 살이 황홀하기 까지 하다.

 

모두가 어정쩡하게 일을 하는 그 시간에

일이 거의 끝나서 여럿이 하나의 일에 메달릴 시간에

시냇물에 발을 담글 용기를 나는 사랑한다.

 

나이가 어떻게 되냐는 나의 물음에

일흔은 안됐다며 "이렇게 말해야

궁금하다"며 다시 해맑게 웃는 모니카 자매님.....

 

4년을 자기 아파트 화단에서 담배꽁초를 말없이

주었는데 4년이 지나자 사람들이 화단에 담배꽁초를

버리지 않더라는 모니카 자매의 실천적 삶이

나를 깨운다.

 

막걸리를 부른다.

 

그렇게 나는 모니카 자매의 복음 음미하며

막걸리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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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좌파, 대안노조, 개밥바리기별

3주간 정신이 없어 독서일기를 쓰지 못했다.

그래도 몇권의 책을 읽었으니 간단히 메모라도 해두자~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와 대안좌파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와 대안노조

윤소영 교수의 연구노트이다.

서울에 있는 친구가 읽어보라고 권유하며 책까지 주기에 낼름 받아 읽었다.

짧은 연구노트는 독해가 어렵긴 하다.

이런 연구노트는 글로 느낌점을 요약하기 참 힘들다.

하지만 현 쟁점을 이야기 하니 흥미롭다.

혁명의 객관적 조건으로서 자본주의의 위기(또는 금융세계화)와 그 주체적 조건으로서 공산주의적 이해(대안세계화)을 대상으로 설정한다는 의미에서 세계시장 분석은 『자본』으로 환원될 수 없는 구체적 정세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어야 한다.....베르티노티의 대안사회강령과 공동정부강령은 정세분석에 대한 알튀세르의 입장, 즉 자본과 노동사이의 단순한 계급관계가 아니라 계급들 또는 그 분파들 사이의 복잡한 세력관계를 정세분석의 대상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현정세에서 한층 더 구체화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윤소영,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와 대안좌파』

 

서문의 이야기가 이 책에 핵심이 아닐까 한다. 주체적 조건으로서 분열되는 운동이 핵심적인 문제라고 제기한다. 맞는 이야기다. 무조건적 단결을 안되지만 대략 비슷한 부류들이 먼저 단결해야 하지 않을까한다. 정세는 때에 대한 이야기이다. 약간 늦은감이 있긴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책으로 몇 몇이 토론을 하기로 했다. 토론을 하면서 느낀점을 정리하면서 적도록 하자.

 

2월부터 직장을 옮기고 옮긴 직장은 한달에 한번 책 토론을 한다.

3월의 책은 황석영의 개밥바리기별이다.

소설을 별로 읽지 않는 나로서는 문체에 적응하느라 고생을 했다.

하지만 이내 여러사람의 시선으로 써내려간 황석영의 성장 소설을 보니

참으로 시대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알싸하다.

작가 황석영은 이제 그 시대로부터 좀 자유로워진걸까?

궁금하다.

60-70년대에 젊은 날을 보냈을 작가의 삶~~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순간 나이가 너무 들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자유의지로도 어쩌지 못하는 시대속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그 시대속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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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대통령을 대하는 21세기 시민의 자세

20세기 대통령을 대하는 21세기 시민의 자세

 

 

인터넷의 쌍방향 소통에 익숙한 21세기 시민은 20세기식 일방향 소통에 익숙한 대통령에게 화가 났습니다. 대통령이 20세기에나 있을 법한 담화문 정도로 국민들에게 일방적인 자기 생각을 관철시키려 하니 21세기 시민들은 당황스럽고 황당할 뿐입니다.

 

지금도 상업적이고 친국가적인 방송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기업과 국가권력 아래로 미디어를 통제하겠다는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발상은 개그콘서트이 복학생을 생각나게 합니다.

 

21세기 시민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은 다원성, 창발성, 자율성이 중요한 덕목인데 이를 역행하는 일제고사는 20세기식 교련의 부활일뿐입니다.

 

법과 질서가 필요한 건 금융사기와 부동산 투기 그리고 요즘은 환율로 차익을 챙기는 돈이 남아돌아 어디에 써야 할이지 모르는 소수의 부유층이지 가계부채로 쫄딱 망하게 생긴 서민들이 아닙니다. 빚내서 가게 열었는데 재개발로 쫓겨 나야하는 철거민이 아닙니다.

 

21세기 시민은 대통령이 동시대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한나라당과 이명박 대통령이 잃어버린 10년을 운운하며 스스로 20세기로 회귀해버리고 말았으니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그러나 21세기 시민은 이미 20세기의 역사를 간직한 사람이기에 20세기 대통령을 21세기로 인도합니다. 21세기 시민들은 20세기 인류 역사의 아픔을 알기에 21세기 시민답게 행동합니다. 그러므로 21세기 시민들은 다음과 같이 행동합니다.

 

○아이들의 창발성, 자율성, 다원성을 훼손하는 일제고사 대신 현장학습을 통한 전인교육을 지지하며 적극 동참합니다.

 

○20세기 신문으로 21세기 시민들을 우롱하는 조선,동아,중앙일보와 같은 구(久)문은 보지 않으며 편파, 왜곡이 없는 21세기 신문을 구독합니다.

 

○전쟁의 세기 20세기로 회귀하며 한반도에 분쟁을 조장하는 모든 군사적 행동에 반대하며 평화를 위한 적극적 평화 행동을 지지하며 이와 함께 합니다.

 

○이윤에 눈이 멀어 광우병 위험 미국산 소고기를 판매하는 대형 할인 매장를 가지 않으며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상생할 수 있는 윤리적 소비를 지향합니다.

 

○모두가 함께 사는 대한민국을 기원하며 사회의 공공성 회복을 위한 21세기 시민행동을 지지하며 적극적으로 함께 합니다.

 

○21세기 시민들은 자율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며 서로 협력합니다. 21세기 시민들은 적극적인 의사표현과 쌍방향 소통을 통해 다중의 지성으로 세계금융위기가 서민의 고통이 되지 않도록 하며 평화와 행복의 21세기를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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