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상 님과 토론중 4

조지스트와의 대화

1. 김윤상 님이 토론할 의지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합리적인 반론 없이 어떻게든 대충 수습하고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것 같다.

그는 "지대조세제에서 지대세 부담이 노동자들한테 떠넘겨질 수 있다"는 게젤의 주장에 대하여 반론하지 않았고, 지대조세제나 토지공공임대제나 마찬가지로 전가된다고 하였다
소수의 경제주체가 시장을 독과점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공임대제의 경우에도 임차인이 시장 지배력을 가지고 있으면 자신이 국가에 납부하는 임차료를 전가시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동통신 주파수를 통신 3사가 경매를 통해 국가로부터 임차했는데, 경쟁이 치열해지자, 결국 통신 3사가 독과점 권력을 발휘하여 통신 소비자에게 높아진 임차료를 전가할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습니다.

저는 지대조세제가 더 낫다고 한 게 아니라, 전가라는 면에서는 공공임대제라고 더 나을 게 없다고 했을 뿐입니다.

-김윤상 교수


이것 참 웃기는 얘기 아닌가?
전가가 된다면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둘 다 전가된다면 둘 다 효과가 없다는 얘기인데
지대조세제는 왜 해야 하나?

조지스트의 입으로 지대조세제와 토지공공임대제 모두 효과가 없음을 고백했다
자폭인 셈이다

 

 

2. 김윤상 님과의 토론을 복기해보자.
필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땅주인은, 노동자가 공짜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 이상을 남겨줄 이유가 없으며, 그 나머지는 지대로 거둬들인다.

(2) 따라서 지대조세제로 얻은 세수로 복지를 하면, 그것은 '공짜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를 늘린 게 아니므로 노동자의 노동대가를 늘려주지 못한다. 국민들이 복지로 얻는 혜택은 임대료 상승으로 상쇄된다. 따라서 지대조세제가 아니라 토지공공임대제를 해야 한다.


김윤상 님은, 필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리에서 "토지공공임대제=공짜땅"에 의문을 제기했다. 중요한 논점을 되짚어보자.

김: 공공임대제도 임대료 받지 않나?
$: 하지만 그건 복지로 돌려받는다. 그러니까 공짜땅과 같다.

김: 지대조세제도 복지를 하지 않나?
$: 그 효과는 임대료 상승으로 상쇄된다. 그리고 그 임대료는 개인이 사유한다. 그러니까 공짜땅이 아니다

김: 경제학의 통설에 의하면, 지대세는 전가 안된다고 하는데?
$: 지대세는 땅주인이 내지만, 그 세금을 임대료에 집어넣을 수 있다. 그럼 세입자가 내지 않나?

김: 지대세 걷어서 복지에 쓰면, 그건 땅 자체에서 나온 게 아니니까 임대료에 넣을 수 없지 않나?
$: 그 땅에서 살아야 복지혜택 받지 않나? 그러니까 넣을 수 있다.

김: 그렇게 떠넘기는 건 토지 독과점 때문 아닌가?
$: "독과점이냐, 계민수전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계민수전도 땅사유권을 인정하지 않나? 땅사유권을 인정하면 지대가 사유화된다. 땅 소유권은 인정하지 말고 사용권만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공공임대제 해야 한다.

김: 공공임대제도 지대가 오를 때 임대료 올리지 않나?
$: 올린다. 하지만 복지효과가 상쇄되지 않는다. 올린 임대료를 모두가 공유하니까.

김: 공공임대제도 임차인이 시장지배력을 가지면 임차료 떠넘길 수 있지 않나?
$: 시장지배력은 화폐제도 문제다. 돈 액면가가 불변하면 돈소유자가 돈을 쌓아둘 수 있다. 그것이 거래를 끊을 수 있는 힘, 시장지배력의 본질이다. 그래서 공짜돈 개혁도 해야 한다.


땅에 대해서 소유권은 인정하면 안되고 사용권만 인정해야 한다.
소유권은 지대를 개인의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조세로 몰수되지 않는다.
몰수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세입자한테 떠넘겨진다.

화폐문제도 비슷하다.
돈이 낳는 이자는 조세로 몰수되지 않는다.
자본가는 몰수당한 만큼을 다시 이자에 더해서 받아낼 수 있다
왜?

땅과 돈 자체는 감가상각이 안되니까.
땅과 돈이 필요한 쪽은 긴급히 필요하고, 땅주인과 돈주인은 여유가 있다.
이것으로 게임은 시시하게 끝난다.
한쪽은 반드시 필요한데, 다른 쪽은 굳이 거래하지 않아도 된다면 이미 불공정한 싸움이다.
여기서 지대와 이자를 부과할 수 있는 힘, 지대세 이자세 부담을 떠넘길 수 있는 힘이 나온다
노동자들은 땅주인과 돈주인을 이길 수 없다.
조세로 몰수해도 그 부담이 다시 노동자들한테 떠넘겨진다

어떤 사람은 땅주인이 지대세를 떠넘기려고 할 때
세입자가 다른 땅으로 갈아탈 수 있으니까 떠넘기지 못할 거라고 하는데,
그 갈아타는 땅도 임대료를 내야 하는 땅 아닌가?
그러면 그 땅주인도 지대세를 떠넘길 것 아닌가?
"다른 땅으로 갈아타니까 지대세를 떠넘길 수 없다"고 하려면
그 다른 땅이 공짜땅이어야 한다.

분명히,
노동자들한테 땅주인의 땅과 돈주인의 돈 대신 다른 대체재가 있다면,
땅주인의 땅과 돈주인의 돈에 의존하는 정도가 제한될 것이다

게젤에 따르면, 기존 경제시스템에서 땅주인의 땅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크게 3가지다.
1. 어디에 남아있을지 모르는 진짜 공짜땅
2. 소액의 비용을 내고 쓸 수 있는 땅, 즉 거의 공짜땅
3. 땅을 집약적으로 활용하여 얻는 '공짜땅이 생기는 것'과 같은 효과

이것들의 존재는 땅주인이 임대료를 어느 한도 이상 올리지 못하게 만든다.
어느 한도 이상으로 올리면 사람들은 위의 수단으로 도피할 수 있으니까.

돈주인의 돈을 대체하는 것은 크게 2가지다.
1. 물물교환
2. 환어음

이것들의 존재는 돈주인이 이자를 어느 한도 이상 올리지 못하게 만든다.
어느 한도 이상으로 올리면 사람들은 위의 수단으로 도피할 수 있으니까.

그러므로,
땅주인의 땅끼리 경쟁하여 지대가 떨어지는 게 아니다
돈주인의 돈끼리 경쟁하여 이자가 떨어지는 게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총지대, 총이자다.
개별 토지의 지대가 아니라 국내 모든 땅의 지대를 합한 값이고,
개별 대출금의 이자가 아니라 모든 대출금의 이자를 합한 값이다.)

땅주인의 땅은 위의 세 가지 부류의 공짜땅과 경쟁하며
돈주인의 돈은 물물교환, 환어음과 경쟁한다.

조세로 몰수한 지대를 만일 위의 세 가지 부류의 공짜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를 늘리는데 사용한다면, 그 세금은 노동자들한테 떠넘겨질 수 없을 것이다.
조세로 몰수한 이자를 만일 물물교환과 환어음 사용을 촉진하는데 사용한다면, 그 세금은 노동자들한테 떠넘겨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지대와 이자를 억제할 뿐,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완전히 제거하려면 실비오 게젤이 제안한 공짜땅 공짜돈 개혁을 해야 한다.
즉, 한 나라의 땅과 돈을 모두 공짜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소유가 아니라 사용임에 유의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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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사회유기체의 슈퍼박테리아

칼럼

IS의 테러로 세상이 어지럽다.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은 IS의 근거지라는 시리아를 공습했다. 하지만 필자는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불러올 것이라고 본다.

사회를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로 보면 IS는 슈퍼박테리아와 같다. 화폐제도와 토지제도의 결함으로 사회유기체의 일부에 염증이 발생한다. '사회유기체의 미생물'인 사람들의 불만이 늘어나고 다툼이 늘어나며 사회적 긴장이 높아진다. 그러면 기존 정치체계는 그것을 인위적으로 억제하는 해법을 내놓는다. 경찰이나 군대를 동원해서 그 불만을 억누르는 것이다. 또는 그런 불만세력들을 외부에서 침입한 이질적인 존재로 단정짓고 그것들을 배제하려고 한다. 마치 우리 몸 안에서 문제를 일으킨 미생물들을 외부에서 침입한 것으로 보는 것과 같다. 그래서 항생제를 투여해서 그런 미생물의 활력을 감퇴시킨다. 하지만 미생물은 다시 더 강해져서 돌아온다. 내성이 생기고 그런 억제력을 견디고 더 많은 염증을 유발하면서......그 최종 결과는 슈퍼박테리아다.

IS는 슈퍼박테리아와 같다. IS의 근거지는 시리아가 아니라 무슬림들에 대한 차별과 멸시이며, 그런 민족간 인종간 증오의 뿌리는 결국 화폐제도와 토지제도의 결함이다. 넉넉한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고 하지 않던가? 미국인들과 유럽인들은 경제위기로 자기들 삶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했다. 그것이 다른 민족이나 이교도에 대한 적대감을 고양하고 있다. 프랑스의 한 풍자잡지에서 무슬림들을 노골적으로 비웃는 내용의 글이 실렸을 때 크게 한 번 터지겠구나 생각했다. 누구나 풍자의 대상이 될 수는 있다. 그것은 정치적 자유의 문제다. 하지만 차별과 멸시로 억눌린 감정들이 그런 비웃음을 견뎌내겠는가? 분노가 폭발하고 모든 것을 쓸어버리게 되지 않겠는가? 모든 것을 풍자의 대상으로 삼을만한 용기가 있다면, 왜 사회문제를 더 깊이 파고들어가지 않는가? 왜 철없는 아이들처럼 조금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비웃는 것에서 멈추는가? 경제질서의 결함을 포착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파리 사람들, 구미 선진국들은 여론몰이를 통하여 IS를 왕따시켰다. IS를 고립시켜서 그들이 또 다른 인적 재정적 자원을 흡수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기존 경제시스템 아래에서 갈등과 분노는 필연적으로 생길 수 밖에 없고, 그것은 모두 IS같은 세력에게 힘을 실어주게 된다. IS는 고립되지 않기 위해 가면을 쓰고 훨씬 더 사회 속으로 깊이 파고들 것이다. 이것은 곧 사회유기체의 병이 깊어짐을 의미한다.

화폐제도와 토지제도라는 사회적 네트워크가 올바르게 설정되지 않는 한, IS가 아니더라도 그것은 계속 더 위험한 형태의 불만세력으로 진화하여 사회 전체를 위협할 것이다. IS의 확산은 FRB, ECB, 각국 경제정책이 실패하였다는 명백한 증거다.

IS는 생명체 특유의 분산화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파리에서 폭탄이 터진지 얼마 안되어 아프리카에서 터지고 그 다음에는 미국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반면에 유럽과 미국의 대응은 기계적인 중앙집중형이다. 시리아 대규모 공습은 힘을 한 곳에 쏟아붓는다. 하지만 불만이 있는 사람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무슬림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자를 가진 종교 중 하나다. 그러니 어떻게 이 문제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인체와 사회유기체의 문제에 대한 대응방법이 서로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그렇다면 그 결과도 마찬가지 아닐까? 여기서 해법은 오로지 게젤의 안을 채택하는 것 뿐이다.

경제질서의 문제를 제대로 알아보려면 분석보다는 어떤 종류의 직관이 필요한 것 같다. 우리가 목격하는 사회현상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어떤 공통적인 내러티브를 포착해내야 하는데, 이건 분석으로는 불가능하다. 어쩌면 우리가 접촉해야 하는 사람은 경제학을 하는 사람 뿐만이 아니라 의학, 심리학, 종교 쪽에 있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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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3 23:18 2016/06/13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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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상 님과 토론중 3

조지스트와의 대화

김윤상 님과 토론중입니다. 김윤상 님의 글은 파란색으로 표시하였습니다. 나머지는 내 글입니다.

 

1. >무슨 뜻인지요? 전가라는 용어는 세부담이 다른 쪽으로 이동하는 걸 말하는 것 아닌가요? (이런 표현을 보면 서로 용어와 전제가 상당히 달라 토론이 어렵지 않나 하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지대세 자체는 땅주인이 내지만 그 실제 부담은 노동자와 임차인이 진다는 것입니다. 됐습니까? (이 정도는 문맥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 아닌지?)


2. > 저는 지대조세제가 더 낫다고 한 게 아니라, 전가라는 면에서는 공공임대제라고 더 나을 게 없다고 했을 뿐입니다. 현실적 집행의 난이도에 차이가 없다면 저는 지대조세제나 공공임대제나 다 좋다고 봅니다. (상대방이 주장하지 않은 것을 비판하는 오류를 논리학에서 허수아비 치기라고 합니다.)
3. > 공짜돈은 우리의 토론 주제가 아니지만, 게젤의 주장이 맞다면 공공임대제는 공짜돈 개혁과 병행할 때 지대조세제보다 낫다고 해야 하겠지요. 아마도 이런 정도에서 토론을 종결해도 좋지 않을까요? 성의를 보여주어 고맙습니다.

->"게젤 논리가 어떻든, 소수의 임차인이 시장을 지배하므로 양쪽 다 전가된다." 이런 뜻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소수의 임차인이 시장을 지배하는 건 토지제도 문제가 아니라 화폐제도 문제입니다. 님이 제시한 예에서 소수의 임차인이 시장을 지배하는 이유는,
그들이 돈을 쌓아두고 재화와 교환할 수 있는 시간을 맘대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돈을 쌓아둘 수 있는 것은 많은 거래를 끊어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진 것과 같다. 그 돈은 원래 계속 순환하면서 교환을 매개해야 하는데, 그 흐름을 끊어버리거나 다시 이을 수 있는 힘이 돈소유자한테 있는 것. 그런 힘은 돈 액면가가 불변하는 성질에서 비롯한다. 다른 재화처럼 낡고 닳고 썩고 보관료가 드는 등 비용이 소모된다면 반드시 교환되어야 하겠지만 그런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에 바로 교환되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스탬프머니 등의 방법으로 돈 액면가를 정기적으로 감가상각한다면 돈이 모두 계속 규칙적으로 순환하고 돈이 많은 곳에서 적은 곳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소수의 경제주체가 대부분의 거래를 독과점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김윤상 님이 제시한 예는 토지제도가 아니라 화폐제도의 문제이며, 돈을 개혁해야 해결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화폐제도 문제를 해결해도 토지제도의 문제가 남습니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별개입니다. 즉 돈을 개혁해서 소수가 시장을 지배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도 땅사유권이 문제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땅사유권을 남겨두고 지대조세제를 하면 지대세 수익을 '공짜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를 늘리는데 사용하지 않는 한 지대세 부담이 떠넘겨질 수 있다. 공공임대제는 그런 문제가 없다.

김윤상 님은 이에 대하여 아직 반론을 하지 않았습니다. 님은 새로운 의견을 더했을 뿐 게젤의 논리 자체에 대하여 반론을 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새로 더한 의견, 즉 소수가 시장을 지배하는 문제는 토지문제와 별개로 다루어져야 합니다. 이자, 실업, 경제위기 등에서도 실비오 게젤과 헨리 조지가 의견이 갈리는데 이에 대해서도 님은 아직 반론을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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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3 22:12 2016/06/13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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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상 님과 토론중 2

조지스트와의 대화

글이 조금 번잡한 듯 하여 단순하게 다듬었습니다.  

 

김윤상 님과 토론중입니다. 김윤상 님의 글은 파란색으로 표시하였습니다. 나머지는 내 글입니다.

 

정봉수 님이 말씀하시듯이 두 제도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지대세 또는 임대료의 전가 여부입니다. (전가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이미 지난 4월 23일에 아래와 같은 의견을 게시했습니다.)

[16/4/23 게시했던 의견입니다]

여러 가지를 참고해보니 핵심적인 차이는.... 실비오 게젤은 토지사유제를 그냥 둔 채 지대세를 부과하면 세액이 전가된다고 보는 데 있군요. 지대세가 임금노동자에게 전가된다면 당연히 지대조세제가 노동자에게는 도움이 안 되지요. 반면 (주류)경제학의 통설은 토지의 공급탄력성이 0이므로 완전경쟁시장에서 지대세는 전가 등 경제 왜곡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고요. 그렇다면 지대조세제로 할 것인가, 국유화한 후 공공임대제로 할 것인가는 현실의 전가 가능성에 따라 달라집니다. 저는 현실에서는 전가 가능성이 있지만 제도의 효과를 망칠 정도는 아닐 뿐더러 지대세로 인해 지주의 독점력이 점점 줄어든다는 낙관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낙관론이 전혀 안 맞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 그 주장에 대하여 저도 이미 http://blog.jinbo.net/silviogesell/207 에서 반론을 한 바 있습니다.  지대세 자체가 전가되지 않는다고 지대세 부담이 전가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위의 의견은 제 글에 대한 반론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의견에 덧붙이자면, 공공임대제의 경우에도 임차인이 시장 지배력을 가지고 있으면 자신이 국가에 납부하는 임차료를 전가시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동통신 주파수를 통신 3사가 경매를 통해 국가로부터 임차했는데, 경쟁이 치열해지자, 결국 통신 3사가 독과점 권력을 발휘하여 통신 소비자에게 높아진 임차료를 전가할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습니다. (게젤이 든 예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경쟁이 치열한 시장이라면 마음대로 전가할 수 없겠지요.)

 

->김윤상 님이 덧붙인 의견, 다시 말해 '토지공공임대제에서 대기업의 시장지배로 토지세 부담이 전가될 수 있다'는 그 의견이 만일 맞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대조세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므로, 그 의견은 지대조세제를 토지공공임대제보다 낫다고 할만한 이유를 조금도 제공하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게젤의 해법에서는 공짜돈 개혁 때문에 소수의 임차인이 시장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님이 제기한 문제는 오히려 게젤이 제안한 공짜땅 개혁(토지공공임대제)과 공짜돈 개혁을 해야 할 이유를 더 강하게 뒷받침해줍니다. 공짜돈 개혁은 다음에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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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1 18:49 2016/06/11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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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상 님과 토론중

조지스트와의 대화

*김윤상 님과 토론중입니다. 김윤상 님은 한국의 대표적인 조지스트 중 한 명입니다. 앞서 나는 또 한명의 조지스트인 남기업 님과 인터넷으로 접촉하여 실비오 게젤의 경제이론을 소개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내가 보낸 편지를 건성으로 읽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지대조세제를 여전히 긍정하기에, 그에게 합리적인 반론이 있는지 궁금하여 알아보았으나 그는 납득할만한 대답을 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진지함 역시 결여된 것처럼 보였고, 이 토론광장의 다른 회원들 상당수 역시 인신공격과 논지 흐리기 등을 일삼으면서 토론을 방해하였습니다. 이에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하였고 김윤상 님이 드디어 진지하게 토론에 응하신 것 같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 토론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김윤상 님이 여기서 도망가시면 뭇사람들의 웃음거리만 될 뿐입니다. 물론 저의 목표는 조지스트 한 명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게 아니라, 실비오 게젤과 헨리 조지의 접점을 발견하고 명확하게 만들려는데 있습니다. 결론만 말하면, 지대조세제가 분배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토지공공임대제를 실현하는 것이 옳고 토지공공임대제를 실현하는 전략을 연구하는 것이 맞습니다. 내 글에 대한 합리적인 반론이 없다면 토지공공임대제로 방향을 선회해야 할 겁니다. 김윤상 님의 글은 파란색으로 표시하였습니다. 나머지는 내 글입니다.

 

 

 

용어와 전제가 서로 다르면 토론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해하려고 노력해봅니다.

1. 정봉수 님이 경제학에서 흔히 사용하는 한계토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굳이 ‘지대를 내지 않아도 되는 땅’이라고 표현하시는 걸로 짐작하면 ‘지대를 내지 않아도 되는 땅’이 지대조세제와 공공임대제 간에 다르고 또 지대조세제에서 결정되는 지대액과 공공임대제에서 징수하는 임대료가 서로 다르다고 보시는 듯.

-> ‘공공임대제도 임대료를 걷으니까 같지 않냐?’는 뜻 같습니다. 하지만 지대조세제와 공공임대제는 다릅니다. 지대조세제는 토지세 부담이 임차인과 노동자들한테 떠넘겨질 수 있죠. 이게 결정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인용: http://www.silvio-gesell.de/en/neo/part1/11.htm )

 

공공임대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공공임대제에서 지대는 공공기금으로 들어갔다가 모든 국민의 복지재정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지대를 내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인용: http://www.silvio-gesell.de/en/neo/part2/5.htm )

그러므로 저의 논리는 여전히 건재합니다.

 

2. “조세로 지대를 몰수해서 그 수익을 ‘땅사유제 아래에 놓여있는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를 늘리는데 사용”하면 지대가 올라간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지대조세제 수입으로 노동자의 소득을 늘리는 정책을 펼 경우 그 소득 증가액은 토지사용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대가 올라가지 않습니다.

-> 넓은 의미에서 땅을 사용한 것이지요. 그 땅에 살지 않으면 기본소득을 못 받으니까. 예를 들어 A와 B, 이렇게 두 개의 나라가 있다고 가정하죠. 이 중 B는 공짜땅이라고 가정합니다. 만일 A에 살면 기본소득으로 월300만원을 받을 수 있고 B는 그렇지 않다면 당연히 A의 땅주인은 B를 넘는 그 이점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고 할 겁니다. (인용: http://www.silvio-gesell.de/en/neo/part1/5.htm )

 

지대세를 징수하면서 다른 세금을 감면해준다면 토지사용 비용이 줄어 지대가 상승하겠지만 그런 경우에는 공공임대제에서도 임대료가 올라가지 않나요? 지대가 상승해도 임대료를 올리지 않는다면 그건 토지소유자인 국가가 임대료 감면 형식의 보조금을 토지임차인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게젤은 임대료를 감면해주자는 주장은 안 한 것 같은데요. The Natural Economic Order의 Part II 에 보면 토지를 국유화하여 경매를 통해 필요한 사람에게 임대한다고 했거든요.

->이 이야기의 핵심은 그게 아닙니다. 지대조세제는 토지세 부담이 노동자나 임차인한테 떠넘겨질 수 있고, 공공임대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지대조세제에서는 토지세 수익으로 복지를 할 때 그 효과가 상쇄될 수 있다, 공공임대제에서 임대료 받은 것으로 복지를 할 때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토지공공임대제에 대한 실비오 게젤의 생각을 이해하려면, part 2 뿐만 아니라 part 1도 읽어야 합니다. 저는 이 토론을 지켜보고 있는 다른 분들도 이 이야기의 본질을 이해하도록 배려하고 싶고, 이 토론이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그래서 제가 The Natural Economic Order를 한글로 번역한 책 <공짜땅 공짜돈>을 함께 인용하였습니다. 한글번역본에 오역이 있거나 더 나은 번역을 제안하고 싶으면 알려주십시오.

저는, 혹시 게젤이 틀렸을 가능성을 염두해두고 김윤상 님이 번역한 <진보와 빈곤>을 작년에 여러 번 읽어보았습니다. 아직까지 저의 잠정적 결론은, 토지개혁과 분배, 사회개혁의 전체 그림에 관하여 실비오 게젤이 옳고 헨리 조지가 틀리다는 것입니다. “실비오 게젤이 헨리 조지보다 낫다”가 아니라 “실비오 게젤이 옳고 헨리 조지가 틀리다”고 한 이유는 헨리 조지가 지대조세제로 후퇴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 말고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헨리 조지로는 이자,경제위기,실업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인용: http://www.silvio-gesell.de/en/neo/part2/6.htm )

 

그리고 헨리 조지의 이자이론은 틀렸습니다. (인용: http://www.silvio-gesell.de/en/neo/part5/6.htm )

 

저는 게젤의 사상과 저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합리적으로 반증하시면 납득할 것이고 오히려 감사하게 여길 겁니다. 마찬가지로 님도 그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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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6 22:37 2016/06/06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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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토론방법을 모른다

조지스트와의 대화

이 글은 '토지+자유 토론광장'에서 <지대조세제가 지대를 제거할 수 없다>는 주제에 대하여 토론하는 중에 올리는 글입니다. 

 

 

 

너희는 밤을 낮처럼 생각하여
흑암 가운데 있으면서도 빛이 가깝다고 말하는구나.
<욥기 17:12>

 

 

 

1. 다음과 같은 논증이 있다고 가정하자.

(1) A는 B다
(2) B는 C다
(3) 따라서 A는 C다

여기서 올바른 반론은
(3)이란 결론을 도출하는데 사용한 (1)이나 (2)가 거짓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즉, 추론과정을 구성하는 명제들이 거짓임을 드러내어
그 추론으로 나온 결론을 부정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A는 D다. 따라서 A는 C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반론이라고 할 수 없고, 일방적인 진술에 속한다.

100명이 토론을 하는데 상대방의 주장에 대하여 반론하지 않고 제각기 자기 주장만 새롭게 더한다고 하자. 결론이 나겠나? 그런 건 토론이 아니다. 서로의 이야기가 맞물리지 못하여 아무 결론도 얻지 못하고 공회전만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상당수의 토론이 쓸모없는 말싸움으로 끝나는 이유가 아닐까?

조지스트는 토론방법을 모른다.
내 논증은 헨리 조지의 임금지대법칙에서 추론된 것이다.
내가 전개한 추론의 과정에서 결함을 찾아낸 사람이 있던가? 없다.
그들은 그냥 기존 입장을 맥없이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네 말은 틀려, 왜냐하면 내 말이 맞기 때문이야" 이게 그들이 하고 있는 얘기의 전부다.
그러나 진정한 반론이라면 "너의 추론은 이러이러한데, 그 과정에서 이러한 전개부분은 이러하므로 오류야. 따라서 그런 추론과정에서 끌어낸 너의 결론은 참이 아니야"라고 얘기해야 한다.
내 논리를 직접 건드려야 반론이 된다
조지스트 가운데 누가 그렇게 했는가?
남기업 님, 김윤상 님, 조성희 님이 그렇게 하였는가?
그들은 내가 제기한 추론에 정면으로 부딪히지 못하고
그저 일방적 진술만 늘어놓고 있을 뿐이다.

난 그 분들을 위하여 반론의 가이드라인까지 친절하게 제시해드렸으나,
여전히 그들은 내 논증에 대해서는 꿀먹은 벙어리
다.

그들이 주장한 것들은 지대조세제가 지대를 제거할 수 있어야만 유효한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음을 나는 이미 '헨리 조지의 임금지대법칙'으로 증명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내 논리를 먼저 반박해야 하지 않나?

그들은 "이해가 안된다"고 둘러대고 있다.
사실 "이해가 안된다"는 얘기는 고등학생이 웃을 얘기다
어려운 한자가 섞였나? 영어로 말했나?
쉬운 우리말로 적었는데 왜 이해가 안되나?
정말 이해가 안된다면, 이해가 안되는 부분과 이해가 안되는 이유를 명확하게 적시해야 할 것이다. 그 정도의 성실함도 없다면, 지성은 둘째치고 토론에 임하는 태도가 불량한 것이다. 이 토론장에서
토론을 회피하는 모습들, 은근슬쩍 무마하고 넘어가려는 움직임이 포착된 게 어디 한 두번인가?

이 토론광장에 지금까지 토론은 없었다. 그저 '비슷한 어리석음'을 공유한 채 무기력한 서로를 위로했을 뿐.

여러분 가운데 정말 권위자가 있다면 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다음과 같은 상식적인 지적조차 감당하지 못하는가?

(1) 땅주인은, 노동자가 '지대를 내지 않아도 되는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 이상을 남겨줄 이유가 없으며, 그 나머지는 지대로 거둬들이게 된다. 여기서 노동자가 '지대를 내지 않아도 되는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는 임금이 되고, 그 나머지는 지대가 된다. 이 경계가 지대선이 된다.<헨리 조지의 지대임금법칙>

(2) 따라서 조세로 지대를 몰수해서 그 수익을 '땅사유제 아래에 놓여있는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를 늘리는데 사용할 때 그것은 '지대를 내지 않아도 되는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를 늘린 게 아니며,

(3) 따라서 지대조세제는 임금을 늘리는 게 아니라 지대를 늘리게 된다.

 

내가 <헨리 조지의 지대임금법칙>을 잘못 알고 있나? 내가 그 법칙을 현실에 잘못 적용했나? 나의 추론과정에 오류가 있었나? 여러분의 댓글은 일방적 진술로 가득할 뿐, 이 세 가지 질문에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2. 사실 여러분들은 먼저 이렇게 반론했어야 했다.

"당신 말대로, 아니 헨리 조지의 말대로 노동자들의 노동대가가 지대를 내지 않아도 되는 '공짜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로 결정된다고 하자. 그렇다면 현재 노동자들의 임금은 어떻게 된 것인가? 지대를 내지 않아도 되는 땅은 거의 없지 않나? 공짜땅은 없지 않나? 그렇다면 노동자들의 임금 역시 없어야 하지 않나? 따라서 헨리 조지의 지대선 개념은 틀렸다고 할 수 있지 않나?"

오, 하지만 불쌍한 조지스트들이여, 그대들은 이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자폭이니까. 하지만 조지스트가 아닌 자들, 즉 도그마에 갇히지 않은 자들 가운데 지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위와 같은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그 모순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헨리 조지가 세운 경제학은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니까.) 아마도 실비오 게젤도 그랬을 것이다. 그는 위와 같이 물었을 것이고, 헨리 조지의 지대임금법칙이 틀렸다고 성급하게 단정짓기 전에 '공짜땅'이라는 개념을 좀 더 깊이 파고들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공짜땅'을 세 가지 부류로 분류하였다.

(1) 말 그대로 공짜땅, 지대를 내지 않는 땅

(2) 무시해도 될 정도의 금액만 지불하고 이용할 수 있는 땅, 즉 현실 속에 존재하는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땅'

(3) 땅을 집약적으로 이용할 때 생기는 공짜땅, 즉 비료를 사용해서 더 적은 땅으로 필요한 농산물을 생산할 때 그만큼 새로운 땅이 생기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는 것, 또는 고층건물을 건축해서 더 적은 땅으로 필요한 거주면적을 확보하여 공짜땅이 생기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는 것. 이것은 '공짜땅'을 기능적인 개념으로 이해한 것이다. 실제로 땅이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땅이 늘어난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를 낳는 것.

 

이렇게 공짜땅을 이해할 때, 헨리 조지의 지대선 개념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 개념은 여전히 쓸모있다. 노동자들의 노동대가를 결정하는 것은 이 가운데 3번이다. 실제로 물리적인 형태의 공짜땅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기능적으로 공짜땅이 생긴 것과 같은 효과를 낳는다면, 거기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는 노동자들이 주인이 있는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를 결정짓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여러분이 아직도 미련을 못버리고 붙잡고 있는 지대조세제는 무효함을 알 수 있다. 지대를 조세로 몰수한 다음 그것을 기본소득에 사용할 때, 그것은 위의 1,2,3번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 중 어느 것도 늘리지 못한다. 1,2번은 물론이거니와 3번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도 올리지 못한다. 3번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를 늘린다는 것은 땅을 집약적으로 활용하는 기법 또는 기술이 더 발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본소득' 형태의 지급은 땅을 집약적으로 활용하는 것과 아무 관계가 없다. 따라서 그것은 노동자들의 노동대가를 늘리지 못하고 지대로 흡수된다. 헨리 조지의 지대선 개념과 지대조세제라는 해법은 완전히 모순된다. 여러분이 지대선 개념에 동의한다면 지대조세제를 긍정할 수 없다는 얘기다. 효과가 없는 방법을 붙잡고 있는 것은 시간낭비다. 토지공공임대제가 아무리 어려운 목표라고 해도 효과가 없는 지대조세제를 붙잡고 있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낫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그렇게 어려운 목표가 아니다. 다음에는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추신: 합리적 반론이 아니라면 내 글에 댓글을 달지 말기 바란다. 무작정 댓글을 달기 전에 내 주장이 어디 위에 서 있는지 보라. 조지스트 여러분이 신앙으로 삼는, 헨리 조지가 세운 기본개념이다. 정말이지 대꾸할 가치도 없는 진부한 레퍼토리를 읊어대기 전에, 수준낮게 인신공격을 하거나 논지를 흐리기 전에, "이해가 안된다"고 둘러대기 전에 내 글의 논리를 먼저 정확히 이해하기 바란다. 무엇보다 논지를 흐리는 것은 토론자로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다. 그런 사람은 태어나지 않는 편이 차라리 세상에 유익했을 것이다. 왜 태어났나? 귀한 토론 망치려고 태어났나? 시간이 남아도나? 옳은 말을 들으면 왠지 배알이 꼴려서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가? 그러고도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려고 태어났나? 진지함, 토론에서 필요한 건 오직 그것 뿐이다. 감성팔이나 할 거라면 피켓 들고 거리에 나가서 관심을 구걸하면 될 일이다. 그걸로 아무것도 얻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삽질, 어리석은 합창, 바보들의 끈끈한 동지애...그런 행위의 바탕에 그것들 말고 또 뭐가 있나? 애초에 그런 사회운동의 방법은 합리적 문제해결의 과정이라고 할 수 없다. 왜인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3. 사회운동가들은 흔히 자신들의 활동을 '투쟁'이라고 부른다. 투쟁은 '싸운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무엇과 싸우고 있나? 인간의 본성과 싸우고 있다.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 자기 이익을 좇는 마음이다. 그 마음은 일반대중 뿐 아니라 사회운동가한테도 존재한다. 따라서 그들은 남과 싸울 뿐 아니라 자신과도 싸워야 한다. 그것은 명백히 소모적이다. 그리고 위선만 낳을 뿐이다. 따라서 그런 사회운동은 종국에는 실패할 경로에 놓여있다. 인간의 본성과 싸울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활용해야 한다. 자기 이익을 좇는 마음이 사회운동의 동력이 되게 해야 한다. 여러분들이 '투쟁'하는 한 여러분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여러분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거센 파도를 거스르지 말고, 그 파도에 올라타서 서핑을 해야 한다. 그래야 가장 멀리 나아갈 수 있다. 중산층이 토지공공임대제로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확신케 한다면 토지공공임대제를 쉽게 실현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되겠나? 생각해보라.

여러분이 피켓을 들고 거리를 방황할 때, 여러분은 소수의 따뜻한 눈빛과 대다수의 관심없는 자 또는 흘겨보는 자를 발견하게 된다. 여러분은 소수의 따뜻한 눈빛을 위로 삼아 오늘도 삽질을 계속 하겠지만, 사실은 대다수의 관심없는 자와 여러분을 흘겨보는 자야말로 여러분 운동의 결과를 좌우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관심없는 자는 여러분의 운동이 자신에게 특별한 이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흘겨보는 자는 여러분의 운동이 자신들의 이익에 반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틀리다고 말하고 싶나? 그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익에 관한 한 여러분들보다 진지할 것이 분명하다. 여러분은 정의를 읊어대지만 대중들은 자기의 이익이 곧 정의이며, 여러분의 정의가 자기의 이익을 갉아먹는다고 생각한다면 자기들의 귀를 막거나 여러분의 입을 막을 것이다. 이것은 여러분이 아무리 고매한 이상을 가져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여러분의 운동방식이 바뀌지 않는 한 5천년이 지나도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4. 조성희 님은 최근 자신의 글 '지대조세제'에 대한 소고에서 나의 주장을 완곡하게 무마하고 넘어가려고 하였다.  

혹자는, 토지사유제 하에서 지대조세제를 실시할 경우 지대의 전가 발생하고, 세금을 공익사업에 투자하게 되면 결국은 토지소유자에게 이익이 돌아가기 때문에 토지사유제가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세율을 단계적으로 높이며 적용하게 되면 초기에는 일시적으로 지대의 전가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지대조세제가 확고한 정책으로 결정되고 분명한 계획 하에 실시된다면 지가의 거품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제거되기 시작할 것이다. 현재까지 부동산 시장은 투기소득에 대한 기대심리에 의해서 주도되었고 이는 금융정책과 조세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공공복지에 대한 투자는 사회전체에 이익이 된다. 예컨대 지대조세에 따른 세수를 확보하여 교육복지를 구현하게 되면 누구나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교육은 지혜를 함양하고 지식을 보급하고 기술을 연마하여 노동의 효율과 생산성을 높이는 수단이다. 그리고 민주의식을 고양한다. 따라서 권리의식이 높고 지식과 기술을 갖춘 사람이 산업노예생활을 당연하게 생각할리 없다. 따라서 사회개혁은 더욱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그리고 지가의 거품이 사라지면 창업비용이 줄어 자가노동자가 늘게 되고, 중소기업이 활성화되어 노동시장의 정상화가 이루어지면 노동의 가치를 수탈당하는 일도 사라질 것이다.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투자가 지주들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도 틀렸다. 지금까지는 그 혜택이 지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갔지만 지대조세제가 실시되면 그에 따른 지가상승분이 고스란히 세수에 편입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조성희 님은, 내가 <헨리 조지의 지대임금법칙>을 잘못 알고 있음을 증명하지도 않았고, 내가 그 법칙을 현실에 잘못 적용했음을 증명하지도 않았으며, 나의 추론과정을 직접 공격하지도 않았다. 그는 '내 주장에 대한 반론'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에둘러서 '자기 주장'을 하였을 뿐이다. 난 이런 무책임한 반응에 분노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가르치면 된다. 그러나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가망이 없다.

그런데 조성희 님만 이런 게 아니라 남기업 님, 김윤상 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일방적인 진술'은 이 토론광장의 일부 무지한 자들에게는 먹힐지 모르겠으나 지성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사람에게는 어림도 없다. 반론할 수 없다면 그대로 상대방의 주장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은 그런 정직함이 없다. 난 실비오 게젤의 이론으로 헨리 조지를 공격한 게 아니라 헨리 조지의 이론으로 헨리 조지의 해법을 공격했다. 결코 새로운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조지스트 모두가 알고 있고 동의하는 전제로 그의 해법 중 한 가지인 지대조세제가 효과 없음을 논증한 것이다. 이게 이해가 안된다면 당신들, 정말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당신들이 가르치는 학생들도 여기 올 것 아닌가? 그들 중 일부는 이 토론을 보고 뒤에서 얘기할 것이다. "이렇게 명백하게 모순인 학문을 배울 이유가 있는가? 헨리 조지의 경제학에서 기본전제와 해법 사이에 놓인 거대한 모순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다는 말인가? 왜 교수라는 사람이 이렇게 기본적인 논쟁에서 무능한 모습을 보이면서 아무 반론도 하지 못하는가? 우리가 그에게 배울 합당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점잔을 빼고, 헛기침을 하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고 싶겠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늦었다. 이 토론기록은 계속 저장되고 있다. 반론을 하든지, 나의 주장이 옳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당신들이 나의 주장에 대해 책임감 있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바로 당신들이 우리 사회의 '진짜 보수'이며, 진보는 다른 곳에 있음을 우리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진보와 보수는 그저 정치적 입장에 관한 게 아니다. 그것은 소통에 임하는 태도에 대한 것이다. 당신들이 지금까지 이 토론에서 보여준 태도는, 당신들이 욕하는 그 누구보다도 보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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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3 22:42 2016/06/03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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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ólogo - Silvio Gesell - Monedas Complementarias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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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9 00:47 2016/05/29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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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비판

칼럼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도 참신해보이는 진부한 해법을 고집한다. 자본주의 욕을 실컷 하다가 슬그머니 자본주의 안에서 해결하자고 한다. "남편이 때리고 술마시고 바람피고 도박한다"고 투덜대던 여성이 "그래도 남편밖에 없다"며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가는 것과 비슷한 뉘앙스다. 자본주의를 바꿀 것도 아니면서 왜 바가지를 긁나?

장하준 교수가 이 책에서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다음과 같다
"더 잘 규제된 다른 종류의 자본주의가 필요.
인간의 합리성은 한계가 있으므로 파생상품 따위는 만들지 말 것.
인간의 좋은 면을 발휘하게 만드는 경제시스템이 필요.
항상 받아 마땅한 보수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물건 만들기(제조업)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금융부문과 실물부분이 더 적정하게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더 크고 적극적인 정부가 필요하다.
개발도상국들을 불공평하게 우대해야 한다."

그러니까 장하성 교수와 크게 보아 같은 얘기다. 자본주의는 그대로 하되 정치로 자본주의를 견제하자는 얘기다. 앞서 장하성의 <한국 자본주의> 비판에서 말했듯이 그것은 불가능하다. 실업, 경제위기, 부의 불평등은 그런 식으로 풀리는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 자체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장하준 교수의 방법대로 하면 그 결과는 파시즘과 부패다. 경제질서의 결함이 만들어낸 똥찌꺼기들을 치우는 과정에서 정치는 비대해질 것이고 공적 개입은 과도해질 것이다. 그 끝은 파시즘과 부패, 관료주의다. 따라서 정치는 토지제도 화폐제도를 개혁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여야 하고 나머지에 정신이 팔려서는 안된다.

왜 규제해야 하나? 왜 더 큰 정부가 필요한가? 자본주의에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왜 제대로 된 물건이 아니라 파생상품 따위를 만드나? 사람의 좋은 면이 왜 발휘가 안되나? 자본주의 안에서는 본래 단기적 이윤을 추구하도록 유도되기 때문이다.
보수가 왜 충분하지 못한가? 지대와 이자로 털렸기 때문이다.
금융부문과 실물부분이 왜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가? 돈순환이 임의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융부문이 실물경제에 비해 부풀었다가 쪼그라들었다가 하는 것 아닌가?
개발도상국들을 왜 불공평하게 우대해야 하나? 자본주의는 모두를 노예로 만드는데 개발도상국 사람들은 노예 중의 상노예이기 때문이다.

장하준 교수의 책이 금서의 목록에 오른 까닭을 난 도무지 알지 못한다. 장하준 교수와 장하성 교수가 내놓은 대안은 모두 '자본주의 고쳐쓰기'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고쳐 쓰든 그냥 쓰든 경기변동과 실업을 유발한다.

장하준 교수는 경제질서에 대하여 무지한 자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만 골라서 해주었다. 이상향을 아름답게 그리되, 그곳으로 가는 수단은 몽상적으로 그려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의 글은 프롤레타리아 뿐 아니라 자본가들한테도 사랑받는다. 실제로 자본가들을 위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자본주의 자체가 문제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다른 경제질서로 전환해야 한다. 토지제도와 화폐제도를 뜯어고칠 수 밖에 없다는 것. 사민주의자들은 실비오 게젤로 오는 길 위에서 여러 유혹을 받을 것이다. 오직 명철한 이성만이 나침판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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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7 23:57 2016/05/27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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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조지스트와의 대화

이 글은 '토지+자유 토론광장'에서 <지대조세제가 지대를 제거할 수 없다>는 주제에 대하여 토론하는 중에 올리는 글입니다. 

 

토론이 비효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참여자에 따라서 논리 자체를 부정하기도 하고, 자기 권위를 인정해주지 않았다고 삐지고, 인신공격을 하고, 논지를 흐리고, 감정에 호소하여 토론을 회피하고, 일방적 진술이 난무한다. 조지스트들은 토론에 익숙하지 않아서 시행착오를 겪는 듯 하니, 그들을 위하여 <조세로 지대를 제거할 수 없다>는 나의 논증에 대해서 어떻게 반론하면 될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해보려고 한다. 나의 논증은 다음의 경우 무효가 된다.


1. 헨리 조지의 임금지대이론이 틀렸을 경우

2. 헨리 조지의 임금지대이론은 맞지만, 필자가 잘못 이해하고 있을 경우

3. 헨리 조지의 임금지대이론은 맞고, 필자도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였으나, 추론과정에서 오류가 있었을 경우


1로 반론할 경우, 조지스트들은 자폭하게 된다.
헨리 조지의 이론을 바탕으로 그들의 사회운동이 조직되어 있으므로.

따라서 2나 3으로 반론하는 것이 그들에게 유리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나의 논증은 간결명료하기 때문에 빈틈을 잡아내기 어렵다.

나의 논증을 다시 요약해보자.

땅주인은, 노동자가 '지대를 내지 않아도 되는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 이상을 남겨줄 이유가 없으며, 그 나머지는 지대로 거둬들이게 된다. 여기서 노동자가 '지대를 내지 않아도 되는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는 임금이 되고, 그 나머지는 지대가 된다. 이 경계가 지대선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정책이나 사회운동을 통하여 노동자들이 얻어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로 '노동자가 지대를 내지 않아도 되는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를 늘린 것인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에 따르면, 조세로 지대를 몰수해서 그 수익을 '땅사유제 아래에 놓여있는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를 늘리는데 사용할 때 그것은 '지대를 내지 않아도 되는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를 늘린 게 아니며, 따라서 임금을 늘리는 게 아니라 지대를 늘리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땅사유권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며, 땅사유권을 남겨두고 그 위에서 조세로 재분배하는 것은 지대로 흡수됨을 알 수 있다.


헨리 조지는, 자기가 발견한 지대임금법칙에서
"사회의 진보가 지대로 흡수되어 노동자들의 노동대가를 약탈한다"는 결론을 끌어냈으나,
그 '사회의 진보'에 자기가 지지하는 해법(지대조세제)마저도 포함된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자기가 발견한 지대임금법칙이,
어떤 사회운동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된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헨리 조지는, 그의 임금지대법칙으로
사회가 앓고 있는 병의 본질을 발견할 뿐 아니라 치료법의 적절함도 판단했어야 했다
그는, 자기의 진단과 치료법 사이에 놓인 모순을 발견하지 못했다.
진단과 치료가 다른데 환자의 병을 치료할 수 있겠는가?

그는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발견하였으나,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는 분명히 방심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 헨리 조지와 그의 제자들에게 말한다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겉을 꾸미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누가복음 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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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7 23:05 2016/05/07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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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조세제는 효과가 없다

조지스트와의 대화

* 이 글은 조지스트와의 대화로서 헨리 조지가 주장한 지대조세제가 효과없음을 논증한 글의 두 번째 버전입니다. 전체 논리구조를 좀 더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내용을 약간 수정하였습니다. 이 논증에는 헨리 조지 자신의 분배이론만 적용하여 그의 이론과 해법이 모순됨을 보여줍니다. 만일 실비오 게젤의 이론을 사용한다면 좀 더 개념이 세분화되고 정교해지지만, 이 글의 타겟이 조지스트에 한정되므로 게젤의 이론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지대는 헨리 조지의 분배법칙으로 결정된다.
 
노동자가 노동생산물을 생산한다
이 가운데 얼마가 노동자 몫으로 떨어지고 얼마가 땅주인 몫으로 떨어지느냐, 이게 어떻게 결정되는지 밝혀놓은 게 분배법칙이다
 
노동자한테 떨어지는 몫을 임금, 땅주인한테 떨어지는 몫을 지대라고 부른다
즉, 분배법칙이란 임금과 지대가 어떻게 결정되는지 보여준다.
 
노동생산물=임금+이자+지대
노동생산물은 임금,이자,지대로 분배된다.
(임금은 노동자가 먹고, 이자는 자본가가 먹고, 지대는 땅주인이 먹는다)
 
따라서, 임금=노동생산물-지대-이자 ...인데,
헨리 조지는 이자 역시 노동자들의 노동대가를 빼앗고 있음을 간과했다.
그래서 그는 이자도 노동자들이 얻는 몫으로 취급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다룰 것임. 지금 다루면 지대 문제가 혼동될 수도 있으므로.)
 
그래서
임금+이자=노동생산물-지대 ...가 된다
위 등식에 의하면 지대가 0인 곳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생산물은 전부 노동자들 몫이 된다
다시 말하여 지대를 내지 않아도 되는 공짜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생산물이,
지대를 내야 하는 땅에서 노동자들이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가 된다.
 
땅주인들의 땅은 공짜땅을 넘는 이점이 있고,
(그런 이점이 없다면 지대를 낼 필요가 없다.)
그 이점 때문에 공짜땅보다 더 많은 노동생산물이 나온다.
따라서 땅주인은 그 이점에 대하여 반드시 지불받으려고 한다.
노동자들이 땅을 빌리지 않았다면 얻을 수 없는 부분을, 땅주인은 자기 몫으로 청구한다.
이 경계를 헨리 조지는 '지대선rent line'이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어느 농부가 '지대를 내야 하는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생산물이 10인데,
'지대를 내지 않아도 되는 땅'에서 같은 식으로 농사 지을 때 얻을 수 있는 생산물이 7이면,
3은 지대로 내야 한다.
 
노동생산물 가운데 '지대를 내지 않아도 되는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가 임금이 되고,
그 나머지는 지대가 된다.
 
먼저 위 법칙을 새겨야 한다.
이게 "지대조세제는 효과가 없다"라는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땅사유제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지대를 세금으로 몰수해서 기본소득으로 나눠준다면,
그것은 '지대를 내지 않아도 되는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가 늘어난 걸까, 아니면 그 나머지 부분이 늘어난 걸까?
 
당연히 전자는 아니다. 그리고 전자(임금)와 후자(지대)는 지대선을 경계로 완전히 나눠지기 때문에 전자가 아니라면 후자다.
 
즉, 지대가 올라간다.
이것은 지대조세제가 효과가 없다는 것이고,
토지세 부담이 결국 전가된다는 것을 뜻한다.
 
만일, 당신이 심부름꾼을 시켜서 친구에게 돈을 전했는데
그 친구가 못 받았다면
심부름꾼이 중간에서 돈을 떼어먹은 것 아니겠는가?
 
토지세로 국민들한테 기본소득을 주었는데
국민들의 실제 노동대가가 늘어나지 않았다면
토지세 부담은 전가된 것이 아니겠는가?
 
토지세를 땅주인 대신 임차인이 내는 것은 아니지만,
임차인은 지대의 형태로 그 부담을 지게 되는 것이다.
 
난 지대조세제가 효과없음을 논증하였다.
이 글은 쉽고, 간단하고, 그 요점이 분명하다
이 글이 어렵다는 사람은, 토론에 참여하기 전에 헨리 조지의 임금지대이론을 복습하라. 그래도 이해가 안된다면 논리의 진행에서 어디가 왜 이해가 안되는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냥 "모른다"만 반복하거나 새로운 이야기만 덧붙인다면, 그는 내 논리를 직접 공격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논지만 흐릴 뿐, 정면으로 부딪히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토론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
 
여러분이 이 글의 논리를 직접 공격하지 못한다는 것은
지대조세제가 효과 있음을 증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지대조세제에 관해 무슨 얘기를 하든
내 글은 개미지옥처럼 그 얘기들을 집어 삼킨다
그 얘기들은 전부 지대조세제가 효과 있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귀를 막고, 하고 싶은 얘기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는 이미 이런 이야기들이 흘러간다
"지대조세제가 효과가 없다면, 우리가 왜 그걸 계속 붙잡고 있어야 하는가?"
"지대조세제가 효과가 없다면, 우리가 그동안 해온 일들, 모든 사회운동은 무엇이었나?"
"여태까지 우리가 시도했던 모든 사회운동은,
지대를 내지 않아도 되는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를 늘리는 것이었나, 아니면 그 나머지를 늘리는 것이었나?"
"조지스트는 그렇다 치고 맑스주의자, 케인즈주의자, 사민주의자들은 무얼 하고 있었나? 그 사람들의 노력은 지대를 내지 않아도 되는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대가를 늘리는 것이었나, 아니면 그 나머지를 늘리는 것이었나?"
"대학교수들은 무얼 하고 있었나?"
"사회과학 연구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무얼 하고 있었나?"
"70억 세계인구는 도대체 지금까지 무얼 하고 있었나?"
 
궁극적으로 여러분의 노력은 무엇이었나?
땅사유제가 만들어낸 게임판에서 한 걸음도 빠져나오지 못한 여러분의 노력은 정말 무엇이었나?
 
 
여러분이 입에 담는 '현실적'이라는 말은
"난 지대를 파괴할 수 없습니다"라는 고해성사와 다를 바 없다.
그것은 스스로 무능함을 실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능함을 가리기 위해
여러분은 이제 지대조세제의 효과를 믿는다.
그건 조지스트에게 신앙이 되어버렸다.
사제가 말한다. "지대조세제가 여러분을 천국으로 보내준다는 걸 믿습니까?"
맹신자들은 경건하게 낭송한다. "믿습니다"
사제는 다시 말한다. "지대조세제를 부정하는 모든 철학들을 멀리 하십시오. 그들은 사악한 저의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이 물으면 '나는 모른다'고 응답하십시오."
 
지성은 자기의 오류를 인정할 수 있는 용기다
조지스트한테 그 용기가 남아있다면, 지대조세제가 효과 없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헨리 조지의 이론과 모순됨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 정직함이야말로 새로운 사회운동이 싹틀 수 있는 기본조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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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7 20:42 2016/04/27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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