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설턴트 이희석 E-Mail : hslee@eklc.co.kr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 신영복
처음... 그것은 설레임 설레임 설레임.
떨림과 기대, 두려움과 자신감의 줄타기 속에서
빚어내는 내 삶의 창조의 순간.
책 내용을 몽땅 잊어버리더라도 독서를 지속해야 하는 3가지 이유
“강사님, 저는 책을 읽는 당시에는 생각도 하고, 뿌듯한 기분도 느끼는데 다 읽고 난 후에는 내용을 하나도 기억 못 해요.” 이 질문은 독서 강연을 하면서 “좋은 책을 어떻게 고르나요?” 라는 질문과 함께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다. 어떤 참가자들은 책의 제목까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그래도 괜찮다. 다 잊어도 괜찮다. 그래도 책은 읽어야 한다. 의아해하시는 분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다. 부제를 “지식의 넓이 확장하기” 정도로 하고 싶다.
가끔씩 어떤 사람들은 책을 읽어도 조금만 지나면 책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어떡해야 하는지, 그래도 계속 책을 읽어야 하는지 물어오곤 한다. 이럴 때마다, 나는 세 가지 답변을 하는데 첫 번째는 한 권의 책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을 수 있으니 현실적인 수준으로 낮추라고 말한다. 책을 잘 읽지 않는 사람일수록, 한 권의 책을 읽고 영원한 유익을 기대한다. 하지만, 좋은 책이라도 평생 동안 지속적인 유익을 주는 경우는 많지 않다. 책 한 권을 읽고서 수일 동안 즐거운 기분을 누리고, 혹은 당면 과제를 해결했다면, 그 책에 대하여 무척 고마움을 느낄 일이다. 고작 한 권의 책이 너무나도 소중한 우리 인생에 유익을 준다는 것이 신기하고 고마운 일 아닌가! 오늘 아침 밥을 먹고 일주일 동안 배부르기를 기대하지 않듯이, 한 권의 책을 읽고서 일 년 동안 지속적인 성장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책을 읽는 것 자체가 끊임없이 지식의 넓이를 넓혀가고 있는 과정이니 부지런히 읽어나가자고 권한다. 두 번째 이유가 이 글의 목적이기에 다소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학문의 즐거움』의 저자 히로나카 헤이스케는 왜 배워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배움은 지식을 얻는 과정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지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들려준다. 읽고 배우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잊어버리고 마는 우리들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이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뇌에 축적해 두는 것이라고 말한다. 고등학교 때 배운 인수분해를 다시 사용해야 할 때, 우리는 예전에 그 지식을 배웠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고등학교 수학 책을 꺼내 다시 공부하자마자 “아! 그렇군. 바로 이거야!”라고 배운 것을 다시 깨닫는다. 그것은 예전에 배운 지식이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뇌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음 인수분해를 접하는 사람보다 빨리 이해할 수가 있다. 저자는 이러한 측면을 ‘지식의 넓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공부하고 계속 잊어버리는 사이에 우리의 두뇌 속에서 지식의 넓이가 계속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공부의 효용을 의심하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이다.
사람은 자기 인식의 넓이 안에 들어와 있는 새로운 것은 쉽게 받아들인다. 『역사 속의 영웅들』을 읽으며 어떤 챕터는 조금 지루했고, 어떤 챕터는 아주 재미있었다. 나는 이 책의 ‘12장 네로와 아우렐리우스‘를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이전에 『로마인 이야기』를 조금 읽은 덕에 로마사에 대하여 조금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반면, 그리스 고대사에 대한 부분은 조금 지루했다. 만약 그리스 고대사에 대한 선이해가 조금 있었더라면 이 책의 첫 부분을 얼마나 재미있게 읽었을까?
나는 20대 초반에 조선사에 대한 책을 몇 권 읽었는데, 그 때 읽은 책으로 인해 언제나 조선사에 대한 책들은 낯설지 않고 즐겁고 재밌다. (『탕탕평평』, 『토정비결』등의 책 제목이 기억난다.)
낯설지 않음이 주는 유익은 그저 익숙함 뿐만이 아니다. 지식근로자들에게는 주요한 교양거리에 대한 익숙함도 경쟁 우위가 된다. 굳이 세부적이고 명확한 지식이 아닌 ‘아, 이 사람 이름은 들어봤어’ 라는 정도의 익숙함 말이다. 그 익숙함으로 인해 우리는 덜 당황하게 되고, 전혀 모를 때의 상황보다 조금 더 나은 자신감으로 전진하게 된다. 따라서, 교양거리와 역사 속의 영웅들에 대하여 익숙해지는 과정 자체가 훌륭한 지성을 향한 진보의 여정이 된다. 누군가가 ‘에우리피데스’라는 사람의 이름을 살짝 언급하고 지나갈 때, 그 사람에 대하여 전혀 모르게 되면 그저 스쳐지나가고 만다. 하지만 그리스 사람이라는 것, 혹은 유명한 시인이라는 것 정도를 알고 있으면 이 새로운 이름이 언급되었을 때에 갖는 익숙함이 새로운 텍스트를 보다 재미있게 받아들이고 빨리 이해하게 만드는 힘이 되는 것이다.
내용을 잊어버리더라도 계속 책을 읽어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감정을 지배하는 언어의 힘 때문이다. 언어는 감정을 만든다. 나는 ‘어머니’라는 음성 언어를 말할 때마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일어난다. 좋은 언어는 좋은 감정을, 나쁜 언어는 나쁜 감정을 만든다. 따라서 훌륭한 정서를 만드는 책을 읽는 것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심력을 강화하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나는 『역사 속의 영웅들』을 읽으며 위의 3가지 이유 중에 두 번째 ‘지식의 넓이’를 키워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절히 느꼈다. 예를 들어, 만약에 내가 젊은 날에 『명장 한니발 이야기』라는 책을 읽었더라면, 지금 조선사에 대하여 살짝 알듯이 카르타고의 역사에 대하여 이렇게 무지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카르타고의 역사가 세세하게 기억나진 않더라도, 카르타고의 여러 인물들의 이름이나 주요 사건을 듣게 되면 낯설지 않고 익숙함을 느꼈을 것이다. 익숙함은 곧 나에게 독서의 재미를 안겨다 주었을 것이고, 독서의 재미는 나에게 보다 빠른 지식의 확장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조선 시대 역사에 대한 약간의 내 지식은 어디에서 왔는가? 독서에서 왔다. 다방면에 대한 나의 무지는 어디에서 왔는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비독서가 하나의 원인이다. 조금이라도 더 젊을 때에 ‘지식의 넓이’를 끊임없이 넓혀가고 싶다. '지식의 넓이 확장하기'는 요즘 내 공부의 화두 중 하나다. 『역사 속의 영웅들』은 지식의 넓이를 이전보다 더욱 넓혀 준 고급 텍스트였다. 내 앞에 차려진 ‘연구원 독서 리스트’ 수십 권이 무척 반가워 보이는 요즘이다.
“지식의 넓이는 계속 공부하고 잊어버리는 사이에 두뇌 속에서 자연스레 키워진다.”
- 히로나카 헤이스케
책은 비슷한 내용을 다룬다?
햇살이 따사로운 2006년 어느 봄날이었다. 어느 대학생과 함께 포스코 센터 앞의 벤치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었다. 몇 달 전, 강연을 통해 만난 청년이었는데, 자기 경영에 대하여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얘기의 주제가 독서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의 질문이다.
“책을 좀 읽다보면 다 비슷비슷한 내용인 것 같아요. 그러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게 돼요. 이럴 땐 어떡해야 해요? 그래도 책을 계속 읽어야 하나요?” 이런 이야기는 비단 이 청년에게서만 들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전적으로 옳은 얘기가 아니다.
탁월한 명저는 저마다의 일가견을 제시한다. 이류, 삼류급의 책들이 비슷한 내용을 다루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명저는 다르다. 분명히 그 책이 명저가 된 이유가 있다. 명저는 시시한 책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놀라운 통찰력을 담고 있다. 책이 모두 비슷한 내용을 다룬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명저를 읽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대학생들은 아직 젊다. 정민 교수님은 젊은 사람은 혈기가 안정되지 않아 늘 낯설고 신기한 것에 눈을 판다고 그의 책에 썼다. 그들은 새로운 것과 괴상함을 혼동하기도 하고 남들이 많이 간 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생전 처음 보는 길로 모험 떠나기를 즐긴다. 한 분야의 기초가 되는 공부를 하고 있는 이들이 대학생들이니, 그들 사이에 전문가가 있을 리 없다.
그들도 삶을 살아가다 어떤 문제에 직면하게 될 때가 있다. 대부분 그들은 친구를 찾아간다. 교수님이나 전문가를 찾아가는 경우는 드물다. 이 때, 이 친구, 저 친구를 찾아가 얘길 나눠 봐도 뾰족한 해답을 주는 친구는 없다. 모두 비슷비슷한 얘길 할 뿐이다. 하지만, 이때 전문가에게 한번 상의해 보면 친구들에게서는 들을 수 없었던 놀랄 만한 의견이나 해결책을 얻게 된다.
마찬가지다. 책에도 전문가와 같은 명저가 있고, 아직 초보적 지성의 단계인 대학생 같은 시시한 책이 있다. 명저를 읽어보지 못한 채, 시시한 책 몇 권을 읽어 본 사람은 책에 실망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실망은 합리적인 판단이 아니다. 시시한 책 몇 권을 읽고 너무 성급하게 책의 무익함을 일반화하지 말아야 한다. 명저를 읽으면 탁견을 만나게 된다. 그 분양의 정상급 책들은 다들 하나씩의 일가견을 제시한다. 명저를 곁에 두어라. 친구와는 우정을 나누고, 삶의 문제가 발생하면 전문가를 찾아가듯 명저를 펼쳐라. 그 속에 길이 있고, 빛이 있다. (물론,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며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함께 나누며 고민하는 것에도 인생의 의미와 낭만이 있다. 이러한 낭만도 즐겨라. 누군가가 이해해 주기만 해도 우리 삶의 무게는 절반으로 줄어든다.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해 주는 친구가 있다면 그에게 고맙다는 전화라도 한 통화하자. 그렇지만, 오늘 글에서는 젊은 날의 독서에도 낭만과 깨달음, 그리고 행복이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명저는 결코 고만고만하지 않다. 혹 내가 지적 편식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좁디 좁은 나의 편견을 깨고 인식의 바다에 뛰어들자. 편협함을 벗고 원대한 지식의 세계에 발을 들이자. 인생은 짧고 읽어야 할 책은 많다. 그러나 부담가질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24시간은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하고 싶은 모든 일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지만, 나의 사명을 이루기에는 아주 적절하고 충분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좋은 책부터 차근차근 읽어나가면 된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하냐고?
이런 책을 읽자
앨빈 토플러는 『부의 미래』에서 ‘무용한(obsolete)’이라는 단어와 지식(knowledge)을 합하여 ’무용지식(obsoledge)'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지식에는 한정된 수명이 있고, 어느 시점이 되면, 지식은 더 이상 지식이 아닌 것이 되어 무용지식이 될 수도 있다. (『부의 미래』 p.169)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시간이 지난 모든 지식이 무용지식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지식’이 아니라, ‘어떤 지식’이 시간의 검증을 버텨내지 못하고 거짓 지식임이 탄로 나는 것이다. 앨빈 토플러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썼다.
"오늘날 데이터와 정보, 지식이 우리 주변에서 홍수를 이루고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의 많은 부분이 점점 더 진실에서 멀어지고 있다." (p.168)
무용지식은 앞서 말한 지식의 넓이에 해당되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범람하는 지식의 홍수 속에서 진실과는 거리가 먼 담론들, 혹은 쓸모가 없게 된 과거의 지식들을 일컫는다. 정보의 홍수와 함께 쏟아져 나오는 쓰레기 지식이 ‘무용 지식’이다. “변화의 가속도에 따라 무용지식의 축적 속도도 그만큼 빨라진다.”는 무용지식의 법칙이 적용된다면, 앞으로 이런 무용지식은 점점 많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 기업, 국가는 어떻게 유용한 지식을 쌓아갈 수 있을까? 앨빈 토플러의 말에서 무용지식의 조건 2가지를 생각해 볼 수가 있다. 하나는 진리와 거리가 먼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유효기간이 짧은 지식이다.
우리는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가?
그 첫 번째는 진리에 기반을 둔 텍스트를 담은 책들이다. 진리에 기반을 둔다면 자연스레 유효기간도 길어질 것이다.
이를 테면, 고통에 대한 얘기를 한 번 해 보자. 고통은 사력을 다하여 피하여야 할 불청객이 아니라, 더 깊은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상실의 느낌은 무기력해지고 비관적이 되는 것이다. 초조해지고 식욕을 잃어버리거나 잠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극도의 분노에 휩싸이기도 하고 쉽게 피곤을 느낄 수도 있다. 이런 고통들은 '피하는 것이 최고'라는 말은 거짓 유혹이다. 완벽한 치유는 이런 고통을 통과하여 고통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통의 치유에 대한 책들 중에도 거짓 진리를 담은 책들이 있고, 진실과 진리를 담은 책들이 있을 것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삶의 진리를 담은 텍스트가 있고, 거짓 문화에 물든 책들도 있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진리를 담은 텍스트를 읽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웬 시대착오적인 주장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믿는 것은 대답은 있다는 것이다. 명저 『한국사신론』의 저자인 이기백 선생은 진리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여 평생의 연구를 진행하였다. 민족도 중요하고, 민중도 중요하지만, 결코 진리의 중요함에는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묘비명은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라는 글이다. 그가 이렇게 써 주길 유언했던 것이다. 나 역시 진리를 좋아한다. 나의 믿음은 진리는 시퍼렇게 살아있고, 정답도 있다는 것이다. 진리는 지혜를 낳는다는 것이다. 진리는 영원하다는 것이고, 순간적인 어둠에 가려질 수 있지만 진리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통에 대한 진리를 담은 텍스트라면, 『상실수업』,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등이 될 것이다.
두 번째, 우리가 읽어야 할 책들은 우리의 마음을 닦아주는 글은 담은 책들이다. 우리의 정서를 아름답게 만들고 더 높은 곳을 향한 용기를 북돋아 주며, 아름다운 가치를 품도록 도와주는 글이다. 걸레로는 매일 방을 닦고, 책으로 우리의 마음을 닦자. 문자 언어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이미 언급했으니 여기서는 마음청소에 도움이 되는 책 몇 권을 소개해 본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나 현대물이나 『팡세』와 『채근담』, 성경의 『잠언』 등 고전도 좋다. 내가 좋아하는 저자는 신영복 교수님, 잭 캔필드, 파커 팔머 등이다. 신영복 교수님만 잠깐 소개하고 넘어가자.
신영복 교수의 글들은 영롱하다. 그 분의 글을 읽노라면 그의 영혼을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신영복 교수의 책을 아직 한 권도 읽지 않은 당신이라면 『처음처럼』부터 편안히 읽어보길 권한다. 그림과 시가 곁들여진 이 책이 주는 울림이 깊고 지속적일 것이다. 지치고 희망이 없어진 때면 어려운 책은 읽기에 힘겹다. 그럴 때 이러한 시나 짧은 에세이들은 부담이 되지 않으면서 우리의 희망과 피로를 회복시켜 준다. 이러한 책들로 류시화의 잠언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과 정채봉의 글들(『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 『눈을 감고 보는 길』 등)을 추천한다.
세 번째, 자신의 삶을 총체적으로 업그레이드시켜 주는 책을 읽자. 자기 경영 서적만으로는 진정한 의미의 성공을 이루기는 힘들다. 자기 경영은 기술이고 수단이다. 자신만의 철학과 사고의 얼개를 짜 두어야 정신 차리기 힘든 변화의 속도에서도 어지러워하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다. 올바른 신념과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발견하고, 삶을 총체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다. 내가 공부하는 목적은 단지 일신뿐만 아니라 세상에 유익이 되는 인재가 되는 것이다. 한 분야의 천재가 되기보다는 나의 능력에 맞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함으로 어제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배움의 목표를 출세나 합격에 두지 말자. 우리 삶의 행복에 두자. 감겨진 내 눈을 뜨게 해 주고, 잠들어 있는 내 머리를 흔들어 깨워주는 책을 읽자. 어떤 책이냐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구본형 선생의 『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 정민 교수의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공자의 『논어』,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 등이다.
[덧붙임글]
긴 글이었습니다. 끝까지 읽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읽어준 당신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에 대한 질문에 조금은 추상적으로 답변을 해 보았습니다. 그래도 책 제목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10-2편에서는 수많은(?) 추천도서 리스트를 작성해 보려 합니다. 사실 이것은 위험한 작업입니다. 왜 위험한지, 어떤 책들인지에 대한 답변을 들고 10-2편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그간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길 기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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