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들은 어디서나 3D 업종 등 가장 낮은 사회계층에 편입되고, 그에 따라 국내 노동자들은 계층상승의 덕을 보게 되지만, 극우파의 선동에 가장 쉽게 넘어가는 계층이 바로 그들이기도 하다. 그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이 대신 방패막이가 돼주기 때문일까? 유럽 땅에서는 한국에서와 같은 지역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 홍세화,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칼 맑스의 자본론이 영국 자본주의 하의 비참한 노동자계급의 상태를 배경으로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는 그러한 어려운 상태에 있는 노동자계급이 혁명의 주체가 될 것을 상정했다.
이주노동자를 차별한 유럽 제국주의
하지만, 영국의 노동자계급은 그렇게 혁명적으로 가지는 않았다. 선진국의 노동자계급의 보수화를 설명하는 대표적 논리는 식민지에서 수탈한 이윤을 국내의 노동자계급에게 나누어 주어 ‘노동귀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구체적 방식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영국의 경우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한 만큼 식민지 경영의 이익이 많았지만, 노동자계급에게는 그 식민지 중 특히 미국 등 신대륙으로 이민을 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더 구체적인 희망이었다.
반면 비스마르크가 이끈 독일은 프랑스 등 유럽제국의 과시적 식민지 경영의 낭비성에 주목하고 자국 내 산업발전에 집중하는 한편, 사회보장제도를 세계 최초로 도입하여 노동자계급의 기본적인 삶을 보장하며, 강력한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국가중심주의로 나아간다.
한편 1800년~1950년 간 인구가 4배로 증가한 영국, 독일과는 달리 1.5배 증가에 그친 프랑스는 노동자들의 저항에 대해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상당 부분 대응한다. 프랑스 사람들이 이웃한 벨기에 사람들을 놀리는 것에는 파업을 무력화시키려고 충원되는 벨기에 노동자들에 대한 반감이 배경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탈리아, 폴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등 유럽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이민으로 부족한 인구를 충원해 오던 프랑스는 2차 대전 이후 출산율 감소가 전 유럽으로 확산되면서 북아프리카 등 옛 식민지 출신을 많이 받아들였다. 전후 영광의 30년 동안 프랑스의 복지국가는 밑바닥을 외국인 내지는 이민자가 채워주어서 가능했던 측면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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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파리 외곽에서 발생한 시위로 자동차가 불에 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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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영국,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등 종래에는 이민을 보내던 나라들도 요즘은 이민을 받게 되어 오늘날에는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인구의 상당한 비율이 외국인 내지는 이민자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 보수화의 계기, 재일 한국인
일본의 산업화 시기인 1910년 이후에는 이주 조선인들이 주로 이주노동자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략 1960년~1990년 사이 압축적으로 성장한 한국과는 달리 1890년경부터 꾸준하고 완만한 성장을 경험한 일본의 경우 공업 도시들은 기존의 인구 밀집지역을 바탕으로 나타났고 한국에서와 같은 대규모, 원거리 이농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서울, 경기, 인천의 인구가 50년 사이에 20% 미만에서 50% 선으로 증가한 한국과 대조된다. 그런 가운데 대도시에서 노동조건이 열악한 직종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조선인, 중국인 그리고 일본 본토인 혼슈 섬 이외 지역에 사는 소수민족 출신들이었던 것 같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때에는 사회적 불만을 소수자에 대한 학살의 형태로 표시하였다(수천 명의 조선인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현재 일본에 존재하는 재일교포들은 이러한 과거의 역사를 반영하는 한편 단일민족의 신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소수민족의 포용이 쉽지 않은 문제임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현재 일본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보수성은 사회적 이동이 크지 않았던 산업화의 역사와 재일 조선인들에 대한 차별로 확인되는 ‘일본인 이데올로기’가 1950년 한국전쟁 특수를 기반으로 한 전후 재건의 과정에서 그다지 도전받지 않은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근대화, 산업화는 박정희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일본 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가 근대 일본의 발전 노선에 매료되었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듯하다. 군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고 63년 대선에서 영호남의 농민층의 지지에 힘입어 승리한 그는 65년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이루고 월남 참전을 결정하는 한편 수출지향적 공업화를 추진해 나간다.
박정희, 화교 차별에서 호남 차별로
박정희가 강력한 민족주의를 추구하고 화교를 억압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 결과 상당수의 화교는 한국을 떠나가고 한국에는 의미 있는 규모의 소수민족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호남을 포위하는 형태’의 지역주의가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승만과 조봉암이 대결한 56년 대선과 박정희와 윤보선이 대결한 63년 대선에서 영/호남 구도는 전혀 찾을 수 없다. 56년 선거에서 이승만의 득표율은 지역적 특성을 찾을 수 없다. 박정희가 윤보선을 15만 6천 표 차(42.6% 대 41.2%)라는 박빙의 승부 끝에 꺾은 63년 선거에서 박정희는 영호남 농민의 지지를 받아 윤보선을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67년 선거에서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윤보선의 득표율이 38.9%로 하락한 반면 박정희의 득표율은 48.8%로 크게 상승했다. 박정희의 득표율 상승이 두드러진 지역은 서울(28.6% → 43.7%) 부산(45.6% → 61.9%), 경북(43.1% → 60.7%), 경남(56.9% → 65.6%)으로 당시 경제개발의 혜택을 보고 있던 서울과 영남지역이었다.
경기지역도 29.9%에서 38.8%로 지지율이 올라갔는데 대체로 지지율이 올라간 지역은 공장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반면 전남, 전북에선 득표수는 제자리, 득표율은 감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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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 : 박정희의 득표율 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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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전남과 전북에서 투표성향의 변화가 다른 지역과 다르게 나타났을까? 나는 경제적 원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 경제는 경제계획에서 가격결정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국가가 주도하는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공업화 정책과 저곡가 정책은 호남 경제를 악화시켰고 서울, 영남 등 공업지대가 있는 지역으로 대규모 이농을 가져왔다.
호남, 저곡가 정책과 SOC 배제에 피해
그런데 농업경제는 호남만의 문제가 아니었는데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건설, 공업지대 건설 등에서 호남이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같은 사회간접자본 투자가 호남지역에는 나타나지 않았고 이는 호남인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준 것으로 보인다.
67년 대선의 구도가 지속될 경우 박정희가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 김대중이란 젊은 스타 정치인의 출현과 김대중으로의 후보 단일화 이후 치러진 71년 선거는 67년 선거의 구도를 무너뜨린다.
김대중은 호남 뿐 아니라 서울에서도 승리하였고 부산에서도 거의 전국득표율에 유사한 수준을 유지했다. 전국적인 표차는 상당한 것이었지만, 이는 박정희가 경북과 경남에서 지역성을 기반으로 몰표를 얻은 데 힘입은 바 컸다. 다시 선거로는 이길 수 없다는 박정희 정권의 인식은 유신체제로 넘어가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78년 총선에서 김영삼이 이끄는 야당이 득표율에서 승리함으로써 이런 생각이 근거가 있었다는 것이 반증되었다.
72년 이후 ‘호남차별’은 모든 부분에서 노골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한국사회에서 지역주의는 이미 그 전에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김대중의 등장과 함께 지역감정이 출현했다고 이야기되는 것은 그 이전까지는 호남차별이 경제정책 등을 통해 개인에게 직접적이지는 않게 진행되다가 그 이후에는 공무원 인사차별 등 개인에게 직접적인 방향으로 노골화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호남 이농민은 이주노동자
호남의 인구는 56년 전체 인구의 23%에서 71년 19%로 완만한 감소를 겪었지만 이후 지속적인 인구 감소로 88년에는 전체 인구의 13% 수준으로 떨어진다. 이는 56년 32%에서 88년 29%로 거의 감소를 겪지 않은 영남권과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서울 등으로 이동한 호남 사람들은 ‘이주노동자’ 군을 형성하였고 기존 서울 사람들에게 일종의 ‘계층상승’ 의식을 가져다주는 한편, ‘전라도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해’ 따위 일종의 ‘왕따’ 현상이 서서히 나타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70년대 말 박정희 체제는 여러 가지로 위기를 겪었다. 60년대 박정희 체제의 노선은 대체로 메이지유신에서 1920년대까지의 일본의 노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일본과 충돌하지 않으면서 한일수교 자금, 월남전 특수, 일본과의 분업체제 형성 등으로 어렵지 않게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70년대가 오자 상황은 달라졌다.
미국과 중국의 접근 및 닉슨 독트린은 위기의식을 고조시켰고 7.4 공동성명과 유신체제 이행을 지나 ‘자주국방’으로 상징되는 국방력 강화정책으로 나아갔다. 박정희 체제의 노선이 30년대 이후 일본의 군국주의 노선에 좀더 가까워지며 미, 일 및 국내 대중과의 긴장은 고조되었다.
베트남의 공산화와 미군 철수를 공약한 카터의 등장은 박정희 체제를 더욱 구석으로 몰아갔다. 박정희 체제는 ‘자주국방’에 더욱 매달렸고 이는 경제적으로도 군수산업에 대한 일종의 위장책이었던 중화학공업 과잉투자로 이어졌다. 78년 총선 패배, 미국과의 갈등, 79년 제2차 오일쇼크, 부마사태로 고조된 갈등은 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박정희 저격으로 이어졌다.
이후의 정치적 공백은 79년 12월 12일 군부내 사조직 그룹의 쿠데타로 일단락되었다. 그 군부가 정치권력을 합법적으로 장악하는 과정에서 80년 5월 광주의 비극이 나타났다. 이 비극이 서울, 부산, 대구가 아닌 하필 광주에서 일어난 것은, 그리고 고립된 것은 박정희 시대의 호남차별 역사와 연결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80년 5월은 5공의 시작이었지만, 박정희 체제의 정리이기도 했다.
민주화와 호남 차별의 약화
5공은 70년대에 박정희가 부딪혔던 미, 일과의 갈등을 해소했다. 자주국방은 폐기되었고 일본과는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북한과의 관계에서도 유화책으로 일관했다. 아웅산 테러 이후에도 대북 강경책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서 경제적으로도 물가안정 속의 고성장을 이루었고 80년대 덩샤오핑의 개방과 고르바초프의 개혁의 분위기 속에서 88올림픽을 준비하며 한국은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결정적 승리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러한 눈부신 성공에도 불구하고 5공은 국내정치적으로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80년 5월의 사건은 급진적 저항세력의 폭발적 성장으로 이어졌다. 85년 총선에서 역시 김영삼과 김대중이 이끈 신민당은 기호 4번임에도 여당에게 득표율에서 승리했다. 87년 개헌정국의 고비를 넘지 못하고 5공은 좌초하고 현재의 헌법이 제정되는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87년 이후 2007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민주화 과정은 권력의 분산, 정권의 교체, 시민 사회의 성장, 투명성의 증진 등 여러 가지 가치로 평가할 수 있지만 빼 놓을 수 없는 지점은 ‘호남차별 및 지역주의의 극복’이라 할 것이다.
87년 선거의 결과는 극단적 지역주의의 표출로 암울해 보였다. 하지만 92년 대선에서, 30년간 특혜를 누리던 TK 지역은 다시 후보를 내지 못했고 김영삼이 당선되었다. 그는 당선되어 하나회를 청산하고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하고 여러 가지 자유주의적 개혁을 단행했다. DJP 연합이 이루어졌을 때 충청은 호남의 편에 섰고 TK와 PK가 분열되면서 김대중은 당선되었다.
분열만 없으면 호남을 버리고도 불패로 보였던 이회창은 호남인이 영남 출신의 스타 정치인 노무현을 지지하고 나서자 패배했다. 이제 한나라당 경선에서 호남이 지지하는 후보가 영남이 지지하는 후보를 꺾는 일이 벌어지며 호남에서 한나라당의 지지는 올라가고 있다.
아직 영호남의 감정은 남아있다. 그러나 97년 선거를 계기로 호남차별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호남은 앞으로 대선에서 최소한 거부권을 계속해서 가질 것이며 적어도 호남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고히 하지 않는 후보는 당선이 쉽지 않을 것이다.
또다른 호남인, 외국인 노동자
이제 한국 사회에서 과거와 같이 특정 지역을 배제, 차별하는 방식의 지역주의가 나타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외국인이 방패막이가 돼주는’ 상황이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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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 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에서 열린 다문화가족협회 총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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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소기업 3D 업종 취업을 시작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이주노동자는 유흥, 식당, 건설 등 업종을 가리지 않고 확대되고 있다. 2007년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100만을 넘어섰다. 2005년에 총 혼인의 13.6%가, 2006년에 총 혼인의 11.9%가 외국인과의 혼인이었다. 한 해 80만, 90만 명씩 태어나는 시대가 가고 한 해 50만 명 미만이 태어나 이미 인적 자원이 부족한 나라가 되어 버린 한국은 앞으로 외국인 이주노동자 없이는 경제유지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이주노동자, 이민자, 인종적 소수자의 문제는 이제 새롭게 한국 사회의 부담으로 등장하고 있다. 농림어업 종사 남성 혼인의 40% 이상이 외국인을 배우자로 하는 것이었다는 통계는 농림어업 계층의 2세들의 40%는 모국어가 한국어가 아니라는 것을 예고한다.
이러한 집단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일어나지 않을 것인가? 그들은 공무원이 되거나 결혼을 하거나 정치인이 되는 데 문제가 없을까? 과거 백인계, 흑인계 한국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차가운 대응은 ‘그런 문제 없을거야’라는 낙관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다.
호남차별이 발생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특히 영남에 대한 ‘상대적 소수’였다는 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호남 자체의 단결은 차별의 극복을 위해 충분하지 않았다. 변화는 선거에서의 연대이든, 지식인의 개입이든, 제도적 보완이든 비호남인의 행동이 있을 때에만 이루어졌다.
97년, 2002년 대선은 그 변화가 극적으로 표현된 계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소수자의 문제가 선거를 통해 해결되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호남차별 문제와는 달리 이주노동자, 이민자, 인종적 소수계 한국인에 대한 인종차별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아마 없을 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한국의 유권자 중 그 비율이 20% 이상이 된다면 비슷하게 해결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날은 너무 멀다. 프랑스에서 헝가리 이민자의 후손인 사르코지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이민을 받은 지 200년이 지나서였고, 미국에서 흑인 오바마가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까지는 노예 해방 이후에도 100년이 훨씬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인종적 소수자의 문제는 결국 인권의 개념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남들이 인종차별이라고 지적하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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