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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生..

요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가 바로 저거다.  블로그 여기저기서 아이 키우는 엄마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한몸으로 여러개의 일을 헤치우는게 그저 슈퍼우먼 정도로 인식되어지는것도 문제지만, 딱히 다르게 표현할만한 단어가 없는것도 문제가 아닌가 싶다.  내가 오늘 상생이란 단어를 떠올리게된 계기는 언젠가 놈현 정부가 한나라당과 연정을 제안했을때의 분위기에서 실마리를 찾지 않았나 생각되며, 그때 상생이란 말의 의도를 나 나름대로 해석해 보면, 다른거 다 필요 없으니 '서로 챙길거 챙겨 가면서 같이 살 궁리를 하자'로 마무리 지었던것 같다.(근데, 정치적의미 에서의 상생은 말도 안되는 것이었던걸로 암. 아니면 말구..) 

 

그때부터 나에게는 정치권에서는 어떻게 써먹든지 상관없이 '상생'이란 단어가 꽤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느날, 아이를 떼어놓고 산에를 가게 됐는데 같이 가던 일행이 묻더라. 아이는 어떻게 하고 혼자 왔어요? 하면서... 그래서 나는 아이는 아빠와 집에 있지만 오후 4시쯤이면 아빠는 출근을 하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혼자 있을것이다.  그러면 집에 빨리 가봐야 되는거 아니예요? 하고 묻는다.  하지만 저는 이번 산행에 꼭 오고 싶었어요.  제 아이는 초등생이기에 그 정도는 견딜수 있을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산에 오게 되었죠.  옆사람은 사뭇 놀라는 눈치로 자기는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할거라고 말하면서 대단한 엄마라는 표정을 짓기 바쁘다.  물론 아이가 아주 어려서 누군가 항상 옆에 있어줘야 하는 상황이라면 나도 그렇게 하지는 못했겠지만,  아이는 이미 초등생이고, 그 아이 때문에 산에 못다닐 정도로 아이의 뒤치닥거리만 하다가 나의 취미나 개인적인 시간을 놓칠 생각은 없다. 고 말하면서 이게 바로 아이도 살고, 나도 사는 방법인 상생이 아니겠습니까? 하면서 웃어 제꼈더니 질문했던 이는 자기는 아이가 내 아이보다 더 큰대도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무척 놀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함께 생활하는 사람(특히, 부부라 명명하는)과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결혼이야 뭐 제눈에 안경이었으니 했을테고, 그 달콤한 시절의 유효기간도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다.  그 유효기간이 지났을때 덤벼드는 각종 충돌을 지혜롭게 돌파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충돌이 갈등과 반목, 신뢰의 훼손으로까지 비약시킨다면 조금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아이가 있다면 그 문제는 더 복잡해지기 일쑤이다. 이럴때 나는, 너도 살고 나도 살고 다 같이 사는 방법-여기서 산다는것은 위기를 돌파 하면서 질적인 발전을 모색하는것을 뜻함-을 고민해 보자고 할것이다.  구태여 상생이란 말을 쓰지 않아도 서로 다른 사람이 같이 사는데는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을것이다.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그 방법을 모색한다는것은 말로는 쉽다.  하지만, 어느순간 같이 살았다는(또는 살고 있다는)이유 만으로 냉정을 잃을  여지는 충분하기에 만족할만한 합의점을 찾기는 그렇게 쉬운일이 아니다.  거기다 언제까지 같이 살수있는지도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최대한 냉정하게 서로를 바라봐야 한다.  적어도 상대방에게 최소한의 '자유'를 주고 사생활을 보장해 주는 지혜로움을 발휘하면서...

 

미루네를 보면서 느끼는 점은 그거다.  둘이 너무 합심이 잘되고 있다는 점, 솔직히 배가 아프다.  그런 관계를 맺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행착오를 거쳤을까마는 결코 쉬운일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특히, 공동육아의 부분은...아빠가 알아서 자진 육아휴직을 낸것도 그렇거니와 슈아의 다분히 共生(설명하기 애매)적인 삶의 모토까지..삶에서 구태여 남.녀라고 구분지어서 설명해야 하는것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것은 열손가락도 채 넘지 않을 만큼인데, 우리는 너무 자주 그 문제에 부딪혀 산다는걸 새록새록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되는대로 살아요! 하고 답하기도 하고.. 이것저것 다 신경쓰다 보면 도대체 '나'는 어디에서 찾나 싶을 때가 많으니까..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도 너무 내중심적이었다. 겁도 없이 8개월된 아이를 어린이 집에 맡기고 일을한다고 하질 않았나, 애가 좀 크니까 별 인맥도 없는 또래친구집에 맡기고 (어린이 집 보육시간이 끝난후)사람을-사교적인 만남- 만나고 다니질 않나.. 또 조금 더 크니깐 이제 혼자 놔두고 집회도 가고, 산에도 간다고 하고 있다.. 비단 요것들 뿐일까 마는...육아 문제에 대해 이기적인 문제에서 출발해서 어느날 사회적인 문제로 깨닫게 된 시기는 얼마되지 않았다.   어느날, 내가 아이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더니 선배한명이 하던 말이 나를 자극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아이는 엄마가 키우는게 아니라, '사회'가 키우는거다.' 이말이 내게는 굉장히 신선한 충격이 되고도 남음직했다. 내가 초보 였던 그 시절엔...

 

암튼,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키운다는 생각을 별로 안하고 산다.  그만큼 책임의 문제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암묵적인 의도인지는 몰라도 아이는 엄마의 의도와 무관하게 나름대로 사회성및 판단력, 가치관을 갖게 마련이다.  어느정도 머리가 컷는데도 그 아이를 뒷바라지 하느라 시간을 쏟으며 사는 엄마들은 사실, 말리기 힘들다...쩝~

 

같이 사는 동거인과의 문제도 그렇다. 우리가 같이 사는데는 일정정도의 합의와 배려 그리고 약간의 수고로움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집안일이나 육아에 특별히 관심을 갖거나 좀 하는것 같으면 쏟아지는 칭찬들이 나는 아주 별로다.(알엠의 엄마 내지는 그 가족이 알엠남편에게 한 칭찬 같은거..) 그 칭찬들은 그가 남자이어야만 받을 수 있는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아니, 자기아이를 잘보고 자기집 살림을 잘하는게 뭐 대순가... 그래서 사실, 나도 하향평준화는 별로 내키지 않는 기준이다.  끊임없이 상향을 위해 눈높이를 높여야 그나마 없던 돌파구라도 생기는것이 아닐까? 하는 야무진 꿈도 꿔보고 말이다. 

 

어찌어찌 하다가 얘기가 여기까지 왔는데, 아는 사람은 다 알듯이 나는 내멋대로 산다. 근데, 내 멋대로 산다는것에서 자꾸 눈치를 보는쪽으로 기울어 가려던 요즘에 진경맘이나 알엠이나 슈아를 보면서 힘을 받는다.(뻐꾸기는 항상 나의 존경이었고..^^) 그리고 마구마구 지지를 보낸다.  우리 같이 힘을 받아, 우리의 목소리가 절대로 이상한 엄마들의 목소리가 되지 않는 날이 올때까지 함께(相) 살(生)아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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