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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2

서울의 한복판, 유복한 어린시절을 겪던 그 남자는 월남전에 출전했던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아버지 밑에서 거의 매일을 전쟁 무용담을 들으며 커갔다.  허구헛날 술과 담배에 쩔어 살면서 자식과 처자식에 다해야 할 도리는 별로 안중에도 없고...때론 여자들을 데리고 놀기도 하였다.  어느날, 몸이 아파 병원에 가보니 그동안 마셔댄 술때문에 간암 선고를 받고서 얼마 살지 못하고 세상과 하직을 하였는데...

 



어린 남동생과 누나, 그리고 홀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그 남자는 졸지에 어린나이에 '가장'역할을 도맡아 하게 된다.  초등학교 5학년때 아버지를 여읜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그 남자.. 그 남자의 어머니는 워낙에 생활력이 강해, 아이 셋을 먹여 살리려고 가락시장 한켠에서 야채 장사를 하여, 아이들 학비를 대고 세끼를 거르지 않기위한 몸부림을 치며 산다.  그런 엄마를 도우며 학교를 다니던 그 남자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전공이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며 학교를 때려치운다.. 그리고는 인천의 어느 공장생활을 시작했는데...

 

어느 추운 겨울이었나보다. 그 남자의 어머니는 시장에서 행상을 마치고 돌아 오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당해서 숨지고 만다. 어머니의 형제들은 그때 어머니의 보상금을 노리면서 서로서로 눈치를 보다가 결국은 그 보상금을 삼형제가 만지기도 전에 쓱싹~ 해버리고선 자취를 감추기까지 했다는데...듣고보니 아무리 형제들이라고 해도 돈 앞에선 피도 물이 되는건 시간문제인가 보다.  빌어먹을 돈이 뭐길래~!

 

그때가 그 남자의 나이 스무살쯤 됐을까?? 무능력한 남편을 먼저 보내더니만 뭐가 좋아서 그렇게 일찍 뒤따라 갔는지, 참으로 기가막힌 한 여인의 운명은 그렇게 가련하게 종말을 맞는다. 그 녀는 남편이 죽자 억척스레 장사해서 모은돈으로 성남 어딘가에 제대로된 양옥집도 한칸 사놓기까지 하는 야무진 모습과 그 집을 세 아이의 공동명의로까지 해 놓는 분명한 모습까지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청파동의 일본식집에서 살고 있던 삼형제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청파동집을 팔고, 어머니가 사놓으신 성남집으로 이사를 한다.  참! 한가지 더 가지고 있었던 그 남자의 불행은, 위로 누나가 있었는데 어릴때 놀다가 담쟁이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뇌를 다쳐 정상인과 다른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다는거다. 그니깐 뭐..정신지체 정도라고 할까?  거기다 언제 발병했는지도 모를 '간질병'까지 달고 살아야 하는 그 남자의 누나... 설상가상이란걸 이런것을 두고 하는 말인가보다.  젊은 나이에 부모를 잃고 아픈 누나까지 돌봐야 하는 그 남자의 운명,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수 있을까...

 

하지만, 그 남자는 열심히 공장생활을 하면서 노.자 모순에 눈을 뜨게된다.  누나가 약간 정신은 온전치 못했지만, 밥 정도는 지어서 먹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기에 일주일에 한번 정도 집안 상황을 둘러보고는 다시 인천의 공장으로 돌아가 노조의 핵심간부 노릇도 하면서..아마도 쟁의부장을 맡았다고 한다.  그때가 전두환 정권의 엄혹한 시절이었으니 싸움만 붙었다하면 선두에 나서서 행동대장을 하느라 이빨이 부서지기까지 하는 무모함을 보이기도 했으며 늘, 몸을 사리지 않고 노조 활동을 열심히 해나갔다.  아직까지도 그 남자는 입만 열었다하면 그 옛날 인천에서의 활동을 자랑삼아 떠들어 대는데, 옆에서 얘기를 듣는 사람들은 그 레퍼토리가 얼마나 지겨울까마는...

 

정권이 바뀌고 그럭저럭 살만해져서 인지 그 남자의 화려한 인천생활은 막을 내리지만, 여전히 변함없는 이 시대의 모순과 부당함은 그대로 남아 있는지라 피끓는 한 청년을 가만히 놔두지는 않는다.  서울의 한 오퍼상에 다시 취업을 하고 나서 세칭 정치조직이라는데를 기웃거리더니 언제부터인지 아예 그 단체의 중견 간부 노릇까지 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다.  때는 영삼이가 '니그들이 갱제를 알어?'라는 신조어를 퍼뜨리는 말기였을까?  그 단체의 등산부 산악회장을 맡고 있던 그는 어느날, 다른 진보 산악회와 연합산행을 주도한다.  거기서 만난 어여쁜 어떤 여인... 그 여인은 그 남자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는지 나중엔 그 남자가 주었던 눈길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날, 메이데이 집회가 있어서 여의도에 갔는데, 그 남자가 눈길을 주었던 그 여인이 거기 서 있었다.  그 여자는 단체사람들과 같이 온것도 아니고, 혼자 메이데이 집회에 참석하러 온것이었다.  집회가 끝나자 혼자 온 그여자는 그 남자와 같이 온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엉겁결에 끼어 뒷풀이에 참석하게 되는데, 그날 뒷풀이가 문제였다.  술을 잘 못마시는 그 여자는 술기운이 오르다보니 그간 그 여자가 겪었던 아픈 얘기들을 토해 놓으며 울기 시작하는거다.  같이 술을 마시던 남자들 역시 무슨 얘기가 도는지 알고 있었을까? 아마도 그 여자는 꽤 심각한 그 여자 개인의 얘기를 털어 놓았을지도..그 이후론 그 여자는 그 남자가 몸담고 있던 조직에 자주 놀러 가게 되었다.  그리곤 술도 여러번 얻어 마셨고...그러던 어느날, 그 남자가 그 여자에게 프로포즈를 한다.  마침, 그 여자는 그 즈음 받은 상처가 너무 커서 다시는 연애 같은거 안한다! 라는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있던 찰나 였는데...

 

그렇게 다부진 마음을 먹고 있던 여자는 지금까지 겪어온 숱한 남자들과는 약간 다른 그 남자의 순수한 모습에 점점 눈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처음엔 괜히 내숭을 떠는 모습을 보이던 그 여자는 어느날 마음을 열고 그 남자와 연애를 하기 시작한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라는 마음을 먹고..그리고는 그 5월, 메이데이를 시작으로 공식적으로  불타는 연애를 하기 시작한다. 그 여자의 알만한 사정을 다 앎에도 불구하고 끈질기에 청혼을 하던 남자는 결국, 연애 시작한지 3개월만에 그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 여자는 그 남자의 집안꼴을 불보듯 훤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씌인 콩깍지는 쉽게 벗겨지지가 않더라.  아픈 누나와 동생까지 짊어져야할 문제들은 이미 보이지도 않는다.  오로지 그 남자만 옆에 있어준다면...

결혼후, 달콤한 신혼생활에 젖어 있을 무렵 시국이 뒤숭숭하다.  때는 여전히 YS말기 즈음 이었고,  마지막 남은 임기에 뭔가 확실히 저지르고 말겠다는 심보인지 뭔지 드뎌 YS는 칼을 뽑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지하에 있는 조직이고 뭐고 할것없이 싹쓸이 작전으로 돌입하는데, 그때 그 남자의 조직까지 치게 되었던 것이다.  핵심간부를 비롯해 하나둘씩 조사를 받더니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드뎌 불기 시작하는데, 별로 중요한 인물도 아닌 그 남자까지 연루에 들어갔다.  하긴~ 핵심이 아닐수도 없기는 하지. 나이도 제일 많았고, 인천에서의 경력도 있으니.. 졸지에 기소까지 되어 빵생활을 시작한 그 남자는 결혼한지 한달만에 어여쁜 아내와 생이별을 하게 되고 만다.  역시 그 남자의 팔자도 그닥 평온하지만은 않은 팔자임이 분명한가 보다.  인생의 전성기라고 할만한 30대의 중후반 시절에 빵생활을 할줄 누가 알았으며, 집행유예로 나왔다곤 쳐도 어렵게 이루어 놓은 직장생활마저 쫑이 날줄이야...

 

3개월간의 빵생활을 마치고 다시 기운차게 새로운 직장을 알아 보려던 찰나, 세상은 여전히 거꾸로 돌아 가고 있었다.  갱제를 살리자며 발버둥친, YS덕분인지 DJ가 등극하자마자 한국사회는 IMF란 거대한 폭풍을 맞기 시작하고, 경제는 바닥을 치고 실업자는 넘쳐나면서 한국사에 기록할만한 위기가 닥치고 만다.  살아 볼려고 발버둥을 치는 그 남자의 앞날엔 또다시 먹구름만 가득하고... 휴~~~ 이렇게 가만히 당하고 있을수만은 없지, 하면서 막노동이라도 해야 결혼한지 얼마안된 아리따운 신부도 먹여 살릴수 있고, 아이라도 생기면 굶기지는 않아야 할것 아닌가, 하면서 다시 허리띠를 졸라맨다. 그 남자와 결혼한 그 여자의 운을 따지고 보면 별반 다를게 없다.  남자 하나만 믿고 결혼한다는 신파적인 사고를 가진 여자는 아닐지언정 결혼 하자마자 맞게되는 이러한 비극적인 사태를 어디 예측이나 했을까?  하지만, 어쩔수 없지.  다시 일어 나는 수 밖에!

 

드디어 결혼한지 1녀만에 그 남자에게도 아이가 생겼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새는줄 모른다고, 결혼이 늦는 바람에 아이까지 늦게 봐야만했던 그 남자는 아이가 생기자 어쩔줄을 모른다.  아이 키우는 재미에..그 덕분에 그 남자의 아내는 상대적으로 편한 육아생활을 하는데...좋은일이 있으면 나쁜일도 있다고 하더니, 어느날 아침 건너 방에서 자고 있어야 할 그 남자의 누나가 아침이 되었는데도 아무런 기척이 없는거다.  사실은 며칠전부터 시름시름 앓고 있어 병원에라도 데리고 가야 하는거 아니냐고 했더니 평소에도 그랬으니 곧, 다시 일어 날거라고 하면서 방치해 둔것이 화를 불렀나 보다.  방문을 열고 몸을 흔들어 보니 도무지 움직이질 않는다. 겁에 질려 119를 부르고 병원으로 급히 옮겼는데, 이미 숨이 끊어졌단다.  헉! 결혼한지 정확히 3년 만이다.  부모님에 이어 많지도 않은 핏줄중 누나까지 잃게 되다니...예측하지 못한 죽음이라 그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남자의 아내는 사실, 그 누나의 죽음이 너무너무 고마웠다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 시누이와 매일 옥신각신 하면서 꼬박꼬박 삼시세끼를 해 놓아야 했고,  돌봐주어야 할 사람이라는 부담감이 엄청 나기도 했으니까.. 그 여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에게 감사를 전하다.  아무런 괴롭힘도 없이 조용히 데려 가주신 그 분의 노고에 대해...(그 남자의 누나도 이해를 할거라 믿고..)역시 그 남자도 슬픔을 추스리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남자에게도 누나의 부담은 부인하기 어려웠을 테니까..

 

그 남자는 여느 남자하고는 많이 달랐다.  결혼 한지 얼마 되지 않을 무렵 아내는 서서히 그 남자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하는데, 때때로 도를 넘는 그 남자의 경제 개념은 아내를 질식케 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다.  종이조각 하나 마음대로 버릴 수 없고, 다쓴 치약통까지 잘라서 남은 치약을 써야 했으며, 물한방울, 전기코드 하나 그냥 꽂아 두는 법이 없다.  심지어 아내가 사다주는 옷마저 다시 갖다주라고 소리 지르기 일쑤이고, 구멍난 양말까지 스스로 기워 신는 스타일!  그 남자의 아내는 때때로 숨이 막힌다.  무드도, 센스도, 분위기도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저 남자랑 앞으로 남은 생활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을 생각할수록 눈앞이 캄캄 할 정도이고.. 그 여자의 소원은 다름아닌, 결혼기념일에 제법 괜찮은 식당에 가서 밥한끼 얻어 먹는 거하고, 크리스마스때 예쁜 트리가 있는 술집에서 와인한잔 같이 마시는거다.  그리고 시간 남으면 심야영화라도 한판 땡기는거.. 이런 소박한 바램을 그 남자는 언제나 무시하고 산다.  그러면서 아내에게 하는 말, "십원 없이 이십원 되는거 봤어? 매사에 절약해야 해! 절약해서 아낀 돈으로 남을 돕는거지, 자기 쓸거 다쓰고 남는 돈으로 남을 돕는건 돕는게 아니야!" 이런다.  그런 말을 귓구멍에 구멍 날 정도로 들으면서 사는 그 여자는 오늘도 쓸쓸히 어느 술집에서 그 남자를 마구마구 씹어댈 것이다.  "인생이 기냐? 사는 동안 이라도 좀 재미나게 살다가 죽자! 바로 옆에 있는 사람한테마저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삶을 무슨 재미로 살겠냐?" 

 

남자들은 여자보다 가을을 더 많이 탄다고 한다.  그런데, 그 남자는 이상하게도 봄이 되면 시름시름 앓는다.  그 남자의 아내는 가을에 시름시름 앓고...과연 이 둘의 관계는 어떤 모습으로 지탱되어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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