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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민영화의 파괴적 합리성


최근 다시 의료 민영화와 관련된 문제들이 쟁점화 되고 있다. 얼마 전 통과한 의료법 개정안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고, 그것을 큰 틀에서 규정하는 의료 민영화와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영리법인병원의 허용 문제와 민간의료보험의 문제가 깊이 연루되어 있다.

 

국민건강보험과 민간의료보험은 일종의 대립관계를 가지는데, 국민건강보험이 강화될수록 민간의료보험이 축소되며, 국민건강보험이 약화될수록 반대의 현상이 발생한다. 국가 경재에서 민간의료보험사가 가진 위치와 영향력(그들의 자본 규모뿐 아니라 로비력까지)을 고려한다면, 정부에서도 국민건강보험에 대한 재정지원을 줄여야 하는 상황에 내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여기에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제약회사 문제까지 겹쳐지면서 사태는 더 가속화 된다. 제약회사가 관여되어 있는 약값은 전체 의료비 중 가장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약값이 급속히 증가하는데 반해 의료 보험 혜택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의료비는 증가하고 있는데 사회나 국가의 충당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그 증가분은 고스란히 개인에게 전가되고 있다.

 

가치 판단은 명확하다. 의료 민영화는 가난한 이들에게 거대한 재난이 될 것이다.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은 점점 낮아질 것이며, 민간의료보험은 더욱 기세등등해 질 것이다. 영리병원 도입 역시 당연히 건강보험 보장성 약화와 동시에 진행된다. 제약회사가 주도하는 약값도 마찬가지다.

 

현대 의학은 엄청난 성취를 이루고 있으며, 지불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기적과 같은 혜택을 가져다 주고 있다. 반면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병과 죽음 그리고 박탈감을 안겨준다. 영리병원이나 민간의료보험사들은 수입을 늘리고 지출을 줄이려 노력(보험금 지급을 거부하거나 늦추는 것)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보험 가입자들은 보험금을 받아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두 입장에는 일종의 간극이 있다.

 

보험가입자에게 보험금을 받는 것은 보험금을 받을 어떤 상황, 즉 병에 걸렸거나, 병원 치료를 받아야할 상황에 직면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보험금은 안받을수록 좋은 것이다. 그들에게 보험금은 자신의 생활에 금전적인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을 막는 최후의 저지선 같은 것이다.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려는 보험회사의 노력과 보험금을 받으려는 가입자 사이의 갈등은 해결되거나 중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을 주고 받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일은 마치 어떤 흥정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흥정의 대상이 생명 그 자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이 갈등은 극한적 상황에서 발생한다. 보험 가입자는 별다른 힘도 권력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거대 자본과의 갈등이나 대결의 결과는 이미 정해진 것이다. 의료 민영화가 말하는 것은 바로 이것, 자본에 의한 생명의 종속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본에 의한 생명의 종속이라는 것은 단순히 밑도 끝도 없는 자본의 횡포 정도로 바라 봐서는 안된다. 그것은 단순한 비난이나 무기력한 대안만을 산출할 뿐이다. 비난 이상의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어떤 것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의료(를 포함한) 민영화는 고유하고 체계적인 광범위한 전략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민영화가 하나의 지배적 흐름이 되었을 때, 그것은 새로운 사회성을 만들어낸다. 국가가 제공했던 어떤 서비스들이 민영화 된다는 것은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하던 국가의 역할이 파기됨에 따라 그 안전망을 유지시키기 위한 비용을 개인이 충당하게 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의료 민영화 경향에 반대하는 대안적인 운동으로 최근에 주목을 받고 있는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건강보험료를 현재보다 1인당 1만 1천원씩만 더 내면, 건강보험 보장성 수준을 혁신적으로 상승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며 운동을 진행중이다. 가입자 본인 부담금을 높이고, 국민건강보험 재정을 확대하여 보장성을 높이자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의료공급을 민간이 주도하고 의료공급자에 대한 규제방안이 거의 없는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재정확충보다 ‘의료공급 시스템의 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이나 운동의 보완을 주장하는 이들 모두 사회적 안전망 파괴가 함의하는 정치적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국가나 사회는 사회적 안전망의 유형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방식에 따라 고유의 정치적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민영화는 그런 유형의 정치를 개인들의 생활 영역으로 이동시킨다. 이 때 정치적인 것은 경제적인 것으로 전환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 의료 민영화 체계에서, 특히 민간의료보험 같은 곳에서 생명은 계산 가능한 것으로 환원되고, 특정한 회계 기준에 의해 평가 되고 측정된다. 병명에 따라 보험금이 다르게 책정될 뿐 아니라, 몸무게, 키, 나이, 병력 등에 따라 개인들의 신체를 분류하고 가격을 매긴다.

 

이런 체계 내에서 새로운 직업 윤리와 규칙도 함께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의사와 같은 전문 직업은 환자의 생명을 보호하는 전통적 역할에서 벗어나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는다. 여기서 무이클 무어의 영화 식코(SICKO)에 등장했던 린다 피노라는 의사를 상기해 보는 것도 좋을듯 하다. 그녀는 휴매나 사의 전 의료 고문이었다. 거기서 그녀는 보험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상황을 면밀히 검토해 그 사람들이 보험에 적용되지 않는 의학적 상황에 있다는 전문 감정을 함으로써 그녀가 속한 회사의 지출을 절약하는 일을 했었다. 이런 방식으로 그녀는 매주 몇백달러의 수입을 올리는 위치에서 백만달러의 수입을 얻는 위치까지 승진을 했다고 진술한다. 보험회사에서 그녀에게 부여한 임무는 사람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회사의 이익을 지키는 일이었던 것이다. 린다 피노는 이윤창출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기업에 속해 있었고, 그녀는 자신의 전문 지식을 활용해 그 과제를 달성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 기준에서 이는 지극히 합리적인 행동이었다. 의사로서 가장 반도덕적 행위는 기업에 속한 의료 고문에게 가장 합리적인 행위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의료 민영화는 새로운 사회성을 만들어내면서 자신만의 체계를 갖는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적합한 유형의 정치적 활동과 회계 방식 그리고 직업윤리 등을 만들어내면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의료민영화로의 변화를 넘어서 보다 넒은 영역을 포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단순히 자본의 횡포만으로도, 그리고 자기 이익 챙기기에 바쁜 몇몇 정치인들의 고안물로도 환원될 수도 없다. 구체적으로 어디서부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아야 할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이나 ‘의료공급 시스템 개혁’과 같은 몇 가지 단편적인 처방만으로는 이 상황이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이다. 민영화라는 것이 가진 정치적 문제와 제약회사나 보험회사가 가진 경제적 문제, 그리고 그것들을 가능케 하는 사회적 조건들이 함께 사유될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처방전에 쓰일 수 있는 몇 가지 단어들이 만들어 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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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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